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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겹한겹 마음의 짐 더는 ‘사리암 가는 길’

등록일 2026-05-27 18:27 게재일 2026-05-28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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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암 산신각에서 내려다 본 풍경.

전날의 여독이 채 풀리지 않아 늦도록 잠자리에서 뒤척이던 아침이었다. 갑작스레 울린 전화벨에 잠결로 수화기를 들자 지인이 “손 선생, 내일 청도 운문사 사리암에 같이 갈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예, 갑시다”라고 답했다. 바로 전날에도 대학 동문회 문학기행으로 성주 일대와 심원사를 다녀온 터라, 왜 그렇게 선뜻 대답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미용실을 운영하는 지인은 쉬는 화요일이면 혼자 버스를 타고 전국의 산과 절을 찾아다니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면 맛있는 것을 먹자며 연락을 건네오는 정 많은 언니다. 이번에도 처음에는 버스를 타고 가자고 했지만, 새벽부터 서둘러야 하는 일정이 부담스러워 내 차로 함께 길을 나섰다.


아침 8시, 경산 사동에서 언니를 만나 청도로 향했다. 언니는 “흔쾌히 가겠다고 해서 기분이 참 좋더라”라며 웃었다. 차창 밖은 봄 산빛이 흘러가고, 나 역시 설명할 수 없는 기대감 속에서 길을 달렸다.


청도 운문사의 부속 암자인 사리암(邪離庵)은 ‘삿됨을 멀리하는 곳’이라는 이름처럼,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손꼽히는 나반존자 기도 도량이다. 특히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영험함이 전해져 전국에서 신도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리암 입구에 쌓인 지팡이들은 앞으로 마주할 길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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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암 올라가는 길. 

산길은 시작부터 가팔랐다. 절에 식료품을 나르는 리프트를 지나자 본격적인 1008계단이 시작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기를 반복할 때마다, 산을 잘 타는 언니는 끈기 있게 기다려 줬다. 문득 과거 팔공산 동봉을 오르다 현기증으로 중도 포기했던 기억이 스쳤다. 오늘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물며 발길을 재촉했다.
 

몇 번이나 쉬어가며 겨우 약수터에 도착했다.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바위틈에 비스듬히 기대선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척박한 곳에서 오랜 세월 버텨낸 나무의 모습이 어쩐지 애처롭고도 숭고해 보였다.
 

사리암을 오르는 동안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이미 기도 같았다. 힘겹게 도착한 암자에는 지친 사람들을 위해 따뜻한 공양을 상시 내어주고 있었다. 언니는 현기증으로 고생한 나를 걱정하며 먼저 공양간으로 이끌었다. 푸짐한 공양부터 맛본 후, 우리 가족 다섯 명의 이름이 적힌 초파일 등을 산 아래가 훤히 보이는 좋은 자리에 달았다.
 

관음전에는 독특하게 불상이 단 한 분만 모셔져 있었다. 관음전 뒤편에는 기도하면 사람 수만큼 쌀이 나왔으나 인간의 욕심으로 더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사리굴’이 있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기도 중이었다. 
 

가장 높은 위치의 가파른 바위벽 앞 산신각에도 올랐다. 힘들었지만 올라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소원을 품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1008개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거운 짐들이 조금씩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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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대웅전과 처진소나무. 어머님과의 추억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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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있는 소나무.

사리암에서 내려온 뒤 운문사에도 들렀다. 경내를 걷다 보니 오래전 어머님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진 소나무를 신기해하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한데, 이제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문득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등을 하나 더 달았다.


집에 있었다면 누워 뒹굴었을 하루였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등을 두 개나 달게 된 오늘,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지인의 다정한 부름에 선뜻 나섰던 청도 여정은, 나도 모르게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무거운 짐을 시원한 산바람에 모두 날려 보낸 참으로 홀가분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려오는 발걸음은 올라갈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손정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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