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탁환의 두 권짜리 소설 `혁명`을 완독했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역사 소설인데도 스토리에 치우치지 않은 것도 맘에 들고,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위안이 된다. 한마디로 취향이 맞으니 금세 읽힌다. 역사 소설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등장인물의 디테일한 내면의 소리나, 담백하면서도 정돈된 문체 미학을 곁에 두고 싶은 독자라면 곁에 둬도 좋은 책이다. 이성계, 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대로 화자가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성계는 해주에 있고, 왕과 정몽주는 왕성에 있으며, 정도전은 유배지이자 고향인 영주에 머물러 있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직전의 18일 간이란 시간을 역사적 기록을 빌려와 작가
칼럼
등록일 2014.07.17
게재일 2014-07-18
댓글 0
-
-
-
-
기억의 자기력은 얄궂다. 대개 기억은 좋은 쪽보다 나쁜 쪽의 힘이 세다. 주변의 가깝거나 먼 사람들 대부분은 특별히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저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분노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 평범한 사람이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한 더 많은 좋은 기억이 있음에도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상처는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약화시키는 속성이 있다. 타자에 대한 좋은 쪽의 기억은 나쁜 쪽의 기억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타자에 대한 나쁜 쪽의 기억은 단 한 번이라도 깊이 각인되고 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기억
칼럼
등록일 2014.07.16
게재일 2014-07-17
댓글 0
-
-
-
-
-
-
-
권력의 세계에는 법의 지배와 함께 힘의 지배도 요구된다. 숱한 영웅들이 제 나름의 정치적 덕성에 따라 역사를 장식했다. 요동치는 격변의 세상, 정치판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자는 끝내 힘의 논리를 거부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권력 쟁취라는 면에서 승리한 그들은 자신이 지닌 정치적 역량에 따라 훌륭한 리더로 추앙되거나 함량 미달의 독재자로 추락하곤 했다. 여말조선 초, 격동의 시기 군웅들이 할거했다. 그 중 정치적 리더로서 제 나름의 덕성과 개성을 확보한 이는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등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위기의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방식은 셋이 지닌 덕성이나 개성만큼 달랐다. 극적인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큼 치열한 권력 투쟁을 했다. 우선 정몽주는 원
칼럼
등록일 2014.07.15
게재일 2014-07-16
댓글 0
-
-
정도전 정치 철학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주자학과 정전제와 재상제였다. 얼마 전 종영한, 그를 타이틀로 한 주말 드라마에서도 이 정신만은 온전히 투영되었다. 정치적 기초 질서로 주자학을, 민본의 생업 토대로서 정전제를, 이상적인 권력 제도화로서 재상제를 설계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불교가 정치 이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정치의 요체는 `질서`였다. 천지만물을 아우르는 불교의 가상적 윤회관은 이를테면 군신과 부자 관계 등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하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정도전 정치철학의 기본은 차별적인 상하관계를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부정하는 불교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토대로서 그가 내세운 것은 정전제였다. 어떤 정치 제도도 그것을
칼럼
등록일 2014.07.14
게재일 2014-07-15
댓글 0
-
-
-
-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따라서 설득이나 학습된 강요에 의한 용서라면 한참 미뤄져도 좋다. 때 아닌 용서는 더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맘 편하고자 용서하라고 한다든가, 용서는 빠를수록 좋다는 등의 섣부른 감화를 조장하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으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이면의 여러 상황과는 별개로 할머니들의 심적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억과 경험`에만 의거한 반쪽 의견에 우리 국민 정서가 움직이고,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여러 오해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간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두 나라의 화합적 미래를 위해서라도 식민지 경험의 왜곡에서 벗어나
칼럼
등록일 2014.07.13
게재일 2014-07-1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