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이즈모신사) 앞 쪽 해변이 이나사노하마(稻佐の浜)다. 오호쿠니누시(大國主神)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보낸 다케미카즈치노오(健御之男)에게 국토를 헌상한 곳, 이곳이 바로 국가이양신화의 무대다. 일본 사람들은 이곳을 화(和)의 정신적 원류라고 보고 있다. 글 싣는 순서 신화의 무대 日 이즈모시 방문기 신라로 해는 지고 마치 호미곶의 어딘가를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을 때 일행은 히노미사키(日御)에 도착했다. 히노미사키는 국토유인(國土誘引)신화의 무대다. 야츠카미즈오미츠노노미코토(八束水臣津野命)가 구름이 많은 이즈모는 작고 어린 미완성의 땅이라고 보고, 신라의 땅 중 여분의 땅이 있는 것을 살펴, 처녀의 젖가슴처럼 풍성하고 널찍한 쟁기를 신라 땅에 꽂고 어망줄을 만들어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날씨다. 태풍이 동쪽을 지나가고 있다는데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즈모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 중앙 로비에는 이즈모타이샤 경내에서 출토된 대형 기둥, 우즈바시라(宇豆柱)가 전시되어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삼나무 세 그루를 묶어 직경이 3m가 넘는다고 한다. 신전의 높이는 48m이고 계단의 길이만 109m라고 한다. 일본 제일의 목조건축물이다. 치기는 신사의 지붕위의 양끝에 X자 모양으로 교차시키는 목재인데 하나에 500kg이 넘는다. 가로지르는 나무는 더 무거워 700kg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오오쿠니누시가 천손에게 나라를 양도하면서 천손이 천황의 지위를 이어가는 것처럼 땅 속의 반석에다 두텁고 큰 기둥을 세우고 타카마노하라(高天原)에 닿을 만큼 높은
시마네 현 사람들에게 이 제국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05년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고 영토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신지호를 따라 이즈모로 가는 군데군데 다케시마를 찾아오자는 푯말이 서 있다. 그들은 그토록 손에 넣고 싶었으나 넣지 못했던 땅과 그 땅을 일시라도 지배했던 시절의 화려했던 기억을 지금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다. 이비가와(裵伊川)의 다리를 건너면서 이즈모에 왔음을 느낀다. 스사노오미코토와 그 후손들이 지배권을 확보한 곳이다. 마치 형산강의 어느 지점 쯤 되는 듯 착각이 인다. 모래가 곱다. 글 싣는 순서 신화의 무대 日 이즈모시 방문기 강물은 핏물처럼 변하고 일본의 섬과 땅을 만들었다는 국조신(國造神)은 이자나기노미코토(伊耶
경북매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연오랑 세오녀 원류 추적`은 쉽지 않은 작업들이었다. 실체가 있는 듯 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국내현실도 그렇지만 신화의 무대가 됐던 이즈모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북매일신문이 연오랑세오녀 신화를 추적하기 위해 지역의 역사학자 등 전문가를 중심으로 구성한 조사단이 지난 5월 이즈모시를 방문한데 이어 일반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방문단을 꾸렸다. 있는 듯 없는 듯 한 연오랑세오녀 신화, 10월말 떠난 방문단 가운데 이상모 (사)도시전략연구소장이 그려내는 신화의 무대 이즈모시 방문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 신화의 무대 日 이즈모시 방문기 해와 달의 행로를 따라 고향의 이미지는 늘 느티나무와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