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수학여행 이후 31년 만에 경주 대릉원을 다시 찾은 건 겨울의 기운을 채 떨치지 못한 올 초봄이었다. 고분 위 잔디는 아직 물기와 푸른 기운을 머금기 전이었고, 쌀쌀한 날씨 탓에 관광객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소 황량한 풍경. 하지만, 이후 취재를 위해 봄기운이 완연했던 4~5월에 다시 방문했을 때는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대릉원을 포함한 경주 일대가 벚꽃과 유채꽃으로 환했고, 가족 단위의 관광객과 연인들로 인해 도시 전체가 젊은 에너지도 가득했다. 대나무·소나무 우거진 역사의 보물창고엔 미추왕릉·천마총 등 이십여 봉분이 옹기종기 계절마다 다른 매력, 여행객 발길 이어져 `감수성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소설가 강석경은 대릉원의 봄 풍경을 이렇게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어떤 권력도 10년을 이어 영화 누리기가 힘들고, 제아무리 어여쁜 붉은 꽃이라 해도 그 온전한 색채는 열흘을 가지 못한다고 했다. 통일신라말 신덕·경명왕 통치 시절엔 기울어진 국운 속 천재지변까지 잦아 8대 아달라왕릉 옆 父子가 나란히 묻혀 신덕왕릉은 두번이나 도굴 당하기도 경주시 배동에 위치한 삼릉(사적 219호)을 찾았던 날은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대낮임에도 하늘은 캄캄했고, 때때로 벼락까지 치는 궂은 날씨. 능으로 오르는 소나무 숲길이 질척거렸다. 통상 `삼릉`으로 칭해지는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능 또한 여지없이 비에 젖고 있었다. 서남쪽 방향 지척에 위치한 55대 경애왕릉 역
경주 각처에 산재한 신라의 고분 속에서는 미려한 금관과 화려하게 장식된 말안장을 포함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우리 선조의 축적된 정신적·문화적 기술로 빚어낸 이 유물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을까? 또한, 고대 유물은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안고 불교미술을 전공한 고고학자 동국대 한정호(46) 교수를 만났다. 아래는 “유물과 유적의 발굴은 인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행위”라고 말하는 한 교수와 나눈 이야기다. 거대한 적석목곽분은 도굴에 비교적 안전해 온전히 남아 있어 비단벌레 형상화한 황남대총 출토 말안장 가리개 `옥충안교` 눈여겨 볼만 `금제유물` 다량 출토는 북방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 추정 가능 학계, 지나친 학문중
초여름답지 않은 뜨거운 햇살이 푸른 눈동자의 외국인 관광객 하얀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주위는 고요했고 어디선가 이름 모를 산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 자리한 진덕여왕릉(사적 24호)으로 가는 길은 평화로웠다. 미국 혹은, 유럽 어느 나라에서 왔을까? 기자를 앞질러 능에 이른 백인 여행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진덕여왕릉 위에 피어난 보라색 풀꽃과 그 위를 소리 없이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를 본 것이었다. 예기치 않은 선물처럼 아름다운 풍경. 재위기간 7년, 짧은 통치로 끝난 진덕여왕 김춘추·김유신 사이서 허수아비 삶 살아 십이지신상 두른 무덤 만큼은 누구보다 화려 생전 “도리천에 묻어달라” 지목한 선덕여왕 인본주의 펼친 비범한 女王… 삶은 가시밭길 산꼭대
경주 고분에 관한 취재를 시작하며 몇몇의 역사·고고학자와 관련 학문을 전공한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학계와 문화계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고분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그리고, 그 주목의 이유도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이재현 조사연구실장은 아래와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제 경우는 황남대총, 원성왕릉과 함께 무열왕릉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능 주위에 비석이 세워져 있어 매장된 사람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고분이니까요.” 최초 진골 출신 왕의 陵, 둘째아들 김인문이 직접 비석 글 남겨 높이 8.7m·둘레 112m크기 봉분 언저리 호석·받침석 돌려 배치 대다수 경주의 왕릉 인근에서는 비석을 찾아볼 수 없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의 전설과 신화에는 말(馬)이 자주 등장한다. 현존하며 세간을 떠도는 옛이야기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애마 부케팔로스, `삼국지`의 명장 관우를 태우고 하루에 400km를 달렸다는 적토마, `서초패왕`으로 불리던 항우와 삶은 물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오추마 등은 역사와 전설 안에 존재하는 명마(名馬)다. 천마도장니·금관 등 1만1천여점 `우르르` 신분과시용 금장신구·말 관련 유물이 대다수 20대 자비왕이나 22대 지증왕 유택 추정 돌무지덧널무덤 구조 눈앞서 살펴볼 수 있어 고대왕국 신라의 왕과 귀족들 역시 전쟁 수행과 신속한 이동에 도움을 주는 말을 소중하게 여겼다. 경주시 황
얼굴을 간질이는 봄 햇살 쏟아지는 바닷가. 우려하던 적의 침입이 외형상으론 사라져서일까? 죽은 왕은 일렁이는 파도 속에서 침묵했다. 반면, 산 자들은 왕의 뼈가 묻혔다고 전해지는 바위를 바라보며 왁자지껄 저마다의 소원을 빌고 있었다. 고요한 바다와 시끌벅적한 해변.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경주 봉길리 해변서 200m 떨어진 수중릉 왕릉 조성 대신 불교화장 유언은 선진적 결단 죽어서도 나라 지키려는 호국대룡 기개 서려 문무왕릉(사적 158호)을 찾아가던 날. 바다의 빛깔은 유난히 푸르렀다. 불 태워진 왕의 뼈가 안장된 곳으로 알려졌기에 `대왕암`이라고도 불리는 바위는 모래톱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외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중릉(水中陵). 신라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여행하며 슈테판성당의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다. 높이가 137m에 달하는 첨탑의 위용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겨우 9년 간격으로 열린 역사적 장소라는 드라마틱한 사실은 비엔나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그 도시에 매력에 빠지게 한다. 왕비 장화부인과 합장무덤으로 추정되는 흥덕왕릉 돌사자와 무인·문인석까지 신라 조각기술 정수 만끽 삼국통일 주역 김유신 장군묘도 여느 왕릉 못잖아 슈테판성당의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 역시 사람들에게 인기다. 안톤 필그람 등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화려하고 매혹적인 부조(浮彫)는 동유럽 예술역사의 한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비엔나는
고대의 왕 혹은, 임금 또는, 황제로 불린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은 명예와 숭배를 원했다. 자신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에게 스스로가 귀한 존재임을 기어코 증명하려 했던 것. 그 존재증명의 욕구는 죽음 이후까지 이어졌다. 한 집단의 지배자로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었던 것일 테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는 이러한 왕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12세기 초반에 건설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살아서 누린` 왕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건축물이다. 당시 크메르제국의 왕들은 신(神)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미려하고 웅장한 공간에 머물며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당연지사 왕에 대한 숭배가 뒤따랐다.
어떻게 보면 초록의 잔디에 뒤덮인 동산 같기도 하고, 신화적 상상력을 가지고 바라보면 크나큰 비밀을 간직한 거대한 짐승의 알처럼 보인다. 고분(古墳)은 경주를 다른 어떤 도시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풍경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신라시대 왕과 역사적 인물의 무덤은 갖가지 유물과 합쳐져 “발걸음을 옮기는 곳이 곧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경주에 가져다줬다. 영국의 저명한 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규정했다. 과거의 유물인 신라의 고분은 현재의 우리와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그 대화를 통해 현대인은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본지는 신라천년의 비밀을 풀어낼 주요한 열쇠의 하나인 `경주 고분`에 관한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연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