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해병대는 일치단결하여 유사시를 대비, 교육훈련에 정진하자. 둘째, 민(民)에는 양이되고 적(敵)에는 사자가 되자. 셋째,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자유를 수호하는 역사를 창조하자.” 1949년 4월 15일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수륙양면 작전의 상시전개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창설된 해병대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이 강인한 해병양성을 위해 제시한 교육훈련 이념이다. 창설기 해병대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강인한 훈련의 연속으로 `해병혼`과 `해병정신`을 주입했으며 그 결과 한국전쟁 당시 상승불패의 정신을 갖게하는 초석이 됐다. 오늘날까지도 군입대를 앞둔 20대 청년들 사이에서 해병대는 최소 5대 1이 넘는 경쟁률을 거쳐야 할 정도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혹자는 해병인
“100명의 적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로 외국 원정군으로 파병된 해병대 청룡부대가 신조로 내세운 문구다. 1964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 침략에 직면한 자유월남공화국을 지원키 위해 한국군의 월남파병을 결정했다. 해병대 1개 여단과 육군 1개사단의 파월을 결정한 정부는 1965년 9월 20일 해병대 포항기지에서 해병대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해 파월해병 결단식을 가졌다. 초대 청룡부대장으로 임명된 이봉출 준장은 선봉대를 이끌고 포항역을 거쳐 부산항에서 출항, 1965년 10월 9일 베트남 캄란만에 도착했다. 청룡부대는 미군 1공수사단 제1여단으로부터 캄란만 일대의 전술책임지역을 인수, 같은해 11
포항과 해병대는 어미 닭과 병아리의 관계로 비유될 수 있다. `줄탁동기`과정을 거친 피붙이 같은 운명공동체다. 줄탁동기란 불교의 깨침과 득도 수단의 하나인 공안(公案) 가운데 하나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돼 나오기 위해서는 병아리와 어미닭이 알의 안과 밖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미닭이 밖에서 알을 쪼아주어 부화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쉽게 나오도록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든 혼자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관계를 말한다. 市·해병대 협력, 동반 성장 비행장·철도·항만 시설 등 군사전략적 입지조건 갖춰 전 세계적 신속 임무 수행 해병대의 `최강 조직` 자랑 포항시민이나 해병인이라면 이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포항은 지속적으로 변화해
인터넷 검색창에 `5인의 해병`이라고 치면 가장 먼저 1961년에 개봉한 이 영화의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전쟁영화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해 영화제목을 딴 날치기단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영화는 군인 아버지를 둔 초임장교가 아버지가 대대장으로 있는 부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소대장은 개성이 강한 소대원들과 5인의 해병을 이뤄 북한군의 탄약고를 폭파시키는 위험한 임무를 자원한다. 5명의 해병대원은 적진에 진입해 임무를 완수하지만 소대원 1명을 제외한 4명은 장렬히 전사하고 만다. 숨진 소대장의 시신을 안고 귀환한 소대원은 소대장의 아버지인 대대장에게 소대장이 탈취한 기밀문서와 유품을 전해준다(중략)…. 1965년 해병1사단 병사 5명 적진 침
해병대가 포항에 자리잡은 1950년 이후 해병대를 거쳐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스쳐갔을 법한 장소. 장병들 입영·휴가 등 추억의 관문 베트남 참전 애환 서린 공간으로도 KTX개통에 따라 이전된 역사 도로개통으로 철거 `진한 아쉬움` “기념비로나마 후세에 기억 남기길” 해병인과 포항시민의 애환과 추억이 고스란히 남겨진 그곳. KTX개통으로 흥해읍 이인리 현 부지로 역사(驛舍)가 이전되면서 2015년 4월 1일을 마지막으로 역할을 다하고 폐역된 `옛 포항역`을 일컫는 수식어다. 지금은 사통팔달(四通八達)에 가까운 뛰어난 교통인프라를 자랑하는 포항이지만, 불과 12년전까지만해도 고속도로 하나 없는 낙후된 상황으로 인해 철도교통은 포항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
지난 10일 해병대 교육훈련단 대연병장.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인한 남성으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희망하는 20대 청년 1천100여명이 이곳을 찾았다. 10월의 푸르른 하늘 아래 가족, 친구, 연인들과 함께 입영문화제에 참석한 해병대 1215기 신병들의 눈빛에는 결연한 의지와 기대가 동시에 보였다. 軍 매년4회 입영문화제 개최 1215기 신병 1천100명 입소 전차 전시·장비 체험행사 등 볼거리 풍성…방문객 줄이어 지역홍보 등 시민축제로 거듭 또 이들은 2년 뒤 늠름한 아들이, 멋진 남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1215기로 입대한 김호준(19)씨는 “가족이 모두 해병대를 전역했다”며 “안다치게, 건강하게, 사람되서 돌아오겠다”며 입대 소감을 밝혔다. 이날 입소식은
훈련과 근무에 지친 장병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조성된 포항 청룡회관의 역사는 2000년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973년 포항시 북구 죽도동 45-1번지 2천211.5㎡부지에 건물 3동, 연면적 2천89.2㎡규모로 문을 연 청룡회관은 1970~80년대 포항 해병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방문한 기억이 있는 해병인의 성지다. 장병들 휴식·복지시설 갖춰 숙소·면회장소 등으로 각광 죽도동서 임곡리로 신축이전 24년만에 현 청룡회관 탄생 최신시설에 일반인도 이용가능 포항지역의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청룡회관은 휴가갔던 장병들이 귀대할 때면 집결장소로, 병영생활에 시달린 장병들의 외박때는 숙소로, 고향에서 찾아온 부모나 친구, 형제들의 면회장소로 이용되며 각광을 받
`무적해병`이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 100만 예비역 해병들의 아련한 추억이 살아 숨쉬는 공간. 포항시 남구 오천읍 용덕리 일원에 위치한 해병대 제1사단 서문에 붙는 수식어들이다. 입소 날엔 가족 등 외지인 `북적` 100만 예비역들의 어울림 공간 2007년 교육훈련단 정문 개장 등 문덕 활성화로 상권 쇠퇴기 맞아 빈 점포 늘어 한산한 거리로 변해 해병대 서문의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도 해병대 제1사단의 존재로 동, 서, 남, 북 4개문이 오천읍과 동해면, 청림동에 걸쳐 존재했다. 그러나 신병훈련소와 같은 외부인 왕래가 잦은 부대없이 현역병, 부사관, 장교들만이 드나드는 전투사단만 있다보니 서문 주변의 상권형성 속도가 더뎠고, 이
올해로 창설된지 67년이 지난 해병대는 긴 역사만큼 다양한 장소에서 수많은 역사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949년 4월 해병대가 출범한 경남 창원시 진해구 덕산비행장, 6·25전쟁 당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승리를 이끌어 내며 `무적해병`의 칭호를 얻게 된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최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2대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통영상륙작전이 펼쳐진 경남 통영시 등에서는 해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창설 68주년인 내년 4월15일 맞춰 해병한마당 문화축제 준비 `착착` 2014년 세계해병대축제 경험 살려 국내외 150만 예비역 결속 이끌어 강석호 의원 등 전·현직 국회의원 현빈 등 연예인출신 예비역도 초청 예비역 페스티벌·부대방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지난 8일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노()해병이 건넨 명함에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이는 미 해병대의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에서 한국전쟁시 유래한 것으로 해병대의 일원으로서 자부심과 긍지, 명예심을 잊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1987년부터 해병대 정신의 표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는 해병대에 몸을 담은 현역, 예비역은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도 `해병대`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1970년 서해구락부 영포지구로 태동한 `해병대 전우회` 창설 멤버로 맹활약 “美·호주 등 30여개국 30만명이 참가한 2004년 세계해병전우인축제가 전성기 내년 4월 개최 `포항 해병대 예비역축제`
해병대의 주임무는 상륙작전이다. 국군조직법 제3조2항에서 확인 할 수 있듯 상륙작전의 핵심은 전쟁발발 시 해상으로 이동해 적 해안에 기습 상륙하는 것이다. 해병대는 이 특수임무를 위해 타 군에는 없는 상륙돌격장갑차라는 장비를 사용한다. 상륙돌격장갑차는 바다에서 해병대원을 태우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해안가로 상륙하는 수륙양용장갑차다. 이렇듯 해병대를 넘어 우리군 전체의 주요전력인 상륙돌격장갑차와 반평생을 함께한 `영원한 해병` 김영환(62) 포항시 해병대 전우회 수석부회장을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포항·경주 물난리에 장갑차로 수재민 수백명 구조도 현역·예비역 지역봉사 열심… 시민과 동반자 인식 가져야 “남자는 해병대” 강원도에서 경남 진해까지 가서
지난 18일 오후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덕리의 한 사무실. 세평 남짓한 작은 컨테이너에 들어서자 남다른 풍모를 지닌 노신사가 기자를 반겼다. 해병대의 본거지인 오천읍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는 퇴역자 모임인 해병대전우회 포항시 오천분회 서수홍(72) 회장이었다. 서 회장은 1965년 1월 해병대에 일반병으로 입대, 같은해 10월 부사관으로 자원해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 20살 해병대 입대후 2년뒤 월남 파병 베트남 추라이 반도서 탐색조 선봉에 서해5도 근무 후 신병훈련소 교관 거쳐 상사로 퇴역… 지역봉사 등 앞장서 와 “고향 경남 진해에서 아버지가 도장방을 하며 어렵게 저희 가족을 부양하셨습니다. 당시에는 특별히 배운 것도 없어 입에 풀칠이라도 할까 싶어 20살 젊은 나이에
□ 전역장병 포항투어버스 운영 해병대 1사단은 포항에서 근무한 장병들이 전역하면 포항을 떠나는 `손님`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고향`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전역 직전 장병을 대상으로 포항투어버스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포항투어 프로그램은 호미곶, 구룡포, 포항제철, 포항항, 새마을운동발상지기념관, 덕동문화마을 등 포항의 산업시설과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코스로 구성돼 있다. 장병들은 해병대 포항역사관에서 오전 9시에 출발해 코스별로 견학한 뒤 오후 5시에 부대로 북귀한다. 포항시에서는 관광버스와 중식, 각종 홍보물을 지원하고 있으며 보다 내실 있는 견학이 될 수 있도록 문화관광해설사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전역을 한 달 앞둔
호국문예경연·병영캠프 등 개최 누구나 해병대 체험기회도 가능 軍장병들 해안정비·의료봉사 등 대민봉사로 든든한 지원군 역할 □ 지역주민의 품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끌고 있는 세대인 40~50대 남성들이 군생활을 하던 시절인 1980~90년대까지만해도 군대는 지역사회에 다가가기보다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는 분위기였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군대 내에서 사건·사고가 발생하면 군을 신뢰하지 않고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군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역사회 민간단체, 기업 등을 대상으로 부대를 개방하고 군이 변화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주민들이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2011년부터 신병·가족 부대밖 나들이 허용 숙박비 등 포함 경제효과 연 3억원 `훌쩍` 병사 외출·외박 소비효과도 8억이나 달해 지방세도 매년 50억 이상 납부, 市재정 도움 장교 등 직업군인·가족 씀씀이도 만만찮아 800명 취업유발 효과까지 적잖은 보탬 줘 □ 전군 최초 영외면회 긍정적 영향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시로 승격한 포항은 인구 5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어촌마을이었다. 전쟁통에 인구가 5만명 밑으로 추락했지만 1958~1959년 해병대가 정식으로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1958년 4만9천32명이었던 인구는 2년만인 1960년에 5만9천555명으로 크게 늘었다. 해병대의 존재는 도시전체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장병을 가족으로
포항, 북한 포함 주변국 억제전략 사용 신속한 업무대응 수행 가능한 곳 평가 육군 포함 1개사단이 한 장소 집결 `국내 유일` 제1사단·교육훈련단·군수지원단으로 구성 포항제철소 등 국가 중요시설 방호도 책임져 □ 해병대와 포항의 인연 대한민국 해병대의 역사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의 교훈을 통해 정부가 상륙작전을 담당할 부대의 필요성을 검토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주도로 1949년 4월 15일 경남 창원군 진해읍에 위치한 덕산비행장에서 신현준 초대사령관 휘하 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등 380명의 전력으로 창설한 것이 해병대의 시초이다. 같은해 8월 1일 해군에서 장교와 부사관을 추가로 지원받고 해군 14기로 입대한 병사 440명을 해병대
`고난과 불행이 찾아올 때 비로소 친구가 친구임을 안다.`중국의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남긴 친구에 관한 소회다.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마주했을 때 곁에서 어깨를 내어주는 친구가 진실한 우정이었다는 깨달음이다. `영원한 친구`포항시와 해병대의 인연은 한국전쟁 당시 포항비행장을 방호하던 미 해병대에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합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6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며 희로애락(喜哀)을 함께했다. 본지는 특별기획시리즈를 통해 반세기 넘게 운명을 함께한 포항시와 해병대의 관계를 재조명하고 21세기 민·군 협력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려 한다. 한국전쟁 당시 美 해병대 전비단에 韓 해병대 1개중대 합류로 첫 인연 1959년 3월 `포항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