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한 시점의 손길과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조선시대 형벌 중에서 ‘유3천리’ 형을 받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220여 명 중 굵직한 사건 34개를 추려내어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사연과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그랬다. 이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소한 내용들이었기에 나름 사료들을 찾는 데는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작업은 과거와 교감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교감하는 일이었기에 내내 행복했다.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
세도정치란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를 말한다. 조선후기에 세도정치가 생긴 이유는 어린 왕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탓이 컸다. 정조가 죽고 난 다음 열한 살 먹은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때 처가인 안동김씨 가문이 정치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34년 통치를 마감한 순조는 왕통을 아들 효명세자에게 이어줄 작정이었으나, 그 세자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 돌아갔다. 그때 헌종의 나이는 여덟 살 꼬마였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이었기에 이
노론의 거두 우암이 장기현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인계열의 핵심인물 한 분이 장기현으로 왔다. 1801년(순조 1) 3월 9일 다산 정약용이 장기로 유배된 것이다. ‘신유박해’라고도 이름 붙여진 천주교 박해사건이 다산으로 하여금 이곳과 인연을 맺게 했다.다산은 1762년(영조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이 태어난 해인 임오년(壬午年, 1762)은 영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어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아보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시파(時派)와 벽파(
1788년(정조 12) 10월 말경이었다. 경상도 장기현감으로 있었던 유환보(柳煥輔)가 떠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장기현으로 되돌아왔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현감이 아니라 유배객의 신분이었다. 관직은 삭탈된 채 ‘탐관오리’란 오명까지 달고 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며 수군댔다.사건의 발단은 경상도 장기현에 사는 김성걸(金聖乞)이란 사람의 격쟁(擊錚)에서 비롯됐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1787년(정조 11년)년 5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50대 후반의 여인이 장기로 유배를 와 관비가 되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계우(溪佑)라 했다. 바로 정감록(鄭鑑錄) 역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효시(梟示)를 당한 유한경(劉漢敬)의 친어머니였다.‘정감록’은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온 예언서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르지만 정작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사상 등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의
능성구씨는 무인(武人)의 명가였다. ‘능성구씨사료집’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총 562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진사 144명, 문과 55명, 무과 363명으로 무과 출신이 65%를 차지한다. 따라서 능성구씨는 영조대(英祖代)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권력의 핵심에서 가문의 세를 떨쳤다. 하지만 정조의 즉위 후 10년 만인 1786년 12월 9일, 구선복이 역모죄로 몰려 조카인 구명겸과 함께 죽음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문효세자가 죽자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세자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구선복 옥사’가 이 집안을
강상죄(綱常罪)는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조선시대는 유교 윤리가 통치의 근간 이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효죄는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고을 읍호가 강등되고 관할 수령은 파직되는 경우도 허다했다.1751년(영조 27년) 9월경에 충남 예산에 살고 있던 박우천((朴右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는데, 그 죄목이 바로 ‘불효죄’였다. 박우천이 그의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
‘정조시해 미수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는 정유역변은 1777년 정유년에 있었던 반역 사건을 일컫는다. 홍지해(洪趾海)를 귀양 보낸 정조에게 불만을 품은 그의 아들 홍상범이 주축이 되어 정조를 시해하고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역모 사건이다.이 사건 역시 경상도 장기현을 비껴나갈 수는 없었다.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 홍상범의 처 정희순(鄭喜順)이 연좌되어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관노가 되었던 것이다. 한때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누렸던 ‘역린(逆鱗)’은 자객이 왕의 거처인 경희
1776년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났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지 석 달 만이었다. 이제 세손이었던 정조가 마침내 스물다섯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날, 그는 여러 대신들 앞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했다. 편전에 도열해 있던 신하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조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앞으로 20년 동안 사도세자를 언급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히고 정국을
폐초(牌招)는 조선시대 임금이 비상사태나 야간에 급히 주요 관원들을 궁궐로 불러들이는 것을 말한다. 도구는 명패(命牌)를 사용하는데, 그 모양새는 둥근 나무판에 붉은 색칠이 되어 있었다. 그 한 면에는 ‘명(命)’자가 씌어 있고 다른 면에는 대상 관원의 관직과 이름, 도착해야할 연,월,일이 적혀 있다. 뒷면에는 임금의 수결(手決)이 찍혀 있다.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 명패를 내리면, 승정원관리는 이를 받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승정원에 보관하고 다른 한쪽은 부름을 받은 신하에게 보냈다.이 패는 왕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패
1770년(영조 46) 11월 26일, 한양에서 이경오(李敬吾)란 선비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유배객의 신분이었는데도 지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앞 다투어 그를 맞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바로 초림체(椒林體)의 대가인 우념재(雨念齋) 이봉환((李鳳煥)의 장남이었던 것이다.이봉환은 전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문사(文士)였기에 한적한 시골 현(縣)의 사족(士族)들이 그의 시편과 글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봉환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상소를 올린 최익남(崔益男)과 공범으로 간주되어 신문을 받다가 죽
조선시대 왕들은 통치의 수단으로 금주령(禁酒令)을 곧잘 내렸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기강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는 더욱 그랬다.태종은 집권 초기부터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차례가 넘는다. 세종은 재난이나 이변이 없더라도 매번 농사철에는 술을 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영조는 재위 기간 52년 중 50년 동안 금주령을 내려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금주령을 시행한 임금으로 꼽히고 있다.1764년(영조 40) 음력 5월, 전라도 영광군수로 있던 윤면동(尹冕東)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
1764년(영조 40) 4월 초순경이었다. ‘달문(達文)’이란 사람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의 추국(推鞠·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는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그 해 4월 17일, 이상묵(李尙默)이란 사람이 달문이를 사칭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이를 두고 ‘이태정(李太丁) 역모사건’이라고 한다.달문이란 누구일까. 그는 1707년생으로 성은 이씨요. 이름이 달문이다. 이달문은 조선 팔도를 뒤흔든 최고의 스타 연예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18세기 ‘아이돌’이었던 것이다. 그
임오화변(壬午禍變)은 1762년 (영조38) 윤5월, 영조가 대리청정(代理聽政) 중인 사도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건이다. 백성들은 감히 접근조차 어려운 구중궁궐 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엽기적이고도 비극적인 이 사건은 한양에서 864리 떨어진 경상도 장기현 사람들에게도 마치 곁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해 윤5월 15일 장기로 온 홍지해(洪趾海)와 뒤이어 7월 11일에 온 목애(睦愛)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비극을 부른 이 사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얽혀 있겠으나,
경종 즉위 후 노론과 소론은 연잉군(훗날 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 급기야 서로 상대방을 역적으로 몰아가는 극단적 붕당싸움으로 번졌다. 이런 복잡한 시기에 경종이 갑자기 죽고 노론의 지지를 받은 영조가 즉위했다. 위기에 처한 소론의 급진세력(준소)과 남인들은 영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며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이들의 불만은 결국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으로 표출되었다.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무신난이 진압된 뒤에도 또다시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두고 윤지(尹志)가 주도하였다고
어떤 이는 영·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말한다. 탕평책을 실시해서 붕당의 폐해를 줄이려 했고, 세금 부담을 들어주기 위한 균역법을 실시했다.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신문고를 부활하는가 하면 학문과 제도를 정비했고, 많은 책을 펴내 문화발전에 도 기여를 했다. 규장각을 짓게 하고 정약용, 박제가 같은 숱한 인재들도 나왔다. 새로운 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실학이 점차 뿌리를 내린 것도 이시기였다.이런 치적들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통치한 18세기는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역모사건이 많았다. 과 같은 조선왕조의 몰락
1739년(영조15) 10월 11일,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재육(梁再六)이란 사람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찢어진 옷, 헝클어진 머리에 오목한 눈만 번들거리는 그의 몰골에서, 걸어온 ‘유3천리’ 유배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실감케 했다.양재육은 평범한 농부였다. 헌데 그가 동해안 땅 끝 고을인 여기까지 흘러온 사연은 이도령과 성춘향의 이야기로 유명한 저 남원부(南原府)를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킬 만큼 큰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읍호(邑號)는 고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고을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끝난 1728년 11월이었다. 영조의 외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자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 3월, 궁궐 안에서 매흉((埋兇)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매흉이란 저주를 통해 왕과 세자 등 왕실의 가족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것이고, 화흉(和兇)은 이 저주물들을 왕실 가족에게 먹이는 독살기도를 말한다.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추국(왕명으로 의금부에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인 1728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이인좌(李麟佐)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의 특징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란 점이다. 난이 평정되자 ‘유3천리’에 처해진 연좌인 10명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왔다.골수 남인인 이인좌(34세)는 세종대왕의 11세손이었다. 선대 때부터 청주목 송면(松面.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 청천면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인좌는 노론의 성지(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옥사는 ‘감옥에 대거 갇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사화는 ‘의로운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말이다. 즉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맞서 싸울 때 사림이 대거 화를 입었던 것을 사화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중기 이후 사림·훈구의 구별이 없어졌을 때, 붕당정치가 이어지면서 ‘일순간에 정권이 확 바뀌는 것’을 사화나 옥사라 하지 않고 그냥 ‘환국’이라고 했다.조선 경종 초기인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