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앞마당에 보리가 누렇다. 작물이 자라서 약간의 곡식이 여무는 때인 소만이다. 낮에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듣고 줄기마다 꽃을 준비하고, 밤에는 소쩍새가 ‘너그 집에는 모내기했나?’하고 인사를 건넨다. 논에 물이 그득하고 어린 모가 바람에 허리를 흔들며 여름이 오는지 내다본다.소만은 24절기의 여덟 번째 절기로 입하와 망종 사이다. 양력 5월 21일께부터 보름간으로 만물이 점차 생장하여 가득 찬다는 뜻이다. 이 무렵에는 모내기 준비에 바빠진다. 보리 베기에 이어 밭농사의 김매기들이 줄을 잇는다. 초후에는 씀바귀가 뻗어 오르고, 중
고래불에 처음 간 날, 바람이 몹시 불었다. 하늘로 오르려는 모양의 전망대로 향하는 우리 일행을 휘감았다. 바람 혼자였다면 뚫고 지났을 텐데, 하얀 모래가 덩달아 신이 나서 방파제를 오르고 있어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명사 이십 리에 가득한 모래가 하도 고아서 바람을 타고 얕은 담을 넘어 배가 정박한 항구의 영역을 침범했다. 다른 날 또 오리라 다짐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얼마 후, 대학 동기 언니들이 동해를 따라 드라이브하자고 해서 나섰다. 그 말에 바람이 길을 막던 고래불부터 들르자 했다. 날이 좋아서 입구의 구멍 숭
봄비가 내린다.이런 날이면 할아버지는 들에 나가 논둑을 한다. 겨우내 얼었다 녹아 금이 가거나 쥐구멍으로 허물어진 둑을 진흙으로 매끄럽게 새로 바르는 것을 논둑 한다고 했다. 삽으로 빗물에 젖은 흙을 떠서 둑에 발라 탁탁 치며 논에 물을 가두는 것이다. 할머니는 얼마 전 씨를 뿌려서 오종종 붙어 자란 모종을 속아 사이를 성글게 아주심기를 하셨다. 촉촉해진 밭에서 무럭 자라길 소원하시며 자신의 몸이 젖는 걸 감수하셨다.어린 나는 따뜻한 방바닥에 엎드려 빌려온 만화 한 질을 다 읽었다. 창가에 속살거리는 빗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기면 세
오늘 아침 노래 하나가 입에 매달렸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어릴 적 이 노래를 들으면 왜 산에 메기가 산다는 거지 하다가 멜로디를 놓치곤 했다. ‘라디오에서 김창완 아저씨가 나와 똑같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침에 떠오른 노래가 종일 따라다닌 것, 외국 사람 이름 매기가 물고기 이름 메기가 되어 뒤섞였던 기억이 같았다.매기의 추억을 들으면 초등학교 시절이, 또 어떤 곡을 들으면 중학생 때가, 이 노랜 대학생이 되어 불렀었지. 노래가 지나간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화석(化石)이라고 읊조렸다. 지질학에서 화
따르릉, “형수님, 전데요. 엄마가 독사에 물려서 119 불러서 병원으로 가고 있대요. 같이 가실래요?” 시동생과 함께 병원으로 가는 길에 목 뒤가 당겨오며 머리가 아파 미칠 지경이다. 독사가 내 머리를 물은 것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니 어머님은 그새 치료를 끝내고 병실에 계셨다. 어디 물리신 거냐고 여쭈니 오른손 중지를 보여주셨다. 퉁퉁 부었을 줄 알았는데 워낙 마르신 분이라 그런가, 다행히 붓기가 없었다.어머님은 내가 결혼하고부터 봐왔지만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지간한 일은 속으로 삭이고 혼자 해결하셨다.
혼자 묵독한다는 것은 19세기 중반까진 불가능했다. 그 이전엔 혼자서 책을 눈으로만 읽으며 사색에 잠기면 불온하며 위험한 자로 취급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말없이 읽어 부하들이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시저도 연애편지를 소리 내서 읽지 않은 것이 특별한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니 지금은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다.하지만 나는 혼자서 조용히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늦은 밤일수록 책 읽는 속도가 난다. 묵직한 책을 들고 침대 머리맡에 기대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쫙, 글쓴이의 생각에 고개를
둘째가 첫 월급을 탔다. 하고 싶은 게 많은지 저축은 몇 달 뒤부터 하겠단다. 설레하는 아이를 보며 수년 전 일이 떠올랐다.첫아이가 아르바이트 한 달 되는 날이라며 기대하는 눈치였다. 주꾸미 집에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을 했다. 처음 며칠은 발바닥이 아프다며 두꺼운 양말을 찾기도 하고, 손목이 저리다고도 했다. 어떤 날은 어린아이 손님이 식당 안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데려온 엄마들은 왜 야단을 안 치냐고 잔소리를 했다. 한 달에 두 번만 쉬니 매일 출근하는 일도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며
남편의 추억을 되짚는 여행이었다.안성에 터를 잡은 아들을 데려다주고 차를 돌려 내려오는 길, 충주휴게소에 들렀다. 졸음도 쫓을 겸 벤치를 찾아 잠시 쉬려고 고속도로에서 내렸는데 휴게소 벤치는 흡연석이 된 상태였다. 어디로 가나 하며 두리번거리다가 톨게이트를 발견했다. 충주는 신기하게도 휴게소에서 바로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로 내려설 수 있게 쪽문을 내놓은 것이었다. 느림의 미학 충청도 사람들의 또 다른 배려인듯싶었다.남편은 한 곳만 들렀다 가자며 내비게이션에 중앙탑을 찍어보라고 했다. 사실 포항에서 경기도까지 다녀가며 길만 보는 것이
포항에 산다는 것만으로 친구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 걸어서 10분이면 반짝이는 윤슬이 펼쳐지니 출근할 때마다 눈이 환해지고, 파도 소리 배경으로 소나무 숲을 거닐며 눈 호강 귀 호강을 겸할 수 있다.오늘 걸어볼 길은 영일만 북파랑길의 한 구간으로 해파랑길 18코스로 칠포해수욕장에서 오도리까지다. 길 가다 발견한 안내도에 이곳은 “동해안 연안 녹색길” 이라고 한다. 바다를 끼고 연결한 데크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물멍을 때리다 보면 칠포항에 다다른다. 칠포리 해안로 1546번길이다.독서회 회원인 문숙씨가 세컨 하우스를 지은 동네이다.
목련 투어를 나섰다. 지난해는 보문단지와 동리목월문학관 지나 서출지까지 발도장을 찍었었다. 올해는 다른 곳으로 골랐다.첫 코스로 화천리 산수유 보러 갔다가 발견한 목련 한 그루다. 어느 문중의 선산인지 햇살 가득한 언덕에 봉분이 나란히 몇 기 엎드린 곳에 꽃나무가 병풍처럼 들러져 있었다. 그 나무 중 우뚝 키가 큰 목련이 봉오리를 가득 달고 있었다. 며칠이면 꽃문을 열 것으로 보여 오늘 찾았다.산비탈에 주춤주춤 차를 세우는데, 아직 만개하지 않은 목련이 노란 산수유 군락지 위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반긴다. 가지에 산새들이
비가 이틀째 내린다. 기우제를 지내며 오래 기다린 만큼 반가워 봄비님이라 치켜세운다. 창가에 밤새 속살거린 빗소리 덕분에 바스락거리던 세상이 촉촉해졌다. 물빛 머금은 봄을 맞으러 우산을 받쳐 들고 나들이를 나섰다.신경주역에 다다르니 비는 안개로 모습을 바꾸며 산 위로 기어오른다. 기찻길을 이고 선 다리 밑을 지나 들어가니 동네가 나타났다. 화천 3리다. 화천이라는 동네 이름은 김유신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냇가에 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 ‘꽃내’라고 불렀다 한다. 후에는 꽃내가 화천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꽃내가 더
화면 가득 노란색이 손짓한다. 저기가 어딜까 하고 클릭해보니 ‘슬도’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의 섬에 우리 동네에는 아직 고개를 내밀지 못한 유채꽃이 환하게 피었다. 파도 소리 들으며 해풍에 몸을 맡기고 노랑노랑 흔들리고 있었다. 얼른 간식 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섰다.달려가니 울산 대왕암 근처였다. 소문을 나만 들은 게 아닌지 주차장이 꽉 찼다. 마침 빠지는 차가 있어서 차를 내려놓고 섬을 향해 걸었다. 이제는 섬이라 불러도 되나 싶게 작은 슬도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오토바이와 자전거가 오갔다.울산 동구 방어진항 끝에 있는 슬도는
7번국도를 달리다 재미난 이정표를 발견했다. ‘바깥멋질’, 위로 가면 울진 평해가 나오고 옆으로 가면 학곡1리와 바깥멋질이 나온다고 초록색 바탕에 하얗게 써놓았다. 입말로 부르는 듯한 동네 이름을 관공서에서 떡하니 간판에 새겨놓은 게 신기해서 차를 돌려 들어가 보았다. 그냥 빈집이 늘어가는 평범한 시골이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누군가 나처럼 궁금해서 알아보고 친절하게 알려주었다.바깥멋질은 옛날 고을 원님이나 관찰사가 평해에 부임할 때 머무르며 행차를 준비했던 곳이란다. 조용한 동네에 왁자지껄한 퍼레이드를 보는 그 자체가 큰 구경거리
안강으로 소풍을 갔다. 소나무의 모양이 특별한 숲이 있어서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흥덕왕릉에 간다고 하니 집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다들 잘 모르는 눈치다. ‘태정태세문단속 예성연중집단속’, 이렇게 엉터리로라도 조선의 왕들은 우리 입에 오르내렸지만, 신라의 왕은 몇 대인지도 모른다. 우선 혁거세를 시작으로 마지막 경순왕까지 총 56명이고 그중 소재 불명을 빼면 왕릉은 총 37여 기가 있다. 하지만 정확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덤은 단 8기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추정할 뿐이다.그 가운데 제42대 흥덕왕릉에 도착했다. 능의 주변 비석에
새밭골로 산책을 나갔다. 시댁에서 아버님이 일주일간 혼자 지낸 집 설거지를 끝내고도 아직 해가 남은 오후, 좀 걸을까 했더니 남편이 길을 잡았다. 결혼한 지 30년이 다 되어가도 시댁에 가도 울타리 안에서만 맴돌 뿐 동네에 나간 적이 거의 없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차 타고 한참 거리의 장기읍성은 자주 올랐어도 사부작사부작 걷는 동네 길은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봉산초등학교 뒤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고양이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자신들만의 길인지 개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남편이 이 학교 학생일 때
카펫을 깔았다. 아이들 호흡기에 좋지 않다고 해서 한동안 수납장 속에 넣어 두었었다. 정해진 공간에 넣기 바빠 카펫의 형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구석진 곳에 넣기 위해 여러 번 겹접었다. 오랜만에 펼쳐 놓으니 판판하지 않다. 접혔던 선이 선명하다. 자근자근 눌러서 가라앉히려 해도 조금 지나면 등허리가 불룩 튀어나온다. 울룩불룩한 카펫 위를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 등쌀에 이리저리 밀릴까 봐 소파 발을 빌어 한 귀퉁이씩 눌러 놓았다. 식구들이 번갈아 가며 등도 대주고 엉덩이로 따뜻하게 품어줘야 할까 보다. 며칠은 그렇게 달래야지.
북송리 북천수의 사계절을 들었다. 다들 숲이라 이름 붙일 때 이곳은 수(藪)라 불렀다. 수풀, 덤불이라는 뜻의 수이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느껴져 매일 한 시간 이상 걷자고 마음먹고 찾아간 곳이다.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한 해였다.북송리 북천수, 소나무 숲의 이름이 특별하다. 다른 고장에도 있을 테지만 포항은 동네 숲을 많이 간직한 도시다. 선비가 지와 예를 갖추듯 푸른 동해와 깊은 계곡까지 겸비했다. 해안선이 길어서 바람을 막고자 방풍림으로 해송을 길게 심었고, 동네마다 둘레에 나무를 심어 가꿨다. 내 어릴 적 학교 소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에 익숙한 바이올린 소리가 통화연결음이다. 봄에는 봄이, 여름엔 여름이더니 12월부터는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그것도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 날’ 노래로 곡명이 잘 못 알려진 ‘2악장 라르고’이다. 겨울이 왔다고 음악으로 알려준다.겨울이면 내 고향 안동에서는 집 집마다 겨우살이 준비로 김장에다 한 가지를 더했다. 바로 난젓이다. 난젓은 겨울에만 해 먹는 음식인데 동태나 생태를 물 좋은 놈으로 사다가 껍질을 벗기고 가운데 큰 뼈만 없애고 대가리부터 꼬리, 내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두들겨서 만들었다. 무
언니들이 드라이브하자고 나를 싣고 달렸다. 신광을 지나 구불구불한 동네 길을 지나 기계로 향했다. 기계가 종착지인가 했더니 산을 넘어 죽장에 다다랗다. 계곡에 물이 얼었다. 커다란 김장배추 절이는 것으로 보이는 깊은 다라이에 아이들을 싣고 삼촌쯤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줄을 달아 얼음을 지치고 있다. 놀이공원에 바이킹을 타는 듯한 아이들의 표정이 멀리서도 보였다. 그곳이 종착지인가 했더니 더 깊은 산속으로 차를 몰았다. 입암서원을 지나 산을 넘으니 청송으로 접어드니 썰매장 가득 사람들로 붐볐다. 추운 날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얼굴
추억은 식물과 같다. 어느 쪽이나 싱싱할 때 심어두지 않으면 뿌리박지 못하는 것이니, 우리는 싱싱한 젊음 속에서 싱싱한 일들을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 프랑스 비평가 생트뵈브가 우리에게 남긴 명언이다.공감하는 명언에 충실하고자 오늘 추억 하나를 남겼다. 경양식이라는 낱말이 옛날을 떠올리게 해서 오래된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는 내 말에 친구들 모두 얼른 따라나섰다. 입구부터 복고풍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묵직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벨벳이 눈에 뜨였다. 푹신한 쿠션까지 더해 소파 깊숙이 당겨 앉고 싶게 했다.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