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이 홍건적의 2차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해 머문 기간은 1361년 12월 임진일로부터 1362년 신축일에 이르기까지의 70일 동안이다.

하필 몽진지로 안동을 선택한 것은 날랜 적 기병의 추격을 떨치는데 안동의 산간지형이 유리했고 태조 왕건 이래 보여준 고려왕실에 대한 안동인들의 충성심 등이 작용했음을 전편에서 언급했다. 또 당시 공민왕의 측근 중에는 안동 출신 또는 안동에 연고를 둔 인물이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고려왕실을 의리로 지켜낸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체류기간 70일 동안 어떻게 왕을 모셨으며 위급한 정세에 대응했을까.

따뜻한 영접과 재기의지 독려

공민왕이 안동에서 70일을 무사하게 보냈다면 이는 안동지역을 관리하는 행정책임자와 지역 백성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의 몽진 당시 안동의 관리는 목사 김봉환이었던 것으로 최근까지의 연구는 결론 내리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공민왕의 몽진 당시 김봉환 목사와 안동 사람들이 국왕을 극진해 예우해 모시자 공민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복주목사를 안동대도호부사로 승격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이 안동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 `고려사`는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략상 왕의 행적을 지나치게 노출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봉환 목사는 왕의 안동 도착 당시 상주도(尙州道) 소속 안기역 역리들에게 왕이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독려하거나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학계의 추정이다. 또 부녀자들이 인교를 놓아서 노국공주가 송야천을 건너게 한 것도 안동부의 행정적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목사 김봉환은 왕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집무하던 복주목 청사를 정리한 뒤 왕이 머물 수 있는 행궁(行宮)으로 준비했을 것이다.

또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왕과 군지휘자들과 협의해 확실한 방어태세를 구축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정세가 위급하던 이때 왕의 최후의 보루로 준비됐던 곳은 다름 아닌 현재 성곡동의 성황당토성과 청량산의 공민왕산성과 왕모산성, 오마도산성 등이었음을 들 수 있고 김봉환이 이를 주도했다는 사실적 추측이다.

이런 것들은 `영가지`가 김봉환의 직책에 대해 행정 관리인 목사나 부사라 하지 않고 무인에게 통용됐던 안집사(安集使)로 기록한데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왕의 휴식과 군사정비 지원

공민왕은 안동에서 우선적으로 오랜 몽진길의 피로함을 달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왕이 어느 날에는 낙동강 영호루 아래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물가에서 활쏘기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전시체제에서도 후방인 안동이 비교적 안전했으며 왕은 피로를 풀거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들이를 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실제 이때 홍건적은 한 번도 경상도를 넘은 일이 없었다. 이에 따라 왕의 일행은 전세가 비교적 안정된 틈을 이용해 안동 지역의 다른 곳으로도 순행했을 것이며, 안동 지역의 많은 산성들이 공민왕의 안전을 위해 축조됐거나 보수됐다고 전해진다. 산성 축조가 정확히 이 시기에 공민왕을 위해 이뤄졌다는 사실적 기록은 충분하지 않지만 안동에 이르러 공민왕의 마음이 편안했음은 여러 기록으로 입증되고 있다.

한편, 왕은 개성 일대를 휘젓던 홍건적을 물리치기 위해 안동에 머무는 동안 군대의 지휘체제를 정비했다. 이는 총병관으로 정세운을 임명해 홍건적을 격퇴한 사실로 증명된다. 이때를 전후해 진성이씨의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李子脩)가 정세운의 휘하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건적을 물리친 공로로 이자수는 공신이 됨으로써 그 자손들이 예안현과 청량산 일대에서 사회적 위상을 점했으며 후일 이 가문에서 성리학의 최고봉 퇴계 이황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던 점도 소홀히 볼 수 없는 한 인과다.

왕은 또 한편 봉정사의 진여문(眞如門) 현판글씨로 볼 때 봉정사에도 들러 불력으로 홍건적을 물리치기를 기도했을 개연성도 적지 않다. 이후 공민왕은 정세운이 지휘하는 군대가 개성의 홍건적을 섬멸했다는 보고를 듣고서야 개성 환도를 준비했던 것이다. 왕은 떠나기 전 “안동이 나를 중흥시켰다”며 안동부에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했으며 이 중 다수가 아직까지 태사묘 등에 전해지고 있다.

안동에 대한 공민왕의 사은

공민왕이 안동에 도착해 송야천을 건널 당시 노국공주를 위해 안동의 부녀자들이 서서 엎드린 채 등을 잇대어 인교를 만들었다는 `놋다리밟기` 전설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사실이 아니다. 영덕의 월월이청청과 의성의 지애밟기, 호남의 강강술래 등 놋다리밟기와 같은 맥락의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여성들이 소로 손을 잡거나 몸을 잇대어 노는 춤의 문화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이다. 결국 안동의 놋다리밟기는 안동의 백성들이 공민왕을 어느 정도 환대했던지를 보여주기 위해 덧씌워진 전설이다.

이런 환대에 힘입어 왕은 재기할 수 있었고 안동에 대한 은혜를 잊지 않았다. 앞서 거론한 것처럼 두드러진 왕의 사은 중 하나는 몽진시에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일이다. 안동이라는 지명은 왕건이 최초로 내렸고 중간에 몇 번이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확고한 지명으로 굳었다. 이와 함께 `금방기`에 따르면 왕은 안동대도호부에 대해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안동 지역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했다.

의미가 깊은 여러 가지 선물을 하사하기도 했다. 안동부와 안기역리들에게 복식류와 식기류를 하사했으며, 영남의 대표적 누각이자 자신의 시름을 달랬던 `영호루`의 현판 글씨를 친필로 하사했다. 이로써 안동의 영호루는 국가적인 주목을 받게 됐으며 이후 누각을 확장하고 유실시 복원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다.

또 몽진해온 공민왕을 중도에서 맞이한 손홍량에게는 “충정이 하나같이 곧은 사람이 늙을수록 나라 위한 마음이 독실하도다”라는 시를 내리고 그의 사후에는 정평이라는 시호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손홍량은 나라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으로 낙향해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던 충성심 강한 신하였다. 이외에도 공민왕은 여러 가지 유무형의 선물을 안동에 남겼으며 안동의 백성들은 왕이 머물렀던 역사를 잊지 않는 의미로 `공민왕 신앙`을 이어왔던 것이다.

/정태원·이임태기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