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현 형

이마 흰 사내가 신발을 털고 들어서듯

눈발이 마루까지 들이치는

어슴푸른 저녁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마루에 나앉아

밤 깊도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설탕을 타 마신 막걸리는 달콤 씁쓰레한 것이

아주 깊은 슬픔의 맛이었습니다

자꾸자꾸 손목에 내려앉아

마음을 어지럽히는 흰 눈막걸리에 취해

이제사 찾아온 이제껏 기다려 온

먼 옛날의 연인을 바라보듯이

어머니는 젖은 눈으로

흰 눈, 흰 눈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초저녁 아버지의 제사상을 물린 끝에

맞이한 열다섯 겨울

첫눈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며

나는 다가올 첫사랑을 기다리며

첫눈 내리는 날이면

댓잎처럼 푸들거리는 눈발 속에서

늘 눈막걸리 냄새가 납니다

남편을 여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은 딸, 남자가 없는 모녀가 마주앉아 첫눈을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눈가도 가슴 속도 젖어 있음을 느낀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모녀가 마주앉아 마시는 설탕을 탄 막걸리는 슬프면서도 달짝지근한, 운명적 슬픔이 녹아난 비애의 맛이 아닐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