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신

뽀송하게 올라오는 콩 싹이 다칠세라

무릎을 꿇고 낫질을 할 때

느닷없이 소란스런 웃음소리

곤색 치마에 눈이 부신 하얀 블라우스

교복을 입은 한동네 한반 친구 두 명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가슴파도가 또 뒤노인다

그대로 엎어져 보릿대 사이로

(중략)

작대기보다 큰 거무스레한 구렁이

발틀에 떠발이 치고

내 안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흔들림

돌아누운 나도 고개를 불끈 쳐들고 있었다

도도하게 혀만 낼름거리며

내 가슴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끓고 있었다

나를 물으라!

씨빠지게 일만 하다

서럽게 그므는 밭이랑 나비

나를 죽이라!

매일을 밭이랑 나비 속에서

성성하게 죽어가는 가림자

어느덧 소르르 물지 않고 사라지는 구렁이

열 서너 살 때 콩밭에서 징그러운 구렁이를 만났던 일화를 소개하며 시인은 자신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생의 길을 떠올리고 있다. 구렁이를 보며 ‘나를 죽이라’고 소리친 것은 어쩌면 모양 없고 힘겨웠던 지난 시간들을 붙들고 있었던 운명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었는지 모른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