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기자가 만난 경북 사람
포항흥해농요보존회 박현미 회장

흥해농요보존회 박현미 회장은 국악을 통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여기 포항 흥해읍 너른 들판에서 신명나게 노래하며 춤추는 사람이 있다.

10대 때부터 30대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우울증과 열등의식의 어두운 터널을 걸었던 그녀는 국악을 만나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포항흥해농요보존회 박현미(57) 회장은 국악을 배우는 궁극적 목적이 뭐냐는 물음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녀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답이다.

흥해읍은 옛날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모내기와 벼 베기 등 농사일의 힘겨움과 시름을 ‘노래 한 가락’으로 위로하던 우리 선조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는 흥해농요의 전승 기반을 무너뜨렸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박현미 회장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몇 해 전 포항 지진으로 고통 받는 이들을 ‘노래로 치료해주고 싶다’는 생각에서 만든 게 포항흥해농요보존회.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단체가 만들어지는데 도움을 줬다.

지난주 본사 편집국에서 박현미 회장을 만나 흥해농요의 매력, 국악과 함께 해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경남 창녕서 병설유치원 교사로 일하다

남편 따라 포항 정착 후에 국악과 인연

40대 늦깎이 국악전공자로 소리꾼의 삶

2017년 포항 지진 계기로 보존회 꾸려

체험장까지 만들며 수집과 기록에 열성

“흥해농요는 색다른 매력 가진 동부민요

국가 무형문화재 지정 위해 노력할 것”

-고향은 어디인지.

△경상남도 창녕에서 태어났다. 결혼도 옆 동네 사는 첫사랑과 했다. 시댁과 친정이 겨우 3분 거리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창녕에서 졸업했다. 대학은 대구에서 다녔고 유아교육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임용고시를 거쳐 병설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7급 공무원 생활을 10년쯤 한 것이다.

-소녀 시절부터 춤과 노래에 관심이 있었나.

△아버지가 교사였다. 아버지가 재직한 학교에 다녔으니 조금은 특별한 대우도 받았다. 예능에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땐 창녕군에서 열린 무용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간 적도 있다. 운동회나 소풍 때면 응원단장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중학교 후반부턴 우울한 아이로 변했다. 존재감도 없었다.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외출도 잘 하지 않을 정도였다. 우울증과 열등감은 오래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지속됐으니까. 국악을 배우면서부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포항과 처음 인연을 맺은 시기는.

△30대 초반 시절이다. 남편이 경남 창원에서 일하다가 포항공대 직원으로 오게 됐다. 그때 유치원 교사를 그만뒀다. 안정적인 공무원이었지만, 내 삶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식구 많은 집의 맏며느리로 고생하며 살던 어머니의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봤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열등의식과 우울증은 그때까지 나를 따라다녔다.

-국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뭔가.

△국악을 접한 것은 30년쯤 됐다. 흥해복지센터에서 민요 강사도 오래 했다. 포항으로 이주하면서 영남대 국악과에 들어갔다. 우울한 일상에서 탈출한 것도 그 시기다. 열등감과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국악의 많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배우고 익혔다. 민요도 부르고, 북과 장구도 치고, 판소리도 공부했다.

포항에 와서 처음 장구를 쳤을 때를 잊지 못한다. 마음속에 어둡게 웅크리고 있던 묵은 찌꺼기가 내려갔고, 스트레스가 단숨에 풀렸다. ‘이게 내 길이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즈음 포스코 문화센터 민요 강사도 시작했다. 40대 늦은 나이에 대학에서 어렵게 국악 석사 과정을 마친 것도 내 안의 우울을 온전히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흥해농요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지.

△2017년 포항에 큰 지진이 났다.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이 ‘소리를 통해 지진이 사람들에게 준 고통에서 벗어나보자’는 것이었다. 2018년에 흥해읍을 찾아가 읍장을 만났다. 그때 내게는 홍해농요를 연구하고 채록한 박창원(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선생과 권태룡(한국아이국악협회장) 선생이 모아 엮은 자료가 있었다. 그것들이 흥해농요의 대중화와 흥해농요보존회를 창립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흥해농요가 가진 매력은 우리 지역, 즉 포항의 소리라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의 노래, 호남의 노래는 그것들만의 특징이 있다. 흥해농요도 마찬가지다. 이곳 사투리로 이곳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흥해농요다. 그런 특성이 있기에 부르면 입에 착착 감긴다.

-농요의 수집과 기록 과정은 어떤 방식인가.

△일단 농요를 부르는 분이 살아있는 게 가장 좋다. 그들을 만나 노래를 듣고 그걸 문자로 기록하고 녹음으로 남긴다. 앞서 언급한 박창원 소장과 권태룡 회장이 해온 게 그런 일이다. 그것이 흥해농요의 실체 보존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노래를 배우고 있는 김선이 어르신은 흥해농요를 젊을 때부터 불러온 분이다. 그분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하다. 흥해 허수아비 축제에서 많은 이들이 농요를 함께 불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흥해농요가 가진 매력은.

△우리 지역, 즉 포항의 소리라는 것이다. 서울과 경기 지방의 노래, 호남의 노래는 그것들만의 특징이 있다. 흥해농요도 마찬가지다. 이곳 사투리로 이곳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흥해농요다. 그런 특성이 있기에 부르면 입에 착착 감긴다.(웃음)

-흥해농요를 배우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는데.

△맞다. 지금도 나는 배우는 학생인 동시에 선생이기도 하다. 흥해엔 흥해농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다. 앞으로도 이들에 의해 흥해농요는 그 맥을 이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관련 심포지엄을 열면 국악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흥해농요가 무형문화재가 되면 좋을 것’이라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30년 이상 소리꾼으로 살아오며 다른 지역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 흥해농요라는 ‘나의 노래’가 생겼기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낀다.

-흥해농요 관련 공연도 많이 열었을 듯하다.

△보존회가 생기고 3년 동안 공연을 자주 했다. 경창대회, 현장 재현행사 등 소규모 공연은 말할 것도 없고, 큰 도로를 막고 100여 명이 함께 농요를 부르기도 했다. 어르신들이 즐겨 보는 공중파방송 프로그램에도 흥해농요가 소개됐다. 부르면 스스로 신명이 나는 게 농요다. 누군가가 ‘10년 세월이 걸릴 홍해농요 홍보를 3년 안에 해냈다’고 칭찬했다. 모두가 농요를 아껴준 여러분들 덕택이다. 그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은.

△흥해농요를 듣고 있던 한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젊은 당신이 내가 어릴 때 듣고 부르던 농요를 어떻게 아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 할머니는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농요는 농사일을 하는 곳에서 불러야 제맛이 나는 노래다. 그걸 재현하기 위해 흥해에 조그만 논도 샀다. 그곳이 ‘흥해농요 체험장’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신에게 흥해농요는 어떤 의미인가.

△포항에 와서 국악인이 됐다. 포항의 소리와 문화예술에 관심이 없을 수 없다. 흥해농요는 경기민요, 남도소리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우리나라 동부민요다. 50대 중반에 발견한 보석이 바로 흥해농요 아닐까. 이전에 내가 불렀던 노래들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거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30년간 사람들에게 국악을 가르쳤다. 악기도 개인적으로 구입해 모두가 연주해볼 수 있도록 했다. 국악대중화에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흥해농요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면 좋겠고, 그것을 넘어 국가 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도록 관심 가진 분들과 여러 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국악을 만나기 전에는 내 자신이 싫었다. 우울증과 열등의식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준 게 바로 국악이고 흥해농요다. 안정된 공무원 생활을 포기한 게 이제는 후회되지 않는다. 국악과 흥해농요가 내게 구세주가 돼준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우리의 소리를 들으며 환하게 웃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결국 국악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니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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