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충택 논설위원
심충택 논설위원

의정(醫政)갈등의 핵심요인인 ‘2천명 의대증원 숫자’에 조금의 여지나마 줄 수 있는 대안이 나와 주목된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과학과 정원 등을 활용하면 의대 정원 2천명을 늘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 선거 캠프에서 보건의료분야 정책의 밑그림을 그린 인물이다. 그의 제안은 전공의들의 반발을 해소하기 위해 내년에 바로 정원을 2천명 늘리는 대신, 2026학년도부터 국가현안인 의과학과 신설 등을 통해 의대 정원을 확대해 나가자는 내용이다.

서울대가 최근 의정갈등을 감안해 내년도 의예과 증원인원을 15명만 신청하면서, 새로 신설할 의과학과에 50명을 따로 신청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동안 임상의사가 아닌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온 서울대는 “의과학과가 신설될 경우 서울대의 바이오·헬스 관련 학과 및 첨단융합학부와 연계하는 교육·연구를 통해 우수인력 양성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카이스트와 포스텍(포항공대)에도 의과학과를 신설할 수 있도록 정원을 확대해줘야 한다고 했다. 박 교수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포스텍의 의과학과 신설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온 현안이다.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경북도와 포항시는 과학공학 분야 인재가 몰려있는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왔다. 의사과학자는 의사면허를 갖고 있지만 환자진료가 아니라 새로운 의료기술, 신약, 첨단의료장비 연구개발에 전념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당시 백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된 배경에도 의사과학자의 역할이 컸다. 세계최고수준의 인프라를 갖춘 서울대나 카이스트,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가 배출된다면 한국의료계로서도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닌가.

출구없이 격화하고 있는 의정갈등은 앞으로 현 정권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5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떨어진 이유 중에는 ‘의대 정원 확대’가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의 한 치 양보 없는 강경자세가 대통령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외신에서도 한국정부가 의대증원을 밀어붙이면서 경제 분야, 특히 반도체산업이 타격을 입고 있다는 분석을 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한국의 많은 학생들이 (의대증원으로)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취업을 보장하는 한국 최고의 공과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거부하고, 의료 분야에서 더 나은 직업 안정성과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고 했다.

의대 증원을 두고 전공의가 지난달 19일 사직서를 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갔다. 전공의의 90% 이상이 아직 복귀하지 않고 있어 대형병원 의료진의 피로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의대 교수들이 사직서를 내고 진료 현장을 이탈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의료시스템이 더 망가지기 전에 정부는 2천명이라는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파국을 막을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