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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험, 가입보다 청구가 중요”

보험은 참 묘한 존재다. 가입할 땐 미래를 대비하는 든든한 안전장치처럼 느끼지만, 정작 보험금을 받으려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절차와 마주친다. 특히 실손보험은 그랬다. 병원 진료가 끝나면 일단 영수증에 진료비 세부내역서도 떼고, 약 처방전까지 챙겨 보험사 앱에 사진을 올리는 과정은 번거롭기 그지없다. 금액이라도 크면 몰라도 감기 몇천 원, 물리치료 몇만 원 때문에 시간을 들여 청구하는 게 귀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험료는 꼬박꼬박 내면서도 정작 보험금은 청구하지 않는다. 금융 당국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매년 청구되지 않고 사라지는 실손보험금이 수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보험에 가입한 소비자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셈이다. 금융위원회가 최근 ‘실손24’라는 전산 청구 시스템을 확대하고 나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필요한 병원 서류를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스마트폰 앱 하나로 보험금 청구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손보험 가입자는 약 4000만명에 이른다. 사실상 국민 대부분이 가입한 생활형 금융상품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보험산업은 가입할 땐 엄청 친절하고 적극적인 데 반해 지급 청구할 때의 불편함은 소비자에게 떠넘긴 측면이 적지 않았다. 보험사 입장에서야 소액 보험금 청구가 줄어들수록 유리하다. 소비자는 “귀찮아서” 포기하고, 보험사는 지급 부담이 줄어드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실제 주변을 보면 아이 병원비, 약국 영수증, 도수치료비 등은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손24 같은 전산시스템이 확대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병원에서 보험사로 서류가 자동 전송되면 소비자는 클릭 몇 번만으로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특히 네이버나 토스 같은 익숙한 플랫폼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연계시킨다는 점은 의미가 크다. 보험이 어렵고 복잡한 것에서 일상 속 생활 서비스로 바뀐다는 신호다. 물론 아직 갈 길은 아직 멀다. 현재 실손24와 연결된 의료기관 비율은 30%도 안된다. 동네 의원 상당수는 여전히 시스템에 불참하고 있다. 병원 전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EMR 업체들의 참여도 걸려 있다. 정부는 올해 안에 연계율을 80~9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실손보험 시장은 지금 심각한 갈등 구조 속에 있다. 소비자는 보험료가 너무 빨리 오른다고 불만이고, 보험사는 과잉진료와 과다청구로 손해율이 크다고 말한다. 도수치료와 비급여 진료를 둘러싼 논란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번 시스템 개선은 갈등 구조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병원에서 어떤 진료가 얼마나 반복되는지 데이터가 축적되면 허위·과잉 청구를 걸러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결국 정상 가입자는 더 쉽고 빠르게 보험금을 받고, 비정상적 청구는 줄어드는 방향으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본래 금융의 본질은 복잡한 상품이 아니라 소비자가 쉽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도록 하는 데 있다. 아무리 좋은 보험이라도 가입은 쉽지만 정작 필요시 보험금 청구가 어렵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좋은 금융서비스가 아니다. 실손24의 의의는 보험이 이제서야 “팔기”보다 “돌려주기”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5-12

호르무즈를 건넌 힘, 관계였다

봉쇄된 바다를 건넜다. 모두가 멈춘 길에서 단 한 척의 유조선만 통과했다. 일본 이데미쓰코산(出光興産)의 초대형 유조선 ‘이데미쓰마루(出光丸)' 이야기다. 지금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세계 에너지 물류의 ‘목’이다. 중동발 긴장이 격화되면서 각국 선박의 통항이 제한되는 상황에서, 일본 이데미쓰의 유조선만 통과했다는 사실은 그저 해운과 관련한 해외토픽으로 보고 지나가서는 안되는 뉴스다. 그것은 ‘누가 위기에서 움직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다. 왜 하필 이데미쓰였는가. 답은 ‘관계’다. 이데미쓰의 이름 뒤에는 70년을 넘는 시간이 쌓여 있다. 1953년, 서방의 제재를 뚫고 이란으로 향했던 ‘니쇼마루(日章丸)’ 사건은 하나의 거래라기 보다는 정치·외교적 상징으로 남았다. 이후 이데미쓰는 이란뿐 아니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과 끈질길 정도로 관계를 이어왔다. 전쟁 이후 가장 먼저 테헤란 사무소를 재개하고, 혼란기에도 현지와 접점을 유지했다. 이 축적이 결국 위기에서 차이를 만든다. 위기는 갑자기 오지만, 통과 능력은 축적의 결과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질문을 던진다. “의존은 했지만, 관계는 쌓았는가.” 한국 역시 에너지 구조에서 중동 의존도가 절대적이다. 문제는 의존 그 자체가 아니다. 의존에 걸맞은 관계를 구축했느냐가 핵심이다. 공급망은 계약으로 유지되지만, 위기는 신뢰로 통과한다. 특히 산업 구조를 보면 이 문제는 더 직접적이다. 포항 철강산업은 에너지 가격과 물류 안정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원유 가격 상승은 전력비와 운송비 등 생산원가로 이어진다. 호르무즈 리스크는 먼 중동 뉴스가 아닌 포항 산업의 비용 구조를 흔드는 변수로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 더. 이데미쓰 사례는 ‘비가격 경쟁력’을 보여준다. 기업은 흔히 가격, 기술, 규모로 경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요소가 작동한다. 신뢰, 네트워크, 역사 같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자산이다. 이것은 단기간에 만들수도, 필요할 때만 꺼내 쓸 수도 없다. 한국 기업들도 중동과 많은 거래를 해왔지만 관계는 다르다. 거래는 계약으로 끝나지만, 관계는 기억으로 남는다. 호르무즈 해협을 누가 통과할 수 있는지, 누가 멈춰야 하는지를 가르는 기준은 군사력도, 물량도 아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연결되어 있었는가다. 포항도 마찬가지다. 포항은 오랜 시간 포스코를 중심으로 함께 성장해왔다. 기업과 협력사, 지역 상공인, 그리고 지자체까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지역경제를 지탱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산업 환경이 흔들리는 국면이라면 이 관계가 그저 ‘거래의 연장선’에 머물러 있다면 다가올 위기를 버티기 어렵다. 거래는 상황이 바뀌면 끊어진다. 관계는 위기에서 오히려 작동한다. 앞으로 포항경제에 닥칠 리스크는 공급망, 에너지, 산업 구조 등의 복합 위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때 이를 함께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은 서로 ‘얼마나 오래 거래를 했느냐’가 아닌 ‘얼마나 서로 신뢰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6-05-05

전봇대를 묻는 도시 경쟁력

요즘 일본이 다시 ‘전봇대’를 없애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전선과 전주를 지하로 묻는 ‘무전주화(無電柱化)’ 정책을 국가 차원에서 재가동했다. 일본은 1980년대부터 이 사업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속도는 기대에 못 미쳤다. 현재도 약 3600만개의 전주가 남아 있고, 오히려 증가 추세다. 그런 일본이 다시 이 정책을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더 이상 ‘미관 개선’ 수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은 재난 대응이다. 최근 일본은 태풍과 집중호우, 그리고 대지진까지 겹치며 전주 붕괴로 인한 도로 마비와 장기 정전 사태를 반복 경험했다. 특히 노토반도(能登半島) 지진에서는 전주가 3480개나 쓰러져 구조와 복구 자체가 지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일본은 결론을 내렸다. “전봇대는 도시 인프라가 아니라 재난 리스크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제3차 무전주화 추진계획’을 통해 정책을 전면 재정비했다. 어떤 시설을 설치하는 단일 사업으로 보지 않고 이를 국가 인프라 전략으로 격상한 것이다. 이번 정책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선택과 집중이다. 모든 도로가 아니라 고속도로 IC와 주요 거점을 잇는 ‘긴급 수송도로’를 중심으로 우선 정비한다. 재난 시 도로가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속도보다 실행력이다. 기존처럼 ‘착공률’이 아니라 ‘완공률’을 기준으로 정책 목표를 설정했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실제 효과 중심으로 전환한 셈이다. 셋째, 현실적 접근이다.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선 공동구뿐 아니라 측구 활용, 건물 벽면 배선 등 다양한 저비용 방식까지 허용했다. 완벽한 지중화보다 “현실 가능한 지중화”를 택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관광과 도시 이미지 개선도 중요한 목표다. 전봇대가 사라진 도시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훨씬 ‘정돈된 국가’로 보인다. 일본이 관광대국을 지향하는 상황에서, 전주 정리는 곧 국가 브랜드 전략이기도 하다. 물론 단점도 분명하다. 막대한 비용과 공사 기간, 주민 불편, 그리고 지방 재정 부담은 여전히 큰 장벽이다. 그래서 일본 역시 전면 시행이 아닌 ‘우선순위 전략’을 택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할까. 우리 역시 무전주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지만, 속도는 더디고 기준은 모호하다. 특히 지방 도시에서는 관광·경관·보행 안전 측면에서 체계적인 접근이 부족하다. 철강 산업도시 포항은 다양한 각도로 미래 전환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도심 곳곳을 가로지르는 전봇대와 전선은 여전히 ‘과거의 산업도시 이미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전봇대를 없애는 일을 미관 정비라는 좁은 시야로 보면 오산이다. 재난을 줄이고,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관광과 정주 환경을 바꾸는 도시 구조 개혁이다. 일본이 전봇대를 묻기 시작한 것도 이제는 ‘보이는 인프라’로 경쟁하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도시 포항도 이제는 선택해야만 한다. 도시 경쟁력은 공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걷기 좋은 도시, 보기 좋은 도시, 안전한 도시가 곧 경쟁력이다. 도시전역에 들쑥날쑥 솟아있는 전봇대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도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할 것인가.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4-28

텅 빈 유조선 행렬이 보내는 경고

요즘 국제유가를 설명할 때 우리는 흔히 ‘공급 부족’을 떠올린다. 그러나 일어나는 상황은 조금 다르다. 원유 자체보다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이 있다. 바로 ‘운송’이다. 중동발 군사 충돌로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막히면서 글로벌 원유 시장은 가격 이전에 물류가 먼저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바다 위에서 포착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 등 아시아에서 출발한 초대형 유조선(VLCC)들이 원유를 싣지 않은 채 미국 멕시코만으로 향하고 있다. 평소의 두 배를 훌쩍 넘는 70여 척이 ‘빈 배’로 대서양을 건너는 이례적 장면은 해운 분야만의 이슈가 아니다. 이는 ‘어디서 실어 올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다. 문제는 거리다. VLCC는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한다. 결국 말라카 해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미국까지 가야 한다. 편도만 약 60일, 지구의 3분의 2를 도는 항로다. 과거 중동에서 2~3주면 들어오던 원유가 이제는 두 달 가까이 걸린다. 이 시간의 공백은 그저 시간이 늦어진다는 지연에 그치지 않고 비용으로 연결된다. 운임은 오르고 재고는 늘어나며 공급망은 느려진다. 이 변화는 우리가 그동안 효율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익숙해진 ‘적시 생산(Just-in-time)’ 체계를 흔든다. 제조업은 그동안 빠르고 효율적인 물류를 기본 전제로 깔고 있었다. 하지만 운송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나면 기업들은 더 많은 재고를 쌓아야 하고 이는 자금 부담으로 이어진다. 결국 에너지 가격보다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 변화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미국은 이번 사태의 최대 수혜자로 보인다. 중동산을 대체할 공급처로 부상하며 수출은 급증하고 에너지 패권은 강화되는 흐름이다. 실제 미국 원유 수출은 7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론 낙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증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수출 확대가 국내 연료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면 정치적 부담도 커진다. 결국 이번 사태는 ‘원유 부족’이 아니라 ‘운송 병목’이 만든 위기다. 그리고 이 병목은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 해상 물류망은 한 번 꼬이면 풀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 비용 압박은 산업 전반으로 확산된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에는 더욱 뼈아픈 변수다. 포항 철강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철강은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다. 유가와 해상 운임이 동시에 오르면 수익성은 이중 압박을 받는다. 더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다. 원료 도착 시점과 운임 상승의 상한선을 예측하기 어려워지면 생산 계획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답은 구조 전환밖에 없다. 다행히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HyREX)은 에너지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조달을 다변화하면 지금처럼 공급망 충격의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산업과 기업이 아무리 정답을 알고 있어도 쓸 수가 없는 것이 문제다. 여전히 산업용 전력요금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유조선의 행렬은 신기한 해상 풍경이 아니다. 하루빨리 산업의 근간인 철강 부문의 족쇄인 전기요금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경고다. /김진홍경제에디터

2026-04-19

지역경제 어떻게 버틸 것인가

요즘 뉴스에는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상승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환율 역시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겉모습은 국제 정세 이야기지만 그 파장은 이미 일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고 있다. 시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생업을 위해 차량을 운행해야 하는 이들에게 주유소 가격은 하루 단위로 체감되는 변수다. 움직여야 수입이 발생하는 구조에서 에너지 비용 증가는 곧바로 소비 축소로 이어진다. 여가와 취미, 외식과 같은 선택적 소비는 어느새 ‘사치’처럼 느껴져 뒤로 밀렸다. 먹거리 물가도 마찬가지다. 수입산 농·축·수산물 가격은 운송·에너지 비용과 환율 상승이 겹치며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구조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면 소득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고정된 수입 속에서 가계는 더 촘촘한 지출 관리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역 산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포항·경주·구미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산업벨트는 제조와 유통이 결합된 구조다. 제조업의 핵심인 수입 원자재 가격도 상승 압력이 거센데다, 이를 이용한 제조과정에 드는 산업용 전력 비용 역시 부담이다. 원재료와 에너지 비용이 같이 오르는 전형적인 비용 상승 국면이다. 이는 곧 수익성 저하로, 기업의 투자와 고용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은 가계는 원리금 상환 압박까지 받고 있다. 과거 대비 다소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기준금리는 장기간 동결 상태다. 물가 불안이 이어지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여건이다. 결과적으로 가계와 기업 모두 비용 증가와 불확실성이라는 이중 부담에 직면해 있다. 결국 시민의 선택지는 단순해지고 있다. 지출을 보다 정교하게 관리하고, 제한된 자원 안에서 합리적인 소비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소비를 선택하는 ‘경제적 판단의 일상화’가 요구되는 시기다. 앞으로의 여건도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중동 지역의 긴장이 완화되더라도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언제든 공급 리스크가 재부각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을 상수로 만들고, 산업 전반의 체질 변화를 요구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의 위기는 특정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항과 경주, 영천, 구미, 대구를 아우르는 대구·경북 전반이 같은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지역 산업과 경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시기일수록 지역 산업체와 노동자들은 방향을 공유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산업의 지속성과 회복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대응과 협력이 엇박자를 내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도시의 행정 역시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시민의 삶과 지역 기업의 회생을 뒷받침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결국 위기 국면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지역 경제의 향방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김진홍경제에디터

2026-04-12

고유가에 흔들린 탈탄소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탈탄소를 가장 강하게 밀어붙이던 유럽이 지금은 오히려 ‘기름값 낮추기’에 나섰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각국이 앞다퉈 연료세 인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스페인, 폴란드, 이탈리아 등 최소 10개국이 이미 감세를 결정하거나 검토 중이다. 유럽연합(EU)의 휘발유 가격은 ℓ당 1.87유로까지 올라 한 달 새 14% 상승했고, 경유는 30% 급등하며 2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고유가 문제가 아닌 유럽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에너지 충격’에 가깝다. 애초 유럽은 기름값을 낮출 생각이 없던 지역이다. 휘발유 가격 절반이 세금일 정도로, 탄소 감축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격을 높여온 구조였다. 그런 유럽이 지금 그 세금을 다시 깎고 있다. 탈탄소 정책과 민생 안정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기름값이 오르면 물가가 뛰고, 물가 상승은 곧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미 경기 둔화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까지 겹치면 산업과 가계가 동시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꺼내 든 해법이 ‘한시적 감세’다. 시장 가격은 유지하되 세금으로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가격 자체를 억누르는 한국식 보조금 정책과는 결이 다르다. 다만 이 선택이 갖는 의미는 세제 조정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한국, 더 정확히 말하면 포항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포항 철강 산업은 에너지 비용에 가장 민감한 구조다. 전기로와 고로 모두 막대한 전력과 연료를 필요로 한다. 전기요금은 지난 몇 년 간 큰 폭으로 올랐고, 유가와 환율까지 높은 수준으로 흔들리고 있다. 중동 리스크까지 더해지며 부담은 더욱 커졌다. 유가 상승은 연료비는 물론 물류비와 원료비, 전력비까지 연쇄적으로 파급된다. 철강은 이 세 비용이 동시 작용하는 산업이다. 원가가 올라가면 수출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격을 올리면 수요가 줄고,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 수익성이 무너진다. 지금 포항 철강이 마주한 구조적 딜레마다. 유럽이 연료세를 낮추는 이유와 포항이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겹친다. 에너지 가격이 흔들리면 산업 전체가 흔들린다는 점에서다. 문제는 정책 대응의 여지다. 유럽은 세금이라는 완충 장치를 갖고 있다. 상황에 따라 올리고 내리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전기요금, 유류세, 보조금이 얽혀 정책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결국 기업이 비용 상승을 직접 떠안는 구조다. 특히 철강은 가격을 자유롭게 올리기 어려운 산업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수출 품목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즉시 철강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번 사태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환경이나 정책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 산업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유럽은 탈탄소라는 방향을 고수하면서도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상을 포기하지 않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이다. 포항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탄소를 줄이면서도 버틸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결국 답은 하나로 모인다. 탈탄소는 피할 수 없지만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친환경’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친환경’을 요구하고 있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4-05

철강 전환 시대, 도시의 역할

포항국가산업단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7일 ‘포항국가산업단지 산업단지계획 변경’을 고시했다. 기존계획의 변경이지만, 내용이 주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지금까지 포항국가산업단지는 대단위 철강공업 육성과 연관 산업 유치를 통한 중화학 공업단지 조성이 목적이었다면, 이번 변경에는 ‘수소환원제철 설비 도입을 통한 탄소 저감’이라는 문구가 별도로 명기됐다. 산업단지의 존재 이유 자체가 바뀐 것이다. 특히 북측 공유수면 일대에 약 135만㎡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용지가 신규 조성된다. 개발기간도 2041년까지로 연장됐다. 종전과 같은 설비 확장이 아니라, 철강 생산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전제로 한 장기 프로젝트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수소환원제철은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철을 생산한다. 고로 방식이 이산화탄소를 대량 배출하는 것과 달리, 수소환원제철은 물이 생성되기에 탄소 배출량은 거의 제로로 수렴한다. 철강산업이 ‘친환경 산업’으로 전환되는 상징적인 기술이다. 다만 이 기술이 성공하려면 막대한 투자, 대량의 수소 공급망 구축, 전력 인프라 확충, 안전 문제 해결까지 복합적인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한다. 그런데도 세계 각국이 주목하는 것은 이 또한 다른 모습의 ‘경제전쟁’이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중인 여러 전쟁처럼 에너지와 자원은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탄소 규제라는 새로운 세계질서로 인해 철강은 많은 산업 가운데 하나가 아닌 유일무이한 ‘경제안보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이 철강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일본제철의 US스틸 매수에 민감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철은 여전히 자동차, 조선, 건설, 인프라 등 거의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이면서 그 나라 제조업 근원 경쟁력의 뿌리다. 이런 흐름 속에서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 전환은 일개 기업의 투자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를 결정짓는 방향 전환이다. 지금의 고로들은 언젠가는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런 중대한 기로에 선 시점에서, 새로운 생산이나 투자가 이어지지 못하면 포항경제에 미래는 없다. 다행히 이번 국토부 고시로 시작될 전환사업이 안착된다면 포항은 친환경 철강의 중심지로 재도약할 수 있다. 관건은 기술이 아닌 ‘환경’이다. 기업이 투자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시민과 행정이 어떤 환경을 줄 것인지가 문제다. 수소환원제철은 기업 홀로 완성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인허가, 부지 조성, 전력 공급, 규제 정비, 지역 수용성까지 모두 한 방향으로 맞물려 돌아가야만 한다. 이 부분에 포항은 많은 실패를 겪어왔다. 이제 포항에 필요한 것은 군림이 아닌 지원하는 행정이다. 산업 전환기에는 속도가 생명이다. 기업이 계획한 투자와 활동할 길을 조금만 앞서 열어 주면 된다. 포항은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재선, 삼선을 위한 겉모습의 성과에 집착할 것인지, 구조 전환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뒷받침할 것인지. 차기 시장을 꿈꾸는 정치인들 역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만 한다. 행정은 앉아서 통제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기업이 원하는 것을 서서 돕는 ‘플랫폼’이다. 공무원을 ‘퍼블릭 서번트(public servant)’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강이 바뀌고 있다. 당연히 포항도 바뀔 때가 왔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29

철강이 흔들리면 국가가 흔들린다

요즘 포항 철강산업 현장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은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라는 하소연이다. 경기가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기에 사이클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경기 사이클의 일시적 침체가 아니라 아예 결이 다른 위기다. 환율, 유가, 전기요금이 동시에 치솟는 ‘복합 충격’이 철강 산업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이란 공격 이후 원·달러 환율은 급상승하며 결국 1500원 선을 넘었다. 철강 산업은 원자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은 곧바로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국제 유가까지 배럴당 100달러를 넘나들면서 물류비와 에너지 비용 전반이 들썩이고 있다. 이 두 변수만으로도 버거운데,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 부담까지 겹쳤다는 점이 문제다. 이처럼 비용 구조 전반이 동시에 흔들리는 상황은 과거에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철강 산업은 ‘전기를 먹는 산업’이다. 24시간 멈추지 못하는 연속 공정 구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 산업용 전기요금이 급등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4년 사이 70% 넘게 상승한 전기료는 이제 기업이 감내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기업들은 공정 운영 자체를 조정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현장에서는 설비 가동 효율을 최대한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여기서 끝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외부 환경도 만만치 않다. 미국의 관세 장벽은 여전하고, 중국은 공급 과잉 물량에 품질 경쟁력까지 더해 시장에 파고들고 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가격 경쟁이 아닌 구조적 경쟁으로 진화하고 있다. 철강업계가 마주한 위기는 특정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통상 질서와 산업 정책이 얽힌 구조적 문제다. 이쯤에서 꼭 필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본다. “기업의 자구책만으로 이 위기는 극복할 수 있는가.” 현장의 답은 분명하다. 어렵다는 것이다. 철강은 수많은 산업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자동차, 조선, 건설로 이어지는 제조업 가치사슬의 출발점이다. 철강이 흔들리면 전방 산업 전체의 원가 구조까지 흔들린다. 이는 곧 수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국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포항이라는 지방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제조업 전체의 문제로 봐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해법과 방향은 분명하다. 철강을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닌 ‘국가 산업 인프라’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전기요금 체계는 국가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통상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역시 기업에만 맡겨서는 한계가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원’은 당연하지만, 그보다는 ‘속도’다. 철강 산업의 구조와 경쟁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회복에는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 글로벌 철강 시장에서 한 번 밀려나면 제자리를 찾는 데 수년이 걸리거나, 아예 되찾지 못할 수도 있다. 포항의 제철소는 오늘도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불꽃이 계속 타오를 수 있을지는 이제 산업계만의 과제가 아니다. 환율, 유가, 전기요금이라는 세 가지 파도가 동시에 밀려온 지금, 정부가 선제적으로 산업 정책을 마련하고 기업과 함께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도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22

일본의 ‘독신세’ 논쟁을 보며

요즘 일본에서는 이른바 ‘독신세 논란’이 가장 뜨거운 정책 논쟁 가운데 하나다. SNS에서는 “4월부터 독신세가 시작된다”는 말이 퍼졌다. 실제 독신자에게 새로운 세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저출산 대책 재원 마련을 위해 의료보험료에 ‘아동·육아 지원금’을 추가로 얹어 징수하기로 하자 이를 두고 일부에서 ‘독신세’라는 표현을 쓰면서 논쟁이 커졌다. 제도의 구조는 단순하다. 연봉 600만엔 정도의 직장인은 매달 약 600엔가량을 추가 부담하게 된다. 금액 자체는 크지 않지만 문제는 부담 대상과 수혜 방향이 다르다는 데 있다. 자녀가 없든 자녀 양육을 마친 고령층이든 같이 부담한다. 그러나 실제 혜택은 아동수당이나 육아 지원 등 자녀 가구에 집중된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왜 싱글이 육아 비용을 대신 부담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설명은 다르다. 아이와 육아 가정을 사회 전체가 함께 지원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 노동력이며 장차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며 연금과 복지 체계를 떠받치는 세대다. 그럴 경우 무자녀인 사람 역시 결국 그 혜택을 받게 되므로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결국 이번 논쟁의 본질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아이를 누가 키우는가.” 이 질문이다. 일본 정계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은 오래됐다. 2009년 민주당 정권은 “아이를 사회가 함께 키운다”는 철학 아래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하는 아동수당을 도입했다. 반면 당시 야당이던 자민당은 “육아 책임은 기본적으로 가족이 맡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 정책 방향은 바뀌었다. 자민당 정권에서도 유아교육 무상화와 아동수당 확대 같은 정책이 추진됐다. 출산율 하락이 그만큼 심각해진 때문이다. 일본의 출산율은 여전히 하락세다. 2024년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15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정책은 확대되지만 아이는 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최근 ‘육아 페널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그만큼 확산됐다는 의미다. 일본의 ‘독신세 논쟁’은 정책 차원의 갈등을 넘어 사실상 사회계약과 관련된 문제다. 아이를 낳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 사회의 노동력과 납세자가 되고 결국 연금과 사회보장 체계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개인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 전체가 분담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 논쟁은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보다 훨씬 낮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저출산 정책을 지원금 확대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저출산 정책의 핵심은 돈이 아닌 사회적 합의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그 이유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결국 일본의 ‘독신세 논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아이를 키우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아이 없는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15

TK경제, 지금은 전환의 시간

요즘 대구·경북 경제를 두고 “바닥을 찍었다”라는 말이 들린다. 일부 지표는 반등 신호를 보낸다. 아파트 입주전망지수가 개선되고 고용지표도 미세하지만, 회복 흐름을 나타낸다. 겉으로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대구 동성로의 자영업자나 포항의 중소기업 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숫자는 회복을 말하지만, 체감은 침체에 머무는 이 간극 속에서 우리는 사이클을 그리는 경기 변동이 아닌 구조 변화의 초입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대구의 상권 지형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도심 상권은 유동 인구 감소와 온라인 소비 확산이라는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반면 신흥 주거지와 혁신도시 주변 상권은 성장세를 이어간다. 소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기 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경제 지도다. 포항을 중심으로 한 철강 산업 도시의 변화는 더욱더 상징적이다. 포스코의 전환 투자와 친환경 공정 도입이라는 과제는 미래의 경쟁력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지만 반면 현실적인 세계적인 관세장벽, 전기료 부담, K-스틸법의 후속 조치 지연으로 중소 철강업체와 지역 상권의 체감 경기는 가라앉고 있다. 미래의 ‘비전’이 아무리 밝아도 지역 경제는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속도의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 고도화가 지역 전체의 활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과 정책적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주택시장에서도 유사한 신호가 감지된다. 입주전망지수 개선은 미분양 우려의 완화 때문이지만 실수요자의 구매 여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건설·부동산 관련 지역 업체들의 체감 경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시장이 바닥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과거와 같은 급격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인구 구조의 장기적 흐름이 관여하고 있다. 청년층 유출과 고령화로 소비 기반이 약화하는 가운데 산업은 적은 노동력과 더 높은 기술력으로 재편되고 있다. 과거처럼 인구 증가와 생산 확대가 동시에 이뤄지던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지역 경제는 얼마나 성장하느냐보다 어떻게 버티고 재편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다고 비관론에 머물 필요는 없다. 배터리 소재와 미래 철강, 미래 로봇, 첨단 부품 산업 등 대구·경북이 축적해 온 제조 역량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다. 중요한 포인트는 산업 전환의 성과가 지역 경제로 파급되는 통로를 연결하는 데 있다. 지표 반등이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지역 경제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지역 경제의 미래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읽고 준비하는 지역 공동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지역 공동체의 선택은 지역 주민 개개인의 선택이 결정한다. 마침 우리는 그 선택의 마지막 기회를 오는 6월 맞이한다. 이번 선거는 다수결로 우리의 미래를 맡길 정치인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당장 전환기를 맞이한 대구·경북 경제의 지자체별 과제를 누가 가장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에 주목해야 할 때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