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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5·18과 언론의 사명

2017년 1200만 관객을 사로잡았던 영화 ‘택시 운전사’. 이 영화는 한 평범한 택시 기사가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향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총성과 비명이 가득한 1980년 5월 광주의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그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남긴 영상은 광주 민주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증언이 되었고, 그의 업적은 한국 민주화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가 취재한 영상이 전세계에 보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신군부가 조작한 뉴스를 역사의 일부로 착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적 진실은 누군가의 용기와 양심 그리고 사명감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반민주적인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이 온몸으로 저항한 역사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신군부가 통제한 언론은 광주의 시민들을 북에서 온 폭도로 몰았고, 국가 폭력의 잔혹함은 철저히 가려졌다. 언론이 오히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대표적인 사건이며 언론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오점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했고, 때로는 진실보다 이해관계를 앞세웠다는 비판도 일리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리를 유튜버나 정치적 선동가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유튜버의 말을 검증 없이 믿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작금의 유사 언론 현상은 일종의 주술적 신앙에 가까운 모습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불편한 사실을 취재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검증하며,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끝까지 묻는 일이다.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다. 언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산업이 아니다. 사회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사법, 행정에 이은 네 번째 권력기구라고 한다. 언론이 무너지면 시민들은 사실이 아니라 편향된 주관에 따라 판단하게 되고, 민주주의는 토론이 아니라 선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소위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언론의 책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권력과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5·18 민주항쟁 46주년을 맞아 다시 묻는다. 오늘의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힌츠페터의 기자 정신 앞에 존재론적 질문을 반추해보아야 한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서는 것, 침묵이 강요되는 순간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는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5월의 광주가 오늘의 언론에 요구하는 사명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5-21

하회 선유줄불놀이

안동지방에 오랫동안 전승돼온 민속문화 놀이인 하회 선유줄불놀이가 갑자기 유명해졌다. 한일정상 회담차 안동에 온 다카이치 일본 총리를 환영하기 위해 준비한 선유줄불놀이 공연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적 이목을 모은 것. 선유줄불놀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기던 양반층 풍류놀이다. 안동탈춤이 양반의 허세를 풍자하며 서민들이 즐겼던 놀이라면 선비들이 나룻배를 타고 강물 위를 오가며 풍류를 즐기며 놀던 문화다. 7월 밝은 달밤에 선비들이 나룻배 타고 서로 술을 권하며 정담을 나누다가 흥이 생기면 시창도 부르고 청풍명월을 즐기는 이때, 배 위 하늘에서는 줄불로부터 불꽃이 꽃가루처럼 떨어진다. 붉은 불빛이 강줄기에 반사되면서 보이는 주변 경관 또한 장관이다. 선비들은 표주박에 기름 적신 솜을 붙여 띄워 보내고 그것이 정자에 도달할 때까지 시 한수를 지어야 한다. 이를 어기면 벌주가 내려진다. 조선시대 공신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한 뒤 형제들과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했다는 유래를 근거로 줄불놀이가 시작됐다고도 전한다. 선유줄불놀이는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오다 일제강점기에 잠시 중단됐고, 1968년 재현됐다.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이 시작되면서 안동의 대표 공연으로 다시 알려졌다. 반상계층이 서로 다르지만 공존하며 민속문화로 이어져 온 안동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 놀이문화란 점이 돋보인다. 보존가치 또한 높다. 보존회가 전승을 맡고 있지만 인적·경제적 기반 미비로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어쨌거나 선유줄불놀이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한일 정상회담 덕분이다. 안동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잘 정착됐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21

투표할 곳 없는 사람들의 선거

지방선거가 다가오니 뉴스 보기가 괴롭다. 정치적 비전이나 지역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모색돼야 할 자리에서 네거티브와 마타도어, 음해와 흑색선전 만이 판을 치니 피로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나. 본래 자기 콘텐츠가 없는 자들이 남의 흉이나 보며 표를 구(걸)하기 마련이다. 안타까운 건 이런 전략(?)이 꽤 먹히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선거라는 제도로 표현되는 민의에 일정한 왜곡이 동반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계급배반투표라는 개념이 있다. 자기의 계층적 이해와 맞지 않는 투표 성향을 의미한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든, 반대로 자본가가 노동자의 편에 선 후보를 선택하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전자인 노동자의 사례는 무지의 결과로 파악되고, 후자인 자본가의 경우는 지적 성숙의 지표로 여겨진다. 따라서 배반의 주체는 언제나 노동자를 비롯한 하위 주체들만 지목되곤 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가 없진 않겠으나, 그조차 계급에 대한 편향적 이해에 기초해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가치에 투표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을 테니 말이다. 애초 하위 주체가 바로 그 자신의 이해나 욕망을 알고 있거나 혹은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발상이야말로 엘리트적인 사고일 수 있다. 계급적 위치와 계급·사회의식은 투명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그 사이(間)에는 적지 않은 물질적·정서적·이념적 매개 장치들이 작동한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하위 주체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언설들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대의제의 역사란 항상 신분, 계급, 재력 등이 우선적으로 대표성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하여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과두제’에 다름 아니며, 선거는 체제를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선거에 기초한 대의적인 통치 체제로 한정해서 보게 된 것도 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다. 그런 만큼 선거의 한계를 직시할 줄도 알아야 한다. 가령 전통적으로 진보적 의제가 선거제도를 매개로 전체의 의견이라는 외양을 갖추고 재력에 기초한 소수에 의해 어떻게 대표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시 의문이 있었다. 따라서 그 정치적 불가능성을 마주하며 차라리 셈해지지 않거나 대의되지 못하는 민의의 여분을 포착하는 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와 선거의 간극을 살피는 여전히 유효한 착목 지점이다. 여론만으로 민주주의에 접근하면 셈해지지 못한 민의를 상실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의사가 대의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당장 사회적·성적 소수자들의 권리를 대변해 줄 정당이 너무 부족하거나 힘에 부치고 있는 것 아닌가. 차별금지법을 관철시키지 못하는 거대 양당의 행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당위를 구실로 실은 그런 합의를 이끌어 낼 만한 별다른 대책 없이 언제까지 도망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거를 앞두고 투표할 만한 곳이 없는 사람들의 사정에도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봤으면 좋겠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5-21

부처님오신날

대한불교조계종은 2026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표어를 ‘마음은 평안으로, 세상은 화합으로’로 정했다고 발표했다. 중생구제를 위해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을 찬탄하며 상생과 화합의 기운이 넘치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해 마음의 평안과 세상의 평화와 화합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고 전한다. 이날을 ‘석가탄신일(釋迦誕辰日)’, ‘초파일(初八日)’이라고 아직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정식 명칭은 ’부처님오신날‘이고 대한민국의 법정 기념일이자 법정 공휴일이다. 명칭은 달라져도 이날의 의미는 하나다. 인류에게 깨달음의 길을 보여준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사찰에서는 탄생하신 부처님을 물로 씻기는 욕불(浴佛), 혹은 관불(灌佛)이라는 의례를 행한다. 이날은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자비와 지혜를 되새기며 자신을 돌아보는 날이다. 불교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종교이고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고 누구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큰 가르침에 작은 용어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누군가 묻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이후에 나오는 말이 ‘일체개고 아당안지(一切皆苦 我當安之)’ 인지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인지 헷갈린단다.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AI‘에게 물어보았더니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삼계가 모두 고통이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하게 하리라)가 모든 의식문에서 발견되고 있어 정론으로 보이고 후대에 ‘일체개고 아당안지(一切皆苦 我當安之· 온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내가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가 나왔다고 한다. 요즘은 ’AI‘에게 묻는 것이 대세라 ’AI‘가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믿어야 한다. 이 또한 불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말조차 생소할 뿐 관심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명확하게 종단에서 정해주면 어떨까? 부처님오신날에는 등을 단다. 이것을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등(燈)을 밝힌다(燃)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 곳에선 연등을 49재나 천도재에서 사용되는 영가등(靈駕燈)이라고 부르고 있고 심지어 연꽃에 불을 켜서 세상을 밝힌다면서 蓮燈(연등)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또한 종단에서 명확한 용어를 지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신자가 줄어든다고 한탄만 할 일이 아니다. 절 세 곳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이날 108배를 하면 업장이 소멸한다. 좋은 날 탑을 특정 횟수 돌면 복을 받는다. 삼재풀이를 해야 집안에 우환이 없다. 이런 말들이 신앙의 동기를 제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교의 핵심은 아니다. 부처님은 복을 거래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고통의 원인을 스스로 보고, 탐진치를 줄이며, 자비와 지혜를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종교를 떠나는 이유는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관행에서 설득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교가 다시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려운 말을 늘어놓기보다, 삶 속에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분명하게 전해야 한다고 본다. 젊은이들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려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노병철 수필가

2026-05-21

밤하늘은 우주의 역사책이다

늦은 밤,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시의 불빛이 조금만 덜한 곳으로 가면, 밤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별빛은 고요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시간의 흔적이다. 천문학자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밤하늘은 사실 우주의 역사책이야.’ 얼른 와닿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는 한동안 멍해졌다. 별빛은 ‘지금’ 모습이 아니라는 것. 빛이 엄청 빠르다지만, 우주 앞에서는 그조차 한없이 느리다. 태양 빛도 지구까지 오는 데에는 8분이 걸린다. 밤하늘의 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다. 더 먼 은하의 빛은 수백만 년, 수억 년을 날아와 우리 눈에 닿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보고 있는 셈이다. 저 별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폭발했거나 사라졌는데, 마지막 빛이 아직 우주를 건너오는 중인 게다. 이제는 없는 별을 올려다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기묘하다. 인간은 늘 현재 속에 산다고 믿지만, 결국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 위에 서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젊은 날의 상처, 누군가의 친절, 오래전 들었던 말 한 마디가 우리 안에서 아직도 빛처럼 살아 도착하고 있다.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긴 말과 온기가 한참 뒤까지 누군가의 삶 속에 살아남지 않는가. 별빛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남기고 사는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돈이나 명함이나 지위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한 인간이 남긴 마음의 흔적은 의외로 오래 간다. 누군가를 위로했던 말, 손을 잡아 주었던 순간, 정직하게 살아내려 했던 태도는 먼 우주의 별빛처럼 오래 남아 다른 사람의 가슴에 오래오래 도착한다. 우주를 생각할수록 인간 세상이 조금 우습다. 끝도 없이 넓은 우주 속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작은 지구 위에서 인간들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속이고 전쟁까지 벌인다. 권력을 두고 다투고,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짓밟는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우리네 한평생은 잠깐 번쩍였다 사라지는 찰나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낸다. 우리는 ‘지방선거’를 건너고 있다. 곧 거리마다 현수막이 걸리고, 후보들은 자신을 외치며, 유권자들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과정 가운데 너무 쉽게 흥분하고 너무 쉽게 미워한다. 상대를 향한 조롱과 비난이 넘치고, 눈앞의 유불리만 계산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면 어떨까. 수억 년 시간을 품은 ‘우주의 역사책’ 앞에서, 인간의 권력과 욕망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자리와 이름이 영원할 것처럼 다투지만, 모두 한순간을 스쳐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도, 곁에서 돕는 이들도, 이제 곧 한 표를 행사할 유권자들도 조금 더 넓게 또 길게 보고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진지한 선거가 되었으면 한다. 우주의 역사책 앞에 겸허해야 한다. 밤하늘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리 거대한 존재가 아니야.’ 오늘 밤도 별들은 소리 없이 빛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5-20

감정보다 정동

지난 5월 8일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정치인 세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순직 공무원 부모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연설하다가, 정청래 대표는 ‘노상원 수첩’에 기재된 연평도 수용소 현장 검증을 거론하며 분노하다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헌법개정안 상정에 국민의힘이 강하게 반대하자 그들을 비난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같은 눈물을 보고도 사람들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누군가는 그 눈물에 공감했고, 누군가는 ‘정치적 연출’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뒤에 어떤 판단이나 해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들의 눈물에 공감하기도 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은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화론적으로 보아도 감정은 생각을 뒷받침한다. 맥스 베넷은 ‘지능의 기원’에서 감정은 생존을 위한 방향 감각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약 6억 년 전 좌우대칭동물이 등장하면서 지능이 발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은 ‘좋음’으로, 불리한 것은 ‘나쁨’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회피할지를 빠르게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방향을 정하는 것은 생각이고, 그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감정인 셈이다. 문제는 자극에 대한 판단이 내 생존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감정은 모두 진실한 것이라 착각하며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러나 한번 자리잡은 감정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어떤 뉴스를 보고 감정에 압도되어 거칠고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다가 지운 적이 여러 번 있다. 물론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은 흔적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내 생각과 다른 오피니언 리더의 견해를 보거나 인플루언서의 행태를 보다가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는 데도 분노에 쉽게 끌려들어갈 때가 많다. 다만,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동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정동이란 어떤 자극에 대해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몸의 동요 상태이다. 화병 같은 예만 보아도 우리는 어떤 강한 부정적인 자극이 오면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것이 정동이다. 자신의 정동을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면, 감정에 휩쓸릴 가능성도 줄어든다. 5월 8일, 세 정치인의 몸에는 어떤 정동이 일어났을까. 이들의 눈물에 공감하는 사람의 몸에는, 그리고 이들의 눈물을 비난하는 사람의 몸에는 어떤 정동이 일어났을까.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그때 나의 정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자신의 정동을 조금이라도 더 잘 관찰할 수 있다면, 강한 감정에 휩싸일 가능성도 줄고, 반목과 갈등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요즘처럼 감정이 정치가 되는 시대일수록, 자신의 정동을 관찰하는 능력은 정치인은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중요한 교양이 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20

숨이 차지 않은데도 답답한 이유

폐도 정상이고 심장도 큰 이상이 없고 산소포화도도 정상인데 가슴은 계속 답답하다. 숨이 끝까지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 들고 자꾸 한숨을 쉬거나 하품을 하게 된다. 가슴이 꽉 막힌 느낌 때문에 불안하고 심한 경우에는 공황장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폐의 문제라기보다는 몸 전체의 긴장 패턴이 무너져 있는 경우가 많다.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앉아서 생활하는데 목은 앞으로 빠지고 어깨는 안으로 말리며 등이 굽는다. 이 자세가 오래 지속되면 갈비뼈 움직임이 줄어들고 흉곽 자체가 굳어버린다. 원래 숨을 들이마실 때는 갈비뼈가 부드럽게 벌어지고 횡격막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데 안 좋은 자세로 흉추와 늑골이 굳어 있으면 이 움직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결국 숨을 쉬어도 폐 윗부분만 얕게 쓰게 되고 숨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목과 어깨가 굳어 있다. 목 옆에 있는 사각근은 흉추 1, 2번에 붙어 호흡 보조근 역할을 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이 근육이 과도하게 굳어버린다. 그러면 숨을 쉴 때마다 목으로 억지로 호흡하는 패턴이 만들어진다. 숨이 답답한 환자들을 보면 목과 어깨가 돌처럼 굳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자율신경 실조시 이런 증상이 생기는데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교감신경이 과하게 항진되고 몸은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심장이 빨리 뛰고 근육이 굳으며 호흡도 얕고 빠르게 변한다. 문제는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몸이 정상적인 호흡 패턴 자체를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숨을 충분히 쉬지 못하니 몸은 더 불안해지고 불안해질수록 호흡은 더 짧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의원에서 진료를 하다 보면 이런 환자들은 단순히 호흡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두통, 어지럼증, 가슴 두근거림, 소화불량, 만성피로, 불면증 등의 화병 증상을 함께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몸 전체의 긴장과 자율신경 균형이 함께 무너져 있는 것이다. 치료는 단순히 가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구조를 같이 봐야 한다. 굽은 흉추와 말린 어깨를 교정하고 경추와 갈비뼈 움직임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추나 치료로 굳어 있는 척추와 흉곽의 움직임을 회복시키고 긴장된 목과 어깨 근육을 풀어주면 호흡이 훨씬 편해지는 경우가 많다. 초음파를 이용해 목 주변의 긴장된 근육과 흉추의 자율신경을 정확하게 자극하면 환자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다. 이와 함께 화를 내릴 수 있는 약재들로 구성된 한약을 같이 복용하면 더 빨리 호전 반응이 일어난다. 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자세를 줄이고 중간중간 가슴을 펴주는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좋다. 숨을 억지로 크게 쉬려고 하기보다는 배가 천천히 움직이는 복식호흡을 연습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잠을 잘 자지 못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사람들은 몸의 긴장을 낮추는 것이 우선이다. 몸이 편안해져야 호흡도 편안해진다. 목, 갈비뼈, 척추, 횡격막, 자율신경이 모두 함께 움직여야 편안한 호흡이 만들어진다. 검사상 큰 이상이 없는데도 계속 숨이 답답하다면 단순한 폐 질환이 아니라 몸 전체의 긴장과 균형 문제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5-20

길등재에서

남자는 울지 않는 법이다 개똥 밟은 듯 쓱쓱 문대고 힘차게 나가야 한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혼자 멀리 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이 완성이 된다 동행은 없다, 둘은 태초부터 귀찮았다 너는 포항으로 가고 나는 감포로 간다 망해산에 올라서는 길등재를 잊고 하산하여 길등재에서는 망해산을 잊는다 바람이 따귀를 때리며 사랑은 그런 것이라 한다 너는 도시로 가고 나는 다시 산으로 간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축복과 저주를 하며, 사랑에 강약(强弱)이 있을 수 없지만 남자는 슬쩍 흐려지는 그런 눈물, 흘리지 않는 법이다. ……. 길등재는 포항 정천리에서 장기면으로 가는 관문 격의 고개로, 정상 부근에서 주차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산행을 시작하면 쉽게 오래 산등성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출발부터 먹고 들어간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대체로 선호한다. 생색도 내고 실리도 챙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살이나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럴 수 없다. 과정은 생략되지 않는다. 오래 걷고 길게 울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길등재 뿐일까. 삶은 교묘한 장치로 장식되어 있다. 결국, 나의 좌표를 확인하고 목적지를 설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그렇다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오직 사람! /이우근 시인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5-20

어떤 사투리, 세 키

휴대폰 카톡방에 문자 하나가 올라왔다. 수필 동인 중 한 분이 ‘키’라는 단어가 포항사투리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식당에 갔을 때 직원이, “몇 명이세요?”라고 물어봐서 “세 키요.”라고 대답했는데 상대가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외계인 취급하더라는 이야기였다. 우리 지역에서만 사용하는 언어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질문한 선생님은 포항 토박이였다. 그는 평소에도 무심코 쓰는 말이라고 덧붙였다. 순간 카톡방 사람들은 모두 익숙한 듯 낯선 말을 붙들고 각자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단어 하나가 추억 매개체가 되었다. 카톡방 사람들 대부분이 경상도 출신이었기에 사투리에 얽힌 저마다의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누군가는 본인도 ‘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 듣는다며 웃었다. 나도 궁금해서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경상도 특히 경북 지역에서 주로 사용했던 말이란다. 예전부터 곡식의 양을 세는 단위를 ‘키’라고 했다. 예를 들어 볏단 한 키, 두 키, 하던 개념이 사람의 묶음 단위로 확장되어 사람 수를 세는 말로 이어졌다는 설명도 있었다. 읽는 순간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렇구나. 곡식의 단을 묶는 단위가 사람에게 옮겨 붙은 것이었구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들판에서 볏단을 세듯 사람도 그렇게 세었던 것이다. 농경문화가 언어와 연결된 대표적인 경우였다. 생각해 보면 참 정겨운 말이었다. ‘세 명’이라 하면 그냥 숫자지만 ‘세 키’라고 하면 왠지 볏단처럼 단단히 묶인 사람들의 무게가 느껴졌다. 밥을 먹으러 온 세 사람이 마치 하나의 단으로 묶여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논과 밭에서 쓰였던 말들이 하나둘 연상되었다. 내 어린 시절 외갓집 마을 경치도 마음속에 한꺼번에 번져왔다. 논두렁 끝에서 어른들이 새참을 먹으라고 이웃을 불렀던 소리, 담장 너머 옆집 할머니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말했던 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키요.” “세 키 왔심더.” 그때는 그 말이 특별한 줄 몰랐다. 사람 수를 세는 말 속에 볏짚 냄새와 들판의 바람이 함께 들어 있었다는 것도. 도시는 숫자로 사람을 세지만 옛말은 사람을 ‘묶음’으로 기억했던 것 같다. ‘한 키’라는 말 속에는 낱낱이 흩어진 개인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사는 우리네 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세 명’보다 ‘세 키’가 더 따뜻하게 들린다. 한 덩이 볏단처럼 함께 밥을 먹으러 온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진다. ‘키’라는 사투리 덕분에 나는 오래된 단어 하나를 다시 주워든다. 사라져 가는 사투리 하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오래 묻어 있는 말 한 조각. 언어는 흘러간다. 어떤 말은 남고 어떤 말은 사라진다. “세 키요.”처럼 농경의 냄새를 품은 말은 도시의 문법 속에서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 어쩌면 우리는 언어 속에 담긴 지역 생활의 풍경과 유대감을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때때로 사투리를 붙들고 싶다.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이 가득 담긴 그 말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사투리에는 지역 사람들의 숨결과 공동체적인 삶의 온도가 함께 스며들어 있기에. /정미영 수필가

2026-05-20

산업전환의 시대, 시민이 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며칠 전, 5월 16일. 정부는 ‘기후시민회의’ 공식 발대식을 열고 국가 단위 상설 기후 공론장의 출범을 선언했다. 이는 지난 3월 국회를 통과한 탄소중립기본법 개정안에 근거한 것으로, 시민이 기후정책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정책 형성의 주체로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변화는 단순히 행정기구 하나가 생긴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니다. 폭염과 산불, 집중호우와 해수면 상승은 이미 우리의 삶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기후위기의 본질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과 에너지, 경제와 지역의 구조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누가 그 변화를 결정할 것인가”라는 민주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의 기후정책은 정부와 전문가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다. 물론 전문성은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이 배제된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송전망 하나를 어디에 설치할 것인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어느 지역에 둘 것인지, 산업 전환의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지는 결국 시민의 삶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세계는 ‘기후민주주의’라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프랑스의 기후시민의회, 덴마크의 시민숙의 모델, 독일과 아일랜드의 시민참여형 기후 거버넌스는 모두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기후위기 시대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기후시민회의 역시 바로 그 흐름 속에 있다. 특히 이번 기후시민회의의 핵심은 ‘상설화’에 있다. 기존의 공론화위원회나 일회성 숙의조사는 특정 사안을 다룬 뒤 해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기후시민회의는 국가 단위의 상설 시민 공론장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정부가 정책을 만들고 시민은 따라가는 시대에서, 시민이 정책의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는 시대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특히 한국의 산업과 에너지를 이끌어왔던 포항과 경북에서 더욱 중요하다. 포항은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중심이다. 동시에 앞으로 수소환원제철과 청정수소 산업, 대규모 전력 인프라 구축이 집중될 지역이기도 하다. 경북 동해안 역시 해상풍력과 송전망, 에너지 전환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이 거대한 전환이 중앙정부와 대기업 중심으로만 추진될 경우, 지역은 ‘희생의 공간’이 될 위험이 크다. 송전망은 지역을 지나가고, 발전 설비는 지역에 들어서며, 산업 구조조정의 충격 역시 지역 주민이 먼저 감당하게 된다. 그런데 결정 과정에서 시민이 배제된다면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포항과 경북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다. 바로 기후민주주의다. 그리고 이 기후민주주의의 핵심은 참여, 숙의, 신뢰.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첫째는 주민참여형 에너지 구조다. 재생에너지와 수소 인프라는 더 이상 중앙집중형 구조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태양광과 풍력, ESS(에너지저장장치), 그리고 지역 안에서 전기를 직접 생산·저장·공급하는 소규모 전력망인 마이크로그리드는 지역 주민의 삶과 직접 연결된다. 그런데 주민이 부담만 지고 이익에서 배제된다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주민이 사업에 참여하고 수익을 공유하며, 그 결과가 지역 복지와 인프라 개선으로 이어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에너지 전환은 갈등의 대상이 아니라 지역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포항과 경북은 바로 이 모델을 실험할 수 있는 지역이다. 영덕과 울진의 풍력, 포항의 수소 산업, 농촌형 태양광과 지역 ESS를 주민참여형 구조로 연결한다면 지역은 단순한 에너지 공급지가 아니라 에너지 민주주의의 주체가 될 수 있다. 핵심은 분명하다. 에너지는 단순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의 문제라는 점이다. 둘째는 지역형 기후시민회의의 제도화다. 기후정책은 매우 복잡하다. 전기요금과 탄소가격, 철강산업 전환과 원전, 수소경제와 재생에너지, 지역 개발과 환경 문제가 서로 얽혀 있다. 이런 문제를 단순한 찬반 논리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숙의 민주주의다. 기후시민회의는 시민이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으며, 서로 토론한 뒤 정책 방향에 대한 의견을 모으는 구조다. 시민은 단순한 여론조사의 대상이 아니라 정책 형성의 참여자가 된다. 포항과 경북은 발빠르게 ‘지역형 기후시민회의’를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 즉, 수소환원제철 전환, 송전망 확대, 해상풍력 입지, 산업단지 전환 문제를 시민들이 직접 토론하고 숙의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사회적 합의 없는 전환은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후정책은 정권 하나로 끝나는 정책이 아니다. 10년, 2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시민이 정책의 필요성과 비용을 이해하고, 스스로 선택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숙의 없는 전환은 결국 불신을 낳는다. 셋째는 정보 공개와 데이터 투명성이다. 기후정책은 신뢰 위에서만 작동한다. 시민이 정부 자료를 믿지 못하고, 기업 설명을 신뢰하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지속되기 어렵다. 포항과 경북에서 추진될 전력망 계획, 수소 인프라 구축, 산업단지 전환, 탄소배출 감축 계획 역시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단순한 형식적 공청회로는 부족하다. 시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법론을 찾아야 하고 비용과 이익, 위험과 효과가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정보가 부족하면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소문을 만들고, 소문은 갈등을 키운다. 반대로 정보가 공개되고 시민이 충분히 이해하면 정책은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포항과 경북은 지금 거대한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 수소환원제철과 재생에너지, 수소경제와 산업 구조 전환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의 삶과 민주주의의 문제다. 이 전환이 성공하려면 중앙정부와 기업의 계획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역 사회의 참여와 동의, 그리고 시민의 신뢰가 반드시 필요하다. 결국 기후민주주의는 거창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지역 주민이 자신의 삶과 연결된 문제를 이해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며,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지는 아주 현실적인 민주주의다. 기후전환은 기술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전환을 끝까지 지속시키는 힘은 민주주의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는 지금, 포항과 경북의 지역 공동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5-20

대통령의 노여움

“대한민국 공동체와 기본적 인권, 민주의 가치를 부정하는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일인 지난 18일. 이재명 대통령은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대통령은 SNS를 통해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희생자들과 시민의 피어린 투쟁을 모독하는 이벤트를 벌이다니”라며 스타벅스 코리아를 질타했다. 해당 업체가 어떤 행위를 했기에 대통령이 이처럼 분노한 것일까? 스타벅스 코리아는 15일부터 오는 26일까지 텀블러 프로모션 이벤트를 진행하며 ‘탱크 데이’ ‘책상에 탁’ 등의 문구를 썼다. 상식을 가진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표현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과 1987년 국가기관의 고문에 의해 숨진 대학생 박종철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겼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몰상식한 행사가 아닐 수 없다. 그랬기에 이 대통령은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이 대체 몇이고, 그로 인한 정의와 역사의 훼손이 얼마나 엄혹한데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라 물으며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행정적, 법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 경고했다. 스타벅스 코리아측은 부랴부랴 문제가 된 이벤트를 멈추고 손정현 대표이사 명의로 사과했다. 하지만, 대통령만이 아닌 국민들의 실망과 지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은 우주 전체보다 귀한 것”이라 노래한 바 있다. 인간의 생명이 국가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사라진 역사적 사건을 상술로 이용했던 스타벅스 코리아는 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야 마땅하다. 그게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20

아카시아 줄넘기

요즘은 어딜 가도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와 어깨 위로 새하얀 꽃잎이 떨어지고 미처 안착하지 못한 꽃잎들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점점이 수놓는다. 나는 꽃향기는 좋아하지만 꽃의 종류나 이름을 구별하는 일엔 영 재능이 없어서, 누군가 떨어진 꽃잎을 가리키며 “이게 아카시아야.”라고 말한 후에야 이게 아카시아구나, 했다. 요즘처럼 바닥을 가득 채운 아카시아 꽃잎을 볼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2년 전에 지금의 동네로 이사 왔다. 나의 집을 꾸린다는 설렘도 분명 있었지만, 평생을 가족과 함께 살았기에 그곳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불안과 공포가 더욱 컸다. “내 인생은 내 거”라는 말을 습관처럼 읊조리고 다녔던 게 조금 후회될 정도로. 집을 보고, 계약금을 넣고, 이삿짐을 싸는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사 온 지역은 본가에서 역 하나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매우 가까웠지만, 살면서 처음 와 보는 동네이기도 했다. 늘 익숙한 곳에 가서 익숙한 음식만 먹는 나였으므로 이토록 가까운 곳임에도 불구하고 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폭풍 같던 이사 당일이 지나고, 나는 반쯤 정리된 짐들 사이를 헤집고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밤새 정리와 청소에 시달렸더니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고 가슴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동네도 둘러보고 괜찮은 카페를 발견하면 커피라도 한잔 마실 요량으로 밖으로 나갔다. 동네는 한적했다. 눈에 띄는 음식점은 없었지만, 퍽 분위기 있는 카페가 몇 군데 있었다. 게다가 집 맞은편엔 큰 공원이 있어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집 근처 골목에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할머니들이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배경 삼아, 편의점 의자를 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할머니 서너 명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속닥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자리한 골목은 해가 비치지 않아 시원했다. 나는 괜스레 걸음을 늦추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게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곳, 모두가 자기의 목소리를 소리 높여 내지 않는 곳이구나.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골목을 지나쳤다. 차분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작은 카페에서 산 커피를 손에 든 채 나는 탐색을 이어갔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은 동네라 그런지, 골목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전부 노인이었다. 집에 돌아가 산더미처럼 쌓인 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짓누를 때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무언가를 잃고 배회하는 소설 속 인물처럼, 나는 생각과 계획 없이 동네를 돌아다녔다. 카페 몇 군데를 더 지났을 때 “이렇게 하라니까?” 하고 외치는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려온 골목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머리를 높이 묶은 여자아이 한 명과, 그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남자아이 한 명이 마주 보고 선 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골목을 지나야만 하는 사람처럼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면 슬쩍 만류할 심산이었다. “아이, 답답하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팔목을 꽉 잡았다. 자세히 보니, 여자아이의 한 손에 줄넘기가 들려 있었다. 나는 얼음이 거의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들이켜며 천천히 걸었다. 그때였다. “자, 내가 하는 거 잘 봐.” 남자아이의 팔목을 놓은 여자아이가 줄넘기를 돌리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눈 깜빡할 새에 골목 끝까지 다다라 있었다. “쉽지? 이렇게 하면 돼!” 여자아이가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외쳤다. 손에 쥔 줄넘기를 만지작거리던 남자아이가 이내 결심한 듯, 줄넘기를 돌리며 뛰기 시작했다. 남자아이가 줄을 돌릴 때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아카시아 꽃잎들이 튀어 오르듯 휘날렸다. 내가 꽃잎에 정신이 팔린 사이 남자아이는 열심히 줄을 돌리며 달려간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곁에 서 있었다. “봐봐, 할 수 있잖아!” 여자아이가 씩씩하게 말하며 남자아이를 끌어안았다. “못할 줄 알았지? 그런데 같이하면 다 돼!” 여자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쯤, 동거인 Y가 전화를 걸어왔다. Y는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없었다며, 어디 있는 거냐고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거의 다 왔다고 대답했다. 집에 가서 같이 정리를 하고, 밥을 먹고, 앞으로의 삶을 잘 꾸려가 보자고 이야기하자 Y가 작게 웃었다. “물론이지.” /양수빈 (소설가)

2026-05-20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모두에게

최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챙겨보기 시작한 드라마가 있다. 제목은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OTT에 보일 때마다 뭐 저런 제목이 다 있을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감명깊게 봤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대본을 집필한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었다. 워낙 문학적인 작품들을 써 온 작가라는 것을 알기에 그 독특한 제목을 여러 번 곱씹게 되었다. 소리 내어 발음을 해볼수록 절묘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 속 인물은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고 스스로 무가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문제로 항상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직업은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드는 일이다. 때때로 나태해지기도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직업으로 여기고 산 십 수 년을 돌이켜보면 나름 치열하게 이 일을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편으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나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단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 해내기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뭔가 업적을 남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피어났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남루하지 않은 옷을 입고 맛집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며 남들 보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때에도 그런 종류의 욕망과 조급함에 머리를 싸매곤 했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는 게 조금 힘들다. 자꾸만 스치는 수치심 때문이다.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인물의 모습이 마냥 남 일 같지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행패를 부리는 장면 가운데 어느 시절의 내가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도 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분노를 품었고, 지금도 가끔 마음속에서나마 그렇게 못나게 굴기도 한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나보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가치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나아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거나 그 안의 모든 이들의 삶을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이들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야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 정도로까지 위대한 삶을 살다 가는 것은 아니다. 그냥 하루하루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소박하게 살다 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다. 방식과 정도는 모두 다르지만 조금씩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사정으로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가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경계는 어디에 그어야 하는가? 더 나아가 우리 모두 가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위대한 인간도, 아무 것도 안 하던 어느 시절의 나 같은 인간도 그냥 지구를 뒤덮은 수많은 생물 중에 하나일 뿐이다. 다른 종의 생물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현재까지 발명되지 않았지만 만약에 그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을 수 있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상상해본다. 아마도 무슨 그런 질문이 다 있냐고 되물을 것 같다. 모든 생물에게 생존은 무엇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그 자체로 목적이다. 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는 있어도 무엇을 위해 사는 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인간의 최종 목적도 생존인 것이고, 살아있는 모두가 매일매일 그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와 더불어 어떤 가치까지 창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목표를 초과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은 것이지,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누군가가 직업을 갖고 살아간다면 어떤 식으로건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것을 직업이라 부를 수는 없다. 직업이 없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사랑의 대상이 된다면 그 또한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다. 딱히 사랑을 주고받는 이가 한 명도 떠오르지 않더라도 괜찮다. 편의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는 행위도, 집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행위도 누군가에게 일거리를 주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가는 삶도 크고 작고를 떠나 가치가 있는 삶이다. 그 모든 것에 하나도 해당이 안되고 도저히 그런 가치는 내게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해도 괜찮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있음 그 자체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울 필요는 없다. /강백수 (시인)

2026-05-20

‘살얼음판 승부’ 펼쳐지는 대구시장 선거

6·3 지방선거 최대 승부처로 꼽히는 대구시장 선거 열기가 더해가고 있다. 민주당 김부겸 후보와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는 사전선거일(29~30일)이 다가오자 각각 ‘여당 프리미엄’과 ‘보수결집’에 화력을 집중시키면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민주당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한 김 후보는 ‘중앙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현 시점에서 대구에 필요한 시장은 중앙정부와 싸우는 시장이 아니라, 중앙정부를 움직여 돈과 권한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전략에 가장 부합하는 공약이 대구·경북(TK) 신공항 건설을 위한 국비 지원이다. K2 군공항 이전에 대한 국비지원은 국회의 특별법 개정과 정부의 예산편성이 전제돼야 하므로 김 후보로서는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특히 신공항 건설은 TK지역 최대현안이기 때문에 지역 민심을 흔들 수 있는 카드다.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TK신공항 예정부지가 있는 군위군을 직접 방문한 것도 야당에선 김 후보의 선거전략과 무관치 않다고 보고 있다. 경제관료 출신인 국민의힘 추 후보는 쇠퇴해가는 대구경제를 완전히 개조하겠다는 것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기획재정부 1차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 출신이고, 대구 달성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와 예결특위 위원도 역임한 경험이 있어 경제정책에 대한 이해도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추 후보는 특히 보수 정서를 대변하는 대구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에 보수세력이 총결집해 ‘줄 투표’를 할 경우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줄 투표는 유권자가 시장, 구청장·군수, 광역·기초의원 선거 모두 같은 당 후보에게 투표하는 현상을 말한다. 추 후보도 최근 “대구시장 선거는 후보 혼자 하는 선거가 아니라 국회의원과 구청장·군수 후보, 광역·기초의원 후보까지 하나로 뭉쳐서 치르기 때문에 경쟁력이 무궁무진할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가 19일 발표한 대구시장 지지도 조사(16~17일 대구시민 800명 전화 면접,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를 보면 김부겸 후보 40%, 추경호 후보 38%였다. 오차범위(±3.5%p)내 초접전 양상이다. 당선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는 추 후보(42%)가 김 후보(38%)를 앞섰다. 향후 주목되는 것은 후보 지지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다. 우선 19·20일 양일간 안동에서 열리고 있는 한일 정상회담이 TK지역 민심에 얼마만큼의 변수로 작용할지가 관심사다. 민주당에서는 국가 외교행사를 선거와 연결해 해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지만, 국민의힘에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장동혁 대표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여는 것은 전형적인 선거용”이라고 비판했다. 이제 13일 남은 선거운동 기간 후보 간 TV토론회(22일 오후 6시 TBC대구방송, 26일 밤 11시 대구MBC)나 캠페인을 통해 누가 유권자에게 신뢰감을 더 얻느냐도 승부를 가를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5-19

선출되지 않은 선출직

선거구에 등록한 후보자의 수가 선출할 의원의 정수와 같거나 적어서 투표하지 않고, 투표 당일 후보자가 자동 당선되는 것을 무투표 당선자라 한다. 유권자의 투표 없이 당선되는 선출직이라는 뜻에서 “선출되지 않은 선출직”이란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6·3 지방선거 후보자 가운데 513명이 무투표 당선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기초단체장 3명과 광역·기초단체 의회의원 510명 등이다. 대구 6명, 경북 37명이다. 직전 선거인 2022년 지방선거 당시 509명보다 숫적으로 많고 역대 최다 인원이라 한다. 평균 경쟁률은 1.8대 1로 2022년과 같다. 무투표 당선은 경쟁을 통해 민의의 대변자를 뽑는 민주주의 본질과 상충되기에 여러 문제점이 발생한다. 유권자가 후보자의 정견과 자질을 비교해 선택해야 하나 선택 기회가 상실된다는 점에서 ‘주권재민’이라는 원칙이 훼손된다. 또 무투표 당선자는 선거공보물 발송이나 합동토론회 등의 공식적인 선거운동 절차가 생략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결격사유가 있거나 자질이 부족한 후보가 아무런 검증 없이 공직에 입문하는 문제도 있다. 대체적으로 특정 정당의 지지세가 압도적으로 높은 지역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영남이나 호남이 그렇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대구와 전북, 광주 등이었다. 지역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무투표 당선자가 많이 나오면 견제와 감시기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유권자의 정치적 무관심도 커진다. 6·3 지방선거 후보자의 30%가 넘는 사람이 전과자라고 한다. 우리의 지방선거제도 이대로 둬도 괜찮을까.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9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 조성을 제안하다(상)

대한민국 제조업의 중심지였던 경북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통계 자료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제조업 비중, 즉 전국 제조업에서 경북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 12.5%를 정점으로 2010년 11.1%, 2016년 9.8%, 2022년 7.79%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주력산업의 국내외 이전, 판교·용인 등 수도권으로의 신산업 집중화가 주요 원인이다. 이는 단순한 경기 변동이 아니라, 경북 제조업이 외부 환경 변화에 취약한 구조적·추세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 방식의 산업정책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장전략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해법으로 나는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 조성을 제안한다. 기존의 산업벨트가 산업단지와 도로망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에 머물렀다면,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는 산업단지, 비즈니스 기능, 교통망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광역 산업혁신 전략이다. 이를 통해 기존 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고부가가치 신산업을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는 도시별 생산 기능과 연구개발 기능을 연계하고, 사업화·금융·데이터 플랫폼 등 비즈니스 기능을 융합하며, 도시 간 물류와 인적 교류를 순환 교통망으로 연결하는 전국 최초의 경북형 광역 산업혁신 생태계다. 경북산업비즈니스벨트가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산업 이동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산업은 속성상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철새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듯, 산업도 기술, 시장, 인재, 비용, 이윤을 따라 이동한다. 제조업과 함께 성장했던 도시가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미국 피츠버그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때 피츠버그는 미국 산업화의 심장이었고, 철강은 도시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산업구조 변화 속에서 철강산업의 중심은 일본으로, 다시 한국과 중국으로 이동했다. 제조 기반이 흔들리면서 피츠버그는 한때 미국에서 쇠락한 공업도시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피츠버그는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 않았다. 과감한 산업 전환에 나섰다. 카네기멜론대학과 지역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컴퓨터, 로봇, 바이오, 첨단 의료산업을 육성했고, 연구개발과 창업 중심 도시로 체질을 바꾸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피츠버그의 전환이 도시 하나의 노력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주정부는 피츠버그를 제조업 부활과 신산업 전환의 핵심 거점으로 설정하고, 주변 도시와 생산, 물류, 소재, 에너지 기능을 연계하는 분업형 광역경제권 전략을 추진했다. 산업 르네상스를 위해 도시 하나가 아니라 주 전체를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 결과 피츠버그는 연구개발, 로봇, 의료, 교육, 창업이 결합된 혁신도시로 바뀌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개최지로 피츠버그를 선택한 것도 이러한 도시 전환의 상징적 장면이었다. 새로운 전략과 이를 실행하는 정치적 능력이 도시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심학봉 전 국회의원

2026-05-19

기업과 인권경영

‘인권경영은 기업복지가 아니라 경쟁력이다.’ 과거 기업의 경쟁력은 생산량이었다. 얼마나 많이, 빨리, 싸게 만드는지가 기업의 핵심이었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고 시장은 기업에게 묻는다. “당신의 회사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최근 글로벌 투자자와 고객들은 제품만 보지 않는다. 그 제품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졌는지, 노동자는 존중받고 있는지, 협력사는 안전한지까지 본다. 인권경영은 기업이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경영 전반에 보호하고 존중하는 경영방식이다. MZ세대의 조직 변화와 ESG 경영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고 있으며, 글로벌 기업들은 공급망·협력사·노동환경까지 인권의 중요한 경영 기준으로 보고 있다. 인권경영(Human Right Management)이란 기업 활동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인권 침해를 예방하고, 모든 이해관계자의 인간다운 권리를 존중하며 경영하는 체계이다. 인권경영의 핵심 요건은 무엇인가. 첫째, 인간 존중 경영철학이다. 회사의 모든 의사 결정 기준에 사람의 존엄이 포함되어야 한다. 직원이 존중받는 조직일수록 생산성이 높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안전할 때 아이디어를 내고, 문제를 공유하며, 개선활동에 참여와 위험을 먼저 알린다. 두려운 조직에서는 침묵하고 숨기고 방어하며, 시키는 일만 한다. 폭언·갑질·차별·강제노동 금지와 안전한 작업환경이 기본이다. 둘째, 산업 안전과 건강 보호이다. 근로자의 생명과 안전은 가장 기본적인 인권이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중대재해 예방, 위험 작업관리, 안전교육, 작업중지권 보장 등이 핵심이다. 셋째, 공정한 노동환경이다. 적정 임금, 적정 근로시간, 휴식권 보장,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성희롱 예방 등이 포함된다. 넷째, 공급망 안전관리이다. 최근 글로벌 기업은 협력업체 인권 문제까지 관리한다. 외국인 노동자 인권 보호, 하청업체 안전관리 등이다. 다섯째, 고충처리 및 신고체계이다. 익명 신고 시스템과 내부 보호 체계가 중요하다. 인권을 존중하는 기업이 지속 성장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리더가 바뀌지 않으면 문화는 변하지 않는다. 관리자의 한마디가 근로자의 자존감을 만들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특히, 제조기업 리더는 지시하는 관리자보다 듣는 리더가 되어야 하며, 현장은 통제보다 참여의 시대다. 안전과 존중문화, 참여와 공정문화가 시스템이 되어 문화로 가야한다. 현대 기업문화 수준은 생산 경쟁력보다 사람을 대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인권경영은 기업의 새로운 생존 전략이며, 품격이고 필수 경영이다. 현장을 존중하는 기업은 사고와 이직이 줄고, 참여가 늘고 개선이 빨라진다. 인권경영은 강력한 미래 투자다. 산업재해, 조직 갈등, 갑질 문화, 이직 증가, 생산성 저하, ESG 리스크, 브랜드 신뢰 하락 등을 예방하는 시스템이다. 기계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사람의 신뢰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현장의 작은 존중, 안전을 우선하는 결정,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문화가 미래 선진 기업으로 가는 길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5-19

얕은 침잠(沈潛)의 변명

식탁의 중심에서 휴대용 가스버너가 나직한 숨을 내뿜는다. 그 위로 얹힌 들큼한 육수가 투명한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보글보글 끓기 시작할 때, 나는 집게를 들어 얇게 저민 선홍빛 소고기 한 점을 집어 뜨거운 물결 속에 고기를 밀어 넣는다. 그 머무름은 찰나에 불과하다. 고기가 뜨거운 수마(水魔)에 닿아 제 빛깔을 채 잃기도 전에, 서둘러 핏기만 가신 채 건져 올린다. 샤브샤브의 미덕은 바로 ‘얕음’과 ‘신속함’에 있다. 깊이 잠기지 않을 것, 그리하여 본연의 연한 질감을 잃지 않을 것. 문득 그 찰나를 바라보며 나는 내 삶의 어떤 단면들을 냄비 속의 고기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인생의 중턱을 넘어 갱년기라는 정체 모를 불청객을 맞이한 이후, 나의 일상은 육체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지리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낯설게 차오른 살들은 세월의 흔적이자 대사가 느려진 장기들이 보내는 무언의 경고였다. 의사는 담담하게 운동을 권했고 나는 비장한 각오로 운동화 끈을 묶었다. 그러나 그 비장함의 유통기한은 언제나 샤브샤브 고기가 끓는 육수에 머무는 시간만큼이나 짧고 덧없었다. 스스로를 돌아보건대, 나는 결코 인내심이 결여된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들이 보기에는 미련할 정도로 하나의 우물을 파는 고지식한 고집이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며칠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원고지 위에서 단어들과 사투를 벌일 때도,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두꺼운 문학 텍스트를 수십 번씩 고쳐 읽으며 행간의 의미를 채굴할 때도, 나는 언제나 끈질긴 추적자였다. 무언가를 사유하고 창작하는 영역에서 나의 정신은 늘 사골을 고는 가마솥의 불꽃처럼 은근하고도 집요하게 타올랐다. 몇 시간이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텍스트의 뼈대를 고아내고, 사유의 진액을 우려내는 일에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던 내가 어찌하여 이 사소한 육체의 움직임 앞에서는 이토록 유약하게 무너지는 것일까. 흔히 우직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상징할 때 우리는 ‘사골을 우린다’는 표현을 쓴다. 내가 삶을 대했던 태도는 사골과 가까웠다. 문장을 다듬고, 삶의 비극을 응시하며, 내면의 고통을 짓이겨 하나의 수필로 길어 올리는 과정은 온전히 내 안의 진액을 짜내는 고단한 은거(隱居)였다. 그러나 운동이라는 물리적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나의 서사는 여지없이 샤브샤브의 가벼운 궤적으로 선회해 버렸다.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에 올라서거나 발레 슈즈를 신고 선을 그릴 때, 내 육체는 그 시공간에 깊숙이 착지하지 못하고 겉돈다. 마치 뜨거운 육수가 무서워 슬쩍 발만 담갔다가 빼내는 얇은 고기 조각처럼,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기도 전에 시계를 확인하고, 근육이 팽팽한 긴장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 서둘러 동작을 마무리한다. 진득하게 육체를 단련하는 사골의 시간 대신 서둘러 건져 올리는 샤브의 순간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격한 괴리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갱년기에 접어든 육체는, 호르몬의 썰물과 함께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거대한 자연의 섭리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 같지 않은 기초대사량,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거리는 관절의 비명은 나로 하여금 내 몸을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선사했다. 어쩌면 나는 진득하게 운동을 지속했다가도 결국 가시적인 성과를 보지 못할까 두려워, 처음부터 깊이 잠기지 않는 샤브샤브식 ‘얕은 운동’ 속으로 도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실한 실패자가 되기보다는, 성의 없는 방관자가 되는 편이 내 자존심을 지키기에 유용했을 터이다. 운동을 진득하게 하지 못하고 겉도는 내 모습이 비록 다이어트라는 세속적 목표에는 불성실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내 무의식이 선택한 생존의 방식일 수 있다. 이제는 육체든 정신이든, 지나치게 깊이 침잠하여 스스로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내면의 브레이크. 매일 거창한 성과를 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대신, 그저 삶이라는 뜨거운 육수에 가볍게 몸을 적셨다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 얕은 접촉만으로도 생은 지속될 수 있다고 위로하는 몸의 언어 말이다. 글을 쓰는 일과 아이들을 마주하는 일에는 여전히 사골 같은 집념을 발휘하겠지만, 내 지친 육체를 달래는 일만큼은 이 샤브샤브의 유연함을 허락하기로 한다. 살을 빼고 건강을 되찾는 일 또한 맹렬한 투쟁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부드럽게 순응하며 핏기만 살짝 가시듯 가볍게 외연을 다듬어가는 과정이어야 마땅하기에 말이다. /김경아 작가

2026-05-19

뉴욕, 나를 다시 살게 한 도시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장소가 있다. 내게 뉴욕은 그런 도시다. 세계 문명의 중심이기 이전에, 절망의 끝에서 다시 희망을 배웠던 곳이다. 그래서 뉴욕은 내 인생의 제2의 고향이다. 퀸즈 플러싱, 한 대로 선상의 낡은 아파트. 그곳은 내 삶의 물줄기가 바뀐 자리였다. 가난했고 불안했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젊은 날의 시간이 그곳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 내게 그 아파트는 단순한 거처가 아니었다. 다시 살아갈 힘을 배운 삶의 교실이었고, 버티는 일이 곧 희망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은 자리였다. 나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뉴욕에 도착했다. 청년이 품어야 할 희망은 이미 많이 닳아 있었고, 미래는 안갯속처럼 희미했다. 현실은 무거웠고, 경제적 어려움은 학업을 포기하라고 등을 떠미는 듯했다. 삶은 자꾸만 내게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인생은 참으로 이상하다. 모든 소망이 꺼진 듯한 순간, 오히려 더 깊은 소망이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걸어올 때가 있다. 뉴욕은 그 역설을 내게 가르쳐 준 도시였다.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나는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뉴욕과 뉴저지를 새벽부터 밤까지 달렸다. 낯선 승객들을 태우고 도시의 혈관 같은 길 위를 쉼 없이 오갔다. 그것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이상의 시간이었다. 한 가장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견뎌 낸 사랑의 시간이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붙들던 책임의 시간이었으며, 내 안의 약한 마음을 조금씩 단단하게 벼려 가던 훈련의 시간이었다. 눈 내리던 어느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JFK 공항에서 벨트 파크웨이를 달리던 중 차가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빙글빙글 돌았다. 차 앞머리가 반대편을 향하던 그 순간, 심장은 멎는 듯했으며 시간은 한순간 얼어붙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멈춰 섰지만, 그날 나는 분명히 알았다. 나를 지켜 준 것은 운전 기술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부터 크리스천이 되었다. 말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다. 삶의 가장 위태로운 순간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손길이 우리를 붙들어 줄 때가 있다. 내게 뉴욕은 바로 그 은혜를 가장 절실히 배운 도시이기도 하다. 그 뒤로 내 삶에는 다시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컬럼비아대학교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높은 등록금은 또 하나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내 마이크로컴퓨터실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고, 그 일은 학비의 부담을 덜어 주는 고마운 문이 되었다. 학업을 마칠 무렵에는 뉴욕의 한 법률회사에서 일하며 논문 집필에 집중할 여건도 마련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삶은 거창한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막막한 골목마다 예기치 않게 열렸던 작은 문들의 기록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성공보다 먼저 감사를 떠올린다. 절망의 밤마다 조용히 켜지던 작은 등불들, 그리고 그 곁에서 말없이 버텨 준 아내의 사랑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한국의 한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그 후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람과 문명, 자연과 역사의 표정을 읽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번 페루와 볼리비아의 여정 또한 그러했다. 잉카의 돌담, 고원의 침묵, 오래된 광장과 거친 바람 앞에서 나는 문명의 흥망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견디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다시 일어서는가. 그리고 삶은 무엇으로 끝내 자기 깊이를 얻는가. 그런데 아무리 먼 길을 돌아도, 뉴욕은 늘 내 삶의 근원으로 나를 이끈다. 뉴욕은 내가 한때 버티며 살았던 도시가 아니다. 끝내 나를 다시 살아내게 한 도시다. 사람들은 뉴욕을 욕망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게 뉴욕은 그보다 더 깊은 얼굴을 지닌 도시다. 돈과 문화, 예술과 기술, 언어와 인종, 야망과 상처가 이곳에서 부딪히고 섞인다. 그 거대한 소음 속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깨닫고 있다. 더 많이 소유한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더 높이 오른다고 마음까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뉴욕은 다른 목소리도 함께 들려준다. 걷기, 명상, 요가, 건강한 식단, 심리적 안정, 자연과의 접촉 같은 작지만 본질적인 실천들이다. 나는 이것이 21세기 웰니스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웰니스는 단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몸과 마음, 관계와 의미, 노동과 휴식, 성취와 평온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삶의 태도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면의 중심은 더 깊어져야 한다. 진정한 건강은 오래 사는 데만 있지 않다. 자기 자신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내는 데 있다.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있으니, 남미의 대지와 뉴욕의 불빛이 문득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졌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의 비극이 ‘존재’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돌아보면 그것은 개인의 삶에도,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대를 이익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그가 지닌 역사와 문화, 상처와 자부심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관계가 시작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다르지 않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조용히 존중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뉴욕을 사랑한다. 이 거대한 도시는 여전히 시끄럽고, 눈부시고, 분주하다. 그러나 내게 뉴욕은 화려함의 도시이기 전에 회복의 도시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희망은 싹틀 수 있고, 삶의 벼랑 끝에서도 길은 다시 열릴 수 있으며, 세계의 소음 한가운데서도 자기 영혼의 목소리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도시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돌아보면 페루와 볼리비아의 높은 하늘 아래서도, 뉴욕의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도 내가 끝내 찾고 있었던 것은 같은 것이었다. 더 많이 갖는 삶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삶, 더 높이 오르는 인생이 아니라 더 진실하게 존재하는 인생을 찾고 있었다. 인생은 결국, 바깥으로 멀리 떠나는 길 같지만 끝내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긴 순례인지도 모른다. 뉴욕은 내게 그 길의 시작이었고, 남미는 그 길의 뜻을 다시 묻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용히 믿는다. 사람은 소유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은 끝내, 존재의 깊이로 살아난다. 이 칼럼은 이것으로 마무리 된다.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드린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5-19

인생은 같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누구나 인생의 길은 같다. 어지간히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같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시면서 정신없었다. 대전과 서울을 얼마나 많이 오갔는지 모른다. 체력에 한계가 느껴지고, ‘처방’, 대처방법을 다르게 생각하는 동생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해야 했다. 나도 어렸을 때 내가 누군지 생각하고 살았던가. ‘나’라는 관념 없이 그냥 먹고 살고 울고 보채지 않았던가. 나이 들어 ‘자기 자신’을 잊어간다는 것,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얻으려 했다. 어느 날 대전 집 안방에 모신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무심코 들여다 보니, 액자 속의 아버지는 얼굴에서 힘이란 힘은 다 빼고 찍으신 듯한 모습이셨다. 돌아가실 때보다 많이 젊으실 적 사진을 선택했는데, 그때는 기운도 좋으셨을 텐데, 얼굴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으셨다. 동화에 얽힌 노래 만드는 AI 작업을 하느라 유튜브를 부지전히 들락거렸다. 새로 채널을 만들고 수노(SUNO)가 작곡한 ‘늑구’ 노래 영상을 올리다 보니, 알고리즘 때문인지 옛날 노래 영상이 보이고 그 밑에 댓글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 노래를 들으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가 마지막 아프실 때가 그래도 좋았었다.’ 처음에 칠십 대 중반에 대장암과 신장암을 함께 앓으시고 신장을 하나 떼어내시고 독한 항암 치료를 체육인의 의지로 이겨내셨다. 연세가 아흔에 이르렀을 때 다시 두 개의 암이 찾아왔다. 하나는 대장암, 또 하나는 요관암이었다. 의사 말대로라면 다발성이요, 전이된 것은 아니라 했는데, 그렇게 아버지는 암으로 ‘4관왕’이 되신 것이었다. 함께 척추골절까지 앓으셔서 일어나지 못하시고 ‘자리보전’하시는 것을, 어머니가 다 보살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래도 두 분이 함께 계시니 그것이 좋은 것이었다. 1년 2개월 아프시는 중에 대전을 무척이나 오갔지만 어깨에 짐을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되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짐은 온전히 어머니에게서 자식들에게로, 내게로 옮겨졌다. 이번 토요일, 일요일은 더 어려웠다. 요양보호사가 주말이면 쉬시는데, 마침 이틀 연속으로 학생들과 답사 수업을 해야 했고, 주중에 하지 못한 수업 보강도 줌으로 해야 했다. 나 한 몸으로 커버할 수 없어 식구들이 전부 ‘동원’된 이틀. 지쳐 잠들었다 스르륵 깨었다. 추천서 일곱 통 중에 마저 두 통을 다 쓰니 세상은 정적 그 자체다. 어지간히 시끄럽게 울어대는 앵무새 빠삐용과 베카도 어딘가로 숨어 소리를 죽였다. 산 바로 턱밑 아파트의 한밤은 자동차 소리조차 멎었다. 긴 정적 틈으로 멀리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 울린다. 인생의 길은 누구나 같다. 이제 보이는 것 같다.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제외하면 누구나 같은 길을 가는 것이라는 ‘진리’. 누구나 다 그렇게 가는 것이므로 두려울 것도 없다. 나만의 고독일 때 무서운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5-18

자살의 심리학

얼마 전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숨진 채 발견됐다. ‘죄송하다. 스스로 떠난다’는 내용의 유서로 보아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엘리트 판사의 자살은 세간에 적잖은 충격과 의문을 남겼다. 자살 충동의 가장 핵심적인 심리는 극심한 고통과 ‘출구가 없다’는 절망감이다. 실패, 상실, 질병, 경제적 파탄, 관계 단절, 사회적 수치심, 외로움 등이 누적되면 삶 전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인간은 미래를 상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면, 지금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가 자살충동을 일으키게 된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자살에는 몇 가지 공통된 메커니즘이 있다. 첫째는 고립감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완전히 혼자라고 느낄 때 존재의 기반이 흔들린다. 둘째는 무가치감과 자기혐오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과도하게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실패나 실수를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존재 전체의 부정으로 확대한다. 그래서 작은 사건도 치명적인 절망으로 연결되곤 한다. 셋째는 인지의 협착 현상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 상태에서는 사고가 좁아진다. 마치 어두운 터널 속에 갇힌 것처럼 다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해결책이 보여도 당사자에게는 죽음만 유일한 탈출구처럼 느껴진다. 넷째는 충동성과 절망의 결합이다. 자살은 장기간 계획되는 경우도 있지만 순간적 충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강한 감정폭발, 음주, 수면부족, 만성스트레스는 자기 통제력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잠깐의 절망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물학적 측면으로는 우울증, 조울증, 불안장애, 중독 문제 등 뇌의 감정조절 기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세로토닌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은 충동조절과 절망감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자살에 대한 병리학적인 접근과 처방이 요구 된다. 반대로 같은 어려움이라도 좌절하지 않고 견뎌내는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으로는, 첫째가 관계형성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주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강력한 보호요인이다. 둘째는 의미부여다. 종교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 사회적 사명감, 실현하고 싶은 목표 등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절망 속에서도 버틸 가능성이 높다. 셋째는 회복탄력성이다. 어린 시절의 경험, 타고난 성격과 기질, 반복된 극복경험 등이 어려움을 견디는 힘을 만든다. 넷째는 사고의 유연성이다. 지금은 비록 힘들지만 나아질 수도 있다는 긍정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된다. 우리나라는 2023년 한 해 무려 1400여 명이 자살을 했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29.1명으로 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라고 한다. 10~40대 사망 원인 1위도 자살이라고 한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죽을 각오로 달려들면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더구나 사회적 책임이 있는 자리의 사람이라면, 난관에 부딪쳤다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한다는 건 비겁하고 나약한 도피가 아니겠는가.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SNS상담 마들랜(www.129.go.kr/etc/madlan)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다.

2026-05-18

공봉학의 인문학 이야기..서양 철학은 붓다의 각주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고대 그리스철학자·기원전 428년~348년)은 소위 ‘이데아론’으로 유명하다. ‘감각세계 뒤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본질이 존재 한다’라는 것이다. 세계는 이데아를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이데아에 충실한 복사본일수록 그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순위를 나열하자면, 최고는 이데아, 다음은 이데아를 복사한 복사본, 다음은 복사본의 복사본 순서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Idea-Copy-Copy of Copy이다. 이데아가 ‘체리 따봉’이다. 이데아와 멀어질수록 그 가치는 떨어진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복사본의 복사본은 단순한 복사본조차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거의 쓰레기 수준의 그 무엇인 셈이다. 플라톤은, ‘시를 쓰는 시인은 복사본의 복사본의 역할을 하는 자’이므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하여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다. 플라톤에 있어 가장 비천한 것인 최후의 복사본은 복사본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들뢰즈(프랑스 철학자·1925년~1995년)가 그다. 들뢰즈는 플라톤을 비판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최후의 복사본은 영어로는 simulacrum, 불어로는 simulacre(시뮬라크르)이다. 들뢰즈의 철학적 핵심 개념인 최후의 복사본인 ‘시뮬라크르’라는 불어식 발음이 일반적이다. 플라톤에게 노비 신분 취급을 받던 시뮬라크르는 들뢰즈에 이르러 왕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들뢰즈는 복사본의 전제로서의 원본인 이데아를 부정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복사본은 스스로 생성된 것일 뿐, 원본으로부터의 복사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는 원본에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르게 생성되는 것으로 ‘차이’를 본질로 한다. 원본의 부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중세 교부철학의 밑거름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화된 것이다. 이데아론은 진리 체계와 현상계를 나누어 서열화함으로써, 이데아와 복사본들에 대한 ‘권력의 서열화’를 초래하였다. 이데아를 장악한 자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린다. 진리 체계가 서열화되어 있으므로, 그 체계 사이에는 억압과 폭력의 개입은 당연하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타락한 가짜 시뮬라크르를 복권하여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존재로 파악하므로써 권력의 서열화와 서열화된 권력 간의 폭력을 비판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를 외치고 있을 때, 동양의 인도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며,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선언한 자가 있었다. 그가 붓다이다. 그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계에 원본 같은 불변의 그 무엇은 존재 하지 않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신 브라흐마의 속성인 아트만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세계는 원본에서 복사된 그 무엇이 아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뿐이라는 연기론을 주장하였다. 절대를 부정하고, 오직 현실이 실재이며, 나머지(이데아조차도)는 모두 환·망·공·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들뢰즈와 붓다의 교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들뢰즈가 붓다를 읽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붓다를 웃긴 남자 플라톤. 그의 철학이야말로 붓다의 각주일지도 모른다. /공봉학 변호사

2026-05-18

고학력 여성과 저출산

세상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났고, 사회 참여 역시 눈에 띄게 높아졌다. 출발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 이는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를 바 없다. 여권 신장의 세계를 살고 있는 건 한국 여성들도 마찬가지. 현대사회의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은 언제 어디서건 고학력 여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아직 선입견과 오해도 없지 않다. “학력이 높고 고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아이 낳기를 꺼린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양에 비해 동양에 더 많은 게 사실. 그런데, 고학력 여성이 출산을 기피한다는 건 맞는 말일까? 최근 미국인구학회 학술지에 발표된 ‘일본에서 교육이 결혼과 출산에 미치는 인과적 효과’라는 제목의 논문이 이 물음에 답하고 있어 주목받았다. 위에 언급된 연구엔 일본 와세다대 교수뿐 아니라, 같은 동양 문화권의 싱가포르 대학 교수 등 4명이 참여해 광범위한 분석을 진행했다. 연구 결과 고학력 여성들은 초혼과 초산을 다소 늦추긴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학력 여성과의 차이는 사라졌다고 한다. ‘많이 배운 여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말 그대로 선입견이었던 것. 이에 논문 작성을 함께한 연구진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출산 감소를 이해하려면 교육보다는 제도적 요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고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 도출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선 고학력 여성들을 탓할 게 아니라, 남성 육아휴직의 확대와 출산 후 경력 단절에 따른 불이익을 없애는 등 시스템 개선이 보다 절실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18

외로움부 장관

개인의 외로움도 국가서 관리한다? 외로움을 국가가 관리해야 할 만큼 현대사회에서 외로움은 심각한 사회적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1인 가구 급증, 양극화 및 불평등 심화 등으로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하는 인구는 늘지만 정부 대처는 미흡하다. 외로움이 고독사로 이어지고 우울증이나 치매 등으로 발전하는 사회문제에 대응할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은 국민건강에 해를 끼치는 외로움을 공적영역에서 다룬다. 외로움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관련 부서도 만든다. 영국은 성인 상당수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고, 이것이 건강과 직접 연결된다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다. 영국 사례를 연구한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대책 담당장관을 신설했다. 일본사회의 고독사 문제 해결과 고독으로 인한 건강악화나 노동력 상실에 따른 사회적 비용증가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도 외로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2024년 한해만 3000명이 넘는 이가 고독사했다. 고독사란 가족과 단절된 생활을 하다 홀로 임종을 맞고 뒤늦게 시신이 발견된 경우다. 여론조사에서 국내 성인의 절반 이상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거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으로 사는 사람이 는다는 것이다. 노인층뿐 아니다. 1인 가구 증가로 젊은층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적 고립문제를 담당할 부서를 만들고 복지부 차관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외로움으로 죽을 수 있는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최초 시도다. 그 역할에 기대를 걸어보자.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7

노화 탈출속도

세계적인 발명가이자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1948~)이 2032년부터 노화 속도보다 노화의 치료와 복구 기술 발전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 주장하여 화제(話題)다. 이것은 노화로 인한 손상의 누적보다 노화를 치료하는 기술 발전이 빨라짐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기대 건강수명이 계속 연장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 ‘노화 탈출속도(LEV)’다. 커즈와일은 지금부터 3년 후인 2029년 ‘범용 인공지능(AGI)’이 일반화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범용 인공지능은 ‘컴퓨터로 사람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 80억 명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ASI)’이 2040년 초에 등장하리라는 사실도 지적한 바 있다. 경이롭고도 전율할 만한 사건이 발생할 날이 가까운 것이다. ‘노화 탈출속도’가 구체적으로 실행되면, 인간은 지금처럼 1년을 살면, 수명이 1년 줄어드는 게 아니라, 1년 늘어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 필연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지가 된다는 얘기다. ‘노화 탈출속도’의 최초 수혜자는 부자들이 되겠지만, 신약(新藥)의 특성상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약값이 대폭 저렴해질 것이기에, 보편적인 수혜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커즈와일의 미래 예측을 대중 강연에서 꺼내곤 하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노화의 종말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생로병사가 생명체에 고유한 운명일진대, 그걸 피해갈 수 있겠는가, 또한 젊어진다는 게 긍정적인 결과인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다. 반면에 회춘(回春)과 무병장수를 쌍수 들어 환영하는 사람도 적잖다. 언젠가 디지스트(DGIST)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다가 만난 학생 하나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뇌과학을 공부한다는 20대 초반의 그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500년은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이것이다. “500년 인생 행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생각해봤니?” 일론 머스크도 최소 120년에서 150년은 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근미래 호모사피엔스의 평균 수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100세 시대라는 현대에 적지 않은 고령자들이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늘그막에 육신과 정신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닌 시대가 21세기의 본질이다. 낙상, 치매, 뇌졸중으로 요양원 침상에서 신음하는 고령 환자들을 생각해보면, 지금과 여기에서 우리가 준비할 사안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어떤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충분한 수면, 적절한 스트레스 관리, 술과 담배 절연, 하루 2시간 운동의 생활화 같은 철칙으로 요약한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오래 버티는 자가 미래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한다면,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골라 즉시 실행에 옮기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므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5-17

지역경제와 인구소멸 위기 극복할 지도자를

6·3 지방선거가 성큼 다가왔다. 대구경북에서는 정당별로 치열한 예선을 거쳐 후보 경선이 어렵게 마무리되었다. 여대야소 국회로 구성되어 있는 현재, 거대여당의 일방적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심각 상황이다. 지방선거에서라도 양당의 균형과 조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여당의 일방적 개헌 입법 추진은 좌절되었지만, 민주당이 발의한 이른바 ‘조작기소 특검법’이 어떻게 결판이 날지 모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와 사법 질서에 어떤 후폭풍이 몰려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얼마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진행한 기소조작 국정조사에서 해당 증인을 호출하여 검찰의 조작과 고의성을 밝힐 기소 조작 혐의를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끝났기 때문에 이번 지자체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큰 변수 중의 하나다. 민주당은 특정인의 피소가 검찰 조작에 의한 것이므로 재판 계류 중에 있는 사건의 공소를 취소하려는 특검 법안을 이미 제출했다. ‘공소 유지 여부 결정’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재판을 강제로 기소 중단 내지는 취하하겠다는 초법적 기획이다. 여당은 ‘조작기소 중단 특검’ 법안 상정 과정에 예상되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계엄과 내란 동조 재판에 연루된 단체장 후보에 대한 재판 문제도 제기할 공산도 없지 않다. 올 초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 사업과 행정 통합 두 가지 다 국비 지원에서 배제되었다. 향후 4년간 광주 전남에 비해 20조원 국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될까? 그럼 점에서 이번 대경 지역 지방선거의 최대 쟁점은 두 가지 국가적 사업의 예산 배제에 따른 후속 국비 확보 전략이 될 전망이다. 김부겸 후보자가 공적자금 5000억을 빚내고, 정부특별지원금 5000억을 확보하겠다는 공약은 법적 근거가 없는 전혀 없는 빈말이다. 국가 예산은 관련 사업의 특별법안에 근거하여 국비 지원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번 지자체 선거 핵심 공약 사업인 통합신공항 건설 사업과 대구경북 시도 행정 통합 문제는 관련 특별법안의 수정 입법안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번 선거 후보자들은 정부가 위 두 가지 사업을 지자체에 떠넘기지 말고 전액 국비지원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각 후보들은 현재 핵심 과제인 대구경북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과 지역 인구소멸 방지를 위한 특단의 전략과 공략 제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 후보 경선 과정에서 기초단체장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후보들의 전과기록이나 자질 의혹의 문제점들이 많이 불거졌다. 공천 과정의 공정성 문제와 얽혀져 어느 때보다 논란이 많이 제기되었다. 공천 과정의 공정성 시비가 선거 후에도 쉽게 수그러지지 않을 듯하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실천력과 추진력 있는 인물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현 집권 여당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대구경북의 미래 경제발전을 위해 국비 지원에만 일방 의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민들 스스로 단결하여 자립, 자강과 갱생을 이끌 지도력을 갖춘 인물을 선택하여야 한다. 누구를 뽑아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국가미래연구원 고문

2026-05-17

트로트

요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트로트를 빼놓기는 어렵다. 한때는 부모 세대의 음악, 혹은 회식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배경음 정도로 여겨졌던 트로트가 이제는 방송의 중심에 서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탄생하고, 공연장은 팬들로 가득 찬다. 계속되는 이 현상은 단순한 복고 열풍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함께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트로트에는 유난히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한과 흥,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버텨낸 시간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으며, 빠른 산업화와 치열한 경쟁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정서는 여전히 깊은 공감과 위로로 이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Distinction :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1979)’에서 사람의 취향은 개인의 순수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는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생활의 감각이 축적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흐름이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미국 코첼라 같은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트로트 기반의 무대가 시도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K-팝 중심으로 소비되던 한국 음악이 점차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오래된 과거의 이미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트로트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의 단순한 구성에서 벗어나 발라드와 록, 댄스와 EDM 같은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다. 무대 연출 역시 훨씬 세련되고, 공연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이제 트로트는 단순히 ‘옛 음악’이 아니라 현재의 대중음악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장르가 되었다. 이 변화는 지역 문화 현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역 축제나 기념행사 무대를 보면 트로트 가수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연장을 찾는 중장년층의 열기는 상당하다. 팬덤 문화 역시 활발해졌고, 이는 침체된 지역 공연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다. 다만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고민도 생긴다. 어느 순간 지역 행사 무대가 지나치게 하나의 장르에 집중되기 시작하면 클래식이나 재즈, 국악, 실험적인 공연 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익숙한 장르만 찾게 되고, 새로운 음악을 접할 기회는 줄어든다. “지역 행사에 가면 결국 트로트겠지”라는 예상이 굳어질수록 문화의 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문제는 트로트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트로트는 세대를 연결하고, 지역 공연장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중요한 문화적 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트로트의 인기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장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문화는 익숙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낯선 음악과 새로운 경험 속에서 더 풍요로워진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5-17

봄밤엔, 돼지들이 자라나고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장옥관, ‘봄밤이다 1’ 전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운 봄밤이 있다. 사물은 그것이 놓이는 시공간에 따라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장옥관 시인의 이 시는 봄의 강력한 자장을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는데, 인용 시에서 “돼지”는 “봄밤”을 활성화하는 동적인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다. 봄밤에 돼지라니, 시인의 상상력이 펼쳐내는 면적이 크다. 그럼에도 멀어지기는커녕 외려 좁아지는 골목처럼 밀착해 온다. 흡사 마술봉이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꽃길을 내고 폭죽을 쏘며 땅속을 파고 있는 것 같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벚나무 아래”를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니는 “시커먼 돼지들은” “천 마리 만 마리”로 팽창한다. 달은 또 어떤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푸는 화자의 봄밤은 강력한 자장을 지닌 커다란 ‘몸’이 된다. 인용되지 않는 같은 제목의 또 한 편을 보자면, 봄밤은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움 가시지 않는 몸”이라고 했다. 이때 “가려움”이란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텐데, 가령 “서른두 살에 혼자가 된 어머니 보름달”은 “달아오르는 요강처럼 뜨고, 오줌이 뜨거운 어머니”처럼 화자의 가려움은 식지도, 좀처럼 사라지지도 않는다. 두 편의 봄밤은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사뭇 다른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의 ‘몸’이라는 장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리되지 않는 미학의 동일한 영토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초월과 일상이 상응하는 상상의 공간이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닌, 몸에 의한, 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캄캄한 하수구” 같은 곳곳의 골목을 신나는 공연장으로 만드는 환상적인 장면이 지나간 후, 다른 봄밤에선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다오”라는 전형적인 로맨스가 펼쳐진다. “이해하나마나 달은 뜨고 바닷물이 끓어넘치고/ 고양이는 밤새/ 붉은 꽃잎 점점이 뿌리며 울며불며 다니는” 밤이다. 빠진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꿈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과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환상의 날개를 떼고 현실로 내려와 발을 내딛는 순간 몸과 유리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자의 봄밤은 시인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부재의 환상에 젖줄을 대고 있는 듯하다.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를 걷어내고 현실과 환상의 허들을 넘을 수 있는 것은 기실 “봄밤”이라는 몽상적인 시간대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여린 꽃잎들이 돼지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침을 퉤퉤 뱉는”봄의 생명력으로 넘친다. 결구에 닿았을 때 “캄캄한 하수구처럼 흘러드는 봄밤”은 사뭇 달라질 법한데, 끝끝내 화자는 천 마리 만 마리 풀어놓았던 돼지들을 거둘 생각이 없다.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픈 봄밤” /이희정 시인

2026-05-17

교육 AI의 가능성과 한계 ···개인화 학습의 현실

40여 년 전,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명의 교사가 한 명의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면 평범한 학생도 상위 2%의 성취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모든 아이에게 전담 교사를 붙여 줄 나라는 없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개인 교사’는 교육의 오래된 꿈으로만 남아 있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그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지치지 않고, 24시간 답해 주고, 학생마다 다른 속도로 설명해 주는 ‘AI 튜터’. 과연 AI는 그 오랜 꿈을 이뤄 줄 수 있을까? 오늘은 그 가능성과,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그 한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가능성··· 6주 만에 2년 치를 배우다. 가장 인상적인 증거는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세계은행이 2024년 나이지리아 에도주의 고등학생 8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이다. 방과 후 6주 동안, 교사의 지도 아래서 학생들이 AI와 대화하며 영어를 공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AI를 쓴 학생들의 성취도는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평균 0.3 표준편차 높았는데, 이는 보통 학교 교육 1.5~2년 치에 해당하는 향상이었다. 세계은행이 비교한 전 세계 교육 프로그램의 80%보다 효과가 좋았다. 핵심은 ‘AI 에게 무엇을 시켰는가’였다. 연구진은 AI를 답을 베끼는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튜터’로 설계했다. 그리고 교사가 옆에서 학생이 딴 길로 새지 않도록, AI가 틀린 말(환각)을 하면 바로잡도록 도왔다. 수업에 더 많이 참여한 학생일수록 더 많이 늘었다. AI가 ‘잘 쓰이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 준 사례다. 이런 흐름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칸아카데미의 AI 튜터 ‘칸미고’, 구글·오픈AI 등이 내놓은 학습 전용 모드까지, 글로벌 교육 기업들은 앞다투어 개인화 학습 도구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강점은 비슷하다. 학생이 막히면 같은 개념을 수준에 맞춰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주고, 틀린 부분을 그 자리에서 짚어 주며, 면박을 주거나 지치는 일이 없다. 한 명의 교사가 서른 명에게 동시에 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 현실··· 1조4000억 원과 8.1%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정부는 2025년 3월,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실험에 나섰다. 수학·영어·정보 교과에 ‘AI 디지털교과서(AIDT)’를 도입한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문제를 내주는, 바로 그 ‘개인 교사’의 꿈이었다. 그러나 1년 뒤 성적표는 냉정했다. 2025년 12월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3년간 1조4000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에서 AIDT를 열흘 이상 사용한 학생은 평균 8.1%에 그쳤다.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 학생이 60%였다. 감사원은 현장 의견 수렴이나 시범 운영 없이 졸속으로 추진된 점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AIDT는 ‘교과서’라는 법적 지위마저 잃고 ‘교육자료’로 격하됐고, 일부 교육청은 2026년 예산 편성을 보류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교사가 준비되지 않았고, 학교 현장이 설득되지 않았으며, ‘왜 이것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좋은 도구도 쓰는 사람과 환경이 받쳐 주지 않으면 비싼 애물단지가 된다는, 오래된 교훈의 재확인이었다. 또 하나의 묵직한 숙제는 데이터다. AIDT는 학생의 학습 이력을 잘게 분석할수록 똑똑해지지만, 그만큼 483만 학생의 민감한 기록이 국가와 민간 기업의 서버를 오간다. 미국과 EU가 최근 아동 교육 데이터 보호 법제를 강화하고, EU가 교육용 AI를 ‘고위험’ 등급으로 분류한 것도 같은 우려에서다. 개인화의 정확도와 정보 보호는 쉽게 맞바꿀 수 있는 거래가 아니다. ■ 더 깊은 한계 ··· “성적은 올라도 배움은 사라진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AI가 정말 ‘학습’을 돕는가? 아니면 ‘학습한 척’을 돕는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연구팀이 튀르키예 고등학생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서늘한 답을 내놓는다. 챗봇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문제 풀이 단계에서는 성적이 크게 올랐다. 하지만 AI를 치우고 시험을 보자, 종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보다 오히려 평균 17% 낮은 점수를 받았다. 답은 얻었지만, 실력은 남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 현상이다. 기억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일을 자꾸 외부 도구에 맡기면, 그만큼 우리 뇌는 덜 쓰이고 덜 자란다. 카네기멜런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연구, MIT의 ‘인지 부채(cognitive debt)’ 연구도 비슷한 경고를 보낸다. AI를 신뢰할수록 비판적 사고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뇌가 20대 중반까지 자라는 청소년에게, 생각의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습관은 위험하다. ■ 그래서,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AI를 교실에서 다시 몰아내야 할까. 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이지리아와 한국, 튀르키예의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오히려 다른 길이 보인다. 성패를 가른 것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설계’였다. 효과를 본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AI가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게 했다. 둘째, 교사가 사라지지 않고 학습의 설계자이자 코치로 남았다. 셋째, 학생이 ‘AI 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을지’를 스스로 고민하게 했다. 반대로 실패한 경우는 기기와 예산만 쏟아붓고, 정작 사람과 수업 설계를 놓쳤다. 올해 OECD가 펴낸 교육 분야 생성 AI 보고서의 결론도 같은 맥락이다. 범용 챗봇을 검증 없이 교실에 들이면 학생은 ‘수동적 소비자’가 되고 교사는 ‘감독자’로 전락한다. 교육은 분명한 교육적 목적으로 ‘설계된’ AI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 지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자가 생각하는 ‘AI 교육특구’ 구상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AI 교육특구’는 하나의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상의 출발점은 ‘AI를 잘 쓰는 학생’이 아니라 ‘AI와 함께 지역의 문제를 푸는 학생’에 있다. 앞서 본 ‘성과와 학습의 분리’라는 함정을, 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설계의 핵심 장치는 세 가지다. 첫째, 학생이 매주 ‘AI에게 무엇을 물었고, 결과는 어땠으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적는 메타인지 일지를 의무화한다. 답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둘째, 3개월·6개월·1년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과정에서 학생이 직접 철강 산업의 탄소 배출, 인구 감소, 해양 환경 같은 포항의 실제 현안을 다루게 한다. 가상의 문제집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가 교재가 된다. 셋째,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물러나 ‘학습 설계자이자 코치’로 역할을 바꾼다. 나이지리아 실험에서 교사가 맡았던 바로 그 역할이다. 이를 떠받치는 것은 지역의 자산이다. 포항에는 포스텍(POSTECH)의 AI 대학원, 한동대, 그리고 국내 유일의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가 있다. 여기에 포스코·포항테크노파크 같은 산업 현장과 교육부의 ‘교육발전특구’ 제도를 결합하면, 학교 혼자가 아니라 대학·기업·행정이 함께 학생을 키우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그동안 부서별로 흩어져 있던 단기 교육 사업들을 하나의 성장 경로로 꿰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포항만의 처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에나 옮길 수 있는 원칙이 담겨 있다. 지역의 대학·기업을 학교와 연결할 것, 그 지역이 실제로 안고 있는 문제를 학습의 소재로 삼을 것, 기기 보급보다 교사 연수와 수업 설계에 먼저 투자할 것, 그리고 학생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힘’을 남길 것. 광주가 ‘AI 교육원’을 세워 도시 전략과 학교 교육을 잇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화려한 장비를 들이는 일보다 ‘왜’와 ‘어떻게’를 먼저 설계하는 도시가, 결국 앞서갈 것이다. ■ 닫는 말 개인화 학습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AI는 그 꿈을 ‘저절로’ 이뤄 주는 마법이 아니다. 좋은 망치가 좋은 목수를 만들지 못하듯, 좋은 AI가 좋은 학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블룸이 발견한 일대일 교육의 힘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끝까지 살피는 관계’에 있었다. AI는 그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교사가 더 많은 아이를 더 깊이 살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손잡이는, 결국 사람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5-17

스승의 날에 생각하는 속수례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스승을 임금이나 부모님처럼 최고의 존경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을 썼다. 유교의 핵심 가치인 효(孝) 충(忠) 예(禮)란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임금에겐 충성을, 스승에게는 예를 갖춘다는 의미로 군사부일체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시대에는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존경의 뜻을 담은 예물을 준비해 갔다. 이때 가르침에 대한 예물로 준비한 한 묶음의 육포를 속수라 하고, 예의를 지키는 절차를 속수례(束脩禮)라 불렀다. 성균관 입학식 등에서 엄격히 지켜져 왔던 그 시대 풍습이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 배우고자 감히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제자가 말하면 스승은 “내 학식이 부족하여 도움이 적을까 두렵다”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 이런 의식은 왕세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세자가 성균관에 나가 속수례를 한 내용이 소개된다. 스승의 날을 맞아 스승에 대한 예절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전례의 예법인 속수례를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벌이는 학교들도 간혹 있다. 스승에 대한 시대적 예우는 옛날 같지 않으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 의미의 행사여서 한편으로는 마음의 위안이 된다. 스승을 찾아가 속수례라는 절차를 밟던 그 시절 스승의 위상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현실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특히 상당수 교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교단을 떠난다는 소식은 우리시대 스승의 위기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 교권 회복을 도울 범국민적 각성이 필요하다. 스승을 임금과 동일시하지는 않더라도 “선생님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