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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억과 망각

지난 4월 3일은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 지 78년 되는 날이다. 제주 4·3 항쟁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도민들의 시위 운동과 대한민국 군경(軍警)의 무력 진압을 일컫는다. 추산에 따르면,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이르는 2만5000에서 3만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제주 4·3 항쟁인 셈이다. 어떤 이는 4·3 사건이라 하지만, 나는 4·3 항쟁이라 부른다. ‘사건’이라는 말에 담긴 가치 중립적이고, 어눌하며 밋밋한 표현은 희생자들의 넋을 온전히 기리지 못한다. 희생자의 80%가 군경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작전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제주 구좌읍에 자리한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 11명은 군경이 굴 입구에 피운 연기에 질식해 전원 사망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1978년 단편소설 ‘순이 삼촌’으로 4·3 항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항쟁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처절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임시 봉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현기영은 ‘순이 삼촌’ 출간 이후 보안사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진짜 빨갱이 형을 둔 ‘박통’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2003년 봄에 나는 처음 제주도에 간다. 그것도 공적인 업무를 위해서. 경북대 학생 70여 명을 인솔하여 4·3 항쟁 피해자와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주요 과제다. 어떤 마을에서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수두룩했다. 군경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결과다. 어린애든 부녀자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반공(反共)을 내세워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처음 찾아간 제주도에서 내가 만난 ‘한라산 소주’는 무척 특이했다. 병의 생김새나 알코올 도수는 대구와 다르지 않은데, 병뚜껑에 태극기가 선명했다. 그런데 제주도에 와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더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태극기 내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제주(濟州)도 대한민국의 일부입니다. 더는 우리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눈물겨운 한라산 소주 뚜껑에 새겨진 선명한 태극기 무늬가 기억에 선연하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 4·3은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례이며,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 해도 국가폭력의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매우 적절한 발언이고 현명한 방향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한강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세 여성의 시각으로 제주 4·3 항쟁을 돌아본다.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다움 그리고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여러 각도로 조명하는 따뜻한 작품이다. 제목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대물림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존재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이음쇠다. 이음의 원리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이다. 국가폭력의 잔인하고 음습한 결과를 묻어두려는 행위는 의도된 망각이다. 망각은 어둠과 파괴를 향한다. 처절하고 참혹한 과거일수록 낱낱이 드러내 재발을 방지하는 편이 나을 터다. 세련된 망각을 딛고, 투박한 기억에 의지할 때 밝고 투명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므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4-05

물을 생각하며

지난 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이다. 나날이 중요도가 커지는 물의 가치와 소중함을 돌이켜봄으로써 생명의 원천인 물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이란 공격으로 석유의 가치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석유가 2차 산업혁명 이후 현대문명 발전과 유지에 필수적이지만,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물보다 더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노자는 ‘도덕경’ 8장에서 물의 속성과 가치를 강조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하며, 많은 사람이 꺼리는 곳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물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 태양계 유일의 물의 항성 지구별의 70%는 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고작 2% 정도만 우리가 음용수(飮用水)로 쓸 수 있다고 한다. 그 2% 물은 대부분 지하수, 빙하, 만년설 등지에 분포하며, 강과 호수처럼 직접 사용 가능한 범주에 속하는 물은 많지 않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는 물 확보를 위한 총성 없는 전쟁이 한창이다. 티베트에서 발원하는 동남아 최대의 메콩강 상류 남창강(南昌江)에 중국 정부는 12개의 댐을 건설하여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5개국의 생명줄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인구의 18%를 차지하지만, 가용(可用) 담수 자원은 세계의 6%에 불과하여 대표적인 물 부족 국가로 분류된다. 그리하여 중국의 669개 도시 가운데 440개 도시가 물 부족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극복하려고 중국 정부는 곳곳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그 일환이 메콩강 상류에 건설된 12개의 댐인 것이다. 문제는 메콩강에 의지해 살아가는 6000만 이상의 인구가 나날이 말라가는 메콩강을 바라보며 한숨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댐이 건설됨으로써 어족자원과 어획량이 급감하고, 퇴적물 공급 중단에 따른 토양 생태계가 파괴되며, 생활용수 부족과 지반 침하 및 염해(鹽害)까지 발생하고 있다 한다. 이로써 피해 5개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해결책 모색이 시급한 실정이다. 다행한 일은 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 최북단의 압록강과 두만강을 비롯한 모든 하천이 우리 강역(疆域)의 역내(域內)에 자리하기에 국제적인 분쟁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름철에 강우(降雨)가 집중되기는 하지만,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는 국가가 전혀 아니다. 석유는 나지 않지만, 물 하나만큼은 그야말로 복 받은 나라인 셈이다. 그런데 어떤 정신 나간 전직 대통령이 불과 2년 만에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에 십수 개의 댐을 만드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200만 년 이상 흐르면서 현재의 수계(水界)를 이룩한 대자연의 소중한 네 개의 강에 시멘트 철근 콘크리트를 무지막지하게 처넣은 것이다. 우리나라가 만성적인 물 부족 국가라는 거짓말을 진리인 양 호도(糊塗)하면서 말이다. 지난 23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4대강 재자연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반가운 일이다. 정부는 구체적인 재자연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기구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와 긴밀히 협의해 구성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우리 강이 다시 살아나는 경사(慶事)가 있으면 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29

전쟁과 파병

최악의 평화가 최선의 전쟁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타당한 말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인명 살상과 사회-경제적 자산의 파괴를 불러온다. 2022년 2월 24일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양측의 인명피해가 180만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으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도 5만 5천을 넘어섰고, 우크라이나 국외 난민도 590만을 넘어섰다고 한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교착상태에 접어든 시점에 느닷없이 시작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 아닐 수 없다.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다”라거나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라는 표현이 떠오르는 어처구니없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국외자인 우리도 그렇지만,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트럼프도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알고나 있을까?! 현지 시각 3월 17일 이란 전쟁에 관한 유의미한 정보가 나왔다. 미국 국가대테러센터 수장인 조지프 켄트 국장이 트럼프에게 보내는 사직서 형식의 서한을 공개한 것이다. 그는 소셜미디어 엑스에 “이란은 미국에 대한 임박한 위협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과 그 강력한 미국 내 로비 압력으로 시작됐다”고 전쟁 발발 원인을 명시적으로 적시(摘示)했다. 켄트 국장은 “이스라엘 고위 인사들과 일부 미국 언론이 허위 정보 캠페인으로 전쟁 여론을 조성하여 이란이 임박한 위협이라고 트럼프를 속였다. 미국 국민에게 아무 이익도 없고, 미군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는 전쟁에 다음 세대 파견을 지지할 수 없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노선을 수정해 국가를 위한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켄트는 트럼프의 대표적인 충성파로 작년 7월 상원 인준을 받아 테러와 마약 정책을 총괄해온 인물이다. 또한 그는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출신으로 11차례 전투 파병을 경험한 인물로 중앙정보부 준군사 조직에서 활동한 안보 전문가다. 이런 경력의 소유자가 트럼프의 이번 전쟁을 정면 반박함으로써 우리에게 이란 전쟁의 본질 가운데 하나를 명징하게 입증한 셈이다. 나는 무슨 이유든 간에 전쟁에 반대한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과 러시아 안보 위협이 아무리 중차대한 문제라 해도 푸틴의 전쟁 개시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같은 이치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명분으로 시작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이고 야만적인 이란 공습은 용납할 수 없는 악랄한 범죄행위다. 무슨 권리가 있길래 대낮에 어린 학생들을 학살할 수 있는가?! 이란의 강력한 저항과 이스라엘의 노골적인 폭력행사에 놀란 트럼프는 호르무즈 해협에 우리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의 참여를 날마다 촉구하고 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우리 국민의 견해도 양분돼 있다. 파병과 참전 절대 불가를 외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일부 태극기 세력은 국익을 위한 대승적 결단을 주장한다. 우리 국익이 소중해서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면, 그대들 먼저 자식들 손잡고 솔선수범하는 용기 있는 자세를 보여 주기 바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영웅적인 투쟁 대열 최전선에 호기롭게 참전하기를 바란다. 부디 남의 소중한 자식들 목숨일랑 그냥 놔두기를 간곡히 바란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22

청령포와 트럼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자 돌연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곳이 영월 청령포다. 청령포는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얽힌 곳이다. 단종 이홍위(李弘暐)는 1452년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의 화신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고 1455년 상왕(上王)으로 물러난다. 그것도 잠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른다. 청령포는 남한강 지류인 서강이 동-북-서쪽을 휘감아 흐르고,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가로막힌 경이로운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단종의 유배지를 청령포로 결정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탁견(卓見)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육지 속의 작은 섬으로 고립무원의 청령포를 무슨 수로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빠삐용’(1974)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이미 세 번이나 청령포를 다녀왔다. 한여름에도 봄철에도 청령포를 찾았지만, 가장 깊은 상념이 몰려든 시절은 삭풍의 한겨울이었다. 서강이 꽁꽁 얼어붙어 나룻배가 아니라, 걸어서 청령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칼바람이 얼굴과 귓전을 때리는데, 노산대(魯山臺)와 망향대에서 어린 단종을 떠올리려니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세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김시습 평전’(2003)에서 심경호 교수는 단종의 사사(賜死)를 끝까지 주장한 이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라고 기록한다. 단종이 세종의 아들 문종의 대를 이었으니, 단종을 죽이도록 세조를 교사한 인물은 두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늙은이들이 무슨 연유로 혈족의 손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조선 왕조의 태생적 한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성계가 개창(開創)한 조선의 권력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연합체였다. 양반 사대부의 협력에 크게 의지해야 했던 군왕들의 일방통행이 불가능했던 왕조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집현전을 통한 각종 제도개혁과 한글 창제 같은 대업을 이룸으로써 신권 강화의 기틀을 시나브로 만들어준 군왕이다. 문제는 병약한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왕권 약화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치적인 변곡점에 일어난 정변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양녕대군은 이 정변에서 일찍이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훗날 효령대군이 단종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일익(一翼)을 담당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란 요물(妖物)에 취해 인명을 살상하고, 제 한 몸과 일가 및 특정 집단의 편익을 도모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 와중에 희생당한 이들의 통절(痛切)한 사연도 다채롭거니와 노산군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가슴 짠하다. 한 살 위인 정순왕후와 재회의 기약도 없이 헤어진 채 노산대에서 한없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사연은 눈물겹게 다가온다. 요즘 세계는 전쟁광 트럼프로 인해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린란드를 탐하고, 베네수엘라를 침탈한 것도 모자라 이란을 공습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더니 다음 차례는 쿠바라고 적시한다. 이런 사태의 출발점은 권력에 도취한 자의 지독한 과대망상과 정신착란 아닐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15

사물의 소리

밤은 사물의 시간이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화양(華陽)에 이사 온 처음 몇몇 해에는 한밤중에도 여러 번 일어나야 했다.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내려가 보면 사위가 돌연 고요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사물들의 고요한 합창이거나 독주 혹은 교향곡임을 알게 되었다. 침묵하던 사물이 느닷없이 살아나 소리를 내는 신비한 밤. 만화영화의 귀재(鬼才)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天空)의 성 라퓨타’(1986)에서 영웅적인 소년 주인공 파즈가 동굴에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파즈에게 밤은 사물의 시간임을 일깨워준다. 고요하게 침묵하던 사물이 밤이면 제각각 소리를 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인은 방해석(方解石)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파즈에게 들려준다. 밤에 담긴 소리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각인한 이는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한밤중에 요하(遼河)를 건너던 기억을 반추하면서 밤과 소리의 상호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감각이 낮에는 눈으로 쏠리지만, 어둠이 장악하는 칠흑의 밤에는 귀가 감각의 중추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밤에는 훤히 들리는 게다. 도회의 밤에는 어둠이 깃들만한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야성(不夜城)처럼 환한 공간에서 인간의 감각기관은 퇴행 일로를 걷는다. 밤과 낮의 분별이 불명확한 21세기 20년대 아파트와 아스팔트와 대중교통은 태곳적 감촉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고작해야 층간소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낯을 붉혀야 하는 이웃 아닌 이웃들의 갈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밤에 들리는 게 어디 사물의 소리뿐이랴?! 우리 내부에서 요동치는 내면의 소리도 낮이 아니라, 밤 시각에 활성화된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자신의 내면과 만나지 못하는 현대인이 자기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각은 짜장 밤이기 때문이다. 창에 기대거나, 벽을 향하거나, 가부좌를 틀거나 우리는 깊은 밤에 고요히 내면을 응시한다. 그때 들려오는 아련한 소리에 귀 기울이면, 오래전에 잊힌 얼굴과 사건과 인연이 살아 나온다. 때로는 환하게 때론 흐릿하게, 혹은 강렬한 음악과 함께, 더러는 애틋한 연가(戀歌)와 함께. 그때의 그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잠시 생각한다. 입가에 미소가 머물기도 하고, 낮은 한숨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날들. 하지만 우리는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마저 퇴색한 시점에 감상(感傷)에 젖어 정신을 흐느적거리게 방치하면 아니 된다. 모든 떠나간 것은 그리운 법이지만, 떠나간 것들이 있기에 지금과 여기의 우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립고 아쉬운 정념이 우리를 휘감고 돈다 해도 이젠 어쩔 도리없이 고개 흔들어야 한다. 오지 않은 날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기둥 모퉁이가 쩍, 소리 내며 갈라지고, 냉장고가 윙, 하며 갑자기 돌기 시작하고, 보일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밤이다. 겨울밤이 사물의 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작별하려 한다. 화사한 봄날 사물은 어떤 소리를 우리에게 보낼 것인지, 궁금한 아침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08

다시 돌아오는 봄

계절의 순환은 경이롭다. 열흘 전인 2월 13일 마당을 살피다가 아, 하는 소리가 부지불식간에 나온다. 수선화 어린싹 몇 줄기가 뾰족하게 돋아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수선화 알뿌리를 몇 알 심어놓았는데, 녀석들이 해마다 잊지 않고 봄을 알리는 전령 구실을 하는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샛노란 영춘화(迎春化)가 어느새 담장 아래 환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이튿날 바위 틈새에서 튤립과 히아신스도 싹을 틔운다. 며칠 뒤에 학교에 갔더니 홍매(紅梅)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 돌 틈에서 크로커스가 보라색 시든 꽃을 달고 처연하게 삐죽, 모습을 드러낸다. 시든 꽃을 보건대, 필시 며칠 전에 마른 잔디 아래서 힘겹게 피어난 것 같다. 미안한 마음에 물을 듬뿍 뿌려준다. 생명에 절실한 물! 조금 늦든 이르든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에 새삼 마음이 뻐근해진다. 한번 먼 길 떠나간 사람은 돌아오는 법이 없는데, 초목은 그러지 아니하는 곡절이 궁금하다. 마당에서 자라는 네 종류 구근(球根)인 히아신스, 크로커스, 튤립, 무스카리는 대학 후배가 택배로 보내준 것이다. 그이는 작년에 고인(故人)이 되어 영영 작별한 인연이 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무슨 상념(傷念)과 만났는지 알 길 없지만, 올해도 여린 싹이 여기저기 돋아나는 걸 보니 자연 그이 생각이 난다. 다소 그늘이 진 얼굴에 떠오는 맑고 순정한 표정과 어색한 웃음이 일품이었던 사람. 만약 그가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네 종류 알뿌리를 전해주지 않았다면, 내가 아끼는 마당의 풍경은 상당히 쓸쓸하고 허전했으리라. 불가(佛家)에서 전해지는 말 가운데 ‘진공묘유(眞空妙有)’가 있다. 참으로 비어 있지만, 묘하게 존재한다는 의미다. 비어 있음(空)은 없음과 같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만,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 만물은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인연으로 서로 엮여서 어떤 형태를 가지며, 그 인연이 다하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진공은 사물의 본질을 가리키고, 묘유(妙有)는 사물의 작동 원리를 일컫는다. 얼핏 보면 상호 모순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만, 진공과 묘유는 만물에 내재한 근본원리이자 이치다. 한 알의 사과에서 우리가 들여다보는 것은 무엇인가?! 영양과 비타민, 맛과 향, 색과 형태?! 아니면, 아이작 뉴턴처럼 만유인력의 실마리를 당신은 사과에서 보고 있는가?! 사과 열매를 보면서 씨앗 하나와 흙과 물과 햇빛과 바람을 떠올려 보시라. 적절한 생육조건, 즉 인연이 생겨나서 씨앗 하나가 발아(發芽)하여 싹으로 자라고, 그것이 나무로 생장하여, 벌과 나비의 도움을 받아 수정하여 마침내 열매 맺었음을 상기하면 어떤가! 만약 이런 여러 가지 조건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난다면, 우리는 사과 열매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홍매와 크로커스가 피고, 수선화와 히아신스가 여리지만, 단단한 싹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면서 기약 없이 훌훌 떠나간 후배를 떠올린다. 부질없는 노릇이지만, 인지상정 아닌가! 삶에 허여된 ‘지금과 여기’를 치열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자명한 명제를 곱씹을 시각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2-22

그림으로 보는 조선 풍속도

지난 연말 ‘청도 인문학’ 종강하는 자리에서 어느 수강생이 툴툴거린다. 방학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12월 하순에 종강해서 2월 하순에 개강하는 것이니, 두 달 남짓한 기간이 방학이다. 이것은 여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누구에게나 한겨울과 한여름의 휴식은 필요하다지만, 그 기간이 유독 길게 여겨지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다. 필시 열렬한 수강생 아닐까?! 잠시 생각을 고른 나는 방학 중에 두 번 정도 인문학 특강을 함께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반색하며 ‘청도 인문학’ 수강생이 아닌 일반 군민들에게도 청강의 기회를 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듣고 보니 아주 생산적인 발상이다. 그리하여 청도 도서관장과 과장, 그리고 실무자와 협의한 끝에 1월 20일과 2월 3일 오전에 도서관 강당에서 특강이 이뤄졌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나는 동서양 그림에 얽힌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다. 그래선지 그림과 관련한 서책을 조금 읽은 편에 속한다. 한겨울에 열리는 인문학 강연 주제로 지나치게 무겁지 않지만,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그림이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감상이 들었다. 그런 연유로 혜원 신윤복과 식민지 조선의 나혜석의 글과 그림을 대상으로 강연하기로 한다. 1970년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 전신첩’에 실린 30점 풍속화 가운데 8점을 준비한다. 언젠가 큰아들 덕분에 읽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는 긴 제목의 서책에서 나는 신윤복의 그림에 담긴 조선 후기의 풍속과 만났다. 아주 평이하고 곡진한 글월로 부산대 강명관 교수는 독자들에게 날로 어지러워지는 조선 하대(下代)의 풍정을 소개한다. 그중에서도 ‘월하정인’이 눈길을 잡아맨다. 한여름 달밤에 두 남녀가 양반댁 담장 앞에서 은밀하게 사랑의 마음을 주고받는 그림이다. 문제는 야삼경에 하늘에 떠 있는 달의 형상이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초승달도 그믐달도 아닌 기묘한 모습의 달이 하계에서 희롱하는 남녀의 통정(通情)을 굽어보는 것이다. 저 달의 본령은 뭔가, 하는 궁금증이 찾아든다. 처음 ‘월하정인’을 보았던 당시 나는 크게 실망한 바 있다. 원근법(遠近法)도 없고, 정체 모를 달은 떠 있고, 한문이 보란 듯 찍혀 있는 생소한 그림. 1793년 8월 21일 한양에서 일어난 부분월식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란 사실을 나중에 확인하고 낯이 화끈거린 기억이 새롭다. 원근법이 금과옥조도 아니고, 그림과 화제(畫題)가 어울리는 전통 역시 나의 무지를 확인해준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재건의 기틀을 다졌다고는 하나, 혜원이 활동했던 시기의 조선은 그야말로 무너져가는 나라였다. 일반 백성의 삶은 곤궁하기 짝이 없었지만, 풍족한 양반들의 법도는 나날이 어지러워진 세월이었다. 자유분방한 혜원은 그런 양반들과 기생들의 한바탕 풍류를 가감 없이 그려냄으로써 18세기 후반의 조선 생활상을 곡진하게 그려낸 것이다. 화려한 색감과 담대한 구도, 적나라한 시선을 감추지 아니하는 정직한 화가의 시선을 유지한 혜원 신윤복. 그의 화첩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도 적잖은 가르침을 준다. 제한된 시공간과 인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지, 넌지시 귀띔하는 듯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2-08

꼰대의 입, 어른의 귀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다채로워졌다. 예전엔 노인 정도로 통용됐는데, 요즘엔 어르신, 시니어, 노인, 꼰대처럼 다양하다. 나이 드는 일은 자연적인 현상인데, 세태풍속이 일변(一變)하는 시기여서 마음이 편치 않다. 생명 가진 모든 것에는 생로병사가 필연인데, 그것을 거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오늘도 꺾일 줄 모른다. 데이비드 싱클레어 하버드 의대 유전학 교수는 ‘노화의 종말’(2020)에서 노화는 질병이고,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심장병, 치매, 암 같은 것은 질병이 아니라, 노화의 증상이라고 규정하면서, 노화 자체가 질병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나아가 노화는 질병일 뿐만 아니라, 만병의 어머니라고 단언하면서 노화는 늦추거나 멈추거나 심지어 되돌릴 수 있다고 확언한다. 나는 그의 주장에 일면 동의하지만, 노화를 역전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문제는 짧은 지면에서 다루기에는 방대한 영역과 맞닿아 있기에 여기서 논의하는 일은 그다지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요즘 불거지는 ‘특이점(特異點)’ 논란처럼 그냥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유해야 할 주제다. 각설하고, ‘꼰대의 입, 어른의 귀’라는 표현에 담긴 불편한 소회(所懷)를 잠시 풀어놓고자 한다. 나이 든 축이 조금 길게 입을 떼면 그는 꼰대로 격하되고, 인내심을 갖고 경청하면 어른이라는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생각한다. ‘노파심(老婆心)’으로 젊은이들에게 충고하려는 말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바람에 말이 길어지는 것은 다반사(茶飯事) 아닌가. 어떤 노인의 영혼과 정신은 청춘보다 시퍼렇게 살아서 대쪽보다 단단하고, 강철보다 견고하다. 어떤 청년의 심성에는 100세 영감의 편벽고루와 이기심이 똬리를 틀고 있다.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런 놀라운 대비를 수없이 보았다. 그들을 낳고 기른 부모와 사회-정치-문화적 환경에 순치된 애늙은이들이 설레발치는 이른바 ‘TK 정서’가 그런 본보기다. 공자는 제자들과 나눈 문답에서 ‘회인불권(誨人不倦)’을 강조한다. 사람을 가르침에 지쳐서는 아니 된다는 얘기다. 여기서 ‘회(誨)’를 파자(破子)하면, 매번 말한다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잘못하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거슬리는 대로, 마음에 어긋날 때마다 말로써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몹시 번거롭고, 배우는 자는 또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반면에 노자는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설파한다. 말로써 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는 의미다. 말로써 인간을 교화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함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나이 먹은 자들의 솔선수범과 언행일치가 말에만 의지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래선지 ‘논어’는 1만6000자 정도인데, ‘도덕경’은 5273자로 소략(疏略)한 편이다. 듣기에 장황해도 필요한 말은 경청함이 옳은데도, 말 때문에 꼰대로 몰고 감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허황한 말을 인내심 있게 듣는 노인을 어른으로 떠받드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지경에 이른 나이 든 자들의 증가를 희망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2-01

안과 밖

긴 한파(寒波)가 이어지고 있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를 더 매섭게 만드는 것은 칼바람이다. 바람에 칼날이 달렸다는 뜻을 가진 복합어 ‘칼바람’은 요즘 같은 추위를 잘 드러내는 어휘다. 지난 1월 20일이 대한(大寒)이었고, 지금 계속되는 한파는 대한의 끝자락이라 할 것이다. 하되, 2월 4일이면 봄을 알리는 입춘이다. 어쩌랴, 시작과 끝은 만나기 마련인 것을! 복층 베란다에서 창밖을 보면 여러 감회가 오간다. 서북풍이 휘휘, 소리 내며 지나가면 감나무 앙상한 줄기가 세찬 바람에 흔들린다. ‘세한도’의 소나무는 푸르름을 유지하지만, 전신을 떨며 고적(孤寂)하게 서 있다. 지나치게 자라나 이웃집 지붕을 관통한 장미는 전지(剪枝)된 채 갈색 이파리만 우줄 우줄 흔들린다. 가로등 전선도 어쩔 줄 모르고 바람에 자못 위태롭다. 눈을 들어 먼 곳을 보면 청도와 창녕을 잇는 20번 국도에 트럭과 승용차 무리가 가도(街道)를 질주한다. 스치듯 오가는 차량 행렬 기사들은 언제 다시 재회할지 알 도리 없다. 주말 아침부터 그들을 차가운 거리로 내몬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필시 그것은 생존 욕망을 채워줄 필수적인 경제활동일 터다. 삶의 기반은 오래 살아남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사로운 햇살이 보존된 안쪽 공간에서 밖으로 나가면 상황이 일변(一變)한다. 찬바람이 어느새 목덜미를 휘감고 살갗을 매섭게 찔러온다. 부신 햇빛 아래 웅크린 채 사위(四圍) 돌아본다. 꽉 잠기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새어 나온 물이 밤새 얼어붙어 굵은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다. 붉은 남천 이파리들은 허수아비처럼 몸을 비틀며 바람의 기세에 잔뜩 주눅 들어 있다. 잠시 숨 고르며 생각한다. 온실 효과로 포근한 베란다 안쪽의 공간과 차가운 대기에 노출된 외부의 차이를 숙고한다.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안과 밖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폭력적인 자연에 저항하여 인간은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그들만의 영역을 건설한다. 이름하여 공동체를 세운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공격에 무방비로 방치되지 않는 문명 공동체! 하지만 계급과 종교와 국가가 생겨나면서 문명 공동체의 허울은 쉽게 벗겨져 나간다. 문자 지식과 창칼의 무력과 우월한 경제 권력을 앞세운 소수의 인간 무리가 다수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문화가 뿌리 깊게 정착되기에 이른 것이다. 30만 년 사피엔스 역사에서 불과 1만 년 전에 형성된 계급과 지배-피지배 관계는 21세기 20년대에도 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맹추위 속에 누군가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혹자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한파와 맞서야 하는 엄혹한 시절. 여기서 떠오르는 장편소설의 놀라운 문장. “부자는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의 짧지만,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 나는 자유보다 평등을, 평등보다 형제애를 주장해왔다. 부자들이 내세우는 자유, 가난뱅이들이 외치는 평등이 아니라, 양자 모두 인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전제에 동의하는 ‘형제애’야말로 우리의 미래 아닐까. 안과 밖의 거리가 최대한 좁혀지기를 고대하는 차가운 아침이 지나간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1-25

참새를 위한 변명

경산에 있는 고층 아파트에 살다가 청도로 이사한 지 어언 12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고 있다. 도회 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들어온 데에는 까닭이 있을 터. 그 가운데 하나가 층간 소음이다. 10층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소년이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불러서 거실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언젠가 아이 엄마한테 그런 사실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애들이 다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왈가왈부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경험한 충격과 공포는 아직도 뇌리에 삼삼하게 각인돼 있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지만, 이런 절정 고수는 실로 만나기 어려운 법이다. 그때 나는 굳게 결심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촌에 층간 소음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다른 형태의 층간 소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에스파냐 기와를 얹은 나의 소담한 지붕에서 일어났다. 기왓장 사이마다 참새들이 둥지를 틀고 새끼 키우면서 잠꼬대하며 몸을 뒤틀거나, 기왓장 아래 나무판을 발톱으로 긁거나, 새벽마다 자기네 기상을 알리는 것이다. 햐, 이런 층간 소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찾아든다. 그런 일을 이미 알고 있던 일부 식견 놓은 건축주는 기왓장 틈새를 완벽하게 막는 시공법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참새는 천적을 피해 인가 부근에 둥지를 트는 인간 친화적인 새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에는 참새도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말에 ‘참’이란 접두어가 붙으면 ‘좋은’, ‘진정한’, ‘우수한’의 의미다. 참나리, 참깨, 참나물 같은 어휘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참새에 이르면 나는 생각이 썩 달라진다. 아무 곳에나 똥오줌 내갈기고, 시끄럽게 울어대면서 새벽잠을 깨우고, 여기저기 솜털이며 깃털을 날리는 불결하고 요란한 작은 조류에 지나지 않다는 게 나의 감상이다. 무엇보다 우두머리 참새가 짖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어그러지곤 한다. 사람을 비웃는 듯한 울음소리 때문에 아침부터 언짢은 심사가 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참새의 ‘참’자는 풍자(諷刺)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놀라운 발상의 소유자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집에는 여전히 헤아리기 어려운 숫자의 참새가 무상-무단으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조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는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요즘 농촌에는 완벽히 사라진 허수아비의 추억도 참새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문화혁명 시기 모택동의 지시로 3억 마리 이상의 참새를 잡아 죽인 까닭에 해충이 들끓어 식량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들린다. 그만큼 참새는 인간과 가까운 조류다. 세상에 ‘나’에게만 좋은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만 좋은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과율에 따라 서로 의지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관계와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을 되풀이한다. 일방적인 선과 악, 미와 추, 정의와 불의는 없다. 참새를 위한 어느 인간의 소박한 변명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1-18

‘연자가’에서 읽는 부모와 자식 관계

얼마 전에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의 5언 30행 150자의 ‘연자가(鷰子歌)’를 읽고 생각이 제법 복잡해진다. ‘새끼 제비의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틀리지 않을 성싶다. 어느 집 서까래에 둥지를 튼 제비 한 쌍이 네 마리 새끼를 애면글면 키워나가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진다. 부리와 발톱이 닳아 뭉개질 만큼 맹렬하게 ‘육추(育雛)’하는 어미 제비 부부. 한 달 내내 먹이 사냥과 언어 교육, 털 고르기를 마다하지 않는 부모 제비. 그러던 어느 날 새끼 제비들에게 깃털이 돋아 그것들은 이소(離巢)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생겨난다. 한 번 비상(飛翔)한 새끼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린다. 어미들이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새끼들은 대답이 없다. 빈 둥지 깊은 곳에서 어미들은 밤새도록 슬피 운다. 이 장면에서 시인이 어미 제비들을 통렬하고도 신랄(辛辣)하게 꾸짖는다. ‘제비야, 제비야 슬퍼하지 말아라. 너희는 마땅히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라. 너희가 새끼였을 때, 어미를 등지고 높이 날아간 그때를 생각해보라. 당시 부모 마음을 너희는 오늘 응당(應當) 알지니.’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는 속담이 절로 떠오르는 장면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학 작품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대개 부모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자식들을 호되게 나무란다. 그런데 ‘연자가’에서 시인은 부모 제비를 엄중하게 꾸짖는다. 언젠가 너희도 어렸을 적 부모 마음을 전연 생각지 않고 제멋대로 천방지축 날아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이제야 너희도 그때 부모 마음이 어땠을지 알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태곳적부터 인간은 세대 갈등에 시달렸을 터. 그것은 오늘날까지 유구하고도 연면(連綿) 부절(不絶)하게 이어진다. 자식은 부모가 답답하다고 비난하고, 부모는 자식들이 자기네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과학기술이 느릿하게 발달하던 시절에도 서로 괴로웠던 부모 자식들은 빛의 속도로 전개되는 4차 산업 혁명 시기에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다. “의대 갈 필요 없다, 3년 내에 로봇이 외과 의사를 대체할 것”이란 일론 머스크의 일갈(一喝)에 얼마나 많은 한국 학부모들의 간담이 서늘했겠는가! 자식들의 취향이나 적성 혹은 미래기획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지금과 여기의 평판과 자신들의 기대치만 앞세우는 부모들의 탐욕! 그로 인해 국가는 과학기술 인재를 잃어버리고, 청춘은 막다른 골목을 서성대고!···. 요즘 같은 시절에 30년 한 세대 차이는 그야말로 석기시대와 대항해시대 차이만큼 거리가 멀다. 그다지 깊지도 다채롭지도 못한 세상 경험과 거론하기조차 쑥스러운 독서량, 빈곤한 상상력과 태부족한 역사 지식으로 무장한 부모 세대의 닦달에 청춘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러하되 내 자식 의대 보냈다는 자부심으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철부지 부모들이라니! 21세기 20년대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배우고 다시 배우는 시간대다.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와 사물(事物) 인터넷이 일상화하는 시기에 부모들은 자식들 못잖게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상상해야 한다. 1200년 전 밤새 슬피 울던 어미 제비처럼 되지 않으려면!···.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1-11

소한(小寒)과 ‘세한도’

지난 며칠 동안 신년 강추위가 찾아왔다. 그저께인 1월 3일 청도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1.6도, 봉화는 16.7도였다. 그래도 예전에 맹위를 떨치던 ‘소한 추위’가 없어서 한시름 놓고 있는 형편이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아왔다. 아파트와 승용차로 무장한 현대 한국인들은 이런 옛말이 무척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차가운 날이면 추사(秋史)와 ‘세한도(歲寒圖)’ 생각이 절로 난다. 이조판서로 이름을 날리던 김정희(1786~1856)는 안동 김씨의 득세와 더불어 1840년 윤상도의 옥사와 관련하여 제주 대정(大靜)으로 귀양살이 떠난다. 고위직에 있을 때 문전성시(門前成市)의 경험을 기억하는 추사에게 위리안치(圍籬安置) 유배 생활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고초였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황량한 유배지에 귀한 서책을 바리바리 들고 찾아온 제자 이상적(1804~1865)에게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다. 중인 출신 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우선(藕船) 이상적에게 추사는 크게 감동한 모양이다. 논어 ‘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구절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也)”의 첫머리를 따서 화제(畫題)로 삼았다. ‘한겨울이 되어서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글귀는 변함없이 스승을 대하는 이상적의 마음 씀씀이와 닮았다. 그래서 화제인 ‘세한도’를 가로로 쓰고, 바로 그 옆에 세로로 ‘우선시상(藕船是賞)’ 네 글자를 쓴 것이다. 국보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여전히 많은 이의 사유와 인식에 자양분을 선사하는 귀한 문화자산이다. ‘세한도’와 더불어 해남 대흥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추사의 고된 유배 생활의 결과를 입증한다. 추사는 대정 유배길에 초의선사에게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가 쓴 ‘대웅보전’ 편액을 내리게 하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한다. 그런데 해배(解配)되어 귀로에 들른 대흥사에서 추사는 자신의 편액을 떼게 하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도록 부탁한 것이다. 천 리나 떨어진 외로운 섬 제주에서 8년의 귀양살이를 경험한 김정희의 내면세계와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훨씬 깊어지고 유장해진 것이 아닐까! 한겨울 북풍한설과 매서운 추위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서 있는 낙락장송처럼 의연하고도 굳세진 추사의 인품이 ‘무량수각(無量壽閣)’ 네 글자에 담긴 것 같다. 삐뚤빼뚤하되 둥글둥글한 자체(字體)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24절기 가운데 스물세 번째인 소한을 지나면서 우리 세대가 살아온 날들을 새삼 돌이킨다. 음습한 날이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야 했고, 콩나물 버스 안내양들이 추락사를 겪어야 했던 저 암울했던 1970~80년대! 도저히 밝은 미래를 꿈꾸거나 기대할 수조차 없던 군부독재의 잔혹한 고문과 투옥, 학살과 은폐, 용공(容共) 조작(造作)까지. 모진 겨울날이면 0.7평의 독방에서 겨울을 나야 했던 양심수들과 그들의 가족 생각이 우심(尤甚)해지곤 했다. 그런 칠흑(漆黑) 같은 죽음의 질곡(桎梏)을 넘어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 어린 것들에게 물려줄 자랑스럽고 따사로운 문화·예술의 나라 대한민국이 멀지 않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1-04

끝과 시작

벽에 걸린 달력을 보니 2025년 을사년(乙巳年)이 딱 사흘 남았다. 아, 하는 사이에 핑하니 1년 세월이 지나간 것이다. 시간은 나이 먹은 빠르기로 지나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100살 먹은 사람에겐 시속 100km로, 20살 청춘에게는 시속 20km로 시간이 흐른다는 얘기다. 양자역학자들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대중에게 그런 주장은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다. 불과 360일 전에 시작한 을사년 초입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탁상용 달력을 보면, 거기 기록한 일정에 의지해 무언가 떠올릴 수는 있겠지만, 즉각 떠오르는 사건이나 관계는 없다. 그것은 그만큼 무탈하고 평온한 한 해를 보냈다는 증거이리라. 2025년 을사년이 스러지면, 2026년 병오년(丙午年)이 막을 올린다. 과연 무슨 인연과 사안이 나를 기다릴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진다. 그것이 생명을 가진 것이든, 무생물이든 시작은 반드시 끝과 결합한다. 생로병사가 전자(前者)를 가장 명백하게 입증한다면, 12월 31일과 1월 1일의 대면은 후자(後者)를 증명한다. 그런 까닭에 시작과 끝은 항상 서로 맞물려 있다. 청년 시인 윤동주가 “시(始)는 종(終)이요, 종은 시”라고 쓴 것은 까닭이 있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노자는 ‘도덕경’에서 ‘전후상수(前後相隨)’를 말한다.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는 말이다. 학생으로 비유하면, 초등학교 6년 졸업하면, 중학교 신입생이 되고, 중학교 졸업반은 고교 신입생이 되는 이치와 같다. 이것은 생의 시작부터 종점까지 수미일관 적용이 가능하다. 최고령자라 할지라도 사자(死者)들의 북망산에 가면 신입 회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노자나 동주의 가르침에서 새겨둘 만한 게 하나 있다. 끝과 시작이 서로 분리될 수 없기에 우리는 관계와 인연을 신중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매개로 맺는 관계와 그것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성립하는 인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모든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업(業)의 실타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 이르다 보니 모골송연(毛骨悚然)하다. 1년 12달 365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에게 나는 얼마나 진정으로 말하고 행동했는지, 도통 자신이 없다. 나이 든다는 일이 유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거나, 허투루 대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사과하고 바로 잡을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경직된 노년의 사유와 인식은 큰 허물이다. 잘못한 게 있으면, 어린 시절부터 과감하게 사과하고, 그 행실을 고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공자는 “과이불개(過而不改) 시위과의(是謂過矣)”라고 가르쳤다. “허물을 고치지 않는 것, 그것이 허물”이란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오류를 고치고 사과하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근거 없는 자존심만 높아가고, 유연성과 관대함은 날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을사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 세상사와 사람들과 나의 일상을 잠시 돌아본다. 나로 인해 혹여 괴로웠을 분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 이순을 넘긴 나이에도 철이 없는 것이다. 그러하되 아름답고 환하게 빛나는 병오년이 여러분과 만나면 참 좋겠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28

이분법과 양비론

오늘은 24절기의 22번째인 동짓날이다. 우리나라가 속한 북반구에서 동짓날은 연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여름의 정점인 하지(夏至)와 비교하면 대략 5시간 정도 낮의 길이가 짧은 날이 동지(冬至)다. 어둠을 꺼리는 만큼 우리는 동지를 기점으로 다시 생의 약동을 꿈꾸기 시작한다. 밤이 가장 깊은 시각은 동시에 동트는 새벽의 전령이기 때문이다. 동짓날에 새삼 이분법을 돌이키도록 인도하는 것은 우리 생의 여러 모습이다. 한여름 소나기 지나간 자리에 찬연하게 빛나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삶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천변만화에 기초하여 진행되는 인생의 고빗길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관계와 인연과 사연이 자리한다. 그러하되 우리는 명쾌하고도 특정한 시각으로 인간과 세상을 재단한다. 이분법은 우리가 의지하는 매우 친근한 관점이자 행동 방침이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친구와 적, 선과 악, 미와 추, 정의와 불의처럼 단순하고도 강력한 분별과 차이가 이분법의 고갱이다. 예를 든 대상 가운데 전자는 우리의 영원한 벗이자 우방이며, 후자는 원수이자 악마로 화한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모순과 충돌, 대립과 갈등, 불화와 반목(反目)이 발원한다. 양자택일의 관점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분법은 상당히 강력하지만, 중간지대를 포기하기에 포용력을 완전히 상실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야’에 등장하는 폴리페모스는 외눈박이 괴물이다.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의 외눈을 찔러 맹인(盲人)으로 만들어버리고 시칠리아를 탈출한다. 폴리페모스처럼 하나의 눈으로만 대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이분법적 사고의 전형이다. 이분법과 달리 양비론(兩非論)은 제3의 시선을 전제한다. 양비론은 너희 둘 다 틀렸다는 관점에 기초한다. 양비론자들은 자기네의 관점만이 옳다는 전제 아래 이분법에 기초한 자들을 비난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다. 하지만 그의 관점이 변증법적인 논리에 기초하지 않는 한, 양비론도 사태의 핵심을 포착하지 못한다. 회색의 중립지대에서 그들은 지적인 유희에 탐닉한다. 1년 넘게 이어지는 내란 정국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엇갈린 시선이 상호 충돌하면서 여론 매체가 들끓는다. 여론을 추동하는 자들은 예외 없이 이분법적인 사고에 기대고 있으며, 일부 현학적인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포장만 그럴듯한 양비론을 제시한다. 양자를 넘어서는 대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대안의 출발점은 역사 인식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와 미래세대를 위한 올바른 선택의 근저에 지나간 날들의 오류와 실패가 자리해야 한다. 성공과 승리가 아니라, 실패와 패배에서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위인전의 쓸모는 위인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이 겪은 처절한 좌절과 절망의 출구 모색과 패배를 딛고 일어서는 강렬한 의지의 발현에 있다. 동지는 음기(陰氣)가 절정에 이르는 날이지만, 양기(陽氣)가 소생하는 첫 번째 날이기도 하다. 그런 연유로 선인들은 동짓날을 ‘일양(一陽)이 생겨나는 날’이라 보았다. 장쾌한 시각에 기초하여 이분법과 양비론을 넘어서는 위대한 통합과 전진을 염원하는 동짓날 아침이 환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22

가르친다는 것

이번 학기에 ‘문학과 영화, 그리고 나’ 교양 수업을 진행하고 나서 느끼는 소회(所懷)가 이 글을 쓰도록 인도한다. 학생들에게 고전 문학 작품들을 읽히고, 고전에 기초한 영화를 감상하게 함으로써 문학과 영화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게 강의 요지다. 그러하되 강의의 방점은 영화가 아니라, 문학에 찍혀 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나는 이른바 ‘최대강령주의자’에 속한다. 무엇을 하든 열렬하고 집요하게 대상을 파고드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강의 준비도 치밀하고 폭넓게 하고, 강의 시간도 최대한 준수하려 애쓴다. 당연히 휴강은 없다. 시인 동주는 “한 시간의 휴강은 실로 살로 가는 것”이라고 했지만,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시점에 그런 자세는 너무 한가하다는 생각이다. 학생들과 15주 강의를 함께 만들어가면서 느낀 뼈아픈 사실은 그들 내면에 지나치게 깊이 새겨진 사회적 수동성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이번 학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동성의 깊이와 폭이 심화-확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타자를 위한 배려가 실종되고, 각자의 좁은 공간에 자발적으로 유폐된 청춘들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언젠가 여기는 강의실이 아니라, 공원묘지나 무덤 속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졸거나 자거나 휴대전화 건드리면서 75분을 간신히 버티는 학생들의 무표정하고 생기 없는 얼굴과 눈빛을 보노라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세대차(世代差)와 ‘엄근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지만, 학과장 말에 따르면, 많은 강의실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공자는 지식인의 기본자세를 ‘묵이지지(黙而識知)’ ‘학이불염(學而不厭)’ ‘회인불권(誨人不倦)’ 셋으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나는 회인불권, 그러니까 사람을 가르침에 지겨워해서는 안 된다는 항목을 가장 요긴한 것으로 생각한다. 회(誨)를 파자(破子)하면, 매번 말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 부정적인 상황이나 언행을 보면 그것을 말로써 계도(啓導)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렇게 끈질기고도 정성스럽게 가르치는 행위가 아무 보답도 없이 시간과 더불어 스러질 경우, 완전히 속수무책이라는 데 있다. 그때 적용할 수 있는 영어 속담이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그 말에게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을 먹을지 말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최종적인 주재자는 교수나 부모가 아니라, 학생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말이 목구멍에까지 치밀어 오르지만, 꾹 눌러 참고 노자의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떠올린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이것이야말로 참교육을 실행하는 가장 좋은 방도다.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언행일치 교육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학부모는 가능하지만, 교사나 교수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거의 봉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독한 사회적 수동성으로 무장한 대학생들을 보면서 한국 교육이 재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행-재정적인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교육하는 방식의 혁신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으면, 인재 양성은 기대난망(期待難望)일 밖에 없을 것이다. 창밖 겨울비 촉촉하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14

무지와 빈곤

사노라면 우연한 계기로 변화와 마주하는 수가 있다. 무슨 연유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2012년에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레미제라블’을 읽게 되었다.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와 뮤지컬로 여러 차례 만들어졌지만, 정작 원작을 읽지 않았던 터였다. 6권짜리 2400쪽이 넘는 대작이었지만, 대가의 솜씨 덕분에 비교적 빠른 기간에 완독할 수 있었다. ‘레미제라블’ 첫머리에 위고는 쓴다.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런 종류의 책도 쓸모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위고 이전에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19세기 영국에 만연한 무지와 빈곤에 대한 소설을 출간했다. ‘올리버 트위스트’(1838), ‘크리스마스 캐럴’ (1843),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 ‘어려운 시절’(1854)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디킨스의 소설 작품들은 위고의 ‘레미제라블’만큼 울림이 크고 깊지 않다. 필시 그것은 디뉴의 미리엘 주교와 죽음을 눈앞에 둔 86세의 노정객 국민의회 의원 G 사이에 펼쳐지는 프랑스 대혁명 관련 논쟁 때문일 것이다. 왕당파이자 보수주의자 미리엘 주교와 진보적인 공화주의자 국민의회 의원 사이의 기나긴 논쟁은 소설의 백미(白眉) 가운데 하나다. 국민의회 의원은 말한다. “루이 16세 처형은 여성에게는 매춘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의 종말, 어린이에게는 어둠의 종말이오. 공화제(共和制)에 찬성함으로써 나는 그 일에 찬성한 것이오.” 그의 선택은 왕과 그 아내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무지와 빈곤에 신음하며 매춘과 노예 노동, 출구 없는 암흑에 빠진 가난한 다수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파괴적인 분노에 반대한다는 미리엘 주교를 반박하면서 의원은 말을 잇는다. “정의에는 분노가 있는 법이오. 올바른 분노는 진보의 요소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예수 탄생 이래 인류의 가장 힘찬 일보였소. 대혁명은 비천한 인간들을 해방했소.” 여기서 우리는 위고의 정치적 입장이 궁금해진다. 그에게는 왕당파와 공화주의자 양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같다. 어떤 영화나 오페라에도 이런 기막힌 서사는 나오지 않는다. 공연에 필수적인 상업적 고려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소설에서 독자는 무지와 빈곤에 시달리는 여러 인물과 대면한다. 장발장, 팡틴, 코제트, 에포닌, 가브로슈 등등을 거명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자기 손으로 무지와 빈곤을 극복한 유일한 인물은 장발장이다. 무지와 빈곤의 최대 피해자 팡틴은 매춘하다가 병에 걸려 죽는다. 그래서 위고는 여자가 비참한 경우에 빠진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미혼모임이 밝혀지면서 쫓겨나고, 저임금으로 바느질하다가 머리털을 잘라 팔고, 끝내는 거리의 여자로 전락해 죽어갔던 비운의 여인 팡틴! 고교교육을 의무화한 한국 사회는 무지와 작별했다. 하지만 빈곤은 여전히 사회 전반적인 문제다. 2014년 2월의 ‘송파구 세 모녀 자살 사건’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사회 안전망과 경제적 양극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창밖 바람이 차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2-07

내란의 시간

이틀 지나면 2024년 12월 3일 ‘내란의 밤’ 1주년이다. 다수 국민은 세월 참 빠르네, 할 것이지만 나는 다르다. 내란은 현재 진행형이고, 그 중심지지 세력은 내가 살고 활동하는 대구-경북이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어쩌다가 천하의 술주정뱅이 망나니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혀 1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간 말종의 하수인으로 지내고 있단 말인가?! 소맥 폭탄주로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이는 자는 “파렴치한 종북좌파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외쳤다. 겨울 초입에 다수 시민이 안온한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시각에 난데없는 칼잡이처럼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파렴치한 종북좌파 세력!’ 타령. 누가 진정 ‘파렴치한’ 종자(種子)인지 이제야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안팎이 닮아도 너무도 쏙 빼닮은 탐욕의 ‘비계덩어리’가 암수한몸 되어 합작한 굴욕과 수치의 내란이 어느새 1년에 가깝다. 우리가 애면글면 기대하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목되어 많은 국민이 기뻐하던 그 시각에 그자들은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사적인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파렴치한’ 내란을 획책하여 지구촌 전체를 경악시키는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다. 21세기 20년대 대한민국에 종북좌파 세력이 있다는 확신범이 일국의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난 세기 7~80년대, 군부독재의 화신 박정희-전두환의 철권통치 시기에 난무했던 종북좌파 책동을 4~50년이 지난 시점에 재활용하는 자의 정신과 뇌 상태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런 자를 아직도 맹종하는 인간들의 심신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작년 12월 4일, 그러니까 내란의 밤 다음 날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나는 청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강의 문학세계와 우리의 삶’을 주제로 2시간 강연했다. 강연 준비를 위해 전날 늦은 밤까지 자료를 만들다가 마주한 ‘파렴치한 종북좌파 타령’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고 말았다. 아, 정녕 이것이 나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란 말인가!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하다가 한강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했다고 한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이 내린 결론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1980년 5월 참혹한 광주학살을 경험하고 교육받은 세대가 한마음 한뜻으로 잔인무도한 비상계엄을 막아냈으니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파렴치하고’ 참람(僭濫)한 내란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고, 내란 수괴를 비롯한 다수 잔당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두 눈을 희번덕거린다. 영장 전담 판사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구속영장을 각하하는 몰염치하고 반역사적인 행태를 거듭하고 있다. 내란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면서 국민의 가슴에 뜨거운 울화(鬱火)를 선사하며 염장을 지르고 있는 형편이다. 매우 보수적인 인간 공자는 논어에서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음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크나큰 과오(過誤)를 저질렀지만,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 탓을 해대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1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이 못내 궁금한 시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11-30

옆집의 환삼덩굴

14년째 옆집이 비어 있다. 청도 화양(華陽)에 이사 온 후 옆집 주인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낡고 허름한 고가(古家)만 덩그러니 남아 사계절 내내 햇빛과 바람과 구름과 비와 눈에 고스란히 온몸을 내맡기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가 그 집이 서울 누군가에 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연히 새로운 주인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이는 돈 때문에 집을 샀으니까. 그리고 1년 남짓 지난 어느 여름날 느닷없이 인부들이 들이닥쳐 집을 허문다. 땅을 고르고, 쓰레기를 정리하면서 온갖 소음과 먼지를 선사하더니 사라진다. 그들 말로는 누가 고가 철거를 주문했는지, 새집을 지을 요량인지, 하는 어떤 정보도 들은 바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허망한 사건이 한여름 벌건 대낮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거였다. 그리고 10년 넘는 세월이 스르륵 지나고, 그곳에는 각종 뱀과 이름 모르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내가 던진 복숭아씨 하나도 용케 발아되어 크게 성장하여 해마다 유월이면 굵은 열매도 선사하는 기이한 사건도 생겨났다. 그곳의 유일한 지킴이는 감나무 몇 그루뿐! 동네 늙은 아낙이 작년부터 호박을 심어 먹는 것 말고는 옆집은 여전히 휑하게 비어 있다. 그런데 작년부터 반갑지 않은 방문객이 그곳을 찾아들었다. 환삼덩굴이다. 처음에는 몇몇이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더니 급기야 올해는 크고 작은 나무들 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장관(壯觀)을 연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나는 작년부터 그곳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울울창창 자라난 대나무 수백 그루를 정리했다.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온종일 그곳을 말끔하게 갈무리하는 것이 나의 일과 가운데 하나다. 환삼덩굴과 내 칼질에서 살아남은 대나무를 겨냥한 작전이 시작된다. 큰톱과 중간 톱, 전지가위, 삽, 쇠갈퀴로 무장하고 그곳으로 향한다. 아직도 쌀쌀한 오전 9시 반부터 일을 시작한다. 환삼덩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 먼지가 자욱하게 앞을 가린다. 지독한 녀석이다. 대나무 위로 자라나 나무를 억압하듯 찍어누르는 환삼덩굴의 위세는 나의 오래전 잊힌 분노를 생생하게 일깨운다. 한편으로는 환삼덩굴을 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나무 밑동을 가지런히 잘라서 정리한다. 거의 세 시간이 지났건만,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데, 일단 후퇴하자!’ 그런 심사로 잠시 휴전에 돌입한다. 다섯 가지 공구로 무장한 나의 맹렬한 진격에 환삼덩굴과 대나무, 우슬(牛膝)과 찔레 등속이 하나둘씩 무너진다. 그 사이 나의 머리와 얼굴, 온몸에는 진땀이 범벅되어 흐른다. 오후 4시가 지나서야 비로소 작업을 마무리한다. 환삼덩굴의 끈질긴 저항과 엉겨드는 끈적거림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체력과 정신력을 끝까지 시험하는 저 잔악무도한 환삼덩굴! 세상 살면서 환삼덩굴 같은 사람과 연을 맺는다면, 그것은 거의 천형(天刑)처럼 여겨질 터. 어떤 악한(惡漢)이라 해도 환삼덩굴처럼 끈질기고, 메케한 먼지 풀풀 날리며, 끈끈하게 안면몰수(顔面沒收)한다면, 과연 뉘라서 대적할 수 있겠는가?! 제발 영원히 사라져다오, 환삼덩굴아!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1-23

아, 1970년 11월 13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지난 11월 13일 오전 10시 30분, 내 입에서 갑자기 55년 전에 일어난 한국 노동 운동사의 대사건이 튀어나온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는 절규와 함께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라이터로 분신-자살한 전태일(1948~1970) 열사 이야기가 부지불식간에 강의실에서 발화(發話)된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불가사의한 일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면서 노동자들의 처절을 극한 노동조건을 동대문구청과 서울시 그리고 노동청에 알리면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한다. 당시 전태일이 노동청에 제출한 진정서를 바탕으로 어느 일간지가 1970년 10월 7일 보도한 내용을 인용한다. “노동자들은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적은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으며 근로기준법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첫째 주와 셋째 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도 하지 못할 형편이다. 이미 4~5년 전부터 받는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동대문구청과 서울시, 노동청 어디서도 전태일의 요구사항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근로기준법’을 불살라버린 전태일은 끝내 자신의 몸마저도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가 세상을 버린 30년 후인 2005년 서울시는 청계천 평화시장 인근에 전태일 거리를 조성하고, 청계천 버들다리 안에 전태일 기념 동상과 동판을 설치하여 그를 추모하고 있다. 전태일은 온몸을 불살라 한국의 극악무도한 노동실태를 나라 전역에 알렸고, 그 결과 ‘청계천 피복 노조’가 탄생한다. 황석영은 중편소설 ‘객지’(1971)를 발표하여 노동 문학의 효시를 쏘아 올린다. 이것은 1983년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이어진다. 인권 변호사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1983)으로 전태일 열사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기폭제 구실을 한다. 전태일이 세상을 버린 지 어언 55년, 그러니까 두 세대가 흘렀건만 이 나라의 노동실태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울산 화력에서 발생한 붕괴사고로 노동자 7명이 숨지는 비극적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통계에 따르면, 한국 전체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오늘의 수많은 전태일이’ 노동인권의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있다는 얘기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잘 먹고, 잘 살자 주의’ 이른바 ‘먹사니즘’이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정글과 다름없다. 위험의 외주화는 원청에서 시작하여 3~4차 하청(下請)에 이르러야 비로소 막을 내린다. 시간과 비용의 감축에 바탕을 둔 돈의 논리가 수많은 노동자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판국에도 대기업들은 여전히 ‘노란 봉투법’에 고개를 흔들어댄다. 비정규직-특수고용직-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법 바깥에서 최소한의 임금과 사회보험보장, 산업안전보건법 적용에서 제외되고 있다. 55년 전 산화한 전태일의 피맺힌 외침과 분신이 그저 고요한 메아리로 남은 셈이다. 기업의 이윤과 성장에 매몰된 경제 제일 논리를 주장하는 대기업 집단과 새로 출범한 이재명 ‘국민주권정부’의 각별한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을 촉구한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1-16

질문하는 인간

운이 좋아서인지 아니면 늦도록 일복이 많아선지 이번 학기에도 시간강사로 학생들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세계적인 문학작품과 그것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비교하면서 이모저모 생각하는 수업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과 ‘덤불 속’, 셰익스피어의 ‘햄릿’,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지바고 의사’,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내가 고른 작품들이다. 요즘에는 조르바를 논의하고 있는데,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을 때마다 신선하게 와 닿는 대목이다. 이미 넘치도록 익숙한 사물이나 관계에서 경이로움이나 신비로움 혹은 경탄을 경험하는 조르바의 놀랄만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에게는 진부함이나 밋밋함 같은 감성이 없는 것이다. 21세기 20년대 대학생들처럼 웃음과 슬픔, 환희와 절망 같은 감정이 스러진 세대를 일찍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들이 이 대목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혹은 온전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등굣길에 낯설게 다가온 사물이나 사람이 있는지 묻지만, 그들은 당황스러워한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거니와, 그런 생각 자체를 해보지 않은 까닭이다. 2019년 겨울 광주에는 눈도 많이 내렸지만, 해가 바뀌도록 전남대 교정에는 꽃이 쉬지 않고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꽃을 보면서 아끼는 후배의 성공적인 항암 투쟁을 기원하곤 했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그는 담도암의 공격을 이겨내는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난 새빨간 장미를 보면서 후배의 건강을 기원했던 내가 기억에 생생하다. 같은 대상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만일 그나 그 여자에게 대상을 낯설고 의미심장하게 대하고 이해하려는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더 나아가 그들에게 시인의 상상력과 감성이 자리한다면, 어떤 익숙한 인간과 관계와 사물이라 해도 그것은 언제나 신선하고 날카롭게 영혼을 찔러오는 감동과 경이의 순간을 선물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조르바는 아들뻘인 화자(話者)에게 툭하면 이런저런 질문 세례(洗禮)를 퍼붓는다. 자신만의 상념과 목적의식에 투철한 화자는 어쩔 줄 모른다. 대상을 새롭게 포착하는 사람은 늘 새로운 문제의식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는 언제나 질문하는 인간이다. 이것을 날카롭게 잡아낸 생화학자가 영국의 찰스 파스테르나크이며, 그 저작이 ‘호모 쿠아에렌스’(2005)다. 인간이 진화 사다리의 정점에 오른 동기를 파스테르나크는 직립보행과 시야 확대, 자유로워진 두 손과 엄지손가락, 언어 소통 능력, 생각과 기억, 추론과 연결된 대뇌 피질 신경세포 등을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적 호기심에 근거한 ‘질문하는 인간 (Homo quaerens)’이다. 궁금증을 가지고 그것을 해소하는데 주력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침팬지의 차이?! 무학(無學)이나 다름없는 그가 지식인 화자를 가르치고, 인생의 비의(秘意)를 일깨워주는 것은 경험뿐 아니라, 경탄에서 발원하는 질문에 기인한다. 묻지 않는 인간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