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③유고슬라비즘의 확산

1848년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 왕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두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1848년 7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러시아마저 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 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훗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은 탄력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 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헝가리는 이들에게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합정당 내의 세르비아인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때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였으니, 밖에서 보았을 때 크로아티아인은 방관자로 낙인 찍혀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훗날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31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②문예부흥의 발로 ‘일리리어니즘’

1805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은 아드리아해의 북쪽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이스트라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접수해버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사바강 남쪽지역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까지 접수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통째로 묶어 ‘일리리아’라며 식민지배의 속주라고 분명히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러한 역사적 무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바람을 탔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슬라브민족 그들의 선인이 일리리아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제국 당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던 고대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도매금으로 몰아서 붙여버린 것이다. 자칫 남슬라브민족 전체가 일리리아민족에서 파생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즈음에서 크로아티아인을 일리리어니즘으로 일취월장 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이곳을 점령한 합스부르크제국마저도 이곳에 괴뢰정권을 만들어 왕국 이름을 ‘일리리언왕국’이라며 역사를 우습게 만들고 말았다. 뒤이어 크로아티아 언론이 한발 더 나아가 ‘일리리어니즘’을 핵심 주제로 각 지역의 지식인들의 주장을 시리즈로 싣는다. 모든 슬라브인이 살아가는 땅은 일리리아인 혹은 크로아티아인 영토라는 주장까지 대두된다. 이를 계기로 스스로 발칸반도 선주민을 받아들이면서 원 뿌리를 더 먼 과거까지 박아버린 셈이다. 그들로서는 나폴레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법하다. 용기백배한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도서관을 개관하면서 문예부흥에 기치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동원해 일리리아 음악과 전설과 설화까지 샅샅이 뒤져 살려냈다. 일리리아인의 전설을 동원해 흙으로 돌아간 지 수천 년이 지난 전사를 일으켜 세워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마치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으로 변신해 되살아나고, 알렉산드로스가 하등 상관없는 지금의 마케도니아공화국 민족영웅으로 되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과 세르비아인, 그리스인들 복장 터지는 일일 게다. 크로아티아 귀족은 물론 중산층까지 지지에 나서며 크로아티아 전역은 물론 슬로베니아와 가만히 있는 보스니아까지 합쳐 일리리아 남슬라브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19세기 초, 언론인들까지 가세한 ‘일리리아운동’은 언어의 통일로 일련의 성공을 거두면서 정치와 종교,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이들의 꿈이 확대되면서 남슬라브 단일국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상은 크로아티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분포해 살아가던 세르비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슬로보니아지역, 달마티아까지 지지를 이끌어 냈다. 실로 나폴레옹과 일리리아의 힘이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1835년 ‘크로아티아 신문’이 발행된다. 뒤이어 문학잡지까지 세상에 빛을 보면서 남슬라브어의 통일과 남슬라브민족의 이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고 힘을 얻는다. 이에 귀족들까지 합세하자 크로아티아의 넓은 지역과 심지어 세르비아까지 즐겨 사용하던 ‘쉬토방언’으로 쓴 논문 등을 통해 미래의 크로아티아 통일국가에 대한 청사진까지 세상에 빛을 본다. 남슬라브민족 쉬토방언이 표준어로 성은을 입은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일리리아주의와 슬로베니아의 그들만의 리그는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하룻밤의 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가 일리리아주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민족의 단합에 이보다 더 좋은 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8 파리혁명과 독일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지켜본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남슬라브족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슬로베니아는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스스로가 주역이 되어야 한다며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늘 자국 내 이익과 시류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어쭙잖은 것을 벤치마킹해 크로아티아의 전 지역에서 헝가리어를 학교와 관공서에서 공식어로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법안까지 만들어 통과해버렸다. 기가 막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에 달려가 징징 짜면서 하소연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 정부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네 말도 맞고, 저들 말도 맞다 했다. 이를 비판하는 세력도 있게 마련이었다. 1843년 크로아티아 이반 쿠쿨레비치를 비롯한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크로아티아 국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현실과 정체성을 장탄식했다. 그리고 남슬라브민족의 단결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단합을 위한 민족회의를 최초로 개최했다. 이반 쿠쿨레비치의 연설이 대 헝가리 투쟁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의 간절한 호소와 노력으로 1845년 크로아티아 자치정부가 부활을 맞았고, 헝가리에 빼앗긴 주권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민족의 자존심인 종교 역시 헝가리교구에서 벗어나 자그레브 주교관구의 대주교관구 승격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17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①무한 폭력의 싹이 자라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합스부르크제국 최전선이 크로아티아라면, 오스만트루크제국 최전선은 세르비아가 된다. 이때부터 가공할 폭력의 역사적 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세르비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지배지역인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 지방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왔던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알바니아와 보스니아로 이동했고, 북동쪽의 살기 좋은 달마티아로 들어가기도 했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터키제국 국경선의 경우 세르비아인이 거주민의 3분의 1에 달했다. 세르비아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터전을 옮겨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목숨을 건 국경탈출은 오랫동안 이어지면서 타국 내 세르비아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고, 훗날 대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 이들의 후손들은 자진에서 혼란을 부추기다 폭력의 선봉에 선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하층민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친 헝가리 인사들에 의해 선진문물 헝가리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자칭 정치 지식인의 외침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가련한 짝사랑은 차별을 가져왔다. 헝가리인은 크로아티아인을 미개인 취급을 했으니 말이다. 한편으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영웅 토미슬라브는 물론 민족의 기원을 찾아내 역사를 기록했고, 중세 왕국 발전과정과 찬란한 문화의 향기를 덧입혀 자존감까지 충족했다. 오스만과 마지막 전투 ‘피의 평원’도 새롭게 조명했다. 그들만의 성경이 발간되는가 하면, 크로아티아 전설이나 설화 등 사연을 들춰내 아픔을 노래하면서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고 고고학적, 인류사 연구가 이루어지며 그 뿌리를 더 멀리 더 깊숙하게 박아 놓았다. 종교의 정통성과 민족성을 결부해 하느님으로부터 일방적 동의를 얻는다. 더불어 유럽에 불어 닥친 르네상스를 경험한 해외파들이 조국 크로아티아를 찾으면서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민족 자주성과 민족성에 대한 의식, 즉 ‘우리(We)’와 ‘그들(They)’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크로아티아 민족 정체성 형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약 세르비아처럼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면 단절과 암흑의 시대를 보내야 했을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에 들게 됨으로써 사회경제적 분야는 물론 문화발전과 국민의식이 함께 상승일로를 걸었다고 봐야 한다. 이에 힘입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주의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단어에 의기만 충만해지게 된다. 실상은 크로아티아 토미슬라브가 세운 최초의 중세 왕국은 후손들이 헝가리에 복속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들이 선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시대별, 지역별로 각기 다른 대국의 그늘에서 숨 쉬며 살았기 때문이다.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베네치아 영향 아래,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 지역은 헝가리 지배하에, 크로아티아 서쪽 아드리아해로 불쑥 튀어나간 이스트라반도는 오스트리아 영향 아래,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는 중세 해양국가 라구사공국으로 진화(?)되면서 19세기를 맞는다.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는 주위로부터 억압 받으면서 성장했고, 그 영향으로 가톨릭국가가 생겨났다. 과정과 결과가 말하듯 이때부터 세르비아와 여타 발칸의 여러 지역과 갈라지면서 문화적 이질감이 형성된다. 민족성과 가치관마저 차이를 보이며 누가 보더라도 도무지 합쳐질 수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하나의 남슬라브 나라를 기세 좋게 추진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포함해 살육과 내전의 씨를 뿌리고 있었던 셈이다. 각설, 민족주의 탄생에서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예술과 문화와 문학과 언어로 찬란하게 옷을 입힐 스토리텔링만 남았다. 민족이동부터 발칸정착, 주위세력들로부터 침략 받으면서 나름의 문화로 승화시킨 자신들만의 종교와 문화적 자존, 그리고 민족 정체성에 완성을 이루어 내고야 만다. 민족 정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은 토착세력 토대 위에서 비잔티움제국 문화와 프랑크, 로마교회, 합스부르크제국, 게르만 문화뿐만이 아니라 헝가리 전통적인 문화까지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면서 접목됐다. 그야말로 다양성의 짬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는 고유한 문화와 동일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아이러니를 가감 없이 내보였다. 우리만의 고유한 언어의 통일과 주변국들 견제를 위해 만들어낸 절박한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필요는 창조의 어머니니까. 그런데 크로아티아 역사에서 전혀 의도치 않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을 꺾으며 기세를 이어갔다. 비록 해군이 넬슨 제독에게 패해 영국 입성에는 실패했지만, 프랑스 육군은 전 유럽에 악명을 떨쳤다. 나폴레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805년 아드리아해의 북쪽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이스트라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접수해버렸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03

피의 평원과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태동 ②서유럽 문화권으로 흡수

13세기 중반,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에 노출되면서,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기세를 올렸다. 반대로 억압이 가중된 계층도 있었다. 봉건왕조 압제가 농민을 괴롭혔고,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면서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자 농민항쟁을 불러왔다. 교회 개혁을 약속했던 프라하 카를대학 학장 얀 후스가 오히려 로마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당하고 만다. 권력에서 한 발자국도 내려오지 않으려는 봉건영주 반들의 승리였다. 교회가 부패하면서 수도원은 물론 수사들까지 탐욕에 물들자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취급했던 보고밀교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설상가상,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에서 승리한 오스만트루크제국은 비잔티움제국을 점령하면서 파죽지세로 서진을 이어갔다. 1463년 보스니아 점령에 이어 세르비아 마지막 수도 스메데레보를 차지하고 크로아티아를 넘보았다. 헝가리와 함께 힘을 합친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은 요새를 만들어 최후의 방어막을 치면서 버티기에 들어갔으나, 오스만제국은 마을을 약탈하는 등 주변을 공격하면서 이들의 힘을 소진시켰다. 1493년부터 대치상태로 수십 년간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크로아티아는 그야말로 황폐해져갔다. 주민이 떠난 자리엔 잡풀만 무성하게 자랐고, 일부 수비병력 역시 의욕을 상실했다. 결국 미르코 데렌친을 중심으로 한 크로아티아방위군은 ‘피의 평원’, 즉 크르바브스코평원(지금의 우드비나Udbina) 전투에서 8천 여 오스만제국의 기병들에 의해 도륙 당한다. 훗날 세르비아에 코소보 ‘검은 새의 들녘’이 있다면, 크로아티아 사람들 가슴에 ‘피의 평원’이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로 살아나 가슴을 쿵쿵 두드리게 된 것이다. 뒤이어 1526년 8월 29일 헝가리 러요시 2세가 오스만제국 쉴레이만 대제와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헝가리 왕조 대가 끊어지자 러요시 2세의 여동생(신성로마제국으로 시집간)을 빌미로 신성로마제국황제이자 합스부르크왕가 카를 5세에게 흡수된다. 이는 헝가리로서는 불감청고소원이었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위협을 합스부르크왕가 우산 속에 몸을 숨기며 살아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크로아티아 역시 합스부르크왕가에 편입되면서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1세가 헝가리 왕과 크로아티아 왕으로 추대된다. 헝가리가 합스부르크제국에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도 따라들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세르비아나 보스니아처럼 오스만트루크제국 하에서 암울한 세기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유럽의 르네상스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할 수 있을 법하다. 이로써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과 헝가리, 보헤미아, 북이탈리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내륙까지 지배하면서 거대제국을 형성했다. 이때부터 서방정벌을 이어가던 오스만트루크제국과 본격적인 양대 산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발칸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비스듬히 대각선 그으면, 위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 아래는 오스만트루크제국에 편입이 되면서 앞서 거듭 언급한 것처럼 20세기 폭력의 경계가 그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크로아티아는 점차 합스부르크왕가 아래에 놓이게 되고, 가톨릭문화권에 자연스럽게 흡수된다. 크로아티아 땅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왕가는 오스만트루크제국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지금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사이에 최전방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때 이슬람제국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한 세르비아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남슬라브민족정착촌’을 형성하면서 국경 수비대를 만들어 실전에 배치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일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중이라 몸 바쳐 충성을 다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오스만트루크와의 잦은 충돌 속에 세르비아인은 최전선에서 인간방어벽이 되어주었다. 또한 헝가리 봉건 영주에게 반기를 드는 토착세력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이들 세르비아인들을 ‘하이두끄(Hajduk)’라고 불렀는데 이를 직역하면 ‘산적’, 좋은 말로는 ‘의적’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세르비아 용병들이 승리를 거두면 토지로 보상해 주었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 영주 반들이 토지를 빼앗을까 오스트리아에 충성해야 했다. 이 일로 인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국경에 몰려 살게 된 것이다. 중간 방어선은 18세기까지 이어지면서 대략 10만 여명의 군인들이 주둔했던 적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가톨릭 열기가 급격히 퍼지면서 정교회 세르비아인에 대해 반감이 고조됐고, 정교도 세르비아인을 개종키 위한 정책을 폈다. 따라서 세르비아 용병들 지위가 하락하고, 숫자가 줄어들게 된다. 그런데도 세르비아인은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훗날 이들의 후손들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대부분 크로아티아 괴뢰정부 우스타샤에게 학살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2-10

폭력의 동반자 크로아티아 ②발칸반도 또 하나의 민족주의

크로아티아는 역사적, 시기적으로 세르비아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같은 지역을 두고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다는 뜻이다. 사정이 어찌 되었던 현재 크로아티아 땅은 그리스와 로마 비잔티움제국을 거쳐 바이킹 노르만족, 헝가리, 베네치아와 오스만터키에 이어, 오스트리아, 독일 등 지속적으로 외부 세력의 영향 아래 들었다는 것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 지배에 들기 시작하면서 한 국가 내에서도 자그레브를 중심으로 한 내륙과 헝가리와 세르비아 경계인 보이보디나, 그리고 아드리아해의 해안 도시 달마티아로 구분되면서 경제는 물론 극명한 문화적 차이를 보였다. 서기 803년 샤를마뉴대제가 위용을 부릴 당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비잔티움제국의 동방정교에서 로마가톨릭으로 자연스럽게 개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에 있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정교 문화권과는 본격적인 경계선이 형성된다. 그러나 적어도 10세기 초까지 달마티아 지방은 오랫동안 비잔틴제국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에 소속되어 있어 가톨릭인 자그레브와 지역적 경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의 크로아티아 지도를 펼쳐놓고 경계 짓는다면 오류란 뜻이다. 로마 가톨릭과 서유럽문명권에 동승한 크로아티아는 9~11세기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과거에 로마제국 당시 세워졌다가 아바르족에 의해 파괴된 100여 개의 교회를 새롭게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초기의 로마네스크양식 교회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어쨌거나 비잔티움제국 발아래 호시탐탐 독립의 기회만 엿보던 크로아티아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불가리아가 비잔티움제국에 반기를 들면서 비잔티움이 눈과 귀가 불가리아로 향했을 때 불이불식간에 독립을 선언해버린다. 더구나 지리적 이점과 국제정세 흐름을 타고 무역과 상업으로 부를 축적해 귀족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재산을 교회에 환원하면서 권위는 물론 정통성까지 충족하려 했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면서 교회에 재산을 헌납하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선물로 승화되고, 크로아티아 군주들은 로마교황으로부터 하느님 은총과 함께 충복으로 인정을 받는 개가를 올린다. 기실 하층민으로부터 권력과 정통성을 부여받는 그 이상도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크로아티아인들 삶에 가톨릭이 깊게 파고들면서 아드리아해 족장이던 토미슬라브(재위 925~928)에 의해 독립국가로 우뚝 선다. 912년 비잔티움 황제 알렉산드로스가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성기를 조각해 원형경기장 멧돼지에 붙이고, 이교 제사를 지내며 성불구를 치료하기 위해 애를 쓰는 등 정상이 아니었다. 이 광기 어린 황제는 913년 6월 6일에 쓰러져 죽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불가리아 시메온이 반기를 들었고, 크로아티아가 이 틈바구니를 이용해 ‘크로아티아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왕국을 선포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토미슬라브는 세르비아 듀산왕과 마찬가지로 대크로아티아주의 원조로 추앙받게 된다. 로마교황 존 10세로서는 교권의 확장을 반기면서 독립국을 승인하기에 이른다. 토미슬라브는 교세 확장에 노력을 약속하면서 충성 맹세를 한다. 그는 서로마를 위협하는 헝가리 마자르족의 공격을 일선에서 막아낸 혁혁한 공로로 로마 교황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는다. 한발 더 나아가 로마와 연합군을 꾸려 제1불가리아제국을 선제공격하자고 나섰다. 시메온이 죽고 없는 제1 불가리아제국과 한판 승부에서 크로아티아가 승리를 거두면서 크로아티아 왕국은 승승장구한다. 935년 크로아티아 왕 페타르 크레시미르는 아드리아해 북부 달마티아를 비롯해 해안을 따라 리예카는 물론 남쪽 헤르체고비나 모스타르에 이르는 네레트바강까지 영토를 넓혔다. 크레시미르는 로마 교황을 넘어 비잔티움제국 바실 2세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왕으로 공식 인정을 받아 명실공히 왕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온전히 왕국의 기틀을 세운다. 이처럼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크로아티아왕국은 11세기 후반 뻬타르 크레시미르 4세를 정점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고, 이때 11세기 소아시아에서 등장한 셀주크투르크의 군사적 압력은 비잔티움제국 세력 약화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 틈바구니를 역이용했던 크레시미르 4세는 아드리아해와 달마티아 전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중세 왕국의 면모를 갖춘다. 아드리아해 무역권을 장악하자 신흥 귀족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크레시미르 4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죽자 복잡한 후계 구도가 벌어진다. 여러 도시의 영주 ‘반’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설쳤다. 이때 로마교황 의중을 간파한 크로아티아 중동부 도시 슬라보니아의 반이었던 드미타르 즈보니미르가 교황으로선 더없이 충성스럽게도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맹세하면서 로마교황청 후원으로 왕좌에 오른다. 눈치가 빠르고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읽는 눈이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1-13

폭력의 동반자 크로아티아 ①대크로아티아주의 - 토미슬라브

세르비아의 영원한 맞수 크로아티아는 10세기 초 남슬라브족 중 발칸반도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왕국을 세웠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비잔티움제국과 로마교황 사이에 이해가 맞물리는 현장이다. 크로아티아지역 아드리아해 항구도시 역시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에 있었지만, 점차 프랑크왕국 카를대제에 의해 복속되고, 북서부와 남동부로 발칸반도가 나눠지면서 두 제국의 영향에서 까닭 없이 보냈다. 긴 역사에 있어서 아주 짧은 기간에 독립왕국을 세웠을 뿐 대부분 이민족 영향을 받으며 제국으로부터 피지배 민족으로 살거나 자치권을 획득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의외의 효과가 나타났다. 현재 아드리아해의 빼어난 풍광을 비롯해 중세 유적들이 크로아티아 곳곳에 산재해 관광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자 국민 생활 수준 역시 몇 단계 상승한다. 크로아티아는 남슬라브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 5~7세기경부터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진출해 정착하면서 성장을 거듭한다. 일부 크로아티아 역사가들은 그들은 여타 남슬라브민족과는 다른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키운 샤르마냔(Sarmatian)인의 일파라고 주장하면서 남슬라브민족과 일단의 선긋기를 시도한다. 역사적으로 보헤미아지방과 폴란드 남부를 정복했으나, 발칸반도로 이주하면서 남슬라브족과 섞여 문화가 통합 흡수되고 동화되어갔을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공허한 소리일 가능성이 높다. 세르비아에게 역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수준이랄까? 7세기에 이르러 온전히 발칸반도에 정착한 남슬라브민족은 민족적 기원만 같을 뿐 역사가 전개되면서 단절과 고립, 그에 따른 종교와 경제력 차이, 사회제도, 관습 등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어졌던 탓에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아드리아해 바닷가에 그리스와 일리리아(Illyria)인들(알바니아인 조상격)이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정착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마지막까지 로마를 괴롭힌 전사들이었다. 이후 로마제국 우산 아래서 풍부한 물산으로 인해 로마제국 소비재 생산지로서 빠르게 도시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해안, 즉 달마티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주로 일리리아인)은 지속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다. 캅카스 아르메니아 선조인 아바르족의 침략과 훈족 역시 꾸준하게 약탈을 이어갔다. 로마가 동‧서 로마로 갈라지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은 자연스럽게 비잔틴제국의 영향으로 정교가 깊게 뿌리 내린다. 그리고 훈족의 침략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무주공산이 된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몰려들었다. 우크라이나를 지나, 헝가리 판노니아평원(부다페스트 지역 대부분)과 도나우강 건너 발칸반도까지 먼 길을 이동해온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하면서 깊숙하게 뿌리내린다. 6~7세기 이곳은 비잔티움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들은 유목민족과는 딴판으로 느리면서도 습관적 이동에 인이 쌓였다. 그러다 기름진 땅을 만나 정주생활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인구가 늘어났다. 이들은 아드리아해 북쪽 바닷가부터 흑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삶을 이어갔다. 그리스 북서부와 지금의 알바니아,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지방 전체가 남슬라브민족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때로는 훈족과 어깨를 당당하게 하면서, 혹은 아바르족과 손을 잡는 등 비잔티움제국은 물론 게르만족이 세운 프랑크와 대결구도에 돌입하기도 한다. 이로써 발칸 내륙과 아드리아해 도시들은 오롯이 남슬라브민족 차지가 된다. 이때 세르비아, 불가리아, 슬로베니아와 함께 크로아티아 역시 독립적인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터전을 닦는다. 크로아티아 선조들은 달마티아 해안가와 아드리아해 가운데 코르출라 지역 등 여러 섬에까지 정착하면서 영역을 넓혔다. 사실 남슬라브민족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비잔티움제국이 아바르인을 물리치기 위해 크로아티아인을 제국의 군대에 편입했다는 기록(헤라클리우스황제/ 재위 610~641년)이 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비잔티움제국의 뒷배를 믿고 세르비아인과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는 역사적·시기적으로 세르비아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같은 지역을 두고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다는 뜻이다. 크로아티아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 선조가 내륙으로는 지금의 헝가리 땅이자, 헝가리 선조들이 최초로 나라를 세운 판노니아 평원에서부터 보스니아 지방을 거쳐 몬테네그로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 자리 잡았다고 거품을 문다. 세르비아 사가들 시각으로선 가당찮은 주장이다. 이들은 비잔티움제국을 근거로 든다. 7세기에는 발칸반도 대부분을 세르비아인들이 차지했으며, 9세기 말에는 달마티아까지 정복했노라 주장한다. 현재 크로아티아 지역 거의 모든 땅을 세르비아인이 정복했다는 말이다. 서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면, 둘 다 틀렸거나 둘 다 맞는 주장이다. 지도는 역사가 그려놓은 화판이라고 하는데, 제각각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 답은 없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2-30

살육의 서막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인류는 폭력과 살육의 연속이었다. 무지한 인간이 신념을 지니면 더욱 무서운 법, 만약에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광폭한지, 얼마만큼 폭력적이고 악해질 수 있는지, 자신의 이익에 얼마나 이기적일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과거로 돌려보내는 것은 기억이고, 미래로 가는 것은 꿈이다. 발칸반도 폭력의 중심에 섰던 권력, 유고내전과 보스니아 전쟁, 그리고 민족을 앞세운 권력욕에 매몰된 인간들에 의해 자행된 코소보 살육의 현장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대한민국 해방정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정권에서 자행됐던, 당대 유명한 오제도(吳制道) 검사가 기획하고 이승만이 승인한 국민보도연맹사건(國民保導聯盟事件)에서 죽어간 수만 명의 억울한 주검 앞에 그 누구도, 백주대낮의 세상이 도래했다고 해도 책임지는 이가 없는 세상이다. 희대의 살육자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이다. 뒤이은 월남전, 중동전쟁을 넘어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청소한다면서 자행한 제노사이드가 21세기에도 버젓이 행해지고 있다. 강대국은 이익이 나지 않은 곳에 눈 돌리지 않는 법, 어쩌면 재고 넘치는 순 구제 무기라도 팔아먹으려면 그마저도 부추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일평생 호위호식하며 몸을 살찌우고 이름 없이 죽어간 인물은 부지기수다. 그나마 악에 물들어 추호의 의심도 없이 살육에 앞장선 인물에 비하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독한 고독을 이겨내고 인류 평화를 밝혔던 역사 속 인물이 주는 메시지는 결국 꿈과 희망을 잃지 말라는 뜻이다. 현실보다는 역사에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조선의 폭군 연산군조차도,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 했다. 이것이 ‘기억의 힘’이다. 되돌아보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서두르지도, 넋을 놓아서도 안 된다. 아무리 두려워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 과거에 아픔이 있더라도 우리의 미래를 위해 깊은 곳을 탐사하는 내시경으로 활용할 일이다.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 플리트비체 물길 따라 흐르는 장엄한 풍경, 아드리아해 진주 아름다운 항구 두브로브니크 성벽에 올라서서 윤슬 반짝이는 바다는 여전히 추억에서 반짝이고 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중세 골목골목을 누벼가며 장검을 찬 기사가 된 양 폼을 잡고, 골목 비탈길에 앉아 나 홀로 맥주를 홀짝거려본 기억도 그립다. 달마티아 해변에서 항구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시간, 달마티아 출신 최초로 로마 황제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년을 보낸 궁전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에 압도당했던 기억은 여전히 설렌다. 성도미니우스대성당의 고즈넉한 맛과 함께 신을 향해 흐르는 인간의 물결은 보이지 않는 신의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자그레브 밤거리를 대한민국인 양 휘청거린 경험은 치기의 아찔한 추억이다. 자그레브 옐라취치 광장에서 어린 학생들 단체사진을 찍어준 일, 이 모든 것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명강사는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다. 삶처럼 베테랑 여행자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한 법, 길을 걷다가 보면 소도 보고, 중도 본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가 산 입에 거미줄 치게 두겠는가, 어찌 소인처럼 작은 이익과 아름다움에만 얽매이겠는가. 삶은 길에서 배운다. 유랑민의 본능이 살아나면 폭력의 아픔과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움에만 빠져 하늘을 우러러 찬사의 목청만 높일 일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드리아해 진주 두브로브니크 성에 올라 둘레를 몇 발자국만 걸어도 과거 아픈 상헌흔이 채 아물지 않은 채 생살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몬테네그로 자칭 용사들이 한 명의 크로아티아인도 남겨두지 않겠다며 무차별적인 포격의 현장이다. 크로아티아가. 일명 ‘문화전쟁’이라며 문화재를 총알받이로 앞세운 전략이었다. 세르비아 연방군을 문화재 파괴의 주범으로 몰기 위해 텔레비전 중계까지 준비하고 파괴하기만을 기다리는 크로아티아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13세기에 건축된 두브로브니크 성이 화염과 포염에 휩싸인 모습을 상상을 해보면 마냥 아름답고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젖을 수만은 없다. 크로아티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유고전쟁 당시 연방군과 크로아티아군 살육전은 소름 돋는 역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조직 우스타샤는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부상자 포함 70만?) 명을 학살했다. 순박하게 생긴 청년들, 밤에만 피는 박꽃 같은 여인들, 팁이라고 내민 손을 부끄럽게 만든 할아버지와 동방의 끝자락에서 날아온 이방인을 향한 비아냥대는 청소년들의 얼굴과 겹쳐진다.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 세르비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을 때, 국경선 군인들 눈초리는 여전히 이들의 가슴에는 폭력의 앙금이 완전히 씻어지질 않았다고 대변하고 있다. 이제부터 21세기 우리 한반도와 닮은 발칸반도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할까 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2-16

제1차 세계대전과 세르비아-유고슬라비즘의 태동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세르비아는 사면초가에 몰렸고, 국왕 알렉산다르는 외국에 망명정부를 세워야 했다. 오스트리아 지배에 들어 있던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 간, 본격적인 대결구도가 형성된 것도 1차 세계대전부터다. 한편 대세르비아주의가 한창 열 올리고 있을 때 발칸반도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남슬라브, 즉 유고슬라비즘이 대세였다. 이 두 지지세력 간에 결정적인 차이가 종교다. 발칸 북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로마 가톨릭과 세르비아 동방정교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었고, 더구나 보스니아에는 이슬람으로 개종이 늘어 어떻게 봉합해야 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한편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이 우선인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가 제1차 발칸전쟁에서 터키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슬라브민족의 대통합 기운이 절정에 달했다. 반대로 세르비아 젊은이들은 세르비아만이 유고슬라비즘 통일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굳힌다. 1913년, 1차 발칸전쟁에서 승리한 세르비아는 터키 손아귀에서 완전하게 벗어남을 뜻했지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로부터 해방이 지상 과제였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저격 후 1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열렸다. 발칸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독일로서도 결코 수수방관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발주자였던 도이칠란트로서는 발칸에 깃발을 꽂아야 제국이 완성된다는 생각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략하면 러시아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때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의중을 물었고, 독일은 흔쾌히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대항해 가장 먼저 러시아가 움직였다. 슬라브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발칸을 노리던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도와 맞섰다. 오스트리아는 물론 독일의 발칸 지배는 영국과 프랑스로서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세계 대전으로 확전된 것이다. 오스트리아 식민지였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자의든 타의든 러시아의 적이 되어 싸워야 했다. 러시아 역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독립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세계 대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의 멍에를 뒤집어썼다. 어차피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쓸 거라면 크로아티아에게 아드리아 함대를 통째로 주며 자치권을 넘긴다. 권력의 맛에 길들어진 크로아티아 민족정치인들은 “황송하옵니다!” 하며 자치권에 만족하면서 감복한다. 거시적 안목보다 권력과 대를 이은 부를 위해 미시적 선택을 한 사람들은 서로가 결속해야 한다는 진리를 잊지 않았다. 이들은 결속을 과시했다. 1917년 5월 말, 유고슬라비아 대표 33인(우연히도 우리나라 3‧1독립운동 대표 33인과 같은 수이다)이 모여 신속하고도 거창하게 변죽까지 울려가면서 ‘유고슬라브 코커스’라는 정치단체를 결성한다. 오스트리아제국에 충성하는 인간들이 모여 충성맹세 식을 시끌벅적하게 벌였다. 가장 이완용다운 인물을 앞세워 선언문을 낭독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지도하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그리고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터전에 자치적인 체제가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한다.” 그러자 유고위원회는 물론 세르비아 정부조차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유고슬라브 코커스에게 대항하기 만나 ‘코르푸선언’에 합의했다. 핵심 내용인 즉, “유고슬라비아인의 왕국은 하나의 영토와 하나의 시민권만이 인정되며, 자유롭고도 이상이 넘치는 왕국이 될 것이로다.” 비장미 넘치는 선언이었지만, 언감생심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내용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더 나아가 이들 세 단체가 모여 구체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세르비아 카라조르지예 왕조를 정점으로 뭉치고, 모든 민족이 동등하게 취급당하며, 종교 역시 이슬람 포함 자유롭게 믿어도 된다. 국경은 북으로는 슬로베니아로부터 남쪽과 서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아드리아해를 포함한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인의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한다. (중략)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일부로 간주된다.” 가만있던 몬테네그로만 얻어터지고 만다. 그런데도 세르비아 국민은 만족하지 못했다.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합법적 정부가 들어서면 대세르비아주는 물 건너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로 파시치 총리가 일선에서 물러난다. 사실 국민 뒤에는 그를 견제하려는 왕 알렉산다르가 있었다. 알렉산다르는 막강 블랙핸드를 자신의 손으로 숙청했던 주도면밀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서 군총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그런 만큼 군부 역시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대세르비아주의가 본격적인 폭력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절대군주의 야심이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발칸반도에 본격적인 폭력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세르비아편 끝)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2-02

가브릴로와 블랙핸드 몰락

세르비아 비밀조직(기실 비밀도 아니었지만) ‘블랙핸드’가 추진했던 대세르비아주의가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를 살해하면서 1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된다. 배후에는 세르비아 블랜핸드가 있었다. 블랙핸드 소속 탄코시치 소령은 가브릴로 일행에게 세르비아 산 수제폭탄 여섯 발, 브라우닝 리볼버 권총 네 자루를 건넨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오스트리아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대세르비아주의 기상을 드높여 잠든 세르비아민족을 깨우기 위한 목표였다. 보스니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가브릴로는 가난한 고향을 떠나 형이 사는 도시 사라예보로 왔다. 상업학교에 다니던 가브릴로는 우연한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시위를 구경하게 된다. 이때 가슴에는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조국이라는 원대한 이상이 요동쳤다. 블랙핸드에 몸을 담으며 본격적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폭탄 발포와 사격술을 연마한 그는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옮겨 생활한다. 한편 강성일로를 걷는 블랙핸드는 세르비아 정부와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던 터였다. 이때 세르비아는 페타르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둘째 아들 알렉산다르가 이어받았다. 대세르비아주의의 실현을 위해 블랙핸드는 오스트리아 요인 암살을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하지만 어수룩한 계획, 미숙한 폭탄 투척과 총질로 매번 실패로 끝났다. 가브릴로가 시도했던 일곱 번째 암살 시도 역시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1914년 6월 28일 때마침 세르비아의 수호신이자 성자 성 비투스의 날,(525년 전 1389년 6월 28일 세르비아가 코소보 ‘검은 새의 들녘’에서 오스만터키제국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마지막으로 항전했던 같은 날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는 국경수비를 강화하면서 검문검색을 시도했다. 그러나 블랙핸드는 국경수비대 소속 장교와 세관원을 매수해 가브릴로 암살단 일행을 사라예보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브릴로 일행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가브릴로의 동료 네델코가 던진 폭탄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타고 있던 차량 밑에 떨어지면서 경호원을 포함해 오스트리아인 16명이 중상을 입었지만, 황태자 부부는 멀쩡했다. 도망친 가브릴로는 사라예보 시내를 흐르는 밀랴츠카강의 라틴 브리지 인근 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했다. 운명은 장난치기를 좋아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는 돌연 예정된 길을 벗어나 중경상을 입은 호위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가브릴로가 황태자가 탄 차량을 발견하고 뛰쳐나가 총을 쏘았다. 부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이를 확인한 가브릴로는 사이안화물 성분의 캡슐을 삼켜 자살을 시도했으나, 캡슐마저도 불량품이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결박당한 가브릴로는 미성년자란 이유로 사형은 면했으나, 법원은 20년 형을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커질지 어찌 알았을까. 감옥에서 자신이 벌린 일로 인해 세계대전이 일어난 사실에 무척 괴로워했다. 결국 가브릴로는 감옥에서 결핵을 앓던 중 25세의 나이로 죽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블랙핸드, 즉 검은손 조직도 위기를 맞는다. 세르비아 왕 알렉산다르는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블랙핸드와 갈등 관계를 이어갔다. 알렉산다르는 반전을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먼저 국민 여론을 자신 편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블랙핸드 폭정에 언젠가 세르비아가 국제사회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변할 것이라며 여론을 환기했다. 당장 세계대전이 블랙핸드에 의해 발발하자 그의 설득력에 힘이 실렸다. 블랙핸드와 맞설 대안으로 친위대 ‘화이트핸드’를 창설한다. 우리말로 ‘흰손’, 혹은 ‘백수단’ 쯤 되겠다만, 어쨌거나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의 강경노선은 군부 내 반대파를 양산했고, 진급이나 요직에서 소외된 군인들이 공공연히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렉산다르는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면서 조직을 탄탄히 했고, 또한 대령이 수장인 블랙핸드는 언젠가 왕의 친위대인 화이트핸드에게 밀릴 것이라며 ‘왕정 대세론’을 퍼트렸다. 세계 1차 대전이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1917년 초,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군부 내 일부 세력들은 화이트핸드로 갈아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왕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배후에 블랙핸드가 있다는 빌미를 씌워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전격적으로 체포했다.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을 중심으로 블랙핸드 핵심인물 공개재판이 1917년 4월 초순부터 두 달간 열렸다. 핵심은 민족 반역자 처단이었다. 알랙산다르는 오스트리아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 암살은 이들이 배후에 있다고 만천하에 알렸다. 6월 26일, 디미트리예비치가 죽으면서 외친 말은 여전히 세르비아인의 가슴에 살아서 요동쳤다. “대세르비아여 영원하라!”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1-18

대세르비아주의 전사 블랙핸드

19세기 말, 세르비아의 왕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콜걸 출신과 결혼하면서, 이제 왕비의 친인척까지 왕궁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세르비아인들이 아니었다. 1903년 청년 장교와 군인 120여 명이 왕궁으로 몰려가 왕비와 그 일족들은 물론 왕까지 잡아 죽이고 말았다. 왕 알렉산다르와 왕비 드라가를 5층 건물 창문 밖으로 던져 살해한 후, 오브레노비치 왕가 일가친척을 도륙했다. 이로서 오브레노비치 왕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열세 살 철없던 시절에 왕위에 올랐던 알렉산다르는 어머니의 간섭과 늙은 아내의 철없는 행동으로 서둘러 지옥행 마차를 타고 만 것이다. 뜻밖에 세르비아 국민이 환호하면서 어떤 시각에서 보면 군부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상황이 벌어졌다. 밀로시 왕가 몰락은 블랙조지, 즉 카라조르지예 가문의 등장을 뜻했다. 이때 대안으로 떠오른 인물이 블랙조지의 손자이자, 카라조르지예 셋째 아들 페타르 카라조르지예(재임 1903~1918)다. 그는 프랑스에서 긴 세월 망명생활을 하였으며, 1870년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농민항쟁 때 참여해 산전수전을 겪기도 했다. 세르비아인 가슴에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추앙받고 있던 그였지만, 60세 가까이 돼서야 세르비아 땅으로 돌아와 45년 만에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1, 2차 발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영토 확장에 이어, 대세르비아주의가 기지개를 펼 수 있는 판을 깔았다. 20세기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두 차례 발칸전쟁으로 세르비아 국토가 넓어지게 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급하게 삼킨 음식이 탈나는 법, 입헌국주국 민간정치기구가 급조되면서 급진당이 의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 중 지도자로 급부상한 인물이 니콜라스 파시치다. 훗날 세르비아 현대사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주입시키는 데 성공하면서 세르비아인 가슴을 요동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블랙조지 가문을 중심으로 세르비아가 새롭게 일어서야 한다며, 당시 발칸반도에 대세로 급부상하던 유고슬라비즘에서 대세르비아주의로 시선을 돌리게 했다. 블랙조지가문이란 기실 오스만터키제국에 투쟁할 당시 농민군 지도자가 세르비아 왕족으로 순식간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것은 오랜 세월 억압된 삶을 살았던 민족의 가문과 인력부재라는 슬픈 현실을 이해해야 한다. 왕위에 오른 페타르는 이미 늙어버렸다. 페타르 1세와는 반대로 쿠데타의 주역 군인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거듭났다. 왕궁으로 난입한 군부 중 지도자격인 인물이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이었다. 그는 1901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기습점령 한 것에 대해 불만이었다. 대세르비아주의 완성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빠트리고는 완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닫힌 민족주의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차곡차곡 실행에 옮겼다. 민병대를 조직해 무기를 쥐어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파견했다. 주요 목표는 오스트리아 고위관료 암살과 테러였다. 충성을 다하는 예하 장교들을 포섭해 정부 위에 군림하는 군부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군부에 의해 들어선 민간정부의 힘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오스트리아에 굴욕적인 행태인 정부를 향한 세르비아인 불만이 증폭했다. 드디어 디미트리예비치 대령은 세르비아에 조직적 폭력군단 ‘블랙 핸드(Black Hand)’를 창시한다. 우리나라말로 직역하면 ‘검은손’이며, 한자로는 ‘흑수단(黑手團)’이다. 즉 대세르비아주의를 지상과제로 내건 군부 내 극우민족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모든 땅은 통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이 둘을 합치면 ‘세르비아인들이 살아가는 그 어떤 땅이라도 죽음을 불사하고 손아귀에 넣어라’란 뜻이다. 블랙핸드 ‘크루나 루카!(Crna Ruka)’의 살기 띤 구호가 세르비아인 가슴에 요동쳤다. 세르비아인 국가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내 땅에서 우리끼리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에 누가 반대를 할까만, 다른 나라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에게 무기를 쥐어주며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혁명적 행동을 강행하되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적으로 간주하며 제거 대상이 되었다. ‘개인의 욕심은 버려라, 어긴 자는 죽음으로 대가를 치른다’ 등 행동강령도 만들었다. 군인뿐만이 아니라 정치인, 변호사, 외교관을 비롯해 민간인까지 가세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국민을 대상으로 대세르비아주의를 설파했고, 당위성에 거품을 물었다. 더구나 디미트리예비치가 군부 내 정보를 총괄하는 보안대장으로 영전하면서 날개를 단다. 밀수를 동원한 자금조달로 요인 암살이 본격화되고, 세르비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으로 거듭 태어났다. 신문까지 발간하면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백주대낮에 공개된다. 무엇이든 처음은 미미한 법, 세계가 전운에 휩싸이게 되는 판이 깔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1-04

폭력으로 얼룩진 세르비아 명가 ②바람 잘날 없는 세르비아공국

독립투사 블랙조지 목을 잘라 오스만제국 술탄에게 바친 후 세르비아 권력을 독차지했던 밀로쉬는 경제가 바닥을 치자, 불랙조지 추종자들과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 술탄에 의해 1839년 6월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후의 세르비아는 왕위 계승문제로 바람 잘날 없이 9개월을 보내야 했다. 결국 17인의 귀족위원회, 즉 섭정단은 이제 막 열여섯 살이던 밀란의 동생인 미하일 오브레노비치를 허수아비로 앉혀 쥐락펴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이마저도 오래 누리지 못했다. 이들은 지난날 반란군의 선두에서 에니체리와의 싸움을 벌이던 블랙조지의 향수를 잊지 못했고, 결국 미하일을 쫓아내고 블랙조지 가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첫째가 블랙조지 후손 알렉산더 카라조르제비치(카라조르지예)란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밀로시 아들이나 동생처럼 의복만 번지르르 했지 실권이라곤 없었다. 그래도 세르비아 왕가의 반열에 당당히 오르면서 일약 대대로 왕족 칭호를 받으며, 더 밀로시 가문과 쌍벽을 이루며 경쟁관계에 돌입하게 된다. 그가 16년 동안 왕좌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았을 뿐 스스로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었다. 그 역시 17명의 대리인에 불과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를 보다 못한 세르비아 민중이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승자는 역시 17인의 위원회였다. 이 일로 조르지예는 크네즈에서 물러나야 했다. 웃긴 것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 17인 위원회에 의해 루마니아로 도망친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기 때문이다. 블랙조지 후손들은 또다시 절치부심 타국 땅을 전전하면서 와신상담,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풍찬노숙을 이어가야 했다. 1860년 밀로쉬는 아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물러난다. 아들 미하일로도 권력 맛을 보게 되지만, 권력의 중심에는 여전히 위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1868년 세르비아니즘 이상을 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츠가 암살당한다. 이제 세르비아 권좌는 그의 사촌인 열네 살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크네즈에 올랐다. 그러나 어린아이였던 밀란은 10년 뒤 의외의 업적을 남긴다. 1878년 3월 산 스테파노 조약에 의해 믿었던 러시아가 친 불가리아로 돌아서자 친 오스트리아로 급선회한다. 그해 6월 베를린조약에 의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영향 하에서 온전히 독립국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1878년 6월과 7월에 있었던 베를린조약은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겁박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도이칠란트, 터키가 참가한 베를린회의에서 맺은 조약이었다. 이때를 기회로 헝가리를 병합해 이름도 이상한 이중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터키제국 영향에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스부르크왕가 아래 편입해 버린 후, 1908년이 되면서 완전한 합병에 성공한다. 세르비아 국민은 지난날 스테판 듀산에 의해 만들어진 세르비아 영원한 국경선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세르비아는 조국독립의 길목에서 강대국들과 어깨들 당당하게 혹은 대등하게 하리란 대망의 꿈은 한낱 물거품으로 변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자신들 땅으로 만들지 않고선 대세르비아주의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보스니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항쟁이 간간히 일어났지만, 돌아오는 것은 매질 뿐이었다. 오스트리아로선 세르비아니즘이든, 유고슬라비즘이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세르비아 정권을 잡고 있던 밀란은 친오스트리아를 향했고, 경제 역시 오스트리아에 의존했다. 이후 밀란을 치욕적이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밀란은 장가를 아주 잘(?)들었다. 사사건건 왕비 나탈리야 간섭은 왕으로 하여금 진저리치게 했음직하다. 왕비는 기세등등하게 일국의 왕인 남편을 우습게 알았다. 급기야 참다못한 왕이 왕비를 나무랐고, 가정폭력이 일어났다. 나탈리야는 어린 아들 알렉산드를 데리고 왕궁을 훌쩍 빠져나가 친정으로 가버린다. 일국의 왕이 가정 하나도 건사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는 세르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들 수 없었던 밀란은 그럭저럭 왕좌는 유지했지만,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잖아도 비실대던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치만 살피던 그는 아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 몰라라 뒷방 늙은이로 들어앉는다. 1889년 13세 아들을 대신해 어머니 나탈리야의 대리청정이 이어지자 아들은 권력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마치 고려 7대 목종을 떠올리는 사건이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의 기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다가 결국 동성애에 빠져버린, 대장군 강조에 의해 목이 달아난 불우한 왕처럼 말이다. 풍족한 궁궐생활에 시간이 남아돌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스캔들이다.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파티에서 자신보다 열한 살이나 연상인 콜걸 출신 드라가 마신을 만나 결혼한다. 그러자 이제는 드라가 마신 가족들이 왕궁을 드나들며 온갖 부조리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10-21

폭력으로 얼룩진 세르비아 명가 ①블랙조지와 밀로쉬

19세기 초, 세르비아는 이때부터 블랙조지 가문과 밀로쉬 가문으로 나눠지면서 새로운 폭력 양상을 띠게 된다. 1815년 유럽 세계 역시 변화의 급류에 휘말렸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원정에서 실패한 후 몰락하고 엘바섬에 유폐된 뒤, 섬을 탈출해 프랑스를 재점령하면서 100일 천하를 이루었다. 하지만 워털루에서 웰링턴 공작에게 패해 대서양 세인트헬레나에 재차 유폐되면서 종지부를 찍는다. 1815년 11월, 세르비아민족회의는 최고지도자에 밀로쉬를 추대한다. 1817년 초 오스만은 골치만 아픈 세르비아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 착하게 말 잘 듣는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세르비아공국 왕좌(공작)에 앉혀 한숨을 돌렸다. 이때를 기회로 러시아 차르는 부동항의 확보를 위해 재차 발칸반도로 진출하자 이에 놀란 것은 터키뿐만이 아니었다. 서구 열강들이 이를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오스만터키 술탄은 넓은 제국을 안간힘으로 지켜내느라 동서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이틈을 노린 러시아는 이란의 카자르조와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면서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을 얻어 기세를 올린다. 영국과 프랑스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오스만터키로부터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밀로쉬는 문제가 많았다. 1814년 9월 블랙조지, 즉 카라조르지예 추종세력들이 새로운 혁명봉기를 위해 모임을 결성하고 밀로쉬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자금지원은커녕 오스만터키에게 이를 고해바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해외운송 독점권에 이어 운송장비까지 독점했다. 이후 블랙조지를 따르는 해외파와 밀로쉬를 추종하는 국내파로 세르비아는 툭하면 싸움판이 깔린다. 이슬람에 몸을 비벼 자치권만 획득한 밀로쉬에 세르비아인 불만이 증폭된다. 세르비아인들은 밀로쉬와 카라조르지예(블랙조지)를 비교하며 블랙조지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 했다. 그러자 밀로쉬로서는 블랙조지가 세상에 없어져야 온전한 자기의 세상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을 굳힌다. 1817년 7월 블랙조지가 해외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리스 혁명지도자들과 연합해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혁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밀로쉬는 암살자를 보내 머리를 잘라 술탄에게 선물로 바친다. 밀로쉬는 정적 제거는 물론 술탄에게 충성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무한 신뢰를 얻는다. 블랙조지를 추종하던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세르비아 하층민에게 있었다. 가난과 핍박 등 혼란한 정국 속, 이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세르비아농민의 불만은 증폭되어 갔다. 그러나 왕권을 유지하려는 밀로쉬는 농민을 달래기는커녕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가두곤 했다. 이전의 에니체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러시아는 이를 간파했다. 1821년 3월 6일 그리스 독립투쟁이 본격화되고, 러시아가 오스만 턱밑에 대포를 포진하면서 세르비아 완전한 자치권을 요구했다. 이에 오스만은 세르비아인에 대해 압박을 가했다. 1828년 러시아는 오스만터키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듬해 8월 러시아군대가 아드니아노플을 점령한 후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오스만제국은 그제야 두 손을 들었다. 아드리아노플조약이 이렇게 해서 생겼다. 뒤이어 1830년 2월 6일 밀로쉬는 세르비아 중부도시 크라구예바츠에서 세르비아자치를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선포한다. 오스만제국이 만든 왕이자, 세르비아 자치국 왕위를 획득한 밀로쉬는 날개를 다는 듯했다. 여세를 몰아 밀로쉬가 강력한 중앙집권형 권력을 추진하자 군사반란을 불러왔다. 밀로쉬가 간과하는 게 있었다. 예부터 세르비아는 지방 고유 자치권이 강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쉬 민낯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곧 통치권 약화로 이어졌고, 블랙조지 추종세력들은 밀로쉬 제거를 목표로 삼았다. 그 와중에 경제정책 실패로 세르비아 경제적 뿌리인 농업정책마저 바닥을 쳤다. 배가 기울면 쥐들이 가장 먼저 뛰어내리는 법, 세르비아 귀족들이 밀로쉬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더구나 내정간섭을 이어가던 러시아는 물론, 오스만터키 역시 밀로쉬 독선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러시아는 밀로쉬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마치 요즘의 국회처럼 위원회를 만들어 왕권을 견제했다. 결국 1839년 6월 위기를 느낀 밀로시는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폭정은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그 맛에 취하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아주 잘 보여준 예라 할 것이다. 토마 부취치를 중심으로 세르비아의 17인으로 구성된 귀족위원회가 본격 가동하면서 이들은 열아홉 살인 밀로쉬 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를 왕위에 올렸다. 그런데 귀족위원회의 입장에서 보면 고맙게도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못 되 죽어버렸다. 말 그대로 세르비아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정이든 나라든 속에서 곪아 터진 뒤에 외부의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동서고금의 이치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2025-10-12

대세르비아주의 독립투쟁사 ②세르비아, 피의 명가(名家) 탄생

러시아 알렉산더 1세.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퍼블릭 제공 세르비아인 최초 공식적인 피의 학살 서막이 열렸다. 역사는 위기 때 영웅을 탄생시킨다. 이제는 단순항쟁이 아니라 반란으로 확장이었다. 하우두크(Hauduk), 즉 튀르키예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반란군을 뜻하는 용어가 생겼다. 예니체리에 대항하는 첫 조직이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봤던 크네즈를 비롯해 성직자들까지도 농민들을 다독이는데 동참했다. 그러나 농민들 생각은 달랐다. 분노는 예상보다 강했다. 농민들은 그야말로 농기구를 들고 대항했다. 일찌감치 최정예 전투력으로 무장한 예니체리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과거 전투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지도자로 뽑아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농민들은 1804년 2월 블랙조지, 세르비아어로 페트로비치 카라조르지예(Petrovic Karadjordje)를 지도자로 뽑았다. 졸지에 블랙조지가 급부상하면서 농민군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군 소속으로 터키와 맞서 싸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산발적인 대항에 불과했던 세르비아 농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자금을 동원할 수 있었고, 무기 조달과 풍부한 전쟁 경험은 오스만터키에 대한 독립투쟁으로 확산하는 데 성공한다. 세르비아 무신정권이 시작된 지 4년 째, 블랙조지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곳곳에서 예니체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36세 블랙조지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면서 예니체리의 지도자 다이스 네 명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처량한 도망자 신세가 된 다이스를 끝까지 추적해 섬에 숨어 있던 예니체리 지휘관 다이스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블랙조지는 농민군 지도자로 우뚝 서며 술탄을 향해 예니체리 해체를 요구했다. 술탄으로서는 씨알도 안 먹히는 말이었다. 술탄으로서는 발칸반도 중앙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지리적 이점은 매우 다양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비롯해 도이칠란트 등 서구열강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반대로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세르비아 땅은 매우 단순했다. 재빨리 발을 담그면 자신들 차지가 될 것처럼 보였을 법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군침 삼키며 발칸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터키제국으로선 도무지 믿기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러시아가 터키제국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게 된 시점이라고 보면 거의 정확할 것이다. 블랙조지는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오스만터키가 나폴레옹과의 외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외교관계를 거절해버린다. 러시아로서도 방법은 단 하나,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것뿐이었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더 1세로서는 닭 대신 꿩인 셈이다. 알렉산더 1세는 가장 먼저 농민군 지도자 블랙조지를 자신 편으로 만들었다. 1811년 러시아는 세르비아 농민군을 지원하면서 의회를 설립하고, 블랙조지를 의장으로 선출한다. 러시아와 영국의 뒷배를 믿은 블랙조지는 오스만제국과 전쟁에서 꾸준히 승리를 거두며 중부도시 니쉬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나폴레옹 정복전쟁에 위협을 느끼던 러시아는 1812년 본국으로 철군해버렸다. 영국 역시 러시아가 돌아서자 터키를 제압하려던 초심은 간곳없이 슬그머니 발을 빼면서 터키와 휴전을 맺으며 관망 자세로 돌아섰다. 국제사회 냉혹함을 몸소 경험해야 했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된 블랙조지는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았다.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잔존 예니체리는 오스만제국의 힘을 뒷배로 몸을 돌려 재차 반격해오기 시작했다. 예니체리들이 반전에 성공하자, 블랙조지는 독립은커녕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다. 예니체리들은 일시에 도나우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를 점령해버렸다. 두 번째 입성이었다. 다시 권력을 잡은 무슬림과 예니체리의 악정은 이전보다 더욱 심했으며, 농민을 향한 폭력이 기승을 부렸다. 예니체리의 보복은 처절했다. 반란군을 뿌리 뽑겠다며 15세 이상 세르비아 남자들을 잔인하게 도륙한다.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삼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혁명군 지도자 블랙조지와 수많은 세르비아인이 베오그라드 도나우강 서쪽지역 제먼이나 노비사드 인근지역으로 몸을 피해야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농민들도 그냥 있지는 않았다. 1815년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세르비아 우쥐째 출신의 밀로쉬 오브레노비치였다. 그는 비록 농민 출신이었으나 전쟁보다 뛰어난 언변으로 타협에 능한, 외교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 역시 농민항쟁에 몸을 담았던 경력이 있었지만, 재력과 세치 혀로 오스만제국에 충성을 맹세해 처형을 면한 인물이다. 민족의 미래보다 쥐꼬리 권력이 더 중요했던 까닭이다. 인간은 권력의 달콤함을 잊지 못한다.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때부터 세르비아는 블랙조지와 밀로쉬 두 가문과 지지자들이 나눠지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작가

2025-09-09

대세르비아주의 독립투쟁사 ①반복되는 탐욕, 역사의 시작

서구 문명에서 소외된 채 오스만트루크제국 지배를 받아오던 세르비아인들은 무슬림 생활양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동화되어 갔다. 일부이긴 하나 초창기 에니체리 모집의 방식 초심에서 벗어나 무작위 선발로 인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청춘들은 주체할 수 없는 폭력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한편 정교회로부터 민족정신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정교회에 스테판 듀산을 비롯해 성인의 반열에 든 18명의 왕족들은 대 트루크제국에 항쟁의 의기로 작용하면서 더욱 탄탄하게 결속해가고 있었다. 대부분 무슬림으로 개종을 택하기보다 세금과 신분 등 약간의 차별을 참아내면서 자신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세르비아정교의 기로에서 굳건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 종교 지도자는 현실안주에 만족하고 스스로 무슬림과 자민족 사이에 방패가 되어 무슬림 대변자 역할도 해내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향교 조직의 타락과 불교, 기독교 등 친일행각의 종교인, 스스로 일본인인 양 행동한 조선인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믿음과는 다르게 종교 지도자 타락은 정신적 타락을 부추겼고, 이는 하층민끼리 응집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들(주로 농민이었지만) 스스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슬금슬금 항쟁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크네세스라는 농민자치조직이 생겼고, 이들 중 크네즈라 부르는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종교 지도자 힘을 능가하게 된다. 세르비아는 농민 항쟁으로 촉발된 에니체리와 대결에서 파생된 일련의 사건들이 오스만터키제국으로서는 골치만 아픈 땅일 뿐이었다. 오스만터키제국은 비엔나 공략 두 번의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와 일정 국경만 놓고 이어가는 불안한 평화의 시대에 만족하면서 고인 물이 썩어가듯 지방호족들의 부패가 몰락을 앞당기고 있었다. 민중의 고혈을 짜냈고, 이는 곧바로 민중항쟁, 즉 두 차례에 걸쳐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제국이 넓어질수록 오스만제국 술탄은 지방호족의 반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말기로 갈수록 지방분권형 권력이 강성해지면서 중앙정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인 권력이 등장한다. 지방에 파견된 총독 파샤 아래 오스만 용병 시파히(Sipahi)라는 900여 명의 군인 계급이 존재했다. 주로 전쟁에 승리하면 재물보다 땅을 하사받는 중세 봉건기사와 성격이 비슷했다. 시파히 아래 소작농민들은 일정 세금만 내면 대를 이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시파히 역시 농토를 후손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소작농 고혈을 짜내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이들 시파히와 에니체리 갈등이었다. 발칸반도 지배자 무라트 1세(코소보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는 툭 하면 반란을 일으키는 귀족 출신 친위대 대신 오로지 술탄, 즉 자신만을 위한 맹목적 충성과 술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술탄 외에는 그 어떤 명령도 듣지 않는 용감하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막강 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이 바로 누구의 표현대로 가혹하고도 슬픈 피해자 에니체리다. 이들은 그리스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천애고아를 만든 후 어릴 때부터 맞춤교육을 시켜 조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제국의 기운이 소멸되기 시작한 것도 이들 에니체리로부터였다.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에니체리들이 시파히 땅을 우격다짐으로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이 감당해야 했다. 18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에니체리에 대한 불만이 농민 항쟁으로 촉발된다. 제1차 혁명은 기사 계급 시파히와 농민지도자 크네세스를 중심으로 세르비아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부터다. 분노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결국 막강 에니체리들은 베오그라드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에니체리에 대항하다 잡혀 온 농민들을 사면하면서 에니체리의 분노를 샀다. 도망친 에니체리들은 그동안 누렸던 권력의 달콤함 맛을 잊지 못했다. 결국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베오그라드를 재점령하고, 지방정부 파샤를 뒤엎은데 성공하면서 1801년 베오그라드에는 무인 정권 시대가 도래 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 역시 개혁이었다. 가해자가 마치 피해자인 양 코스프레 행위는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민중을 향한 폭력과 압제일 뿐이었다. 이들 에니체리는 최고위급 지도부 네 명의 다이스(Dayis)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농민 항쟁은 옥죈다고 해도 반등하기 마련이다. 이를 염려한 다이스들은 기세를 꺾기 위해 죄 없는 세르비아 농민 지도자를 체포해 처형하기에 이른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1866년(고종 3) 권력을 쥔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병인박해(丙寅迫害)를 시작으로 6년간 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처럼, 다이스들 역시 먼저 처벌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면서 반체제인사는 체포와 동시에 죽여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세르비아인 최초 공식적인 피의 학살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면서 민중의 생활을 더욱 피폐해졌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8-26

대세르비아주의의 탄생:암흑기 세르비아의 빛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민족의 정체성과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단초가 될 만한 요소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압제 42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자의든 타의든 세르비아가 독립을 맞이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왕국을 거쳐 민족이라는 장대한 용어가 사건과 역사와 인물이 조화를 이루어 화려한 부활을 맞는다. 19세기 중엽 수도사인 부크 카라지치(1787~1864)는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출발하는가?’ 등 자문자답하며 세르비아인에 대한 미래에 해답을 찾았다. 그는 언어학에 몰두하면서 발칸반도에 한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꿈을 꾼 인물이다. 그 뒤를 이어 정치가 가라샤닌(1812년~1874년)의 노력으로 민족주의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오랫동안 대세르비아주의 이념에 몰두했다. 그리고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위대한 인물과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세계가 우리(We)와 그들(They)로 규정될 때 가라샤닌을 비롯해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역사에서 코소보 전투를 살려냈다. 정의를 내걸었지만, 편향된 애국심이 가슴에 요동쳤고, 권력자 구미를 당겼다. ‘이교도와의 최후의 성전’은 민족주의 발흥에 있어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때부터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있다면 세르비아인에게 코소보가 성지로 거듭났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중세 발칸을 호령했던 듀산황제가 거느렸던 영토적 개념이 세르비아뿐이라면 별 문제가 없었다. 타 공화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의 국가를 향한 군사적 저항을 정당화해버린다. 이제 더 필요한 것은 없었다. ‘검은 새의 들녘’ 코소보는 세르비아 민족 성지로 거듭났고, 20여 년 남짓 제국을 구축했던 듀산황제는 세르비아인 영원한 황제로, 코소보전투가 벌어졌던 1389년 6월 28일은 성 비투스의 날이자, 영원히 기록되어야 하는 성전의 날로 탄생했다. ‘강자 스테판 듀산!’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 민족이라는 의기에 요동쳤고, 민족 이상에 상처를 내는 일에는 자동적 분기탱천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을 잊지 못하듯 세르비아인으로서는 민족주의라는 의기가 가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을 세르비아민족주의의 영원히 빛나는 별로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것이 훗날 살육의 싹이 자라났다. 스테판 듀산이 거느렸던 영역은 세뇌당한 국민 머리에도 반드시 차지해야 할 상징적인 국경선이 되어 버렸다. 20세기에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2차 세계대전에 이어 유고슬라비아 학살전쟁, 더 나아가 20세기 가장 더러운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 살육전 신념으로 거듭나게 된다. 대세르비아주의라는 망령은 이렇게 해서 창조된 후 도미노처럼 연이은 사건으로 세상을 경악시켰다. 물론 세르비아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 우스타샤 정권이 나치 지원 아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인 35만 명을 학살했던 상처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자신들만 핍박해대니 억울하고 원통할 지경이다. 성지라고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던 코소보에 이방인들이 들어와 진을 치고 나라를 세웠다며 국제사회에 선언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 금세 다른 물이 채워지듯 네마냐 왕조가 이슬람제국에 멸망한 후 코소보에 살던 일부 세르비아인은 압제를 피해 지금이 수도 베오그라드를 비롯해 노비사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지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떠나고 난 빈집에 오스만제국이 평정한 알바니아계 이슬람이 몰려들어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소보 땅에 알바니아인이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자신감이 붙는다. 나아가 자주적 독립 국가를 선언하며 국경을 긋고 세르비아를 자극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국제사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냉혹하기만 한 국제사회는 먹을 것 없는 코소보에 독립국가가 세워지든 말든, 폭력이 자행되던 말든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러자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은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자민족 희생을 미끼로 걸었다. 코소보 내 세르비아인 경찰을 살해해 의도적인 폭력을 부추겼다. 울고 싶은 놈 뺨을 갈겨준 대가는 혹독했다. 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가 원하는 대로 세르비아는 코소보 내 알바니아계를 향한 제노사이드를 감행했다. 알바니아계가 의도한 대로 자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아 국제사회 관심을 끄는 것에 성공한다. 나토의 개입이 본격화 되자, 세르비아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민족을 위해서라면 역사를 위조하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선동과 폭력이 확산되고, 결국 처참한 상처로만 남는다. 알바니아 내 세르비아인 학대가 일어나며, 몬테네그로 내 알바니아계에 대한 핍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게다. 그리고 크로아티아에서 살아가는 세르비아인 역시 바늘방석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또한 악랄해질 수 있는지를 실험 중일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8-12

대세르비아주의 탄생과 식민지배 - 암흑기 세르비아

대 이슬람 코소보 항전 패전을 끝으로 세르비아에는 암흑의 시대가 찾아왔다. 세계 시대적 변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단절된 공간, 세상과 완전히 격리된 채 이슬람 생활양식에 순응하면서 묵묵히 삶을 이어갔고, 어쩌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종교가 달랐음에도 데브시르메(Devsirme), 즉 전쟁포로 중 소년 징발과 공납이란 방식에 의한 직업군인 에니체리에 기꺼이 발을 들이며 전쟁을 수행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희대의 살육자 티무르가 공격했을 때 이슬람 술탄을 위해 결사항전 했던 세르비아 병사들이었다. 이렇듯 지금에 와서야 유럽의 영역에 유입되지만, 당시에는 그저 이슬람제국 백성일 뿐이었다. 피지배민족은 봉건제도 아래 중앙과 분리된 느슨한 구조 속에서 충성을 다하며 질서에 편입된다. 종교가 비교적 자유로웠으니, 세르비아정교를 가지고서도 다른 이슬람민족과의 전투에 투입되어 전과를 올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슬람 연구자들 주장대로 이교도 강제 개종금지는 성경 코란의 가르침인지도 모른다. 일련의 이러한 조건 속에서 종교단체 집단 거주지이자 통제를 위한 집단 밀레트를 중심으로 제국에 순응하면서 세르비아민족이라는 영속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 정교회라는 믿음을 보장받으며 오스만트루크제국 압제에 순응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 생활 수준도 다르지 않았다. 오랜 세월 오스만 지배를 받은 세르비아는 말 그대로 식민정책으로 문맹의 나라였다. 교육기관이라곤 세르비아에 대학교는커녕 중학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초등학교 두 개가 전부였다. 문화를 전파하는 인쇄소는 아예 꿈도 꿀 수 없었다. 세르비아어조차 배울 수 없어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정해 학교에서 교육할 정도였다. 이웃 몬테네그로는 더 열악했다. 1834년까지 어떤 교육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세르비아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지배를 받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터전을 옮겨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19세기 초 슬로베니아에는 초등학교가 1천 개를 넘었다. 세르비아인 귀에도 이런 소식이 들렸을 법했다. 그러자 당연히 크로아티아로 가면 잘살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경을 넘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 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었다. 도중에 목숨을 잃거나, 국경 수비대에 뇌물을 주고 겨우 성공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어찌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목숨을 걸고 이동한 세르비아인이 크로아티아에 터전을 잡으면서,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훗날 배타적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살육의 발판이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 눈치 빠르고 발 빠른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네 일제강점기처럼 제국에 빌붙어 자민족 고혈을 짜내는 인간도 생겼다. 메메드 소콜리에 의해 세르비아 정교가 활기를 띤다. 하지만 어떠한 관용에도 대가가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리스마저 오스만트루크제국 발아래 들면서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를 그리스 정교 교구에 예속시켜 버리자 세르비아인은 자존심이 상했다. 세르비아정교회는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오스만트루크 지지를 얻어 독립교구로 거듭나고자 종교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1557년 목표에는 성공했으나,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지지하며 정당화하는 악수를 둔다. 일련의 이 사건에는 오스만제국에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른 메메드 소콜리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이슬람으로 개종까지 해가며 술탄 쉴레이만의 수족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세르비아 페치교구가 부활했고, 자신의 동생 마카리우스를 세르비아 주교로 올려 부흥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엄격하게 바라보면 밀레트라는 종교조직 속에서 세르비아인 통제를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대신 산악지방이 대부분인 발칸반도 지형 상 트루크 귀족 지배에서 벗어난 농민의 패쇄적인 삶은 정체되기 마련이었다. 그러자 조직적인 항쟁은 오랜 세월 동안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르비아정교라는 정체성은 꾸준하게 이어갔다. 하지만, 정복전쟁을 즐겼던 술탄 무스타파 2세(재위 1695~1703)는 정교회세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페치 교구를 폐쇄해버린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세르비아정교회는 지지기반이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종교 자체는 민중항쟁의 구심점에 있었지만, 이는 세르비아에 성인으로 추앙된 인물들이 가슴 뛰는 추억을 불러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정교에는 대략 58여 명의 성인이 기록되어 있는데, 네마냐왕조 시조를 비롯해 세르비아정교회가 독립교구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 사바, 세르비아 최초 황제 스테판 듀산, 코소보 영웅 밀로슈 오빌리치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18세기에 시작된 세르비아 항쟁은 민족적 항쟁이 아니라 발칸반도 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주장처럼 신앙에서 파생된 순교자적 저항에 힘이 실린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7-29

역사 속 세르비아 민족정신대세르비아주의 탄생

세르비아인은 부족장을 ‘추판(Župan)’이라고 불렀다. 9세기 중엽 추판 블라스티미르는 자신이 견고하게 다져놓은 나라의 안정을 비잔티움제국과 친교를 통해 획득하려고 했다. 비잔티움제국을 괴롭히던 제1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한 틈을 타 세르비아는 12세기에 들어와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지금의 몬테네그로 수도 포도고리차에서 세르비아 부족 중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네마냐가 세르비아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그를 추판 앞에 위대함을 붙여 ‘위대한 추판’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로마 교황에게 일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며 끊임없이 추인을 시도했다. 나라 안정과 발전을 위해 세르비아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정교를 중심으로 단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서기 476년 서쪽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함락당한 이후 기독교권을 이용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권력 중심에 있었다. 그에 의해 왕권을 인정받은 스테판 네마니치는 날개를 단 듯했다. 기실 교황청에 뇌물을 바치고 겨우 추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마와 경쟁 관계였던 비잔티움제국은 12년 전 성지탈환을 빙자한 4차 십자군에 의해(메메트 2세 때보다 더한) 치욕적인 약탈을 당한 후, 프랑크인과 베네치아인에 의해 정략적으로 세운 라틴 황제 시대였다. 이때를 기회로 스테판 동생 사바 네마니치가 전면에 나섰다. 1219년 그는 비잔티움으로 달려가 왕국의 백성 모두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 동방정교를 믿음으로 가진 하나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동방정교 독립교구로 승인 받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르비아 초대 대주교에 임명된다. 네마냐 왕조가 생산되고 100여 년이 흐른 후 위대한 세르비아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의 상징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스테판 듀산이 등장한다. 그는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다.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제국도 눈치를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특히 비틀거리는 비잔티움제국 영토를 야금야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발칸반도 전역,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까지 장악해 제국 영역에 포함시켰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거듭났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 그가 승승장구한 데에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했다. 동․서로마 사이에서 교역로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를 이용한 막강 용병으로 영토 내 반란을 진압하면서 북쪽 마케도니아 전역을 손에 넣는다. 스테판 듀산 스스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왕’이라 부르며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영역에 세르비아 정교회 확산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비잔티움제국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하필이면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제국에게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오스만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샘이다. 결국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 멸망은 물론 천년을 넘어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 종말을 앞당겼으며, 더 길게 보면 발칸반도 이슬람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렸던 스테판 듀산, 1355년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오던 도중 급작스레 죽어버리고 만다. 세르비아의 걸출한 영웅이 쓰러지자 곧바로 제국은 몰락의 기운이 요동쳤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스테판우로스 앞에 네나먀 왕조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로 ‘약자(弱者)’라는 별칭을 붙여 ‘약자 우로스 5세’라며 세르비아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잔티움제국은 자신들이 불러들인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압박을 가해오자 급기야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를 비롯해, 불가리아, 보스니아, 헝가리 등 십자군이 꾸려지면서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오스만트루크제국 적수가 되지 못했다. 1363년과 1371년 두 번에 걸친 마리짜강 전투에서 우로스를 비롯해 그 형제들까지 전사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르비아 귀족들은 듀산의 후손 라자르를 왕으로 옹립하고, 오스만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후라 때는 늦었다. 코소보에서 오스만과의 한 판 대결은 결국 세르비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오스만제국과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전투다. 역사를 거스르면 세르비아인 가슴에 피로 새겨진 정기와도 같은 땅 코소보에 알바니아인이 정착해 살면서 나라를 세운 작금의 현실이 이들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을 법하다. ‘지리란 역사가 그려 놓은 화판’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7-15

세르비아, 상처만 남은 도시들 ② 옛 헝가리 땅 노비사드

세르비아 제2의 도시, 베오그라드 북부 노비사드에 도착했다. 이곳 역시 도나우강을 끼고 형성된 도시이자, 철도망과 도나우강 운하를 통하여 중부 유럽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다. 그런 만큼 파괴를 부르는 전쟁의 역사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그 옛날 중부유럽을 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복해야 할 땅이라는 뜻이다. 요새에서 시작되어 확장을 거듭한 도시라 이민족 방어의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페트로바라딘 성채가 견고하게 남아 있다. 도나우강을 1차 자연방어막으로 두고 그 뒤에 튼튼한 성벽을 높게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곳 노비사드의 역사적 특징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헝가리 땅이라는 데 있다. 나치 침략으로 어쩔 수 없이 주축국에 가담했고, 패전을 당하면서 헝가리의 국토를 좁게 만든 원인이었다. 현재도 노비사드에는 헝가리 사람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보면 오스만제국이 발칸의 맹주로 떠오르자, 베오그라드 주민이 오스만을 피해 이곳 노비사드로 이주하면서 자연스럽게 요새취락이 형성되었다. 그래선지 노비사드는 세르비아말로 ‘새로운 정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스만트루크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뒤 90km 떨어진 노비사드를 그냥 둘리 없었다. 놀랍게도 쉴레이만 대제가 가톨릭 세계 본거지 오스트리아 빈을 침략할 때 소수 병력을 첨병으로 보내 페트로바라딘을 순식간에 점령해버렸다. 성벽의 견고함이나, 지형지물을 보았을 때 그리 쉽게 공략당할 성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그랬다고 하면 그런 거다. 18세기가 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 지배에 들어가면서 절정기를 맞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곳으로 보이보디나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이주민이 몰려들면서 도시가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그런 이유로 노비사드에는 정교 사원을 비롯해 유대교 사원, 가톨릭 성당 등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17개의 사원이 사이좋게 서로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일명 세르비아의 아테네로 알려진 노비사드 중심가이자 번화한 광장 ‘슬로보데(Slobode·자유) 거리’는 역사를 반대로 쓰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해가 저물기도 전에 남녀노소 누구랄 것도 없이 광장에 모여서 즐긴다. 사람들 얼굴에는 즐거움이 넘치고 웃음꽃이 만개했다. 레스토랑에 북적임도 한 몫 더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와 춤, 축제랄 것도 없는 이들 일상이다. 생소하게 생긴 길손은 귀동냥으로 흥을 얻어 어깨춤이 들썩였다. 그러던 중 파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한 눈의 중년 여성과 마주쳤다. 이방인을 향한 더없는 미소에 낯선 인간의 향기가 스며든다. 광장 맞은편 네오르네상스식 시청사의 웅장한 건물이 무척 매혹적이다. 중심부에 지상 60m 높이, 뿔 같은 탑이 불쑥 솟았는데, 도시 경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다. 개방 시간이 지난 탓에 이방인은 은혜를 입지 못했다. 이때 구름에 잔뜩 가렸던 하늘이 열리고 뾰족한 첨탑의 ‘성 마리성당’이 명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반겼다. 하늘이 하나를 닫으며 하나를 열어 보인 게다. 파란 하늘과 성당 건물의 네거티브한 선이 매혹적이다. 구름이 심술을 부리기 전에 앵글에 담았다. 단 한 컷! 구름이 하늘을 급하게 닫는다. 상념을 깨듯 일렬횡대로 행진하듯 걸어오는 남녀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 같이 손과 입에는 담배를 물거나 들었다. 그 중 한 명은 채 여섯 살도 안 돼 보였다. 기이한 장면에 동방의 이방인은 이 땅에 난립한 신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이 떠올라 그만두어야 했다. 즈마이 요비아 거리 역시 매일 축제날이다. 끝을 모르는 골목, 즐비하게 들어선 레스토랑의 이국적인 정취는 이방인을 더 외롭게 만든다. 요반 요바노비치 드래곤(1833~1904)의 동상이 이방인의 발길을 잡는다. 의사이자 서정시인인 그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곳 거리를 산책하였다. 1984년에 그를 기리고자 그때 모습을 재현된 기념비다. 이내 도나우공원 녹색의 한적한 공간을 지나면 도나우강 너머 페트로바라딘 요새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 은빛 물길이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곳이 피의 역사가 자행된 역사의 현장이다. 강변에 서 있는 ‘희생자조각(Raid The Family)’이 그날의 아픔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월 21일부터 3일간 행해진 헝가리 파시스트들의 만행, 이들은 세르비안, 유대인, 집시 등 1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살육을 했다. 지구촌 어디에도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의 현장, 동상에서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하게 잔상처럼 나타나는 상상의 기억에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한다. 이처럼 비극적인 역사를 노비사드 출신 조각가 요반 솔다토비치(1920~2005)가 조각했다. 밝고 경쾌하기만 한 세련된 도시에 이처럼 아픈 과거가 있다니? 숙연한 마음으로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인간은 창조보다 폭력에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5-07-01

세르비아, 상처만 남은 도시들 ①고도(古都) 스메데레보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동쪽을 향해 버스로 한 시간을 달리면 스메데레보가 나온다. 인구 7만 명이 채 되지 않은 도시지만, 베오그라드 지척에 있는 만큼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도나우강이 도심을 감싸며 흐르고, 낡은 석축성벽이 우뚝 솟아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폭력의 역사를 서둘러 입을 연다. 로마제국 당시에는 로마 땅이었다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이슬람 땅이자 세르비아 수도 역할을 톡톡히 해낸 침탈과 아픔이 담긴 저력(?)의 도시다. 그리고 오스만과 헝가리 국경을 긋는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군 긴 장화발이 장악하면서 하켄크로이츠 폭력을 온 몸으로 맞아야 했다. 인간의 능력은 창조와 건설에 발휘되지만, 모방과 파괴에 더욱 뛰어난 재능을 자랑한다. 이 도시를 찾는 사람은 주로 낡아 초라하기까지 한 스메데레보의 성을 보기 위해서다. 도나우강과 사바강 합류 지점에 서 있는 베오그라드 칼레메그단처럼 도나우강과 스메데레보 도심을 관통하는 예자바강 사이 두물머리, 혹은 합수머리에 버티고 있어 사람들은 ‘물 위의 성’이라고 부른다.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차역을 지나야 했다. 성 입구 허물어져가는 성벽과 마치 띠처럼 어울리는, 언제부턴가 멈춘 녹슨 열차의 처연한 모습은 시공을 뛰어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스메데레보성은 1430년 무렵 세르비아공국 군주 브란코비치 명에 의해 세워졌다. 물론 장기간 공성에 대비한 수성의 역할이 성 내부 곳곳에서 어렴풋이 나타난다. 성벽 두께 2m, 한눈에 보아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본뜬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진 비잔티움 스타일이다. 25m 높이 망루(성 전체에 25개의 망루가 있었다고 함), 우물, 화장실, 마구간, 계급과 신분의 차에 따라 거처의 높낮이 차이도 애써 찾아보았다. 한 곳에서 알게 모르게 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다만, 지원금이 딸려서인지 급할 것이 없는 모습이다. 세월에 허물어지고,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원형은 상상으로도 거의 불가능하니 입체 그림을 그려내는 소프트웨어 성능도 딸리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에서 무척 드물게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라니 할 말을 잊는다. 관광객 낙서에 온몸을 그대로 맡기는 구간도 있다. 우리나라 청잣빛 하늘을 닮은, 도도하게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며 마음을 풀어 놓고 그야말로 멍 때리기에 좋은 곳이다. 그러나 늘 시간을 급조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은 형태를 잃어버린 채 서 있는 성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돌계단과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전쟁의 화급함을 상상했다. 아비규환 속 절규도 그렸다. 그러다 좁은 아치형 통로를 몇 개 돌아서자 탁 트인 망루에 이방인이 올라서 있었다. 건너편 도나우강을 바라보는 망루가 외성(外城)의 존재를 알렸다. 독일 남부 산악지방에서 발원해 흑해로 흘러드는 물길 그 아랫부분에 속하는 스메데레보 도나우강은 그래서 더 넓고 잔잔하며, 한적하기까지 하다. 다분히 세월에 삭아 내린 성채와 고색창연하게 어울리며 장엄하기까지 했다. 허물어지는 성벽 아래를 걷는 젊은 아낙과 조막만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해맑은 아이 얼굴을 바라보며 동방의 수도자 글이 생각났다. “네가 무한한 사랑과 하나가 되는 순간에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신의 은총을 입은 순간에 잊지 말아야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방인에게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낯선 곳에서 먹거리다. 스메데레보성, 길차길옆 작은 식당, 낡은 비닐조각으로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머리를 숙인 채 우연히 들어서서 맛본, 메뉴판을 들고서도 도무지 이름을 읽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빵과 빵 사이에 두께 2cm 됨직한 다진 쇠고기를 넣고 토마토를 비롯해 양파 등 채소가 가득 들었다. 우리나라 햄버그와는 맛은 물론, 크기에 있어서도 비교가 안 된다. 대․중․소가 있어 가장 작은 것을 주문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크기라서 실수로 잘못 나온 줄 알았다. 인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란다. 포장해가는 손님이 대부분이다. 넌지시 분주하기 짝이 없는 주방을 훔쳐보다가 깜짝 놀랐다. 훈제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 중 가장 큰 것이 우리나라 개다리소반 너비만 했다. 콜라와 곁들여 먹는 맛 또한 일품이다. 사이사이 구멍이 숭숭 뚫린 부드럽고 촉촉한 빵과 잘 구워진 다진 고기가 잘 어울렸다. 때마침 참새 두 마리가 나눠먹자며 교대로 식탁에 앉는다. 저 쪼끄만 참새조차도 제 눈에는 낯선 이방인 생김이 만만한 게다. 공원 의자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캔 음료를 마시는 노인들의 주름진 얼굴에 인생의 황혼에서 맛보는 여유를 보았다. 따스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조는 할아버지 옆에 앉아 말을 거는 할머니 모습은 이보다 행복한 표정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저들에 의해 폭력이 생산되고, 폭력에 오롯이 노출된 과거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스토리텔링 작가

2025-06-17

상처뿐인 영광 베오그라드를 가다

세르비아는 발칸반도 내륙국 고도(古都) 베오그라드로 대표되는 나라다. 베오그라드는 남쪽 슬라브의 나라, 즉 유고연방의 수도이자 이들의 영웅 티토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 니슈부터 국토 중앙 세메데레보, 그리고 수도 베오그라드를 지나 북쪽을 향해 노비사드에 이르면 왼쪽은 크로아티아 조금만 더 가면 헝가리 국경이 지척이다. 세계사 중심에서 늘 상처를 입어야 했던 태생적 폭력 현장이자 아픔의 터전이다.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사연을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꿈에서나 보았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에 피맺힌 역사가 마르지 않은 채 곳곳에 묻어 있었다. 베오그라드 발 보스니아 전쟁, 크로아티아 전쟁, 1998년 최근래에 이뤄진 베오그라드 발 코소보 살육전, 그리고 나토의 베오그라드 공습 등 ‘악마의 시대’에 중심적 이미지가 뿌리박혀 있는 곳이 아닐까. 그러나 도착과 동시에 우리 아니면 살육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상한 수도라는 생각은 대번에 깨어졌다. 물론 16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지만 말이다. 18세기 말까지 세르비아는 물론이고 발칸반도 나라들 역시 민족주의 싹이 움틀 만한 조건이나 의식 자체가 거의 없었다. 대신 정교, 가톨릭, 혹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있었을 뿐이다. 신을 믿는 사람조차도 어디 교구 소속인지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삶이 곧 믿음이었고, 종교가 그냥 삶이었다. 다만 수많은 침략을 당해내면서도 처참하게 견뎌낸 세르비아정교가 이들의 정체성이자 가치 정점이었다. 상징적 구심점 세르비아정교회 ‘성 사바(St. Sava)성당’은 오스만제국 이슬람과 오스트리아 가톨릭 세력의 침략에도 민족 저항정신의 요람으로 거듭났다. 그런 만큼 상처도 깊다. 깔끔한 미감, 비잔티움 형식을 닮은 외형과는 달리 어느 순간 어떤 물리적 힘에 의해 멈춰버린 듯한 성당 내부 모습, 세르비안 선지자와 성자들이 슬픈 모습으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거무튀튀한 공간은 이방인 마음까지 점령하는 듯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시선들···. 침묵 속에서 우러나는 숙연함, 신을 향한 간절한 내면을 볼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 도심에 시민 휴식처이자, 여유와 여백의 공간 칼레메그단 성채가 있다. 공원 이름이 요새(Kale)와 전쟁터(Megdan)라는 단어가 합해진 만큼 베오그라드는 오스만제국과 비잔티움제국 틈바구니에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져야 했다. 오랜 세월 그렇게 흘렀을 도나우강(다뉴브, 돈, 두나이, 드네브 등으로도 불린다. 이곳이 세르비아니 드네브라고 해야겠지만···.)이 잔물결 일으키며 침묵으로 대신하고, 사바강과 만나는 교차점의 두물머리 풍경은 역사를 잊은 사람들에게 도심의 삶에서는 도무지 풀릴 것 같지 않은 시름을 풀어주기에 딱 알맞다. 그 위에 우뚝 솟은 칼레메그단 성채는 석양의 황혼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서 있다. 이름처럼 격동의 세월을 온 몸으로 견뎌낸 칼레메그단은 이슬람과 기독교 연합군과의 수전을 온몸으로 겪는다. 2014년과는 달리 2017년에 찾은 칼레메그단에서 한가롭고도 녹녹한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았다. 성채에 올라 먼데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삼각주의 잔잔한 물길을 바라보다 두물머리에 서 있는 육각형 타워 ‘네보이샤탑’이 눈에 다가왔다. 에니체리들이 세르비아 봉기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은 세르비아 민중을 학살하던 장소다. 어떤 식으로든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같은 발칸반도 내 그리스나 세르비아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늘씬하게 빠진 청춘남녀 시원시원한 발걸음에 힘이 넘치고, 이방인 서툰 말에도 친절한 미소로 끝끝내 화답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존적이며 꼴사나운 비틀림에 지나지 않은 어린 학생에 의한 동양인에 대한 멸시 어린 시선과 조롱이 매우 자연스럽기도 하다. 공화국 광장에서 마주친 청춘들이 내뿜는 열기는 서울 홍대거리 못지않았다. 전철 속에서 세르비아대성당 성 사바 가는 길을 묻는 이방인에게 목적지는 잊은 듯 갈등의 기색이라곤 추호도 없이 전철에서 내려 목적지까지 함께하고 돌아서던 자매 눈길은 잊을 수 없다. 그러다 문득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식당에서 만난 세르비아 신혼부부 말이 생각났다. 코소보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자 대뜸 이렇게 말한다. “코소보가 무슨 나라라고···.” 여전히 코소보는 현재진행형이 분명했다. 세르비아인의 성지 코소보에 이방인이 독립을 선언한 이 억울하고도 미칠 듯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코소보가 중세 서사시적 영광이 서린 세르비아인 고향이라는 인식의 뿌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음을 보았다.(본 오피니언 2024년 6월 18일자 16면 ‘검은 새의 들녘’ 세르비아 민족 성지 코소보 참조) 코소보 프리슈티나 박물관에서 각 나라 국기들 중 유독 태극기를 망토처럼 걸치고 사진을 찍던 프리슈티나대학교 2학년 여학생 말이 떠올랐다. “코소보를 어떻게 생각해요?”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알아들었다. 그러나 답은 글쎄···. 갈 길이 멀다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대한민국은 ‘BTS’의 나라였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5-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