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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팔과 다리에 쥐가 자주 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해결책이 영양제다. 약국에서 권하는 마그네슘 제제를 사서 복용하는 일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실제로 마그네슘은 근육 경련 완화에 도움이 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정확한 진단과 상관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몸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좋다더라”라는 말만 믿고 약을 먹는 습관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상화된 모습이다. 최근 주변을 둘러보면 약을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비타민은 기본이고 각종 건강기능식품, 심지어 특정 질환을 예방하거나 기능을 강화한다는 약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약 90%가 3개월 이상 처방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심혈관 질환 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질환을 생각하면 약물 복용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약을 ‘필요해서’ 먹는 것과 ‘막연한 기대’로 먹는 것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우려스러운 현상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건강 정보가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병원 치료보다 자연 요법이나 약초를 더 신뢰하며 검증되지 않은 방법에 의존하기도 한다. 중병을 앓다가 산속에서 약초를 먹고 완치됐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반복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대부분 개인의 경험담일 뿐 의학적 근거로 보기 어렵다. 현대 의학이 축적해 온 치료 방법과 약물의 역할을 무시한 채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기대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기능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젊을 때 아무리 강인했던 신체라도 세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병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환상보다는 증상을 관리하고 삶의 질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물 복용과 정기적인 검사, 생활 습관 관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정작 필요한 관리보다 편의와 습관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건강검진이나 진료는 미루면서 영양제나 건강식품에는 쉽게 손이 간다. 또래 친구들과 모여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약부터 찾는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몸은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약과 건강에 대한 태도 역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약은 분명 많은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 없이 남용되거나 근거 없는 정보에 흔들린다면 약은 치료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결국 건강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순하다. 자기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다. 약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 역시 이제는 경험담이 아니라 근거와 책임 위에서 다시 정리되어야 할 때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방송에서 한때 글루타치온이 유행이더니 요즘은 ‘알부민’이 뜬다. /노병철 수필가

2026-04-02

남성 육아휴직 제도의 문제점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처음 도입되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씁쓸하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육아휴직을 신청한다는 것은 많은 사업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한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대부분의 소규모 사업주가 느꼈을 감정은 놀라움과 당혹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제도는 이미 만들어졌지만, 현실의 현장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남성에게까지 육아휴직을 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남성 육아휴직 사용을 적극 장려해 왔다. 육아를 여성에게만 맡기던 사회 구조를 바꾸고, 부모가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러나 정책의 취지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몇 명의 직원이 전부인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직원 한 명의 장기 휴직이 곧바로 운영 부담으로 이어진다.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휴직자가 복귀하면 인적 구조가 다시 흔들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시로 채용한 대체인력을 내보내는 일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부담이 제도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육아휴직 기간 발생하는 보험 부담이나 퇴직금 적립 문제, 대체인력 채용 비용 등은 대부분 사업장의 몫으로 남는다. 규모가 큰 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영세한 사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사업주와 직원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과 불신이 생기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육아휴직 제도의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의 상당수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역설적인 결과다. 급여 수준이 낮은 근로자일수록 휴직 기간의 소득 감소를 감당하기 어렵고, 복귀 이후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크다. 결국 제도는 존재하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저출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정부는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을 시행해 왔지만, 출생아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는 정책의 규모보다 정책 설계가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육아휴직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소기업과 자영업 현장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대체인력 지원과 비용 보전 같은 현실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제도가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창한 구호보다 현실을 세밀하게 살피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는 종이 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는 정책의 숫자보다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곧 선거철이다. 배부른 사람이 이긴다면 배고픈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26

정치는 타협이다

어릴 적 세계지도를 보면 난 정말 뿌듯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모든 것이 우리나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컸다. 솔직히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면서도 왜 우리나라가 있는 곳을 ‘극동(極東)’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시아라고 분류하더라도 ‘중동’은 되어야 하지 않냐는 의문이 늘 있었다. 선생님에게 물어봤으면 당장 답을 해주었겠지만, 당시 선생님이란 존재는 매를 들고 있는 하늘 같은 존재라 이런 엉뚱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아 감히 묻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중동을 개척했던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고구려 사람이란걸 당시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을 읽고 알았다. 진짜 고구려 사람이 맞냐고 선생님께 질문했다가 수업 중에 이상한 질문 한다고 얻어터진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매를 부르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진 터였다. 암튼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각 나라의 세계지도가 다르다는 것을 보았고 솔직히 많이 신기했었다. 각 나라의 위치는 세계지도의 중심이었고 유럽 지도를 보면 한국과 일본은 완전 동쪽, 즉 극동임이 분명했다. 좀 과장하게 표현하면 지도 맨 우측 구석에 처박혀있는 꼴이었다. 유럽 애들이 우리나라 위치를 잘 찾지 못하고 한국에 가는 것을 마치 해남 땅끝으로 가는 기분이 이해됐다. 면적 10만km²의 한국은 G20 국가 가운데 국토가 가장 작은 나라다. 시속 400km의 고속철로 1시간 반 만 달리면 더는 갈 곳이 없는 나라다. 영국이 G20 중 우리나라 바로 위의 작은 국가인데 면적은 우리나라의 2배(24만4000km)가 넘는다. 중국은 22개 성(省)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작은 성과 면적이 같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이 작다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아웅다웅하며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왔다. 그래도 큰 자부심으로 지냈다. 간혹 능력 안 되는 정치인들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무한정 발전하였다. 보릿고개 노래 부르던 우리나라가 세계 제7대 경제 대국이란다. 이건 그저 얻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똑똑한 국민은 정치 잘못하는 것을 늘 바로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나라 꼴을 보면 왜 이렇게 가슴 답답하고 한숨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 좁은 나라에서 젊은 애들은 애도 낳지 않는 나라에서 뭐 먹을 것이 있다고 이렇게 죽자고 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꽉 막힌 인간들은 처음 봤다. 경행록에도 “남에게 원수를 맺게 되면 어느 때 화를 입게 될지 모른다”고 했고, 제갈공명도 죽으면서 “적을 너무 악랄하게 죽여 내가 천벌을 받게 되는구나”라고 후회하며, 적도 퇴로를 열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거의 죽기 살기이다. 누가 날 죽이려 들면 어떤 사람도 그냥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는다. 원수를 꼭 갚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에 보복은 필수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제 끊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좁은 나라에 살지만, 배포는 좀 크게 통 큰 정치 한번 봤으면 싶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19

남자의 길을 없앴다

여자 얼굴이 반반하면 집구석 망친다고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다. 딸 하나 없이 아들만 삼 형제를 둔 엄마는 사내들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사고나 치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한 것 같다. 싸움판에 끼어들어 주먹질하다가 잡혀갈까 싶어 우려하셨고 ‘야시 같은’ 여자에게 넘어가 제 앞길 못 갈까 봐 볼 때마다 매사 행동거지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으신다. 아마도 아들만 둔 엄마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셨으리라.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삼 형제가 다 연애결혼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다. 아버진 끝까지 가족의 안위를 위해 돈 벌기를 거부하셨고, 없는 집 자식이 결혼하기엔 연애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기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것이다. 특히 돈 없는 집 장남이 결혼하기란 허우대만 멀쩡해서 되는 것은 아니기에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말이 맞겠다. 집사람은 아직도 자기 얼굴이 반반해서 선택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굳이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나도 오래 살고 싶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당신 며느리들의 미적 기준인 ‘반반함’은 없었나 보다. 근근이 형제들이 밥은 굶지 않고 살고 있으니 말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뜻은 왕이 여자 치마폭에 빠져 나라가 망하는 것도 모를 정도의 헤매게 하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를 이르는 말이다. 의자왕을 정신 못 차리게 한 가희, 숙종 때 장희빈, 연산군 때 장녹수가 그 대표적인 주자로 보면 되겠다. 중국에선 호수에 얼굴을 비추자,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다는 서시, 하늘을 보는 순간 기러기가 날갯짓하지 못해 떨어졌다는 왕소군, 보름달도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는다는 초선, 꽃 중의 꽃 모란꽃도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는 양귀비를 내세운다. 중국 사람들 ‘뻥’이야 세상이 아는 이야기인지라 대충 감안 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문학적 형상화만큼은 인정할 만하다. 이런 반반한 여자는 집구석이 아니라 나라까지 ‘망조’들게 만든다는 전례를 강하게 전해준다. 살면서 반반한 얼굴만 보고 결혼해서 파탄이 난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때 어머니가 왜 ‘반반한 여자’를 조심하라고 한 건지 이해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분명 사고 치신 전력이 있어 그 화가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청빈한 생활의 대표적 주자라 술집에 작부에게 갖다줄 돈이 없었고, 고질병인 잠꼬대로 인해 낮에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토해내는지라 여자로 인한 추문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한 삶을 사셨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본받으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남자는 풍류를 즐길 줄 알아야 돼.” 흔히 남자의 조건에서 주색잡기에 능해야 한다고 배웠던 ‘남자의 길’은 어디에서도 대놓고 이야기도 못 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반반한 여자 찾다가 미투에 걸리거나 패가망신 한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반적 추세가 이젠 ‘여존남비’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괜히 옛날이야기를 지금 떠벌리고 다니면 사람 꼴만 우습게 되는 세상인지라 난 큰 결심을 했다. 아들을 낳지 않겠노라고. 그래서 아들이 없다. 남자의 길을 없애버렸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12

사라진 가장놀이

애처가와 공처가 차이를 묻는다. 난 대답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내 팬티는 내가 알아서 빨면 공처가이고 내 팬티 빨 때 마누라 팬티도 같이 빨면 애처가라는 말은 이십여 년 전부터 나돌던 이야기다. 주위에 힘없는 가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서로 묵례하면서 겸연쩍게 웃는 모습이 남자들의 자화상이다.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던 반딧불이 세대는 이미 한참 지나간 이야기다. 장사꾼과 사업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장사꾼은 물을 많이 뜨기 위해 양동이만 늘리고자 힘쓰지만, 사업가는 한꺼번에 다량의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부터 준비한단다. 근본 생각부터 차이가 나야 한다는 말이다. 집안에 가장 노릇도 마찬가지이다. 권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시절이 아니기에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대통령 꼴이 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할 자리임에도 탄핵당하고 형사소추 당하고 있으니, 나라가 어디로 갈지 자못 걱정스럽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양아치들의 계급 놀음인 보스가 아니다. 일종의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위치이다. 보스는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이끌고 간다. “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가자”고 권고한다. 따라서 보스는 권위적이지만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보스는 음흉하게 비밀리에 일을 꾸미고 들키면 발뺌하거나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남을 절대 믿지 않으며 겁을 주는 폭력에 의한 공포심을 심어주어 복종만을 요구한다. 아버지는 보스였다. 그게 남자라고 믿었다. 가끔 소리도 지르고 밥상도 한번 엎고,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와 자는 애들 깨워서 일장 연설도 하고. 그래도 절대 탄핵당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가장으로서 존경받지 못하고 늘 뒷전이거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젊은 시절 할아버지나 아버지 흉내 내면서 힘으로 짓누르려고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김두한 시절 흉내 내던 보스 기질이 그대로 살아남았으리라. 농사짓던 시절 아버지의 권위는 하늘 이상이었다. 나라에서도 군사부일체니, 뭐니 하면서 아버지 권위를 부추겼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는 잘 먹고 잘 놀다 가셨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 세대까지는 어떻게 세력 유지하면서 버틸 줄 착각했다. 꿈은 바로 깨졌다. 대통령은 탄핵당하기 일쑤이고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됐다. 요즘 젊은 애들은 남자도 음식을 한단다. 서로 맞벌이가 많아 청소나 설거지도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작업구역으로 변모했다. 우리 때는 여자 일로 규정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거들어 주면 칭찬받았는데, 이젠 안 하면 바로 지적당한다. 다행히 아들이 없어 며느리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아들 꼴을 안 봐서 다행이지만, 사위가 내 딸에게 잡혀 사는 것도 별반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 딸이라 못 본 체할 뿐이다. 안사돈은 자신이 낳아 좋은 음식만 갖다 먹여 키워놓은 자식이 저 지경으로 사는 걸 보고는 천불이 나 어쩔 줄 모르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05

의료계 문제

우리나라는 매년 의료질 평가라는 것을 한다. 수술, 질병, 약제사용 등 병원의 의료서비스를 의료의 안전성· 효과성· 효율성 ·환자 중심성 등 측면에서 평가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다. 지역 종합병원 중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이 고관절 치환술, 췌장암수술, 식도암 수술, 조혈모세포이식술, 위암, 간암 평가등급에서 모두 1등급을 받았다. 이는 의료능력자들이 대거 투입되었거나한 대규모 투자가 있어 시설이나 장비가 엄청나게 보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북대병원은 췌장암과 식도암, 간암에서 2등급을 받았고, 칠곡경북대학교병원은 췌장암에서 2급, 식도암은 평가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영남대병원은 식도암, 위암에서 2등급을 받았다. 대구카톨릭대병원은 췌장암, 식도암, 위암에서 2등급을 받았다. 모두 1등급 받은 병원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서울성모병원 정도라 계명대 동산병원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1등급을 받은 서울의 최상급 병원들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전국에 있는 중환자들이 이들 병원으로 몰린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제대로 진료받고 싶다는 심리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 병원에서 새벽 수술은 거의 일반화되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밀려드는 수술 환자를 쳐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의료계가 경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방과 서울 의료 격차가 크다는 이야기를 지방에 사는 우린 많이 듣는다. 왜 이런 이야기가 도는지 지역 의사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투자하지 않는 곳에 발전은 없다. 교수들은 자꾸 노령화되어 가고 있고 신기술을 받아들일 여력은 없다. 그렇다 보니 할 수 있는 한계치가 보이게 마련이다. 적자에 허덕이며 주차비 받고 매점 운영해서 병원 운영비 보태야 하는 지금 상황에선 의료 발전을 기대하긴 힘들다. 미국 최고로 꼽히는 ‘빅4’ 병원은 메이요 클리닉, 존스홉킨스대 병원, 하버드대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클리블랜드 클리닉을 꼽는다. 이 병원의 의료 기술은 세계적이라는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세계 갑부들이 거의 이 병원에서 치료받으니 말이다. 이들은 우리나라 병원을 찾지는 않는다. 이들 병원과 우리 1등급 병원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 병원들이 가지는 모토를 보면 ‘환자가 최우선’이고 ‘창의적인 의학 연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 병원에는 대략 한국 병원보다 10배 이상 많은 전문의와 교수가 있다. 이들이 하루에 진료하는 환자 수는 한국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니 개개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최상의 진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자. 의료 보험비보다 의료 사보험비를 더 많이 내야 하는 이상한 의료체계를 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병원 간병인이 재중동포인 조선족으로 대체된 지 오래됐다. 곧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의사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의사로 대체될 것이다. 수술할 의사가 없어지는 데도 정치권은 지금도 의료인 숫자놀음에 빠져 한가하게 국민 세금을 축내고 있다. /노병철 수필가

2026-02-19

나잇값 하기

병원에선 나이를 만으로 쓰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 이런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특히 머리가 나빠 수(數) 계산에 약한 터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하고 대충 나이를 적는다. 지금 내 나이에서 한 살을 빼야 하는지 두 살을 빼야 하는지 잘 몰라서다. 옆 친구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조건 한 살 빼란다. 친하긴 하지만 머리 쓰는 쪽으로는 별로 믿음이 안 가는 친구라 똑똑한 반장에게 물어본다. 생일이 안 지났으면 두 살 빼고 지났으면 한 살 빼란다. 어렵다. 그래서 나도 친구 따라 무조건 한 살 빼는 것을 택했다. 복잡한 건 무조건 싫어하니깐. 남자라는 족속들은 족보 따먹기에 민감한 시절을 거친다. 특히 고등학교 때 유독 심하다. 중학교까지는 같이 다니다가 아파서 한 학년 쉬다가 들어와 밑에 학년이 되는 경우가 있다. 동네에선 같은 친구지만 학교에선 학년이다. 나이와는 관계없다. 무조건 학년이다. “빠른 몇 년생이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가 한 살 적은 경우가 있다. 1월부터 3월생들이다. 우린 이런 애들을 ‘빠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이야기한다. 이들은 나이는 같지만, 학년은 높아 밑에 후배들에게 나이를 한 살 속이기도 한다. 혹자는 돌아가신 애먼 할아버지 핑계를 댄다. 언제 죽을지 몰라 일 년 뒤에 신고했다고. 어떤 이들은 어른들이 애들 출생신고를 한꺼번에 모아서 가는 바람에 몇 년 늦었다고 하기도 한다. 실제 그런 일이 있기도 한 시절이라 그냥 넘어간다. 그놈의 나이가 뭐라고. 복(福) 많이 받으라는 인사 시즌이다. 신정 때 한번 하고 구정 때 또 한 번 해야 한다. 참으로 희한한 나라다. 그래서 어릴 적엔 신정 때 한 살 먹고 구정 때도 한 살 더 먹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음력이란 걸 알았고 생일이 왜 매년 달력과 다른지도 알게 되었다.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음력”이란 말을 꼭 붙인다. 요즘도 업체에선 내 생일도 아닌데 축하 메시지를 보내와 당황스럽다. 음력 생일을 양력 생일 날짜에 맞춰 문자를 발송해서 생긴 일이리라. “붉은 말의 해” 뭐 때문에 ‘붉은’ 말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부른다. 누가 내게 붉은 부적 한 장을 들이민다. 올해 삼재(三災)란다. 불교에선 삼재란 말이 없다. 정통 명리학에도 삼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삼재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쥐어짜서 한푼 벌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도 부족해 들삼재, 눌삼재, 날삼재라고 세분화한다. 12개 띠 중에 9개 띠가 항상 삼재에 걸리게 만들어 놓고선, ‘삼재팔난’ 운운해 가면서 난리다. 양력에 나이를 먹든지 음력에 나이를 먹든지 먹었으면 나잇값이나 하고 살아야 할 텐데 사리 판단 제대로 못 하고 엉뚱한 행동하는 사람이 자꾸 보인다. 신년 되었다고 점집 찾아 토정비결이나 보고 다니면 젊은 애들에게 욕먹는다. 그리고 나이 들어 미신 찾으면 굉장히 추해진다. ‘만 나이’ 헤아리고 ‘학년’ 따지고 ‘빠른 나이’ 따지는 시절 다 지나가고 이젠 한 살이라도 줄여보려고 애쓴다. 더는 나이 계산할 나이가 아닌 모양이다. 나잇값을 해야 하는 나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2-12

공자님 말씀은 아닌데

서원과 절의 공통점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친 현대인이 힐링할 곳을 찾는다면 절이나 사원 쪽으로 가면 거의 틀림없다. 내가 여행지를 정할 때 유독 그쪽으로 택하는 이유이다. 서원에 가면 육십이 훌쩍 넘은 듯한 중년 단체 방문객들이 열심히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본다. 주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별 관심도 없다. 그저 사진이나 찍으면서 희희낙락이다. 마루에 신발 벗고 올라가지 않고 걸터앉아 해설사 이야기 듣는 중년들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이다. 마루에 걸터앉는 것은 예가 아닌데도 말이다. 지인이 도산 서원에 다녀왔다기에 물었다. 마당 앞에 큰 나무 두 그루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단다. 도동 서원에 갔다 온 분에게 물어도 서원 앞쪽 큰 은행나무 이야기만 한다. 4변(籩) 4두(豆)나 축(畜)과 생(牲)의 이야기는 머리만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 그냥 입을 다문다. 서원에서 조상들이 던지는 말이 한가지가 아닌데 안타깝다. 한 2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중문과 전공인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펴냈다.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의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유교의 도(道)는 윗사람에서 유리하고 아랫사람에게 불리하며, 윗사람에게는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는 것 같으며, 아랫사람에게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것 같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난리가 날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유학자분들의 저항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고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세상은 그때부터 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당시 젊은 사십 대가 지금 육십 대이다. 그 속에 내가 속해있다. 요즘 서원 같은 곳을 다니면서 그동안 몰랐던 것을 배우곤 한다. 젊을 땐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눈에 보인다. 나이 먹은 탓일까. 문제는 공부하면 할수록 여태 내가 알고 있던 유교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온다. 우물안에 개구리란 말뜻을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 풍속화에서 본 갓 쓴 선비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육아가 여자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부모들이 자식에게 과한 기대치를 내걸며 부담시킬 것을 염려해서 교육은 주로 조부모가 맡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제사도 과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가정 형편에 맞게 올렸으며,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다. 남자들이 직접 음식을 하고 제사상을 차렸으며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뭔가 잘못 알고 있었고 변질된 듯하다. 언제부터 강한 남존여비의 사상이 우리 몸에 스며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첫 손님이 여자이면 재수 없다는 말을 듣고 컸다. 어릴 때 남자들은 상에서 밥을 먹었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먹었다. 요즘도 장례식장에 가 보면 딸만 있는 집은 사위가 상주이다. 여자는 상주도 될 수 없다는 전통이 이어져 온다. 안경 쓴 여자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여성 아나운서가 안경을 쓴 채 뉴스를 진행하는 것이 화제가 됐다는 말을 듣고 픽 웃음이 나온다. /노병철 수필가

2026-02-05

현실적 남녀평등

간혹 이슬람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여성에 대한 차별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 사람을 본다. 하긴 이슬람 원리주의자 탈레반은 이슬람 경전 코란을 근거로 여자를 악의 근본으로 보고 철저하게 배척하고 유린하고 있다. 여성은 철저히 남성에 복속된 존재다. 강제 결혼을 당할 수 있고,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되면 죽임을 당하고, 외간 남자와 말이라도 섞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하지만 역사를 훑어보다 보면 이게 이슬람 문화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은 다 있다는 이야기이다. 제임스 코미 전 FBI 국장의 회고록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은 여성을 고깃덩이로 취급한다고 폭로했다. 이게 21세기 미국 대통령이란 작자의 여성관이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 내가 클 때만 해도 여자의 웃음소리가 집 밖을 나가면 안 되고 가게 첫 손님이 여자이면 재수가 없다고 했고 안경 쓴 여자는 더더욱 재수 옴 붙는다고 했었다. 안경 쓴 여자가 택시 첫 손님이었을 때 승차 거부는 물론이고 그날 사고 난다고 운행을 안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요즘은 당연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MBC 뉴스 진행을 맡은 임현주 아나운서가 안경을 쓰고 출연했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남자는 괜찮고 여자는 화제가 된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이게 현실이다. 불교에서 비구와 비구니의 차이는 엄청나다. 비구는 250계(戒)만 받으면 되지만 비구니는 348계(戒)를 받아야 한다. 원칙주의자인 성철 스님도 이런 게 상당히 못마땅했든지 많은 부분을 개선 시켰고 보완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본다. 가톨릭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여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고 프란치스코 가톨릭 266대 교황은 대놓고 말했다. 수녀는 사제가 아니기에 가톨릭 교단에서 아무 발언권이 없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바로는 불교에서 보살(여자)의 역할이 없으면 불교는 없다. 마찬가지로 가톨릭에서도 자매들이 없으면 성당 문 닫아야 한다. 종교에서 여성 파워가 막강하다고 아니할 수 없는데 변화의 조짐은 더디기만 하다. 답답했던지 나라에서도‘양성평등기본법’이란 것을 만들었다. 모든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 참여 기회를 보장하고 양성평등의 사회를 실현하라는 강행 규정이다. 분명 외견으로는 불평등이 여전히 지금까지도 존재한다는 이야기인데 솔직히 실감은 잘 나지 않는다. 나만 그렇게 느끼며 살고 있나? “아직 여자들이 불평등을 당한다고?” 정년퇴직하고 세끼 밥이나 축내는 삼식이란 놀림을 받지 않으려고 요리 배우는 지인의 예를 굳이 들지 않아도 주위에 남성이 대접받는다는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한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기상청에서 날씨 예보할 때 기온에 덧붙여 체감온도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무리 기온이 높거나 낮아도 체감온도에 의해 사람이 느끼는 감응은 다르게 마련이다. 분명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체감온도는 그 반대이다. 누가 양성 불평등을 논하고 있는지 알고 싶고 직접 체감하고 싶다. /노병철 수필가

2026-01-22

주사 이모

골프장에 가면 호칭은 단 하나다. 모두가 “사장님”이다. 진짜 사장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손사래를 쳐도 “사장님 나이스 샷”은 멈추지 않는다. 호칭은 사실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편리하게 만드는 장치다. 반복되면 어색함은 사라지고, 결국 말은 의미를 잃는다. 골프장에서 사장님이 넘쳐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호칭이 존중의 표현이기보다 서비스의 윤활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듣는 쪽도, 부르는 쪽도 그 허구를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주사 이모’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적잖이 낯설었다. ‘주사 아줌마’도 있을 수 있고, ‘주사 도우미’도 가능할 텐데, 왜 하필 이모일까. 더 묻게 된다. 고모는 왜 안 되는가. 외삼촌은 왜 상상조차 되지 않는가. 호칭 하나에 이렇게 많은 전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고, 동시에 불편함을 남긴다. 이모라는 호칭은 이미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식당에서도, 마트에서도, 동네 병원에서도 여성 노동자를 부르는 가장 무난한 말이 되었다. 이름 대신 불리고, 직함 대신 쓰이며, 개인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친근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 친근함은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향한다. 부르는 쪽은 편하고, 불리는 쪽은 선택권이 없다. 과거 드라마 속 가사도우미는 “청주댁”, “안성댁”으로 불렸다. 본래 ‘댁’은 존칭이었지만, 어느 순간 출신과 신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었고, 급기야 비하의 언어로 굳어졌다. 지역과 혈연을 담던 말이 노동과 종속을 표시하는 기호로 변한 것이다. 언어는 이렇게 계층을 정리하고, 한 번 굳어진 호칭은 좀처럼 위로 이동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이모라는 말조차 부담스러워졌는지, 재벌가를 다룬 드라마에서는 가사노동자를 “실장님”이라 부른다. 반면 골프장에서는 모두 사장님이고, 글 쓰는 세계에서는 모두 선생님이다. 미술계에서는 작가라 부른다. 이 공간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이모’라는 호칭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모는 특정한 장소, 특정한 계층에만 허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호칭 하나로 공간의 위계가 구분되는 셈이다. 백화점에서 이모라는 호칭이 통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곳에서는 “저기요”면 충분하다. 아가씨도 아니고, 이모는 더더욱 아니다. 호칭을 지우는 대신, 서비스 공간의 격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모라는 말이 그만큼 낮은 위치로 고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는 평생 이모라는 호칭을 거의 쓰지 않고 살았다. 어머니는 외동이었고, 아버지 쪽에는 고모만 있었다. 그래서인지 식당에서도 이모라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오십쯤 되어 보이면 무조건 아가씨라 부른다. 그 말에 불쾌해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불편함은 말보다 맥락에서 생긴다. 내게 이모는 친족 호칭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모는 여성 노동자를 부르는 가장 손쉬운 말이 되었다. 친근함이라는 포장을 두른 채, 개인을 지우고 역할만 남기는 언어가 된 것이다. 만약 주사를 놓는 사람이 남자였다면 우리는 뭐라고 불렀을까. ‘주사 외삼촌’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요즘 꽤나 심심하긴 한 모양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1-15

점집 대목 시즌이다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붉은 말의 해’라면서 새해의 염원을 담고 있다. 붉은 말은 설날 이후에나 오는 것을 알면서도 설날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일단 먼저 즐기자는 마음이 강한 모양이다. 주작(붉은 참새)을 가리키는 남쪽 방위의 색이라 붉은 말이라고 하는지, 천간이 ‘병(丙)’이어서 화(火)에 속하기 때문에 붉은색이라고 하는지, 찾아보지 않고 쉽게 설명해 주는 이가 없다. 쉽게 설명이 되지도 않겠지만 그걸 꼭 들어야 할 이유도 없기에 ‘청색이라면 청색’ ‘붉은색이라면 붉은색’인가 하고 고개만 끄덕여 준다. 천간과 지지에 의해 ‘붉은 말띠의 해’라고 하니 그런가 하고 이해하지만, 천간과 지지는 음력 기준이라 아직 좀 기다려야 한다. 해가 바뀌면 미래를 예측한다는 점집이 대목을 탄다. 종교를 가지고 안 가지고 별반 차이가 없다. 교회 다니면서도 점집 찾고 절에 불공드린다고 부지런히 법당을 드나들면서도 버젓이 점집을 찾는다. 이런 상황이니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찾지 않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꾸짖으면 되지만 신도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살림을 사는 절의 궁색한 사정으로는 스님이 명리를 공부해 대충이라도 신자의 마음을 달래주지 않을 수 없다. 옥황상제나 용왕을 모시거나 관우 장군을 모시는 무당들도 버거운데 좀 배웠다는 사람들은 명리학이니 뭐니 해서 사주팔자로 사람들을 현혹하니 주지 스님 머리가 자못 복잡하다. 사기 치는 집단들,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사람의 아픈 구석을 집요하게 후벼파거나 자식이나 건강을 빌미로 협박한다. 병으로 죽거나 자식이 잘못된다는데 ‘이깟 돈이 뭔 대수냐’라는 생각에 한순간 자신의 지조를 무너뜨리고 만다. 무당의 특징이 과거는 잘 맞추는데, 미래에 대한 예측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귀신을 통한 영매도 귀신이 알려주는 과거는 족집게처럼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귀신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선 대충 어벙벙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긴 미래에 대한 예측이 제대로 된다면 달셋방에 대나무 꼽아놓고 손님 기다리는 무당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삶에 관한 궁금증 때문에 과거를 잘 맞춘다는 무당을 찾아 구렁이 알 같은 돈을 아낌없이 주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답답한 일이다. 국정을 점쟁이들 손에 맡겨 운영하려 했던 대통령도 있었는데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있다. 한 심포지엄에서 패널로 나온 출중하시고 고명하신 선생님들의 발표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의 역사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발표하였다. 요지는 언제부터 우리는 어려운 역경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헤쳐 낸 과거 몇몇 선배들의 희생으로 인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잘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물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것으로 결론 내었다. 그래서 질문했다. “그래서 향후 10년 뒤를 전망해 주십시오.” 미래에 대한 대안은 차치하더라도 현재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개선 방안이라도 내놓았으면 좋으련만 패널분들은 흘러간 과거 노래만 하고 있었다. 용한 무당도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하라는 나도 미친놈이지만. /노병철 수필가

2026-01-08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어릴 때 짜장면 한 그릇이면 다 통했다. 졸업식, 입학식, 그리고 생일 때 짜장면 이상은 사치였다. 탕수육 같은 건 있는지도 몰랐다. 우동 아니면 짜장면이었고 아버지는 가끔 짬뽕을 잡수시곤 했었다. 그래서 지금도 짬뽕은 어른들이 드시는 음식으로 안다. 짜장면이 1970년에는 한 그릇에 100원 정도였으나 최근엔 7000원 선으로 가격대가 형성돼 있다. 물론 동네 중국집에선 5000원 정도 받는 곳도 있긴 하더라만, 50년 동안 50배나 가격이 뛰었다. 요즘 식당 밥값이 장난이 아니다. 1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중국집이나 분식집 말고 없을 정도이다. 학창 시절 데이트할 땐 돈 1만원만 있으면 둘이 극장가고 다방에서 커피 한 잔씩 마셔도 집에 갈 버스비는 남았다. 지금 애들은 도대체 얼마를 들고 나가야 데이트를 할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선다. 특히 남자애들이 부담이 상당할 것 같다. 둘이 짜장면만 먹을 수는 없을 테고 분위기 한번 잡을라치면 두당 3만원 정도는 생각해야 한다. 차 한 잔 마시면 거의 10만원 돈이다. 요즘은 그래도 ‘카드’라는 것이 있어 돈 떨어져 집에까지 뛰는 사태는 없어 다행이다. 제주 유명호텔 짬뽕 한 그릇이 6만2000원이다.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먹으면 20~30만원이 짬뽕값으로 나간다. 메뉴 제목이 ‘전복 한우 차돌박이 짬뽕’이라는데 우리 동네 중국집에선 문어까지 넣은 고급 짬뽕이라도 2만 원을 넘지 않는다. 비싼 호텔 짬뽕이 대중적인 음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비싼 짬뽕을 먹기 위해 줄을 선단다. 인생 짬뽕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 짬뽕 가격에 질려버린다면 파인다이닝 식당엔 근처에도 갈 생각을 접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몇몇 생소한 단어가 옆을 스친다. ‘파인다이닝’ ‘오마카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 그냥 서민으로 한세상 그렇고 그렇게 산다고 보면 된다. 재혼을 준비하는 돌싱들 이야기가 흥미를 끈다. “재혼 목적 교제 중, 어떤 말을 자주 들으면 재혼 의지가 꺾이느냐”라는 질문에 남성 대부분이 ‘파인다이닝’을 골랐다고 한다. 데이트비를 거의 지불하지 않는 여성이 맨날 고급 식당을 요구하면 ‘나를 호구로 보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여자는 정이 뚝 떨어진단다. ‘파인다이닝’이란 ‘좋은’, ‘질이 높은’이라는 뜻의 ‘fine’과 ‘식사’를 뜻하는 ‘dining’의 합성어이다. 문자 그대로 비싼 식사, 고급 식사를 뜻하는 일반적인 어휘라고 보면 된다. 이름난 셰프가 운영하는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식사 금액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시그니처 메뉴를 제공하고 받는 금액이 일인당 수십만 원이라고 한다. 수억대의 자금을 인테리어에 투자하고 테이블과 의자 또한 최고급이다. 화장실에는 고급 향수가 비치되고, 고급 브랜드들의 식기가 제공된다. 보험 신청하고 받은 그런 허접한 그릇에 밥 먹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갑자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한 번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서글퍼진다. 인생이 헛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제주도는 비행기 값이 없어서 못 가고 동네 중국집에서 뜨끈한 짬뽕 국물로 속을 달래야겠다. /노병철 수필가

2026-01-01

애매한 밥값 이야기

이걸 관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예절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여자가 밥값 내는 행위를 시건방지게 생각했고 설사 남자가 돈이 없어 여자가 내야 할 때도 탁자 밑으로 돈을 건네주어 남자가 내게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고, 우린 이런 행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연장자에게 얻어먹는 것은 당연했고 후배가 밥값을 낸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그래서 선배 대접 제대로 받으려면 밥값 정도는 항상 챙겨 다녀야 했다. 이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가 아니란 게 놀랍다. 얼마 전만 해도 남자라는 ‘거들먹’이 몸에 남아 밥값 정도는 내가 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건만, 세상은 변했고 나도 변했다. 이젠 여자가 밥값을 내는 행위에 익숙해져서 별로 어색하지도 않다. 대구 수필가이신 김상립 선생은 나이 어린 사람과 식사 자리에서 밥값을 거의 전담하셨다. 너무 얻어먹는 것이 죄송스러워 몰래 몇 번 내기도 했지만, 선생은 결코 신발 끈 맨다고 우물쭈물하신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자리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항상 도리를 다하고 사셨기에 거리낌이 없었고 당신 속에 있는 말씀을 다 하셨다. 결코 구질구질하게 눈치를 보며 주위 지탄을 우려해 주례사만 읊는 법이 없었다. 그런 당당한 모습에 반해 언제부터인지 선생처럼 되어보려고 따라 하다가 집구석 거덜 날뻔했다. 아무나 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요즘은 연로하신 분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린 인간이 밥값을 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용돈 받아 쓰시는 분에게 밥값을 전가한다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이래저래 애매한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우리말 뿌리 찾기 ‘어원사전’을 내신 국어학계의 거목 고(故) 이기문 서울대 명예교수를 알만한 분들은 다 안다. 그동안 잘못 알려진 어원을 제대로 오랫동안 연구해 찾아낸 분이다. 작고하신 지 몇 년 후에 제자들에 의해 책이 마무리되어 출간되었다. 북한이 고향이었던 이기문 교수는 소문난 ‘평양냉면 마니아’였다. 그래서 후배들이나 제자들을 데리고 냉면집을 자주 찾았던 모양이다.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학문적 업적보다는 교수님은 절대 후배나 제자들이 식사비를 못 내게 했다는 것을 더 기억하고 있어 웃음이 난다. 제자들이 이제는 연로하신 교수님을 대접하려 하면 교수님은 ‘아무리 제자가 돈을 벌어도 스승이 사는 법’이라며 크게 화를 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단다. 이름을 남기려면 제자를 잘 키워야 하고 제아무리 살아생전 출중한 업적이 있어도 그 업적을 인정해 줄 후학들이 없으면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이름 석 자는 사장되고 만다는 것이 현실이다. 혼자 똑똑한 척 잘난 척하며 우쭐대면서 거들먹거리는 인생을 살아도 주위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다 헛짓거리라는 말이다. 밥을 사고 안 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서 스승으로서의 인격이 보이면 후학들이 추앙하게 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일 때는 앞에서는 가식적인 웃음만 날리고 있다가 사후 그 어떠한 기억도 지워버리는 것이 요즘 세태라는 말이다. 학식과 덕망도 갖춰야 하고 지갑도 두둑해야 하니,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노병철 수필가

2025-12-18

전문가다운 이야기를 듣고싶다

어떤 대담 프로에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얼핏 알겠지만,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잘 이해할 수 없다. 뭔가 번지르르한 단어와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이야기하는 통에 말하는 바를 평범한 사람이 주워 담기엔 역부족이다. 더 웃기는 것은 대담하는 장소에서 대담은 하지 않고 자기가 준비해 온 것만 줄곧 읽고 있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마치 한 개인에 불과한 자신의 취향을 타인에게 강요하고 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처럼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들은 그렇게 한다’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대안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요즘 방송에 전문가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유관 학과 교수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소위 ‘전문가’라고 치고 섭외를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도저히 전문가 같지 않은 분이 나와서 자기 주관대로 말하는 사람이 보인다. 그런 사람을 전문가라 부르기는 무리가 따른다. 마치 뚱뚱한 사람이 다 미식가가 아닌데 그런 사람만 끌어모아 맛 탐방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본다.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능통함은 물론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을 갖춘 사람을 일컫는 단어가 아닌가? 사실 종편을 보면 심하게 꽉 막힌 사람들이 전문가입네 하고 나와서 온갖 말을 다 쏟아내고 있다. 사실 검증이나 제대로 거친 이야기인지는 의심스럽지만 상관없다. 그냥 특정인의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다. 사실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마련이다.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을 가늠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그래서 더 많고 정확한 정보에 기초해서 더 정확한 판단과 예측이 가능한 전문가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견해를 검증받고자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면 황당할 수밖에 없다. 요즘 ‘농업’이란 교과 과목을 학교에서 가르치는지 모르겠다만, 옛날 농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작물들의 파종 시기를 한 시간 내내 강의하시다가 마지막 한마디로 종료한다. ‘책대로 하지 말고 집에 할아버지가 씨뿌리라면 그때가 씨뿌리는 시기’라고. 연습생 시절을 거치지 않고 목청만 좋다고 다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많이 먹어보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음식 전문가가 될 수가 없다. 선수 시절이 없는 감독은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진리다. 그냥 책만 보고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사람은 적어도 정보 수집과 분석함에 있어서의 편견 없이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가치중립적으로 이해한 후 그 경험적 정보를 바탕으로 일반화하기에 사람들의 이해도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마치 귀신에게 홀려 설득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문가가 드물다. 그러니 몸에 와닿지 않아 실망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선택은 내 몫이 되고 만다. 이걸 흔히 전문 용어로 ‘제자리 곰뱅이’라고 하던가? /노병철 수필가

2025-12-11

덜 떨어진 금성인

‘깻잎논쟁’이란 말이 있다. 남의 부인이 깻잎을 먹는데 잘 안 떨어지는 것을 본 남자가 깻잎을 떼주다가 자기 부인에게 된통 혼이 났다는 이야기다. 이게 방송을 타자마자 패널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된다. 별것 아닌 이야기가 이렇게 논쟁이 된다는 자체가 놀라웠다. 깻잎이 안 떨어져 곤란을 겪고 있으면 좀 도와주는 것이 뭐 어떤가 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많이 당황하게 된다. 사실 주위에 물어보니 이와 유사한 사례가 많이 벌어졌고, 남자들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당한 적이 많다는 것이다. 생선 가시를 발라주다가도 낭패 보고 술자리에서 한 잔 따라주다가도 잔소리 들은 적이 많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는 부부가 함께하는 모임을 자제하게 된다. 내 물건에 누가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소유욕 혹은 독점욕이 너무 과한 것은 아닐까 싶어 조심스레 물어보았지만, 자신의 프라이버시와 나름 고상한 체면 때문인지 대답을 잘하지를 않는다. 단지 그러한 행동을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에둘러서 말한다. 그냥 애착과 소유욕으로 인해 그런 친절한 서비스는 나만 받을 자격이 있고 나 이외에 그 어떤 여자가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을 보는 순간 눈에 불이 튄다는 말은 애써 자제한다. 요즘 유행하는 ‘천박한’ 언어이기에 사용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대놓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라고 물었다간 일이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그냥 늘 하던 식으로 내가 또 뭘 잘못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접는다. 남자 인생이 뭐 별거가 있나. 이런 것을 서로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는 화성인 금성인으로 구분한다든지,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해서 왜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요즘 유행하는 MBTI에 가져다 붙여,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성격상 차이를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한동안 논란에 휩싸인 라캉의 한 책에서 그 정답을 찾곤 했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언어 체계로 수렴되지 않고, 부부가 ‘서로 통하는 사랑’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에 격하게 공감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상황이 한국 남자만 겪는 일이 아닌 것 같다. 모임에서 여행을 갔다가 여자분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한다. 별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 정도의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이성적 판단으로 몇 가지 포즈를 더 요청하면서까지 성의를 베풀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벌어졌다. 집사람이 말을 안 한다. 분명 내가 또 무슨 잘못을 한 것이 분명하다. 깻잎을 떼어준 적도 없고 생선 살을 발라준 적도 없기에 집에 올 때까지 안절부절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서 남은 여행 일정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없다. 사진 찍어준 것도 죄가 되나? 나이가 들어도 이런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한참이나 이어질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마음 때문에 누구라도 붙잡고 이 억울한 마음을 하소연하고 싶다. “AI, 너는 아느냐? 저 여자가 왜 저렇게 삐졌는지를?” /노병철 수필가

2025-12-04

사람 사귀기가 쉽나

사진을 배울 때다. 선생님이 질문했다.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첫 번째 비법은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주위를 둘러본다. “빛에 따라 조리개를 잘 조절해야 한다.” “조금의 흔들림도 주의해야 한다.” 등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답을 질러본다. 선생님은 웃으며 “렌즈를 먼저 닦는다.”라는 답을 한다. 그 순간 수강생들의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뭔가 잔뜩 기대했지만, 가장 기본적인 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사진 찍을 때마다 렌즈부터 닦는 습관이 들었다. 그 어떤 스킬도 그다음이었다. 오래 건강하게 살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병원 자주 가서 건강 체크를 하는 것도 중요하고 고급 영양제 달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말동무가 있는 것이란다. 시시껄렁한 야담을 늘어놓아도 전혀 거리낌 없는 친구가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 지수는 높아져 가고 이에 편성해 장수 인자가 몸에 자리 잡게 된다는 이론이다. 아주 손쉽고 간단한 방법이 정답으로 다가올 때 살짝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친구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주위에 아는 사람이 하나둘 나의 곁을 떠날 땐 분명 자신에게 큰 문제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데 늘 상대방 탓을 한다. 우린 보인다. 그들이 왜 떠나는지를. 사실 이 사람의 인간성을 볼 땐 우리도 별로 다가서고 싶지는 않지만, 모임 속 일원이라 이야기 정도는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는 모른다. 자기는 착한데 떠나가는 남들은 전부 나쁜 인간들로 치부해 버린다. 나를 찾는 이가 없으면 남에게 베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이든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친구를 만드는 데도 노력과 희생도 필요하며 절대 이기적으로 굴어서는 친구를 만들 수 없고 나 좋을 때만 연락해도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허구한 날 얻어먹는 인간에겐 사주기가 싫다. 모임 회비는 늘 늦게 내면서 챙기는 것은 일등으로 챙기려 들고 남 찬조 안 한다고 뒷말하고 다니면 좋아할 사람 없다. 이기적인 티가 팍팍 나는데 남들은 모른 줄 안다. 염치를 모르고 사는 전형적인 인간형이다. 혼자서만 똑똑하다. 세상 아는 척은 혼자 한다. “저 인간은 주는 것 없이 미워.” 이 말은 절대 본인은 들을 수 없다. 마치 자신의 입에서 나는 심한 구취를 본인만 모르고 주변 사람들은 다 알듯이 죽을 때까지 안 보고 살 자신이 있지 않은 한, 대놓고 말하기는 많이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난 천성이 혼자 있는 것이 좋아.” 이런 말을 하면서 혼자서 여행가고, 홀로 영화 보면서 고상 떠는 한 지인이 있었다. 그도 생일날 혼자 밥 먹으니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나더란다. 사람이 살면서 주는 것 없이 미운 인간형으로 낙인찍혀 사는 것만큼 창피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내 가족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다.” 가족이 제일 먼저 안다. 내 가족 간에 대화 없이 산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쓸데없는 유튜브만 쳐다보지 말고 가족과 지인에게 전화 돌릴 때다. “지금 뭐해? 같이 밥이나 먹을까?” /노병철 수필가

2025-11-20

내 생각이 너무 고루한가?

세종대왕께서 날 밤을 새우면서까지 만든 한글을 기념하는 ‘한글날’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도 언론에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거의 외국어이다. 외래어면 말도 안 한다. 자기가 좀 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말도 아닌 듯하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을 보면 생활 속에 아주 익숙해진 말투다. 하지만 방송은 조금 정화되었으면 싶은데 듣는 사람 기분을 거슬리게 만든다. “관객”을 계속 “갤러리”라 말하는데도 사회자는 그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이게 요즘 말하는 세련되고 글로벌한 어투인가? “찌개다시 많이 나오는 식당가자.” “찌개다시? 스끼다시가 아니고?” “너무 유식한 척하지 말고 대충 알아들어라.” 복잡한 것을 유난히 싫어하는 우리는 따지고 드는 사람을 기피하고 대충 뜻만 통하면 넘어가는 이상한 문화가 자리 잡았다. 나름 남들에게 유식하게 보이고는 싶고, 그래서 한마디 한 것이 지적질로 돌아오면 기분은 나쁠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알고 말하는 것과 머리를 거치지 않고 대충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품격에 차이는 난다고 보면 된다. 일본에 가서 “찌개다시”라고하면 알까? “스끼다시”도 모른다. 마치 중국에 가서 짜장면 찾기다. 그리고 “츠키다시”라고 하는 일본 말은 메인 음식에 곁들인 아주 소량의 기본 음식이다. 이런 오토시나 츠키다시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30개의 반찬을 깔아버리는 한식과 경쟁하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손님 접대는 푸짐해야 하고 음식은 남아야 대접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듣는 문화라 제비 눈물처럼 찔끔 나오는 전채요리로는 경쟁이 안 됐다. 살아남기 위해선 당연히 변화해야 했고, 그 결과 마치 코스요리처럼 푸짐하게 한 상을 받는 느낌이 들게 만든 것이다. 이제 일식집에 스끼다시가 시원찮으면 사람들이 가지 않는다. 당연히 나와야 할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시미 요리와 함께 튀김이나 해산물이 한상 가득 깔려야 한다. 우동이나 김말이(마키), 초밥 같은 것도 곁들여서 말이다. “오늘 추천 요리는 뭔가요?” 손님이 요리를 주방장, 아니 요즘말로 “셰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방식을 ‘오마카세’라고 한다. 이런 용어가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용어 자체가 많이 거북하게 다가온다. 젊은 친구들은 이런 일식 문화에 자주 접하는지 내가 잘 모르는가 싶어 열심히 설명한다. 내가 돈 내는 자리가 아니라 그냥 들으면서 한 번씩 고개만 끄덕여 준다. 들으면서 내가 꼭 이걸 알아야 하나 싶다. 일식집만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식당의 다반상(多飯床) 문화도 변해 전통 반상은 어디 허름한 한식집이나 공사장 함바집 수준으로 전락했고 요즘 잘나가는 한식집은 36반찬을 깐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젊은이들이 낭비라면서 우리네 한식 문화를 보여주기 식의 낙후된 식문화로 깎아버린다. 정말 그럴까? 36반찬을 혼자 먹을 순 없다. 다함께 밥 먹는 문화에 익숙한 우리네 자랑스러운 우리 밥상 문화임을 알았으면 싶다. 미소 된장국에 감탄하지 말고, 구수한 한국 된장의 참맛을 느끼면서 우리네 식문화에 좀 더 관심 가지는 젊은이를 보고 싶다. /노병철 수필가

2025-11-13

정말 모르고 있나

요즘 우리 나이 때 사람들의 카톡 프로필을 보면 전부 손주 사진으로 도배를 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니 보고 또 보는 것을 넘어 돈 만 원을 주고서라도 손주 자랑을 하고 싶은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우리가 손주만을 바라보면서 그저 “귀엽다”라는 마음으로 한정되어 있고 젊은 부모들의 육아 전쟁은 실로 엄청나게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현실은 갑갑하다. 그래서 함부로 결혼하라느니, 애를 낳으라는 말을 못 한다. 언제까지 이런 현상을 두고만 볼 것인지 엉뚱한 정쟁만 늘어놓는 정치권만 맥 놓고 바라만 본다. ‘위대한 고전’이란 말이 있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인용되어 실제로는 읽지 않았음에도 마치 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거나, 정말 읽은 것으로 착각하는 책을 일컫는 말이다. 대표적인 책이 맬서스의 ‘인구론’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책들이다. 그래서 이런 책을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누구나 그 내용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읽은 이는 거의 없는 위대한 고전”이라고 평하는 것이다. 맬서스의 인구론에 나오는 단 하나의 문장은 정말 또렷이 기억한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식량이 부족해지면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서로 죽이거나, 병들어 죽게 된다는 이론이다. 즉 다시 정리해서 말하면 맬서스의 인구문제 제기는 식량이 부족하기 전에 인구 조절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그 해결이 불가능하므로 정치적 해결방안조차 필요 없고 구호의 손길조차 끊어 하층민들이 죽거나 살거나 그냥 내버려 두라는 이론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 많이 낳는 게 효(孝)라는 농경 사회 인식이 팽배했고,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자, 그동안 미뤄졌던 결혼과 출산이 한꺼번에 일어나 연간 약 80만~100만 명이 태어난다. 소위 말하는 ‘ 베이비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58년 개띠가 약 90만 명 태어나기도 했다.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깜짝 놀란 정부는 맬서스의 인구론을 인용하면서 인구 억제 정책을 부랴부랴 내놓기 시작한다. 인구론을 교과서에까지 언급하면서 인구를 줄이고자 많은 정책을 쏟아 놓았다. 당시 정부는 인구폭증을 막기 위한 ‘가족 계획’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적게 낳아 훌륭히 기르자”, “둘도 많다”라는 포스터 구호를 우린 기억한다. 적극적인 피임 교육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갖다 부었다. 인구 증가로 인해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이 정책 입안자 머리에 팽배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지금은 인구 절벽이니 하면서 외국에선 한국이란 나라가 곧 없어질 것이라 예언할 정도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맬서스의 이론처럼 식량이 부족해서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서로 죽이거나, 병들어 죽게 되어 인구가 줄어든 것도 아니다. 뒤늦게 부랴부랴 저출산 억제 및 출산 장려 정책을 펴고 있지만 막대한 세금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아직도 아기 울음소리는 자꾸 사라지고 노인네 기침 소리만 들린다. 정부는 우리 젊은이들이 애를 낳지 않는 이유를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노병철 수필가

2025-10-30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

나의 이상한 증세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뭘 버리지를 못한다. 부모님에게 받은 유전적 요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집구석마다 쟁여놓은 물건이 산더미라 늘 아내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언젠가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물건은 몇 년이 지나도 사용하지 않고 구석에 늘 처박혀 있다. 독하게 마음먹고 버리려고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가도 다시 끄집어내기를 반복한다. 이건 분명 ‘병’이다. 의학 쪽에서 말하는 강박장애가 아닌가 싶다. 강박장애는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을 멈추지 못하고 반복하는 정신질환이다. 입에 늘 청결제를 가지고 헹구면서 손을 자주 씻는 것과 냄새가 날까 싶어 옷을 자주 빨아 입는 것을 결벽증이라고 몰아붙이는 친구들에게 제발 담배 좀 끊고 냄새나는 옷 좀 입고 다니지 말라고 되려 역정을 내고 있지만, 이 또한 오염 강박증의 한 증세일지도 모르겠다. 집사람은 뭔가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확인 강박증이 있다. 냄비를 태워 먹고 약속을 몇 번 ‘빵구’를 내더니 늘 확인한다. 하지만 병이 워낙 독한지라 늘 사고는 친다. 부모님 제사까지 잊어버린다. “난 저런 인간들과 같이하기가 너무 싫다.”라며 혼자 고고한 척하는 완벽주의자 친구가 있다. 정말 반듯한 생활을 하는 친구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례를 들춰 봐도 그 친구의 논리가 맞다. 그렇게 살아야만 제대로 산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가 참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끔은 정떨어질 때가 있고 재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런 친구도 강박 증세가 있다고 본다. 완벽주의자로 포장된 인간의 대부분이 강박적 성격이 있거나 강박장애가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학적 견해도 있으니 말이다. 땅이 무너질까 두렵다는 생각,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두렵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분명 환자다. 남의 호의나 선의를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는 사람 또한 환자이다. 늘 불평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험담하는 것을 자기 주장의 정당화로 억지 강변하는 사람도 분명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다. 이것을 먹으면 뭐가 나빠지고 저것을 복용하면 이것이 좋지 않다는 식의 건강 염려증이 있는 사람도 정상은 아니다. 병원을 수십 군데 돌아다니는 사람이 “병은 소문내야 한다.”라는 이상 한 논리로 말할 때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넘어 너무 오래 살아 자식에게 짐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된다. “그 나라는 지금 전쟁 중인데 잘못 가다간 큰일 난다.” 이 정도 수준이면 그래도 이유가 확실하니 들어 줄 만은 하다. 하지만, 해외여행 가자는데 그 나라는 잘못하면 강도가 많아 물건 빼앗기고 살해당한다고 가지 싫어하고 어떤 나라는 납치된다고 싫어하고 또 어떤 나라는 물이 좋지 않아 안 간다고 할 땐 말문이 막힌다. 혼자서 해외여행을 반대하는 친구가 이번엔 같이 가는 동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여행을 반대한다. 같이 어울리기 정말 힘든 사람을 가만히 보면 전부 강박 환자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만 눈에 보이는 나도 강박 환자임이 분명하다. /노병철 수필가

2025-10-23

큐피드의 화살

나이가 마흔이 다 되어가는데 시집을 안 가고 개기는 딸 때문에 가끔 짜증이 나서 한 번씩 쏘아붙인다. 어릴 땐 찍소리도 못하던 놈이 좀 컸다고 이젠 말대꾸를 자주 한다. 말로선 못 이겨 눈만 흘기고는 머리를 돌리고 만다. 첫째는 안 그런데 둘째 놈은 제 아비 속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어느 강사가 부모와 자식 세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금촉 화살과 은촉 화살 이야기를 빗대어 설명한다. 은촉이 아니라 납촉인데,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서 찾아봤더니 납촉이 맞았다. 하지만 납촉보다는 은촉이 더 이해도를 쉽게 만드는 요인이 있고 납이든 은이든 소재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에 문학적 표현에서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납인데 왜 은이라고 했느냐며 따지는 인간이 있다면 그 인간은 여지없는 꼰대 기질을 가졌다고 보면 되겠다. 에로스라고 하면 다른 생각을 하지만 큐피드라고 하면 ‘화살’을 바로 생각할 것이다. 큐피드의 그리스 말이 에로스다. 동양 신화는 마치 무당 굿하는 이야기처럼 여기고 서양 전설을 이렇게 이름까지 헷갈리면서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암튼 큐피드 화살은 단 하나였다. 이 화살에 맞으면 사랑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어 사랑이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면서 화살이 사랑의 아이콘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왔다. 이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의 귀재들인 작가가 나타나 재미있게 만들어 버린다. 그가 바로 유명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이다. 그가 쓴 ‘변신 이야기’에서 큐피드가 두 종류의 화살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금촉으로 사람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다른 하나는 납촉으로 사랑에 대해 거부감을 일으키게 만들어 버린다. 정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탄생한 이야기가 아폴론에게 금촉을, 다프네에게는 납촉을 쏘아 아폴론은 다프네에게 미치도록 빠지지만, 다프네는 오히려 도망치게 되고, 결국 다프네는 월계수(로렐)로 변해 아폴론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게 만든 명작품이 나온 것이다. 빛나는 금을 ‘불타는 욕망·신성한 매력’의 이미지를 주고 납은 무겁고 둔탁한 성질로 인해 ‘냉각· 무관심· 거부’의 효과를 줌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했다. 그 후 화살의 종류는 계속 늘어나 납이 아니라 은(銀)이 등장하고 철(鐵)까지 나오게 된다. 작가들이 이 재미있는 사랑의 작동 방식을 그냥 두지 않았고, 고대·르네상스 이후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이 강사는 이것을 부모와 말 안 듣는 자식 간의 관계를 금촉과 은촉이라는 화살 이야기를 가져와 설명한 것이다. 당연히 강의를 듣는 이들은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고 강의의 목적을 제대로 전달한 것이 된다. 부모는 자녀의 연애·욕망을 제어하거나 반대하는 역할로 은촉의 화살을 맞은 것이고 자식들은 금촉 화살을 맞아 ‘불타는 청춘의 사랑’ 운운하며 무모하게 자신을 불태우려 한다. 아마도 둘째 놈은 금촉 화살을 잘못 맞은 게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지지리 말을 안 듣는 걸 보면. 근데 멍청한 큐피드가 나에게도 금촉을 쏜 거 아냐? 왜 자꾸 미운 자식에게 미련을 두는 거지? /노병철 수필가

2025-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