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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트로트

요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트로트를 빼놓기는 어렵다. 한때는 부모 세대의 음악, 혹은 회식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배경음 정도로 여겨졌던 트로트가 이제는 방송의 중심에 서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탄생하고, 공연장은 팬들로 가득 찬다. 계속되는 이 현상은 단순한 복고 열풍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함께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트로트에는 유난히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한과 흥,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버텨낸 시간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으며, 빠른 산업화와 치열한 경쟁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정서는 여전히 깊은 공감과 위로로 이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Distinction :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1979)’에서 사람의 취향은 개인의 순수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는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생활의 감각이 축적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흐름이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미국 코첼라 같은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트로트 기반의 무대가 시도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K-팝 중심으로 소비되던 한국 음악이 점차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오래된 과거의 이미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트로트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의 단순한 구성에서 벗어나 발라드와 록, 댄스와 EDM 같은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다. 무대 연출 역시 훨씬 세련되고, 공연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이제 트로트는 단순히 ‘옛 음악’이 아니라 현재의 대중음악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장르가 되었다. 이 변화는 지역 문화 현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역 축제나 기념행사 무대를 보면 트로트 가수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연장을 찾는 중장년층의 열기는 상당하다. 팬덤 문화 역시 활발해졌고, 이는 침체된 지역 공연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다. 다만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고민도 생긴다. 어느 순간 지역 행사 무대가 지나치게 하나의 장르에 집중되기 시작하면 클래식이나 재즈, 국악, 실험적인 공연 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익숙한 장르만 찾게 되고, 새로운 음악을 접할 기회는 줄어든다. “지역 행사에 가면 결국 트로트겠지”라는 예상이 굳어질수록 문화의 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문제는 트로트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트로트는 세대를 연결하고, 지역 공연장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중요한 문화적 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트로트의 인기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장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문화는 익숙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낯선 음악과 새로운 경험 속에서 더 풍요로워진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5-17

스페이스워크

포항 북구 환호공원 언덕 위에 세워진 스페이스워크는 이제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2021년 포스코 기부 이후 2026년 1월 기준 누적 방문객 371만 명을 넘어섰고, 400만 명 돌파를 앞두고 있다. 주말마다 인근 도로가 관광객 차량으로 가득 차 혼잡할 만큼 이곳은 이미 강력한 핫 플레이스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은 한 상인의 말은 이 활기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사람은 많은데, 손님은 아닙니다. 올라갔다가 그냥 내려와서 가버려요.” 이 짧은 문장은 지금 포항 관광의 구조적 한계를 정확히 드러낸다. 스페이스워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시간을 붙잡아 두는 데까지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강력한 목적지는 만들어졌지만, 그 이후의 흐름은 비어 있다. 사람들은 올라가서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은 뒤, 더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도시를 떠난다. 결국 포항은 경험되는 도시가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장소로 남는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왜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한 설득이다. 언덕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음악, 해 질 무렵 시작되는 미디어아트, 매일 반복되지만 지루하지 않은 짧은 공연 같은 요소들은 공간의 체류 시간을 바꾸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일상처럼 이어지는 콘텐츠가 쌓일 때, 이곳은 단순한 방문지가 아니라 다시 찾는 공간으로 바뀐다. 관광의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보고 끝나는 여행보다 기억을 가져가는 경험을 원한다. 스페이스워크의 형태와 이야기를 담은 디자인 상품, 포항을 상징하는 감각적인 굿즈, 지역 작가의 시선이 담긴 작품들은 단순한 기념품을 넘어 도시의 이미지를 확장시키는 매개가 된다. 이런 경험이 축적될수록 포항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더 오래 남는 도시가 된다. 현재 운영 중인 포항관광 시티투어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주요 관광지를 연결하는 기능을 넘어, 스페이스워크를 체류의 시작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곳에서의 체험이 공연과 전시, 야간 프로그램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면 관광객의 동선은 단순한 방문에서 머무는 경험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동 중심의 투어가 아니라 경험 중심의 흐름으로 전환되는 순간, 하나의 점은 도시 전체를 잇는 선이 된다. 결국 핵심은 흐름이다. 스페이스워크에서 시작된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길 위에 머물 수 있는 공간과 경험이 연결될 때 사람은 떠나지 않는다. 지금처럼 올라갔다 내려오는 구조에서는 체류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관광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미 스페이스워크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충분히 증명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힘을 시간으로 바꾸는 일이다.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비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 경험은 기억으로 남는다. 371만 명이라는 숫자를 기록으로 남길 것인지, 도시 전체를 경험하는 흐름으로 확장할 것인지. 그 선택이 포항 관광의 다음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5-10

오래된 기억에 숨 불어넣기

빈 상가가 늘고 발길이 줄어든 포항 원도심을 보면 우리는 습관처럼 ‘쇠퇴’라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나는 그 표현이 이 공간을 너무 쉽게 규정한다고 느낀다. 원도심은 사라진 곳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곳에 가깝다. 이곳은 단순한 상업 지구가 아니다. 항구에서 시작된 삶이 있고, 산업화의 시간 속에서 쌓인 노동의 흔적이 있으며, 시장 골목마다 사람들의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지금도 이곳에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지금의 감각으로 읽어내는 데 서툴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읽어낼 것인가”로. 이미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도시들이 있다. 일본의 일부 원도심은 한때 공동화를 겪었지만, 서브컬처(Subculture·단순한 취향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주류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발전하는 하위 문화)라는 흐름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과거를 지우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취향과 작은 공간들을 쌓아 올렸다. 도쿄의 미야시타 파크 역시 그런 방식으로 변화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위해 찾아왔다. 그렇게 일상과 비일상이 섞이며 새로운 도시의 리듬이 만들어졌다. 이런 변화의 기류는 포항에서도 조금씩 감지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이 원도심을 이야기하고 다양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 빈 상가 활용, 청년 창업, 문화예술 기반 재생 등 방향도 다양하다. 원도심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라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된 듯하다.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 ‘개발’에서 ‘삶’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한 가지가 걸린다. 이 공약들이 과연 이 공간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원도심 재생은 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다. 이곳에 쌓인 시간과 기억을 지금의 방식으로 다시 쓰는 일이다. 포항의 원도심은 부족해서 멈춘 것이 아니다. 아직 쓰이지 않은 가능성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오래된 여관이 작업실이 되고, 빈 상가가 공연장이나 전시 공간으로 바뀌는 순간, 사람들은 다시 그곳으로 모여든다. 공간은 지어질 때가 아니라, 사용될 때 살아난다. 이 변화는 결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자체는 제도와 기반을 만들고, 건물주는 공간을 길게 바라봐야 하며, 문화 기획자는 그 안의 이야기를 읽어 사람을 불러들이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 다른 역할이지만, 그것들이 맞물릴 때 비로소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나는 가끔 “시내 우체국 앞에서 보자”라는 말이 자연스럽던 시절을 떠올린다. 그 말은 단순한 약속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이고 머물던 시간의 기억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결국 그런 공간 아닐까. 이유 없이도 가고 싶고,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는 곳. 원도심의 미래는 거창한 개발 계획이 아니라, 다시 사람이 모이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데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4-27

장례

환절기라 그런지 유난히 부고 소식이 잦다. 계절이 바뀌는 틈 사이에서 사람의 삶도 함께 흔들리는 것일까. 며칠 간격으로 들려오는 소식들은 마음을 무겁게 하고, 문득 전화 한 통, 안부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시간 속에서 문득 한 얼굴이 떠오른다. 달포 전,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공연을 함께했던 동생 같은 친구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식사하고 차를 마시며 웃던 그 평범했던 하루가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경주의 작은 장례식장을 다녀오던 길, 그날의 공기와 풍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어 마음 한쪽이 오래도록 먹먹하다.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마다 우리는 비슷한 풍경을 마주한다. 무표정한 영정사진, 줄지어 놓인 삼단 화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건네는 위로의 말들. 너무도 익숙한 장면인데, 이상하게도 늘 낯설게 느껴진다. 그 자리에 서 있으니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곁에서 울고 있는 가족들에게 “곧 죽을 내가 더 슬프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농담처럼 들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야말로 죽음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늘 남겨진 사람의 슬픔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떠나는 사람의 두려움과 아쉬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상상하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라면, 그 마음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날 이후 나는 슬픔이라는 것이 단지 남은 사람의 감정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요즘 장례식장 현황판을 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든다. 대부분이 90세 전후, 때로는 백 세에 가까운 나이들이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긴 시간을 살아낸 죽음 앞에서는 ‘병마에 오래 고생하셨는데 잘 돌아가셨어’라는 말이 조심스럽게 붙는다. 그 말 속에는 오랜 돌봄의 시간과 기다림, 그리고 어쩌면 끝내야 할 시간에 대한 안도 같은 것이 함께 섞여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은 슬픔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어딘가 허탈하고, 또 한편으로는 고요하게 비워진 분위기가 흐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장례문화는 여전히 무겁게만 느껴진다. 슬픔을 크게 드러내야 제대로 애도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영정사진은 왜인지 늘 굳어 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떠나는 사람은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할까. 만약 나에게 그날이 온다면, 나는 조금 다르게 남고 싶다. 가장 즐거웠을 때의 사진 하나, 내가 좋아하던 음악 몇 곡, 그리고 화환 대신 작은 마음들이 모이는 자리. 그곳이 단지 울음만 남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했던 시간을 자연스럽게 꺼내보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나를 떠올리고, 누군가는 함께 웃었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다시 한번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장례가 단지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다시 꺼내보는 자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요즘처럼 부고가 잦아지는 계절이 되면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결국, 사람이 남기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함께 쌓아온 시간이라는 사실을.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4-19

콜 포비아

딸아이와의 사소한 말다툼은 아주 평범한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어른들께는 톡 말고 전화로 해야지.” 무심코 꺼낸 말이었는데, 딸은 곧바로 되물었다. “왜 꼭 전화여야 해?” 그 짧은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서로의 말이 엇갈리면서 대화는 금세 기 싸움처럼 변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 듣는 말을 알게 됐다. ‘콜 포비아(call phobia)’. 전화를 걸거나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그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전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약속을 잡을 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할 때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전화였다. 목소리의 떨림, 잠깐의 침묵, 말끝의 뉘앙스까지도 다 의미 있는 소통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딸에게 전화는 오히려 부담이라고 했다. 예고 없이 울리는 벨소리가 사적인 공간을 깨뜨리는 느낌이고, 바로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싫다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딸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 안에도 나름의 질서와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짧은 문장 하나, 이모티콘 하나에도 아이의 기분이 묻어 있었다. 답장이 늦어도 예전처럼 서운해하기보다 지금은 바쁜가 보다 하고 기다리는 법도 배우게 됐다. 전화처럼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호흡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딸이 말한 콜 포비아는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감정,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식이었다. 전화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감정을 바로 마주해야 하지만, 메시지는 한 번 더 생각하고, 다듬고, 때로는 미룰 수도 있다. 그 차이가 아이에게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전히 전화의 가치를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처럼 마음의 무게가 실린 순간에는, 여전히 목소리가 더 깊이 닿는다고 믿는다. 실제로 얼마 전, 딸에게 짧은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별다른 말은 아니었지만, “괜찮냐”는 한마디에 아이가 잠시 말을 고르던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문자로는 느낄 수 없는 온기가 전해졌다. 그래서 요즘 나는 예전처럼 방식을 고집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상황에 따라,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따라 방식을 건너간다. 아이가 편안해하는 메시지로 시작해, 필요할 때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건다. 예전 같으면 설득하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함께 맞춰 가려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화 또는 메시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가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전화가 더 익숙한 사람이고, 딸은 메시지가 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조금씩 건너가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방식은 다르더라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날의 작은 말다툼 덕분에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관계는 옳고 그름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어른이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걸음 건너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4-12

미술관은 왜 늘 낮에만 열려 있는가

대부분의 미술관은 오전 10시에서 오후 6~7시 사이에 운영된다. 이 시간표는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일반적인 형태로, 행정 효율과 시설 관리 측면에서 편리한 구조라 하여 지금까지 운영되어 오고 있다. 특히 공공 미술관은 공무원 근무 체계와 연동되어 있어 보안·안전·시설 인력이 동일한 틀 안에서 움직인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운영 시간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도시의 생활 리듬은 과거와 분명히 달라졌다. 직장인, 자영업자, 맞벌이 가정 등에게 평일 낮 시간은 가장 바쁜 시간대다. 미술관은 열려 있지만 실제로 방문하기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수도권에 비해 예술·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은 지방 도시에서는 그 간극이 더욱 크게 체감된다. 한정된 전시와 프로그램마저 낮 시간에 집중된다면, 문화를 즐기는 기회는 특정 시간대에 자유로운 일부 시민에게만 돌아간다. 이 문제는 전면적인 구조 개편이 아니라 점진적 보완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 1회나 월 2회 평일 야간 개관을 시범 운영하면 기존 체계와 충돌 없이 실현 가능하다. 특정 요일은 오후 9~10시까지 개관하고, 전시 연계 프로그램을 저녁에 배치해 ‘퇴근 후 미술관’이라는 새 선택지를 마련할 수 있다. 국내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수요일과 토요일 야간 개장을 하고 있고, 해외 사례에서도 이러한 유연한 운영은 긍정적인 효과를 보여주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금요일,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과 파리의 퐁피두센터(매일 오전 11시에서 저녁 9시)는 저녁 시간 운영을 통해 관람 문화를 일상의 영역으로 확장 시켰다. 중요한 점은 단순히 관람 시간을 늘린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저녁 동선 속에 미술관을 자연스럽게 포함시켰다는데 있다. 지방 도시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문화 정책이 아니라 지역 경제와 연결될 수 있다. 저녁 시간대 관람객이 늘어나면 전시 관람 이후 식사, 카페 이용, 서점 방문 등으로 동선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체류형 소비로 확장될 수 있으며,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특히 술 중심의 야간 소비 구조와 달리,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 저녁 움직임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세대 혼합이 가능한 문화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의미도 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 의견을 구조적으로 수렴하는 일이다. 생활 패턴별 수요 설문조사와 시범 운영을 병행한다면 행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미술관의 운영 시간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문화를 설계하는가에 대한 선택이다. 특히 문화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방에서, 저녁 시간의 미술관은 시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낮 중심의 전통을 유지하되, 도시의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까지 함께 숨 쉬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지역 문화의 저변을 넓히고, 도시의 활력을 되살리는 하나의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29

쇼츠(Shorts)

점심 후 차 한잔을 위해 커피숍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모두는 고개 숙여 손안의 작은 화면에 빠져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도,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휴대전화 화면으로 향한다. 손가락 하나로 화면을 위로 밀어 올리면 다음 영상이 나타난다. 길어야 2~3분 남짓한 짧은 영상들, 이른바 ‘쇼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켜는 순간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 준비를 하며 잠깐 본 영상이 이어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에도 또 하나의 영상이 재생된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이 영상 하나만 더 보고 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다음 영상을 이어 붙인다. 그렇게 10분 또 30분이 되고 어느 순간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우리는 분명 많은 것을 본 것 같지만, 막상 무엇을 보았는지 떠올리려 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어느 때보다 바쁘고 쫓기듯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강한 인상도 받지만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쇼츠는 즉각적인 재미와 반응을 제공하지만, 그 경험은 쉽게 내면에 남지 않는다. 화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자극은 계속되지만, 생각이 머물 여유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웃고 놀라고 반응하지만, 영상이 끝나고 나면 묘한 공허함이 남는다. 짧은 시간 감정은 소진되었지만, 삶의 의미는 충분히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할 시간 없이 이어지는 정보들은 기억으로 남기보다 금세 사라지는 잔여물이 되기 쉽다. 미국의 기술 철학자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인터넷 환경이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터넷이 정보를 빠르게 찾는 능력은 키워주지만 깊이 읽고 오래 집중하는 능력은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따라 화면을 넘기는 습관 속에서 우리의 뇌는 점점 빠르게 훑어보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한 문장에 오래 머물며 의미를 곱씹는 능력, 복잡한 생각을 차분히 따라가는 능력은 점차 약해진다. 이 빠른 흐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독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서는 쇼츠와 정반대의 속도를 요구한다. 문장은 즉각적인 보상을 주지 않고 의미는 천천히 드러난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멈추고 되돌아가며 타인의 생각 속도를 따라 걷는다. 이 느린 과정속에서 주의력은 다시 우리 것이 되고 기억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결국 인문학적인 삶이란 더 강한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래 남는 의미를 선택하는 태도에 가깝다. 쇼츠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화면을 끄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속도에서 내려와 자신의 삶에 맞는 리듬을 다시 찾는 일이다. 모두가 더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에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산책하며 사색하는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지만 분명한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15

아랫목

인구감소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변화다. 한 가정에 한 아이가 자연스러운 시대, 집 안은 조용해졌고 형제자매 사이에서 부딪치며 배우던 양보와 타협의 기술은 점점 희미해졌다. 세대 간 공감하는 간극은 넓어져, 각자의 논리는 분명해지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 듯 보인다. 내복이 잠옷이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려 본다. 구들장 밑으로 연탄 불길이 지나가고 나면 가장 먼저 따뜻해지는 자리가 있었다. 검게 그을린 바로 아랫목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아랫목으로 모였다. 두툼한 이불을 펴고 온 가족이 둘러앉거나 누워 발을 맞댔다. 서로의 발이 닿는 것과 이불속 더운 공기와 어울린 발 냄새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닿은 그 체온이 하루의 피로를 녹여 주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밖에서 들은 소식, 부모의 걱정과 식구들의 투정이 그 자리에 풀어졌다. 아랫목은 단순히 따뜻한 자리가 아니었다.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함이 모이는 곳, 그래서 마음도 모이던 자리였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이치를 배웠고, 아이의 말을 들으며 어른은 세상의 변화를 체감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좋았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온돌방 아랫목은 늘 가족의 마음을 먼저 데워 주었다. 지금, 우리의 집은 더 넓고 효율적인 구조이다. 하지만 함께 둘러앉을 아랫목은 사라졌다. 꾸며진 거실은 설렁하게 비어 있고, 각자 방의 휴대전화 화면은 또 다른 세상이다. 한 공간 아래 살지만 서로 다른 시간과 취향 속에 머문다. 대화는 짧아지고, 표정 대신 메시지가 오간다. 가족은 함께 있으되, 동시에 각자의 공간은 따로 있다. 편리함과 독립성은 시대의 흐름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아랫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식탁에서, 거실 소파에서, 혹은 동네 작은 모임에서라도 우리는 서로 공감한다면 다시 함께 머무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표정을 읽고, 침묵까지 공유하는 시간 말이다. 관계는 멀리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데워지는 것이다. 인구가 줄어들어도 우리라는 관계까지 함께 줄어들 필요는 없다. 아랫목의 정신은 공간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가장 따뜻한 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주고, 그 자리로 기꺼이 모이는 마음이 곧 공동체의 출발점이다. 비록 오늘의 사회가 각자의 방과 화면 속으로 흩어져 전통적 공동체를 말하기 어려운 구조일지라도, 아랫목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자는 제안이다. 자리를 조금 내어주고, 대화의 속도를 늦추는 작은 배려가 모일 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난다. 형태는 달라져도 좋다. 온라인이든, 작은 모임이든 그 안에 따뜻함을 나누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하다. 인구는 줄어도 우리의 온기만은 줄지 않는 사회, 서로의 발을 다시 맞댈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08

깨추고랑과 학산천

추운 겨울이면 콧물을 훌쩍이며 수갯도(앉은뱅이 스케이트)를 끌고 나섰다. 얼음이 완전히 얼지 않은 날에는 발밑이 불안했지만, 그마저 겨울철 최고 놀이의 일부였다. 여름이면 태풍 뒤 불어난 물살에 중학교 앞 다리 밑으로 돼지가 떠내려가던 장면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세상이 얼마나 거칠고 생생하며 동시에 두려운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학산천’이라 불리는 그곳, 내가 살던 포항시 덕수동에서 조금만 걸으면 닿던 놀이터를 우리는 깨추고랑(깨추·‘붉은 찔레 열매’를 뜻하는 경북 북부 사투리. 왜 깨추고랑이라 불린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 주변에 깨추가 많이 자란 듯)이라 불렀다. 새로이 단장되었다는 그곳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다시 걸었다. 한때 흙과 물과 위험이 뒤섞여 있던 곳은 아스팔트 아래로 사라졌다가, 이제는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전과 다른 깨끗한 모습을 되찾았다. 콘크리트로 정갈해졌고 보행로는 안전해졌다. 도시의 기준으로 보자면 성공적인 정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자 이상하게도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풍경은 남아 있지만 서사는 사라졌고, 장소는 존재하지만 삶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학산천은 보기 좋은 하천이 되었지만, 더 이상 내 삶 속의 장소가 아니었다. 기억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는 굳이 표식을 남길 필요가 없지만, 단절되는 순간 사람들은 기념비와 기록으로 그것을 붙잡으려 한다. 지금의 학산천은 이 아이러니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길은 복원되었지만,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과 감각을 불러내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그 결과 이 하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안전과 깨끗함을 돌보는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의 하천은 단순한 경관 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동네의 성장기였고, 공동의 기억이 축적되던 생활 공간이었다. 깨추고랑이라는 이름 속에는 동네 사람들의 언어가 있었고, 위험과 놀이, 일과 휴식이 뒤섞인 삶의 리듬이 담겨 있었다. 인문 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공간과 장소’라는 저서에서 말했듯, 공간은 인간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비로소 장소가 된다. 이름이 바뀌고 이야기가 지워지는 순간, 그곳은 누구 것도 아닌 중립적인 공간으로 남는다. 나는 학산천을 다시 깨추고랑으로 부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불리던 시절의 감각과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남기자는 것이다. 안내판 하나, 짧은 기록이나 QR코드 하나, 혹은 주민의 목소리를 담은 작은 오디오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아이들이 “여기서 예전에는 뭐 하고 놀았어요?”라고 묻고, 어른들이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컸지”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이 하천은 현재와 과거가 만나는 문화적 장소가 될 것이다. 문화는 새로 만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미 살았던 시간을 존중하고, 사라진 그때의 감성을 다시 불러오는 일에서 문화는 시작된다. 이제 학산천이 동네의 풍경이 아니라, 동네의 이야기로 다시 흐르기를 바란다. 개인의 향수가 아니라, 모두의 기억이 조용히 겹쳐지는 곳으로. 그것이 진짜 복원의 모습이 될 것이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2026-02-23

골목길

1970년 초 나에게 동네 골목길은 지금 축구장의 절반 크기였다. 또래 아이들과의 모든 놀이가 거기에서 이루어진 기억으로 가득하다. 반골 축구, 자치기, 마리, 구슬치기, 연탄 던지기 심지어 야구까지 안되는게 없던 공간이었다. 우리는 학교 운동장보다도 동네 골목길에서 어울린 시간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얼마 전 옛 생각에 동네 골목길을 찾았다. 어른 두 명이 지나가면 꽉 차 보이는 이 좁은 길을···. 그때는 그렇게 작은 몸이었던가. 이제는 보기 힘든 흙투성이 골목길에서 친구, 동생 그리고 형들과 함께 밤늦도록 누비던 그 길에서 나는 우리 동네 어른들과 집마다 키우던 강아지들,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그때의 부모님 모습이 그리워진다. 차 몇 대 다니지 않는 70년대의 2차선 도로는 한참을 걸어야 건너는 대로였다. 그 길 건너 골목길 한쪽 편 우리 집 마당 작은 꽃밭의 한가운데 풍성히 그리고 담벼락에 잔뜩 기울어 뾰족이 담 밖을 내다보는 검붉은 장미와 조금조금 경계 지어진 꽃밭 돌 틈 사이로 소담소담 올라온 노랑 빨강 채송화가 한창일 때의 향기로운 기억의 냄새가 나를 감싸며 옅은 미소를 배어나오게 한다. 길지 않는 좁다란 골목길에서의 추억들이 지금보다도 어려운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으로 남아있다니 행복했던가 보다. 옛 모습과 비슷이 남아있는 큰길 건너 첫 번째 모퉁이 돌아 세 번째 집 그리고 딱딱한 회백색 시멘트 깔려진 그때와 다른 골목길은 아쉬움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 공간에 오롯이 남아있는 골목길은 여전하다. 골목길은 단순한 이동 통로가 아니었다. 그곳은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낮은 단위의 문화 공간이자,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던 생활의 무대였다. 아이들에게 골목은 놀이터이자 교실이었고, 어른들에게는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마을의 사랑방과도 같았다. 계획되거나 설계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관계와 이야기를 품을 수 있었던 공간이 바로 골목길이었다. 골목길 문화의 핵심은 ‘우연한 만남’에 있다. 약속하지 않아도 마주치고, 의도하지 않아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쌓인 관계가 동네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아이들은 그 안에서 규칙을 만들고, 다툼을 해결하며 사회를 배웠다. 경쟁보다 어울림이 먼저였고, 효율보다 관계가 우선이었다. 골목은 삶의 속도를 여유롭게 늦추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도시가 커지고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골목은 점점 사라지거나 기능을 잃었다. 흙길은 시멘트로 덮였고, 놀이는 위험과 소음으로 규정되었다. 골목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실내와 조그마한 화면 속으로 옮겨갔고, 이웃과의 관계는 점점 느슨해졌다. 골목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편리함이었지만, 그만큼의 공백도 함께였다. 이제 다시 골목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향수만은 아니다. 골목은 지역 문화의 가장 기초적인 토대이며,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의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의 골목은 변했을지라도, 기억 속 골목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기억은 한 개인의 추억을 넘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함께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한다. 골목길 문화는 사라진 과거가 아니라, 다시 회복해야 할 삶의 감각이자 특별한 공간이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2026-02-08

이야기에서 삶으로

그동안 지역의 문화정책이나 행사는 잘 말해서 제대로 전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왔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서 할 것인가, 그 이야기를 얼마나 감동적으로 보여야 할 것인가가 기획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가장 중요한 내용은 그 문화가 시민의 삶 속에서 실제로 작용하고 있는가, 문화를 경험한 후 일상생활의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대부분의 경우 문화는 계속 소비되지만,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문화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기에서 시작하여 해보기, 그리고 살아내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우리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스토리두잉(storydoing), 스토리리빙(storyliving)이라는 세 단계로 구분하여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문화가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뿌리내리고 지속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흐름을 표현한 것이다.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문화의 시작점이다. 지역의 역사와 장소의 기억, 사람들의 삶을 서사로 엮어 전달하는 과정이며 공연과 전시, 아카이브와 해설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공감도 형성된다. 그러나 시민은 여전히 관람자에 머물고 있으며 이야기는 전달되고는 있지만, 아직 삶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설명은 반복되고 연출은 점점 정교해지지만, 행사가 끝난 뒤의 일상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쉽게 잊혀지고, 문화는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전환이 스토리두잉(storydoing)이다. 스토리두잉은 이야기를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 해보게 만드는 단계다. 이 과정에서 시민은 관객이 아니라 참여자가 되며 전시를 ‘보는’ 대신 그 과정을 체험하고, 공연을 ‘관람하는’ 대신 공간을 함께 사용한다. 문화는 머리로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기억되는 즐거운 경험이 된다. 시민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하는 대신, 이야기를 해봤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친다면 한계는 분명하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삶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문화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단계는 스토리리빙(storyliving)이다. 스토리리빙은 이야기가 특별한 프로그램이나 연례행사가 아니라, 일상 속 관계와 습관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상태를 의미한다. 시민은 공동의 이야기를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서사를 살아가는 주체가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지역의이야기를 따로 배우기보다 자연스럽게 익히며 성장하고, 문화는 콘텐츠가 아니라 생활 속의 일부가 되어진다. 스토리텔링만 반복되는 문화는 쉽게 소진된다. 스토리두잉이 더해질 때 문화는 참여가 되고, 스토리리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지역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이 된다. 지금 문화정책과 예술기획이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는가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이다. 문화는 말할 때 시작되지만, 해볼 때 깊어지고, 살아낼 때 비로소 지역의 얼굴이 된다. 지금의 지역 문화가 향해야 할 방향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1-25

화려한 무대 뒤에 남겨진 질문

지난해 경주에서 열린 APEC 문화행사는 국가가 세계를 향해 내민 하나의 문화적 얼굴이었다. 완성도 높은 연출과 막대한 예산, 그리고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얻는 유명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장면들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국제 행사의 성격에 걸맞은 스케일과 이미지, ‘알리기 위한 문화’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해냈다. 그러나 그 화려한 무대를 바라보는 지역의 시선은 단순한 감탄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같은 도시, 같은 시간 속에서 지역 예술가들은 여전히 ‘예산 부족’이라는 익숙한 문장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이 떠오른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의 아우라는 작품이 놓인 고유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삶의 맥락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기술이 고도화되고 규모가 확장될수록 예술은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삶의 자리에서 분리될 위험도 커진다. 벤야민이 경고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삶과 분리된 예술은 결국 소비되고 사라지는 이미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APEC 문화행사가 국제적 이미지로서의 아우라를 가졌다면, 지역 문화는 일상의 시간 속에서 천천히 생성되는 또 다른 종류의 아우라를 지닌다. 지역 문화의 힘은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밀도에 있다. 골목과 시장, 항구와 학교, 그리고 그 공간을 오랫동안 지켜온 사람들의 기억과 이야기는 대체 불가능한 문화 자산이다. 이러한 맥락 위에서 축적된 문화는 쉽게 복제할 수 없고, 외부에서 단기간에 이식할 수도 없다. 이를 외부의 화려한 콘텐츠로 덮어버리는 순간, 문화는 삶에서 떨어져 나가고 배경으로 전락한다. 벤야민이 말한 ‘전통의 단절’은 거창한 파괴가 아니라, 바로 이런 무심한 대체에서 시작된다. 오히려 저예산 문화행사가 지닌 가능성은 이 단절을 피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장비와 기술, 홍보가 부족한 대신 기획은 필연적으로 삶에 가까워진다. 지역 예술가와 주민이 주체가 되고, 관객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될 때 문화는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기억으로 남는다. 이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한 ‘행위(praxis)’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아렌트에게 행위란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시간 속에서 지속성을 획득하는 실천이었다. 지역 문화는 바로 이러한 행위가 반복되고 축적되는 장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국가급 축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다. 해마다 반복되는 작고 꾸준한 문화 활동, 눈에 띄지 않더라도 멈추지 않는 실천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만든다. 예산은 줄어들 수 있어도, 시간 속에서 쌓인 신뢰와 연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APEC 문화행사가 국가의 얼굴이었다면, 지역 문화는 지역의 심장이다. 심장은 크지 않아도 된다. 다만 멈추지 않고 뛰어야 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진짜 아우라는 언제나 삶의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지역 문화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생성되고 있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 또 같이 대표

202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