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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험의 밀도가 도시공간을 살린다

공실의 시대, 사람들은 왜 더 이상 오지 않는가? 공실률 70%, 구도심의 쇠퇴, 죽어가는 상권. 이제는 너무 익숙한 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인구감소와 경기침체로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의 공실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공간이 21세기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의 도시는 기능에 따라 고정되고 분리되었다. 상가는 소비를 위한 곳, 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 사무실은 일하는 곳, 학교는 배우는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기능을 따라 이동했고, 공간은 그 목적에 맞게 작동했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일하고 쉬고 만나고 소비하는 행위는 한 공간 안에서 겹쳐지고,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도 끊임없이 중첩된다. 많은 상업공간은 이런 변화에 아직도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공실이 늘어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소비가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바깥 세상의 리듬이 초연결과 초개인화로 바뀌는 동안에도, 많은 상업공간은 여전히 진열과 판매 중심의 오래된 문법에 머물러 있다. 결국 사람들은 더 편리하고 더 빠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한 기능들을 먼저 온라인으로 옮긴다. 극장은 OTT에 밀리고, 활자 신문은 인터넷 기사로 대체되며, 단순 판매 중심의 상점은 플랫폼 커머스에 흡수된다. 많은 공간이 이제 사람들에게 굳이 찾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 지점을 읽어내는 기준이 경험의 밀도다. 경험의 밀도란 단순히 사람이 많이 오는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서만 가능한 감각, 관계, 기억, 머무름, 우연성이 얼마나 두텁게 형성되는가를 뜻한다. 좋은 시장과 식당, 광장과 복합공간은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와 현장의 분위기, 장소의 기억을 함께 만든다. 사람은 상품만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머물고 어떤 장면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도 그곳을 찾는다. 결국 공간의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미술관의 변화는 중요한 힌트를 준다. 과거의 미술관이 완성된 작품을 조용히 바라보는 공간이었다면, 오늘의 미술관은 작품이 저장되고 보존되고 운반되는 과정까지 감상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수장고형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는 현대인이 결과물만이 아니라 그것이 유지되고 관리되는 과정 전체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식당과 상점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음식을 만드는 손길, 재료를 다루는 과정, 물건이 선별되고 포장되는 장면이 드러날 때 공간은 더 깊고 풍성한 경험의 장소가 된다. 결국 공실의 문제는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경험의 밀도를 담아내지 못한 공간들이 비워지는 현상이다. 도시 재생의 핵심도 빈 점포에 어떤 업종을 넣을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머물게 할 어떤 장면과 경험을 기획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기능만 남은 공간은 죽고, 서사와 체류가 있는 공간만이 살아남는다. 비어가는 것은 점포가 아니라 경험의 밀도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3-17

존재인구 시대의 도시 건축

중소도시에서 인구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50만, 100만이라는 숫자는 도시의 체급이었고 자존심이었다. 그 안에는 “우리 도시는 아직 괜찮다”는 믿음도 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산업화 이후 도시는 정주인구를 중심으로 짜였다. 주택지구와 도로, 학교와 상업시설, 산업단지와 행정체계도 모두 그 감각 위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역소멸이 현실이 된 지금, 그 시스템의 빈틈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년층은 떠나고 인구는 계속 빠져나가며, 도심은 활력을 잃고 있다. 임대 표시가 붙은 빈 상가와 쓰임을 잃은 시설도 늘어난다. 문제는 단지 인구가 줄어드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낡고 고정된 인구 개념으로 도시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도시에는 디지털 노마드와 원격근무자, 한달살기 체류자, 5도 2촌처럼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거주지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이민자와 재외동포처럼 둘 이상의 언어와 문화, 생활권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이동성의 확대는 20세기에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던 삶의 방식과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도 지역에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도시의 공기와 흐름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 시스템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생활인구와 관계인구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인구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존재인구는 단지 잠시 체류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다. 한 장소에 반복적으로 존재하며 관계를 만들고, 소비와 기억, 문화적 가능성과 활력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 여부가 아니다. 누가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무엇을 남기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존재인구를 중심에 놓고 보면 도시와 건축이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도시는 더 이상 주민만 붙잡아 두는 시스템이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머물고, 만나고, 섞이면서 새로운 일과 관계가 생겨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원격근무자를 위한 일터, 유연한 체류형 주거, 지역민과 외부인이 함께 쓰는 문화교류 공간, 프로젝트형 방문자를 위한 실험의 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가깝다. 장기 체류자를 위한 작은 작업 공간,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공유 거점도 중요해진다. 빈 상가와 유휴시설도 더 이상 쇠퇴의 흔적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쓰임을 만드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무엇보다 존재인구의 관점은 도시 안에 다름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감각과 지식, 네트워크와 수요가 들어오면 교환과 실험이 시작된다. 기존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산업이 태어날 수도 있다. 이제 지역소멸의 해법은 정주인구를 붙잡는 데만 있지 않다.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머물게 하며, 지역의 동력으로 바꿀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도시의 미래는 얼마나 많은 주민을 붙잡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도시와 건축도 정주인구만이 아니라 존재인구까지 함께 품는 방식으로 다시 짜여야 한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3-10

DDP를 위한 변명

최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둘러싼 논란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이 건물을 대변해 ‘변명‘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작 변명이 필요한 것은 건물보다 우리의 평가 방식이다. DDP에 던져지는 질문은 대개 두 갈래다. 하나는 문화적 가치가 아니라 “상업적 가치가 있나”라는 계산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건축적 논쟁을 가장한 채 정당한 비평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시선이다. 이 두 시선이 결합하는 순간, 건축의 진짜 가치는 보이지 않게 된다. 도시는 그렇게 ‘해석’ 대신 ‘판결’만 남는다. 공공건축을 손익계산서로만 재단하면 문화의 본질은 언제나 패배한다. 문화는 단기간 매출이 아니라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이며 형성되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운영과 지속가능성은 따져야 하지만 ‘수익=가치’로 환원할 수는 없다. 가동률, 반복 프로그램, 체류시간, 주변 상권과의 교환 구조 같은 지표로 성과와 결함을 분해해야 한다. 대표적인 DDP 비판 가운데 ‘문맥과의 단절’은 형태만 놓고 보면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동대문은 원래 생산·유통·야간 이동이 겹치는 ‘시장-도시’다. 여러 방향에서 들어오고, 다양한 동선이 교차하며, 각자 다른 방식으로 머물다 빠져나가는 경험이 동대문다운 방식이다. DDP의 다중 진입과 비정형 동선은 그 복잡한 도시성을 공간으로 번역하려는 시도였다. ‘길을 잃고 싶은 공간’은 낭만이 아니라 우연한 만남과 재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또 하나의 유산은 산업적 파급력에 있다. DDP 외피는 4만5000장이 넘는 패널을 ‘대량 맞춤’으로 제작·설치해야 했고, 특히 이중곡률 패널 성형은 기존 표준 커튼월처럼 반복 생산으로 해결하기 어려웠다. 설계-제작-시공을 디지털 데이터로 연결해 품질과 오차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강화되며 국내 시공 역량이 한 단계 성숙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랜드마크는 ‘시간의 지연’을 겪는다. 에펠탑도 초기에 거센 비난을 받았고, 모파상이 탑이 보기 싫어 “탑 안에서 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은 낯섦을 상징으로 바꿨고, 에펠탑은 결국 파리의 얼굴이 되었다. 자하 하디드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릿츠커상을 받은 여성 건축가다. 그의 작품을 보유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시의 문화적 수준을 보여준다. DDP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대개 형태가 아니라 시스템이다. 운영·연결·거버넌스를 보완하고 수정해 채워야 한다. K-pop 공연장 같은 대형 시설은 지방 도시 활성화에 더 직접적인 자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필요도 기존의 문화적 실험을 ‘지우는’ 방식으로 충족될 필요는 없다. 공연장은 새로 지을 수 있지만, 논쟁적 유산은 해석과 개선을 통해서만 성숙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버리지는 않듯, 불편함은 삭제가 아니라 진단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건물을 부수는 결단보다 어려운 일은, 건축을 도시 속에서 작동시키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괴가 아니라 정밀한 비평과 시스템 업그레이드다. 논쟁을 ‘호불호’가 아니라 문화적 가치와 도시적작동을 함께 따지는 다각적 평가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DDP를 대하는 최소한의 품격이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2-25

랜드마크는 도시의 의지다

나는 ‘랜드마크’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느낀다. 도시는 랜드마크를 통해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기대가 너무 쉽게 정치적 수사로 소비되는 장면 또한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랜드마크의 영향력을 부정하긴 어렵다. 도시재생에서 랜드마크의 효용을 말할 때 흔히 ‘빌바오 효과’가 언급된다. 철강·조선·항만물류에 의존하던 스페인의 산업도시 빌바오는 1970~80년대 산업구조 변화로 실업과 도시 쇠퇴가 심화된, 이른바 망해가던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1997년 강변의 낡은 항만 부지에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가 들어서며 도시 이미지는 관광과 문화로 전환되었고, 빌바오는 ‘문화로 재탄생한 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의 랜드마크가 만들어낸 이 강력한 파급력은 이후 수많은 도시에서 랜드마크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빌바오가 남긴 진짜 교훈은 “유명한 건물 하나면 된다”가 아니다. 랜드마크는 해답이 아니라 촉매이며, 촉매가 작동하려면 접근성·동선·주변 공간·프로그램·운영까지 도시 전체의 준비가 필요하다. 외형만 모방한 랜드마크가 반복해서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동대문 DDP설계로 잘 알려진 런던의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에서 12년 동안 일하며 여러 나라의 랜드마크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형태’지만, 실제로 더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도시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였다. 랜드마크는 멋진 조형물을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머물고 다시 찾게 만드는 경험의 장치여야 한다. 운영이 빈약하면 사진 배경으로 끝나고, 주변과 단절되면 섬이 되며, 도시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상징은 금방 낡는다. 최근 포항시가 영일대해수욕장 공영주차장 부지에 노보텔 브랜드의 26층 규모 특급호텔을 건립해 체류형 관광과 MICE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본궤도에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포항이 어떤 도시로 전환하려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관광도시는 “좋은 호텔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랜드마크가 되려면 “특급”이라는 등급이나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라, 포항만의 다름과 가치를 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누가 이 건축을 설계했는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프로젝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건축가의 정체성과 설계의 방향, 공공과 민간이 어떤 비전을 공유했는지까지 모두 도시 브랜딩의 일부가 된다. 결국 사람들은 호텔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호텔이 대표하는 포항의 세계관을 경험하러 온다. 랜드마크는 차이와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물리적 증거여야한다. 그때 비로소 이 프로젝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될 수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건물이 아니라, 여기만의 건물이어야 한다. 결국 랜드마크는 도시의 자존심이 아니라 도시의 의지를 스스로 공간과 형태로 증명한다. 포항의 새로운 특급호텔이 “건물 하나”가 아니라, “도시의 시스템”을 바꾸는 촉매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2-01

21세기 도시 생존은 ‘차이’에 달려 있다

20세기 도시 발전의 목표는 ‘결핍 해소’와 ‘차이 제거’에 있었다. 서울과 지방 간 주거·교육·문화 등 삶의 조건을 구성하는 인프라 격차를 줄이는 것이 곧 발전이며 진보라고 믿어졌다. 어디를 가나 동일한 아파트 브랜드와 프랜차이즈 상업시설, 효율 중심의 도로망은 도시를 빠르게 팽창시켰고, 우리에게 안정과 편의를 제공했다. 개발의 언어는 효율과 속도가 중심이 되었고, 차이는 불편한 것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라진 것은 단지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각 도시의 고유한 특성과 특별한 개성도 사라졌다. 낯선 도시의 역에서 내려도 어디선가 본듯한 대단지 아파트 숲이 눈앞을 가로막고, 골목마다 똑같은 프랜차이즈 간판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서울 외곽의 수많은 신도시 프로젝트에서부터 지방 도시, 유럽 교외에서 아시아 해안 도시까지, 같은 건축물과 인프라, 접근 방식, 논리가 복사된 듯 반복되었다. 도시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무색무취한 공간으로 전락했다. 요즘 도시, 특히 지방 도시의 문제는 인프라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기본적인 도로와 건물, 각종 시설은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진짜 문제는 “왜 굳이 이 도시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방소멸은 단순한 인구나 일자리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도시가 더 이상 어떤 삶을 제안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지방 도시가 삶의 선택지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히 일이 많은 도시만을 고르지 않는다. 일 이후의 삶까지 상상하며, ‘나다운 삶’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선택한다. 결국 사람들이 도시를 고르는 기준은 그 도시만이 가진 공기의 질감, 축적된 역사의 기억, 그리고 그 안에서 형성되는 고유한 관계의 방식 말이다. 포항과 경북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산업과 항만, 대학과 자연이라는 충분한 자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도시가 어떤 삶을 제안하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어느 도시에나 있는 프랜차이즈와 똑같은 풍경으로 채워지는 ‘어디에나 있는 도시’가 되는 순간, 젊은 세대는 떠나고 도시는 빠르게 늙어간다. 따라서 21세기 도시 전략은 장식이 아닌 구조적 차이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차이는 일회성 축제나 화려한 건축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시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보호하며, 어떤 삶의 방식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구조적 선택이다. 공간과 건축, 문화와 산업, 그리고 일상의 방식까지 포함한 총체적 차이다. 차이는 단순히 더 많은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 도시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이유다. 20세기의 인프라가 이동과 생산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21세기의 도시는 여기에 더해, 관계·기억·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인프라를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빠르고 편리한가가 아니다. 이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가다. 다름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가 살아남기 위한 핵심 전략이다. 차이를 잃어버린 도시에 미래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