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던 바람이 늦은 저녁의 눈을 읽을 때면 수련 잎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고,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저녁은 소리 내어 일러 주었다 다시 책을 읽는다 아득한 독서의 속도에 부딪혀 나는 까마득히 정신을 잃는다 어둠의 심장을 깊숙이 베어 물며 입술을 닦는 그대 나는 무수히 죽어나 살아난다 숲속에는 피 냄새가 진동해. 나뭇잎들이 수군거리며 숲의 낌새를 읽었다 읽다 빠져나온 책 속이 캄캄하다 우리는 세계의 무엇인가를 읽으며 살아간다. 그것은 세계가 알려주는 어떤 뜻과 자신의 마음을 겹쳐놓는다는 것이다. 위의 시의 시인은 ‘저녁의 눈’을 읽고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저녁에 그는 책을 읽고 있다. 존재를 빨아들일 만큼 강렬하게 읽히는 책을. 그 책을 숲에 비유한다면, 그 숲에는 “무수히 죽거나 살아”나는 ‘나’의 “피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캄캄한 무(無) 위에 펼쳐진 숲. 문학평론가
2025-03-13
미끄러운 세상을 지나 헐벗은 비탈을 지나 부끄러운 마음을 지나 동지를 지나 허전해진 동면의 밤을 지나 돌아가는 곳 따뜻한 아랫목 할머니의 온기를 따라 가족들이 웅크리고 발을 넣던 곳 고구마를 구우며 깊게 묻어둔 감자를 들어내며 화로의 숯들이 발갛게 익던 곳으로 어릴 때, 추운 겨울날 거리를 걸을 때 오직 생각했던 것은 어서 귀가해 ‘따뜻한 아랫목’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인생 자체가 겨울이 된 현재, 나를 품어주는 아랫목은 없다. 시인도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닐까. 미끄럽고 헐벗은 세상과 부끄럽고 허전한 마음을 지나 귀가할 수 있는, “가족들이 웅크리고 발을 넣던 곳”이 예전엔 있었지만, 이제 그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위의 시가 슬픔을 주는 건 이 때문이겠다. 문학평론가
2025-03-12
아버지 성묘 다녀 온 겨울 숲에는고라니 발자국들이 지그재그로 찍혀 있었다 고라니가 숨어서 보았을 텐데,차례상 거두는 손길에 참 실망했겠다 북어포 찢어 던져놓고 올 걸곶감 서너 개 뿌려줄 걸 돌아오는 길,하트모양 발자국들이 배고프다고내 마음밭을 헤집었다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작은 징표도 지나치지 않고 마음 쓰는 시인의 영혼. 성묘 다녀오며 시인은 하트 모양의 고라니 발자국을 발견한다. 그 모양은 배고파하는 생명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시인은 성묘 상에 올려놓았던 음식의 일부라도 던져놓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묘 안에 계시는 아버지가 자신의 묘로 시인을 불러들이는 이유가, 숲속의 생명들에게 조금이라도 음식을 나눠주라는 것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5-03-11
나, 신나게 땅에 떨어질래 곽 찬 한 알의 온 무게로, 전속력으로 땅에 처박히겠어. 단숨에 땅을 들이받겠어 이 순간이 영원인 것처럼, 내 둥근 몸이 전 지구인 것처럼 단단한 땅을 부수고, 흙이 울리는 소리를 들을래 사방에 부서지는 사과 향기를 흩뿌리겠어, 황홀하도록 꼭지와 씨앗이 도려내진 채 청과상 쇼윈도에 갇히느니 냄새 없는 무늬처럼 비닐에 담겨 누군가의 접시로 실려가 조용하고 우아한 칼놀림 아래 같은 크기로 8등분 되느니 아, 차라리 떨어져 깨지겠어, 속살 드러낸 난만한 붉음이 되도록 큰 소리로 소란스레 바람을 일으키면서 쿵! 모든 삶은 추락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저 나무에 매달린 사과처럼. 위의 시의 사과는 그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온 무게로” “땅에 처박히겠”다고 다짐한다. 하여 자신의 추락이 “단단한 땅을 부수고” 흙을 울리도록 하겠다고, 쇼윈도에 갇히거나 누군가에게 먹히느니 완전히 깨어져 “사방에 부서지는 사과 향기를 흩뿌리겠”다고 말이다. 아마 시인이란 존재는 이런 다짐을 하는 이가 아닐까 한다. 문학평론가
2025-03-10
그것은 아름답고 둥근 푸른 눈의 바보 같은 영원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스스로를 영원의 하얀 눈(目)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제 오로지 영원만이 그것을 이해한다 영원의 포옹은 그것의 욕망을 닮아 말이 없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영원의 모든 그림자를 제 안에 포착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다른 어떤 아름다움도 그것은 알아채지 못한다 오직 영원밖에는 머리로 그 대가를 치룬 이것밖에는 바스코 포바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살았던 모더니즘 시인. 위의 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으나 응시하지는 않는 조약돌 한 개를 보여준다. 시인은 그 조약돌에서 영원을 향한 갈망을 발견한다. 그것이 영원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영원의 하얀 눈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을 읽어내면서. 조약돌은 ‘제 안’에 있는 “영원의 모든 그림자를” ‘포착’하면서 영원을 찾아내는 바, 그 탐색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2025-03-09
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 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때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따스한 우정의 침대 안에 내 사고(思考)를 맡겨 버리고,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어져서 마음은 이내 누그러진다. 괴로움에 울던 나는 우정이라는 기적에 의해 강력해져 무적이 된다. 동시에 모든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 젊은 시절 그는 산문시를 썼다. 위의 시에서 그는 우정을 “누우면 기분이 좋아”지는 침대로 비유한다. 들어가면 깊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침대. 외부의 추위를 막아주는 우정 안에서 그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기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고. 우정이 삶의 침대가 되었던 때를 기억해본다.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힐 수 있었던 우정의 공간을. 문학평론가
2025-03-06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좋아한다. 나는 천재의 잔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때론 덜 깨친 천재의 재치를 좋아한다. 절망을 모르는 것처럼 반짝이는 혜안으로 즐긴다. 즐기는 만큼 천재의 놀이는 재미있다. 남에게 선사하기보다 자신에 충실하느니.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그. 나는 그러한 모습을 너무 좋아한다. 너무 가까이서만 보면 지루할지 몰라 그와의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의 몰두를 본다. 그는 시퍼런 칼날은 숨기면서 여유롭게 흔들리지 않고 그는 오줌 찔끔찔끔 싸면서도 태연자약으로 거기 있고 이처럼 의연한 천재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내 마음에 키우고 있다. 그는 언제든지 내 마음속에서 행복해한다. 나와 천재는 둘이 아닌 것처럼 사느니. 천재란 교육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닌,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 누구나 그런 재능이 있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 안의 그러한 재능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자질이 있다면, 그것이 ‘천재’ 아니겠는가. 위의 시에서 시인이 좋아하는 ‘천재’는 놀이하는 재능이다. 자신에 충실하며 절망을 모르고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천재. 시인은 그 천재를 마음 안에 키우고 그것과 “둘이 아닌 것처럼” 살아 행복하다고. 문학평론가
2025-03-05
봄 숲에 드는 순간 쭈욱 뻗어 올라간 곧은 다리 보얗게 팔목을 드러낸 연초록 잎들을 보며 이팔청춘 나무들이라 이름 부르고 싶어졌다 장마가 휩쓸고 간 뒤 햇빛에 그을리며 다리에 근육이 야무지게 붙을 때쯤이면 사랑의 감미로움에 눈을 뜨고 이별의 뜨거운 번갯불이라도 한바탕 맞고 나면 더더욱 고요해질까 아픈 성장통을 아직은 까마득히 짐작조차 못 하는 싱그러운 봄 숲의 나무들 지극히 아름다운 이팔청춘 나무들, 가만히 불러보았다 젊은이들을 보면 자신의 청춘 시절을 떠올리는 나이가 되면, 봄날 연초록 잎들만 보아도 마음이 설레고 서글퍼지나 보다. 이 싱그러운 ‘이팔청춘 나무들’에서 “사랑의 감미로움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의식의 창에 영사되기 때문이겠다. 아직 아픔을 “짐작조차 못 하는” 나이, 하지만 머지않아 “이별의 번갯불”에 몸을 태우게 될지 모르는 인생의 봄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웠던, 잃어버린 계절. 문학평론가
2025-03-04
생전의 당신께 손발톱 한번 잘라 줄 새 없이 아침볕 서리 녹듯 가셨는데 구월 불 회오리 쏟고 있는 봉분에는 덤벼들기라도 할 것처럼 억새들만 장검 날을 세우고 있더이다 게을러터진 나를 꾸짖듯 말입니다 등에 진 예초기는 심동맥 찢어지겠다 싶게 발광하며 진저리 치구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다름 아닌 나를 깎는 일이었습니다 시인은 부모님 묘를 찾아와 벌초하는 중인 듯하다. 초가을이 되어 어느새 자란 억새들이 ‘불 회오리’와 같이 거센 기세로 마치 시인의 게으름을 비난하듯 날카롭게 검처럼 솟아있다. 진저리치는 예초기는 시인의 죄스런 마음-찢어지는 심동맥-을 대신 드러낸다. 그는 언제 “생전 당신께/손발톱 한번 잘라” 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깨닫는다. 부모님 묘의 벌초란 반성의 예초기로 자신을 깎는 일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2025-03-03
민들레가 피고 별이 반짝이는 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향기나 소리도 흩어져서 살아 있는 겁니다. 흩어지면, 더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외로우면 더 빛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빛나고 있습니다. 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또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단순한 진실을 전해준다. 위의 시도 그렇다. 별이 반짝일 수 있는 것은 별빛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사라지지 않는다면 빛나는 것도 없다. 흩어지기에 삶의 향기는 더욱 살아난다. 하여, 사라짐에 대해, 사라지기에 남겨진 외로움에 대해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당신’도 시인 앞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당신도 외로울 것이다. 하나 사라져 외롭기에 당신은 빛난다. 문학평론가
2025-02-26
선명히 보이는 북극성 말수가 적은 미녀 저녁 하늘의 붉은 구름 바람 속의 영국인 꼭 쥔 손의 도끼 배에서 기르는 늙은 고양이 새벽녘 밝아오는 하늘 모양 한창 물이 오른 혼혈 여인 모두 다 좋다 다 모두 좋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전위 시인, 이상과 윤동주가 좋아했던 시인인 콕토의 시. 위의 시는 세계를 대하는 예술가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가 접하는 세계의 존재들이 모두 좋고 아름답다는 것. 우연히 마주친 존재자들, 하늘을 보았을 때 본 북극성과 붉은 구름이나 옆에서 마주하게 된 영국인과 고양이, 혼혈 여인까지 말이다. 다 좋으니까 예술가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그려내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5-02-25
복숭아 나뭇가지 위 늙은 호박 한 덩이 묵상에 드셨다 애호박 때부터 사는 법을 수학한 수행자다 복숭아 나뭇가지 저만치 늙은 어머니 혼자 호미질하신다 어려서부터 체험 시를 써서 흙에 새기는 육필 시인이다 늙은 호박과 늙은 어머니가 조응한다. 둘 다 자연의 삶을 사는 존재자들이기에. 시에 따르면, 수행과 시는 이 자연의 삶에 그 본질이 있다. ‘애호박’ 때부터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마치 묵상하며 수행하듯 홀로 살아온 늙은 호박. ‘어려서부터’ 흙에서 혼자 호미질하며 살아온 어머니. 이 호미질이야말로 ‘체험 시’를 “흙에 새기는” 행위이다. 생존을 가능케 하는 노동은 삶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기에. 문학평론가
2025-02-24
꽃 피는 속도로 산맥을 넘어가면 전파가 지지직거리는 절벽 아직 정리하지 못한 사랑같이 창을 열면 흰 새의 날갯짓 손에 잡힐 듯하고 먼저 흘러온 강물이 뒤따라온 강물에 몸을 섞는 강면 창을 닫으면 물결 흘러와 머리맡을 적시는 방 짧은 기억 긴 추억 홀로 그렇게 누구나 “긴 추억”을 남기는 “짧은 기억”을 갖고 있을 테다. 아름다우나 순간의 섬광 같은, 잃어버려서 사는 내내 슬픈 추억으로 남게 된 기억. 시인은 ‘강변 모텔’에서, “먼저 흘러온 강물”과 “뒤따라온 강물”이 뒤섞이는 것을 창 아래로 내려다보며, 떠오르는 추억과 현재가 뒤섞이는 삶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손에 잡힐 듯”한 “흰 새의 날갯짓”처럼 아름답게 비상하는 ‘짧은 기억’을 슬픈 마음으로 바라본다. 문학평론가
2025-02-23
모든 삶을 생각하니 그 끝에 죽음이 버텨 그 끝의 죽음을 생각하니 모든 삶이 버텨 메아리다 이쪽에서 부르면 저쪽에 꽃혀 죽음을 캐내려면 삶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삶을 캐내려면 죽음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죽음과 삶을 각자 떼어놓으니 반 토막이다 내가 내린 상상력이 반 토막이라 생각하니 삶의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시들시들하다 죽음과 삶을 같은 줄기로 가지런히 세우니 모든 게 살 갖추어진 줄기다 부족함이 없다 삶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 아래 “모든 삶이 버”티고 있다.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산다. 시에 따르면, 이는 반 토막의 상상력으로 사는 것이다. 삶을 부르면 죽음이 대답하고 죽음을 부르면 삶이 대답한다. 메아리다. 죽음이 있어 삶은 ‘시들시들’함을 멈춘다. “죽음을 이리저리 들춰내야” 삶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낸다. 삶과 죽음이 같은 줄기에 있음을 인식할 때, 존재의 살이 부족함 없이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2025-02-20
밤이 되자 먼 곳이 더 훤히 건너다보이는데도 그 어떤 말조차 건너가지 못하고 어떤 다른 말이 되어 되돌아올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게 두려워서 밤이라서 뱀은 운다 한껏 목을 추어올릴 뿐 자기가 뱀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고서야 그제야 우는 것을 멈춘다 할 말을 잊은 듯 귀만 남아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런 말이 있어도 안으로만 소용돌이치는 젖은 귀만 대신 남게 되어서 그래서 한갓 진흙덩이로 되돌아왔을 뿐이라고 생각하자 힘없이 울어 댄다 울다 보면 자기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고 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뒤집는 시. 이 시에서 뱀은 말을 건넬 수 없는 슬픈 짐승이다. “먼 곳이 더 훤히 건너다보이”지만 뱀의 말은 타인에게 건너가지 못한다. 뱀은 이 슬픔을 표현할 수도 없다. 울려고 해도 온몸이 목울대인 뱀은 “목을 추어올릴 뿐”일 수밖에 없기에. 하여 뱀에게 ‘할 말’은 “안으로만 소용돌이치”고 “젖은 귀만 대신 남”는다. “자기를 잊게”되기를 바라며 속으로만 “힘없이 울어”댈 뿐인 뱀. 문학평론가
2025-02-19
일어서라, 일어서라! 우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별들의 그림자와 함께 소식이 왔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야 할 시간이다. 그들은 달빛의 엄호 아래 그들의 갈 길을 정하고 집들을 비웠다. 달은 별로 힘이 없지만. 우리의 언어는 침묵에 의하여 기록된다. 운하의 수문이 가늘게 틈을 내며 열린다. 도로표지판이 방향을 바꾸었다. 우리가 사랑의 이정표를 기억한다면, 水面 위에서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읽을 수 있으리라! 전후의 독일 시인 귄터 아이히의 시. 세상은 전위만 찬양하지만 후위의 삶도 있는 것. 후위의 언어는 “침묵에 의하여 기록”되고, 그들 “사랑의 이정표”는 “눈보라 속에서”나 읽을 수 있지만 말이다. 하나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후위도, 일어서서 집들을 비우고 “다른 사람들처럼 가야” 할 때가 있다. “별로 힘이 없“는 달빛 아래에서라도. 결국 이 후위의 움직임이야말로 세상을 바닥에서부터 변화시킨다…. 문학평론가
2025-02-18
한 번씩 일렁이는 집 묵묵했던 바닥에 의심이 묻어난다 각박한 모서리마다 둥글게 닳고 닳아 빠져나갈 수 없는 층과 층 사이 안락함과 두려움의 두터운 벽 사이 두 눈 질끈 감고 침묵 중인 건 아닌지 오래전 속 깊이 생긴 실금 어긋나지 않게 다독이는 건 그 틈으로 빛바랜 해가 지기 때문인지 어깨 짓누르는 세간살이 젖은 짐으로 낡아 가는 바닥에게 묻고 싶다 삶에 안정을 얻고, 벽에 둘러싸인 집안에서의 생활을 자연스레 받아들게 되었을 때, 과연 ‘지금 이 삶이 내가 추구하던 삶이었던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위의 시도 그런 질문을 던진다. 현재 생활 아래 있는 바닥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을. “안락함과 두려움”으로 인해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든 “층과 층 사이”의 ‘두터운 벽’이, 지금껏 견지해왔던 삶의 바닥에 실금을 내고 있지 않는지 의심하면서. 문학평론가
2025-02-17
길은 길게 기더라 배밀이로 기어서 갈 길 올 길을 빤히 보여주거나 대문 앞까지 안전하게 길손을 배송하더라 (중략) 길은 제 방식의 길을 버리지 않는 고집이 있더라 나서부터 물 발자국 아래 기었고 밟혔고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는 생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 이타의 길, 눈부셔라 연달래 꽃장화를 신은 듯 갓길 꽃빛도 곱더라만. 시는 사물의 이미지를 재창출하여 삶과 세계를 새로이 생각하게 이끈다. 위의 시는 ‘길’의 이미지를 재창출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나, 우리 삶을 밑에서 받쳐주는 존재자가 있다. 길이 그렇다. 길은 “자기는 맨바닥까지 낮추는/이타의 길”을 살아간다. 길은 자신을 배밀이로 간신히 밀어내면서, “움직이는 목숨들의 길이 되”어 살아가는 것. 가끔 길의 이 고단한 길을 “갓길 꽃빛”이 곱게 단장해주기도 하지만. 문학평론가
2025-02-16
아름다운 것은 쉽다 수리 발톱 같은 뿌리로 흙을 틀어쥐고 흙 속의 피를 빨아올려 태양계속에 벨벳보다 부드러운 수백 겹의 겹눈을 굽는다 푸르고도 연하고도 날카로운 가시는 대기 속의 화농을 쿡 찌른다 조롱도 자부심도 이 밀도 앞에선 잠잠 들어간 자는 나올 수도 나온 자는 들어갈 수도 없으니 이 감옥에서는 늘 불 냄새가 난다 (하략) 위의 시에 따르면, 장미는 역설적이게도 공격성을 통해 아름다움을 얻는다. “흙 속의 피를 빨아올”리고 태양빛을 받아 부드러운 이파리들을 구워내는 불로 사용하니. 이 공격성은 연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로 대기 속의 화농을 찔러 터뜨리는 데서도 나타난다. 하여 그 가시로 대기는 더 깨끗해지는 것, 세계의 정결함을 지켜내는 가시는 장미 넝쿨을 함부로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요새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5-02-13
함성과 비명, 피비린내는 가라앉고 주검이 널렸던 골짝은 역사가 되었다 공주에서 부여로 통하는 우금치골 도대체 어디로? 분노에 떨며 솟아올랐던 호미, 낫, 쇠스랑, 대나무 창 회오리치던 바깥세상에서 볼 때 그들의 주먹이야 바위를 치는 계란 여기를 빠져나갔어도 어차피 죽음이 기다렸을 거라면 떠도는 혼백들에게 위로가 되랴 너무 몰랐다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도 운명이라 체념하던 천한 것들도 좁혀오는 그물에 갇혀 파닥이던 물고기 방향도 모르고 내달리던 울분. “안방에서 큰소리치던 권력자들”은 모른다. 민중 속으로 퍼져나가는 분노를. 해소되지 못한 분노는 언젠가는 터질 터이다. 피비린내를 동반하면서. 동학 민중 봉기처럼. 비록 그 봉기가 “바위를 치는 계란”과 같았다고 하더라도, “좁혀오는 그물”처럼 “어차피 죽음이” 다가왔을 세상, 죽임을 당한 동학 농민들은 자신의 봉기를 후회하지 않으리라. 민중의 울분을 무시하는 권력이란 결국 몰락함을 역사는 가르쳐준다. 문학평론가
2025-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