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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감정보다 정동

지난 5월 8일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의 주요 정치인 세 사람이 공식 석상에서 눈물을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은 순직 공무원 부모 가슴에 빨간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연설하다가, 정청래 대표는 ‘노상원 수첩’에 기재된 연평도 수용소 현장 검증을 거론하며 분노하다가, 우원식 국회의장은 헌법개정안 상정에 국민의힘이 강하게 반대하자 그들을 비난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같은 눈물을 보고도 사람들의 반응은 상당히 달랐다. 누군가는 그 눈물에 공감했고, 누군가는 ‘정치적 연출’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의 뒤에 어떤 판단이나 해석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이들의 눈물에 공감하기도 하고 비난했을 것이다. 이렇게 감정은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진화론적으로 보아도 감정은 생각을 뒷받침한다. 맥스 베넷은 ‘지능의 기원’에서 감정은 생존을 위한 방향 감각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약 6억 년 전 좌우대칭동물이 등장하면서 지능이 발달했는데, 그 과정에서 생존에 유리한 것은 ‘좋음’으로, 불리한 것은 ‘나쁨’으로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감정은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회피할지를 빠르게 결정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방향을 정하는 것은 생각이고, 그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감정인 셈이다. 문제는 자극에 대한 판단이 내 생존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심한 경우,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감정은 모두 진실한 것이라 착각하며 기꺼이 몸을 맡긴다. 그러나 한번 자리잡은 감정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어떤 뉴스를 보고 감정에 압도되어 거칠고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다가 지운 적이 여러 번 있다. 물론 미처 지우지 못하고 남은 흔적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내 생각과 다른 오피니언 리더의 견해를 보거나 인플루언서의 행태를 보다가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는 데도 분노에 쉽게 끌려들어갈 때가 많다. 다만,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는 정동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정동이란 어떤 자극에 대해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몸의 동요 상태이다. 화병 같은 예만 보아도 우리는 어떤 강한 부정적인 자극이 오면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것이 정동이다. 자신의 정동을 먼저 알아차릴 수 있다면, 감정에 휩쓸릴 가능성도 줄어든다. 5월 8일, 세 정치인의 몸에는 어떤 정동이 일어났을까. 이들의 눈물에 공감하는 사람의 몸에는, 그리고 이들의 눈물을 비난하는 사람의 몸에는 어떤 정동이 일어났을까. 남의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그때 나의 정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우리가 자신의 정동을 조금이라도 더 잘 관찰할 수 있다면, 강한 감정에 휩싸일 가능성도 줄고, 반목과 갈등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요즘처럼 감정이 정치가 되는 시대일수록, 자신의 정동을 관찰하는 능력은 정치인은 물론, 일반 시민에게도 중요한 교양이 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20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

한달 전쯤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김애란 작가의 화법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시청자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손석희의 어떤 질문에 김애란 작가는 “소설을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적 주제를 집의 콘크리트나 뼈대로 세우지 말고 그 집을 나갔을 때 그 사회적 공기가 몸에 냄새처럼 배어서 바깥 공기와 만나서 환기되는 식으로 상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손석희의 표현대로 ‘(내 작품을) 사회적 메시지로 규정해서 독자들에게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라고 해도 될 말을 이렇게 길게 말하면, 짧고 빠르게를 추구하는 요즘 세상에 답답하게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영상에 많은 시청자가 감동했다는 댓글을 달고 있다. 짧게 말해도 될 말을 길게 말하기의 대가로 프루스트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 1913년 1권이 출간되고 1921년 작가 사후 1927년까지 14년에 걸쳐 7권으로 완간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는, 처음에는 출판해 주는 곳이 없어 자비로 출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출판되자마자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전문 작가나 일반 독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책이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가 첫 책 출간을 제안받고 이런 책을 누가 읽겠냐고 거절했다고 할 정도로(후에 지드는 그 거절이 자기가 평생에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통탄했다고 한다.), 이 책은 묘사가 너무 상세하고 문장이 길어서 엔간한 집중력이 없으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책이다. 프루스트는 왜 이렇게 읽기 어렵게 자세히 썼을까.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에 그 이유가 나온다. 1919년 젊은 외교관 해롤드 니콜슨은 리츠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서 프루스트와 만난 이야기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주 근사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에게 위원회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얘기했다. 나는 “흠, 우리는 보통은 10시 정각에 모입니다. 뒤에는 비서들이 있고요···.”라고 말했다. “아뇨, 아뇨! 말씀을 너무 빨리 하시네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주세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악수, 지도들, 종이가 스치는 소리, 옆방의 홍차, 마카롱 쿠키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아주 열중해 들으면서 가끔씩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선생님,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라고 끼어들었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 화자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이 ‘빨리 하지 않을 때’ 연민을 느낀다고 한 말에 동의하게 된다. 빨리 하지 않을 때 얻는 또 다른 이득은 자신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급변하는 사회에도 원인이 있지만, 쇼츠나 릴스, SNS 같은 단발적이고 즉각적인 인터넷 문화에 매몰된 탓도 크다. 이렇게 천천히 자세히 말하려면 큰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애란은 집중력을 우리 시대의 도덕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애란이나 프루스트만큼 자세히 관찰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문학을 읽으며 연민과 자기 챙김을 회복하면 좋겠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13

옳은 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

최근 옳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말을 두 사람에게서 연거푸 들었다. 두 사람이 말하는 의도는 조금 달랐는데, 한 사람은 아무리 옳아도 힘이 없으면 소용 없으니 자신의 옳음을 관철하려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아야 진짜 옳음이 된다는 뜻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옳음에도 적절한 때가 있어서 그렇지 않으면 옳음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표현은 비슷해도 의미는 많이 다르다. 전자의 의견을 말한 의도에 맞게 고쳐보면, 옳은 것은 힘이 있어야 옳은 것이 되고 힘이 없으면 옳다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많은 소수자들의 주장이 이런 사례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지만 소수이고 힘이 없으니 그들의 주장은 소음으로만 치부된다. 그래서 그 옳음을 관철시키려면 힘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이 의견은 자칫 힘이 옳음이라고 생각될 여지는 있지만, 상당히 현실적인 조언이다. 두 번째 의견은 좀 복잡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런 경우다. 어떤 조합을 운영하는데 A가 정당한 절차를 주장할 때 임원들은 A의 주장이 사업을 방해한다면서 A의 옳음이 적절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경우이다. 이런 두 번째 의견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근본적으로 보면, 부처님도 때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알아들을 사람한테만 말하라고까지 했으니, 적당한 시기, 적당한 대상이 아니라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옳지 않은 말이 될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러니 옳음에도 적절함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합에서 새 임원 선출을 위한 선거에서 일반 조합원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기존 임원의 유임을 결정했을 때 이를 항의하는 A를 사업 방해꾼으로 치부한다거나, ‘의안서’와 ‘의사록’을 구분해야 한다고 해도 4년 넘게 의안서를 의사록이라고 했어도 아무 일 없었다고 무시당하는 상황까지 맞닥뜨리면 옳음의 적절성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심한 회의가 든다. 물론 작은 불의에 집착하다가 큰 불의를 놓칠 수 있다면 작은 불의는 넘어가는 것이 현명하다. 문제는 불의의 크고 작음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작은 불의를 넘어가다 보면 큰 불의도 넘어가게 되는 문제도 있다. 옳음보다 속도가 중요하다는 논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격렬한 이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속도전을 벌였기 때문이라는 논리는 승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잘살게 된 것은 맞지만,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고 빈부격차는 더 극심해지고 있다. 2025년 말 기준 한국의 빈부격차가 극심한데, 상위 20%와 하위 20%의 순자산 격차가 45배에 달하여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고 수치라고 한다. 중위소득 50% 이하 인구 비율을 상대적 빈곤율이라고 하는데, 3%대인 노르웨이에 비해 한국은 2024년 기준 15.3%로 OECD 회원국 중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상당히 높다. 사회적 약자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옳음의 적절성을 따지기보다 옳다면 옳게 해야 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06

치매 환자를 욕보이지 마라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이란을 침공한 일부터 그 이후 보여준 행보에 대해 미국 내 인사들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를 치매라느니, 정신병자라느니, 요양원에 보내야 한다느니 하는 식의 비난이 뉴스를 달구고 있다. 실제로 어떤 네티즌은 오락가락하는 트럼프의 발언을 날짜별로 정리해서 게시했다. 일부를 인용하면, 3월 3일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다.”, 3월 9일 “우리는 이란을 공격해야 한다.”, 3월 12일 “우리가 이기긴 했는데, 아직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다.”, 3월 14일 “우리를 도와달라.”, 3월 16일 “사실 우린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 “누가 내 말을 듣는지 테스트해 봤다.”, “나토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주 나쁜 일을 겪게 될 거다.”, 3월 17일 “우리는 나토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등이다. 이후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둘러싸고도 말이 여러 번 바뀌었으니 누가 봐도 트럼프는 정신없는 사람 같다. 지난 12일에는 자신을 예수처럼 표현한 AI 합성 사진을 올렸다가 보수 기독교계의 뭇매를 맞고 12시간 만에 내리더니 15일에는 눈을 감고 예수 품에 안겨 있는 AI 합성 사진을 올리고 뿌듯해하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 트럼프에게 정신 병원에 가라는 비난이 지나친 것 같지는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비난은 지난 9일 중앙의 한 일간지에서 대서특필한 ‘치매설’ 보도다. ‘마가(MAGA)’ 진영의 대표적 보수 논객 알렉스 존스조차 ‘이란 문명을 멸망시키겠다’는 트럼프를 비난하면서 자신을 공격하는 트럼프에게 ‘치매’라고 응수했다는 뉴스다. 어떤 사람의 행보를 비판할 때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직설적인 표현보다 강력한 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트럼프에게 치매라는 비유는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면죄부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염려스럽다. 더 큰 문제는 치매와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을 엄청나게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보여준 트럼프의 행동이 정상적인 판단력이라고 생각하기 어렵고, 오락가락하는 급격한 감정 변화는 비정상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고령으로 현재 79세이니, 치매가 발병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이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도 치매 환자의 특징과 트럼프의 광포함은 공통점은커녕 비슷한 점도 하나 없다. 치매 환자는 길을 잃고 판단력을 잃고 자신조차 잃지만, 트럼프가 가는 길은 명확하고 확실한 이해관계가 있으며 극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치매 환자가 얼마나 연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인지 생각하면, 트럼프를 치매라고 하는 것은 치매 환자를 욕보이는 것이다. 한때 ‘개 같다.’ 등 개를 비하하는 욕설에 개가 얼마나 충직한 동물인데 개를 모욕하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개만도 못하다.’는 욕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동물 비유조차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정치지도자의 비정상적인 선택을 비판할 때는 비유법보다 직설법이 백배 낫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22

‘라키비움’을 뭐라고 할까요?

며칠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라키비움’이라는 단어가 우리말 다듬기 예시로 나왔다. “책을 읽고 기록을 살펴보고 전시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라키비움(larchiveum)’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이 표현은 우리말로 다듬으면 ‘복합 문화 공간’이라고 합니다. 도서관·기록관·박물관의 기능을 함께 갖춘 공간이나 시설을 뜻하는 말이에요.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 이제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전해 보세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는 우리말, 오늘도 하나 더 알아갑니다.” 라키비움(larchiveum)이라니, 도서관학, 기록학, 박물관학 분야의 전문용어라는데 2008년 미국의 기록전문가가 만든 이후 꽤나 널리 퍼져있는 단어인 것 같았다. 상당히 어려워 보이지만 그래도 도서관(library)의 첫 글자 엘과 기록보관소(archive)의 아카이브, 박물관(museum)의 뒷글자 움을합성해서 만들었다는 설명을 들으니 바로 이해는 된다. 그러나 라키비움을 쓸 때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어렵고, 라이브러리, 아카이브, 뮤지엄 등 외국어 자체도 부담인 데다가 각 단어의 알파벳 몇 개를 뽑아서 만들었으니 편하게 받아들이기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오래전 ‘아카이브’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도 적응하느라 힘들었는데 라키비움이라니 나도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인지 3년 전쯤 국립국어원에서 라키비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다듬자고 제안했다는데 잠잠하다가 우리말 다듬기 예시 단어로 나오면서 논란이 촉발된 것이다. 한쪽에서는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단어인데 굳이 한글로 번역해서 써야 하느냐고 반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라키비움이라는 단어가 미국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거의 한국에서만 쓴다면서 우리말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최근 내가 맞닥뜨리는 어려움도 번역 또는 말 만들기와 관련이 있어서 이 논쟁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가능하면 관련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중적으로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만들자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요즘 노자의 ‘도덕경’을 강의하면서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혼자 공부할 때는 생각지 못했던 난관을 자주 만난다. 한문을 한글 단어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27장에 나오는 ‘要妙’라는 단어를 그냥 요묘라면 무책임해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비로운 요체’라 하고, 어떤 이는 ‘본질적인 요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다. 어느 수강생의 제안대로 우리말 단어로 만들고 싶지만 어렵다. 이런 단어를 우리말 단어로 만드는 것은 전문가들의 중요한 과제이다. ‘라키비움’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다듬어야 할 말로 예시했다는 것은, 그것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대중적인 단어로 다듬었다는 것은, 이 단어가 우리 곁에 가까이 왔다는 뜻이다. 실제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는 ‘라키비움’ 공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외국어를 한국어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키비움은 아무래도 과한 것 같다. 이참에 제안해 보자면, ‘기록문화관’은 어떨까?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15

딸깍 글쓰기를 넘어서는 방법

지난 4월 3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이자 베스트 셀러 작가인 김영민 교수가 클로드와 첨삭 대결을 했다. 클로드에게 프롬프트를 준 사람도 김영민 교수다. 김영민 교수를 좋아하는 사람, 클로드와 사람의 대결을 보고 싶은 사람 130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첨삭은 바둑과는 달리 우열을 판단하기 어렵다. 실제 이번 대결에서 첨삭 내용 중 겹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팽팽하게 끝난 셈이다. 그만큼 텍스트 생성형 인공지능의 성능이 좋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픈AI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챗지피티가 나온 것이 2022년 11월이니 이제 3년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지금은 생활 곳곳에서 생성형 AI를 이용하고 있다. 이제 생성형 AI는 텍스트, 이미지, 소리와 음악, 영상, 코드, 멀티모달 등 여러 기능으로 특화되어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생성형 AI를 선택할 수 있다. 글쓰기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중에서 글쓰기 분야에서 사용하는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텍스트 생성형 인공지능을 눈여겨보게 된다. 이것들은 글이 필요한 모든 현장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한때 대학생들이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과제를 제출해서 문제가 된 적이 있지만, 이제는 교수들이 나서서 이 툴을 어떻게 잘 이용할까를 가르치는 단계에 왔다. 실제로 ChatGPT가 써준 글을 처음 보면 얼마나 매끄러운지 감탄스럽다. 하지만 다시 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여러 번 보면 그 이상함의 실체를 알게 되는데, 그것은 글에서 인격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용하지 않는다. 글쓰기 도움보다는 질문하는 정도로 몇 번 사용해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세상은 곧 이 한없이 매끄럽지만 매력은 없는 이런 글들로 도배될지도 모른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초능력으로 딸깍 출판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딸깍 출판이란 프롬프트로 책을 만들어 빠르게 출간하는 것을 말한다. 대형 출판사의 연간 발행 권수가 200여 권이라는데, 작년 어느 출판사는 이런 식으로 9000권 이상의 AI 도서를 발행했다고 한다. 어느 출판인은 이 딸깍 출판을 세금 도둑이라고 맹비난한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의무 납본하면 보상금을 주는데 이들은 이를 악용하여 책을 한두 권만 인쇄하고 보상금만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딸깍 출판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비열한 글쓰기가 인간다움을 파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오늘 SNS 글쓰기 모임에 처음 참여했다. 자기소개도 없는 익명의 모임이었지만 어떻게 글을 쓸까, 어떤 책이 좋은가 하는 주제로 카페에 앉아 글을 쓰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사람의 관계 맺기가 중요하다는데, 오늘 우리는 관계 맺기의 정수를 체험한 셈이다. 제아무리 클로드가 첨삭을 잘해도 사람이 주는 프롬프트 없이는 한 줄도 글을 못 쓴다. 우리가 글쓰기 없이 한 순간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은 글쓰기의 핵심 기능인 자기성찰, 경험 공유, 관계 맺기 때문이다. 딸깍 글쓰기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08

퀄리아를 배우다

‘퀄리아’라니, 무슨 꽃 이름 같기도 하고, 나무 이름 같기도 한 이 이름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느낌을 갖거나 심지어 엉뚱한 다른 물건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은 이 ‘퀄리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퀄리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읽은 뇌과학 교양서, ‘인간을 읽어내는 뇌과학’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는 뇌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만한 주제를 골고루 설명하고 있다. 퀄리아도 그 중 하나다. 정신이나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현대 뇌과학 분야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르려야 자를 수 없는 ‘퀄리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꽤 쌓여있다고 한다. 퀄리아 자체는 관찰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행동만으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을 갖는 모든 것이 퀄리아를 형성한다. 색깔은 물질의 속성이 아니라 뇌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주관적 느낌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같은 빨간 사과를 보지만 빨강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사과의 맛 역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 퀄리아는 감각마다 존재하는데, 시각 퀄리아, 후각 퀄리아, 청각 퀄리아, 미각 퀄리아, 촉각 퀄리아 등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주관이 만들어낸 환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퀄리아를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퀄리아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잘 감각하기 위해 좀 더 느리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부 전공은 심리학이니 빼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원 진학부터 따지면 인문학에 종사한 지 40년이 지났다. 한 번도 휴학한 적 없고 다른 일에 전업으로 종사한 적이 없으니 아무리 게을렀다고 해도 이만하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고전 평론가가 6, 70대에 들어서서 공허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 공부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생각난다. 예를 들어 ‘논어’를 읽을 때는 유학이 세상 최고이고, ‘도덕경’을 읽을 때는 도가 사상이 최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중인격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런 지식이 그 사람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게 해줄까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 모든 느낌과 생각이 퀄리아라는 주관적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라니, 그렇다면 고통이나 통증 역시 퀄리아일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객관적 실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을 알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고 세상의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퀄리아 이야기를 듣자노라니, 삶의 공허를 조금이라도 넘어서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의 답까지 얻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덤으로 말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01

4세 고시 금지를 환영한다

3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학원 운영자가 유아를 대상으로 원생을 모집할 때 선별해서 받거나 수준별 반 배정을 목적으로 시험을 보고 평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앞으로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9월부터 실행되는데, 이를 위반하면 영업정지나 등록 말소 등 행정처분을 받거나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처분받는다고 한다. 레벨 테스트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고 몇십 년 전부터 있어 온 관행이지만, 최근의 경향은 새로운 국면이다.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3~4세부터 영어학원에 보내면서 4세 이하까지 레벨 테스트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4세 고시, 7세 고시가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런 뉴스를 접하니, 30년 전에도 돌이 안 지난 아기를 영어 과외 시킨다고 해서 헛웃음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극소수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을 테고 레벨 테스트도 없었을 테니 지금에 비하면 크게 염려할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아들이 이것을 순순히 수행할 리 없다.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니 부모들은 안정적인 학습 상태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유아 대상으로 ADHD 처방이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5세 미만 어린이에게 비급여로 3만 8천 정이 처방되었고, 5세에서 9세 아동에게는 3년 누적 3271만 정 중 650만 정이 비급여라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입학 시험을 쳐야 했는데 중학교 때는 스트레스로 복통에 시달렸고,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월요일마다 1교시에 시험을 쳤는데 시험 때마다 설사가 나서 시험을 20분도 못 보고 중간에 나와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레벨 테스트는커녕 시험 볼 환경을 아예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글도 모르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인으로서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도 작은아이는 뭔가 아쉬움이 있었는지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일찌감치 과외든 학원이든 학습 대열에 편입시킬 거라고 별렀다. 그러나 두어 달 후 출산을 앞둔 요즘에는 뭔가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아기의 학습 코치는 내게 맡기겠다고 선언한다. 조선시대 관리 등용문이었던 과거 시험에서 율곡 이이는 10번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 급제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역사에서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나는 율곡이 장원이라는 명예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시험 자체가 결국 시험 기술에 능통한 사람이 상위 성적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산림이라 불리는 재야 학자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레벨 테스트를 포함하여 모든 시험을 철폐할 수는 없으나 시험의 폐해는 작지 않다. 그것이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부작용은 훨씬 더 커진다. 올해 하반기부터 4세 고시, 7세 고시가 금지된다고 하니, 올해 출산하는 아기들은 물론 현재 3세 이하 유아들의 스트레스는 좀 줄어들 것 같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25

이름을 붙인다는 것

노자의 ‘도덕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진짜 도가 아니니, 이름 붙인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를 역설한 유명한 문장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대상을 백 퍼센트 온전하게 인식하기 어렵고, 인식한 부분조차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언어로 표현된 이름에 사로잡히면 대상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노자라는 사람이 언제 적 사람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문시되고 있는 데다, ‘도덕경’이라는 텍스트도 판본이 여러 가지라 어느 판본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거의 2500여 년 전 어느 인물이 쓴 문장을 사람들이 지금도 읽는다는 것은 그 텍스트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말이 홍수를 이루는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한계와 폐단을 강조하는 노자의 일갈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언어의 힘을 빌려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언어의 한계를 강조하며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할 것이 아니라 대상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깝게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특히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슬픔이 포함하고 있는 엄청난 스펙트럼의 감정을 발견하여 이름붙인 신조어 사전이다. 존 케닉은 기존에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기존의 단어의 의미도 더 깊고 풍부하게 파고들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동안 슬픔(sadness)을 ‘희망의 부재’로 생각해왔지만, sadness의 원래 뜻은 ‘충분한’,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이라면서 어떤 강렬한 경험으로 마음이 넘치도록 차오르는 상태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슬픔이 마냥 슬픔으로만 머물지 않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스스로 이름 붙인다. 그중 ‘디스토리아’(dystoria)라는 단어는 라틴어 dys-(나쁜)+historia(역사)의 합성어다. 디스토리아에 대해 저자는 ‘자신이 역사의 거대한 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기분:자신의 삶이 그 어떤 위대한 사명과도 무관하고, 세대의 고난도 알지 못하며, 상대할 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 손쉽게 높은 파도의 일부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물방울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협공하고 이란 역시 팽팽하게 맞서며 이제는 다른 나라도 강제 개입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노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심연을 파고들고 보면, 개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에 힘없이 떠다니는 작은 뗏목 같은 무력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전쟁의 비극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18

부모보다 시민이 먼저인가요?

한국 부모들이 공동체 정신은 없이 개인적 탐욕으로 아이를 잘못 키운다고 비판하는 ‘탐욕스러운 돌봄’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어느 게시글에는 ‘알 만한’ 이들조차 부동산과 자식 교육 두 가지 앞에서는 딴사람이 된다면서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게시글을 쓴 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부동산과 자식 문제만큼은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별로 없다. 진보를 자처하거나 능력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자녀를 위해 강남으로 이사하는 사례가 많다. 두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나 역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입시는 한국의 부모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말하듯이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으므로” 양육을 사적인 헌신에 가두지 말고 모두의 책임으로 재사유하자는 제안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저자는 이런 주장에 논거로 제시한 것은 들러리 서는 아이들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 찬스’를 쓸 운이 없었던 것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능력 있는 부모들의 개인적인 탐욕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불안과 욕망을 부추겨 공동체를 훼손하는 사회 전체의 탐욕을 더 비판한다. 이렇게 하여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부모인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돌보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사회 구성원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도 부모이기 이전에 시민이 먼저라면서 이 주장에 동의한다. 이런 주장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3년 전쯤 만난 어느 법조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자녀가 공부에 큰 재주가 없는 것 같다면서 그런 아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데 관심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공부에 재주가 없으면 다른 재주를 계발해야 하지 않나, 사회 구조가 어떻게 그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에 의문이 생긴 두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식을 돌보는 데서 남긴 에너지를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을 돌보는 데 얼마나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오래전 두 아이가 아토피가 심해서 생협을 이용하다가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반경을 넓혔는데, 두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쏟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자기들에게 신경 써달라고 여러 번 불평한 적이 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도 내 가족과 공동체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자녀가 5분이라도 찬 바람 맞는 것을 꺼리는 것을 탐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불법의 영역만큼은 엄격하게 단속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기 위해 도로에 불법 주차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니 비판하고 규제해야 한다. 부모들의 불법을 단죄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아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노력과는 관계없지만 사회 구성원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04

집을 고치며

5년 전, 처음으로 내 이름으로 집을 샀다. 오래된 낡은 연립주택 3층이다. 겉은 무척 낡았으나 내부는 아주 깨끗해서 마음에 들었다. 이전 소유주가 매수하면서 싱크대며 화장실이며 도배며 샷시며 모두 새것으로 바꾼 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화장실이었는데, 약간 볼록하면서도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하얀 타일을 벽면에 사용해서 화장실 전체 분위기가 부드러우면서도 세련되어 보였다. 그런데 3년쯤 지나자 비만 오면 옥상에서 물이 스며들어 천장 여기저기에 얼룩이 지기 시작했다. 옥상 방수공사비를 알아보니 400만 원을 달라고 한다. 얼마나 오래 거주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400만 원이 아까워서 이웃에 의논하니 싸게 해주는 곳을 소개해준다. 그 업자는 200만 원으로 해준다기에 얼씨구나 하고 공사를 맡겼다. 그런데 몇 달 못 가서 또 비가 새서 천장 얼룩이 더 커졌다. 업자에게 사후서비스를 요청해서 그 후로도 두 번이나 추가 보수를 해야만 했다. 그 다음에는 아래층 화장실 천장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연락이 왔다. 한 업자를 불렀더니 타일 한 곳의 틈을 가리키며 여기만 막으면 된다고 10여 분 처리하더니 30만 원을 달라고 한다. 아주 간단한 작업이라기에 미리 비용을 물어보지도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작업이 다 끝난 후라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 아래층 화장실 천장에서 또 물이 샌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업자를 불렀는데, 제대로 하면 300만 원이 넘으니 아래층 천장을 임시방편으로 처리하라고 권한다. 비용 생각에 그 권유를 받아들였는데 그 비용도 140만 원이었다. 하지만 다시 일 년도 못 돼서 다시 물이 떨어진다고 연락이 왔다. 그것도 그전보다 아주 심하게 뚝 뚝 뚝 물이 떨어진다면서 아래층 집주인은 누전될까 무섭다고 하소연한다. 이번에는 제대로 누수 부위를 잡아보니, 예전 리모델링 업자가 겉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내부는 부실 공사한 것을 발견했다. 결국 280만 원을 들여 하수 배관을 다시 했다. 그런데 이번에 온 업자가 집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위해 옥상에 올라갔다가 더 큰 문제를 발견했으니, 옥상 방수 공사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장실 같은 실내에서 쓰는 방수 재질로 옥상을 방수 처리해서 햇빛에 다 들떠 있다며 올해 장마가 길면 누수가 심각할 거라고 경고해준다. 옥상 방수해 준 사람이 싸게 해준다면서 엉뚱한 재질로 공사한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럽다. 옥상에서, 아래층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그렇게 새는데 비용 좀 아끼겠다고 보이는 곳만 어설프게 처리한 결과 피해는 입을 만큼 입고 돈은 돈대로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들지 알 수 없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된다. 사진 잘 나오는 행사에만 관심 있는 자치단체장들, 철근을 누락하여 무너지는 아파트를 짓는 건설사들, 무엇보다 지난 내 삶을 돌아본다. 탄탄한 실력은 쌓지 못하고 그때그때 요령으로만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개인이나 사회나 만사불여튼튼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2-25

미풍양속이 사라진다고요?

몇 년 전 결혼한 딸을 설 연휴 전날 만났다. 올해부터 시가에서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시부모님을 뵈러 남편 고향에 가기는 하지만, 차례가 없어져서 올해부터 시가 방문 일정이 하루 줄었다고 한다. 차례를 주관하는 시가의 큰집에서 결정한 일이라는데, 그 집이 유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차례나 심지어 제사까지 지내지 않거나 간소화하는 집이 늘어나고 있다. 본래 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한밤중에 조상을 추모하는 의례이고, 차례는 명절이나 특정한 날 아침에 지내는 의례지만, 요즘에는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제사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보다 그 의례를 지내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명절에 정성스럽게 차례를 지내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하다. 오랜 기간 외국 생활하는 지인이 명절마다 SNS에 올리는 차례상을 보면 감탄을 넘어 감동에 젖어 든다. 문제는 그런 정성이 우러나오려면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는 어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집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설이나 추석에 민족이 대이동 하던 일은 우리 학창 시절만큼 뉴스거리는 아니다. 애써 가족이 모였어도 의미 없는 웃음과 상투적인 대화만 오가기 쉽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너무 오랜만에 만나 그럴 것이다. 그래도 60~70대 중 응답자의 35%가 넘는 사람은 명절이 추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해진 예법대로 유교 의례를 수행하지 못한다 해도 유교 사상이 우리 문화 유전자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가 내려갈수록 이 비율은 한없이 낮아진다. 2월 15일자 뉴스를 보니, 국민 3명 중 2명이 설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대신 가까운 해외나 국내 여행을 선택하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다. 명절이 충전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2030이 응답자의 50%가 넘는다. 명절이 추모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60~70대는 35%지만 20대는 10%도 안 된다고 한다. 명절이면 부정적인 뉘앙스로 세대 격차에 대한 통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유교에서는 후손이 차례나 제사를 지내면 음식을 흠향한다고 한다. 조상신이라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조상신이 와서 흠향하고 간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이렇게 명절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조상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문화 유전자에 유교 사상이 남아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할 여건이나 믿음이 없으면 명절 문화도 바뀌어 갈 수밖에 없다. 돌아가신 부모나 조부모를 기리기 위해 조상신의 흠향을 믿고 전통 의례를 수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가정마다 혹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조선시대조차도 ‘가가례’라고 해서 집집마다 예가 달랐다. 박제된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후손들의 화목과도 거리가 멀다. 전통 의례를 미풍양속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이 사라진다고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 행복한 의미 있는 의례를 만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유영희 인문학자

2026-02-18

요즘 곡학아세

지난 1월 28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및 통일교 청탁 금품 수수 혐의 등으로 자본시장법·정치자금법 위반했다고 기소된 김건희 씨가 1심에서 징역 1년 8월을 선고받았다. 15년 구형도 적다는 의견도 많았는데, 구형의 9분의 1인 1년 8개월이 선고되자 비판의 목소리가 많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해야 할 영부인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영리를 취한 것은 옳지 않다고 판결문에 쓴 것도 공분을 샀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말은 김부식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온조왕 15년(BC 4년) 기사에 새 궁궐을 두고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아름답되 사치스럽지 않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사자성어는 유홍준의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백제와 조선의 미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후 전통미를 설명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사자성어를 나란히 놓은 것은 좀 어색하다. 누추함과 가까운 검소와 사치와 가까운 아름다움이 한 건물에 공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부식이 백제의 새 궁궐을 검소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고 한 것은 임금이 사는 궁궐만의 특징 때문일 것이다. 궁궐이 검소하기만 해도 안 되고, 아름다움만 추구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개의 사자성어의 출전은 다르지만 모두 유학의 경서다. ‘검이불루’라고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공자는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해야 한다’거나 ‘꾸밈이 본바탕보다 지나치면 겉치레가 심한 것이고, 본바탕이 꾸밈보다 지나치면 거친 것이다. 꾸밈과 본바탕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좋다’고 해서 본바탕만 강조하는 것을 경계했으니 ‘검이불루’와 통한다. ‘아름답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은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한 구절을 ‘중용’의 저자가 인용하면서 비단의 아름다움을 감추기 위해 홑옷을 덧입는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홑옷의 재료도 아주 고급 천이라서 귀족만 입을 수 있고, 그 홑옷 때문에 안에 입은 비단옷 더 돋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중용’의 저자가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한 점이 있다. 그래도 그동안 겸양의 뜻으로 인용해왔다. 그런데 판사가 ‘권력자가 영리를 추구하면 안 된다’거나 ‘청탁과 결부된 선물로 자기를 치장하는 데 급급한 것은 문제’라면서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검소하게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훈계하는 과정에서 ‘검이불루 화이불치’를 인용한 것은 영부인에게 누추하지 않을 정도의 검소함을 요구하는 것이라 영부인의 지위에 전혀 맞지 않는다. 더 문제는 영부인이 사치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뇌물을 받은 것이 문제다. 뇌물을 받는 것은 영리를 추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어떤 인용이든 원문의 뜻에서 변형되는 것은 글의 숙명이다. 그러니 판사가 고전에서 사자성어를 재해석해서 인용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전혀 상황에 맞지 않게 사자성어를 맥락과 상관없이 단장취의하여 인용하는 것은 교묘한 곡학아세다. 그 판사가 아첨하고 싶었던 세상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2-04

유전형 탈모 보험 적용에 대하여

지난 12월 업무보고 때 이재명 대통령이 유전적 탈모에도 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하자 찬반양론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난색을 표했다. 그동안 원형탈모나 지루성 탈모 같은 질병으로 인한 탈모는 질병으로 간주하여 보험 급여 대상이지만, 유전적 남성형 탈모는 미용 목적이 강하다고 보험 적용을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난 현재 보건복지부는 건강바우처 사업에 청년 탈모 치료도 포함하는 방안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바우처는 복지부의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2024~2028)에 담긴 시범사업으로, 20~34살의 탈모인들이 분기별 1회씩, 1년에 4회 미만으로 의료를 이용했다면, 전년에 납부한 건보료의 10%(연간 최대 12만원)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보험료만 내고 혜택을 못 받은 금액 중 일부를 바우처 형식으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건도 까다롭고 금액도 적어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논란을 보다가 오래전 대학 동창 만난 일이 생각났다. 대학 졸업 후 20년이 넘어 만난 남자 동창들은 모두 변함이 없었는데, 유독 한 동창이 어색하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군대 갔다가 심한 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심한 탈모가 와서 언제나 모자를 쓴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허물없이 지냈던 동창이라 장난삼아 모자를 건드렸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혹자는 우리 사회가 유난스럽게 외모에 민감하다며 드웨인 존슨이나 제이슨 스타뎀, 이연걸 같은 영화배우를 예로 들며 탈모인의 고민을 무시하지만, 일반인이 그들처럼 빡빡 밀고 다닌다면 어느 문화권이라도 호감형은 아닐 것이다. 유전이라서 질병이 아니라는 논리도 군색하고, 유전형 탈모 치료를 미용 목적이라고만 단정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유전형 탈모가 생존 문제라는 대통령의 인식도 심하다고 생각하다가 ‘털업’으로 활동하는 유튜버 최수호 씨가 가발 벗은 모습을 보니, 내 원형탈모가 보험 적용을 받은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10대 20대의 탈모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그들이 최수호 씨처럼 탈모가 심하면 정말 생존 문제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어떤 이는 탈모 인구가 1천만 명에 이르고, 10~30대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건강보험재정의 한계를 들어 반대한다. 그러나 고혈압 인구는 1천300만 명으로 의료기관 진료는 700만 명이 넘고 기대수명 증가로 30년 이상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혈압은 생명과 직결되고 탈모는 생명과는 상관없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고혈압은 인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탈모를 방치하는 사람은 없다. 유전형 탈모에 보험 적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험이 적용되면 탈모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약 먹기를 꺼리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기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니 의학적으로 질병의 기준을 세워 약에 한정하여 보험을 적용하는 것은 공평한 처리라고 본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28

매일 버리는 힘

사회교육기관에서 글쓰기 강의와 인지력 강화 교육을 하고 있다. 인지력 강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질 좋은 수면과 식사, 운동,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다. 그중에서 나는 독서와 글쓰기로 진행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면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정리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중앙치매센터에서도 치매 예방을 위한 세 가지 권장 사항 중에 글쓰기를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리정돈이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도 정리의 한 분야다. 물건을 정리할 때도 마음과 생각이 깊이 관여한다. 많은 사람이 정리정돈을 못하는 이유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하니, 정리정돈을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마음과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버리기가 필수다. 그러나 버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인지력 강화 교육에 참여한 분들 역시 버릴 수 없다고 난감해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버려왔지만, 아직도 뭔가 정리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많이 줄였다는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지만 사실은 무엇을 남겨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작년 9월 느닷없이 계단에서 낙상하여 어깨뼈가 골절된 후 불편한 상황을 겪으면서 무엇을 내게 남겨두어야 할지 기준이 세워지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 골절된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한 달간 오른팔을 깁스한 후부터 건강 이슈가 연이어 터지고 있다. 10월 초에는 발가락을 집에 있는 실내자전거에 부딪혔는데 그게 골절이 되었고, 10월 중순부터는 왼쪽 다리에 통증이 와서 갖은 치료를 해도 제대로 걷지 못한 지 석 달이 되어간다. 이렇게 몇 달 동안 몸이 불편하다 보니 우울감까지 와서 그야말로 심신 모두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래도 다행히 일주일 전부터는 상태가 호전되어 가면서 여러 가지 나의 생활을 되돌아보고 있다. 특히 어떤 물건을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정리하고 있다. 역시 내게 정리하기 가장 힘든 것은 책과 가방이다.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무거운 가방을 무슨 벼슬이나 되는 양 지고 다녔고 책 욕심도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A4 파일과 책 한 권 들어가는 아주 가벼운 크로스 가방만 남겼고, 책 역시 매일 5권씩 버리고 있다. 이것은 다리 통증이라는 내 신체의 한계와 공간의 한계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구나 책에 대한 관심이 현실 도피일 수 있다는 깨달음은 책을 버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극적인 이슈가 없더라도 누구에게나 한계는 있다. 다만 평소에는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그래서 생각정리나 물건정리가 어렵다. 내가 원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각도 상실하게 만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한계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욕구는 인간을 나락에 빠트린다. 매일 버리는 힘은 인지력을 높이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21

해방군은 없다

새해 벽두부터 참담한 소식이 전해온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부부를 납치하고 직접 통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군은 새벽 두 시에 침입하여 한 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은 반면, 베네수엘라 측은 80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명분은 마두로의 부정선거와 미국 내 마약 판매다. 아무 배경지식이 없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기가 막히는 일이다. 트럼프는 1기 대통령 시절부터 부정선거로 당선되었다는 이유로 반미 성향의 마두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그동안 트럼프는 베네수엘라가 미국에 마약과 폭력을 전파한다고 비난하면서 마약 실은 배를 습격하는 등 긴장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부정선거에 미국이 개입할 정당성도 없거니와, 대통령을 납치한다고 마약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미국의 개입을 환호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마두로가 얼마나 독재를 했으면 미국의 침공을 환영할까 싶은 것이다. 사실 마두로가 처음부터 독재자는 아니었다. 그는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가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마두로는 자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명분만 사회주의를 내세웠을 뿐 실제로는 사익만을 위했다. 예를 들어, 마두로가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지만, 그것은 국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었다. 작년 10월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였던 것은 마두로의 독재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증거이다. 마차도는 차베스가 대통령일 때부터 독재를 비판해왔다. 차베스와 마두로는 갖은 위협으로 마차도의 인권 운동을 방해했지만 마차도는 수년간 꿋꿋하게 독재에 맞서 왔고,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고 노벨상 위원회가 발표한 것이 기억난다. 마차도 같은 인권 운동가가 정권을 잡게 된다면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희망이 될 수는 있지만, 지금처럼 미국이 개입해서 친미 정권을 세우는 것은 또 다른 독재를 불러올 뿐이다. 과테말라나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처럼 미국이 개입해서 친미 정권이 들어선 나라들은 내분만 격화할 뿐 제대로 발전한 나라는 없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 세계 1위 국가다. 그러나 이 석유 때문에 베네수엘라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트럼프가 마두로 부부를 납치한 것은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일 뿐 베네수엘라를 해방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차도 같은 민주 인사가 정권을 잡는다고 안심만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변한다. 1991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미얀마의 정치 지도자 아웅 산 수 치도 노벨상 수상 이후 반민주적인 행보에 비판이 많다. 아무리 민주 투사였던 사람이라도 처지가 바뀌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현재까지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가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복덩어리가 되려면 마두로의 부정투표와 독재에 저항하고 트럼프의 군사 개입에도 항거할 수 있어야 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15

개인의 결핍에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

며칠 전 SNS에서 흥미 있는 글을 보았다. 요즘 초등학교에서는 운동회 때 학부모 동반을 아예 금지하거나 부르더라도 딱 한 명만 오라고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편부모 가정, 특히 아버지가 없는 가정에서 항의가 빗발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학교를 무균실로 만들어 아이들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킨다고 성토하면서 심지어는 아동 학대이자 교육 기관의 직무 유기라고 비판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아야 할 권리 따위는 없으니 상처를 딛고 일어설 의무를 가르치는 것이 진짜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이 글을 보자니, 큰애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때 일이 생각났다. 강의하러 가야 해서 이웃 엄마에게 교과서를 챙겨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큰애는 두고두고 그 일을 되새기며 원망을 쏟았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와서 교과서를 받아 갔는데 자기만 엄마가 안 왔다는 것이다. 큰애는 다른 엄마들은 다 왔다고 하지만 못 온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보니, 아이들 운동회가 내 강의 시간과 겹쳐서 내가 참석을 못 한다면 큰애의 설움은 극에 달했을 것 같고, 그래서 나 역시 운동회에 학부모 참석을 제한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치니 SNS에서 글쓴이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웠다. 운동회가 가정과 학교가 함께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의식이라는 주장에는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하루 같이 뛴다고 해서 공동체 의식이 다져질 수도 없고, 실제 현실에서는 운동회 참여를 둘러싸고 많은 학부모 임원들이 수고하면서 벌어지는 긴장과 알력은 행사가 끝나도 이어지는 일이 태반이다. 물론 학교가 교육 공동체로서 더 적극적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다만, 소수의 결핍과 상처를 덜 느끼게 할 대안을 마련하지 않고 ‘결핍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학부모를 설득하자는 것은 무책임해 보인다. 결핍에 상처받는 사람의 아픔을 극복하는 일을 개인의 의지에만 전가하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초등학교 1학년 그 작은 아이들이 하교할 때 교과서 여러 권을 한꺼번에 들려 보내지 말고, 입학 직전이든 입학 직후든 별도로 교과서를 받아 가는 시간을 마련해줬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배려해도 결핍을 다 해소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핍을 덜 느끼게 할 방법이 있다면 그런 배려를 하면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운동회가 진정한 공동체 활동이 되게 하려면 부모가 학부모 참여를 아예 금지하자고 항의하는 사람을 악성 민원이라고 치부하거나 결핍을 느낄 아이들에게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기 이전에 부모가 못 오는 아이들도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능력이 되는 사람들끼리만 화합하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결핍을 덜 느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능력이 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것, 이런 일에 좀 더 진전이 있기를 바란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07

한자, 한문, 문해력

갑자기 한자 교육 논란이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지난 12일 교육부 대상 업무 보고 자리에서 김언종 한국고전번역원장이 문해력 향상을 위해 한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엉터리 국어 사용의 문제를 언급하자 그 원인이 한자 교육의 문제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가 꾸준히 한자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왔지만, 한자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두 사람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조갑제 대표는 엘리트 교육을 위해, 김언종 원장은 문해력 향상을 위해 한자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두 교과 과정에 한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입장이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은 한자 병용이나 제도 도입에는 회의적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예로 들면서 한자 학습 자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SNS에서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졌다. 한자 교육을 하지 않아도 문해력 교육이 가능하다는 입장과 그래도 한자 교육을 하는 것이 문해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런데 대화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면 대통령이 언급한 국어 사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자 교육을 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예를 들어, 대인배에서 배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한자를 알지 못해도 배울 수 있고, ‘저희 나라’가 아니라 ‘우리나라’라고 해야 한다는 것 역시 한자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자를 알면 어휘력이 좋아지는 것은 어느 정도 맞기 때문에 논란이 커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한자 교육과 한문 교육은 다르다. 현재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한문 수업은 한자 교육이 아니다. 한문은 한자로만 이루어진 글, 또는 중국 고전의 문장이라고 어학 사전에 나온다. 실제로 교과서 이름도 한문이고 내용도 한시나 산문 같은 문학 작품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한자 교육을 하는 것은 엘리트 양성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문해력 향상을 위한 한자 교육론과는 거리가 있다. 단어의 난이도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로 판가름되는데 일상에서 자주 쓰지 않는 단어 중에 한자어가 많고, 한자어는 음이 같아도 뜻이 다른 경우가 많다. 고유어 ‘배’에는 먹는 배, 타는 배, 사람 배 등 뜻이 많지만 맥락을 알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인명재천’ 같은 사자성어는 한자 하나하나를 익히더라도 한문은 우리말과 어순이 달라 해석하기 어렵고 국어 문해력 향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1천 자나 1천 8백 자 낱글자로 한자를 익히는 것도 효과는 없다. 단어는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뜻을 모르는 어휘를 검색해보면, 한자어든 고유어든 단어마다 여러 가지 뜻이 나온다. 문해력을 향상시키려면 사전에서 문장의 맥락과 관계있는 의미를 찾아 익히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한자어에 동음이의어가 많아 한자에 호기심이 발동하는 사람은 한자, 아니 한문까지도 배우면 된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28

환단고기 논란을 보다가

지난 12일 정부 부처 업무 보고를 받을 때 이재명 대통령이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환단고기’와 ‘환빠’ 논쟁에 대해 질문한 일이 있다. ‘환단고기’는 환웅과 단군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한 역사서이고, ‘환빠’는 ‘환단고기’ 맹신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대통령이 ‘환단고기’가 문헌이다,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볼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한 발언에 대해 역사학계는 물론이고 정치권까지 비판의 소리가 크다.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역사서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환빠’라고 한 것만 봐도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으며 다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논란을 인지하는지, 역사관을 어떻게 수립할 것이냐의 질문 과정 중 하나였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런 단군 관련 이슈에 특별한 관심이 가는 것은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1909년 나철이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중광했는데 대종교에서는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 한얼님이라고 하여 모두 믿는다. 중광(重光)은 한국에 단군과 천신을 모시는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는데 나철이 그것을 재건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종교는 아버지와 인연이 있다. 아버지가 만주에서 사실 때 대종교 3대 도사교였던 윤세복이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에 몇 번 방문한 적도 있다. 대종교의 경전은 ‘삼일신고’와 ‘신사기’인데, 특이한 것은 대종교에서는 1917년에 발견된 ‘천부경’도 경전으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삼일신고’는 온전히 수행에 관한 책이고 ‘신사기’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지만 ‘환단고기’처럼 실재 사실처럼 서술했다기보다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천부경’ 역시 수행과 관련이 깊다. 대종교가 ‘환단고기’를 수용하거나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통 ‘환단고기’를 역사적 사실로 신봉하는 사람들이 극단적 민족주의 경향을 띠는 것과는 달리, 대종교에서 환인, 환웅, 단군을 모시는 관점은 수행론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대종교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종교 신자들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대종교를 중광한 나철은 일제 탄압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자결하였고, 2대 도사교 김교헌은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대 도사교 후보였던 서일은 독립운동을 위해 도사교를 마다하고 대한정의단을 발족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많은 대종교인들이 참여하였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극단적 민족주의를 지향한 활동이 아니다. 대통령이 왜 ‘환단고기’와 ‘환빠’를 언급했는지 배경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지금도 ‘환단고기’를 실제 역사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면, 제대로 대응해서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것이 옳다. 다만, 엄밀한 역사학이라는 명분으로 고대에 대한 상상력까지 말살하지 않기를 바란다. ‘환단고기’는 수용하지 않더라도 환웅과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민족 정체성과 관련해서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21

시민불복종, 명령불복종

지난 12일,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 중인 국방부 헌법존중 정부혁신 티에프(TF)는 박정훈 대령을 중심으로 조사분석실을 신설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박정훈 대령은 2023년 채상병 사망 사건을 수사한 후 결과 임성근 사단장에게 과실치사 혐의가 있다고 보고 수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하려던 중 보류 지시를 받았지만, 수사 결과를 경상북도경찰청에 이첩한 일로 항명죄로 기소되었다가 올 1월에 무죄 판결을 받은 군인이다. 재판부가 무죄 판결한 이유는 이첩 중단 명령이 부당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난 2월 민형배 등 10명의 국회의원은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몇 가지 내용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군인이 정당한 명령에만 복종하고, 위법 또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군형법」은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은 군인을 항명죄로 처벌한다. 물론 군인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에 관하여 명령은 하달할 수 없다. 이것은 정당하지 않은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이기는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이라는 책에서 보다시피 시민불복종은 기본권과 헌법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의 부당한 법이나 제도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명령불복종은 시민불복종과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지배 권력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명령불복종은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행동으로, 전시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상명하달이 중요하기 때문에 엄한 벌을 받는다. 1995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크림슨 타이드’는 위기 상황에서 명령불복종을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 러시아의 핵공격 압박 상황에서 1차 통신에 선제 핵미사일 발사 명령이 왔다가 2차 통신이 오던 중 중단되어 발사 여부가 불분명한 상황이 되었다. 함장 램지는 1차 통신을 근거로 발사를 명령하지만, 2인자인 부장 론터는 분명하지 않다며 명령을 거부하고 함장을 감금하기까지 한다. 다시 도착한 3차 통신은 발사하지 말라는 것이어서 영화는 헌터의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램지는 월권으로, 헌터는 항명으로 모두 해군 청문회에 소집된다. 결론은 모두 국가를 위한 충정이었다고 보고 램지 함장은 징계 없이 전역하고 헌터 부장은 승진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핵발사의 후폭풍이 너무나 크기에 신중함도 필요하지만, 헌터의 명령불복종은 위험했다. 선제적 핵발사가 꼭 필요한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와 정당과 부당이 확실한 박정훈 대령의 사례는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헌터의 승진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큼 명령불복종의 명분이 정당하다면 용인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박정훈이 비상계엄 가담 공직자를 조사하는 중심인물로 복직된 것은 다행이다. 이번 기회에 법률이 일부 개정되어 기본권이 존중받는 군대가 되기를 바란다.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