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보경사 적광전 용마루 가운데엔 청기와가 1장 얹혀 있다. 적광전 지붕 위 수천 장의 기와 가운데 청기와 1장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사찰 건물 용마루에 청기와가 얹힌 사례는 보경사 말고도 개심사 대웅보전, 직지사 대웅전, 내소사 대웅보전, 대흥사 대웅보전, 마곡사 대광보전, 백양사 대웅전, 선운사 대웅보전과 만세루, 전등사 대웅보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대웅전, 화계사 대웅전과 보화루 등 전국적으로 꽤 많다.
청기와가 보경사처럼 용마루에 1장만 올려져 있기도 하지만, 선운사처럼 한 사찰 내 여러 건물에 있는 경우도 있고, 화계사처럼 한 건물에 여러 장이 얹힌 경우도 있다. 전각도 대웅전이나 적광전, 원통전 같은 법당뿐만 아니라 만세루, 보화루 같은 누각에도 올라가 있다.
사찰 지붕 용마루에 청기와가 얹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속설이 있다. 먼저 용마루의 청기와가 피뢰침 역할을 한다는 설이다. 이 설이 어디에 근거하는 알 수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도 불구하고 이 속설이 넓게 퍼진 것은 유명 사찰인 해남 대흥사의 공식 설명 때문인 듯하다. 2009년 8월에 어느 방문자가 이 절 홈페이지에 대흥사 대웅보전 지붕 가운데에 청기와가 얹힌 연유에 대해 질문을 했고, 사찰 측에서 “대웅보전 용마루 위에 청기와 한 장은 천둥번개와 벼락을 대비해서 피뢰침 역할을 하는 기능을 갖춘 기와입니다.”라는 답변을 적었다. 피뢰침의 원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설명이 도무지 상식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찰 측에서 내놓은 공식 설명이기에 사실인 양 인식되었고, 다른 사찰의 청기와를 설명할 때도 그대로 차용되고 있는 듯하다.
사찰 용마루의 청기와가 임금이 다녀간 절을 의미한다는 속설도 있다. 직지사 대웅전 지붕의 청기와를 설명하는 어느 블로그에는 “스님들 말로는 임금이 왔다 간 절이라 합니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 속설도 꽤 널리 퍼져 있다. 서울 주변의 사찰이면 모를까, 조선시대에 김천 직지사나 포항 보경사, 해남 대흥사까지 임금이 어찌 다녀갈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 또한 사실과 부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화려함의 상징으로 불리는 청기와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와를 만든 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색조 변화를 추구한 결과다. 청기와 제작에 쓰이는 주원료인 염초(焰硝)는 화약을 만드는 주재료인 염토에서 채취해 만들었는데, 그러다 보니 염초는 국가에서 관리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이 때문에 청기와 제작에는 비용이 많이 들었고, 궁궐이나 왕실과 관련이 있는 건물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기에 청기와는 곧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청기와는 궁궐 이외에도 원각사, 봉선사, 장의사 등의 사찰 전각에 사용된 사례가 있고, 발굴조사를 통해 관악사지, 중흥사지, 한흥사지, 원각사지, 영국사지, 서봉사지, 개흥사지, 회암사지 등에서 청기와가 확인되었다.
사찰에서 청기와가 한두 장 전해 오는 경우는 왕실 하사품인 경우가 많다. 그걸 설명해 주는 일화가 있다. 단양 영춘면 화장암(華藏庵)은 조선말에 폐허가 되었는데, 1897년에 김영준(金永俊)이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중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착공한 뒤 돈이 걷히지 않자 영춘현감에게 국고 1천 냥을 빌려 짓게 되었는데, 뒤에 갚지 못하게 되었고, 김영준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대원군이 화장암 산신령의 현몽을 얻은 뒤 김영준을 직접 문초한 뒤 사면하고, 친필로 화장암 현판 1점, 청기와 3장, 법복 1벌과 함께 고종의 초상화를 내려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한다.
이 일화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화장암이 왕실의 원찰이 되었으며, 당시 왕실에서 청기와를 3장 하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청기와는 왕실을 상징했고, 청기와가 있는 사찰은 원찰로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순천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청기와가 2장 소장돼 있다. ‘조계산 송광사지(曹溪山松廣寺誌)’에 따르면 고종 39년(1902)에 환갑을 맞은 고종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성수전(聖壽殿)이 건립되었다. 이 당시 왕실에서 자금은 물론 상량문과 예폐(禮幣)를 내렸다고 한 것으로 보아 박물관에 있는 청기와도 이때 하사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화장암과 송광사의 사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왕실에서 하사한 청기와를 사찰 측에서 보물로 여겨 소중하게 보관하기도 했지만, 사찰에 따라서는 건물 지붕 용마루 같은 곳에 올려 왕실 원찰임을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 사찰 전각의 청기와는 이러한 연유에서 용마루에 얹힌 것이 아닐까 한다.
보경사 적광전 용마루의 청기와 1장은 결국 왕실 원찰임을 나타내고 싶은 의도로 봐야 한다.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 발견되는 용마루의 청기와는 상당수가 보경사 적광전의 경우처럼 왕실 원찰임을 나타내고 싶은 의도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유교국가인 조선왕조의 억불정책과 관련이 깊다. 말하자면 노골적인 불교탄압 정책 속에 관아와 사대부로부터 사찰과 승려를 보호하고자 하는 절실함이 숨어 있는 것이다. 왕실로부터 보호받는 사찰이라면 관아에서도, 사대부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경사의 경우 적광전 비로자나후불도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문을 새겨 넣은 일이나 숙종대왕의 어필각판(御筆刻板)을 제작하여 보관해 온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