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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특집] 팔순에 불러보는 사모곡 ‘어머님 전상서’

등록일 2026-04-28 16:55 게재일 2026-04-29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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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남의 어머님 전상서(1) 출생과 유아 시절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날, 부부의날 등이 이어져 한달 내내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달이기도 합니다. 수필가이자 금경연 예술관장인 금태남씨가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썼습니다. 팔순의 세월을 지나며 비로소 가슴 깊이 불러보는 ‘어머님’의 이름. 금태남의 ‘어머님 전상서’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한 아들의 늦은 참회와 그리움이 담긴 이 글이 독자 여러분께 깊은 울림으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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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남 수필가가 어머니(중간줄 오른쪽 둘째)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제 나이 팔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철이 드는 모양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참으로 부족하고 못난 자식이었습니다. 어버이날을 앞두고 창밖 풍경을 보며, 이제는 곁에 계시지 않는 어머님께 늦은 사죄의 글을 올립니다.

오늘은 늦은 봄의 길목입니다. 개나리는 이미 노란 웃음을 거두었고, 벚꽃은 바람결에 흩날려 봄의 끝자락을 고합니다. 은은히 번지는 아카시아 향기와 대지를 적시는 봄비 속에서 저는 문득, 따스했던 어머님의 품을 떠올립니다.

어머님, 제가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던 그날을 기억하십니까.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최부잣집 넓은 기와집 뜰에서 저는 첫 울음을 터뜨렸지요. 어머님께서는 저를 잉태하신 열 달 동안,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김유신 장군 생가의 우물물을 길어다 드셨다지요. 무려 사십 리가 넘는 험한 길을 오가며 태중의 자식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셨던 그 사랑을 생각하면, 이제야 가슴 깊은 곳이 저릿하게 사무쳐 옵니다.

경주 교촌과 반월성의 기운을 품고 태어난 평온한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미술 교사였던 아버님께서 제가 세 살 되던 해, 고향인 영양군 수비면의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시며 우리 가족은 정든 경주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원망 섞인 마음으로 묻고 싶었습니다. 왜 그 험한 길을 선택하셔야 했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선택 뒤에는 홀로 계신 할머니를 모시려는 아버님의 깊은 효심이 있었습니다.

수비면 사택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다섯 남매를 건사하시랴, 병약해지는 아버님을 수발하시랴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날을 보내셨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끝내 무심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서른셋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고, 기둥이 무너진 집안에 남겨진 것은 막막함뿐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시집오시던 날의 꿈은 얼마나 푸르렀습니까. 대구사범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며 장래가 촉망되던 화가 아버님과 백년가약을 맺으셨으니, 어머님의 가슴은 희망으로 가득 찼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 화려했던 예술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고, 설상가상으로 큰딸과 막내아들마저 병으로 잃으셨지요. 이어진 6.25 전쟁의 비극은 우리 가족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피란길에 오르던 날, 어머님께서는 혹여 자식들이 굶을까 쌀을 볶아 두 주머니 가득 나누어 주셨지요. “헤어지더라도 이것으로 목숨을 이어가거라.” 그 떨리는 음성에는 절박한 기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하지만 철없던 저는 그 깊은 뜻을 모른 채 길가에서 친구와 장난을 치며 그 귀한 양식을 홀랑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제 와 복기해 보니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자식의 배고픔보다 앞선 어머님의 처절한 당부를 저는 너무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모진 풍파 속에서도 어머님은 아버님의 유작만은 결코 놓지 않으셨습니다. 미완의 그림들을 명주보자기에 싸서 애지중지 지니고 다니셨지요. 하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작품들은 훼손되어 갔고, 결국 어머님은 북받치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 작품들을 불태우셨습니다. 그날의 불길 속에서 타오른 것은 단순히 그림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자식들을 지켜내야 한다는 독한 다짐이 함께 타올랐을 것입니다.

밤이면 아이들이 깰까 봐 장독대 뒤에 숨어 남몰래 흐느끼시던 어머님. 어둠 속에서 홀로 삼키던 그 눈물은, 우리 가족이라는 작은 배를 띄워 올린 보이지 않는 강물이었습니다. 전쟁 후에도 어머님은 남의 밭을 매는 품팔이와 감자 농사로 모진 목숨을 이어가셨습니다. 당신의 고통을 가슴 깊은 무덤에 묻어둔 채 오직 자식들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머님, 이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 신산했던 세월 전부가 저희를 살리기 위한 어머님의 거대한 기도였음을 말입니다. 그 눈물겨운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늦어버린 고백이지만, 이제라도 고개 숙여 나직이 불러봅니다.

어머님, 참으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정리=방종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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