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찾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울림을 준다. 월항면 선석산 자락 태봉 정상에는 세종대왕의 왕자 18명과 손자 단종의 태가 19기의 석물 아래 잠들어 있다. 생명을 점지한 최고의 명당이라 불리는 이곳을 벌써 네 번째 찾았다.
그동안은 늘 태실이 있는 봉우리만 올랐다. 탁 트인 능선 위에 호위하듯 놓인 태실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곳에 온 목적을 다한 줄 알았다. 산 아래 태실을 관리하던 사찰 선석사가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둘러볼 생각조차 못 했다.
이번 네 번째 여정에서 뜻밖의 우회로로 진입해 마주한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태실 옆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주차장 앞으로 ‘생명문화공원’과 그 품에 안긴 ‘태실문화관’이 있었다. 그 규모에 동행한 이들 모두 “이곳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라며 눈을 크게 떴다. 부끄럽게도 네 번을 올 동안 나 역시 까맣게 몰랐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해설사의 설명은 더욱 인상 깊었다. 조선 왕실이 아기의 태를 얼마나 신성하게 여겼는지, 왜 성주가 태실의 명당으로 선택되었는지, 그리고 일제강점기 시절 겪은 수난 등 서사가 가슴에 와닿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탯줄을 100번 씻어 항아리에 담고 봉안했던 왕실의 의례는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깊은 존중의 표현이었다.
이야기는 서늘한 역사의 그늘로도 이어졌다. 단종을 지키려다 무너진 다섯 왕자의 태실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석물이 파괴되어 산 아래로 내던져졌다. 훗날 가봉된 세조의 태실 앞에는 거대한 거북 좌대의 비석이 세워졌다. 같은 공간에 남겨진 두 흔적은 인간의 영욕과 권력의 무상함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해설사는 최근에 흥행했던 ‘왕과 사는 남자’의 영향으로 태실을 찾는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해설사의 웅숭깊은 설명을 마음에 채우고 다시 올라간 태실은 이전 세 번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는 만큼 보이고 들은 만큼 느껴진다고 했던가. 우람한 소나무 사이 늘어선 19기의 태실은 더는 차가운 화강암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600년 전에 울음을 터뜨렸던 아기 왕자들의 숨결이었고, 생명을 귀하게 여겼던 선조들의 따스한 체온이었다. 동행자들 역시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예사롭지 않다”라며 연신 깊은 감탄을 쏟아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 자그마한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처럼 태실의 계단만을 헐떡이며 오르는 수많은 이들이 스쳤기 때문이다. 태실의 초입이나 계단 입구에 ‘태실에 오르기 전 생명문화공원과 태실문화관을 먼저 만나보세요’라는 작은 안내판 하나만 다정하게 서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 친절한 문장 한 줄이 있었다면 더 많은 방문자가 이 풍성하고 고귀한 생명의 이야기를 온전히 가슴에 담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오지랖 같은 아쉬움이 스쳤다.
그 아쉬움 끝에 성주가 왜 스스로 ‘생명문화도시’라 부르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인간 삶의 시작을 품은 태실, 삶의 흔적을 간직한 한개마을, 그리고 삶의 마지막을 기리는 선석사까지. 성주는 단순히 참외의 고장이 아닌 인간의 일생을 품은 생명의 고장이었다.
문화관을 거쳐 올라간 네 번째 걸음에서야 나는 비로소 성주가 품은 세계관을 읽어냈다. 다음에 이곳을 찾는 누군가가 있다면 태실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보다 먼저 생명문화공원의 우회로를 걸어보라고 권한다. 그 길 끝에서 성주는 오래된 유적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생명의 고장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손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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