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에 가면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듯돌쌓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제 멋대로 생긴 주위의 돌들 주워 모아숨 죽여 가며모난 돌 잘난 돌 쌓아 올리는데눈 여겨 보면움푹한 쪽엔 뾰족한 쪽을 받쳐 올리고왼쪽으로 기운 돌에는오른쪽으로 기운 돌로 균형을 잡아준다빈틈을 작은 돌로 메워주면 돌탑 하나가 완성되는데그렇게 쌓은 돌들이 돌탑 되어여기저기 모양을 내면 마른 강은작은 공원만 같았다친구는 세상살이도 늘 그렇게돌탑을 쌓듯모자란 쪽에 서서 받쳐주기를 좋아했는데돌탑이 자꾸 무너지듯세상살이도 자꾸 무너져 내렸다그럴 때마다 잠시 낙담하기도 했었지만그가 쌓고 싶은 돌탑의 돌들지천에 늘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개울가에 정성들여 쌓은 가지런한 돌탑을 보며 시인은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닫는다. 한 쪽이 낮고 모자라면 그 만큼의 높이와 넉넉함을 더해 균형있는 돌탑을 쌓듯이 우리네 인생살이도 그리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시인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아름다운 생의 균형을 이뤄가는 세상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18-04-24
산 하나 쌓으니 산 하나 무너진다꿈을 가지면서 노예는 모습을 드러냈다육신을 무너뜨린 노동의 절반은 노예가 되어 있었다부드러운 말 매무새 단정한 옷차림은 사라졌다탈춤을 꿈꾸지 마라. 그것은 싸움의 시작이다절망은 늪이 아니라 무르익은 유기질의 토양이거늘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면너무 멀리 돌아 온 길을 후회하지 않으리무너질 것도 없고 막을 것도 없다강 하나 막으니 강 하나 흘러간다평생을 노동현장에서 육신을 노예로 삼았음을 겸허히 고백하면서 시인은 얻은 것과 동시에 잃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그 어떤 불의나 절망에 이르게 하는 패배감을 피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맞서야겠다는 치열한 대결의지를 보여주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8-04-23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삼십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이제는 내 자신도 미워져서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그냥 그대로 했다시인은 너무도 오랫동안 미움의 언어들에 길들여져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 증오의 언어들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시를 써 온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런 증오의 말들로부터의 자유, 해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18-04-20
흐린 날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은 비젖은 것들이 몸이 잘 보인다 치잉 칭 감기는, 빗줄기의 한쪽 끝을 물고 새 날아간다. 건물과 건물 사이 세 뼘 잿빛 하늘 가로질러 짧게 사라진다 창유리 창유리들이, 나무 나무의 이파리 이파리 풀잎들이 모두 그쪽을 보고 있다 잘 보이는, 뇌리 속의 새 길게 날아가는 아래, 젖어 하염없이 웅크린몸, 섬 같구나 그의 유배지인 몸시인의 시선이 가닿는 풍경은 비에 젖어 더욱 선명해진다. 젖은 것들의 몸, 젖어서 하염없이 웅크린 몸에서 시인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을 읽어내고 있음을 본다. 섬처럼 홀로 견디는 우리네 생을 유배지의 삶으로 표현한 것에 깊이 공감하는 작품이다.시인
2018-04-19
목이 잘린 채축 늘어진 머리카락으로빨랫줄에 걸려 있다언제쯤에나시린 세상 풀어헤치고보글보글 거품 개워내며 끓어오를까새벽 인력시장 꽁탕치고 돌아앉은다리 밑 식객들의허기진 창자에 몸풀까시인은 가톨릭의 사제다. 줄에 걸려 마르고 있는 무청 실가리처럼 무기력하게 세상 변두리에서 가난과 궁핍의 생을 이어가는 실직자들에 대한 연민이 시 전체에 흐르고 있다. 무청 실가리가 웅크리고 배고픈 그들의 허기진 창자를 풀었으면 하는 간절한 사제의 바람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시인
2018-04-18
하늘과 물안개 하나 된 공산폭포이쯤에서 한번 뒤돌아보거라아래로만 흘러가는 물결에도탐욕이 실리는지절벽이다온몸 얼얼하도록 채찍질하는맵고 뜨겁고 차디찬 낙차에무섭게 붉어진 개옻단풍 가지 사이로얘야, 여기 피해 갈 생이란 없단다어머니 목소리에살얼음 끼는 소리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폭포는 자연의 순리, 이치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시인은 맵고 뜨겁고 차디찬 폭포의 낙차를 얘기하면서 우리네 삶의 자세, 태도를 한번쯤 돌아보고 성찰하라고 일러주고 있다. 폭포라는 자연물을 내세워 우리의 신념, 가치가 정말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는 시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시다. 시인
2018-04-17
개나리 유채꽃 아름답대도저 금빛 출렁이는 벼꽃에 비기랴불볕더위 건너온 세상 함성으로 피워 올리는농사꾼 아버지에그 아버지들 피땀으로 차려주신이 푸진밥상벼꽃을 밥꽃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인식에는 불볕을 견디며 평생 논바닥에 엎드려 밥꽃을 피워올리는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의 피땀 흘린 고생의 덕분에 대학도 가고 선생도 되어 이 풍진 세상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땅 어느 골 어느 들판에 눈물겨운 밥꽃 피어오르지 않는 곳 어디 있으랴. 우리의 아버지들이 피눈물로 피워올린 거룩한 꽃이 바로 밥꽃인 것이다. 시인
2018-04-16
동양공전 앞 사거리, 라면 박스로 지은 집 한 채, 사방으로 갈라진 길들을 몽느 채 다리 밑에 오롯이 앉아 있다. 삼양라면, 농심라면, 이름표들을 달고 라면 박스로 만든 집 속의 사연이 적혀있다. 바다의 냄새가 담뿍 담긴 들꽃이 이야기하는 한 끼의 그리움을 곱게 포장한 라면 박스로 만든 집 속에는 세상을 포장한 벙어리 아저씨가 살고 있다. 날마다 라면 박스가 포장하는 꿈들을 주우며 아저씨는 한밤이면 라면발로 몸을 칭칭 동여매어 라면으로 만든 꿈을 꾼다. 때묻은 길거리의 이야기와 골목길의 겨울 담벼락 모퉁이 파란 풀잎들을 박스에 담은 채, 겨울 눈 오는 밤, 아저씨는 알아들을 수 없는, 별들이 잠자는 라면 박스 속 이야기를 리어카에 싣고 하루 종일 사람의 집들 사이를 누빈다.시인의 눈에 비친 집 한 채는 누구나 꿈꾸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건사한 집이 아니다. 각종 상표의 라면 박스로 지어가는 집이다. 폐라면 박스를 모아서 삶을 영위하는 영세한 어느 아저씨가 지어가는 미완의 행복 집인 것이다. 거기에는 바다의 냄새가 담겨있고 들꽃의 얘기와 그리움이 있다. 시인
2018-04-13
팔다 남은 신발을 싣고정선장 나간 신랑의 트럭은 지금쯤 고개를 넘고 있겠지먼지를 털며 일어나는 황톳길돌만 앙상한 개울을 건너 달도 없는 휘청휘청한 길로구겨진 천원짜리처럼 돌아오고 있겠지아이의 숨소리, 산을 성성 넘는 바람하루 종일 심심하던 아이의 꿈속에도아빠의 낡은 자동차는 돌아오고 있겠지별빛 흩어진 빈 길을 달려옛집 가듯옛집 가듯어둠의 틈을 열며 달려오고 있겠지차를 몰고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을 옮겨 적은 느낌을 주는 시다. 아빠를 기다리며 고이 잠든 아이들과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가난과 결핍의 옛집 속에 있지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옛집에 있지 않다. 어둠의 틈을 열며 행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18-04-12
강은 밤이 오면큰 동굴처럼 바람을 마신다하얗게 바랜 옥양목 한 필어둠 속 도심을 흐르는 강물을 문명이 집어삼키는 욕망의 동굴로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아니, 인간이 가진 욕망의 동굴로 여기며 그것은 하얗게 빛이 바랜 옥양목처럼 부질없음을 깨닫게 해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을 객관화하며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깊은 시심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2018-04-11
북창에 등을 달면별이 보인다, 문경 새재 넘언외길로 걸어온 길바람불어도 곱게 살아야지새재골 구름넘어 ‘소요 산방’애묵향 스며든다새재골 구름넘어 소요산방은 길이 모이고 길이 흩어지는 곳에 있으리라. 옛날 한양으로 과거보러가던 선비들이 넘나들던 새재에서 시인은 희망찬 발걸음 소리와 실패와 좌절의 그늘 속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8-04-10
한 토리 따스한 해살 무질되요한식 훨씬 지나 푸르싱싱한 저 대동강물답을 쓰며 바라보고 있소웃동 훨훨 벗고 헤엄이라도 치고 싶은바로 저 강물이문배술 제조에 필요할 줄이야얼마나 놀랬는지 그러문서 기뻤는지호상의 유대 위하야 기꺼이 보내리요문배술을 빚는데 필요한 대동강물을 북한동포가 보내고 빚은 술을 북한으로 보낸다는 단순한 얘기지만 시인은 민족의 화합과 동질성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시에 담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강물은 편향된 어떤 사상이나 이념도 모두 담아낼 수 있다는 시인정신이 깊이 녹아있는 작품이다. 시인의 가슴 속에 흐르는 절실한 시대정신을 읽는다. 시인
2018-04-09
먼 데산들이 겹쳐 앉은 봄날이다길 저쪽은함부로 가지 못할 곳 신생아실이쪽 서늘한 눈길거기까지 닿을까 미안하다그림 속 길은막다른 병원복도와 맞닿아 있다액자밖엔 눈이 오고 있다너무 늦게 도착했다고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고타이르는 동안 오후의 진통제가 처방되었다나른한 잠의 시간 경계에서침대 모서리를 짚고 일어서 통점탱자나무처럼 혼자 독해지고알약 삼키고 맨발로탱자나무 아래까지 당도하였을 때한 떼의 새가 날아가고한 떼의 흰 꽃이 가시 사이로 앉았다시인은 병원 회랑을 걸으며 그림 한 장을 보고 있다. 그림 속의 길은 막혀있고 시인이 건너고 걸어가는 팍팍한 생의 길도 끊겨있다고 여기고 있다. 강단지게 마음먹고 걸어가야 할 삶의 길이 우리 앞에도 놓여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생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나는 작품이다.시인
2018-04-06
봄이 가려운가 보다엉킨 산수유들이몸을 연신 하늘에 문대고 있다노란 꽃망울이 툭툭 터져 물처럼 번진다번져서 따스히 적셔지는 하늘일 수 있다면심지만 닿아도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불꽃일 수 있다면나는 너무 쉽게 꽃나무 곁을 지나왔다시간이 꽃보다 늘 빨랐다오랫동안 한 곳을 보지 않으면그리고 그 한 곳을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시가 꽃이 되지 못한다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가 더 많이그 그늘이 더 깊어고향 묵호를 떠나 빛고을 광주에서 생활해온 시인은 1980년 5월의 빼앗긴 봄을 본 것이다. 5월에 피어오르는 꽃의 불꽃은 순수한 생명의 욕구와 상승의 의지로 타오르며 인간을 환희에 젖게 하지만 시인이 본 것은 잔혹하게 피에 젖은 오월이었다. 암담한 그늘 속에 피는 오월의 꽃을 본 것이다. 해마다 오월이면 우리들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짓붉은 상처의 아픈 꽃이 있다.시인
2018-04-05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라면나지막하게라도 꽃을 피우겠습니다꽃잎을 달고 향기도 풍기겠습니다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세상에는제 이름을 달지 못하는 꽃도 많습니다토담 위라고 불만이 있을 리 없지요몸을 세워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하고화려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갑니다납작하게 엎드려 그리 근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꽃을 피우지만 세상 한 쪽을 아름답게 칠하는 채송화를 바라보며 시인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 화려하거나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가만히 세상을 아름답고 따스하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낮고 볼품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변두리에는 오롯이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8-04-04
공룡들과 함께아아, 입 벌리고 마시면내 마음마저 옥토가 되던백악기의 빗방울들이 살아 있다고공룡 발자국들과 함께 발견되었다고아, 나는누구가 알리이렇게 오래선연히 살아 있는 것누구가 우연히 발견해주리백악기의 공룡이 살다간 흔적이 선명한 화석을 보며 시인은 그 때 내린 빗방울이 화석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이른다. 무변광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가는 자신의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깊은 성찰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아옹다옹 100년도 못 살고 가는 우리네 인생은 빗방울처럼 사소한 존재일 따름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시인
2018-04-03
아침에 눈을 뜨니마당에 웬 물고기 떼들이 가득하다조것들이 조것들이왜 이 마당엘 올라와지느러미를 파닥거리며 놀고 있는가아침 햇살에 빛나는 비늘들이 싱그럽다내 인생의 뜰엔풀꽃도 아닌, 잡풀도 아닌, 낙엽도 아닌우물가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 지난 바람도 아닌물고기 떼들이 몰려와길을 물을 때가 있다시인은 아침 마당에 물고기 떼가 가득 노닐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자신에게 길을 물으며 생의 깊은 성찰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겸허한 시인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시인
2018-04-02
선각자들은 안다 그는 초당에만 있지는 않다이 추운 형산 뱃머리에도 있고한겨울 견뎌 낸 동백처럼붉게 꽃피워 내는나라사랑에도 있다유배18년 고독 벗 삼아등잔불아래서 일구어 낸다산4경의 약천이며연못속의 석가산(石暇山)이며적거(謫居)의 진한 고독이여샘터속 바위속에 깊게 판피로세긴 정석(丁石)의 노래눈 쌓여 인적 끊긴 산골새 울음소리 마져 깊이 잠든아 적막한 밤에댓잎의 울음만으로고이 피워 낸 꽃정석이란! 두 글자의 노래씨앗이바로 그 꽃속에 그리움으로 삭아기어코 꽃으로 피어난 이름동백꽃이여짙붉은 동백꽃 속에서 한 많은 역사와 그리움과 고독, 외로움에 붉게 젖은 시간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과 가슴이 깊고 그윽하다. 엄동을 견디며 댓잎의 울음만으로 피워 올린 동백꽃이 가만히 열어가는 새 봄, 눈 시린 연두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빛을 따라가 보는 아침이다. 희망이 크다.시인
2018-03-30
썩은 물만 고여 있는 만(灣)배도 항해를 잊은 지 오래인 듯시궁창에 처박혀 있고 장례를 치룬 듯미처 다 이름을 부르지 못한 잡초만이꺽꺽 쇳소리를 내며 바람에 흔들린다저 포구의 구경꾼들은 폐허를 알아버린 듯하다곰삭는 새우젓 냄새가 마른 똥 냄새를 풍기고깃발이 찢겨진 배가 시커먼 개펄에묻혀만 있을 때 추억의 문장인 소금도 시궁창 물에 섞여자신의 존재를 잃은 채 노란 거품을 문다물의 감옥인 소래, 구경꾼 생의 배경이 되는 개펄엉겅퀴꽃 피는 저녁, 그 꽃의 가시가찔러대는 흉조의 밤, 그곳은 고속도로가협궤열차를 대신하고 중국산 농어가창백한 혀를 대신하는 8월이다어족의 무덤 소래에별들이 썩어 되비쳐 올라간다인천만 팔미도가 저만치 바라보이는 곳에 소래포구가 있다. 포구의 썩은 물이 고여 부패의 냄새가 풍기고 폐허와 상실과 소멸의 정서가 시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본다. 가시를 품고 보랏빛 꽃을 피우는 엉겅퀴꽃이 피는 저녁은 죽음과 폐허와 몰락의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시인
2018-03-29
허드레허드레빨랫줄을높이 들어올리는가을 하늘늦비올까말까가을걷이들판을도르래도르래 소리로날아오른 기러기떼허드래빨랫줄에빨래를 걷어가는분주한 저물녘먼어머니간명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시다. 적막강산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시 가득 묻어남을 느낀다. 높이 나는 기러기떼와 허공에 펄럭이는 흰 빨래가 자아내는 그림 속으로 그리운 어머니 생각까지 곁들여져 감동의 잔잔한 파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시인
2018-03-28
산을 넘었습니다들로 오시지요, 할머니까마귀떼 속으로요할머니께서 처녀적 꿈 애기를 하신 그 가을날 한 마리씩 산 넘어간까마귀들 여기 다 모여 있네요. 발갛게 달아오른 지평선, 실개울 타다남은 하얀 실연기 자국, 그 아래 잠겨가는 마을에서 해를 품고 살고싶다 하셨지요? 들 가운데 까마귀떼 내리는 곳이 그 마을 아니겠나하셨지요?까마귀떼는 마을과 거리를 두고들도 넘어가네요까마귀 날개 밑에할머니의 지평선 마을이 깃들어 있었네요들로 오시지요 할머니다시 날아오는 까마귀떼 속으로요할머니의 들과 지평선 마을은 모성으로서의 대지를 의미한다. 까마귀떼의 등장은 특별한 상징성을 획득하지 못하지만 할머니의 들은 누구나 회귀하고 싶어하는 모성의 공간이며 생명의 공간이다. 시인의 따스하고 넉넉한 그리움의 목소리를 듣는다.시인
2018-03-27
잔물결 일으키는 고기를 낚아채어망에 넣고호수가 다시 호수가 되도록기다리는 한 사내와귀는 접고 눈은 뜨고그러나 아무것도 보지 않는개 한 마리물가에 앉아 있다사내는 턱을 허공에 박고개는 사내의 그림자에 코를 박고건너편에서 높이로 서 있던 나무는물 속에 와서 깊이로 다시 서 있다담담하고 간명한 풍경을 제시하며 시인은 인간을 그 풍경에서 빼내고 있음을 본다. 인간의 주관적이고 편협한 인식을 배제하고 침묵과 여백이 주도하는 자연스러운 풍경 한 장을 담담히 건네주고 있는 시다.시인
2018-03-26
흔히 한 장의 백지가그 위에 쓰여지는 말보다더 깊고그 가장자리는허공에 닿아 있으므로 가없는무슨 소리를 울려 보내고 있는 때가 많다거기 쓰는 말이그 흰 종이의 숨결을 손상하지 않는다면상품이고허공의 숨결로 숨을 쉰다면명품이다백지의 가장자리가 허공에 닿아있다는 한 줄의 시가 이 시의 중심을 꿰뚫고 있음을 본다. 말을 아껴 써야하는 장르가 시라면 백지가 품고 있는, 허공에 닿아있는 엄청난 침묵의 울림을 시인은 인식한 것이다. 허공의 숨결이라는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봄직한 아침이다.시인
2018-03-23
겨울 이른 아침맑은 공기 속에싸락눈 쏟아지기 시작하자동그마한 흙마당에나보다도 더 작은하나님들이여기저기에서 들떠왔다갔다하시네살구나무들이뿌리를 가지런히하는 소리싸락눈 제일 많이 쌓이는그 그늘모퉁에서 들리네이른 아침 눈 내리는 외딴집 풍경 하나를 건네주고 있다. 참 맑은 공기 속으로 싸르락 싸르락 내리는 평화경이 아닐 수 없다. 싸락눈을 받아주는 흙마당 가에 선 살구나무들이 뿌리를 가지런히 하며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봄을 기다리는 모습을 시인의 정겹고 살가운 눈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18-03-22
어렸을 적 석양녘이었다다스한 참새들의 알을 꼭 한 알만 얻겠다고 가만가만새들이를 타고 올라간 여동생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처마 밑에 막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콩닥거리는 참새들의 알 대신 차고 미끄러운 것이쓰윽 고개를 내밀고 나왔다굵고 긴 구렁이였다어릴 적 초가집 지붕 끝에 손을 넣어 참새를 잡던 아득한 시간들이 있었다. 시인은 그런 추억 속의 시간을 건네며 성장소설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고 있다. 참새를 잡으러 손을 넣은 것은 여동생이다. 그런 행위는 일종의 성적탐색의 성격과 원시사회의 성년식과 관련되는 풍속적, 의례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고 생각된다. 구렁이를 만진 것은 그러한 조숙한 성적탐색에 대한 징벌적 의미를 가진다고 보여진다.시인
2018-03-21
세상은 고요한데 누가 쏘았는지 모를 화살 하나가 책상 위에 떨어져 있다누가 나에게 화살을 쏜 것일까내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화살은 단단하고 검고 작았다새깃털 끝에 촉은 검은 쇠인간의 몸엔 얼마든지 박힐 것 같다나는 화살을 들고 서서 어떤 알지 못할 슬픔에 잠긴다심장에 박히는 닭똥만한 촉이 무서워진다숨이 막히고 심장이 아파왔다혹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장난삼아 하늘로 쏘는 화살이내 책상에 잘못 떨어진 것인지도 몰라!시인이 말하는 화살은 실체로서의 화살이라기 보다 남에게 쏘거나 자기가 맞는 말이나 행동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남을 향해 화살을 날려 상처를 입히거나 반대로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것이 치명적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인의 반성적 자기성찰에 깊이 동의하고 싶은 아침이다.시인
2018-03-20
눈이 내린다 거세게, 내 빰에 부딪치지 않고 그 눈,그 바깥에 네가 있다눈이 내린다 지워질 듯, 도시가 화려하다 그 눈,그 바깥에 네가 있다바깥은 이별보다 가깝다 사랑이여눈은 눈보다 가깝다 육체여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부스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내 몸을 파묻지 않고 그 눈그 바깥에 네가 있다눈이 내린다 말살하듯, 네 육체가 화려하다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정신과 육체라는 이분법적 인식의 틀을 보여주는 이 시에서 시인은 육체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정지되고 갇혀있는 사물로서의 자동차는 육체를 의미하고 흩날리며 움직이는 눈은 정신을 뜻하고 있다. 이별과 사랑을 육체로 본다면 열정과 긴장과 아픔과 상처는 그것을 감싸는 정신이기에 시인은 네가 늘 그 바깥에 있음을 말하며 그 둘의 일치를 염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시인
2018-03-19
잠 이루지 못하는 밤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평생을 시를 쓰며 울다가 간 시인 박용래. 이 시도 가만히 음미해보면 그의 눈물이 보인다. 사람들이 다 떠난 적막한 고향마을 밤 깊도록 잠 못 들고 있을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 눈 내리는 고향마을의 모습을 그린 슬프고도 애잔한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시다.시인
2018-03-16
봄이 와 범부채꽃이 핀다그 언저리 조금씩 그늘이 깔린다알리지 말라어떤 새가 귀가 없다바람은 눈치도 멀었다 되돌아와서한 번 다시 흔들어 준다범부채꽃이 만든(아무도 못 달래는)돌아앉은 오목한 그늘 한 뼘점점점 땅을 우빈다봄빛이 밝고 따사로운 둑 위에 핀 범부채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 마음에 선명하게 비쳐든 것은 그늘이다. 바람이 흔드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의 그늘이고 땅을 우비는 그늘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섬세하고 투명한 눈을 본다. 모든 아름다움 뒤에는 씁쓸한 그늘이 있는 법이다.시인
2018-03-15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누운 제일 큰 자라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 제일 큰 자라 등판 위에그 다음 큰 자라, 제일 높은 돌 위에 올라가제일 큰 자라 몸통에 몸을 기댄 세 번째 자라더 높은 돌멩이를 갖다 놓으면제일 큰 자라가 그쪽으로 가서 올라타고두 번째 자라가 올라가서 제일 큰 자라 등판 위에 올라타고세 번째 자라가 올라가서제일 큰 자라 몸통에 몸을 기대겠지, 웃기는 자라웃기는 어항재미난 어항 속 풍경 하나를 보여주며 시인이 암시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다. 알레고리라는 시의 기법이다. 첫 번째 자라를 올라타거나 곁에 서는 두 번째 세 번째 더 큰 자라는 인간 세상의 권력이랄까 계층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어항 속 자라들의 모습이 우리 사회에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어서 `나라`라고 말했는지 모른다.시인
2018-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