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새벽, 자두밭을 둘러보았다. 과수원 안쪽, 지난해 산불을 이겨내고 늠름하게 서 있는 소나무 두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그 곁에 어머니의 유해를 모셨다. 셋째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언제든 지켜보실 수 있는 자리, 어머님이 기꺼이 마음 두셨을 법한 그곳이 이제 어머님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요양원에서 조심스럽게 며칠을 보내신 뒤, 4월 8일. 어머님은 체온이 38.5도를 넘어서며 119구급차를 타고 안동병원으로 옮겨지셨다. 응급실에서 어머님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고 호흡기에 의지해 가쁜 숨을 이어가고 계셨다. “어머님.”하고 불러보니, 알아보신 듯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치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 병실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뇌혈관은 혈전에 막혀 온몸으로 온기를 보내지 못했고, 신장과 폐마저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의사는 우리를 불러 위급 상황에 대비한 마음의 준비와 연명치료에 관해 설명했다. 어머님은 영양공급을 위해 목 아래에 튜브를 삽입한 채 그날 저녁 중환자실로 옮겨지셨다. 그때부터 면회는 하루 두 사람, 각 5분으로 제한되었다. 그날 밤늦게, 아주버님에게 혈액투석이 시작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4월 10일, 짧은 5분의 면회 시간. 투석 덕분인지 어머님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손을 잡으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어머님은 힘겹게 눈을 뜨고 나를 찬찬히 바라보며 무언가 말씀하셨다. 그러나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작은 소리는 끝내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머님,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
어머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셨다. 그것이 어머님과 나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어 남편이 5분간 어머님을 만났다.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님께서 웃는 얼굴로 따뜻하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고 했다. 눈을 조금 더 떠보시라 하며 사진도 몇 장 남겼다.
11일에는 큰아가씨가, 12일에는 남편이, 월요일 낮에는 남편과 아주버님이 차례로 면회했다. 비닐 방역복을 입고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쳤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어머님은 끝까지 무언가를 전하려 애쓰셨다.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남편은 며칠 사이 달라진 어머님의 모습을 다시 사진으로 남겼다.
낮에 면회를 다녀온 그 날 저녁,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사이 어머님은 이미 숨을 거두셨다. 우리는 마지막 모습을 함께하지 못했다. 4월 8일 입원하여 4월 13일 저녁 8시, 어머님은 끝내 말을 멈추셨다. 마지막은 길지 않았으나, 그 안에는 한 생의 시간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었다.
열한 살에 가족을 잃고도 살아낸 시간, 타인의 집에서 견뎌낸 세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을 키워낸 날들. 요양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셨던 마음까지, 어머님은 마지막까지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계셨다. 어디에 머물 것인지, 누구 곁에 있을 것인지, 병원이 아닌 집, 낯선 침대가 아닌 익숙한 방, 그리고 따뜻한 가족의 손. 그 모든 선택의 끝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삶이란 어디에서 끝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손을 잡고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봄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사과밭은 여전히 손길을 기다리고, 마당의 진달래는 조금씩 꽃잎을 떨군다. 그러나 나의 봄은 이전과 같지 않다.
어머님은 유언대로 화장되어 자두밭이 내려다보이는 산, 큰 소나무 곁에 모셔졌다. 남편이 과수원에서 일할 때면 언제든 아들을 내려다보실 수 있는 자리다. 이제 밤마다 이어지던 모자의 이야기는, 자두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에 섞여 흐를 것이다.
/손정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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