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실은 열차가 오월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 대낮, 포항철길숲을 걸어간다.
올핸 웬일인지 길게 줄지어 피었던 이팝꽃이 벌써 거의 다 졌다. 저 앞쪽에서 아직도 피어있는 이팝꽃이 빨리 오라고 손짓한다. 떨어져서 보아도 뭔가 다르다. 하얀 쌀밥 같던 모습이 사라진 실루엣이다. 조금 빨리 걸어 이팝꽃 앞에 다다랐다.
꽃이 누른색으로 변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작년까진 먼 거리의 가로수 이팝나무만 보고 다녔다. 때문에, 꽃 질 무렵의 이팝꽃을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하얀 쌀밥이 오월 따가운 햇볕에 눌어붙었는지 누렇다. 당연히 누룽지가 떠 올라야 할 텐데, 내 마음 모니터엔 다른 게 비친다.
그랬다. ‘꽁닥보리밥’···.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 고향에선 꽁보리밥을 이렇게 불렀다. 춘궁기.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보리가 다 익기 전에 양식이 떨어져 배고팠던 때. 산골 남정네들은 얼마간의 덜 여문 풋보리를 베어와 간이 타작을 했다. 저녁이면, 동네 아낙들은 밤이 이슥토록 디딜방아에 풋보리를 찧었다. 며칠간 가족들의 일용할 양식은 이렇게 마련되었다.
사실, 풋보리 꽁닥보리밥은 보통 꽁보리밥보다 훨씬 거칠었다. 호야 등불 밑에서 품앗이 디딜방아로 찧어낸 풋 보리쌀이 꺼끌하기 때문이다. 밥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은 풋 보리밥이 입안에서 까끄럽다고 불평하면서도 잘도 퍼먹었다. 보리깜부기로 허기를 달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으니까.
이렇게 보릿고개를 넘어내면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조국 근대화의 목표를 향해 온 국민과 정부는 한 몸 되어 바지런히 일했다. 하얀 쌀밥이 목적이라면, 누런 꽁보리밥은 극복해야 할 현실이자 과정이었다. 6.25 한국전쟁 직후, 한국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게다가 자원도 최빈국이었으니, 절망적 나라 상황이 보릿고개를 만들었다.
왜 내 눈엔 누런 이팝꽃이 노릇노릇한 쌀밥 누룽지가 아니라, 풋보리 꽁닥보리밥으로 보였을까. 이팝꽃이 배고픔을 달래는 자기 보상심리의 상징물이라면, 풋 꽁보리밥은 배고픔을 겪은 삶의 실물이자 팩트이며 처절한 체험의 역사였다. 때문에, 잠재의식이 꽁닥보리밥을 불렀으리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보릿고개 가난했던 시절에도 산골 사람들은 공짜를 탐하거나 넘보며 살지 않았다. 필요한 건 품앗이를 하여서라도 값을 치르고 나누며 살았다. 대다수 국민도 그렇게 살아왔음을 후일 타지에 살면서 체험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잘살기 운동에서 자연스레 체질화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수십 년을 기업이 피땀 흘려가며 이루어낸 성과를 마치 노조나 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얼빠졌다. 기업의 성과는 급여, 배당, 세금, 복지 등으로 사회에 환원된다. 주식을 사면 성과에 또 참여할 일을, 청와대 관료도 나서서 ‘국민배당금 구상’이니 하며 ‘제 살 뜯어 먹기’에 나설 지경에 이른 게 우리 사회다.
“제 살 뜯어 먹는 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지는 이팝꽃이 던지는 물음이다.
/강길수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