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랜드마크는 도시의 의지다

나는 ‘랜드마크’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느낀다. 도시는 랜드마크를 통해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기대가 너무 쉽게 정치적 수사로 소비되는 장면 또한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랜드마크의 영향력을 부정하긴 어렵다. 도시재생에서 랜드마크의 효용을 말할 때 흔히 ‘빌바오 효과’가 언급된다. 철강·조선·항만물류에 의존하던 스페인의 산업도시 빌바오는 1970~80년대 산업구조 변화로 실업과 도시 쇠퇴가 심화된, 이른바 망해가던 공업도시였다. 그러나 1997년 강변의 낡은 항만 부지에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 빌바오가 들어서며 도시 이미지는 관광과 문화로 전환되었고, 빌바오는 ‘문화로 재탄생한 도시’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나의 랜드마크가 만들어낸 이 강력한 파급력은 이후 수많은 도시에서 랜드마크 프로젝트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작동해왔다. 하지만 빌바오가 남긴 진짜 교훈은 “유명한 건물 하나면 된다”가 아니다. 랜드마크는 해답이 아니라 촉매이며, 촉매가 작동하려면 접근성·동선·주변 공간·프로그램·운영까지 도시 전체의 준비가 필요하다. 외형만 모방한 랜드마크가 반복해서 실패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동대문 DDP설계로 잘 알려진 런던의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에서 12년 동안 일하며 여러 나라의 랜드마크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형태’지만, 실제로 더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은 도시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였다. 랜드마크는 멋진 조형물을 넘어, 사람들이 실제로 걷고 머물고 다시 찾게 만드는 경험의 장치여야 한다. 운영이 빈약하면 사진 배경으로 끝나고, 주변과 단절되면 섬이 되며, 도시의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상징은 금방 낡는다. 최근 포항시가 영일대해수욕장 공영주차장 부지에 노보텔 브랜드의 26층 규모 특급호텔을 건립해 체류형 관광과 MICE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본궤도에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숙박시설을 넘어, 포항이 어떤 도시로 전환하려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관광도시는 “좋은 호텔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랜드마크가 되려면 “특급”이라는 등급이나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라, 포항만의 다름과 가치를 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누가 이 건축을 설계했는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가, 이 프로젝트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건축가의 정체성과 설계의 방향, 공공과 민간이 어떤 비전을 공유했는지까지 모두 도시 브랜딩의 일부가 된다. 결국 사람들은 호텔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호텔이 대표하는 포항의 세계관을 경험하러 온다. 랜드마크는 차이와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물리적 증거여야한다. 그때 비로소 이 프로젝트는 미래 세대를 위한 유산이 될 수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건물이 아니라, 여기만의 건물이어야 한다. 결국 랜드마크는 도시의 자존심이 아니라 도시의 의지를 스스로 공간과 형태로 증명한다. 포항의 새로운 특급호텔이 “건물 하나”가 아니라, “도시의 시스템”을 바꾸는 촉매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2-01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실전편 - AI 답변을 내 손으로 다듬는 법

지난주에는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네 가지 기법을 알아봤다. 예시로 가르치기, 단계별로 생각하게 만들기, 역할 맡기기, 제약 조건 명확히 하기 등 이들, 기법들로 AI의 답변 품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이번 주에는 나머지 여섯 가지 기법을 마저 익혀,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기법 활용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섯 번째 기법: 출력 형식 구조화(Output Format Structuring) 인공지능(AI)에게 “어떤 형태로 답해달라”고 프롬프트를 제시해야 결과물의 활용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을 확인해 보자. 중소기업 인사팀에서 일하는 이 대리는 채용 공고문을 작성할 때 AI를 자주 활용한다. 처음엔 “마케팅 담당자 채용 공고 써 줘”라고 물었다. AI는 긴 문장으로 자격 요건, 우대 사항, 복리후생을 나열했는데, 채용 사이트에 올리기엔 형식이 맞지 않았다. 이 대리는 채용 공고 형식을 지정해서 다시 물었다. “마케팅 담당자 채용 공고를 다음 형식으로 작성해 줘. [회사 소개]: 2~3문장 [담당 업무]: 글머리 기호로 5개 [자격 요건]: 필수/우대 구분하여 각 3개씩 [근무 조건]: 표 형식(항목, 내용) [지원 방법]: 1문장“ 결과는 바로 채용 사이트에 복사해서 붙여 넣을 수 있는 형태로 나왔다. 표, 글머리 기호, 섹션(Section) 구분이 명확해 가독성도 좋아짐을 확인 할 수 있다. 출력 형식 지정은 보고서, 이메일, 기획안 등 정해진 양식이 있는 문서 작업에서 특히 유용하니 독자분들이 활용해 보시기를 권한다. 여섯 번째 기법: 반복 개선(Iterative Refinement) 한 번에 완벽한 답을 기대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점점 다듬어 가는 방법이다. 결혼식 축사를 준비하던 어느 신랑 친구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처음 “친구 결혼식 축사 써줘”라고 물었더니 AI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로 시작하는 천편일률적인 축사를 내놓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AI와 질문과 대화를 이어갔다. “너무 형식적이야. 우리가 대학 때 같이 밤새 과제를 했던 에피소드를 넣어줘.” AI가 수정했다. “근데 좀 길어. 3분 안에 끝낼 수 있게 줄여줘.” 다시 수정됐다. “마지막 문장이 뻔해. 신랑 별명인 ‘곰돌이’를 활용한 재치 있는 마무리로 바꿔줘.“ 세 번의 피드백 끝에 박씨만의 개성이 담긴 축사가 완성됐다. 반복 개선의 핵심은 ‘무엇이 아쉬운지’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시 써줘”보다 “톤을 더 유머러스하게”, “분량을 절반으로”, “이 부분을 더 자세히”처럼 방향을 제시하면 AI는 빠르게 개선해 나간다. 일곱 번째 기법: 생각 과정 보여주기(Think Step by Step) “Think Step by Step”이라는 간단한 문구를 추가하면 AI의 추론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특히 수학 혹은 논리적 분석이 필요한 경우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풀이 과정을 설명할 때 AI를 보조 도구로 쓴다고 가정하자. “한 상자에 사과 12개가 들어있고, 5상자에서 매일 3개씩 일주일간 판매하면 남는 사과는?” 이 문제를 AI에게 그냥 물으면 그냥 39개하고 답만 나온다. 하지만 “Think Step by Step으로 풀어줘”라고 하면 AI는 이렇게 답한다. “1단계: 전체 사과 수 = 12개 × 5상자 = 60개. 2단계: 일주일 판매량 = 3개 × 7일 = 21개. 3단계: 남은 사과 = 60개 - 21개 = 39개.“ 이 기법은 AI가 중간 과정에서 실수하는 것을 줄여준다. 복잡한 계산, 논리 문제, 의사결정 분석 등에서 “단계별로 생각해 줘”라는 한 마디가 정확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AI 기능을 함께 활용한다면, 수학 선생은 학생들에게 수학 문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풀어가는 멋진 교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번째 기법: 컨텍스트 레이어링(Context Layering) 대화가 길어질수록 AI는 앞서 나눈 대화의 맥락을 활용한다. 이를 전략적으로 쌓아가면 점점 정교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소설 쓰기에 도전 중인 어느 대학생 사례를 확인해 보자. 첫 대화에서 학생은 이 소설의 시대 상황을 설명했다. “2050년 한국, 기후변화로 여름이 6개월이 된 세상이야.” 두 번째 대화에서 주인공을 설정했다. “주인공은 28세 기상청 연구원 서연이야. 낙천적이지만 가족을 기후 재난으로 잃은 트라우마가 있어.” 세 번째에서 갈등 구조를 잡았다. “서연이 발견한 데이터가 정부의 은폐와 관련 있다는 걸 알게 돼.” 이렇게 맥락(Context)을 쌓아놓고 “1장 오프닝 써줘”라고 하면, AI는 앞서 설정한 시대 상황, 캐릭터, 갈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글을 쓸 것이다. 소설뿐만이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때 이 방법을 활용해 보기를 권한다. AI와 대화를 나누며 맥락을 차곡차곡 쌓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홉 번째 기법: 창의성 조절하기(Temperature Concept) AI에게 “창의적으로” 또는 “정확하게”라고 요청하면 답변 스타일이 달라진다. 이것이 Temperature 개념의 실용적 활용이다. 어느 광고 카피라이터가 제품에 대해 두 가지 버전을 받아보는 내용을 살펴보자. “친환경 텀블러 광고 문구를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써줘.” 결과: “스테인리스 304 소재, 12시간 보온, 500ml 용량의 친환경 텀블러입니다.” 같은 제품에 “창의적이고 파격적으로 써줘”라고 하면? “지구가 당신의 커피잔을 기억합니다. 매일 아침, 작은 혁명이 시작됩니다.” 전자는 제품 상세 페이지에, 후자는 SNS 광고에 적합하다. 정보 전달이 중요한 작업에는 “사실에 기반해서”, “정확하게”를, 아이디어가 필요한 작업에는 “자유롭게”, “창의적으로”를 붙이면 원하는 결과에 가깝게 AI가 결과를 제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열 번째 기법: 메타 프롬프팅(Meta Prompting) “이 질문을 어떻게 물어야 좋은 답을 얻을 수 있을까?”를 AI에게 묻는 방법이다. 질문하는 법을 질문하는 것이다. 창업을 준비 중인 한 젊은이는 사업계획서 작성이 막막했다. “사업계획서 써줘”라고 바로 물어봐야 너무 뻔한 답이 나올 거라 예상한 젊은이는 먼저 이렇게 물었다. “좋은 사업계획서를 AI에게 요청하려면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해? 내가 준비해야 할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 줘.“ AI는 사업계획서 준비에 적합한 프롬프트를 아래와 같이 만들어 줄 것이다. “1. 해결하려는 문제와 핵심고객 2. 기존 경쟁사 대비 차별점 3. 수익 모델과 가격 전략 4. 초기 자금 규모와 사용 계획 5. 창업자의 관련 경험이나 강점 등“ 이 자료를 준비한 젊은이는 리스트에 맞춰 정보를 정리한 후 다시 질문했다. 그 결과는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업계획서였다. 메타 프롬프팅은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를 때’ 특히 유용하다. 어떻게 보면, AI를 접하는 독자들이 초급이든 고급이든 이 방식만 알고 있어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기법들의 조합(Combining Techniques) 지난주 네 가지와 이번 주 여섯 가지, 모두 열 가지 기법을 알아봤다. 중요한 건 이것들을 상황에 맞게 조합해서 활용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업 제안서를 작성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은 VC 투자 심사역 출신 컨설턴트야(역할). 다음 형식으로 작성해 줘: 요약-문제정의-해결 방안-시장 규모-경쟁분석-재무계획-팀 구성 계획 순서로(출력 형식). 실현성 있는 숫자만 사용하고 과장된 표현은 배제해 줘(제약). 먼저 이 사업 아이템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고(Think Step by Step), SWOT 분석도 부탁해 그 분석을 바탕으로 제안서를 작성해 줘.“ 한 문장에 여러 기법이 녹아있다. 이것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진짜 힘이다. 지난주와 이번 주에 걸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의 핵심 기법 열 가지를 모두 다뤘다. “AI에게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셈이다. 다음 주에는 AI기술과 방대한 데이터의 활용으로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발생하는 AI의 거짓말 현상, 이른바 ‘환각(Hallucination)’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AI를 믿고 활용하되, 확인하는 법을 알고 있으면 유용할 것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2-01

신발장의 경제

몇 년 전부터 발 앞부분에 통증이 가끔 왔다. 앞부리가 조금 뾰족한 신발을 신으면 증상이 더 심해졌다. 걷다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에 한참을 멈춰 선 적도 있었다. 앞코가 좁은 신발은 하나씩 신기 편한 것으로 대체되어 신발장 안은 대부분 운동화가 차지하고 있다. 원피스를 입고 나갈 생각이어서 구두를 신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색의 스팽클이 촘촘히 박힌 흰색 구두가 눈에 들어온다. 모양이 예뻐서 버리지 못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 옆 한구석에 몸통을 덩굴로 묶어 놓은 운동화가 놓여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조금은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인들과 가까운 산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자주 신지는 않았지만 버리기 아까워 가지고 있던 운동화가 있었다. 그것을 신고 가기로 했다. 출발은 산뜻했다. 산길을 즐겁게 대화하며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발밑의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가벼워진 듯 했다. 모처럼 산에 온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걸었다. 뒤에서 오던 분이 신발 밑창 좀 보세요 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아뿔사. 운동화의 밑창이 양쪽 다 벌어진 것이었다. 부끄러움은 다음 일이고 당장의 조치가 필요했다. 주변에 인가가 없는 산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한 분이 근처에서 덩굴을 주워 왔다. 단단해서 묶으면 괜찮을 것이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운동화를 묶었다. 생각보다 편했고 매듭도 풀리지 않아서 하루 종일 그것을 신고 다녔다. 때때로 우리 사이의 화제가 사라졌을 때 그 이야기로 웃을 수 있었다. 그 운동화를 버리지 않고 신발장에 둔 것이다. 눈길을 보내면서도 흰색 구두를 집어 들었다. 그 날 행사에 참석한 내내 수시로 통증이 나타나서 집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구두를 벗어 던지고 맨발로 걷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경제학에 매몰 비용의 오류라는 말이 있다. 이미 지출해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이 매몰 비용이다. 이것은 어떤 선택을 해도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들어간 돈이나 쓴 시간이 아까워 손해인 줄 알면서도 비합리적으로 계속 붙들고 있는 판단 실수를 매몰 비용의 오류라고 한다. 중도에 단념하지 못한 경험이 제법 있다. 끝까지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런 오류는 일상의 가벼운 문제에서도 나타나지만 크게는 기업이나 국책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손실을 피하고 싶은 성향과 함께 자기 합리화나 책임 회피와 같은 마음들이 있다고 한다. 미래의 수익과 비용을 생각해서 과감한 결정을 해야 함에도 손실로 인한 고통을 더 크게 느껴 그런 오류를 범한다고 한다. 몸통이 덩굴로 묶인 운동화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깝다거나 버리기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을 보면서 보냈던 시간이나 좋은 기억 때문에 필요 없고 사용할 일이 적은 것들을 붙들고 있지 말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마음을 순간 잊어버리고 옷에 어울리는 구두에 혹한 것이었다. 구두를 신고 나가면 발에 통증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어리석음을 저지른 것이었다. 늘 후회는 일을 당하고 나서야 나타나는 후발 주자이다. 매몰 비용 때문에 현재나 미래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포기를 하지 못했던 나를 되돌아본다. 추억이라는 것, 함께 한 시간이라는 것은 실물로 붙들고 지키려고 할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를 지키는 게 아니라 현재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더구나 잊지 않기 위해 버려야 할 신발 하나를 신발장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지른 같은 실수. 작은 것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때로는 버려야 하는 것에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신발장을 열었다. 아직도 아까워 버리지 못한 신발들이 눈에 띄었다. 한 번도 제대로 신지 못한 샛노란 구두 한 켤레가 나를 빤히 보는 듯 하다. 큰 종이봉투를 가져와 신지 않을 신발들을 담았다. 신발을 담는 손길이 부쩍 바빠진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2-01

2026년을 ‘리셋 포항’의 원년으로 삼자

지난해부터 지역의 성장한계를 절감하며 ‘리셋 포항’(Reset Pohang)을 꾸준하게 주장해 왔다. ‘리셋 포항’은 산업 구조의 편중, 청년 유출과 인구 감소 등 복합적 문제에 직면한 포항의 도시 구조·산업·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짜자는 것이다. ‘리셋 포항’은 과거의 성과를 부정한다는 정책이 아니라 포항이 가진 소중한 자산들을 재설계·재배치·재조합해 지속 가능한 미래 100년을 열어나가는 성장 전략이며, 선택이 아니라 포항의 생존과 지속 성장을 위한 필수 추진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 ‘리셋 포항’인가. 이유는 이렇다. 먼저 산업 구조의 취약성이다. 포항은 지금까지 포스코라는 강력한 엔진에 의존해 오면서 산업 다각화는 미미했고, 신산업 유입·육성도 제한적이었다. 이는 지금의 산업 구조로는 미래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다음은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이다. 청년층은 수도권과 대도시 등으로 떠나고, 고령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인구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활력을 저하하고, 소비·문화·교육 등에도 동반 약화를 촉진한다. 이는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점점 ‘조용한 도시’로 전락한다는 신호일 것이다. 그리고 도시 이미지의 고착을 들 수 있다. 포항은 여전히 산업 도시 이미지에다 일자리가 있어도 살고 싶은 곳은 아니라는 인식이 많은 편이다. 이는 도시의 이미지와 브랜드를 바꾸지 않으면 사람도, 기업도 유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지진과 홍수 등을 경험하면서 ‘안전한 도시인가’라는 의문을 들게 한다. 이는 도시 설계와 생활 시스템을 다시 짜야 한다는 주문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있듯이 ‘리셋 포항’은 지금이 바로 적기가 아닐 수 없다. 포항은 지금, 이대로 계속 정체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변화와 성장의 길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갈림길에 있다. 한 도시가 쇠퇴를 시작하면 이를 되살리는데 몇 배의 비용과 시간이 든다. 포항은 회복 가능한 마지막 지점에 있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래서 2026년을 ‘리셋 포항’의 원년으로 삼자고 제안해 본다. 이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산업 구조 리셋이 필요하다. 산업 구조를 철강 중심에서 에너지·바이오·신약·신소재 등 신산업으로 확장하고, 기존산업과 신산업 연결형 클러스터 조성도 필요할 것이다. 다음은 도시 공간 리셋이다. 산업과 차량 중심 공간에서 생활·문화·보행 중심 공간, 노후화된 산업·항만·도심 공간의 단계적 재구성이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년 중심 도시로의 전환이다. 이제는 청년을 정책 ‘대상’이 아닌 기획·운영의 주체로 참여시켜야 하고, 더불어 도시 이미지 리셋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도시를 리셋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중점적으로 실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시장 직속의 전담 조직은 물론 전 부서가 참여하는 통합 기획 기능 구축도 요구될 것이다. 이에 더해 시민 참여형 포항 리셋 프로그램 운영 등 행정 주도에서 시민 협력형 정책 구조 전환도 과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리셋 포항’은 △지속 가능한 산업·환경 구조 확보 △청년 유입 및 정착 기반 마련 △도시 활력 및 지역 경제 회복 △지역의 중장기 도시 경쟁력 강화 등의 효과가 기대되는 미래 성장 전략이 아닐 수 없다. 2026년이 리셋 포항의 원년이 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충운 환동해연구원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2-01

지방선거 실패하면 현 지도부 책임이다

상식이 무너지는 시대가 있다. 1980년대 신군부는 야당마저 직접 만들었다. 야당이 5공화국 정권의 ‘2중대’(민한당), ‘3중대’(국민당)라고 불렸다. 양 김 씨(김영삼·김대중)가 신민당을 만들어 돌풍을 일으키자, 안기부(현 국정원)가 공작으로 내분을 일으켰다. 양 김 세력은 집단 탈당해 다시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안기부가 사주한 깡패 수백 명이 각목을 휘두르며 방해했다. ‘용팔이’ 사건이다. 한국 정치에서 각목이 이게 처음은 아니다. 76년 신민당 전당대회도 당권파와 비주류연합이 ‘각목대회’로 치렀다. 자유당 시절에는 이정재 같은 정치 깡패들이 설쳤다. 따지고 보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깡패 전성시대다. 무신정권 100년간 칼을 든 무리가 국가의 법 위에 군림했다. 무뢰배들이 길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공공재물을 훔치기도 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권력자들이 이런 불량배들을 사병으로 부렸다. 몽골 침략기에도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역사는 반복된다. 무뢰배 시대가 역사 이야기로 사라진 것 같지 않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한동훈 전 대표를 제명했다. 당원 게시판에서 가족 명의로 윤석열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는 이유다. 강성 우파는 한 전 대표를 ‘배신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비상계엄을 막고, 윤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는 이유다. 장 대표도 대표 경선 때 “당론을 어기면서까지 탄핵에 찬성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윤석열 대통령이 아니라 이재명 대통령이 서울구치소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는 탄핵을 막아내지 못했다. 국민이 만들어준 정권을 2번 연속 지켜내지 못했다”라고 사과했다. 정권을 빼앗긴 책임이 비상계엄을 한 윤 전 대통령이 아니라, 탄핵에 동조한 사람들에게 있다고 지목한 셈이다. 장 대표는 ‘윤 어게인’ 세력을 업고 대표가 됐다. 그들에게 빚을 졌다. 한동훈 전 대표를 쳐야 하는 빚이다. 향후 정치 행보에서 강력한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장 대표는 정치 경험이 짧다. 하지만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쳐야 권력을 잡는다고 민주당에서 배웠다. 지난 총선 때 이재명 대통령은 비(이재)명계 인사들을 가차 없이 ‘학살’했다. 컷오프(공천 배제) 하거나, 터무니없이 불리한 핸디캡을 씌워 경선하게 했다. 과거 ‘각목 전당대회’가 왜 벌어졌겠는가. 거대 양당 외에는 살아남기 어렵다. 사표(死票)를 던지지 않으려는 투표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제3당으로 성공한 것은 지역 기반이 튼튼한 3김 씨 정도나 가능했다. 더구나 신당을 만들어 보수표만 분산시키면, 선거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안아야 한다. 꼼짝없이고사할 처지다. 그러나 민주당과 큰 차이가 있다. 지지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없다. 대중의 여론은 성난 파도와 같다. 통제력을 잃고, 얹혀가면 뒤집힐 수 있다. 이 대통령은 극성 지지 세력인 ‘개딸’을 끌고 갔다. 그러나 장 대표는 강경 목소리에 끌려다니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지 세력을 확산해 왔다. 자기가 만든 명분으로 지지 세력을 설득하고, 확산했다. 그 논리가 옳건 그르건, 지지 세력을 늘려가는 바탕이 됐다. 그러나 장 대표는 스스로 해제 투표에 참여한 비상계엄과 탄핵 반대라는 논리적 모순 속에 갇혔다. 더구나 ‘윤 어게인’은 확산 가능성이 없다. 강경 보수 세력으로 스스로 고립해 간다. 선거가 넉 달 앞이다.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 트럼프의 위협 등 집권 세력을 공격할 거리가 많았지만, 국민의힘은 모두 놓쳤다. 당내 싸움하느라 대여 투쟁은 묻어버렸다. 지지율도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다. 장 대표의 단식도 한 전 대표를 치기 위한 정지 작업이라는 게 확인됐다. 시작할 때 내건 특검 요구는 흔적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를 지면 장 대표가 책임질 수밖에 없다. 윤 전 대통령은 총선 패배의 책임도 내부 총질로 돌렸다. 장 대표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이 아무리 주장해도, 모든 언론이 그의 책임이라고 지목했다. 중도에 하차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당명 변경 등을 시도한다지만, 효과가 의문이다. 진정성을 담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2-01

정치인을 잘 선택해야 하는 이유

관계로 시작해 관계로 끝나는 인간의 삶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 놓이며, 그 관계는 삶의 전 과정과 함께 지속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뜻이다. 사회란 두 사람 이상이 맺는 관계의 구조이며,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고 성장하며 세상을 떠난다. 부모와 자식의 ‘천륜과 인륜’, 시절이 만들어낸 인연,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으로 다가오는 만남이 삶을 채운다. 그 과정에서 좋은 관계도 있고, 무난한 관계도 있으며, 때로는 피하고 싶은 관계도 생겨난다. 선한 인연과 악한 인연, 오래 남는 인연과 스쳐 가는 인연은 인간관계의 다양한 모습들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관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관계를 어떻게 선택하고 유지할 것인가에 있다. 관계는 감정이 아니라 선택으로 성립된다 인간관계는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지속 여부는 선택의 문제다. 관계는 정서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현실의 인간관계는 언제나 편익과 비용을 동반한다. 개인이 느끼는 관계의 편익이 부담보다 크다고 판단될 때 관계는 유지된다. 이는 계산적이라기보다 삶의 현실에 가까운 판단이다. 모든 사람은 장점과 단점을 함께 지닌다. 개인적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기준은 상대의 장점이 단점보다 크게 느껴지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인간관계 역시 주체적인 선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관계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며, 그 선택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상대방 또한 같은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때 관계는 균형을 가진다. 합리적 선택으로서의 인간관계 이러한 관계 인식은 합리적 선택 이론과 맞닿아 있다. 개인은 자신의 선호와 비교우위를 기준으로 선택한다. 진학과 전공, 배우자, 직장, 주거지 선택은 물론 은퇴 이후의 친구 관계와 취미, 배움의 방식까지도 같은 논리로 설명된다.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가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합리적 개인이란 이기적인 개인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분명히 인식하고 선택하는 사람이다. 관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나의 시간과 감정, 에너지를 배분하는 일이다. 따라서 관계 선택은 삶의 방향과 내용의 선택과 다르지 않다. 개인의 인간관계는 사적 영역에 머무는 듯 보이지만, 그 선택 방식은 사회적으로도 보편성을 가진다. 개인의 선택은 사회적 선택으로 확장된다 개인적 선택의 논리는 사회적 선택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선택, 경제적 선택, 정치적 선택 역시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엇을 선호하는가? 어떤 선택이 나와 공동체에 더 이익이 되는가? 특히 정치의 계절이 오면 이 질문은 더욱 분명해진다. 정당과 후보자, 정치인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도 개인은 장점과 단점을 비교한다. 이때 기준은 단순히 호불호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미치는 영향, 지역의 미래, 국가의 방향이 함께 고려된다. 정치적 선택은 개인의 입장, 지역의 입장, 국가의 입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개인의 판단이 사회의 방향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선택의 책임이 사회의 질을 만든다 정치적 선택은 가장 종합적인 인간관계의 선택이다. 정치인은 나를 대신해 결정하는 사람이며, 사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존재다. 따라서 정치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개인적 관계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장점이 단점을 충분히 상쇄하는가? 개인의 이익을 넘어 지역과 국가의 지속 가능성에 기여하는가? 이 선택의 결과는 결국 사회 전체의 비용과 편익으로 돌아온다. 무심한 선택은 무책임한 사회를 낳고, 성찰 없는 관계는 공동체의 질을 낮춘다. 인간관계의 선택을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관계를 선택하는 기준이 사회를 결정한다 인간관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은 개인을 넘어 사회로 확장된다.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는 곧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의 문제다. 개인의 관계 선택이 모여 사회의 문화가 되고, 정치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관계를 선택하는 기준은 삶의 태도이자 시민의 책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선택하고 어떤 관계를 지지하는가에 따라 사회의 모습은 달라진다. 관계의 선택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성근 영남대 명예교수 · 행정학박사ㆍ전 대구경북연구원장

2026-01-30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바야흐로 지방선거의 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각종 현수막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지역 정치인들의 문자 세례와 각종 여론조사 전화가 휴대폰을 괴롭힌다. 각자가 ‘준비된 일꾼’, ‘검증된 후보’, ‘지역의 적임자’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왜 지방선거에 나오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부분이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정책들을 나열하지만, 정작 지역의 미래와 장기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다. 지방선거를 약 4개월 가량 앞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작년 연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가 화제를 모았다. 많은 직장인들이 극 중 김 부장이라는 캐릭터에 격한 공감을 표했다. 대기업 임원이 되기 위해 평생 직장에서 헌신했지만, 결국 임원이 되지 못하고 조직에서 버림받는 김 부장에 대해 시청자들의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이 드라마를 분석해보면 극 중 김 부장은 대기업 임원이라는 자리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 회사의 장기 전략이나 조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비전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는 꼰대형 리더십으로 그려진다. 그러니 기업 입장에서는 김 부장이 임원을 달지 못한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지방선거에도 수많은 김 부장들이 출사표를 던진다. 자신이 지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기본이고, 과거의 치적을 열거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어필한다. 물론 그동안 정말 애썼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리더십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갈수록 벌어지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 인구 감소, 지방 소멸 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역의 난제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농경시대의 경험이 산업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듯이 지금까지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미래 성장 전략이다. 비전 없는 지도자가 위험한 이유는 이들이 지역의 장기적 발전과 무관한 일들을 마구잡이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무능력한데 부지런한 리더가 얼마나 최악인지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드라마 속 김 부장처럼 지역의 리더십들은 언제나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각종 준공식과 행사 참석, 주민 간담회 등 쏟아지는 보도자료로 성과를 연출하는 동안 지역의 미래 비전은 서서히 동력을 잃는다.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역 청년들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지역의 권력 집단과 기성세대들의 입맛에 맞춘 공약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혁신이 어렵다.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묻고 싶다. AI가 노동을 대체하고, 디지털 플랫폼이 모든 산업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 지역의 미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상권 활성화’, ‘청년 유입’, ‘기업 유치’ 등 허황된 공약이 아닌,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궁극적인 체질개선 방안이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김 부장을 임원으로 만들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1-30

TK 행정통합, 이제 국회통과 문턱 남았다

경북도의회가 지난 28일 ‘대구경북 행정통합에 관한 의견 제시’ 안건을 통과시키면서 이제 TK 행정통합의 운명은 국회가 결정하게 됐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도의회에서 안건이 통과된 후 기자들과 만나 “다음 달 중 특별법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 법이 통과되면 6월 실시되는 지방선거에서 ‘통합특별시장’을 뽑을 것”이라고 했다. 대구·경북이 국회에 제출하는 특별법안에는 다양한 특례조항이 담겨 있다. 통합특별시 부시장은 4명으로 구성하고, ‘광역통합교부금’과 ‘광역통합교육교부금’과 같은 신규 재원도 신설하도록 했다. 특별시장이 미래특구(통합신공항과 후적지, 항만 등 대상)와 투자진흥지구(대기업 유치)를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특별법 조문은 335개에 달한다. 특별법이 국회에 발의되면 해당 상임위인 행정안전위원회(행안위)에 넘겨진다. 상임위에서 전문가 의견 청취와 공청회 등을 거쳐 법안수정 작업을 한 후, 법사위와 본회의 의결 절차를 밟게 된다. 민주당은 2월 임시국회 회기 내에 특별법 처리를 목표로 입법 속도를 높이겠다고 했다. 특별법이 국회 관문을 통과하면 3월부터는 통합특별시 출범을 위한 실무 준비가 본격화된다. 대구시와 경북도, 시·도 교육청의 조직·인사·재정 통합 작업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6월 지방선거에서는 초대 통합특별시장이 선출된다. 그동안 대구시장·경북도지사 출마를 준비해 왔던 예비주자들도 선거운동 범위를 대구·경북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 이미 인지도가 높은 일부 예비주자들은 동창회나 향우회 등 개인 연고를 통해 통합단체장 선거에 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TK 행정통합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행안위 심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한다. 행안위에서는 특별법 조항을 꼼꼼하게 심사한 뒤 정부와 지자체 의견 등을 종합해 수정안을 마련한다. 특별법 수정작업을 하는 행안위 법안심사 제1소위에는 대구 출신 이달희(비례대표) 의원이 소속돼 있다. 행안위가 얼마나 빨리 특별법안을 법사위에 넘기느냐에 따라 6월 통합단체장 선출 여부가 결정된다.

2026-01-29

TK금고 이자율 전국 꼴찌, 투명성 높여야

이재명 대통령은 28일 지방자치단체 금고 이자율이 지역별로 2배 이상 편차가 나는 것을 두고 “이게 다 주민들의 혈세”라고 비판했다. 그는 X에서 “1조원에 1%만해도 100억원”이라며 이 돈으로 주민을 위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날 행안부는 전국 243개 자치단체의 금고 이자율을 공개했다. 작년 12월 지방회계법 시행령 개정으로 금고 이자율 공개가 의무화된 데 따른 조치다. 공개된 지자체별 금고 이자율은 전국 평균 2.53%다. 인천이 4.57%로 가장 높았고 대구와 경북은 2.26%와 2.15%로 전국 평균보다 낮고 전국 꼴찌로 확인됐다. 지자체의 금고 이자율이란 지방자치단체가 주민이 낸 세금으로 조성된 예산을 특정 은행에 맡기고 받는 금리다. 지자체마다 세금을 관리할 은행을 선정할 때 은행이 제시하는 금리 조건은 선정의 핵심 요소로 평가된다. 대구시와 경북도의 금고 금리가 인천의 절반 수준에 머물고, 전국 최하위권에 있는지에 대한 해당 자치단체의 해명이 필요하다. 이번 기회에 금고 관리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 검토도 새롭게 해야 한다. 은행관계자에 의하면 이번에 발표된 금리는 정기예금 금리만 공개한 자료여서 실질적 금리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지자체 금고 선정 평가에는 금리와 더불어 지자체 협력사업비나 지역사회 기여도, 지역민 이용 편의성 등을 포함하기 때문에 1년 정기예금만으로 금고 운영의 성적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고 금리 공개로 드러난 지자체 간의 금리 격차가 주는 의미를 가볍게 볼 수 없다. 금리 공개 의무화는 행정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 궁극적으로는 주민이 낸 세금으로 재정 운영을 잘해 수익성을 극대화하라는 뜻이다. 대통령의 말대로 1조원을 잘 운용하면 도서관 하나쯤 지역에 더 지을 수 있다. 대구와 경북에는 많은 공공기관들이 금고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금고 이자율 공개를 계기로 금고에 대한 전문성 확보 등으로 주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2026-01-29

사랑의 온도가 전해지는 사회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연말이면 시작하는 사랑나눔 캠페인이 올해도 목표액을 채우고 무난히 마무리됐다. 극심한 경기침체로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목표액 106억2000만원을 조기 달성했다고 모금회는 발표했다.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올해는 개인 기부금이 는 반면 기업 기부는 작년보다 조금 줄었다고 밝혔다. 모여진 성금은 지역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을 발굴,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국가라 하지만 아직도 공공사회복지면에서 세계 중위권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의 공공사회복지 지출은 GDP 대비 15.5%로 OECD 국가 평균 20%에 못 미친다. 그러나 의료와 교육 분야는 한국이 꽤 높은 평가를 받는다. 복지사각지대란 복지 정책이나 제도의 손길이 미치지 못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문제는 도움이 필요해도 사회복지망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상존한다는 것이다. 작년 대전에서 60대 여성과 30대 남성 모자가 사망한 지 약 한 달만에 발견된 일이 있다. 경찰은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했다. 아파트 관리비가 밀려 있었고 단전, 단수 독촉장이 집안에 수북 쌓여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해마다 세밑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쌀자루나 라면 박스, 돈 봉투 등을 몰래두고 가는 이름 없는 천사의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훈훈케 했다. 불황으로 온정의 손길이 줄어들 것을 걱정했던 사랑의 온도탑은 그래도 건재했다. 대구 사랑의 온도탑이 조기 달성됐다는 소식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랑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1-29

'핑크수소'

최근 이어지는 강력한 한파로 저체온증 사망 사고와 심뇌혈관 질환 위험이 커지고 있다. 특히 난방비 부담이 큰 저소득 취약계층에게 겨울은 생존이 걸린 계절이다. 에너지가 곧 생명과 직결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과제가 겹쳐 있다. 바로 탄소중립이다. 화석연료에 계속 의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에너지 비용이 더 오르는 구조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한파에 강하고, 환경에도 부담이 적은 새로운 에너지 체계로의 전환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숙제가 되고 있다. 여기에 태양광과 함께 최근 주목받는 해법 중 하나가 바로 수소에너지다. 수소는 색깔이 없는 기체지만, 생산 방식에 따라 환경 영향을 구분하기 쉽게 색으로 부른다. 석탄 기반은 갈색, 천연가스 개질은 회색, 재생에너지 기반은 그린수소처럼 말이다. 이 가운데 원자력 전력을 활용해 물을 전기분해해 만드는 수소를 ‘핑크수소’라고 한다. 대구·경북은 이 ‘핑크수소’에 유리한 여건을 갖춘 지역이다. 울진 원전의 안정적인 전력을 활용한 대규모 수전해 수소 생산이 가능하고, 대구에는 바이오가스 기반 수소 인프라도 함께 구축되고 있다. 실제로 지역 청정수소 생산 로드맵을 보면, 2030년 이후 ‘핑크수소’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는 구상이 제시돼 있다. 이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면서도 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해외에서도 원전과 수소를 연계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원전의 남는 전력을 활용해 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산업과 수송 분야에 공급하는 실증사업이 진행 중이다. 국내에서도 원전 지역을 중심으로 수소 생산을 에너지 신산업으로 키우려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대구·경북은 울진의 ‘핑크수소’ 생산, 대구의 바이오가스 수소, 그리고 이를 연계한 청정연료 생산까지 아우르는 복합 수소 생태계를 구상하고 있다. 지역 차원에서는 수소 배관·저장 인프라, 수소 활용 산업 육성, 주민 수용성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오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 전환이 곧 지역의 새로운 먹거리”라는 인식 전환이다. 물론 ‘핑크수소’도 과제가 있다. 원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초기 인프라 비용, 수소 안전에 대한 우려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점은,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시대에 선택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구·경북이 바이오자원과 원자력이라는 두 축을 바탕으로 청정수소 선도 지역으로 나아간다면, 기후위기 대응은 물론 지역 산업과 일자리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핑크수소’는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미래를 바꾸는 전환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속도와 방향이다. 선제적 준비와 과감한 정책 결단이 지역의 지속가능한 내일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대구·경북이 ‘핑크수소’ 에너지 정책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면, 탄소중립 선도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물론 우리 이웃 모두가 따뜻하고 안전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미래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지역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가 대구·경북의 핑크빛 미래를 만드는 동력이 될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1-29

포항문화재단이 나아가야 할 길

창립 10주년을 맞은 포항문화재단이 2026년을 인구 감소와 저성장 시대 속에서 ‘문화가 도시의 생존 조건’이 되는 원년으로 선포했다. 산업과 개발 중심 성장의 한계가 분명해진 지금, 문화의 역할을 도시 전략의 전면에 세우겠다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핵심 전략인 ‘SODO(소도) 프로젝트’는 구도심을 공예와 융합예술의 벨트로 묶어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실질적인 청사진을 담고 있다. 단순히 보기 좋은 예술을 넘어 시민의 삶에 녹아들고 지역 경제의 동력이 되는 ‘문화의 산업화’를 꾀하는 것이 골자다. 이 같은 방향 설정은 포항문화재단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재단이 현재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은 ‘시민’과 ‘공간’이다. 연간 수만 명이 찾는 동빈문화창고1969와 시민 주도 플랫폼 ‘판플러스’는 그 단적인 예다.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만들어지고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역 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김설보:여인의 숲’ 역시 이런 토대 위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포항문화재단은 다시 10년 미래의 출발선상에 섰다. 이제는 성과를 나열하는 시기를 넘어, 방향을 고도화해야 할 시점이다. 갈 길은 명확하다. 포항의 문화 업그레이드다. 지역의 문화가 정체되거나 머물면 그 도시는 삭막함만 더하게 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포항만의 문화를 구축하고, 외지에서 포항의 그 문화를 보기 위해 걸음을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포항문화재단에 주어진 책무다. 포항 인구가 줄어드는 그 이면에는 각종 설문조사에서 드러나듯 문화에 대한 갈증도 한몫하고 있다. 물론 포항문화재단이 오롯이 포항 문화 전반을 책임지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도시가 가야 할 문화적 방향을 설계하고, 그 길로 가도록 이끄는 역할만큼은 재단이 앞장서야 한다는 점에서 책임은 가볍지 않다. 이상모 포항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재선임됐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포항만의 정체성을 현대적 콘텐츠로 치환해내는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 왔다. 다시 지휘봉을 잡은 그가 취임 초 내건 ‘문화의 수신지에서 발신지로’라는 기치를 다시 어떻게 빛나게 할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지난해 APEC 2025 정상회의 당시 선보인 불꽃&드론쇼와 로보틱스 퍼포먼스 ‘이아피’는 포항의 첨단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이 결합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런 수준의 문화가 일회성 이벤트에 머무르지 않고 도시의 일상으로 스며드는 일이다. 그래야 포항은 더 이상 문화를 소비만 하는 변두리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발신지가 될 수 있다. 포항은 철강도시다. 단어가 주는 어감만으로도 무게가 느껴진다. 이제 포항만의 문화는 창작을 통해 이 ‘철강’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의 2년, 이상모 대표가 이끄는 포항문화재단이 ‘철’의 단단함에 ‘문화’의 유연함을 더해 포항을 세계적인 문화 매력 도시로 완성해 주길 기대해 본다. /임창희 선임기자

2026-01-29

TK 행정통합 국회로··· 특별법 완성도 높여야

대구시의회에 이어 경북도의회가 28일 대구경북(TK) 행정통합을 승인하는 역사적 결단을 했다. 대구경북 행정통합은 이제 특별법 제정이라는 마지막 관문만 남겨놓게 됐다. 통합의 공이 국회로 넘어감으로써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올 6월 지방선거는 대구경북특별시장 선출로 바뀌게 된다. 정부가 의도한 광역행정의 통합은 국가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지방주도 성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가 지금부터 과제다. 정부가 행정통합 지자체에 전폭적인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특별법안의 디테일한 준비가 필수다. 특별법에는 대구경북을 하나의 생활·경제권으로 묶는 통합자치단체 설립 근거와 함께 자치, 재정, 조직, 인사 분야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다. 중앙정부가 담당하고 있는 일부 권한이 특별시장으로 이양돼 재정적으로 독립된 지역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중앙정부가 얼마나 과감하게 권한을 이양해주고 재정적으로 독립토록 하느냐는 것이다. 통합의 목적이 수도권에 집중된 권력과 산업을 지역으로 되돌려 국가 균형발전을 이루자는데 있다. 단순히 이름만 바꾼 거대한 광역특별시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실질적 자치권 확보로 독립적 권한을 행사해야 행정통합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대구경북통합 특별법에는 스스로 결정하고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더 많이 담기 위해 304가지의 특별한 규칙을 담았다고 한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특별법이 자치권 확보에 의미 있는 보탬이 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디테일한 검토를 해야 한다. 또 행정통합의 목적에는 찬성하나 통합으로 인한 지역소외를 걱정하는 경북 북부지역민의 목소리도 경청해야 한다. 북부권역의 발전을 견인할 구체적인 내용도 법안에 담아야 함은 물론이다. 대구와 경북은 뗄 수 없는 한뿌리 문화민족이다. 청년이 떠나고 지방소멸을 걱정하는 도시를 청년이 돌아오는 도시로 건설하는데 통합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대구경북 통합이 대한민국 지방자치 성장의 모범적 모델이 될 수 있도록 시도민의 인내와 합심이 필요하다.

2026-01-28

원전공모 앞두고 고민에 빠진 영덕군

정부가 원전 정책에 대한 입장을 바꾸면서 신규 원전 건설을 계획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히자 영덕군이 고민에 빠졌다. 영덕군은 과거 천지원전 1·2호기 건설이 추진되던 지역이어서 유력한 후보지로 꼽힌다. 정부는 조만간 대형원전 2기의 부지 공모를 시작하고 5~6개월간의 부지평가·선정 과정을 거친 뒤 이르면 2037년 준공을 목표로 관련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신규 원전 건설에는 14년 정도 소요된다. 최적지로는 영덕군을 비롯해 울진군, 삼척시, 부산 기장군이 거론된다. 영덕군의 경우 지난 2015년 영덕읍 석리, 매정리, 창포리 일대가 원전 후보지로 결정됐다가 문재인 정부 탈원전 정책으로 인해 사업이 백지화된 곳이다. 추진 당시 주민 수용성이 높았고, 원전 사업자인 한수원이 18%가량의 용지 매입도 진행했었다. 이 때문에 정부의 원전 정책에 대한 군민들의 불만이 큰 곳이기도 하다. 원전 유치에 대한 영덕군민들의 여론은 찬·반으로 갈라져 있다. 찬성하는 주민들은 “원전을 유치해서라도 지역발전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덕군의 지방소멸 위험 지수가 해마다 높아지고 있고, 지난해는 대형 산불 피해까지 겹쳐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는 위기감이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안전 문제와 환경 훼손, 공동체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영덕군은 “주민 동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신청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원전은 대표적인 기피 시설이기 때문에 부지 선정에는 극심한 갈등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주민 반발이 큰 지역은 제외하겠다고 했지만, 공모라는 형식 자체가 사회적 갈등 해결을 지방정부에 떠넘기는 절차로 볼 수 있다. 정부는 부지선정에 앞서 안전성 평가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해당 주민들과도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 주민들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원전 부지에 편입돼 이주하는 주민들보다 원전 가까이에서 대대로 살아가야 하는 주민들의 피해가 더 클 수 있다.

2026-01-28

AI와 로봇의 시대

스페이스엑스(SpaceX)와 테슬라(Tesla)의 창업자 일론머스크(Elon Musk)는 인류가 머지않아 ‘보편적 고소득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 전망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넘어, 대다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 구조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논리는 단순하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그 결과 재화와 서비스가 넘쳐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희소성에 기초한 화폐경제는 약화되고, 돈의 가치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른다.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미 변화의 조짐이 분명하다. 산업현장 곳곳에 자동화 설비가 들어서고, 사무직 업무마저 AI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보통사람들도 AI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생산라인에 로봇 도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소식은 전환기의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효율과 경쟁력을 이유로 자동화를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었던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진다. 수년 내에 인간의 숫자와 맞먹는 로봇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 한다. AI는 특정 분야에서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고, 활약 범위는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다. 흐름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노동에서 해방된 사회는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사람은 오랫동안 직업을 통해 자신을 규정해 왔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면, 인간의 역할과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생산성이 극적으로 높아진 사회에서 그 성과가 과연 공평하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을 소유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다면, ‘보편적 고소득’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불평등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와 정책, 사회적 합의가 적절하게 뒤따르지 않으면 기술의 진보는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도 무조건적인 공포도 아니다. 다가올 변화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교육과 복지, 경제와 노동을 어떻게 재설계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 일도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연대, 공동체 의식과 상생의 정신, 책임과 존엄 같은 가치는 기계화되거나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AI와 로봇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시대의 모습이 유토피아를 당겨올지 아니면 새로운 불안과 불안정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부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과 함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다시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8

유전형 탈모 보험 적용에 대하여

지난 12월 업무보고 때 이재명 대통령이 유전적 탈모에도 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하자 찬반양론이 벌어지고 있다. 일단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부터 그 자리에서 바로 난색을 표했다. 그동안 원형탈모나 지루성 탈모 같은 질병으로 인한 탈모는 질병으로 간주하여 보험 급여 대상이지만, 유전적 남성형 탈모는 미용 목적이 강하다고 보험 적용을 안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난 현재 보건복지부는 건강바우처 사업에 청년 탈모 치료도 포함하는 방안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건강바우처는 복지부의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2024~2028)에 담긴 시범사업으로, 20~34살의 탈모인들이 분기별 1회씩, 1년에 4회 미만으로 의료를 이용했다면, 전년에 납부한 건보료의 10%(연간 최대 12만원)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보험료만 내고 혜택을 못 받은 금액 중 일부를 바우처 형식으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그러나 조건도 까다롭고 금액도 적어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논란을 보다가 오래전 대학 동창 만난 일이 생각났다. 대학 졸업 후 20년이 넘어 만난 남자 동창들은 모두 변함이 없었는데, 유독 한 동창이 어색하게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군대 갔다가 심한 사고를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심한 탈모가 와서 언제나 모자를 쓴다는 것이다. 대학 다닐 때 허물없이 지냈던 동창이라 장난삼아 모자를 건드렸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혹자는 우리 사회가 유난스럽게 외모에 민감하다며 드웨인 존슨이나 제이슨 스타뎀, 이연걸 같은 영화배우를 예로 들며 탈모인의 고민을 무시하지만, 일반인이 그들처럼 빡빡 밀고 다닌다면 어느 문화권이라도 호감형은 아닐 것이다. 유전이라서 질병이 아니라는 논리도 군색하고, 유전형 탈모 치료를 미용 목적이라고만 단정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유전형 탈모가 생존 문제라는 대통령의 인식도 심하다고 생각하다가 ‘털업’으로 활동하는 유튜버 최수호 씨가 가발 벗은 모습을 보니, 내 원형탈모가 보험 적용을 받은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10대 20대의 탈모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니 그들이 최수호 씨처럼 탈모가 심하면 정말 생존 문제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어떤 이는 탈모 인구가 1천만 명에 이르고, 10~30대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 건강보험재정의 한계를 들어 반대한다. 그러나 고혈압 인구는 1천300만 명으로 의료기관 진료는 700만 명이 넘고 기대수명 증가로 30년 이상 치료해야 하는 상황이다. 고혈압은 생명과 직결되고 탈모는 생명과는 상관없다는 큰 차이가 있지만, 고혈압은 인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탈모를 방치하는 사람은 없다. 유전형 탈모에 보험 적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보험이 적용되면 탈모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뀔 것이고 그러면 약 먹기를 꺼리는 경향도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조기 치료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니 의학적으로 질병의 기준을 세워 약에 한정하여 보험을 적용하는 것은 공평한 처리라고 본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1-28

솔선리더십이 주는 긍정조직문화

‘부하 직원은 상사의 등을 보고 배운다‘라는 속담이 있다. 리더가 말보다 먼저 행동으로 기준을 보여 조직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솔선리더십이다. ‘하라‘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한다.‘ 규정·구호보다 현장에서의 실천, 권한이 아니라 신뢰로 이끄는 힘을 말한다. 현업 개선 활동 참여, 설비 환경 청소 등 똑같은 일을 직책보임자들이 먼저 행하는 것으로, 현장 직원들이 공감하고 상하 간 마음으로 통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자발적 참여와 진정한 소통을 이루어 긍정조직문화를 형성하는 출발점이 된다. 솔선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3가지 조건을 갖춰야 목적과 기능을 발휘한다. 첫째, 말과 행동의 일치로 일관성이다. 안전을 강조하려면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보이지 않는 잠재위험‘ ’사각지대 6대 잠재위험‘ 등을 직접 찾아 먼저 행하며, 비용 절감을 말하면 불필요한 회의·의전부터 줄여 나가는 것이다. 즉, 구성원은 말이 아니라 리더의 선택을 본다. 둘째, 불리한 상황에서도 먼저 행동한다. 문제 발생 시 책임 회피보다 책임을 수용하고, 성과는 팀원에게, 실패는 리더가 감당하는 자세이다. 솔선은 편할 때가 아니라 불편할 때 드러난다. 셋째, 현장 중심이다. 3현주의에 입각한 책상 위 보고보다 현장 눈높이에 맞춰 일하는 것을 말한다. 지시보다 함께 보고, 함께 고민하고, 숫자보다 사람·공정·흐름을 이해하는 것에서 솔선은 시작된다. 현장을 모르는 솔선은 ‘연출‘로 보이고, 현업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 솔선활동은 ‘공개적 쇼‘라고도 하지만 진정성이 없거나 정말 쇼가 되어서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솔선리더십은 긍정 조직문화로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구성원은 감시없이 기준을 지키고, 스스로 개선하는 조직문화는 통제 중심 조직에서는 불가능하다. 상하 간, 동료 간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하고, 진정한 솔선리더십이 조직의 신뢰를 형성시켜준다. ‘리더가 하는 데 내가 안 할 이유가 없다.‘라는 문화가 형성되어 지시가 없어도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준수한다. 지시 문화에서 자율 문화로 바뀌면, ‘내 일‘이라는 주인의식이 강화된다. 안전, 품질, 윤리, 개선 활동이 구호가 아닌 관행이 되고, 편법, 타협이 설 자리가 줄어들어 조직의 기준이 높아지고 신입도 빠르게 조직 기준을 학습한다. ‘이번에도 말뿐이겠지’라는 생각이 사라지고, 구성원이 변화를 신뢰하고 따라온다. 솔선리더십은 지속 가능한 혁신과 개선 문화의 토양이 된다. 긍정조직문화는 개선이 살아있고 성과의 토양이 된다. 개인과 조직간 상호 신뢰를 토대로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 조직이 하고자 하는 일의 수용이 빠르고, 함께 하는 일들이 시너지가 발휘되는 것이다. 숨김없는 일의 문화, 원칙과 공정성, 일관성이 살아있는 조직, 존중과 소통으로 함께 성장하는 교육·개선·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화이다. 솔선리더십은 긍정 조직문화의 출발점이며, 긍정조직문화는 성과의 토양이 된다. 제도보다 빠른 변화는 리더의 태도와 행동이고, 조직의 리더가 허용한 수준까지 기업문화는 성장한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1-28

포항시민 권정무 2

깔쌈하다는 경상도 촌말이 있어요 검색해 보세요 당신들이 울릉도 갈 때, 천 명이 넘는 손님들이 타는 크루즈, 객실의 바닥과 소금기 가득한 계단, 당신들이 싸지르는 화장실 청소를 이 사람이 합니다 어찌 보면 너무 일에 집착해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소주도 꼭 한 잔만 해요 술자리 끝나면 후배들 선배들 다 챙겨 보내요 그야말로 인생의 바닥을 싹쓸이하는 사람이에요 해충박멸, 방역과 청결, 하는 일 모두가 얼굴만큼 깔삼해요 기부도 잘 해요, 왼손은 몰라요, 부자도 아니에요 알릴 일도 아니고 그러지도 않아요, 그냥 해요 시니컬한 허세, 그러나 진정성 가득한 포스 덜떨어진 애교가 볼 만해요 그리고 맨발 달리기의 전도사예요. 비오는 날엔 시내를 맨발로도 달려요 영일대 바닷가를 죽자고 달리는 미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거기에 더한 일도 합니다 시 한 편 제대로 못 외우는 이 삭막한 시대에 그는 삼 백 편의 시를 외우고 있고 필요로 하는 곳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낭송을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정말 열심입니다 정말이지 읽고 외워 인문을 함양하고 달리고 달려 신체를 구축하고 쓸고 닦아 생활을 바로 세우는 실존적인 삼종(三種) 세트 인간, 말릴 재간이 없습니다, 지켜보며 응원합니다 후배지만 선배 같아요, 그렇습니다 일부에 충실하여 전부를 말하는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 순수하다고 해서 맹탕일 필요는 없다. 생업은 치열할 뿐만 아니라 더러는 더럽고 저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순화시키면 주위가 고요해진다. 그렇다고 고요가 적막은 아니다. 시장의 소음 속에서도 적막의 흐름을 아는 사람이 있고, 또 그것이 적막임을 모르면서도 그 적막을 지배하는 능력자들이 도처에 있음을, 본인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런 사람이 정말로 영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다. 가장 잡놈이라 불릴 사람에게서 경지를 이룬 사람의 불가해한 능력을 보는 것은 대낮에 등불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무 멀리 와버렸거나 도태되었다. 그들의 마을에 가고 싶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1-28

꽃 뒤에 선 잎

지난해 가을, 수필집을 발간했다. 신문과 여러 매체에 흩어져 있던 글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새로운 숨을 얻었다. 어떤 글은 오래 묵은 슬픔에서 왔고 어떤 글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기쁨에서 태어난 글이었다. 책 속의 모든 글이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듯이 독자들에게도 은은한 치유의 서막이 되기를 바랐다. 12월 초입에 북콘서트를 했다. 한 독자가 내게 “다가오는 크리스마스까지 잘 키우세요”라는 말과 함께 포인세티아 화분을 안겨 주었다. 포인세티아는 초록색과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기에 크리스마스 꽃이라 불리며 꽃말은 축복과 행복이다. 갓 태어난 책을 축복하듯 눈부신 생명의 빛을 품고 있어 자태가 황홀했다.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것처럼 온종일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화분을 두었다. 전등을 켜자 붉은 잎이 실내의 공기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풍성한 초록 잎에 둘러싸인 포인세티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꽃이라 부르는 붉은 부분은 진짜 꽃이 아니다. 포엽(苞葉)이다. 꽃을 감싸고 보호하기 위해 태어난 잎. 가운데 작고 노란 꽃은 조용히 숨어 있었고, 포엽은 자신이 꽃인 듯 화려하게 빛나며 세상의 시선을 대신 받아주고 있었다. 포엽은 스스로를 꽃처럼 드러낸다. 하지만 사실은 꽃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잎이다. 그 희생과 배려가 없다면 진짜 꽃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문득 세상 만물의 이치가 그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무대 위에 서고 누군가는 무대 뒤에서 조명을 켠다. 누군가는 이름을 남기고 누군가는 이름 없이 지탱한다. 드러내지 않고 타인을 도와주는 돌봄의 손길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뒷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소임을 다하는 이웃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내 삶에도 포엽 같은 존재가 있다. 수필 동인과 독서회,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분들이다. 혼자 책을 읽고 혼자 글을 쓰는 행위는 개인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지만, 여럿이 참여하는 책 읽기와 글쓰기는 타인의 관점을 들여다보며 내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 독서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책 읽기를 마칠 때도 있지만 토론을 통해 사고의 전환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나는 분들은 서로의 성장을 위해 아낌없이 이끌어 주고 토닥여 주는 포엽이다. 포엽은 화려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빛을 잃고 이내 시든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꽃은 열매를 맺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포엽의 겉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열매라는 본질은 남는다. 그래서 나는 한때 찬란히 빛났던 순간보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참고 견뎠던 순간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포엽은 말이 없다. 하지만 자기 역할을 알고 있다. 앞에 나서지 않아도 없으면 안 되는 존재. 꽃을 위해 자기 색을 태우는 잎이다. 그 겸허한 구조를 바라보며 나는 오래 잊고 지내던 마음 하나를 다시 기억해냈다. 빛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드러나는 것이 진짜가 아닐 수 있다는 진실이다. 나는 지금 포인세티아를 바라본다. 포엽 사이에서 작은 꽃이 살포시 숨을 쉬고 있다. 포인세티아는 나에게 은유 하나를 조용히 건넨다. 내 삶이 빛나고 싶다면누군가를 감싸 안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정미영 수필가

2026-01-28

수소환원제철, 국가의 결단과 주도성이 중요하다

2025년 12월 26일자 파이낸셜뉴스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의 기사를 전했다. “수소환원제철 큰일났다···한국은 R&D, 중국은 벌써 생산 시작.” 기사에 따르면 중국 최대 철강기업인 ‘중국 바오우(宝武)그룹’은 광둥성 잔장(湛江)시에 연간 100만 톤 규모의 수소환원제철 생산라인을 완공하고 이미 가동에 들어갔다고 한다. 코크스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고, 전기로에 재생에너지를 공급하는 이 공정은 기존 제철방식보다 탄소배출을 50~80%까지 줄일 수 있으며, 연간 300만 톤이 넘는 탄소감축효과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중국과 대비되는 한국의 현실은 냉정하다. 한국은 아직 범정부 차원의 연구개발(R&D)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파이넥스(FINEX) 공법을 기반으로 한 수소환원제철 실증기술 개발사업을 추진하며,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약 8146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의미 있는 출발임은 분명하지만, 이미 생산 경쟁에 들어간 중국과의 격차는 분명하다. 이 차이를 단순히 기술력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철강산업이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되는 국가전략산업이라면, 그에 걸맞은 대응 역시 국가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국민 개개인의 독립적 존엄과 자유와 더불어, 국민 전체의 생활과 생존을 책임지는 공동체가 바로 국가이고 정부이기 때문이다. 수소환원제철에서 국가와 정부의 주도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이 먼저 수소환원제철의 고지에 깃발을 꽂은 사실에서 배울 수 있는 핵심은 명확하다. ‘누가 더 좋은 기술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누가 먼저 국가의 결단을 내렸는가’이다. 수소환원제철은 개별 기업이 선택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신기술이 아니다. 이는 철강 생산방식뿐 아니라 국가 산업구조와 에너지시스템을 동시에 바꾸는 전면적 대전환 프로젝트다. 수소환원제철은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요구한다. 첫째, 수조~수십조 원에 이르는 초대형 투자다. 둘째, 흔히 “10년이 걸린다”고 말해지는 장기간의 기술적 불확실성이다. 셋째, 청정수소와 재생전력이라는 에너지 인프라의 동시 구축이다. 이 모든 조건은 개별 기업의 통제범위를 명백히 넘어선다. 시장에만 맡길 경우“누군가 먼저 하면 따라가겠다”는 조정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국가의 개입 없이는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렵다. 실제로 주요국은 이미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스웨덴은 정부·국영 전력회사·철강기업이 함께 실증부터 상용화까지 전 과정을 국가 전략사업으로 관리하고 있다. 독일은 수조 원의 재정을 투입해 전력과 수소 가격 리스크를 국가가 보전하며 철강전환을 에너지전환의 핵심 축으로 삼았다. 중국 역시 국가계획에 수소에너지 기반 제철전환을 포함시키고, 국영 철강기업에 상용화를 주문했다. 이들에게 수소환원제철은 기술 실험이 아니라 철강강국 간 생산능력 경쟁이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또 다른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다. 수소환원제철은 단기간 성과를 내는 정책이 아니라 최소 1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하는 국가 전환프로젝트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행정구조는 이러한 장기과제에 취약하다. 정권교체와 함께 정책 우선순위가 흔들리고, 조직과 예산이 단절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그래서 수소환원제철 논의는 국가 지도자인 대통령 개인의 의지 차원을 넘어, 국가전략의‘계속성’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산업 전환과 탄소중립 전략이 실증을 넘어 상용화 단계까지 이어지려면, 정책의 시간표 역시 단임 임기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임기구조에 대한 논의 또한 특정 인물을 위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이러한 장기 국가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제도적 고민 속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한국도 이제 관점을 바꿔야 한다. 수소환원제철을 포스코라는 한 기업의 선택에 맡겨둘 일이 아니다. 이는‘기업의 혁신과제’가 아니라‘국가의 전환과제’이며, 국가전략기술로 공식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 주도성이 필요하다는 점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첫째, 국가 비전과 로드맵이 필요하다. 언제 실증을 끝내고 언제 상용화로 넘어갈 것인지 국가가 명확히 제시해야 기업이 움직인다. 둘째, 초기 단계에서 불가피한 수소·전력 가격 리스크를 국가가 흡수해야 한다. 장기 전력구매계약(PPA), 탄소차액계약제도(CCfD)는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핵심 수단이다. 셋째, 연구개발을 넘어 설비투자에 대한 직접 지원과 금융보증이 필요하다. “실패하면 국가도 함께 책임진다”는 시그널이 있어야 투자 결단이 가능하다. 넷째, 수소 생산·저장·운송, 전력망, 항만과 같은 인프라는 공공재로 인식하고 국가가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다섯째, 법과 제도를 통해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전환 특별법, 인허가 패스트트랙, 그린철강 공공조달 의무화는 선언이 아니라 실행을 위한 장치다. 특히 K-스틸법 시행령에 수소환원제철의 국가 주도 실증·상용화, 국고 직접 지원, 전담조직 설치가 명확히 담기지 않으면 법은 구호에 그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제를 통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상설 전담조직이 필요하다. 산업·에너지·환경·인력 정책을 통합 조정할 국무총리실 산하의 수소환원제철 전환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것이다. 또한 전환청(추진단)이 자리할 곳은 책상 위의 정책 공간이 아니라, 실제 전환이 일어나야 하는 현장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심장인 포항이 그 장소다. 실증·생산·인력·연구가 공간적으로 집적된 곳에서 산업전환의 속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확인되어 왔다. 수소환원제철이 뒤처질 경우 그 대가는 막대하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로 수출 경쟁력을 잃고, 자동차·조선·방산 등 연관 산업이 연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이는 환경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안보의 문제다. 이제 선택은 분명하다.“기업이 알아서 하길 기다리자”거나 “R&D만 하면 언젠가 된다”는 접근으로는 늦다. 필요한 것은 국가가 책임지고, 수소환원제철 구축 기간의 계속성을 보장하며, 현장에서 실행하는 체계다. RE100을 모르고 시작해서 아까운 시간 3년을 허비했다. 다시 자세를 다잡아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중심, 포항에서 수소환원제철의 신기원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수소환원제철이 제2의 철강혁명이라면, 수소환원제철은 기업의 선택이 아니라 국가의 결단이며, 그 결단은 국가의 문제이므로 정부와 국가 최고지도자인 대통령의 임무이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1-28

진짜 두려운 것

어느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순간 내가 제일 먼저 떠올린 건 건조기였다. 전날 저녁, 건조기를 돌려놓고는 잠들어버린 것이다. 며칠 치의 수건이 겹겹이 몸을 포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건을 꺼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건조기가 있는 베란다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밤새 꼭꼭 닫아두었던 베란다 창문을 열고 건조기를 열었다. 건조기 깊숙이 상체를 밀어 넣고 건조된 수건 뭉치를 품에 안던 때였다. 오른발에 무언가 밟혔다. 바삭. 말 그대로 바삭한 소리가 들렸다. 베란다에서 감자칩을 먹은 적이 있었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잠에 취해 있었던 것 같다. 불 꺼진 베란다는 어두웠고, 나는 손에 든 수건을 우선 거실 소파 위로 옮겨두었다. 그러곤 베란다 불을 켰다. 그곳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공포’라는 단어에는 ‘두려울 공(恐)’과 ‘두려워할 포(怖)’라는 한자가 쓰였다. 말 그대로 두려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공포라는 뜻인데, 두려운 것이 두 배가 될 때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두려운 것과 두려운 것. 평소에 나는 겁이 별로 없는 편이다. 공포나 고어 영화도 잘 보고 무서운 놀이기구도 즐겨 탄다. 높은 곳도 겁내지 않는다. 이런 내가 두려워하는 건 두 가지인데, 바로 어둠과 벌레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가 두려워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목격했다. 하나, 내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바퀴벌레. 둘, 그 바퀴벌레를 어둠 속에서 내가 밟았다는 사실. 나는 곧장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바퀴벌레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반쯤 울먹이며 화장실에서 발을 깨끗이 닦고, 살충제로 바퀴벌레를 익사시켰다. 겨우겨우 사체까지 치우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완전히 탈진한 채 소파에 누워 세스코 무료 상담을 검색했다. 가장 이른 날짜로 방문 신청을 하곤 며칠간 베란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그날의 충격과 공포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나는 이 일을 무용담처럼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최근에 겪은 일 중 가장 끔찍한 일인데,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도 친구 한 명에게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우리는 추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 뜨끈한 샤부샤부를 먹기로 했다. 식사하는 동안엔 만나지 못하는 동안 있었던 근황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는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계획 중이었다. 친구의 애인은 다정하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긴 뒤 우리는 결혼 이야기를 이어갔다. 집은 어디에 구하기로 했어? 음료를 마시며 가볍게 던진 질문에 친구가 잠시 머뭇거렸다. 집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괜히 민감한 주제를 던졌나 고민하던 찰나 친구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같이 집을 보러 다녔는데, 오빠가 나는 바퀴벌레 나오는 집만 아니면 돼, 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는데 기분이 되게 이상했어.” 친구가 유리잔에 꽂힌 빨대를 한참 만지작거리다 말했다. “오빠는 평생 아파트에서만 살았거든. 우리 집은 바퀴벌레가 종종 나오곤 했는데 오빠한테 말하면 아마 기겁할걸. 자기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대.” 친구가 빨대를 가볍게 물었다 놓았다. “이럴 때 조금 무서운 것 같아. 우리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다는 게.” 나는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나 또한 평생을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집에서 바퀴벌레를 비롯한 벌레를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여름엔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서 날파리가 들끓고 몰래 침투한 모기가 가족들을 괴롭혔지만 그건 거의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므로 제외하고). 그게 너무 당연해서, 내가 사는 집에선 당연히 바퀴벌레가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던 것이다. 바퀴벌레가 징그러운 해충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평생 겪은 적 없는 미지를 앞으로 수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막막함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든 건 아닐까. 내가 진짜 두려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진 순간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살면 또 살아지더라.” 나는 친구를 위로하듯 말했다. 친구가 빙긋 웃었다. “그렇겠지? 그리고 바퀴벌레쯤이야 내가 잡으면 되니까.” 나는 친구에게 세스코 정기 구독료에 대해 알려주고, 친구는 바퀴벌레를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약을 소개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독 어두웠다. 나는 친구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걸었다. 살면 또 살아지더라. 친구에게 건넨 말이 부드럽게 몸을 돌려 내게 다가오는 걸 느끼며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양수빈(소설가)

2026-01-28

글쓰기를 권함

나의 여덟 번째 책이 세상에 나왔다.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기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가까운 사람들부터 천천히 내 신간이 나왔다고 소문을 내야 한다. 주변에 책 나왔다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은 내게 대단하다고 칭찬을 해 준다. 처음에는 머쓱했는데 이제는 그냥 싱긋 웃는다. 누군가 자기 일을 하고 그 결과물을 세상에 내어 놓는 모든 일들은 사실 모두 칭찬받을 만 한 일이다. 휴대폰이나 자동차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사람들, 흙 밖에 없는 땅에서 먹거리를 생산해내는 사람들, 맛있는 스파게티나 떡볶이를 만드는 사람들 모두 칭찬받아 마땅하다. 신간 소식을 전하는 내게 질문을 건네는 사람들도 있다. 먼저 자기도 언젠가 책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책을 낼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일단 글을 쓰라고 말한다. 책을 채우는 기본적인 내용물은 결국 글이다.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들 중 실제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책은 낼 수 없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내 생각에 글을 잘 쓰는 방법과 운동을 잘 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은 결국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잘 한다. 약간의 재능을 타고 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운동이란 것은 그것을 많이 해 보지 않으면 도저히 잘할 수 없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잘 쓰려면 글을 많이 써야 한다. 글쓰기도 운동도 직접 행동으로 옮겨야 그것을 잘 하기 위한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권한다. 꼭 어디 발표하거나, 책을 내거나,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 위한 글쓰기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러닝 열풍에 힘입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황영조나 이봉주를 꿈꾸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들 중 대부분이 원하는 것은 조금 더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이다. 나는 생활 속의 글쓰기 역시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머릿속에 흩어져있는 생각을 모아야 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쉽게 잘 정리해야 한다. 이를 통해 내가 하고 있었던 생각이 구체화되고 또렷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머릿속에 분명히 있었으나 자각하지 못했던 어떤 생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사람의 행동은 결국 생각의 산물이다. 생각이 정돈되면 확신이 생기고 행동에도 체계가 생긴다. 생각이 다양해지면 행동의 반경도 넓어진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또한 글쓰기는 휘발되고 마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저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은 점점 더 소중해진다. 그런데 그것들이 허망하게 잊혀지고 마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일이다. 우리가 경험한 것과 그 안에서 품은 감정들을 짧게나마 글로 남기고 머리와 가슴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보다 촘촘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다. 장황하고 거창하게 써 내려간 대단한 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몇 문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수필도 좋고, 솔직한 마음을 담아 몇 줄의 시를 써 보는 것도 좋다. 그것도 조금 막막하다면 몇 단어의 메모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괜찮다. 생각해보면 아주 글을 쓰지 않고 쓰는 삶이라는 게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지지 않았는가. 인터넷 기사에 쓰는 댓글도 글이고 SNS에 휙 던져놓는 몇 마디도 글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건네는 메시지도 글이고 업무를 위해 주고받는 이메일도 모두 글이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왕 쓰는 것 잘 쓰고 싶은 분들을 위해 비결을 조금 공개하도록 하겠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문장을 구사하는 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글이건 일단 써 보고 요즘 널리 사용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교정·교열을 요청한다. 그러면 맞춤법 오류와 비문 같은 것들을 수정한 새로운 문장을 내어 놓을 것이다. 기존에 쓴 문장과 수정된 문장을 비교하는 일을 반복한다면 문장을 정확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글은 좋은 글감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좋은 글감을 찾는 방법도 알려드리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지면이 부족하다. 강백수의 신간 《뭘 쓸까》에 상세히 적어두었으니 참고하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백수(시인)

2026-01-28

생리대와 슈퍼카

‘생활필수품(생필품)’이란 사람이 생활을 영위하는데 반드시 있어야 할 물품을 의미하는 단어다. 생각해보자. 가격이 아무리 높아도 설탕과 생리대, 화장지 등을 구입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그런데, 그런 소비자의 약점을 이용해 높은 이익을 얻어내고, 그에 대한 세금은 피해가려 했다면 심각한 도덕적 일탈인 동시에 작지 않은 문제다. 비싼 생리대 가격은 이재명 대통령의 ‘저렴한 제품을 만들어 무상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는 발언까지 불러왔다. 시장에서 생필품 가격을 높이는 요인은 원가 부풀리기와 담합 등이다. 최근 국세청이 앞서 언급한 생필품 가격을 높여 폭리를 얻고, 탈세를 반복한 업체에 칼을 빼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폭리와 탈세를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흥청망청 유흥을 즐기거나, 비싼 슈퍼카와 고급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의 행위를 한 회사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국세청의 조사 대상이 된 업체는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담합으로 생필품 가격을 크게 인상시키고, 세금을 회피한 곳이다. 더불어 소득 축소 신고와 유통 비용 상승 유발 업체도 들여다본다는 계획이라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얻어낸 이익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은 생필품 업체를 질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며 생필품을 높은 가격에 판매해 얻은 돈으로 법인용 슈퍼카를 사서 사주가 사적으로 이용했다거나, 법인 자금으로 취득한 수십억 원대의 아파트를 사주 자녀가 무상으로 사용하게 했던 생필품 제조업체들에겐 사람들이 납득한 만한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하겠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1-28

원전 집적지 경북, 원전허브 도약 기회 잡아야

이재명 정부 출범 후 탈원전 등을 놓고 원점에서 재검토되던 정부의 원전건설 계획이 예정대로 추진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26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따라 2038년까지 신규 대형원전 2기와 소형 모듈원전(SMR) 1기를 신설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수요 급증과 탈탄소 전환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규 원전건설이 불가피해서라고 한다. 또 원전 필요성에 대한 높은 국민적 공감 여론이 형성돼 애초 생각했던 탈원전 기조에서 벗어나기로 했다는 것이다. 국내 원전 26기 중 절반인 13기는 경북에서 운영된다. 경북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피해지역이다. 2017년 이전만 해도 경북 영덕과 울진 등에 6기의 원전을 추가로 건립하기로 하였으나 백지화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 울진의 2기가 다시 건립되기 시작했지만 영덕 천지원전 사업은 모두 백지화됐다. 원전 유치로 영덕군은 정부로부터 받은 특별지원금 380억 원을 이자를 붙여 되돌려주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2022년 11월까지 가동하기로 했던 경주의 월성 1호기는 2018년 6월에 조기 폐쇄됐다. 문 정부의 이런 조치로 경북도는 탈원전에 따른 경제적 손실액이 무려 28조 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정부의 신규 원전건설 계획이 유지된 것은 원전을 주요 산업으로 안고 가는 경북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다. 특히 정부는 조만간 원전 부지 공모 절차에 착수하게 되는데, 현재 경주, 영덕, 울진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져 신규 원전 건립에 경북이 유력하다. 특히 차세대 원전으로 불리는 SMR은 원전 인프라가 우수한 경주에서 국가산단을 추진 중인 사업이어서 경북은 국내 원전산업의 허브로써 이미 탄탄한 기반을 잘 갖추고 있다. 경북에는 원전 13기와 함께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를 비롯해 원자력환경관리공단, 원자력연구기관 등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원전 생태계 조성에도 매우 유리하다. 정부의 신규 원전 건설이 경북 원전산업의 새로운 도약 기회가 돼야 할 것이다.

2026-01-27

국힘, 이제 ‘自害정치’ 그만둘 때 안됐나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26일 ‘당론에 어긋나는 언행’ 등의 이유로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탈당 권고’를 결정하면서 당 내분이 재발하는 모습이다. 김 전 최고위원은 대표적인 친한계(친한동훈계) 인사로 꼽힌다. 앞서 사건을 조사한 당무감사위원회가 윤리위에 ‘당원권 정지 2년’을 권고했지만, 윤리위가 징계 수위를 더 높인 것이다. 탈당 권고는 당규에 따라 10일 이내에 탈당 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윤리위 의결 없이 자동 제명된다. 이후 최고위 의결을 거치면 제명이 최종 확정된다. 국민의힘 윤리위는 지난 14일 새벽 당원 게시판 사건의 관리 책임 등을 물어 한동훈 전 대표에게 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이 때문에 당 안팎에선 장동훈 대표 단식 기간 주춤했던 친한계에 대한 ‘찍어내기’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김 전 최고위원에 대한 탈당 권고는 한 전 대표를 몰아내기 위한 ‘예고편’이라는 해석이다. 장 대표는 곧 당무에 복귀하고 29일에는 최고위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날 최고위 회의에서는 ‘한 전 대표 제명’이 의결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국민의힘 내에서는 장 대표 단식이 계기가 돼 “이제 논란을 끝내야 한다”며 제명 쪽으로 기류가 확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4일에는 한 전 대표 지지자들이 서울 여의도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징계 철회를 요구하자, 장예찬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이 “한동훈에게 시급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료다. 제명당하면 오은영 선생님부터 찾아가길 권한다”고 조롱했다. 26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도 한 전 대표 제명 문제를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처럼 당내 갈등이 확산될 경우 지지층 분열은 불 보듯 뻔하다. 최근 민주당은 조국혁신당에 합당을 제안하면서 지방권력 장악을 준비하고 있는데, 국민의힘은 또다시 내홍의 늪 속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최근 20%대 바닥을 헤매는 당 지지율을 생각하면, 이제 ‘자해(自害)정치’를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2026-01-27

6·3 지방선거 최대변수된 ‘TK 행정통합’

대구·경북(TK) 행정통합이 6·3 지방선거의 핵심 쟁점이 되면서 시장·도지사 선거 구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다. 대구시장·경북도지사 주자들은 행정통합이 실현될 경우에 대비해 출마를 준비하고 선거전략도 짜야 해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통합단체장 선거는 정치적 무게감이 현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공약이나 자금조달, 캠프 구성 등에서 완전히 새롭게 준비해야 한다. 현재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출마를 서두르고 있는 예비주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TK 행정통합에 대한 의견이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행정통합에 대해 찬성하는 예비주자들이 다수이긴 하지만,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찬성론자들은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TK가 영원히 낙오된다”는 입장인 반면, 신중론자들은 “공론화 절차와 공감대 형성 없이 행정통합을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행정통합에 찬성하는 대구시장 예비 주자들은 대체로 인지도가 높은 현역의원들이다. 이미 시장 출마를 공식화 한 주호영(수성구갑)·추경호(달성군) 의원은 “행정통합이 빠를수록 좋다, 이번에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했다. 조만간 출마를 선언할 것으로 보이는 윤재옥(달서구을) 의원도 “우리가 손 놓고 있다가는 ‘죽 쒀서 남 주는 꼴’이 될 수 있다”며 행정통합에 찬성했다. 더불어민주당 대구시장 주자로 꼽히는 홍의락 전 의원은 “TK행정통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됐다”며 찬성했다. 반면 최은석(동구군위갑) 의원은 “행정통합은 돈(인센티브)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라며 반대했고, 홍석준 전 의원도 “행정통합은 사실상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했다. 경북도지사 여야 예비주자들의 입장도 첨예하게 엇갈린다. 그동안 TK 행정통합을 주도하며 3선에 도전하는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지금이 우리가 원하던 행정통합을 실현할 골든타임”이라고 했고, 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며 도지사 출마설이 나오는 임미애 민주당 경북도당 위원장도 “광역 단위 행정통합은 국토 균형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정부의 강한 의지다. 환영한다”고 했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과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이강덕 포항시장은 행정통합에 대해 반대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행정통합은 지방선거용 이벤트”라며 평가절하했고 최 전 부총리는 “도민 공론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며 절차상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 시장은 “주민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진행되는 통합 논의는 매우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지방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행정통합에 대한 쟁점이 예비주자들의 주요 토론의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그리고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당연한 현상으로 봐야 한다.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다양한 의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호남이나 충청, PK 지역 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다만, 유권자들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누가 통합특별시의 ‘초대 단체장’ 역량을 갖췄는지를 기준으로 지지 후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1-27

국가도 각자도생

각자도생(各自圖生)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쓰지 않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사자성어다. 그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선조편에 나온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왜적들의 약탈과 횡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선조는 백성들에게 각자 살길을 찾아나서라고 권하는 대목에서 이 말이 등장했다고 한다. 나라가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니 백성들이 알아서 살길을 찾아가라는 뜻이다.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공동체 속의 각자가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아 나서는 것을 보통 각자도생이라 부른다. 트럼프 대통령 2기 정부가 출범하면서 트럼프 발 안보 불확실성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미국의 방위망을 믿고 있던 유럽도 혼란에 빠졌다. 미국은 독일주둔 미군감축을 공식화하고, 유럽 국가들의 국방비 증액을 압박한다. 러시아에 대한 위협은 유럽에 맡기고 그들은 중국 견제에 집중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밝힌 2026년 국가방위전략에 북한 억지의 1차적 책임은 한국이 지고 미국은 결정적이지만 제한적 지원에 그친다는 입장을 명시하고 있다. 한미방어 구조를 미국 주도에서 한국 주도 미국 지원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한국의 강력한 군사력과 높은 국방비, 견고한 방위산업, 의무복무를 들었고 이것만으로 한국은 북한 억제의 1차적 책임을 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바이든 정부가 안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목표로 했던 국방보고서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이 세계 수호자임을 자처하던 시대가 물러가고 있다. 미국은 미국 수호자일 뿐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우리가 갈 길도 각자도생이다. 자강만이 국가를 지켜줄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1-27

멈춰 선 갈채

겨울의 끝자락은 언제나 시리고도 투명하다. 작년 12월, 차가운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 아버님은 당신이 평생을 지탱해온 견고한 육신을 잠시 내려놓았다. 평생을 공직이라는 좁고도 곧은 길 위에서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걸어오신 분이다. 남들이 빠른 길, 쉬운 길을 택해 앞서나갈 때도 아버님은 정직이라는 무거운 보따리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당신의 진급은 늘 동료들보다 한 뼘씩 늦었고 그만큼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노을은 남들보다 조금 더 깊고 고즈넉했다. 아버님은 한 번도 그 ‘늦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인 남편이 사회라는 거친 파도 속에서 한 단계씩 위로 솟구칠 때마다 당신은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아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아들의 승진은 아버님에게 단순한 직급의 상승이 아니었다. 당신이 고집스럽게 지켜온 그 정직한 삶의 방식이 아들의 생(生)을 통해 비로소 만개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증명이었으리라. 아버님에게 아들은 당신의 인생이라는 문장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침표이자 가장 화려한 수식어였다. 새해 첫 아침, 남편의 손에는 잉크 냄새도 채 가시지 않은 새 명함이 쥐어져 있었다. 아버님이 그토록 기다리셨을 아들의 성취가 오롯이 박힌 작은 종이 한 장, 그러나 운명은 잔인하게도 그 순간 앞에 깊고 어두운 강을 하나 놓아버렸다. 뇌졸중이라는 불청객은 아버님의 의식 속에 깃든 기억의 등불을 하나둘 꺼뜨렸고 이제 그 강 건너편에서 아버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요양병원의 창백한 조명 아래, 남편은 아버님의 초점 없는 시선 앞에 그 명함을 내밀었다. “아버지 저 진급했어요. 명함 새로 나왔어요.” 목소리는 허공을 맴돌다 차가운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평소 같았으면 명함의 모서리를 조심스레 받아들고 몇 번을 어루만지며 아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으셨을 분이다. ‘장하다 내 아들’그 인자한 웃음과 사투리 섞인 칭찬 대신 돌아오는 건 규칙적이고도 서늘한 기계의 숨소리뿐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버님이 견뎌온 지루하고 올곧은 시간은 아들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당신의 진급이 늦어졌던 것은 무능함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영혼이 지급해야 했던 귀한 세금이었음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깨닫는다. 아들은 그 비옥한 정직의 토양 위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마침내 오늘날의 푸른 숲을 이루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온 생애를 바쳐 기다려 주지만, 정작 자식이 부모의 갈채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늘 ‘조금만 더 있으면,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이라는 유예의 언어로 효도를 미룬다. 그러나 생의 시계추는 자식의 성공을 기다려 줄 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아버님의 정직함이 아들의 명함 속에서 깊이 뿌리 내려 결실을 보았을 때 정작 그 뿌리의 주인은 자신의 꽃향기를 맡지 못하는 적막의 세계로 유배를 떠나버렸다. 이 지독한 비대칭성이 우리가 생에서 마주하는 형벌이 아닐까. 인생은 어쩌면 어긋나는 타이밍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모의 뒷모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될 즈음 부모는 이미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노을 지는 언덕을 넘어가고 있다. 아들의 명함에 박힌 글자를 읽어줄 한 사람의 시선은 멈춰버렸다. 아버님의 침묵은 세상의 모든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남겨진 갯벌처럼 황량하고도 깊은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다. 아버님의 육신은 비록 아들을 알아보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깊은 심연(深淵) 어딘가에 남아 있는 영혼의 감각은 아들의 성취를 느끼고 계실 것이라고. 아들의 명함에 묻어있는 긍지가 당신의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을 것이라고. 기다려 주지 않는 시간 앞에서 자식은 늘 죄인이 된다. 하지만 아버님이 보여주신 강직한 삶의 궤적은 이제 아들의 삶 속에서, 또 손주들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 부자(父子)가 맞잡은 손등 위에 명함을 올려두고 바친 아들의 눈물 한 방울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버님의 따스한 시선에 바치는 마지막 헌사처럼 보였다. 비록 육신의 대화는 멈췄지만 아버님이 물려주신 따뜻한 영혼의 언어는 아들의 생애를 통해 메아리칠 것이다. /김경아 작가

2026-01-27

'내 일’이 있는 포항, ‘내일’이 있는 포항으로

포항은 지금 도시의 ‘체력’이 떨어지고 있다. 산업은 흔들리고, 청년은 떠나고, 원도심은 비어간다. 골목의 불이 하나둘 꺼질 때, 시민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 도시가 지금 방향을 잃고 있구나”. 포항은 분명 위대한 산업도시였지만, 그 위대함이 시민의 삶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제 포항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내 일’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내일’은 무엇으로 만드는가?. 지금 포항의 문제는 단순한 불황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철강은 여전히 포항의 중심이지만, 세계 시장은 관세와 공급과잉, 탄소 규제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산업을 지탱하는 비용 구조는 악화하고, 협력업체와 하도급 노동자,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 충격이 먼저 전달된다. 한편, 청년들은 “포항에서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확신을 갖기 어렵다. 일자리와 주거, 문화, 교육, 의료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여야 하는데, 이 연결이 약하다. 이대로는 산업도, 도시도, 삶도 함께 지치게 된다. 그래서 포항의 해법은 분명하다. 산업을 살리되, 시민이 체감하는 방식으로 살려야 한다. 기업만 성장하는 포항이 아니라, 시민의 월급과 가게의 매출, 아이들의 미래와 부모의 안심으로 이어지는 포항이어야 한다. ‘내 일’이 있어야 ‘내일’이 있다. 그 첫 단추는 산업의 재설계다. 철강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철강을 지키면서, 수소와 이차전지, AI, 신소재, 바이오, 해양에너지 같은 신산업을 철강과 연결해 포항형 산업 생태계를 완성해야 한다. 기업이 투자할 만한 조건은 결국 원가와 전력, 물류, 인력, 규제의 문제다. 포항은 이 기반을 다시 다져야 한다. 산업이 숨을 쉬어야 일자리가 생기고, 일자리가 늘어야 인구가 붙는다. ‘내일’은 산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삶이 견딜 만해야 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학교에 가고, 늦은 밤에도 불안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치료와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 즐길 문화와 도전할 공간이 있어야 하고, 어르신이 존중받는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져야 한다. 포항의 원도심은 개발이 아니라 사람이 돌아오는 재생으로 되살려야 한다. 전통시장과 골목상권이 살아야 지역경제의 혈관이 다시 뛴다. 시민이 체감하는 변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생활 속 작은 불편이 줄어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포항은 지금 ‘다시 설’ 시기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도시는 결국 실행력에서 갈린다. 말로 위로하는 시대는 지났다. 시민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언제, 무엇이, 어떻게 바뀌나?” 포항은 바뀔 수 있다. 산업의 힘과 바다의 가능성, 사람의 성실함이 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시민의 삶을 중심에 두고, 산업과 생활을 하나로 묶어내는 시정의 방향이다. “‘내 일’ 있는 포항, ‘내일’이 있는 포항”. 이 말은 구호가 아니라 포항이 다시 살아나는 조건이다. 일자리 만들고, 삶의 질 높이고, 도시의 연결을 복원하는 일. 포항의 내일을 시민과 함께 다시 세우겠다. /박용선 경북도의원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6-01-27

피의 평원과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태동 ①서유럽 문화권으로 흡수

11세기 말, 소아시아 셀주크투르크가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반대로 유럽을 호령했던 비잔티움제국은 국제적으로 나약한 존재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그러나 천 년 제국은 쉬이 망하지 않는 법, 비잔티움제국 알렉시우스 1세가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교황은 기독교권 방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십자군 원정을 추진한다. 1095년 교황은 예루살렘으로 출병을 위해 기독교 사상 최초의 십자군을 꾸리고자 크로아티아에 약속대로 참전할 것을 종용했다.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의 반 즈보니미르는 십자군 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맹세하면서 로마교황청에 의해 왕좌에 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1098년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고 일어나 즈보니미르를 암살해버린다. 경제적 이득과는 하등에 상관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비할 영주들이 아니었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과 함께 재정파탄을 우려했다. 이후 국왕의 빈자리는 무주공산처럼 보였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하는 법, 왕위 계승문제로 바람 잘 날 없던 크로아티아는 귀족들 간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손도 대지 않고 크로아티아를 흡수해버린다. 불가리아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면서 비잔틴제국과 연합전선을 펼치며 이어가던 크로아티아왕국은 종말에 가까운 운명을 맞았다. 그 까닭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암살당한 즈보니미르의 왕비 엘레나 리예파는 헝가리 출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가 위험에 처하자 해결책을 내놓았다. 오빠 라디슬라브를 크로아티아 왕으로 추대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헝가리로 편입된 것이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에게는 불운의 시작이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될 때까지 제국 치하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자신의 영토와 자치권을 보장받는다는 조건으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내가 차지할 수 없다면 너도 차지할 수 없다는 의미다. 헝가리 왕과 크로아티아 왕을 겸업하던 라디슬라브가 죽자 1102년 그의 동생인 칼만이 자치권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때부터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는 온전하게 크로아티아 왕권을 손아귀에 거머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복속된 사건은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크로아티아가 이때부터 온전히 동유럽의 문명권에서 서유럽 문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스만트루크제국 아래 놓여 정교만 고집한 채 어둠에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세르비아와는 딴판으로 전개가 된 셈이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하면서 살아가던 크로아티아는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이질감이 형성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민족성과 가치관의 차이로 변화된다. 이는 서유럽 전통이 쌓여가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마찰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자치권을 넘어 왕권을 넘보았으나, 오스만제국의 두 차례 빈 공격의 실패 후 오스트리아제국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꿈으로 끝났다. 그러나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힘을 축적한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경제력을 이용해 땅을 사들이며 경쟁적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오스만트루크제국의 침략이라는 혼란한 틈을 타 재산을 끌어 모으는 데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다. 무주공산에 깃발 꽂기, 위기의 땅 주인을 겁박해 헐값에 사들이기, 영토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토지세로 강제로 거둬들이기 등 약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힘을 축적했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가격경쟁과 풍부한 물량으로 골목상권까지 노리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이들의 롤 모델은 자치독립국이면서도 합스부르크제국의 우산 아래서 살아가는 헝가리를 본받고 싶어 했다. 한편 번영의 기세에 동승한 수도사들에 의해 라틴어로 된 성경이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책들이 세상에 태어났다. 13세기 중반이 되자, 헝가리는 몽골의 침략에 노출되면서 기세가 꺾였다. 더구나 헝가리의 보헤미아 공략이 결정적 패착이었다. 헝가리 땅은 초라하게 줄어들었고, 승리한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루돌프에 의해 크로아티아와 체코, 슬로바키아는 물론 헝가리 땅 일부까지 그들의 발아래 들게 된다. 이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합스부르크를 지원하면서 최초로 제국과 본격적인 인연을 맺는다. 이 일로 인해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의 인연은 무려 19세기 중반까지 싫던 좋던 줄기차게 이어지게 된다.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기세를 몰아 초라해진 헝가리 왕 찰스 1세에게 대들기 시작했다. 경제적 독립과 함께 사법권에 이어 독자적으로 권리를 행사했다.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역시 이때를 기회로 주요 무역도시로 거듭났다. 아드리아해 진주라 불리는 두브로브니크공국 역시 경제는 물론 문화적 발전에 전성기를 구가한다.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그늘에 들면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