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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골든타임 놓친 TK행정통합, 무산수순 밟나

대구·경북(TK) 행정통합 법안 처리에 대한 여야 합의가 불발됐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는 10일 국회에서 만났지만, TK 통합법안을 12일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하는 데 대해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국민의힘 유상범 원내 수석부대표는 “민주당에 TK 통합법안 처리를 강력히 요청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면서 “법안 처리가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TK출신인 민주당 임미애 의원도 이날 당 지도부를 만나 법안처리를 설득했지만 별 성과를 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TK 통합법안이 12일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하면, 지방선거 전 처리될 확률은 거의 없어진다. 민주당이 요구하는 선결조건(대전·충남 통합법안에 대한 국민의힘 당론확정, 경북 북부권 의원들의 통합 찬성 등)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12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가 TK 통합법안 처리의 마지노선이라는 사실은 여야가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그동안 TK통합 법안 처리는 민주당의 잇따른 ‘조건 추가’에 가로막혀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 때문에 TK지역에선 민주당이 애초부터 TK통합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말이 나왔었다. 민주당 정준호(광주 북구갑) 의원의 경우 지난달 25일 TK와 대전·충남 행정통합 보류를 전제하면서 “타 지역 통합 인센티브로 편성할 예정이었던 재원을 전남·광주에 추가 배분하는 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하기도 했다. TK통합 무산을 기정사실화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소리다. 정치권에서는 이달 말까지 법안처리 여지가 남아있다고 하지만 ‘희망고문’에 불과하다. TK통합법안 단독 처리에 대한 민주당의 부정적 태도가 워낙 강한데다, 국민의힘 내에서도 지방선거 공천심사가 본격화하면서 관련 논의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여야의 극적 협상으로 통합 불씨를 살릴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행정통합 무산이 확정되면 TK지역은 정부재정지원 인센티브나 2차 공공기관 우선 배정에서 배제돼 ‘상대적 박탈감’이 한층 가속화 할 것이다.

2026-03-11

대구안경산업, 국가 전략산업 출발점에 서다

대한민국 안광학산업을 국가 차원의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고 글로벌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민관합동협의체인 K-아이웨어 글로벌정책협의회가 발족했다. 국민의힘 우재준 의원(북구 갑)의 주관으로 10일 국회에서 발대식을 가진 협의회는 앞으로 안광학산업의 중장기 국가 전략 발굴과 법·제도 개선 등 안광학산업의 도약을 위한 문제를 중점 논의, 해법을 모색한다. 우 의원은 개회사에서 “우리나라는 렌즈, 안경테, 장비, 안경사 등 모든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이뤄져 있음에도 정치권의 관심과 연결이 부족했다”고 밝히고 “앞으로 정책협의회가 안경산업 도약을 위한 법적 기반을 마련하고 소통창구 역할을 해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대구는 우리나라 안광학산업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안경공장이 세워졌고, 국내 안광학 사업체 10군데 중 7곳 이상이 대구에 있다. 전국 최초 안경산업특구가 지정되고 한국안경산업진흥원 설립과 24년 전통의 대구국제안경전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 영세업체 비중이 높고 안경테 중심의 단순한 생산 등 산업 구조적인 문제 등으로 성장이 한계에 부딪쳐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특히 중국산 저가제품이 시장에 침투되고 프랑스 등 브랜드 제품에 밀려 지역 안경산업이 위기에 몰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브랜드 마케팅 역량 강화와 R&D 연구지원 등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우리나라 안경산업은 뛰어난 금형 및 가공기술 등을 바탕으로 세계적 수준의 안경제조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글로벌정책협의회 발족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선택이다. 안경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인데다 시장 규모도 갈수록 커져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이다. 또 의류와 헬스케어 등과 기술적 융합이 가능해 산업 확장력도 기대된다. 한류 연관산업으로 지정된다면 성장의 가속화를 기대할 수 있다. 우 의원 말대로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면 100배 성장도 가능한 사업이다. 정책협의회 역할에 거는 기대가 크다.

2026-03-11

고액 체납자의 명품들

체납 발생일로부터 시작해 1년이 경과한 국세 미납액이 2억 원 이상인 사람을 ‘고액 체납자’라 부른다. 국세청은 이들의 이름과 주소, 체납된 세금액을 공개하고 있다. 적지 않은 현금을 이곳저곳에 숨겨놓거나, 위장이혼 등의 방법으로 부동산을 타인 명의로 옮기고는 세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악질적이고 상습적인 체납자의 모습은 TV 화면을 통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국세청은 지난해 말과 올해 초에 걸쳐 4개월 동안 고액 상습 체납자를 추적해 124명으로부터 81억여 원에 이르는 재산을 압류했다. 현금과 귀금속, 고가의 시계와 가방, 그림 등 압류품의 종류는 다양했다. 지난해 12월. 이재명 대통령은 고액 체납자 문제를 거론하며 ‘체납자들에게 압류한 물건을 지체하지 말고 강제 매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에 따라 앞서 언급된 압류품들은 공개를 거쳐 곧 공매될 예정이다. 첫 번째 공매엔 세칭 명품가방과 지갑 35개, 시계 11개, 예술품 9점, 고급 주류 110병 등 총 166점이 나온다고 한다. 이것들은 현재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에르메스와 샤넬 등의 가방과 롤렉스와 까르띠에 시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공매품 전시장을 찾는다고 한다. 언급된 가방과 시계는 대부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비싼 것들이다. 고액 체납자들은 그런 걸 살 돈은 있지만 세금 낼 돈은 없었던 것일까? 압류된 고액 체납자의 값비싼 명품 공매 소식을 접한 평범한 서민들의 심정은 어떨지 궁금하다. 이상스레 낯이 뜨겁고 가슴 속에서 부아가 치밀 것 같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11

바람이 불어오는 곳

봄이 올 거라는 기대감을 가볍게 무너뜨린 3월의 바람은 한겨울의 것보다 매섭고 날카롭다. 옷장 깊은 곳에 넣어두었던 겨울옷을 다시금 꺼낸다. 발열 기능이 있는 이너를 챙겨입고 옷깃을 올린다. 안감에 보드라운 털이 가득한 부츠를 신어야만 현관 앞에 설 용기가 생기는 날씨. 좌우로 살을 베어내는 바람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는 요즘 같은 날이면, 내 머릿속엔 희고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떠오른다. 작년 이맘때 나는 미국에 있었다. 8일간 서부를 가로지르는 짧고 굵은 여행 중이었다. 무언갈 보고, 먹고, 음미하는 시간보다 버스에 실려 이동하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여행이 아니라 이동하기 위해 미국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창밖으로 비슷한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미국 서남부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일대에는 모하비 사막이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을 달리다 보면 관광객이 우글우글 모여 있는 거대한 라스베이거스 사인이 보인다. ‘LAS VEGAS’라고 적힌 붉은 글씨는 사막과 잘 어울린다.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세계적인 관광 도시, 초대형 호텔과 휘황찬란한 카지노, 시선을 사로잡는 분수 쇼까지, 이 도시에 입성한 순간 ‘사막’이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지워진다. 내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이, 이 풍경이 사막의 것을 빌려왔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자연은 감쪽같이 지워진다. 새벽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 공기 중에 맴도는 대마초 냄새, 카지노 기계 앞에 앉아 눈을 부릅뜬 사람들. “여긴 바람이 안 부네.” 동행인 Y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 바람이 꽤 쌀쌀한데?” 그런 바람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다 그만두었다. 라스베이거스에는 바람이 온전히 바람으로 존재하는 순간이 없었다. 식물의 몸체를 뒤흔들고 형체 없는 뱀처럼 모래 사이를 지나다니는 바람, 낯선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지 않는 바람, 그런 게 없어서 이 도시에는 정이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짧은 환락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또다시 사막, 사막, 그리고 사막이 이어졌다. 비슷한 풍경이 반복될수록 잠이 쏟아졌다. 눈을 떠도 감아도 나는 여전히 사막 위에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버스 안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이드가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처럼 혼곤한 잠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꼬리가 긴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1마일이 넘을 정도로 긴 길이 덕분에 ‘마일 트레인’이라 불리는 화물 기차였다. 규모에 놀랄 새도 없이, 기차 뒤로 풍력 발전기가 끝도 없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하비 사막 산등성이를 가득 채운 풍력 발전기에 나는 압도당했다. 5천 대가 넘는 거대한 발전기가 동시에 회전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졌달까. 모하비 사막은 세계에서 풍력 발전기를 설치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미서부의 풍력 발전기는 캘리포니아의 날개라고 불린다. “멋지죠? 저 풍력 발전기 한 대에 한화로 2억 원이 넘어요.” 가이드의 목소리에 뒷자리에 앉은 이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장관이네요, 여행 내내 유독 목소리가 컸던 아저씨 한 분이 외쳤다.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 그대로 정말 장관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풍력 발전기에 대해 아는 건 아주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자연 바람을 이용해 친환경적인 데다 미관상으로도 아름다운 발전기. “그런데 마냥 멋진 것만은 아니에요. 풍력 발전기는 하얗지만, 그 아래는 아주 새까맣거든요.” 가이드의 차분한 설명에 누군가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풍력 발전기는 새들의 무덤이에요. 풍력 발전기가 내는 소음이 새들의 경로를 방해하고 혼란을 일으키죠. 또 강력한 바람에 휩쓸려 발전기에 부딪히는 사고를 만들어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해요. 친환경을 표방하지만, 실상을 알면 결코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없어요. 인간에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바람이지만, 새들에겐 죽음의 바람인 셈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바람이 불어오는 저 언덕이 더는 장관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을 거예요.” 버스 안에 작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저 발전기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겁니까?” 가이드는 고개를 저으며 저 발전기는 모두 개인에게 분양했으며, 현재 발전기 주인들은 여생을 편히 즐길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돈을 뿌리는 바람이네요.” 질문을 던진 사람이 덧붙이자 가이드 역시 웃으며 농을 던졌다. “빚을 내고서라도 분양받았어야 하는 건데요.” 모두가 한마음으로 발전기 주인들을 부러워했다. 나는 커튼을 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여긴 바람이 너무 많이 부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양수빈(소설가)

2026-03-11

그래도 봄은 온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잔 생각이 나서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궂은 날씨지만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져서 모처럼 봄맞이 음식을 준비했다. 먼저 나름 자신 있는 돼지고기 수육. 앞다리살을 사서 된장과 커피, 통후추를 푼 물에 통마늘과 함께 푹 삶았다. 그렇지만 술상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봄나물. 보통은 수육을 맛있게 먹기 위해 채소류를 준비하지만 이날만큼은 오히려 봄나물을 맛있게 먹기 위해 수육을 삶았다. 달래, 미나리, 냉이를 사다가 차가운 물에 정성스레 씻었다. 달래와 미나리는 그냥 적당한 크기로 숭덩숭덩 썰었고 냉이는 끓는 물에 아주 살짝 데쳤다. 달래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양념에 무쳤고 냉이와 미나리는 각각 된장과 고추장 양념으로 맛을 냈다. 마치 호리병처럼 작았던 친구의 딸은 내일이면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고 했다. 새로운 학급에서 어떤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등교하던 새학기 첫날이 생각났다. 그날의 감각은 포근한 듯 하면서도 조금 서늘한 것이 봄 날씨와 닮았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싶기도 하고 친구 딸이 벌써 저렇게 컸나 싶기도 해서 참 세월 무섭게 흐른다는 얘기를 하며 준비해간 안주에 소주를 마셨다. 친구 딸이 자기가 쓴 동화 자랑하는 소리와 세 살 배기 아들이 엄마 찾는 소리로 조금 소란한 가운데 은은한 취기가 돌았다. 대리기사님이 운전해주시는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제법 추웠다. 집에 도착해서 아들과 아내를 먼저 올려 보내고 편의점에 들러 마실 것을 좀 샀다. 아파트 통로 문을 여는데 뜻밖의 기척을 느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 앙증맞은 고양이 두 마리의 동그란 눈 네 개가 두려운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랑 한참 같이 살다가 지금은 아버지 댁에서 나 대신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우리 삼봉이와 같은 치즈색 털이 예쁜 두 녀석은 아마도 따뜻해진 날씨를 믿고 밖으로 나섰다가 갑자기 만난 비와 추위를 피하려 아파트 안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녀석들이 무거운 유리문을 열지 못해서 거기 들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계속 거기 있을 작정인지를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내보내 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문을 닫고 거기 하룻밤 머물도록 두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한 녀석이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둘을 생이별 시킬 수는 없으니 하는 수 없이 그냥 문을 열어둔 채로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은 아들이 새로 다닐 어린이집의 입학식에 다녀왔다. 아직 아기 냄새를 지우지 못한 채 엄마 아빠 품에 안겨있는 아기들에게서 어제 먹었던 봄나물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짧은 행사를 마치고, 이번에도 아내와 아들을 먼저 집으로 올려 보내고 편의점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라면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거기서 반가운 이들을 만났다. 바로 어제 만난 고양이 두 녀석. 이번에는 어둡고 습한 지하실 계단이 아니라 아파트 화단에서 드러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장난을 치다가를 반복하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다행스러운 장면이었다. 어제를 잘 견디고, 그보다 압도적으로 길었을 겨울을 잘 견디고 따스한 오늘을 맞이한 녀석들이 대견했다. 사실 내게도 겨울은 순탄치 않다. 더위를 많이 타고 추위를 안 타는 나에게 겨울은 원래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었는데, 공연과 강연 같은 행사가 생활에 있어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뒤로는 여러모로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 되어 버렸다. 매년 같은 계절에 같은 상황을 맞이하지만 일 없는 한 철의 초조함에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봄이 오면 날이 따뜻해지는 것이 당연하듯이 나를 찾아주는 연락도 오기 마련일 텐데, 올해는 작년 만큼 벌이를 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불안해지곤 한다. 그런데 나보다 혹독했을 그 추운 계절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저렇게 한가로이 놀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니, 나의 사정도 어떻게든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여유가 조금은 생겨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봄은 오는 것이다. 겨우내 온 세상에 별 일이 다 있었다. 오늘 뉴스에도 온 세상의 힘든 이야기가 가득했다. 지난번에 칼럼에 쓴 것처럼 장사가 되지 않아 힘든 시간을 보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나처럼 언제나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불황기를 힘겹게 버텨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어떻게든 봄은 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떠나버린 겨울 추위처럼 모두의 힘든 이야기들도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강백수(시인)

2026-03-11

[정치 에세이] ‘尹 어게인’과 ‘카고(화물)신앙’

제2차 세계대전 때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의 원주민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통조림과 옷가지 등 각종 물자에 경탄했다. 미군 수송기가 섬에 상륙한 미군들을 위해 투하한 생필품 ‘카고(Cargo·화물)’였다. 전쟁이 끝나고 주둔했던 군인들이 섬을 떠나자 물자도 끊겼다. 원주민들은 나무로 비행기 모형을 만들고 숲에 가짜 활주로를 닦았다. 횃불을 들고 행진하며 기도를 올렸다. 미군들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흉내 내면 다시 하늘에서 화물이 내려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카고 신앙(Cargo Cult)’이다. 외부에서 나타난 압도적인 힘과 풍요를 경험한 사회에서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스스로 원인을 이해하거나 만들어내기보다 그 힘이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믿음이다. 한국의 미륵 신앙과 동학(東學)의 ‘후천개벽’ 사상도 현실의 고난을 초월적 사건이나 새 질서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점에서 카고 신앙과 구조가 비슷하다고 해석 한다. 문제는 이 기묘한 인류학적 장면이 21세기 한국 정치에서도 낯설지 않다는 점이다. 2017년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성조기를 든 태극기 집회가 등장했을 때 일부 외신은 이를 ‘21세기형 화물 숭배’라고 해석했다. 2025년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의 조합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요즘 극우 진영 일각에서는 더 노골적인 기대가 떠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항공모함을 타고 와 한국 정치를 뒤집을 것이라거나, 이재명 정권이 외부의 압력으로 곧 무너질 것이라는 식이다. 어떤 인사는 “지방선거도 못 치른다. 여름 전에 정권이 날아간다”고 장담한다. 문제는 이 믿음의 구조다. 스스로 정치 세력을 조직하고 시민을 설득해 권력을 바꾸겠다는 현실 정치의 노력 대신, 외부의 절대적 힘이 상황을 대신 뒤집어 줄 것이라는 기대에 의존한다. 마치 멜라네시아 원주민들이 가짜 활주로를 만들고 하늘을 바라보던 장면과 닮았다. 지난 3월 9일 의원총회에서 국민의힘 의원 107명 전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완전한 단절’을 결의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이어진 정치적 후폭풍 끝에 당이 마침내 ‘윤석열’이라는 과거의 활주로를 닫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 국민의힘이 과거의 ‘활주로’를 닫고 스스로 비행기를 띄울 수 있을지, 아니면 또 다른 ‘카고 신앙’의 활주로를 만들 것인지.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3-11

‘징계정치’ 도구가 된 국민의힘 윤리위

‘친윤 스피커’로 불리는 장예찬 국민의힘 여의도연구원 부원장이 지난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을 수성하면 장동혁 대표는 2028년 총선까지 연임할 것이다. 그러나 수성에 실패하더라도 휴지기를 가진 뒤 당 대표로 재선출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국민의힘 당원들 기류를 감안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장 대표에 대한 당원들의 신임이 그만큼 강하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장 대표 임기는 2027년 8월까지이며, 제23대 총선은 2028년 4월 12일 치러진다. 이날은 마침 한국갤럽이 장 대표 취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한 국민의힘 지지율(21%)을 발표한 날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에 대한 민심이반 경고등이 곳곳에서 켜지고 있지만, 친윤계 내부에선 국민의힘이 지방선거 이후에도 장 대표 중심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장 부원장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어떻든 2028년 총선에서 장 대표가 다시 공천권을 쥘 수 있다고 믿는 부분이다. 국민의힘 윤민우(54) 윤리위원장이 현재 사분오열된 당 내분 속에서도 비주류에 대한 ‘징계 정치’를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윤민우 윤리위’는 새해들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를 전격 제명한 데 이어, 친한계인 김종혁 전 최고위원과 배현진 의원에 대해서도 중징계를 했다. 배 의원에 대한 징계는 법원이 나서서 “윤리위가 재량권을 남용한 중대한 하자가 있다”면서, 본안 재판 때까지 징계조치를 정지하라는 판결까지 했다. 당내 비주류인 친한계에 대한 당 윤리위 징계가 계속되자 국민의힘 소장파 의원들 사이에서는 ‘윤리위가 당권파의 사냥개 노릇을 한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일부 의원은 “당 윤리위가 지도부 입맛대로 움직이며 정적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는 성명서를 냈고, 지난 9일 열린 의원총회에서는 윤리위원장 사퇴요구도 나왔다. 현재 국민의힘 윤리위에는 한동훈 전 대표의 대구 서문시장 방문에 동행한 의원들과 장동혁 대표의 사퇴를 요구한 서울시당 전·현직 당협위원장 24명에 대한 징계안도 상정돼 있는 상태다. 만약 윤민우 위원장이 이들에게 중징계를 내릴 경우 당 내분은 폭발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지난 8일까지 지방선거에 나설 후보 공천 신청을 받았지만, 수도권(서울·경기·인천) 광역단체장 공천 신청자는 거의 없었다. 별다른 당내 경선 흥행없이 현역 시·도지사들로 선거를 치러야 하는 초라한 상황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전국적으로 국민의힘을 탈당하는 지방의원들도 속출하는 모양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 지지율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앞으로 당 지도부가 ‘징계정치’를 계속하며 당을 늪으로 몰아가면 대구·경북 민심도 민주당 쪽으로 돌아설 수 있다. 이미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과 민주당에 대한 TK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장동혁 지도부가 TK를 자신들의 안방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11

깡통계좌 공포

모 증권회사가 2년 전 자산 30억원 이상 보유한 고객을 상대로 그해 증권시황 전망과 투자 계획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응답자의 33%가 사자성어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에 동의했다. 거안사위는 중국 고서 한비자에 나오는 말로 “평안할 때도 위험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전국시대 재상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도와 패권을 차지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사력을 축소하지 않고 전쟁이 없을 때 무기를 갈고 병사를 훈련시켜야 다음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증시에 대입하면 안정적인 시장 상황에도 미래에 닥쳐올 위기에 대비하라는 뜻이다. 설문 응답자 중 시황의 불확실성을 예측한 응답자들은 새옹지마(塞翁之馬)와 설상가상(雪上加霜)을 그해 사자성어로 꼽았다. 이는 투자의 길흉화복은 늘 바뀌면서 등락을 거듭할 것이라는 말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이란 전쟁으로 국내 주식시장이 오르막 내리막 요동을 치고 있다. 빚내 주식을 투자한 개인의 빚투 공포도 확산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의하면 주식 투자를 위해 돈을 빌린 신용거래융자 잔고가 5일 현재 33조원으로 역대 최대치라 한다. 중동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주가 등락에 따라 증권사의 반대매매가 감행될 소지도 높다. 이럴 경우 투자자들은 원금 회수는 고사하고 깡통계좌를 찰 판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주식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 기업의 가치 투자에 있다. 지나친 욕심과 성급함은 낭패를 부를 수 있다. 교활한 토끼는 자신이 숨을 굴을 세 개 파놓고 있다는 교토삼굴(狡免三窟)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10

기름값 2000원대···에너지 쇼크 방지에 총력을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열흘째 이어지면서 기름값이 폭등하고 있다. 9일 심리적 방어선으로 여겼던 국제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했다. 서부텍사스원유 선물가격이 이날 배럴당 107.54 달러를 기록, 2022년 이후 처음 100달러를 넘어섰다. 문제는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금 상승하는 유가는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지급해야 할 작은 대가”라고 말하나 유가 폭등이 장기화하면 한국 경제는 치명적 충격을 받아야 할 입장이다. 이란전쟁으로 유가가 빠르게 오르자 대구 등지 주유소 기름값도 2000원대를 육박하고 있다. 각 주유소에는 조금이라도 싼값에 기름을 넣으려는 사람들도 장사진을 이루고, 갑자기 급등한 기름값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다. 유가 급등이 산업체 전반의 부담으로 확대되면서 정부도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휘발유값 2000원대를 앞두고 정부는 30년만에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을 준비하고 있다. 판매가 상한을 정해 소비자 부담을 낮추는 제도이나 시장 왜곡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지속 가능 여부도 미지수다. 급한 불부터 꺼야겠지만 정부의 면밀한 추후 대책도 별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기름값이 오르면 소득에서 에너지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과 영세사업자들이 가장 가혹한 충격을 받는다. 서민가구에게 물가 상승은 사실상 임금 삭감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늘어난 난방비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영세가구는 채 추위가 가시지 않은 겨울 보내기가 부담이다. 이들을 도울 세심한 정책도 준비해야 한다. 또 영세 화물차 기사나 소상공인, 운송업·배달업 종사자들은 기름값이 바로 생산원가로 적용되나 이를 원가에 당장 반영하기가 쉽지 않아 수익성 급락에 따른 생계 위협도 우려된다. 면세유를 사용하는 농민이나 화훼농 등도 직격탄을 맞는다. 가격급등으로 유통 질서가 혼탁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정부는 시장 질서 회복과 실질적인 민생지원책을 당장 강구해야 한다.

2026-03-10

국힘의 ‘절윤’ 결의, 장동혁 과연 실천할까

국민의힘 의원 107명 전원이 9일 총회를 열고 12·3 비상계엄 사태 사과와 ‘윤 어게인’에 반대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들은 이날 12·3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재차 사과하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의 정치적 복귀를 요구하는 일체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했다. ‘윤 어게인’ 세력과의 절연을 다짐한 것이다. 이날 의원들은 장 대표 면전에서 “윤 전 대통령이 뭐라고 우리가 국민과 절윤으로 기싸움을 하느냐”, “당을 지지하지 않는 80%의 국민을 등 돌리게 만들어 놓고 선거를 어떻게 치르겠다는 것이냐”라는 비판발언을 쏟아냈다고 한다. 한동훈 전 대표의 징계 철회와 친한계 징계를 주도한 윤민우 윤리위원장의 사퇴 요구도 나온 모양이다. 최근 발표되는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드러나듯이,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거센 민심의 역풍을 맞고 있다. 국민의힘이 지난 8일 공개한 시·도지사 공천 신청자를 보면, 현역 의원은 7명뿐이었는데 대구·경북(TK)이 5명이었다. 수도권에서는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당 노선 정상화를 요구하며 신청 마감 시한까지 접수 서류를 내지 않았다. 민주당 현역의원들이 앞다퉈 지방선거에 뛰어드는 현상과 너무 대조된다. 국민의힘 후보로 공천되더라도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니까 현역의원들도 다들 후보가 되는 걸 꺼려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은 지금이라도 바뀌지 않으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TK당’으로 쪼그라들 가능성이 다분하다. 각종 여론조사의 정당 지지율 추세가 이를 여실히 대변해주고 있다. 국민의힘이 선거를 80여 일 앞두고 당 노선을 바꾸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지만, 장동혁 지도부가 기존처럼 마이웨이를 고수할 경우 아무 소용이 없다. 장 대표는 이날 의총에서도 내내 침묵을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힘이 변화의 진정성을 국민에게 보여주려면, 의총에서 일부 의원들이 요구한 ‘한동훈 복귀’나 ‘윤리위원장 교체’ 등 후속 조치를 하루빨리 단행해야 한다. 말로만 변화를 외치는 것은 아무 설득력이 없다.

2026-03-10

존재인구 시대의 도시 건축

중소도시에서 인구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50만, 100만이라는 숫자는 도시의 체급이었고 자존심이었다. 그 안에는 “우리 도시는 아직 괜찮다”는 믿음도 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산업화 이후 도시는 정주인구를 중심으로 짜였다. 주택지구와 도로, 학교와 상업시설, 산업단지와 행정체계도 모두 그 감각 위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역소멸이 현실이 된 지금, 그 시스템의 빈틈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년층은 떠나고 인구는 계속 빠져나가며, 도심은 활력을 잃고 있다. 임대 표시가 붙은 빈 상가와 쓰임을 잃은 시설도 늘어난다. 문제는 단지 인구가 줄어드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낡고 고정된 인구 개념으로 도시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도시에는 디지털 노마드와 원격근무자, 한달살기 체류자, 5도 2촌처럼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거주지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이민자와 재외동포처럼 둘 이상의 언어와 문화, 생활권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이동성의 확대는 20세기에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던 삶의 방식과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도 지역에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도시의 공기와 흐름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 시스템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생활인구와 관계인구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인구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존재인구는 단지 잠시 체류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다. 한 장소에 반복적으로 존재하며 관계를 만들고, 소비와 기억, 문화적 가능성과 활력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 여부가 아니다. 누가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무엇을 남기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존재인구를 중심에 놓고 보면 도시와 건축이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도시는 더 이상 주민만 붙잡아 두는 시스템이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머물고, 만나고, 섞이면서 새로운 일과 관계가 생겨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원격근무자를 위한 일터, 유연한 체류형 주거, 지역민과 외부인이 함께 쓰는 문화교류 공간, 프로젝트형 방문자를 위한 실험의 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가깝다. 장기 체류자를 위한 작은 작업 공간,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공유 거점도 중요해진다. 빈 상가와 유휴시설도 더 이상 쇠퇴의 흔적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쓰임을 만드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무엇보다 존재인구의 관점은 도시 안에 다름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감각과 지식, 네트워크와 수요가 들어오면 교환과 실험이 시작된다. 기존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산업이 태어날 수도 있다. 이제 지역소멸의 해법은 정주인구를 붙잡는 데만 있지 않다.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머물게 하며, 지역의 동력으로 바꿀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도시의 미래는 얼마나 많은 주민을 붙잡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도시와 건축도 정주인구만이 아니라 존재인구까지 함께 품는 방식으로 다시 짜여야 한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3-10

기업의 조직·성과와 감정 전염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오늘 회의가 생산적인지, 형식적인지 분위기가 말해준다. 표정, 목소리의 높낮이, 미묘한 침묵, 감정은 공기처럼 퍼진다. 우리는 그 공기를 무의식적으로 들이마신다. 타인의 감정이 언어·표정·행동·목소리 톤 등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전달되어, 상대방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자 일레인 헷필드(Elaine Hatfield)는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 했다. 웃음과 짜증은 전이되고, 감정은 무형으로 전염된다. 감정 전염이 발생하는 조건은 첫째, 물리적, 심리적 근접성이다. 가까이 자주 만나는 관계일수록 강하게 일어난다. 가족, 동료, 팀 단위 조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둘째, 권력과 영향력 차이다. 상사의 감정은 부하에게 더 강하게 전염되는 속성이 있다. 리더의 정서 상태가 조직 분위기를 좌우한다. 셋째, 공감 능력이다. 감수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감정 전염에 민감하다. 넷째, 반복·노출이다. 지속적 접촉은 감정의 누적 전염이 된다. 다섯째, 집단 동일시다. ‘우리는 한 팀이다’란 인식이 강할수록 전염 효과가 증가한다. 사람 관계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 전염은 밝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에너지가 상승하고, 감사 표현을 하면 관계 만족도 증가하고, 웃음은 신뢰 형성을 가속화한다. 부정적 전염은 불안·짜증이 갈등을 확산하고, 피해의식이 집단 냉소주의로 이어지고, 한 명의 불만이 팀 전체 분위기 하락으로 간다. 기업에서는 감정 전염이 조직 성과에 직접 영향을 준다. 긍정적 리더십을 연구한 다니엘 골만(Daniel Goleman)에 따르면 리더의 감정 상태가 조직 몰입도와 생산성에 큰 영향을 준다. 긍정 감정 전염 효과는 몰입도 증가, 창의성 향상, 협업 촉진, 안전사고 감소, 고객 만족도 상승 등이 있다. 감사 문화를 도입하면 생산성이 올라가고, 정서 안정 리더가 긍정 피드백이 증가하면 팀 성과가 향상된다. 기업 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있다. ‘또 혁신이야?’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다. 이 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장기간 매너리즘에 젖어 있고, 혁신이 현업 공감대 형성을 못하고 현실에 맞지 않게 운영하면 누적되어 형성된 집단 감정이 되는 것이다. 이 냉소가 퍼지면 조직은 냉각되고, 개선 활동은 한계에 이른다. 겉으로는 움직이지만 속으로는 멈춘 조직이 된다. 반대로 긍정 감정이 전염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미국의 항공사 사우스웨스트항공은 유머와 존중의 문화를 통해 직원 만족과 고객 충성도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기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서적 분위기가 달랐다. 구성원들은 서로의 태도를 모방했고, 그 감정이 서비스 품질로 이어졌다. 조직은 전략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 전략은 머리를 설득하지만 감정은 몸을 움직인다. 혁신이 멈춘 조직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은 새로운 슬로건이 아니라 새로운 정서 경험이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비용을 만들고, 성과도 만든다. 우리가 매일 전염시키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조직의 미래를 가르는 첫 출발점일지 모른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10

안데스 콘도르, 볼리비아에서 다시 날다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 긴 밤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 쉬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해발 4천 미터의 고지대 공기는 희박했고, 그 희박함이 라파스의 첫인상이었다. 다운타운의 작은 호텔에 짐을 풀고 창문을 여니, 분지 경사면을 따라 불빛이 층층이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항아리에 별빛을 한가득 담아둔 듯한 야경 앞에서 피로는 잠시 잊혀졌다. 로비 카페에서 화이트와인과 피자를 주문했다. 산뜻한 향이 혀끝에 감돌자, 문득 이 땅의 이름이 떠올랐다. 우리는 흔히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대륙을 ‘아비아 얄라(Abya Yala)’, 즉 ‘성숙한 대지’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여행은 단순한 풍경 감상을 넘어섰다. 나는 이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문명이 꽃피운 이 땅의 운명은 16세기, 쇠와 총으로 무장한 이방인들의 발자국과 함께 뒤바뀌었다. 금과 은은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흘러갔고, 신전 위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은 어느새 자기 땅에서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페루가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볼리비아는 풍부한 자원의 보고였다. 특히 포토시 은광은 막대한 부를 쏟아내며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지만, 그 빛의 이면에는 수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험준하고 고립된 지형은 또 다른 선물이 되었다. 외부의 손길이 쉽게 닿지 못했던 덕분에, 이곳은 고유한 언어와 전통을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었다. 지금도 잉카의 언어 중 아이마라어와 케추아어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문자가 없었던 잉카의 기억은 입과 발을 통해 전승되었다. 말이 이어지고, 발걸음이 이어지는 한, 정체성 또한 이어지는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라파스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때 문득 뉴욕에 두고 온 가족이 떠올랐다. 떠나온 지 3주가 지나자 그리움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여행은 때로는 이기적인 열망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기심이 낯선 삶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도시에서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펼쳐진 라파스의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거대한 분지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이 반짝이는 모습은 운석이 파놓은 구덩이에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했다. 숨은 여전히 가빴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만, 멀리 보이는 일리마니의 은빛 설산이 조용히 나를 감싸안아 주었다. 이방인의 지친 마음을 “괜찮다”라는 듯 다독이는 산의 침묵이 느껴졌다. 나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으로 갔다.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손팻말과 구호가 눈에 띄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분노가 모이는 ‘저항의 공간’이었다. 구호는 정치적인 외침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늘 삶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 아이를 키우는 문제, 내일을 살아가는 문제. 생존이 절실한 사회에서 희망은 때때로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촐리타들이었다. 풍성한 포요라 치마, 중절모, 가파른 골목길을 짐을 지고 오르내리는 굳건한 뒷모습. 그 투박하고 강인한 발걸음에서 오래전 한국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1960년대 명절이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터로 향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선 도시 라파스는 순간, 향수의 빛깔로 물들었다. 비록 이곳 사람들의 가난이 내 삶의 고단함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을 꿋꿋이 살아내는 자세는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닮아 있었다. 서툰 스페인어로 “당신은 잉카인입니까?”라고 묻자, “우리는 순수한 아이마라입니다”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보 모랄레스 집권 후에도 현실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들의 촉촉한 눈빛은 패배가 아닌 존재의 증거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정체성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낮에는 텔레페리코, 하늘을 가르는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붉고 푸른 곤돌라 창밖으로 라파스의 과거와 현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녀 시장의 향초 냄새, 노점에 가득한 알록달록한 보자기, 천에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걷는 사람들, 장터의 소음과 웃음. 그 모든 것이 어린 시절 시골 장터의 따뜻한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라파스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쉽게 닳아 없어지지 않는,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도시였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대에, 이 도시는 오히려 주름과 흔적으로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분지를 따라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라파스는 세상에서 가장 큰 벽난로처럼 따스하게 빛났다. 붉은 노을이 일리마니의 허리를 감싸안는 짧은 순간,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깨달았다. 우리가 풍요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더 빠르게’라는 욕망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라파스의 사람들은 느리고 고단한 하루를 묵묵히 살아냄으로써, 다른 차원의 풍요를 보여주고 있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고지대에서 오히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역설처럼, 결핍은 때로 삶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진정한 웰빙은 화려한 소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자기 이름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에 있었다. 여행은 지도를 따라 낯선 땅을 밟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된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나의 뿌리와 진심을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다. 라파스의 붉은 야경은 말없이, 그러나 깊은 여운으로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언덕길을 내려오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라파스가 가르쳐 준 ‘느린 성실함’을 잊지 않겠다고. 콘도르가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듯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존엄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으며. 나는 내일 소금 사막 우유니(Uyuni)를 향한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3-10

생일 꽃다발 위에 내린 하얀 작별

가장 화려한 빛의 꽃을 품에 안았던 날, 역설적이게도 내 삶에서 가장 깊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 달 전부터 약속된 생일 약속이었다. 친구들의 축하 속에 미역국과 점심을 먹으며 생의 환희를 만끽했다. 셔터 소리에 맞춰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 찰나, 휴대폰 진동이 정적을 깨뜨렸다. 수화기 너머 오빠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중환자실의 사투를 견디다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지 불과 열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통보였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색채가 휘발되었다. 어떻게 운전대를 잡았는지, 도로 위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지독한 죄책감이었다.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독한 강을 건너실 때, 막내딸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기름진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나는 아버지의 차가워진 손을 붙잡고 절규했다. 한 달 전,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시던 그 순간부터 중환자실의 기계음에 의지해 숨을 이어가시던 고통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날 아침 기이한 꿈을 꾸었다. 영정사진 속 아버지가 평소보다 훨씬 환하게, 마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별의 전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망 선언 5분 후에야 도착한 병실, 이미 온기를 잃어가는 아버지의 육신 앞에서 나는 생전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했던 짐승 같은 곡성을 쏟아냈다. 그것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끝내 가닿지 못한 임종의 거리에 대한 통한이었다. “아버지, 내가 미안해···. 생일밥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아버지 가는 길도 못 보고, 아버지 너무 미안하고 고생했어.” 내 목소리는 메아리 없는 빈 공간에 흩어졌다. 아버지는 막내딸의 불효를 이미 용서하신 듯, 그저 고요히 눈을 감고 계셨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딸인 나를 유독 금지옥엽으로 키우셨다. 세상 모든 풍파를 당신의 마른 등 뒤로 숨기시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응원해주시던 분. 여든이 넘은 노구(老軀)를 이끌고도 막내딸이 친정에 오면 손수 된장찌개를 끓여 밥상을 차려주시던 분이었다. “우리 막내 왔나” 하시며 냄비 뚜껑을 열 때 나던 그 구수한 연기는 이제 전설처럼 사라졌다. 구수한 된장 냄새는 아버지의 사랑이 시각화된 온기였고, 그 찌개 한 그릇에 나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호를 받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내 휴대폰 속에 저장되어 있던, 꿈속의 모습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사진으로 결정되었다. 슬픔의 예식장에 걸린 사진은 죽음을 말하고 있었으나, 그 표정만큼은 생(生)의 절정보다 찬란했다. 이제 나의 생일은 영원히 아버지의 기일(忌日)과 겹쳐지게 되었다. 매년 돌아올 나의 탄생일은 아버지가 이승의 옷을 벗으신 날이며, 내가 꽃다발을 들었던 시간은 아버지가 수의(壽衣)를 입으신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이처럼 잔혹하게 맞닿아 있고, 기쁨과 슬픔도 한 몸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길가에서 카스텔라의 달콤한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노인을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김 서린 냄새를 접할 때마다 불쑥불쑥 아버지라는 이름의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치환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끓여주셨던 된장찌개의 온기로, 당신이 좋아하시던 카스텔라의 부드러움으로 내 일상의 곳곳에 스며들어 계실 테니까. 육신은 소멸하였으나 그분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의 질량은 우주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고 내 삶의 궤적을 지탱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생일날 아침,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신 그 꿈속의 미소는 아마도 당신의 마지막 배려였으리라. “막내야, 미안해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웃으며 잘 가고 있단다.” 나는 이제 비로소 눈물 젖은 손으로 그 웃음을 받아 안는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을 완성하는 마침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 드린다. /김경아 작가

2026-03-10

검은 건반 위를 질주하다: 쇼팽 에튜드 ‘흑건’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쇼팽의 에튜드가 있다. 바로 별칭 ‘흑건(Black Keys)’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아마도 이 곡의 입문은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배틀씬에서부터일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은 총 27곡의 에튜드를 남겼다. 작품번호 Op.10의 12곡, Op.25의 12곡, 그리고 ‘세 개의 새로운 에튜드’로 불리는 3곡이 그것이다. 이 곡들은 단순한 연습곡을 넘어, 각각 특정한 피아노 테크닉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다. 쇼팽의 에튜드는 이전 시대의 기교 중심적인 연습곡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전 시대의 에튜드가 주로 기술적인 연습에 초점을 맞췄다면, 쇼팽은 여기에 음악적 표현과 예술성을 더했다. 그 결과 쇼팽의 에튜드는 연습곡이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음악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특징은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꼽힌다. Op.10의 에튜드들은 1829년부터 1832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당시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이후 작곡된 Op.25의 에튜드들은 리스트의 연인이자 후에 부인이 된 마리 다구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흑건’은 Op.10의 다섯 번째 곡이다. 각 에튜드는 다양한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쇼팽은 자신의 에튜드에 직접 부제를 붙인 적이 없다. ‘흑건’이라는 이름 역시 후대의 평론가와 음악가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이다. 이 곡이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곡의 대부분에서 오른손이 한 음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 검은 건반만을 연주하기 때문이다. 곡은 2/4박자의 빠르고 경쾌한 성격을 지니며, 조성은 G♭장조로 플랫이 무려 여섯 개나 붙는다. 구조는 다른 쇼팽의 에튜드와 마찬가지로 세도막 형식을 따른다. 빠르게 흐르는 오른손 패시지와 리듬감 있는 왼손 반주가 어우러지며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는 원곡의 처음 8마디가 연주된 뒤 반음 위로 전조되어 G장조로 편곡된다. 이 버전에서는 대부분 흰 건반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흑건’과 반대인 ‘백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처럼 에튜드의 핵심 테크닉을 제목처럼 부르는 경우는 다른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Op.10 No.2는 ‘반음계’, Op.10 No.11은 ‘아르페지오’로 불리며, Op.25 No.6은 ‘3도)’, Op.25 No.8은 ‘6도’, Op.25 No.10은 ‘옥타브’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쇼팽의 에튜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필수적인 레퍼토리로 여겨진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음악대학 입시와 예술학교 시험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곡들인데, 이는 테크닉적으로 어렵고 음악성을 동시에 요구하여 연주자의 실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흑건’은 다른 쇼팽 에튜드에 비해 비교적 연주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취미 연주자라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다. 검은 건반 위를 빠르게 달리는 화려한 패시지 속에서 쇼팽 특유의 음악적 상상력은 빛나며, 이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연주자와 청중을 매료시키고 있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6-03-10

주유하는 게 무섭다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폭격받기 시작한 이후 하루가 다르게 기름값이 오르고 있어요. 이젠 차에 기름 넣는 게 무서울 정도입니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국제 유가의 상승과 함께 한국도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의 요인으로도 이어질 것이라 관계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 시내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2000원에 육박하는 중이다. 일부 주유소는 이미 2000원을 넘겼다. 지방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 열흘 사이에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원가량 올랐다. 주유소마다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는 건 당연지사.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산유국이 밀집한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분위기 속에서 국제 유가는 얼마 전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 8일 브렌트유와 서부 텍사스산 원유는 각각 107.70달러와 108.15달러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는 2022년 여름 이후 최고가다. 이라크와 아랍에미리트 등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란이 석유 수출길을 막고 있는 한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가 폭등의 위험이 갈수록 커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사용되는 원유의 거의 대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기에 비상사태를 맞이한 한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휘발유 가격을 안정시킬 정책 마련을 지시했다. 정부는 ‘최고 가격 지정제’라는 극약 처방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몸부림에 가까운 노력이 날개 달린 기름값을 꺾을 수 있을까? 아직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09

다카이치의 ‘강한 일본’이 가는 길

‘철의 여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일본 열도를 장악했다. 중의원 465석 중 316석을 확보한 것은 자민당 사상 초유의 대승이다.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개헌을 제외한 모든 법안을 단독 통과시킬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다카이치가 천명한 ‘강한 일본’은 국제질서에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녀가 역설한 ‘힘을 통한 평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일본’을 연상케 한다. 다카이치는 이른바 ‘비핵 3원칙’(핵무기의 제조·보유·반입 금지)이 포함된 ‘3대 안보문서’, 즉 국가안보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 등을 조기에 개정하여 방위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한편, 방위비를 GDP 2% 이상으로 확대하고 ‘국가정보국’을 창설하여 정보기능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일본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중장기적으로는 헌법 제9조를 개정하여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거듭나고자 한다. 다카이치는 중의원 선거 압승 후 기자회견에서 “헌법 개정을 위한 조정을 진행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개헌에 필요한 참의원 의석이 부족하여 현실적 한계가 있지만 개헌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조성하다가 만약 여의치 않으면 2028년 참의원 선거에 승리하여 개헌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현행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서도 우회하여 ‘3대 안보문서’의 개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미·일동맹의 황금기를 맞은 트럼프는 “다카이치의 힘을 통한 평화가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적극 지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할 방패로 일본을 활용하고자 한다. 대만 역시 미·일동맹의 연장선에서 ‘대만 유사시 자위권 발동’을 천명한 다카이치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분쟁 중에 있는 중국은 “군국주의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대비할 것인가? 다카이치의 ‘강한 일본’은 우리에게 ‘양날의 칼’이다. 일본의 재무장은 북핵 위협과 북·중·러 연대에 대처하는 한·미·일 공조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흔드는 불안정요인이 된다. 게다가 다카이치의 ‘대미 올인 전략’은 이재명 정부의 ‘전략적 자율성 확대 전략’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향후 한·일 관계와 한·미·일 공조는 상당히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은 중국의 군비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일 간의 잠재적 갈등요인(과거사문제, 독도문제 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현재의 한·일 우호분위기를 바탕으로 전략적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미·일 밀착과 중·일 경쟁이 한·중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최소화해야 한다. 바야흐로 우리의 외교역량이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있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6-03-09

TK만 공천신청 몰리는 게 국민의힘 현실

국민의힘이 지난 8일까지 6·3 지방선거 후보 공천 신청을 받았지만, 경선 흥행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대구·경북(TK)에만 신청자가 몰렸고, 수도권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유력 후보들의 불출마 선언이 이어졌다. 이날 대구시장 공천에는 현역의원 5명을 비롯해 모두 9명, 경북도지사 공천에는 이철우 지사 등 6명이 등록했다. 반면, 수도권(서울·경기·인천) 공천 신청자는 단 6명에 그쳤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공관위가 마감시한(오후 6시)까지 연장하면서 공천신청을 기다렸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는 전날 “당 노선 정상화라는 선결 과제를 풀지 않는 이상 후보 접수와 경선은 의미가 없다”고 했었다. 자신이 요구한 ‘노선 전환’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불출마도 배제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친 것이다. 경기도지사 유력 후보로 꼽혔던 유승민 전 의원과 김은혜 의원도 이날 불출마 의사를 밝혔다. 대신 양향자 최고위원과 함진규 전 한국도로공사 사장이 공천을 신청했다. 부산에서는 박형준 시장과 초선 주진우 의원이 공천 신청을 했다. 양자 대결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충남도지사에는 현역인 김태흠 지사를 비롯해 단 한 명도 공천신청을 하지 않았다. 국민의힘 공관위는 이번 지방선거 공천후보 결정을 위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비슷한 경선방식을 도입했다. 현역 단체장이 아닌 후보끼리 미리 예비 경선을 치르고, 최종 경선 후보가 현역 단체장과 1대 1로 맞붙는 경선방식이다. 조은희(서울 서초갑) 의원은 이 방식이 “오세훈 시장 제거를 위한 프로젝트”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오 시장이 공천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 중에는 이러한 경선방식에 대한 불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국민의힘이 수도권에서 광역단체장 후보 기근현상을 겪는다는 것은 참담한 현실이다. 국민의힘이 사실상 서울시장·경기지사 선거를 포기했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다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장동혁 대표가 이번 지방선거를 ‘윤어게인 노선’으로 치를지, 아니면 노선을 전환할지 결단해야 할 상황이 됐다.

2026-03-09

하이테크로 지역 섬유산업 재도약 길 열어야

이란전쟁 등 대외정세가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 열린 대구경북 국제섬유박람회(PID)가 사흘간 전시 끝에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7개국 264개 사 기업이 참가한 이번 전시회에는 모두 1만2700명의 참관객들이 다녀갔으며 1억9000만 달러의 상담 실적을 기록했다. PID는 섬유산업 도약을 목적으로 매년 대구에서 개최되는 국내 최대 규모 섬유소재 비즈니스전시회다. 섬유업계의 다양한 신제품이 전시되고 세계 주요국 바이어들과의 비즈니스를 통해 지역섬유산업의 활로를 모색하는 자리다. 대구와 경북은 섬유산업의 메카다. 한때 섬유산업은 한국 경제를 견인한 효자산업으로 각광도 받았지만 지금은 첨단소재와 디지털 기술이 융합된 하이테크 산업으로 전환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지난주 열린 대구경북 국제섬유박람회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 슬로건부터 새로운 시작이란 뜻의 리부트(RE:BOOT)로 정했다. 전시된 제품들도 전통섬유가 아닌 친환경, 고능성 소재, 하이테크 첨단섬유, AI 패션테크까지 아우르고 있다. 섬유산업이 나아갈 미래 비전을 제시한 전시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원창머티리얼과 대현티에프시는 극한 환경에서도 신체보호와 쾌적함을 유지하는 고기능성 라이프웨어 소재를 선보였고, 삼일방직과 보광아이엔티, 백일 등은 고강도·고내열 특성을 갖춘 산업용 소재기술을 공개했다. 또 한국섬유기계융합연구원은 섬유제조 공정에서 반복 작업을 대체할 수 있는 팔레타이징 로봇과 와인딩 로봇을 선보였다. 섬유산업이 과거 저가제품 중심의 생산구조에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산업으로 재정비되는 과정을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준 것이다. 대구는 전국 17개 시도 중 섬유산업 중심지 기능이 2위로 파악된다. 전체 산업 비중도 사업체 수 16%, 종사자수 15%로 대구 미래5대 신산업 육성 정책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많은 사업체와 종사자가 유지되는 중추산업이다.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급변하는 수요시장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지역 섬유산업의 명성을 되찾는 혁신적 시도가 지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2026-03-09

인간 말종과 수정구슬

폭탄이 인간의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 말종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벌이는 이란 공격의 배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 팔란티어(Palantir), 앤스로픽(Anthropic), 라벤더(Ravender), 가스펠(Gaspel)이 있다. 21세기 전쟁과 권력의 중심에는, 더 이상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정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인공지능이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 인공지능 기업들 가운데 하나가 팔란티어다. 팔란티어는,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정구슬’을 뜻한다. 피터 틸은, ‘데이터를 이해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팔란티어를 창업했다. 핵심 플랫폼인 고담(Gotham)과 파운드리(Foundry)를 통해 위성, 드론, 금융, 통신, 행정 데이터 등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존재론적 지도(Ontology)’로 엮어낸다. 단순한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관계와 구조를 모델링하는 작업 즉, ‘현실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어떤 조직도, 변수를 가진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명쾌한 결정을 내리긴 쉽지 않다. 회사의 경우, 매우 복잡한 사업계획에 대하여 전 간부들이 몇 날 몇 일을 심사숙고하여 밤샘 회의를 하더라도, 그 결정이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높다. 만약 그 결정이 늘 90% 이상 정확하다면 회사는 망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각 데이터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한 다음 최적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수정구슬의 주장이다. 군사 영역에 있어서 수천 개의 목표물 가운데 공격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금융 영역에 있어서 수많은 거래 패턴을 분석하여 위험과 기회를 판단한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테러를 막을 수 있으며, 질병을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운영체계(OS)인 셈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의사 결정권’을 넘겨받은 시대가 왔다, 인간은 더 이상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정을 ‘승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도가 없던 시대에서 지도가 탄생한 시대가 된 것처럼, 인공지능이 세계의 사건을 데이터 지도로 만들어 관계를 분석하고, 그 관계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이다, 데이터가 권력이 되는 시대에 이러한 플랫폼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 기관이 된다, 수정구슬 팔란티어는 단순히 새로운 기업의 등장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전환 신호이다. 오늘의 푸른빛 수정구슬이 빛을 잃더라도, 내일 또다시 붉은 빛의 수정구슬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 플랫폼이 새로운 제국이 되려고 하려는 이 시대에, 두 인간 말종이 승인한 이란 폭격이라는 결과물을 전 인류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과거의 제국은 영토의 지배를 원했지만, 미래의 제국은 데이터 관계망의 지배를 원한다. 푸른 빛 수정구슬의 소유자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인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수정구슬의 신세계가 빛의 세계 일지, 어둠의 세계 일지 판가름 날 순간이 멀지 않았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09

인공지능과 지식혁명

인류는 몇 차례의 지식혁명(知識革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는 문자의 발명이었다. 직접 대면하여 말과 몸짓으로 전달하던 정보와 지식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축적하고 전승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의 지식혁명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금속활자가 실용화 되면서 지식은 소수의 수도원이나 귀족들의 서고(書庫)를 벗어나 대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성경과 고전, 자연과학 서적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지식은 더 이상 특권 신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또 다른 지식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수시로 접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은 단순히 데이터를 찾는 도구가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자연과학의 법칙과 인문학적 성찰을 스스로 학습하여,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논리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학과 철학,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른바 통섭과 융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눈부신 기술적 성취 뒤에는 서늘한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폭발적인 지식의 팽창이 과연 인류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정 장애’와 ‘인지적 과부하’를 걱정하게 되었다. 과거의 지식혁명이 인간의 팔과 다리를 대신하거나 기억력을 보조했다면, 지금의 지식혁명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사유(思惟)’와 ‘창의(創意)’마저 대신하는 실정이다. 지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이 생략된 채 AI가 내놓은 결과물만을 소비할 때, 인간의 뇌는 퇴화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자연생태계의 한 종으로서 인류에게 안정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온다. 하지만 AI가 주도하는 변화의 속도는 생물학적 인간이 적응할 수 있는 임계치를 이미 넘어섰다. 지식은 통합되어 거대한 지능의 바다를 이루었으나,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개별 인간은 갈수록 소외되고 파편화되는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기술의 축복이 소수의 설계자에게 집중되고 대다수가 지능의 하청업자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재앙의 서막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폭주를 멈출 수는 없을진대, 비판적 사고와 윤리적 성찰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인공지능이 가져온 지식혁명의 용처와 가치,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지혜’의 영역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가 답을 주는 존재라면, 인간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한다. 새로운 지식혁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넘쳐나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가치인지를 가려내는 윤리적 선별력이다. 윤리적 기준이 없는 지식은 흉기가 될 수 있다. AI의 편향성 문제나 디지털 격차로 인한 불평등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지식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아는 인문학적 지식이야말로 지식 폭발의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3-09

민주당의 ‘갈라치기’와 국힘의 ‘뒷북 대응’

6·3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선거란 모름지기 새로운 비전과 일꾼을 뽑는 축제여야 하건만, 지금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광역행정구역 통합 논의 과정을 보고 있자면, 본말(本末)이 전도됐다는 탄식을 지울 수 없다. 행정 효율화라는 시대적 과제는 간데없고, 오로지 ‘표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최근 민주당은 광주·전남 통합법은 일사천리로 처리하면서, 대구·경북(TK)과 대전·충남 통합은 미뤄뒀다. 정치권 안팎에서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따른 선택적 통합”이라는 냉소적 추측이 나오는 이유가 무언가. 선거를 앞두고 행정구역을 정비하는 것은 단체장의 관할 구역을 확정 짓는다는 점에서 적기(適期)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정당의 유불리에 따라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는’ 식의 격전지 관리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명백한 주권 기만이다.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광역 체제는 그야말로 ‘누더기’다.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6도, 3특별자치도라는 복잡한 구조에 광주·전남 통합특별시까지 더해지면 16개 광역단체가 무려 6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내부의 부조화다. 통합특별시라는 이름 아래 시·군과 자치구를 한데 섞어놨지만, 이들 간의 사무와 재정 권한은 전혀 다르다. 자치구가 처리하지 못해 광역단체가 떠맡는 업무만 14개 분야 42개에 달하고, 지방세 징수 비율 역시 광역시와 도의 기준이 제각각이다. 이런 불균형과 부조화를 방치한 채 ‘특별’이라는 수식어만 붙여 즉흥적으로 조합하는 것이 과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처사인가. 법과 제도는 간단하고, 명료해야 한다. 야당의 ‘갈라치기’ 전술을 탓하기 전에, 과연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제 역할을 다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광주·전남 통합법이 민주당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국회 문턱을 넘는 동안, 국민의힘은 무엇을 했는가. 대구·경북(TK) 통합이라는 지상 과제를 앞에 두고도 지역 국회의원들과 지자체장들은 각자의 셈법에 빠져 중구난방 목소리만 냈다. 경북 북부 지역의 소외론과 기초의회들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그런데도 당내 이견 하나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법사위에서 “내부 합의부터 먼저 해오라”라는 굴욕적인 훈수를 들은 책임은 전적으로 국민의힘에 있다. 뒤늦게 찬반 투표를 거쳐 당론을 정했다고는 하나, 이미 실기(失期)한 뒤의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공천권’에는 민감하면서 지역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에는 이토록 굼뜨고 무기력해서야 되겠는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통합의 본질이 ‘미래형 행정 혁신’이 아닌 ‘예산 따내기’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보화 시대에 맞춰 행정 조직을 슬림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근본적 처방은 뒷전이다. 선거를 앞두고 수십조 원의 지원금을 정파적 이익에 맞춰 집행하려 하고, 선거를 겨냥해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으니 답답하다. 금융기관조차 창구 업무를 줄이며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거는 시대다. 행정수요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앉아서 증명서나 떼어주던 시절이 아니다. 정보 소통이나 교통수단이 과거와 다르다. 그런데 국가 행정 체제는 낡은 외투에 ‘특별’이라는 이름의 누더기 조각만 덧대고 있다. 특정 지역에 특혜를 주고, 선거를 앞두고 예산을 쏟아부어 표를 사려는 행태는 결국 다음 세대에게 막대한 갈등 비용과 부채만 떠넘기는 꼴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특별’이라는 예외 뒤에 숨지 말고, 대한민국 전체의 행정 지도를 단순·명료하게 재설계하는 백년대계(百年大計)에 임해야 한다. 예외 없는 원칙과 보편적 기준이야말로 껍데기만 화려한 ‘특별’보다 훨씬 강력한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꼼수와 사심이 가득한 행정 체제는 결국 큰 부작용을 낳고, 민심의 심판을 받게 된다. 표 계산기를 던지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다시 그려야 할 때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3-08

파인튜닝과 프롬프팅···AI를 맞춤화하는 두 가지 전략

지난주 우리는 RAG(검색 증강 생성)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AI)이 어떻게 최신 정보를 실시간으로 참고하며 답변의 정확도를 높이는지 살펴보았다. AI에게 회사 문서를 건네줬더니 정확도가 95%까지 오른다는 이야기,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RAG처럼 문서를 떠먹여 주는 방법 말고, AI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까?” 있다. 그것이 바로 ‘파인튜닝(Fine-tuning)’이다. 오늘은 AI를 나에게 맞게 변형하는 두 가지 핵심 전략, 파인튜닝과 프롬프팅(Prompting)을 비교 분석한다. 이 두 가지를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AI 활용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AI를 내 것으로 만드는 두 가지 길 요리 학원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훌륭한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했다. 그런데 한국 손님들이 많아 김치찌개, 된장국을 잘 만들어야 한다. 이때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요리사를 한식 학원에 수개월간 보내 한식 조리법을 아예 체득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파인튜닝’이다. 두 번째는 요리사에게 그때그때 “오늘은 된장국 만들어줘, 재료는 이것이고, 맛은 구수하게”라고 상세히 지시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프롬프팅’이다. 어느 쪽이 낫냐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파인튜닝 - AI의 뇌 자체를 바꾼다 파인튜닝(Fine-tuning)이란 이미 학습을 마친 대형 언어 모델(LLM)에 특정 분야의 데이터를 추가로 학습시켜 그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로 만드는 기술이다. 한마디로 AI의 성격과 지식 자체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의료 분야를 예로 들자. 일반 생성형 AI에게 “이 CT 사진에서 폐암 초기 병변 찾아줘”라고 물으면 일반적인 의학 지식수준의 답을 한다. 하지만 수십만 건의 흉부 CT 판독 데이터로 파인튜닝 된 AI는 전문 방사선과 의사 수준으로 병변을 식별한다. AI의 ‘기본기’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파인튜닝의 가장 큰 강점은 반복 설명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고객 응대 AI를 파인튜닝 하면 “우리 회사 말투로 정중하게 답해줘”라고 매번 지시하지 않아도, AI가 알아서 회사의 말투와 정중함을 유지한다. 마치 신입사원을 6개월간 교육해 회사 문화를 몸에 익힌 것과 같다. 그러나 파인튜닝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먼저 비용이 상당하다. 고품질 학습 데이터를 수천 혹은 수만 건 확보하고 전처리하는 과정에만 큰 금액이 소비될 수 있다. GPU 학습 비용도 만만치 않다. 또한 한 번 파인튜닝 한 AI는 그 분야에 최적화되는 대신 범용성이 떨어진다. 의료 전용으로 파인튜닝 한 AI에게 법률 계약서 검토를 시키면 오히려 엉뚱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롬프팅 – AI에게 제대로 지시하는 기술 프롬프팅(Prompting) 이란 AI에게 입력하는 질문이나 지시문(프롬프트)을 정교하게 설계하여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AI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AI와 ‘소통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같은 AI라도 어떻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큰 차이가 난다. “마케팅 기획서 써줘”와 “너는 10년 경력의 B2B 마케팅 전문가야.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한 6개월 디지털 마케팅 기획서를 작성해 줘. 예산은 2000만 원이고 목표는 신규 거래처 20개 확보야”라는 두 지시문의 결과물 품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이미 독자들은 알 것이다. 효과적인 프롬프팅의 핵심 기법으로 현재 널리 활용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역할 부여(Role Prompting)’는 AI에게 특정 전문가 페르소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너는 20년 경력의 세무사야”라고 시작하면 AI는 세무사의 관점에서 답변을 구성한다. ‘사고 연쇄(Chain of Thought)’는 “단계별로 생각해 줘”라고 요청해 AI가 논리적 추론 과정을 밟게 만드는 기법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효과가 크다. ‘예시 제공(Few-shot Prompting)’은 원하는 결과물의 예시를 2~3개 먼저 보여주고 같은 형식으로 작성하게 하는 방식이다. 프롬프팅의 최대 강점은 즉시성과 유연성이라 할 수 있다. 추가 비용 없이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고, 목적에 따라 매번 다르게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롬트팅의 한계도 명확하다. 매번 길고 정교한 프롬프트를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동일한 AI 모델을 여러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결과물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파인튜닝과 프롬프팅의 비교 내용을 정리한 표를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실제 활용 사례 -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사례 1 : 금융사의 파인튜닝 챗봇 국내 한 대형 증권사는 10만 건의 투자 상담 대화 데이터를 활용해 GPT 기반 모델을 파인튜닝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 GPT는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위험이 있습니다”라는 교과서적 답변만 반복했지만, 파인튜닝 된 AI는 “현재 고객님의 포트폴리오 구성을 고려하면 채권 비중을 10% 높이는 것이 리스크관리에 유리합니다”처럼 맥락에 맞는 개인화 조언을 제공했다. 상담 만족도가 42% 상승했다. 사례 2: 스타트업의 영리한 프롬프팅 전략 반면 자금이 부족한 스타트업들은 파인튜닝 대신 프롬프팅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콘텐츠 마케팅 스타트업 A사는 회사 브랜드 가이드 라인, 타깃 고객 페르소나, 기존 인기 콘텐츠 예시를 프롬프트에 담아 매번 AI에게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일관된 브랜드 톤의 콘텐츠를 추가 비용 없이 대량으로 생산한다. 결과, 마케터 1명이 혼자서 월 200개 이상의 SNS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례 3: 파인튜닝 + 프롬프팅의 결합 실제 현업에서는 두 기술을 함께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의료 기록 데이터로 AI를 파인튜닝(전문성 확보) 한 뒤, 의료진이 구체적 프롬프트로 진단 보조를 요청하는 복합 방식을 채택했다. 파인튜닝으로 의료 전문 언어와 임상 지식을 갖추고, 프롬프팅으로 각각의 경우에 맞게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선택의 기준은 명확하다.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권유한다. · AI를 하루에 수천 번 이상 반복사용 하는가? → 파인튜닝을 고려하라. · 특수 전문 언어(의료, 법률, 반도체 등)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하는가? → 파인튜닝이 효과적이다. · 다양한 업무에 유연하게 AI를 쓰고 싶고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 프롬프팅 역량을 키워라.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이나 개인에게는 프롬프팅이 먼저다. 파인튜닝은 대기업이 수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특화 서비스를 만들 때 유효하다. 하지만 프롬프팅만 잘해도 웬만한 업무 효율은 3~5배 향상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 두 기술의 미래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기술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OpenAI의 GPT-4 파인튜닝 API, Anthropic의 Claude 맞춤화 기능 등 대형 AI 회사들이 파인튜닝 비용을 대폭 낮추고 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수억 원이 들던 파인튜닝이 이제 수백만 원 수준으로 내려왔다. 또한 ‘프롬프트 캐싱(Prompt Caching)’이라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자주 쓰는 긴 프롬프트를 저장해두고 재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파인튜닝의 일관성과 프롬프팅의 유연성을 동시에 얻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5년 이후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흐름은 ‘RLHF(인간 피드백 강화학습)’와 프롬프팅의 결합이다. AI 사용자가 좋은 응답에 피드백을 주면, AI가 스스로 학습해 점점 나은 결과를 내놓는 방식으로, 이는 파인튜닝과 프롬프팅의 장점을 모두 취한 차세대 AI 맞춤화 방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이 부분에 대한 사용 힌트는 다음 주에 소개하고자 한다. 결국, 도구보다 전략이 먼저다. 파인튜닝이냐 프롬프팅이냐,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기술이 더 우월한가가 아니다.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자원(시간, 예산, 데이터)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RAG가 AI에게 ‘최신 자료를 건네주는 기술’이라면, 파인튜닝은 ‘AI의 뇌를 바꾸는 기술’이고, 프롬프팅은 ‘AI와 소통하는 기술’이다. 세 가지를 모두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조합하는 사람이 AI 시대의 진짜 전문가가 될 것이다. 당신의 비즈니스에는 어떤 맞춤화 전략이 필요한가?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주변의 AI 활용 사례들을 다시 살펴보자. 분명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는 멀티모달 AI 시대 텍스트, 이미지, 음성을 넘나드는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아보자.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3-08

호르무즈에 인질 된 세계 경제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좁은 해협이다. 해협의 길이는 약 160km, 가장 좁은 곳이 33km다. 중동 산유국들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는 핵심 해상통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20%인 하루 2000만 배럴이 이 해협을 통과한다. 문제는 좁은 항로 가운데 통항이 가능한 항로는 겨우 10km에 불과하고 이곳 대부분은 이란 영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란이 자국 영해에 들어오면 쏜다고 했을 때 전 세계의 유조선은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가야 할지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석유 한 방울도 못 나가게 하겠다”고 밝힌 지 일주일이 지난 8일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봉쇄 상태다. 평소라면 하루 100여 대의 선박이 지나다니던 것이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외신은 전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원유 수입도 80%가 이 통로를 이용한다. 한국은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이처럼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무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카드로 꺼낸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무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거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각국의 주식 등 금융시장도 큰 혼돈에 빠져 있다. 특히 에너지 대란에 따라 정유, 항공, 해운, 화학 등 모든 산업이 멈춰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각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풀릴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갈지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08

기름값 폭등, 물가불안 잠재울 대응책 있어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전쟁이 중동 전체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유가가 연일 폭등하고 있다. 지난 주인 6일 서부텍사스산 원유 가격이 하루 만에 12%가 올라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했다.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를 돌파하면서 국내 기름값도 덩달아 오르기 시작해 전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으나 서울지역 경우 휘발유 값이 ℓ당 2000원대에 육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에 의하면 8일 오전 9시 기준, 전국 주유소 평균 휘발유 가격은 ℓ당 1893.3원으로 나타나 있으나 국제시장의 불안정으로 국내 기름값의 추가 상승 압박이 이어지고 있는 분위기다. 국제유가는 이란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최악의 경우 150달러까지 폭등할 수 있다는 시장 전망도 있어 수입원유 의존도가 높은 우리경제에 미칠 파장에 우려가 크다. 일반적으로 국제유가가 오르면 수입물가가 먼저 오르고 약 1~3개월의 시차를 두고 소비자 물가에 반영된다. 석유류 가격이 곧바로 물가에 반영되는 것과는 달리 전기와 가스요금은 인상 압박이 커지고 물류비가 상승한 가공식품과 외식물가 등 서비스 요금까지 연쇄적으로 인상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한국은행은 유가가 10% 오르면 소비자 물가가 0.1~0.2%포인트 오른다는 분석을 한다. 이란발 유가 폭등이 길어지면 수입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내수는 얼어붙고 기업 투자가 줄어들면서 국가 성장에도 타격을 준다. 그 와중에 서민층이 받을 경제적 고통이 가장 심하다. 정부가 기름값 안정을 위해 유류세의 한시적 인하 조치 등을 시행하고 있으나 유가 안정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공급망 다변화도 이번 기회에 서둘러야 한다. 또 기름값 폭등을 계기로 부당하게 가격을 올리는 행위에 대해서도 유통 질서 확립 차원에서 엄격하게 단속해야 한다. 이란발 유가 폭등으로 지금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걱정하고 있다. 정부 차원의 대책도 중요하지만 지자체도 서민물가 안정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2026-03-08

TK외엔 시·도지사 후보 찾기도 어려운 국힘

한국갤럽이 지난 6일 발표한 정당 지지율 조사를 보면, 국민의힘은 지난해 8월 장동혁 대표 취임 후 최저치인 21%를 기록했다. 그 전주 갤럽조사보다도 더 떨어졌다. 반면, 민주당 지지율은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최근 6개월간 최고치(46%)를 기록했다. 지난해 8월 중순부터 민주당은 40% 내외, 국민의힘은 20%대 초중반의 구도가 지속되다가 최근 한 달간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보수텃밭인 대구·경북(TK)에서도 여당과 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이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TK지역에서 2월 첫째 주에는 여당 지지 22%, 야당 지지 49%로 국민의힘이 27%포인트 차로 크게 앞섰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여당 지지 36%, 야당 지지 38%로 나타났다. 야당에 대한 TK 민심 이반을 여실히 파악할 있는 조사결과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국민의힘에 대한 TK지역의 민심이반은 지난주 최대이슈였던 TK 행정통합 특별법 처리 무산이 핵심원인으로 보여진다. TK지역에선 국민의힘이 여권과의 특별법 협상 과정에서 내부 조율 없이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행정통합 기회를 사실상 무산시켰다고 보고 있다. 국민의힘 강성지도부가 주축이 된 ‘징계정치’도 지지율 하락에 한몫했다. 국민의힘 윤민우 윤리위원장은 올들어 임명되자마자 마치 조자룡 헌 칼 쓰듯 당내 비주류 인사들에 대한 중징계를 남발하고 있다. 한동훈 전 대표와 친한계인 김종혁 전 최고위원을 징계한 후 지난주에는 배현진 의원까지 중징계했다가, 법원으로부터 “재량권을 남용한다”는 레드카드까지 받았다. 현재 국민의힘은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TK지역 외에는 시·도지사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지방선거 승부처인 서울·부산시장과 경기도지사 경선의 경우 그동안 예비주자로 거론돼온 유력 인사들이 모두 출마 의사를 거둔 상태다. 이러니 국민의힘 안팎에서는 장동혁 지도부가 지방선거 승패와는 상관없이 당권 유지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2026-03-08

사물의 소리

밤은 사물의 시간이다.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 화양(華陽)에 이사 온 처음 몇몇 해에는 한밤중에도 여러 번 일어나야 했다.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내려가 보면 사위가 돌연 고요했다. 나중에야 그것이 사물들의 고요한 합창이거나 독주 혹은 교향곡임을 알게 되었다. 침묵하던 사물이 느닷없이 살아나 소리를 내는 신비한 밤. 만화영화의 귀재(鬼才)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天空)의 성 라퓨타’(1986)에서 영웅적인 소년 주인공 파즈가 동굴에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파즈에게 밤은 사물의 시간임을 일깨워준다. 고요하게 침묵하던 사물이 밤이면 제각각 소리를 내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인은 방해석(方解石)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파즈에게 들려준다. 밤에 담긴 소리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명하게 각인한 이는 연암 박지원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한밤중에 요하(遼河)를 건너던 기억을 반추하면서 밤과 소리의 상호성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인간의 감각이 낮에는 눈으로 쏠리지만, 어둠이 장악하는 칠흑의 밤에는 귀가 감각의 중추가 된다. 그런 까닭에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가 밤에는 훤히 들리는 게다. 도회의 밤에는 어둠이 깃들만한 시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불야성(不夜城)처럼 환한 공간에서 인간의 감각기관은 퇴행 일로를 걷는다. 밤과 낮의 분별이 불명확한 21세기 20년대 아파트와 아스팔트와 대중교통은 태곳적 감촉을 앗아가 버린 것이다. 고작해야 층간소음으로 인한 민원 때문에 낯을 붉혀야 하는 이웃 아닌 이웃들의 갈등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밤에 들리는 게 어디 사물의 소리뿐이랴?! 우리 내부에서 요동치는 내면의 소리도 낮이 아니라, 밤 시각에 활성화된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자신의 내면과 만나지 못하는 현대인이 자기의 심연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각은 짜장 밤이기 때문이다. 창에 기대거나, 벽을 향하거나, 가부좌를 틀거나 우리는 깊은 밤에 고요히 내면을 응시한다. 그때 들려오는 아련한 소리에 귀 기울이면, 오래전에 잊힌 얼굴과 사건과 인연이 살아 나온다. 때로는 환하게 때론 흐릿하게, 혹은 강렬한 음악과 함께, 더러는 애틋한 연가(戀歌)와 함께. 그때의 그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잠시 생각한다. 입가에 미소가 머물기도 하고, 낮은 한숨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제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버린 날들. 하지만 우리는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기억마저 퇴색한 시점에 감상(感傷)에 젖어 정신을 흐느적거리게 방치하면 아니 된다. 모든 떠나간 것은 그리운 법이지만, 떠나간 것들이 있기에 지금과 여기의 우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립고 아쉬운 정념이 우리를 휘감고 돈다 해도 이젠 어쩔 도리없이 고개 흔들어야 한다. 오지 않은 날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찻잔이 달그락거리고, 기둥 모퉁이가 쩍, 소리 내며 갈라지고, 냉장고가 윙, 하며 갑자기 돌기 시작하고, 보일러가 힘차게 돌아가는 밤이다. 겨울밤이 사물의 소리와 함께 시나브로 작별하려 한다. 화사한 봄날 사물은 어떤 소리를 우리에게 보낼 것인지, 궁금한 아침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08

TK경제, 지금은 전환의 시간

요즘 대구·경북 경제를 두고 “바닥을 찍었다”라는 말이 들린다. 일부 지표는 반등 신호를 보낸다. 아파트 입주전망지수가 개선되고 고용지표도 미세하지만, 회복 흐름을 나타낸다. 겉으로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대구 동성로의 자영업자나 포항의 중소기업 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숫자는 회복을 말하지만, 체감은 침체에 머무는 이 간극 속에서 우리는 사이클을 그리는 경기 변동이 아닌 구조 변화의 초입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대구의 상권 지형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도심 상권은 유동 인구 감소와 온라인 소비 확산이라는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반면 신흥 주거지와 혁신도시 주변 상권은 성장세를 이어간다. 소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기 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경제 지도다. 포항을 중심으로 한 철강 산업 도시의 변화는 더욱더 상징적이다. 포스코의 전환 투자와 친환경 공정 도입이라는 과제는 미래의 경쟁력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지만 반면 현실적인 세계적인 관세장벽, 전기료 부담, K-스틸법의 후속 조치 지연으로 중소 철강업체와 지역 상권의 체감 경기는 가라앉고 있다. 미래의 ‘비전’이 아무리 밝아도 지역 경제는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속도의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 고도화가 지역 전체의 활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과 정책적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주택시장에서도 유사한 신호가 감지된다. 입주전망지수 개선은 미분양 우려의 완화 때문이지만 실수요자의 구매 여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건설·부동산 관련 지역 업체들의 체감 경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시장이 바닥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과거와 같은 급격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인구 구조의 장기적 흐름이 관여하고 있다. 청년층 유출과 고령화로 소비 기반이 약화하는 가운데 산업은 적은 노동력과 더 높은 기술력으로 재편되고 있다. 과거처럼 인구 증가와 생산 확대가 동시에 이뤄지던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지역 경제는 얼마나 성장하느냐보다 어떻게 버티고 재편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다고 비관론에 머물 필요는 없다. 배터리 소재와 미래 철강, 미래 로봇, 첨단 부품 산업 등 대구·경북이 축적해 온 제조 역량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다. 중요한 포인트는 산업 전환의 성과가 지역 경제로 파급되는 통로를 연결하는 데 있다. 지표 반등이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지역 경제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지역 경제의 미래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읽고 준비하는 지역 공동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지역 공동체의 선택은 지역 주민 개개인의 선택이 결정한다. 마침 우리는 그 선택의 마지막 기회를 오는 6월 맞이한다. 이번 선거는 다수결로 우리의 미래를 맡길 정치인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당장 전환기를 맞이한 대구·경북 경제의 지자체별 과제를 누가 가장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에 주목해야 할 때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08

아랫목

인구감소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변화다. 한 가정에 한 아이가 자연스러운 시대, 집 안은 조용해졌고 형제자매 사이에서 부딪치며 배우던 양보와 타협의 기술은 점점 희미해졌다. 세대 간 공감하는 간극은 넓어져, 각자의 논리는 분명해지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 듯 보인다. 내복이 잠옷이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려 본다. 구들장 밑으로 연탄 불길이 지나가고 나면 가장 먼저 따뜻해지는 자리가 있었다. 검게 그을린 바로 아랫목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아랫목으로 모였다. 두툼한 이불을 펴고 온 가족이 둘러앉거나 누워 발을 맞댔다. 서로의 발이 닿는 것과 이불속 더운 공기와 어울린 발 냄새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닿은 그 체온이 하루의 피로를 녹여 주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밖에서 들은 소식, 부모의 걱정과 식구들의 투정이 그 자리에 풀어졌다. 아랫목은 단순히 따뜻한 자리가 아니었다.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함이 모이는 곳, 그래서 마음도 모이던 자리였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이치를 배웠고, 아이의 말을 들으며 어른은 세상의 변화를 체감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좋았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온돌방 아랫목은 늘 가족의 마음을 먼저 데워 주었다. 지금, 우리의 집은 더 넓고 효율적인 구조이다. 하지만 함께 둘러앉을 아랫목은 사라졌다. 꾸며진 거실은 설렁하게 비어 있고, 각자 방의 휴대전화 화면은 또 다른 세상이다. 한 공간 아래 살지만 서로 다른 시간과 취향 속에 머문다. 대화는 짧아지고, 표정 대신 메시지가 오간다. 가족은 함께 있으되, 동시에 각자의 공간은 따로 있다. 편리함과 독립성은 시대의 흐름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아랫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식탁에서, 거실 소파에서, 혹은 동네 작은 모임에서라도 우리는 서로 공감한다면 다시 함께 머무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표정을 읽고, 침묵까지 공유하는 시간 말이다. 관계는 멀리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데워지는 것이다. 인구가 줄어들어도 우리라는 관계까지 함께 줄어들 필요는 없다. 아랫목의 정신은 공간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가장 따뜻한 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주고, 그 자리로 기꺼이 모이는 마음이 곧 공동체의 출발점이다. 비록 오늘의 사회가 각자의 방과 화면 속으로 흩어져 전통적 공동체를 말하기 어려운 구조일지라도, 아랫목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자는 제안이다. 자리를 조금 내어주고, 대화의 속도를 늦추는 작은 배려가 모일 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난다. 형태는 달라져도 좋다. 온라인이든, 작은 모임이든 그 안에 따뜻함을 나누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하다. 인구는 줄어도 우리의 온기만은 줄지 않는 사회, 서로의 발을 다시 맞댈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08

하품밖에는 버릴 게 없는

소는 하품밖에는 버릴 게 없다(고 한다) 버려진 소의 하품은 어디로 가는가 정처 없이 헤매다 우연히 내 입으로 들어와 나의 하품이 된다 내 뼈다귀를 소 뼈다귀로 만들고 내가 하루종일 쳐다보는 컴퓨터 모니터를 소가 일구는 밭으로 만든다 멍에 메고 일하면 기분 더럽지만 멍에라도 없으면 하루는 또 너무 길어 오늘 하루도 또 뭐라도 하며 보내야만 하고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을 일구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문득 하품밖에는 할 게 없어지고 하품 말고는 다 버려도 좋을 만한 존재가 되어 하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이나 한번 해본다 하품이라도 내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결국 내 안에 갇혀 뼈빠지게 일하다 죽게 될 삶 하품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서 ―황유원, ‘하품’ 전문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 , 난다) 이 세상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생을 마칠 때까지 잠시 머물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고 했다. 오래 남는 시 한 줄이나 영화 대사는 감동이나 교훈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독백으로 대화를 만들어 낸다. 황유원의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에는 ‘방학’ ‘연중무휴’ ‘평상’‘하품’ 등 멈추지 않는, 아니 멈출 수 없는 곤비한 삶에 대한 사유와 쉼 없는 존재의 역설로 쉴 틈이 없다 “하품밖에 버릴 게 없”는 소의 거대한 멍에는 소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하루종일 쳐다보는 컴퓨터 모니터”는 소가 일구는 밭과 다름이 아니다. 이건 ‘소’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려는 시인의 시공간을 뛰어넘은 진지한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화자는 지향점을 야심 차게 제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돌파해가지 않는다. 눈에 비친 삶의 인상들을 소리나 이미지를 안배해 과장 없는 일상의 독백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미 시인의 전작들에서 음악이나 그림을 통해 보여온 것들이 매번 새롭게 인식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건 그가 좋아하는 것들 악기든 공연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그리고 국립국어원을 경유한 사물과 언어의 감각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넘나들며 혼융하는 장르의 흐름은 멈춘 듯 새삼 이어지며 팽팽한 어법이 된다.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작품들이 대부분 역설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간과 존재가 하나의 대상에 동시에 작용하는 그의 작업은 인용되지 않은 시 ‘연중무휴’의 “존재와 비존재에 초근접한 순간에도 잠시도 쉴 수 없는 게 존재의 운명이라는 듯” 삶의 순간 쉼의 순간에 처하는 불가해한 감정이랄 수 있겠다. “일 년째 비어 있는 카페 창문에는/연중무휴라는 네 글자가 남아 있었다/일 년 동안 쉬었으면서 연중무휴라니//비어 있는 동안에도 쉴 틈은 없다는 듯(···.) 소낙눈 내리는 삼월 아침/혀 없는 입처럼 텅 비었어도/열린 창으로 존재를 시리도록 환기시키며/카페는 오늘도 삶 숨쉼, 삶 숨쉼, 연중무휴로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시인의 탁월한 삶과 존재에 대한 은유적 감수성에 감탄하며 몰입할수록 시인이라는, 삶이라는 예술가는 하나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일요일의 화가(Sunday painter)’란 평일에는 주업에 종사하다가 주말에만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흔히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를 ‘일요일의 예술가’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 표현이 마음에 들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풍기는 일요일의 정서까지 사랑하게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곧 삶이라는 아이러니가 된다. “결국 내 안에 갇혀 뼈빠지게 일하다 죽게 될 삶” 죽을 때까지 노동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멍에를 잠시나마 내려놓은 순간일 터이다. 그러니까, 소의 하품을 그려내는 이 신랄한 블랙 코미디를 통해 모든 반복 중에서 가장 극심한 반복이란 ‘일’과 같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긴 겨울 방학이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풍경은 삼월로 이행하는 이월과 같다. 이때 한순간이나마 방학을 방학으로, 쉼을 쉼으로, 잠깐이나마 ‘하품’처럼 머물러 볼 수는 없을까. “하아아암, 하품이라도 내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희정 시인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