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성과 세계성' 두 미학의 융합

박목월(1916∼1978)은 일찍부터 작품성에 대해 높은 평가를 얻은 시인이었다. 등단 무렵 이미 소월에 비견될 만큼 각광받는 서정 시인이었다. 1939년에 등단해서 1946년에 ‘청록집’을 낸 후 1978년 타계할 때까지 46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그는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한국 시단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다.

40년 동안 그는 쉼 없이 시를 썼고, 늘 깨어 있는 시 정신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갱신시켰다.

그의 시 세계는 한국 현대 시사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깊이와 풍요를 보여준다. 박목월이 없는 한국 현대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올곧은 시 정신과 남다른 언어감각 그리고 예민한 서정성으로 독보적인 시 세계를 확립한 시인이며, 40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시 세계를 개척했던 보기 드문 시인이다. ‘향토성과 세계성’이라는 두 가지 미학과 속성을 함께 달성하고 있는 그의 독창적이고 깊이 있는 시세계는 많은 학자와 연구자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으며 깊은 해석을 낳게 했다.

■목월의 청년시절

박목월의 본명은 영종(泳鍾)이다. 1916년 1월6일 경상북도 경주군 서면 모량리 571번지에서, 아버지 박준필(朴準弼)과 어머니 박인재(朴仁哉) 사이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체적으로 유복해 가을추수를 50여 섬이나 했다고 한다.

본래 기독교를 믿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면서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목월은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금융기관의 서기로 취업해 근무를 했다. 1937년 9월 어느 날 건천네거리 홰나무 아래에서 ‘문장’지에 투고했던 작품이 실린 것을 우연히 신문을 통해 보게 됐고, 그 뒤 잡지와 쌀 한 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5원의 원고료를 받았다고 한다.

금융조합에 근무한 몇 년간은 참으로 유배된 생활과 마찬가지였기에 문학청년이었던 그의 눈에는 어쩌면 아름다운 고도 경주의 산천과 하늘이 황폐한 것처럼 비쳐졌을는지도 모른다. 그 반면에 ‘문장’지를 통해 등단한 뒤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을 것이다.

1941년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외치면서 이른바 창씨개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때 목월은 타오르는 분노를 삭이려고 시 한 편 썼다.

“내사/애달픈 꿈꾸는 사람/내사/어리석은 꿈꾸는 사람/밤마다 홀로/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기인 한밤을/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어느 날에 사/어둡고 아득한 바위에/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오.”

■문학교류

목월문학의 본질은 흐르는 물과도 같은 경계가 없는 서정성이다. 그래서 흔히들 북에는 소월(素月), 남에는 목월(木月)이라고 일컬었다. 문장지의 추천제가 있기 전의 등용문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일간신문의 신춘문예가 전부였다. 이런 문단으로 향하는 좁은 길에서 ‘문장’의 등장은 문학의 통로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목월은 바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문장지에 시 ‘길처럼’과 ‘년륜’ 두 편을 추천한 선자는 정지용이었다.

“머언 산/구비구비 돌아갔기로/산구비마다/구비마다/절로 슬픔은 일어…/뵈일 듯 말듯한 산길/산울림 멀리/울려나가다/산울림 혼자/돌아나가다/…어쩐지 어쩐지/울음이 돌고/생각처럼 그리움처럼…/길은 실낱같다.” - ‘길처럼’ 전문.

등단한 뒤 계속되는 문학수업 중 우연히 만난 조지훈이 목월에게 시(詩)를 한 편 보였는데 ‘완화삼’이었다. 이 시에 목월은 ‘밭을 갈아’란 근작 시 한 편으로 화답했으니, 두 사람이 만나게 된 일화도 참으로 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훈이 목월에게 어느 날 몇 시에 경주 역에서 만나자고 전보를 쳤다고 한다. 연락을 받은 목월은 그 날이 오자 난감했다. 서로 초면인데 지훈을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생각끝에 ‘朴木月’이란 이름을 쓴 깃발을 들고 마중을 나갔는데, 깃발을 들어 흔들기도 전에 훤칠한 키에 검은 장발을 한 청년이 지훈이란 것을 단박 알아볼 수 있었다.

세인으로부터 절찬을 받은 시 목월의 ‘나그네’는 지훈이 보낸 ‘ 낙화’ 란 시의 화답작품이다.

문학교우를 꼽자면 김동리, 이기현, 조지훈,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박두진 등을 들 수 있다.

■작품세계

목월의 작품세계는 동화성(童話性)과 여성주의를 배제할 수 없다.

C. D. 루이스는 시를 이미지를 언어로 그린 그림이라 했지만, 다음 시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그것도 아담한 수채(水彩)의 동양화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머언 산 靑雲寺/낡은 기와집/산을 자하산/봄눈 녹으면/느릅나무/속잎 피어가는/열두 구비를/청노루 맑은 눈에/도는/구름.

산은 九江山/보라빛 石山/산도화 두어 송이/송이 버는데/봄눈 녹아 흐르는/옥같은 물에/사슴은 암사슴/발을 씻는다.”

이 시는 ‘산도화(山桃花)’ 전문이다. 이렇게 노루와 사슴을 등장시켜 한 마리는 푸른 초원의 빛깔을 띠게 하고, 한 마리는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흰 눈을 얹은 꽃사슴이다. 그리고 흔히 여성의 상징성인 달, 사슴, 물, 댕기 등 시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예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나그네. 갑사댕시기 남끝동 삼삼하고나-갑사댕기.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목단 여정. 삼월을 건너가는 햇살아씨-산도화. 물을 청하니 팔모반상에 받쳐 들고 나오네. -도화 한 가지.”

다음 ‘산이 날 에워싸고’의 시는 한계의식을 초월한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품에 안기고자 하는 소망이 직설적으로 표현돼 있다.

작중 화자에게 산은 ‘씨나 뿌리고 밭이나 갈며, 살기를 권한다. 그믐달처럼‘을 거듭 쓴 것은 시어(詩語)의 점층법을 도입한 것이다. 그믐달은 저문 하늘에 핼쓱히 떠서 넘어 가지만, 보름달로 둥글 만월의 꿈을 잉태하고 있듯 사위어지는 목숨에서는, 어떻게 보면 체념적인 것이 수반되지만, 체념밖에 있는 인간의 한계를 수용하면서 깊은 못물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삶의 힘, 맹자(孟子)가 일컬었듯 가까운 듯 말을 하지만 실로 먼 뜻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목월의 시(詩)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한국문인협회 경주지부

시인 박목월 연보

▲1916년 경북 경주 출생

▲본명은 영종(泳鍾)

▲1935년 계성중학교 졸업

▲1940년 문장에 ‘가을 어스름’ ‘연륜’으로 추천 완료돼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상임위원, 조지훈 박두진과 ‘청록집’(을유문하사)간행, 동시집 ‘초록별’(조선아동문화협회 간행), 어린이 잡지 ‘아동’ 간행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1955년 제3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첫시집 ‘산도화’(영웅출판사) 간행

▲1959년 시집 ‘난 기타’(신구문화사) 간행

▲1962년 한양대 국문과 교수, 동시집 ‘산새알 물새알’(여원사) 간행

▲1964년 시집 ‘청담’(일조각) 간행

▲1968년 대한민국 문학상 본상 수상, 시집 ‘경상도 가랑잎’(민중서관) 간행, 연작시집 ‘어머니’(삼중당) 간행, ‘박목월자선집’(삼중당) 전 10권 간행

▲1973년 ‘심상’ 간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회장

▲1976년 시집 ‘무순’(삼중당) 간행, 한양대 문리대 학장

▲1978년 사망

▲1979년 유고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영산) 간행

*2006년 4월 경주 토함산 기슭에 그를 기리는 ‘목월문학관’이 세워졌다. 이어 지난해 2월부터 목월문학관 문예창작대학을 개설하고 역량있는 신인들을 기르고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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