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가 생전에 끼시던 돋보기를 발견했다.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유품을 정리하며 수많은 물건을 비워냈지만 손때 묻은 이 안경만큼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안경알 너머로 아버지가 평생을 걸쳐 찾아내고 응시했던 수많은 글자와 세상들이 여전히 그 안에 고여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그 안경을 챙겨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노년은 적막했다. 귀가 어두워지면서 세상의 활기찬 소음들은 아버지의 문밖에서 길을 잃었다. 소리로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아버지에게 이 돋보기는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하고도 절박한 창구였다. 지인들이 보내온 안부 문자, 서툰 맞춤법으로 사랑을 전하던 손주들의 메시지를 아버지는 이 렌즈를 통해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셨다. 아버지에게 돋보기는 사물을 크게 보여주는 도구만이 아니라, 고립된 침묵 속에서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려는 아버지의 마지막 의지였다.
돋보기 렌즈가 사물을 확대할 때, 그 이면에는 소외된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함이 서려 있다. 아버지에게 그 작은 유리알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붙들었던 마지막 끈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한 파도 소리처럼 흩어질 때, 아버지는 침묵의 방 안에서 홀로 돋보기를 닦으셨을 것이다. 깨끗하게 닦인 렌즈 위로 자식들의 짧은 안부를 올리고, 당신의 시력을 다해 그 글자들을 마음속에 새기던 시간들. 멀어져 가는 세상을 다시 끌어당겨 품에 안으려는 눈물겨운 포옹이었음을 나는 체감한다.
책상 앞에 앉아 아버지의 안경을 가만히 써 본다. 시야가 일렁이며 초점이 흐릿해지지만 그 굴곡진 렌즈 너머로 아버지가 걸어온 생의 궤적이 만져지는 듯했다. 아버지는 평생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다. 때로는 고집스럽고 무뚝뚝해 보였지만, 당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 앞에서는 한없이 올곧은 분이었다. 그 안경은 아버지가 세상을 왜곡해서 보기 위함이 아니라 흐려지는 세상 속에서도 본질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던 정직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누군가는 욕망의 색채가 덧칠해진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화려하게만 보려 하고, 누군가는 편견이라는 도수가 맞지 않는 렌즈로 타인의 삶을 왜곡하여 재단하기도 한다. 내가 낀 안경의 색깔에 따라 세상은 때로 차갑게 얼어붙기도, 때로 지나치게 과열되기도 하는 법이다. 그 주관적인 굴곡 안에서 우리는 종종 사물의 본질을 놓치고,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적으로 망막에 담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돋보기는 달랐다. 그것은 화려한 색을 입히지도,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흐릿해진 경계를 선명하게 끌어올리고 작아서 보이지 않던 진실을 정직하게 확대할 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안경을 닦으며, 세상이 아무리 소란하고 변칙적일지라도 그 안에서 변하지 않는 ‘원칙’이라는 상(像)을 맺기 위해 평생을 분투하셨던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곁에 계시지 않지만 나는 이 안경을 통해 아버지의 시선을 배우려 한다. 아버지가 돋보기로 작은 문자 속에 담긴 진심을 찾아내셨듯, 나 또한 삶의 소소한 풍경들 속에서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싶다. 원칙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던 그 투명한 시선을 물려받고 싶다.
이제 아버지의 유품은 나의 책상 위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아버지가 돋보기를 통해 세상을 읽었다면, 나는 그 시선을 빌려 세상을 ‘기록’하려 한다. 타협하지 않는 원칙과 올곧은 성품이 때로는 고독한 길이었을지라도, 아버지는 한 번도 그 안경을 벗어 던지지 않았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작가로서, 때로는 눈앞의 이익이나 편안함에 시야가 흐려질 때마다 아버지의 안경을 떠올릴 것이다. 돋보기가 작은 것을 크게 보이게 하듯, 남들이 쉽게 지나치는 미소한 존재들의 가치를 크게 들여다보고 아버지가 지켜냈던 그 투명한 진심을 문장 사이에 촘촘히 박아 넣고 싶다. 아버지의 안경은 이제 나의 시력이 되어 내가 써 내려갈 수많은 원고지 위를 묵묵히 동행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돋보기를 곁에 두고 펜을 든다. 이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이전보다 조금 더 선명하고, 조금 더 정직하다. 아버지가 그러하셨듯, 나 역시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굽힘 없이 그리고 따뜻하게 지켜내며 살아내고 싶다.
/김경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