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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우유

등록일 2026-06-17 19:53 게재일 2026-06-18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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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언스플래쉬

며칠 전 방문한 카페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물건을 발견했다. 우유가 가득 든 녹색 플라스틱 박스.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우유 박스를 교실까지 들고 올라와야 하는 우유 당번들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우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미지근한 온도의 우유도, 우유를 마시고 난 뒤 입안이 텁텁해지는 것도 싫었다. 아니, 사실 내가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던 데에는 아홉 살 무렵 교실에서 일어난 ‘우유 테러 사건’의 영향이 컸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학교에서 나눠준 물건을 꼼꼼히 챙겨 책가방에 넣어두고는 정작 집에 와서는 잘 꺼내보지 않는 아이였다. 부모님 사인을 받아야 하는 가정 통신문이나 땀 냄새가 밴 체육복 같은 것들을 가방 안에 며칠씩 잠재워두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날 벌어진 ‘우유 테러 사건’의 범인에게 고의성이 없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건은 점심시간 전 수업 때 일어났다. 오래전 일임에도 정확히 기억하는 건, 그 순간이 너무나 평화로운 장면으로 내게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여름방학을 앞둔 오후, 한여름의 진하고 강렬한 햇빛이 쏟아졌다. 당시 나는 창가 줄 맨 뒷자리에 앉아,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몰래 졸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앞 사람의 등 뒤로 몸을 숨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별안간 구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냄새에 졸음이 단번에 달아났다. 나는 고개를 번쩍 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시선은 전부 칠판을 향하고 있었다. 잘못 맡았나? 그러나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명확한 냄새였는데… 

 

아리송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리던 찰나,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선생님, 누가 똥 쌌어요!” 평소 장난기가 많은 개구쟁이였던지라, 선생님은 그 아이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수업 시간에 장난하면 안 된댔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앞자리 아이가 책상 옆에 걸어둔 가방에서 무언가 뚝뚝 흘러내리는 걸 발견했다. 동시에 교실 전체로 퍼지는 비릿하고 지독한 냄새. 나도 모르게 코를 움켜쥐었다.

 

그 아이의 앞과 옆에 앉은 아이들이 코를 틀어막으며 소리를 지르자, 가방 주인인 아이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고개만 푹 숙였다. 가방 아래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가방을 열어 보라고 지시했다. 아이가 한참을 머뭇대기만 하자, 참다못한 선생님이 가방을 집었다. 지퍼를 열고 안을 들여다본 선생님이 깜짝 놀라 가방을 떨어뜨렸다. 활짝 열린 가방 틈으로 누런 액체가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액체 위에서 하얗고 통통한 구더기들을 발견했다. 구더기는 온몸을 좌우로 비틀며 꿈틀대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헛구역질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급히 걸레를 가져와 바닥에 고인 우유를 닦은 선생님이 한 손엔 가방을, 다른 손엔 가방 주인의 손을 잡고 교실 밖을 빠져나갔다. 한참 후 돌아온 선생님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여름에는 우유가 빨리 상하니 가방 안에 두지 말고 곧장 먹도록 해라.”

 

그날 이후 우리 반에는 우유를 다 마신 뒤 빈 우유갑을 선생님께 확인받아야 하는 규칙이 새로 생겼다. 우유가 싫었던 나는 내심 그 아이를 원망했다. 아이들은 가방 주인에게 ‘구더기 우유’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너무 길었던 탓인지 나중에는 ‘구더기’로만 불렀다. 구더기가 된 아이는 반이 바뀌기 전까지 은근한 왕따가 되었다. 직접적인 괴롭힘은 없었으나, 모두 그 아이와 짝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가방에 또 구더기 우유가 있으면 어떡해. 누군가 꺼낸 불안이 모두를 잠식한 탓이다. 해가 바뀌기 전까지 그 아이에겐 짝이 없었다.

 

여전히 나는 그 아이의 이름과 얼굴,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 남은 건 ‘구더기’라는 단어 하나뿐이다. 나 역시 가방 속 물건을 꺼내놓지 않는 아이였다. 구더기 우유를 발견한 날, 나는 집에 돌아와 가방을 열어 보았다. 각종 유인물과 교과서 틈에 우유 한 갑이 숨어 있었다. 언제 넣어둔 건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며 우유를 꺼냈다. 어쩌면 나 또한 ‘구더기 우유’가 됐을지도 몰랐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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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빈 소설가

나는 턱을 괸 채 직원 둘이 우유 박스를 카운터 안쪽으로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햇볕이 너무 강하네.” 맞은편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친구가 말했다. 그러게, 나는 대답했다. 오늘 같은 날씨엔 너무 오래 두지 않는 게 좋겠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나는 조금 남은 라테를 털어 마셨다. 고소한 우유 향이 입안에 남았다.
/양수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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