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대로를 달려 4번 국도로 갈아타고 가다가 황학리에서 마을 길로 접어든다. 신동입석 표지판을 따라 풍월문을 지나면, 언덕 위에 오래된 선돌이 우뚝 서 있다. 비바람에 깎이고 허리가 부러져 깁스를 한 채로 선 선돌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익숙하다. 선돌은 묻는다. 왜 서야 하는가, 왜 이 자리에 남아야 하느냐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내게도 홀로 서야 할 사람이 있다. 백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건강이 나빠져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올까 봐 안전이라는 이유로 손을 묶었다. 2주가 지난 뒤 혼자서는 설 수도 없게 된 어머니의 모습은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에게 선다는 것은 이제 당연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요양병원에서 시간은 잔인했다. 집에서는 자유롭게 걷던 몸이 손이 묶인 채 누워 있는 시간으로 인해 급격히 약해졌다. 집에선 돌볼 사람이 없어 병원에서 치료하고 방문 간병을 병행하기로 했다. 병원에 도수치료를 의뢰하고, 형제들이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걷기 연습을 시켰다. 작은 반복들이 모여야만 어머니의 발은 다시 땅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처음 보행기를 잡고 섰을 때, 어머니의 손은 보행기를 꽉 움켜쥐었고,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손에 힘만 들어가고 발은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는 선돌의 깁스처럼 어머니의 허리를 힘껏 잡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게 했지만,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선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선돌은 허리에 깁스를 한 채로 자리를 지킨다. 비를 맞고 바람에 깎여도 스스로 서 있는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고, 선돌로 인해 나무도 관리된다. 그 모습은 누군가에겐 보호로 읽힌다. 어머니의 한 걸음 한 걸음도 같은 맥락이다. 떨리는 발로 서는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위로이고, 용기다.
서 있다는 건 자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견디는 태도이며, 한 사람의 자존감이 걸린 일이기도 하다. 선돌이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경계를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의 홀로서기도 그러하다. 언제나 자식을 위해 목욕하고 기도를 올리던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자식으로서 어머니 삶의 자리를 지켜 드리고 싶은 욕심과 어머니 자신이 온전한 삶을 다시 회복하길 바라는 간절함 사이에서 나는 자주 흔들린다. 사회생활 때문에 면회 가는 날을 자꾸 빼앗길 때면 마음은 불편하고 죄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가능하면 자주 찾아가 어머니와 함께 걷는 연습을 계속하려고 한다. 내게 어머니의 걸음은 일상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나이 많은 어머니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어머니의 눈빛과 손끝에서 분명한 소망을 보았다. 혼자 서고 싶은 욕구, 스스로 발로 일어서고 싶은 욕망이 아직 남아 있음을. 그 욕망을 함께 견뎌내는 것이 내 역할이라면 나는 그 역할을 기꺼이 떠맡을 것이다.
연습 끝에 어머니가 힘겹게 두 걸음을 옮기셨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여러 걸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작은 진전이 쌓일 때 비로소 걸음의 리듬이 돌아온다는 것을. 선돌이 깁스하고도 서 있음을 마다하지 않듯, 어머니도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작해도 된다는 걸. 그 자리에 서는 것 자체가 이미 의미 있음을 안다.
선돌 앞에서 나는 다짐한다. 서 있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며 주변을 지키는 태도다. 어머니의 다음 걸음을 위해 나는 매일 어머니 옆에 설 것이다.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이고, 함께 발을 내디딜 것이다. 그 손길이 어머니에게는 등불이 되고, 나에게는 삶의 방향이 되기를 바란다.
서는 일은 혼자의 일이 아니다. 선돌과 소나무가 서로를 보듬듯, 내가 어머니의 자리를 지켜줄 때 비로소 온전한 홀로서기가 가능하다. 오늘의 한 걸음이 내일의 굳건한 발걸음이 되도록, 나는 다시 선돌을 떠올리며 어머니 곁으로 향한다.
/김규인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