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간판이 늘어선 포항시 북구 여천동 ‘꿈틀로’ 골목. 지난 14일 오후 찾은 이곳에는 반세기 전 포항 예술의 자존심이었던 ‘청포도다방’이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사진작가 박영달이 1960년대 운영하던 음악감상실을 2017년 도시재생사업으로 복원한 이곳은 이제 지역 작가와 시민이 어우러지는 문화의 보루가 됐다.
이 공간의 뿌리는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영달은 생전 자신의 다방을 예술가들의 해방구로 내어줬다.
특히 독립운동가 이육사가 시 ‘청포도’의 시상을 떠올린 포항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려 문을 연 청포도다방은 통신망조차 없던 시절 지역 예술가들이 고뇌를 나누던 당대 유일의 소통 창구였다.
이후 세월 속에 묻혔던 전설적인 공간은 8년 전 ‘문화경작소’라는 이름을 달고 부활해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다방 안은 작가들의 고집스러운 취향으로 채워졌다. 실내 테이블은 작가들이 목재를 직접 끊어와 망치질해 만들었고 손님에게 나가는 커피잔조차 모양과 색깔이 매번 다르다. 정형화된 규격 대신 예술가의 감성을 담겠다는 의지다.
이진희 꿈틀로 사회적협동조합 대표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라 박영달의 예술 정신과 이육사의 시심(詩心)이 깃든 온기를 복원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운영 방식도 일반 카페와는 궤를 달리한다. “음료를 마시지 않아도 좋으니 언제든 들어와 쉬어가라”는 이 대표의 방침에 취업난과 사회생활에 지친 MZ세대의 발길이 이어진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개인 작업을 하다가도 곁에 있는 작가들과 자연스럽게 마주 앉아 인생 상담을 나눈다. 60년 전 예술가들의 사랑방이 2026년 청년들의 안식처로 변모한 셈이다.
이 대표는 “공간이 주는 아늑함을 느꼈다는 청년들의 말 한마디가 무모한 운영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훈훈한 풍경 뒤에는 현실적인 고충이 깊다. 문화재단으로부터 장소와 공과금은 지원받지만, 인건비와 물품비는 오로지 음료 매출로만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면서 작가들의 당번 수당까지 챙기기엔 역부족인 구조다.
이 대표는 “이곳은 지역의 문화를 잇는 공공재에 가깝다”며 “작가들의 사명감에만 기대기보다 운영 인건비 등 실질적인 지원 대책이 뒷받침되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다방 앞마당에는 이 대표가 직접 심은 청포도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재작년 심은 나무는 지난해 처음으로 알알이 열매를 맺었다. 그는 이 나무를 보며 서두르지 않는 문화 재생의 가치를 되새긴다.
“청포도는 단숨에 익지 않습니다. 포항의 문화도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단단하게 여물어가길 기다릴 뿐입니다”
60년 전 박영달의 살롱은 이제 이진희 대표와 작가들의 손을 거쳐 포항 원도심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장 따뜻한 통로가 되고 있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