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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맞으며

등록일 2026-06-07 17:33 게재일 2026-06-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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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벌써 열흘이 다 되어간다. 지난 주말 무렵 목이 칼칼하고, 으슬으슬 한기가 돌고, 온몸이 천근만근 무거운 데다가, 욱신욱신 전신이 쑤셔온다. 간간이 흐르는 땀으로 속옷이 젖는다. 이건 분명 몸살감기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좋은 약일 터, 비상약을 찾아 종류별로 먹어 본다. 하지만 약효는 신통치 않다. 그렇지만 감기 때문에 병원에 가는 건 내 생리와 맞지 않는다.

그렇게 사흘을 흐르는 강물처럼 흘려보낸다. 급기야 한밤중에도 통증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 끙끙 소리 내며 이리저리 돌아누워 보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어둑한 공간에서 혼잣말한다. ‘그래,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월요일 아침 일찍 서둘러 군청 옆에 있는 병원에 간다. 의사는 주사 두 방과 처방전을 내준다. 오랜만에 맞아보는 주삿바늘은 날카롭고 깊다.

그렇게 시작된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 칩거가 이어진다. 뭔가 굵은 나사가 빠져버린 듯 공허하다. 어느 날엔 18시간 이상을 잠과 함께 보낸다. 낮에도 아침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잠이 유일한 의지처이자 동반자처럼 나를 인도한다. 무수한 허황(虛荒)한 꿈이 나를 찾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게 하염없는 무기력과 나태가 천석고황처럼 들러붙는다.

그러면서 지나간 일과 관계와 사람들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는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는데, 설령 그 시절과 대면한다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터인데, 하는 자괴감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몸이 아프다는 사실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청춘 시절엔 마음이 몸을 지배하지만, 나이 들면 몸이 마음을 통제한다. 건강한 몸은 마음을 이기지만, 아픈 몸은 마음에 백전백패일 뿐!

가까스로 책에 손을 대보기도 하고,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에 눈길을 주기도 하지만, 잠시. 이럴 땐 유튜브에 나오는 짤막한 영화나 화가(畫家)의 일대기(一代記) 혹은 추리소설 낭독이 유용하다. 언제부턴가 잠자리 동행이 되어버린 각종 유튜브 프로그램 덕분에 무료함과 적막함을 대적(對敵)한다. 우리 삶에서 어쩔 도리 없는 몇 가지가 분명 있기 마련이다.

사라져버린 사건 사고를 원상회복할 수 없다. ‘열역학 제2 법칙’은 지구상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설계된 까닭에 우리는 시간의 화살과 대결할 수 없다. 뜨거운 커피는 식기 마련이고, 허공을 맴돌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커피잔은 원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우주 만유는 고요와 정돈에서 소음과 혼란으로 나아가도록 예정돼있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 혹자는 평행이론을 신봉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좌충우돌할 수 있다지만, 아직은 다중우주에 거주하는 나의 다른 자아와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터무니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다. 하지만 공포와 분노의 포로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그것들과 쉽게 작별하지 못한다.

오랜만에 텃밭에 나가 불원초(不願草)를 뽑거나 자르고, 가시상추와 머위를 따다가 건사한다. 초여름 햇살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얼굴과 전신을 휘감는다. 그러면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그만 털고 일어나지, 그래. 혼자 왔다 가는 길 아닌가?!’ 허허로운 웃음소리 들린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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