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원전 취소 후 지원금 환수·주민 갈등 겪어 주민 수용성·부지 적정성 평가 1위로 신규 원전 후보지 선정
영덕군이 신규 대형 원자력발전소 건설 후보지로 최종 선정됐다. 2017년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천지원전 건설 계획이 백지화된 지 9년 만이다.
원전 취소와 지원금 환수, 지역사회 갈등을 겪었던 영덕은 이번 재선정을 통해 다시 국가 에너지 정책의 중심에 서게 됐다. 인공지능(AI) 산업과 반도체 클러스터 확대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원전이 지역소멸 위기를 겪는 영덕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수력원자력 신규원전 부지 선정평가위원회는 17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반영된 신규 원전 건설 후보 부지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평가위원회는 1.4GW급 대형 원전 2기 건설 후보지로 경북 영덕군을, 국내 첫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 후보지로는 부산 기장군을 각각 선정했다.
이번 선정은 단순한 신규 원전 입지 결정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영덕은 이미 2011년 천지원전 예정지로 선정됐던 지역이다. 당시 영덕읍 석리·노물리·매정리와 축산면 경정리 일대는 국가 에너지 정책에 따라 원전 건설 예정 구역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2017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사업이 전면 중단되면서 지역사회는 큰 혼란을 겪었다.
원전 건설을 전제로 추진되던 각종 개발 계획은 멈췄고 주민들은 찬반 갈등 속에서 장기간 재산권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특히 정부는 원전 유치 인센티브로 지급했던 특별지원금 380억 원에 이자까지 더한 400억 원대 자금을 환수했다. 영덕군은 이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지역 주민들은 국가 정책 변화로 사업이 취소됐는데도 책임은 지역이 떠안았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원전 예정부지 주민들은 수년간 토지 이용 제한을 받았고 지역사회는 찬반으로 갈라져 갈등을 겪었다. 원전 정책 변화에 따른 피해를 보상받지 못한 채 지원금까지 반환하게 되면서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
그럼에도 영덕이 다시 원전 유치에 나선 것은 지역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영덕군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대표적인 지방소멸 위험지역이다. 청년층 유출이 지속되고 산업 기반도 취약한 상황에서 대규모 국책사업은 지역 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사실상 몇 안 되는 기회로 인식되고 있다.
정부 역시 원전 확대 기조로 정책 방향을 전환했다. AI 산업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산업 확대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가 결정적 배경으로 꼽힌다. 탄소중립 목표를 유지하면서도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원전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평가 결과는 영덕의 경쟁력을 수치로 보여준다. 영덕군은 종합점수 91.01점을 받아 울산 울주군(82.63점)을 크게 앞섰다. 부지 적정성 23.20점, 환경성 21.80점, 건설 적합성 22.27점, 주민 수용성 23.74점 등 모든 평가 항목에서 울주군보다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특히 주민 여론조사 결과가 반영된 주민 수용성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점이 눈에 띈다. 평가위원회는 정책·인문·환경·원자력·지질·지진 분야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돼 현장실사와 기초조사, 주민 여론조사를 실시했으며, 이를 토대로 종합평가를 진행했다.
평가위원회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은 국가 경쟁력 확보와 미래 세대를 위한 필수 과제”라며 “산업 생태계를 지탱할 기저 전원으로서의 역할과 지역 상생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최적의 입지를 찾고자 노력했다”고 밝혔다.
지역사회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경제적 효과다. 영덕에 건설될 원전 2기의 사업비는 약 11조 70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건설비의 2% 수준인 약 2300억 원의 특별지원금이 지급된다. 여기에 기본지원금과 사업자지원금, 지역자원시설세 등을 포함하면 향후 70년 동안 영덕군에 유입될 재정 규모는 약 2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건설 과정에서는 대규모 고용 창출 효과도 기대된다. 원전 건설 인력과 협력업체 유입으로 숙박·음식업 등 지역 상권이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 운영 단계에서는 원전 관련 기업과 전문 인력이 상주하면서 장기적인 경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조주홍 영덕군수 당선인은 “이번 선정은 단순한 국책사업 유치를 넘어 영덕의 100년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역사적 결정”이라며 “청년들이 돌아와 일자리를 찾고 아이 키우기 좋은 지역으로 거듭날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과제도 적지 않다. 원전 건설까지는 환경영향평가와 원자력안전위원회 인허가, 주민 의견 수렴 등 장기간 절차가 남아 있다. 무엇보다 천지원전 백지화 과정에서 발생한 지역사회의 상처와 불신을 해소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원전 예정 구역 지정과 사업 취소, 지원금 환수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주민들은 장기간 재산권 제한과 지역 분열의 후유증을 호소하고 있으며 원전 건설 과정에서도 주민 수용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영덕군은 앞으로 원전 건설과 연계한 지역 발전 전략 수립, 관련 산업 유치, 정주 여건 개선, 인구 유입 기반 확충 등에 나설 계획이다.
9년 전 국가 정책 변화로 중단됐던 원전 사업이 다시 영덕으로 돌아왔다. 이번 결정이 지역소멸 위기에 놓인 영덕의 새로운 돌파구가 될지, 과거의 상처를 넘어 지역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앞으로 영덕군과 정부의 후속 대응에 달려 있다.
/박윤식기자 newsyd@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