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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존재인구 시대의 도시 건축

중소도시에서 인구수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50만, 100만이라는 숫자는 도시의 체급이었고 자존심이었다. 그 안에는 “우리 도시는 아직 괜찮다”는 믿음도 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산업화 이후 도시는 정주인구를 중심으로 짜였다. 주택지구와 도로, 학교와 상업시설, 산업단지와 행정체계도 모두 그 감각 위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지역소멸이 현실이 된 지금, 그 시스템의 빈틈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청년층은 떠나고 인구는 계속 빠져나가며, 도심은 활력을 잃고 있다. 임대 표시가 붙은 빈 상가와 쓰임을 잃은 시설도 늘어난다. 문제는 단지 인구가 줄어드는 데만 있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낡고 고정된 인구 개념으로 도시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도시에는 디지털 노마드와 원격근무자, 한달살기 체류자, 5도 2촌처럼 여러 지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 거주지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이민자와 재외동포처럼 둘 이상의 언어와 문화, 생활권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기술의 발전과 이동성의 확대는 20세기에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던 삶의 방식과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아도 지역에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도시의 공기와 흐름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지금의 도시 시스템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하지 않다. 이런 현실 속에서 생활인구와 관계인구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인구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존재인구는 단지 잠시 체류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다. 한 장소에 반복적으로 존재하며 관계를 만들고, 소비와 기억, 문화적 가능성과 활력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주민등록 여부가 아니다. 누가 이곳에 실제로 존재하고, 무엇을 남기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존재인구를 중심에 놓고 보면 도시와 건축이 해야 할 일도 달라진다. 도시는 더 이상 주민만 붙잡아 두는 시스템이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머물고, 만나고, 섞이면서 새로운 일과 관계가 생겨나는 장이 되어야 한다. 원격근무자를 위한 일터, 유연한 체류형 주거, 지역민과 외부인이 함께 쓰는 문화교류 공간, 프로젝트형 방문자를 위한 실험의 장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요에 가깝다. 장기 체류자를 위한 작은 작업 공간, 지역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공유 거점도 중요해진다. 빈 상가와 유휴시설도 더 이상 쇠퇴의 흔적만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쓰임을 만드는 공간으로 바뀔 수 있다. 무엇보다 존재인구의 관점은 도시 안에 다름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감각과 지식, 네트워크와 수요가 들어오면 교환과 실험이 시작된다. 기존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산업이 태어날 수도 있다. 이제 지역소멸의 해법은 정주인구를 붙잡는 데만 있지 않다. 새롭게 등장한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연결하고, 머물게 하며, 지역의 동력으로 바꿀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도시의 미래는 얼마나 많은 주민을 붙잡느냐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고 싶어 하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제 도시와 건축도 정주인구만이 아니라 존재인구까지 함께 품는 방식으로 다시 짜여야 한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3-10

기업의 조직·성과와 감정 전염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오늘 회의가 생산적인지, 형식적인지 분위기가 말해준다. 표정, 목소리의 높낮이, 미묘한 침묵, 감정은 공기처럼 퍼진다. 우리는 그 공기를 무의식적으로 들이마신다. 타인의 감정이 언어·표정·행동·목소리 톤 등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전달되어, 상대방도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현상을 심리학자 일레인 헷필드(Elaine Hatfield)는 ‘감정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 했다. 웃음과 짜증은 전이되고, 감정은 무형으로 전염된다. 감정 전염이 발생하는 조건은 첫째, 물리적, 심리적 근접성이다. 가까이 자주 만나는 관계일수록 강하게 일어난다. 가족, 동료, 팀 단위 조직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둘째, 권력과 영향력 차이다. 상사의 감정은 부하에게 더 강하게 전염되는 속성이 있다. 리더의 정서 상태가 조직 분위기를 좌우한다. 셋째, 공감 능력이다. 감수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감정 전염에 민감하다. 넷째, 반복·노출이다. 지속적 접촉은 감정의 누적 전염이 된다. 다섯째, 집단 동일시다. ‘우리는 한 팀이다’란 인식이 강할수록 전염 효과가 증가한다. 사람 관계 관점에서 보면, 긍정적 전염은 밝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에너지가 상승하고, 감사 표현을 하면 관계 만족도 증가하고, 웃음은 신뢰 형성을 가속화한다. 부정적 전염은 불안·짜증이 갈등을 확산하고, 피해의식이 집단 냉소주의로 이어지고, 한 명의 불만이 팀 전체 분위기 하락으로 간다. 기업에서는 감정 전염이 조직 성과에 직접 영향을 준다. 긍정적 리더십을 연구한 다니엘 골만(Daniel Goleman)에 따르면 리더의 감정 상태가 조직 몰입도와 생산성에 큰 영향을 준다. 긍정 감정 전염 효과는 몰입도 증가, 창의성 향상, 협업 촉진, 안전사고 감소, 고객 만족도 상승 등이 있다. 감사 문화를 도입하면 생산성이 올라가고, 정서 안정 리더가 긍정 피드백이 증가하면 팀 성과가 향상된다. 기업 현장에서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있다. ‘또 혁신이야?’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이다. 이 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장기간 매너리즘에 젖어 있고, 혁신이 현업 공감대 형성을 못하고 현실에 맞지 않게 운영하면 누적되어 형성된 집단 감정이 되는 것이다. 이 냉소가 퍼지면 조직은 냉각되고, 개선 활동은 한계에 이른다. 겉으로는 움직이지만 속으로는 멈춘 조직이 된다. 반대로 긍정 감정이 전염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미국의 항공사 사우스웨스트항공은 유머와 존중의 문화를 통해 직원 만족과 고객 충성도를 동시에 끌어올렸다. 기술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서적 분위기가 달랐다. 구성원들은 서로의 태도를 모방했고, 그 감정이 서비스 품질로 이어졌다. 조직은 전략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 전략은 머리를 설득하지만 감정은 몸을 움직인다. 혁신이 멈춘 조직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힘은 새로운 슬로건이 아니라 새로운 정서 경험이다. 감정은 보이지 않지만 비용을 만들고, 성과도 만든다. 우리가 매일 전염시키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조직의 미래를 가르는 첫 출발점일지 모른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10

안데스 콘도르, 볼리비아에서 다시 날다

티티카카 호수를 건너 긴 밤 버스를 타고 볼리비아 라파스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 쉬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해발 4천 미터의 고지대 공기는 희박했고, 그 희박함이 라파스의 첫인상이었다. 다운타운의 작은 호텔에 짐을 풀고 창문을 여니, 분지 경사면을 따라 불빛이 층층이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항아리에 별빛을 한가득 담아둔 듯한 야경 앞에서 피로는 잠시 잊혀졌다. 로비 카페에서 화이트와인과 피자를 주문했다. 산뜻한 향이 혀끝에 감돌자, 문득 이 땅의 이름이 떠올랐다. 우리는 흔히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대륙을 ‘아비아 얄라(Abya Yala)’, 즉 ‘성숙한 대지’라고 불렀다.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는 순간, 여행은 단순한 풍경 감상을 넘어섰다. 나는 이곳의 역사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천 년 동안 문명이 꽃피운 이 땅의 운명은 16세기, 쇠와 총으로 무장한 이방인들의 발자국과 함께 뒤바뀌었다. 금과 은은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흘러갔고, 신전 위에는 성당이 세워졌다.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은 어느새 자기 땅에서 이방인 신세가 되었다. 페루가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볼리비아는 풍부한 자원의 보고였다. 특히 포토시 은광은 막대한 부를 쏟아내며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지만, 그 빛의 이면에는 수많은 원주민들의 희생이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험준하고 고립된 지형은 또 다른 선물이 되었다. 외부의 손길이 쉽게 닿지 못했던 덕분에, 이곳은 고유한 언어와 전통을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었다. 지금도 잉카의 언어 중 아이마라어와 케추아어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문자가 없었던 잉카의 기억은 입과 발을 통해 전승되었다. 말이 이어지고, 발걸음이 이어지는 한, 정체성 또한 이어지는 것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라파스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그때 문득 뉴욕에 두고 온 가족이 떠올랐다. 떠나온 지 3주가 지나자 그리움은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갔다. 여행은 때로는 이기적인 열망에서 시작되지만, 그 이기심이 낯선 삶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이 도시에서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창밖으로 펼쳐진 라파스의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거대한 분지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이 반짝이는 모습은 운석이 파놓은 구덩이에 보석을 흩뿌려 놓은 듯했다. 숨은 여전히 가빴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지만, 멀리 보이는 일리마니의 은빛 설산이 조용히 나를 감싸안아 주었다. 이방인의 지친 마음을 “괜찮다”라는 듯 다독이는 산의 침묵이 느껴졌다. 나는 산 프란시스코 성당 앞 광장으로 갔다.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고, 곳곳에는 손팻말과 구호가 눈에 띄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고통과 분노가 모이는 ‘저항의 공간’이었다. 구호는 정치적인 외침처럼 들렸지만, 그 속에는 늘 삶의 고뇌가 담겨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 아이를 키우는 문제, 내일을 살아가는 문제. 생존이 절실한 사회에서 희망은 때때로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촐리타들이었다. 풍성한 포요라 치마, 중절모, 가파른 골목길을 짐을 지고 오르내리는 굳건한 뒷모습. 그 투박하고 강인한 발걸음에서 오래전 한국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1960년대 명절이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터로 향하던 어머니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낯선 도시 라파스는 순간, 향수의 빛깔로 물들었다. 비록 이곳 사람들의 가난이 내 삶의 고단함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삶을 꿋꿋이 살아내는 자세는 시대와 대륙을 초월하여 닮아 있었다. 서툰 스페인어로 “당신은 잉카인입니까?”라고 묻자, “우리는 순수한 아이마라입니다”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보 모랄레스 집권 후에도 현실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그들의 촉촉한 눈빛은 패배가 아닌 존재의 증거를 보여주는 듯했다. 나는 그 눈빛에서 정체성의 의미를 되새겼다. 한낮에는 텔레페리코, 하늘을 가르는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붉고 푸른 곤돌라 창밖으로 라파스의 과거와 현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마녀 시장의 향초 냄새, 노점에 가득한 알록달록한 보자기, 천에 짐을 싸서 어깨에 메고 걷는 사람들, 장터의 소음과 웃음. 그 모든 것이 어린 시절 시골 장터의 따뜻한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라파스는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쉽게 닳아 없어지지 않는,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는 도시였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대에, 이 도시는 오히려 주름과 흔적으로 자신의 존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분지를 따라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라파스는 세상에서 가장 큰 벽난로처럼 따스하게 빛났다. 붉은 노을이 일리마니의 허리를 감싸안는 짧은 순간,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깨달았다. 우리가 풍요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은 ‘더 빠르게’라는 욕망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라파스의 사람들은 느리고 고단한 하루를 묵묵히 살아냄으로써, 다른 차원의 풍요를 보여주고 있었다. 숨쉬기조차 힘든 고지대에서 오히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역설처럼, 결핍은 때로 삶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진정한 웰빙은 화려한 소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인간이 자기 이름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에 있었다. 여행은 지도를 따라 낯선 땅을 밟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된 삶 속에서 잊고 지냈던 나의 뿌리와 진심을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다. 라파스의 붉은 야경은 말없이, 그러나 깊은 여운으로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언덕길을 내려오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라파스가 가르쳐 준 ‘느린 성실함’을 잊지 않겠다고. 콘도르가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르듯 우리 각자의 삶에서도 존엄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고 믿으며. 나는 내일 소금 사막 우유니(Uyuni)를 향한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3-10

생일 꽃다발 위에 내린 하얀 작별

가장 화려한 빛의 꽃을 품에 안았던 날, 역설적이게도 내 삶에서 가장 깊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 달 전부터 약속된 생일 약속이었다. 친구들의 축하 속에 미역국과 점심을 먹으며 생의 환희를 만끽했다. 셔터 소리에 맞춰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 찰나, 휴대폰 진동이 정적을 깨뜨렸다. 수화기 너머 오빠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중환자실의 사투를 견디다 요양병원으로 옮기신 지 불과 열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통보였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색채가 휘발되었다. 어떻게 운전대를 잡았는지, 도로 위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지독한 죄책감이었다.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고독한 강을 건너실 때, 막내딸은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기름진 음식을 삼키고 있었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심장을 찔렀다. 나는 아버지의 차가워진 손을 붙잡고 절규했다. 한 달 전, 화장실에서 미끄러지시던 그 순간부터 중환자실의 기계음에 의지해 숨을 이어가시던 고통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그날 아침 기이한 꿈을 꾸었다. 영정사진 속 아버지가 평소보다 훨씬 환하게, 마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별의 전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기에 애써 외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망 선언 5분 후에야 도착한 병실, 이미 온기를 잃어가는 아버지의 육신 앞에서 나는 생전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했던 짐승 같은 곡성을 쏟아냈다. 그것은 단순히 슬픔이 아니라, 끝내 가닿지 못한 임종의 거리에 대한 통한이었다. “아버지, 내가 미안해···. 생일밥이 뭐라고, 그게 뭐라고 아버지 가는 길도 못 보고, 아버지 너무 미안하고 고생했어.” 내 목소리는 메아리 없는 빈 공간에 흩어졌다. 아버지는 막내딸의 불효를 이미 용서하신 듯, 그저 고요히 눈을 감고 계셨다. 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딸인 나를 유독 금지옥엽으로 키우셨다. 세상 모든 풍파를 당신의 마른 등 뒤로 숨기시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응원해주시던 분. 여든이 넘은 노구(老軀)를 이끌고도 막내딸이 친정에 오면 손수 된장찌개를 끓여 밥상을 차려주시던 분이었다. “우리 막내 왔나” 하시며 냄비 뚜껑을 열 때 나던 그 구수한 연기는 이제 전설처럼 사라졌다. 구수한 된장 냄새는 아버지의 사랑이 시각화된 온기였고, 그 찌개 한 그릇에 나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보호를 받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내 휴대폰 속에 저장되어 있던, 꿈속의 모습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사진으로 결정되었다. 슬픔의 예식장에 걸린 사진은 죽음을 말하고 있었으나, 그 표정만큼은 생(生)의 절정보다 찬란했다. 이제 나의 생일은 영원히 아버지의 기일(忌日)과 겹쳐지게 되었다. 매년 돌아올 나의 탄생일은 아버지가 이승의 옷을 벗으신 날이며, 내가 꽃다발을 들었던 시간은 아버지가 수의(壽衣)를 입으신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삶과 죽음은 이처럼 잔혹하게 맞닿아 있고, 기쁨과 슬픔도 한 몸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앞으로 나는 길가에서 카스텔라의 달콤한 향기를 맡을 때마다, 하얀 머리칼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노인을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의 김 서린 냄새를 접할 때마다 불쑥불쑥 아버지라는 이름의 파도에 휩쓸릴 것이다.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치환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끓여주셨던 된장찌개의 온기로, 당신이 좋아하시던 카스텔라의 부드러움으로 내 일상의 곳곳에 스며들어 계실 테니까. 육신은 소멸하였으나 그분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의 질량은 우주 어디에도 사라지지 않고 내 삶의 궤적을 지탱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생일날 아침,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신 그 꿈속의 미소는 아마도 당신의 마지막 배려였으리라. “막내야, 미안해하지 마라. 나는 이렇게 웃으며 잘 가고 있단다.” 나는 이제 비로소 눈물 젖은 손으로 그 웃음을 받아 안는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가장 깊은 사랑을 완성하는 마침표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 드린다. /김경아 작가

2026-03-10

검은 건반 위를 질주하다: 쇼팽 에튜드 ‘흑건’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쇼팽의 에튜드가 있다. 바로 별칭 ‘흑건(Black Keys)’으로 불리는 작품이다. 아마도 이 곡의 입문은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배틀씬에서부터일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은 총 27곡의 에튜드를 남겼다. 작품번호 Op.10의 12곡, Op.25의 12곡, 그리고 ‘세 개의 새로운 에튜드’로 불리는 3곡이 그것이다. 이 곡들은 단순한 연습곡을 넘어, 각각 특정한 피아노 테크닉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 위해 작곡된 작품들이다. 쇼팽의 에튜드는 이전 시대의 기교 중심적인 연습곡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전 시대의 에튜드가 주로 기술적인 연습에 초점을 맞췄다면, 쇼팽은 여기에 음악적 표현과 예술성을 더했다. 그 결과 쇼팽의 에튜드는 연습곡이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음악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특징은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로 꼽힌다. Op.10의 에튜드들은 1829년부터 1832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당시 피아노의 거장이었던 프란츠 리스트에게 헌정되었다. 이후 작곡된 Op.25의 에튜드들은 리스트의 연인이자 후에 부인이 된 마리 다구 부인에게 헌정되었다. ‘흑건’은 Op.10의 다섯 번째 곡이다. 각 에튜드는 다양한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쇼팽은 자신의 에튜드에 직접 부제를 붙인 적이 없다. ‘흑건’이라는 이름 역시 후대의 평론가와 음악가들에 의해 붙여진 별칭이다. 이 곡이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곡의 대부분에서 오른손이 한 음을 제외하고 거의 전부 검은 건반만을 연주하기 때문이다. 곡은 2/4박자의 빠르고 경쾌한 성격을 지니며, 조성은 G♭장조로 플랫이 무려 여섯 개나 붙는다. 구조는 다른 쇼팽의 에튜드와 마찬가지로 세도막 형식을 따른다. 빠르게 흐르는 오른손 패시지와 리듬감 있는 왼손 반주가 어우러지며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피아노 배틀 장면에서는 원곡의 처음 8마디가 연주된 뒤 반음 위로 전조되어 G장조로 편곡된다. 이 버전에서는 대부분 흰 건반으로 연주되기 때문에 ‘흑건’과 반대인 ‘백건’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처럼 에튜드의 핵심 테크닉을 제목처럼 부르는 경우는 다른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Op.10 No.2는 ‘반음계’, Op.10 No.11은 ‘아르페지오’로 불리며, Op.25 No.6은 ‘3도)’, Op.25 No.8은 ‘6도’, Op.25 No.10은 ‘옥타브’라는 별칭으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쇼팽의 에튜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피아노 전공자들에게 필수적인 레퍼토리로 여겨진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함께 음악대학 입시와 예술학교 시험에서 빠지지 않는 중요한 곡들인데, 이는 테크닉적으로 어렵고 음악성을 동시에 요구하여 연주자의 실력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흑건’은 다른 쇼팽 에튜드에 비해 비교적 연주 난이도가 낮은 편에 속해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취미 연주자라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다. 검은 건반 위를 빠르게 달리는 화려한 패시지 속에서 쇼팽 특유의 음악적 상상력은 빛나며, 이 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연주자와 청중을 매료시키고 있다. /박정은 객원기자

2026-03-10

주유하는 게 무섭다

“이란이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폭격받기 시작한 이후 하루가 다르게 기름값이 오르고 있어요. 이젠 차에 기름 넣는 게 무서울 정도입니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국제 유가의 상승과 함께 한국도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전반적인 물가 상승의 요인으로도 이어질 것이라 관계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 시내 주유소의 휘발유 평균 가격은 2000원에 육박하는 중이다. 일부 주유소는 이미 2000원을 넘겼다. 지방이라고 크게 다를 바 없다. 최근 열흘 사이에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원가량 올랐다. 주유소마다 사람들의 한숨 소리가 커지고 있는 건 당연지사. 이란과 미국·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산유국이 밀집한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분위기 속에서 국제 유가는 얼마 전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섰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 8일 브렌트유와 서부 텍사스산 원유는 각각 107.70달러와 108.15달러에 거래됐다고 한다. 이는 2022년 여름 이후 최고가다. 이라크와 아랍에미리트 등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 생산을 줄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란이 석유 수출길을 막고 있는 한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가 폭등의 위험이 갈수록 커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사용되는 원유의 거의 대부분을 중동에서 수입하기에 비상사태를 맞이한 한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휘발유 가격을 안정시킬 정책 마련을 지시했다. 정부는 ‘최고 가격 지정제’라는 극약 처방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몸부림에 가까운 노력이 날개 달린 기름값을 꺾을 수 있을까? 아직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09

다카이치의 ‘강한 일본’이 가는 길

‘철의 여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가 일본 열도를 장악했다. 중의원 465석 중 316석을 확보한 것은 자민당 사상 초유의 대승이다.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개헌을 제외한 모든 법안을 단독 통과시킬 수 있는 절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다카이치가 천명한 ‘강한 일본’은 국제질서에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그녀가 역설한 ‘힘을 통한 평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했던 ‘제국주의 일본’을 연상케 한다. 다카이치는 이른바 ‘비핵 3원칙’(핵무기의 제조·보유·반입 금지)이 포함된 ‘3대 안보문서’, 즉 국가안보전략, 국가방위전략, 방위력정비계획 등을 조기에 개정하여 방위력을 획기적으로 제고하는 한편, 방위비를 GDP 2% 이상으로 확대하고 ‘국가정보국’을 창설하여 정보기능을 강화하는 등 ‘강력한 일본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중장기적으로는 헌법 제9조를 개정하여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거듭나고자 한다. 다카이치는 중의원 선거 압승 후 기자회견에서 “헌법 개정을 위한 조정을 진행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개헌에 필요한 참의원 의석이 부족하여 현실적 한계가 있지만 개헌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조성하다가 만약 여의치 않으면 2028년 참의원 선거에 승리하여 개헌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현행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서도 우회하여 ‘3대 안보문서’의 개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일본의 재무장에 대한 각국의 반응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미·일동맹의 황금기를 맞은 트럼프는 “다카이치의 힘을 통한 평화가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적극 지지하면서 중국을 견제할 방패로 일본을 활용하고자 한다. 대만 역시 미·일동맹의 연장선에서 ‘대만 유사시 자위권 발동’을 천명한 다카이치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에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분쟁 중에 있는 중국은 “군국주의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식하고 대비할 것인가? 다카이치의 ‘강한 일본’은 우리에게 ‘양날의 칼’이다. 일본의 재무장은 북핵 위협과 북·중·러 연대에 대처하는 한·미·일 공조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흔드는 불안정요인이 된다. 게다가 다카이치의 ‘대미 올인 전략’은 이재명 정부의 ‘전략적 자율성 확대 전략’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향후 한·일 관계와 한·미·일 공조는 상당히 유동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재무장은 중국의 군비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일 간의 잠재적 갈등요인(과거사문제, 독도문제 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현재의 한·일 우호분위기를 바탕으로 전략적 협력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미·일 밀착과 중·일 경쟁이 한·중 관계에 미칠 부정적 영향도 최소화해야 한다. 바야흐로 우리의 외교역량이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있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6-03-09

인간 말종과 수정구슬

폭탄이 인간의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 말종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벌이는 이란 공격의 배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 팔란티어(Palantir), 앤스로픽(Anthropic), 라벤더(Ravender), 가스펠(Gaspel)이 있다. 21세기 전쟁과 권력의 중심에는, 더 이상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정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인공지능이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 인공지능 기업들 가운데 하나가 팔란티어다. 팔란티어는,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정구슬’을 뜻한다. 피터 틸은, ‘데이터를 이해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팔란티어를 창업했다. 핵심 플랫폼인 고담(Gotham)과 파운드리(Foundry)를 통해 위성, 드론, 금융, 통신, 행정 데이터 등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존재론적 지도(Ontology)’로 엮어낸다. 단순한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관계와 구조를 모델링하는 작업 즉, ‘현실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어떤 조직도, 변수를 가진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명쾌한 결정을 내리긴 쉽지 않다. 회사의 경우, 매우 복잡한 사업계획에 대하여 전 간부들이 몇 날 몇 일을 심사숙고하여 밤샘 회의를 하더라도, 그 결정이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높다. 만약 그 결정이 늘 90% 이상 정확하다면 회사는 망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각 데이터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한 다음 최적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수정구슬의 주장이다. 군사 영역에 있어서 수천 개의 목표물 가운데 공격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금융 영역에 있어서 수많은 거래 패턴을 분석하여 위험과 기회를 판단한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테러를 막을 수 있으며, 질병을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운영체계(OS)인 셈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의사 결정권’을 넘겨받은 시대가 왔다, 인간은 더 이상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정을 ‘승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도가 없던 시대에서 지도가 탄생한 시대가 된 것처럼, 인공지능이 세계의 사건을 데이터 지도로 만들어 관계를 분석하고, 그 관계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이다, 데이터가 권력이 되는 시대에 이러한 플랫폼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 기관이 된다, 수정구슬 팔란티어는 단순히 새로운 기업의 등장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전환 신호이다. 오늘의 푸른빛 수정구슬이 빛을 잃더라도, 내일 또다시 붉은 빛의 수정구슬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 플랫폼이 새로운 제국이 되려고 하려는 이 시대에, 두 인간 말종이 승인한 이란 폭격이라는 결과물을 전 인류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과거의 제국은 영토의 지배를 원했지만, 미래의 제국은 데이터 관계망의 지배를 원한다. 푸른 빛 수정구슬의 소유자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인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수정구슬의 신세계가 빛의 세계 일지, 어둠의 세계 일지 판가름 날 순간이 멀지 않았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09

인공지능과 지식혁명

인류는 몇 차례의 지식혁명(知識革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첫 번째는 문자의 발명이었다. 직접 대면하여 말과 몸짓으로 전달하던 정보와 지식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축적하고 전승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다음의 지식혁명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금속활자가 실용화 되면서 지식은 소수의 수도원이나 귀족들의 서고(書庫)를 벗어나 대중 속으로 확산되었다. 성경과 고전, 자연과학 서적이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지식은 더 이상 특권 신분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또 다른 지식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지금까지 인류가 축적해온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수시로 접속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생성형 인공지능(AI)’은 단순히 데이터를 찾는 도구가 아니라 인류가 쌓아온 자연과학의 법칙과 인문학적 성찰을 스스로 학습하여,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논리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학과 철학, 예술과 기술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른바 통섭과 융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 눈부신 기술적 성취 뒤에는 서늘한 질문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폭발적인 지식의 팽창이 과연 인류의 안정과 행복을 보장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다. 오히려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정 장애’와 ‘인지적 과부하’를 걱정하게 되었다. 과거의 지식혁명이 인간의 팔과 다리를 대신하거나 기억력을 보조했다면, 지금의 지식혁명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사유(思惟)’와 ‘창의(創意)’마저 대신하는 실정이다. 지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숙성시키는 과정이 생략된 채 AI가 내놓은 결과물만을 소비할 때, 인간의 뇌는 퇴화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자연생태계의 한 종으로서 인류에게 안정은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온다. 하지만 AI가 주도하는 변화의 속도는 생물학적 인간이 적응할 수 있는 임계치를 이미 넘어섰다. 지식은 통합되어 거대한 지능의 바다를 이루었으나,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개별 인간은 갈수록 소외되고 파편화되는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기술의 축복이 소수의 설계자에게 집중되고 대다수가 지능의 하청업자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진화가 아니라 재앙의 서막일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폭주를 멈출 수는 없을진대, 비판적 사고와 윤리적 성찰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인공지능이 가져온 지식혁명의 용처와 가치,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묻는 ‘지혜’의 영역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AI가 답을 주는 존재라면, 인간은 질문을 던지는 존재여야 한다. 새로운 지식혁명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넘쳐나는 지식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인간다운 가치인지를 가려내는 윤리적 선별력이다. 윤리적 기준이 없는 지식은 흉기가 될 수 있다. AI의 편향성 문제나 디지털 격차로 인한 불평등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지식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며 자연과 공존하는 법을 아는 인문학적 지식이야말로 지식 폭발의 시대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가 될 것이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3-09

민주당의 ‘갈라치기’와 국힘의 ‘뒷북 대응’

6·3 지방선거가 코앞이다. 선거란 모름지기 새로운 비전과 일꾼을 뽑는 축제여야 하건만, 지금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광역행정구역 통합 논의 과정을 보고 있자면, 본말(本末)이 전도됐다는 탄식을 지울 수 없다. 행정 효율화라는 시대적 과제는 간데없고, 오로지 ‘표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다. 최근 민주당은 광주·전남 통합법은 일사천리로 처리하면서, 대구·경북(TK)과 대전·충남 통합은 미뤄뒀다. 정치권 안팎에서 “민주당의 선거 전략에 따른 선택적 통합”이라는 냉소적 추측이 나오는 이유가 무언가. 선거를 앞두고 행정구역을 정비하는 것은 단체장의 관할 구역을 확정 짓는다는 점에서 적기(適期)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정당의 유불리에 따라 ‘누구는 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는’ 식의 격전지 관리 수단으로 전락한다면, 이는 명백한 주권 기만이다.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국가적 대사를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광역 체제는 그야말로 ‘누더기’다. 1특별시, 6광역시, 1특별자치시, 6도, 3특별자치도라는 복잡한 구조에 광주·전남 통합특별시까지 더해지면 16개 광역단체가 무려 6가지 형태를 띠게 된다. 더 큰 문제는 내부의 부조화다. 통합특별시라는 이름 아래 시·군과 자치구를 한데 섞어놨지만, 이들 간의 사무와 재정 권한은 전혀 다르다. 자치구가 처리하지 못해 광역단체가 떠맡는 업무만 14개 분야 42개에 달하고, 지방세 징수 비율 역시 광역시와 도의 기준이 제각각이다. 이런 불균형과 부조화를 방치한 채 ‘특별’이라는 수식어만 붙여 즉흥적으로 조합하는 것이 과연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처사인가. 법과 제도는 간단하고, 명료해야 한다. 야당의 ‘갈라치기’ 전술을 탓하기 전에, 과연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제 역할을 다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광주·전남 통합법이 민주당의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국회 문턱을 넘는 동안, 국민의힘은 무엇을 했는가. 대구·경북(TK) 통합이라는 지상 과제를 앞에 두고도 지역 국회의원들과 지자체장들은 각자의 셈법에 빠져 중구난방 목소리만 냈다. 경북 북부 지역의 소외론과 기초의회들의 반발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그런데도 당내 이견 하나 제대로 조율하지 못해 법사위에서 “내부 합의부터 먼저 해오라”라는 굴욕적인 훈수를 들은 책임은 전적으로 국민의힘에 있다. 뒤늦게 찬반 투표를 거쳐 당론을 정했다고는 하나, 이미 실기(失期)한 뒤의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공천권’에는 민감하면서 지역의 ‘생존권’이 걸린 문제에는 이토록 굼뜨고 무기력해서야 되겠는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통합의 본질이 ‘미래형 행정 혁신’이 아닌 ‘예산 따내기’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보화 시대에 맞춰 행정 조직을 슬림화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근본적 처방은 뒷전이다. 선거를 앞두고 수십조 원의 지원금을 정파적 이익에 맞춰 집행하려 하고, 선거를 겨냥해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으니 답답하다. 금융기관조차 창구 업무를 줄이며 디지털 전환에 사활을 거는 시대다. 행정수요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앉아서 증명서나 떼어주던 시절이 아니다. 정보 소통이나 교통수단이 과거와 다르다. 그런데 국가 행정 체제는 낡은 외투에 ‘특별’이라는 이름의 누더기 조각만 덧대고 있다. 특정 지역에 특혜를 주고, 선거를 앞두고 예산을 쏟아부어 표를 사려는 행태는 결국 다음 세대에게 막대한 갈등 비용과 부채만 떠넘기는 꼴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금이라도 ‘특별’이라는 예외 뒤에 숨지 말고, 대한민국 전체의 행정 지도를 단순·명료하게 재설계하는 백년대계(百年大計)에 임해야 한다. 예외 없는 원칙과 보편적 기준이야말로 껍데기만 화려한 ‘특별’보다 훨씬 강력한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꼼수와 사심이 가득한 행정 체제는 결국 큰 부작용을 낳고, 민심의 심판을 받게 된다. 표 계산기를 던지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다시 그려야 할 때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3-08

파인튜닝과 프롬프팅···AI를 맞춤화하는 두 가지 전략

지난주 우리는 RAG(검색 증강 생성) 기술을 통해 인공지능(AI)이 어떻게 최신 정보를 실시간으로 참고하며 답변의 정확도를 높이는지 살펴보았다. AI에게 회사 문서를 건네줬더니 정확도가 95%까지 오른다는 이야기,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길 수 있다. “RAG처럼 문서를 떠먹여 주는 방법 말고, AI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까?” 있다. 그것이 바로 ‘파인튜닝(Fine-tuning)’이다. 오늘은 AI를 나에게 맞게 변형하는 두 가지 핵심 전략, 파인튜닝과 프롬프팅(Prompting)을 비교 분석한다. 이 두 가지를 언제, 어떻게 써야 하는지 AI 활용 수준이 달라질 것이다. AI를 내 것으로 만드는 두 가지 길 요리 학원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은 훌륭한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했다. 그런데 한국 손님들이 많아 김치찌개, 된장국을 잘 만들어야 한다. 이때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요리사를 한식 학원에 수개월간 보내 한식 조리법을 아예 체득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파인튜닝’이다. 두 번째는 요리사에게 그때그때 “오늘은 된장국 만들어줘, 재료는 이것이고, 맛은 구수하게”라고 상세히 지시하는 방법이다. 이것이 ‘프롬프팅’이다. 어느 쪽이 낫냐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파인튜닝 - AI의 뇌 자체를 바꾼다 파인튜닝(Fine-tuning)이란 이미 학습을 마친 대형 언어 모델(LLM)에 특정 분야의 데이터를 추가로 학습시켜 그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로 만드는 기술이다. 한마디로 AI의 성격과 지식 자체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의료 분야를 예로 들자. 일반 생성형 AI에게 “이 CT 사진에서 폐암 초기 병변 찾아줘”라고 물으면 일반적인 의학 지식수준의 답을 한다. 하지만 수십만 건의 흉부 CT 판독 데이터로 파인튜닝 된 AI는 전문 방사선과 의사 수준으로 병변을 식별한다. AI의 ‘기본기’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파인튜닝의 가장 큰 강점은 반복 설명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고객 응대 AI를 파인튜닝 하면 “우리 회사 말투로 정중하게 답해줘”라고 매번 지시하지 않아도, AI가 알아서 회사의 말투와 정중함을 유지한다. 마치 신입사원을 6개월간 교육해 회사 문화를 몸에 익힌 것과 같다. 그러나 파인튜닝에는 분명한 단점이 있다. 먼저 비용이 상당하다. 고품질 학습 데이터를 수천 혹은 수만 건 확보하고 전처리하는 과정에만 큰 금액이 소비될 수 있다. GPU 학습 비용도 만만치 않다. 또한 한 번 파인튜닝 한 AI는 그 분야에 최적화되는 대신 범용성이 떨어진다. 의료 전용으로 파인튜닝 한 AI에게 법률 계약서 검토를 시키면 오히려 엉뚱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롬프팅 – AI에게 제대로 지시하는 기술 프롬프팅(Prompting) 이란 AI에게 입력하는 질문이나 지시문(프롬프트)을 정교하게 설계하여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AI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AI와 ‘소통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같은 AI라도 어떻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큰 차이가 난다. “마케팅 기획서 써줘”와 “너는 10년 경력의 B2B 마케팅 전문가야. 중소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한 6개월 디지털 마케팅 기획서를 작성해 줘. 예산은 2000만 원이고 목표는 신규 거래처 20개 확보야”라는 두 지시문의 결과물 품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것을 이미 독자들은 알 것이다. 효과적인 프롬프팅의 핵심 기법으로 현재 널리 활용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역할 부여(Role Prompting)’는 AI에게 특정 전문가 페르소나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너는 20년 경력의 세무사야”라고 시작하면 AI는 세무사의 관점에서 답변을 구성한다. ‘사고 연쇄(Chain of Thought)’는 “단계별로 생각해 줘”라고 요청해 AI가 논리적 추론 과정을 밟게 만드는 기법이다. 복잡한 문제일수록 효과가 크다. ‘예시 제공(Few-shot Prompting)’은 원하는 결과물의 예시를 2~3개 먼저 보여주고 같은 형식으로 작성하게 하는 방식이다. 프롬프팅의 최대 강점은 즉시성과 유연성이라 할 수 있다. 추가 비용 없이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고, 목적에 따라 매번 다르게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롬트팅의 한계도 명확하다. 매번 길고 정교한 프롬프트를 작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동일한 AI 모델을 여러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면 결과물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파인튜닝과 프롬프팅의 비교 내용을 정리한 표를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실제 활용 사례 -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사례 1 : 금융사의 파인튜닝 챗봇 국내 한 대형 증권사는 10만 건의 투자 상담 대화 데이터를 활용해 GPT 기반 모델을 파인튜닝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일반 GPT는 “주식 투자는 원금 손실 위험이 있습니다”라는 교과서적 답변만 반복했지만, 파인튜닝 된 AI는 “현재 고객님의 포트폴리오 구성을 고려하면 채권 비중을 10% 높이는 것이 리스크관리에 유리합니다”처럼 맥락에 맞는 개인화 조언을 제공했다. 상담 만족도가 42% 상승했다. 사례 2: 스타트업의 영리한 프롬프팅 전략 반면 자금이 부족한 스타트업들은 파인튜닝 대신 프롬프팅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콘텐츠 마케팅 스타트업 A사는 회사 브랜드 가이드 라인, 타깃 고객 페르소나, 기존 인기 콘텐츠 예시를 프롬프트에 담아 매번 AI에게 전달한다. 결과적으로 일관된 브랜드 톤의 콘텐츠를 추가 비용 없이 대량으로 생산한다. 결과, 마케터 1명이 혼자서 월 200개 이상의 SNS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사례 3: 파인튜닝 + 프롬프팅의 결합 실제 현업에서는 두 기술을 함께 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의료 기록 데이터로 AI를 파인튜닝(전문성 확보) 한 뒤, 의료진이 구체적 프롬프트로 진단 보조를 요청하는 복합 방식을 채택했다. 파인튜닝으로 의료 전문 언어와 임상 지식을 갖추고, 프롬프팅으로 각각의 경우에 맞게 세밀하게 조정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선택의 기준은 명확하다.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권유한다. · AI를 하루에 수천 번 이상 반복사용 하는가? → 파인튜닝을 고려하라. · 특수 전문 언어(의료, 법률, 반도체 등)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하는가? → 파인튜닝이 효과적이다. · 다양한 업무에 유연하게 AI를 쓰고 싶고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 프롬프팅 역량을 키워라. 현실적으로 중소기업이나 개인에게는 프롬프팅이 먼저다. 파인튜닝은 대기업이 수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특화 서비스를 만들 때 유효하다. 하지만 프롬프팅만 잘해도 웬만한 업무 효율은 3~5배 향상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 두 기술의 미래 흥미로운 점은 이 두 기술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OpenAI의 GPT-4 파인튜닝 API, Anthropic의 Claude 맞춤화 기능 등 대형 AI 회사들이 파인튜닝 비용을 대폭 낮추고 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수억 원이 들던 파인튜닝이 이제 수백만 원 수준으로 내려왔다. 또한 ‘프롬프트 캐싱(Prompt Caching)’이라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자주 쓰는 긴 프롬프트를 저장해두고 재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파인튜닝의 일관성과 프롬프팅의 유연성을 동시에 얻는 방향으로 기술이 진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5년 이후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흐름은 ‘RLHF(인간 피드백 강화학습)’와 프롬프팅의 결합이다. AI 사용자가 좋은 응답에 피드백을 주면, AI가 스스로 학습해 점점 나은 결과를 내놓는 방식으로, 이는 파인튜닝과 프롬프팅의 장점을 모두 취한 차세대 AI 맞춤화 방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면 관계상, 이 부분에 대한 사용 힌트는 다음 주에 소개하고자 한다. 결국, 도구보다 전략이 먼저다. 파인튜닝이냐 프롬프팅이냐,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기술이 더 우월한가가 아니다.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나의 자원(시간, 예산, 데이터)들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RAG가 AI에게 ‘최신 자료를 건네주는 기술’이라면, 파인튜닝은 ‘AI의 뇌를 바꾸는 기술’이고, 프롬프팅은 ‘AI와 소통하는 기술’이다. 세 가지를 모두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조합하는 사람이 AI 시대의 진짜 전문가가 될 것이다. 당신의 비즈니스에는 어떤 맞춤화 전략이 필요한가?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주변의 AI 활용 사례들을 다시 살펴보자. 분명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는 멀티모달 AI 시대 텍스트, 이미지, 음성을 넘나드는 기술이 산업 현장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아보자.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3-08

호르무즈에 인질 된 세계 경제

호르무즈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좁은 해협이다. 해협의 길이는 약 160km, 가장 좁은 곳이 33km다. 중동 산유국들의 원유와 천연가스가 세계시장으로 나아가는 핵심 해상통로다. 세계 석유 소비량의 약 20%인 하루 2000만 배럴이 이 해협을 통과한다. 문제는 좁은 항로 가운데 통항이 가능한 항로는 겨우 10km에 불과하고 이곳 대부분은 이란 영해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란이 자국 영해에 들어오면 쏜다고 했을 때 전 세계의 유조선은 목숨을 걸고 이 길을 가야 할지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에서 “석유 한 방울도 못 나가게 하겠다”고 밝힌 지 일주일이 지난 8일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사실상 봉쇄 상태다. 평소라면 하루 100여 대의 선박이 지나다니던 것이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외신은 전한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주요 국가들의 원유 수입도 80%가 이 통로를 이용한다. 한국은 원유의 70%를 중동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대부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여오고 있다. 이처럼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무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카드로 꺼낸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경제적 압력을 무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호르무즈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국제유가는 배럴당 150달러까지 치솟을 거란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각국의 주식 등 금융시장도 큰 혼돈에 빠져 있다. 특히 에너지 대란에 따라 정유, 항공, 해운, 화학 등 모든 산업이 멈춰서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각국은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풀릴지 아니면 얼마나 오래갈지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08

TK경제, 지금은 전환의 시간

요즘 대구·경북 경제를 두고 “바닥을 찍었다”라는 말이 들린다. 일부 지표는 반등 신호를 보낸다. 아파트 입주전망지수가 개선되고 고용지표도 미세하지만, 회복 흐름을 나타낸다. 겉으로 보면 긴 터널의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나는 대구 동성로의 자영업자나 포항의 중소기업 사장의 표정은 여전히 무겁다. 숫자는 회복을 말하지만, 체감은 침체에 머무는 이 간극 속에서 우리는 사이클을 그리는 경기 변동이 아닌 구조 변화의 초입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대구의 상권 지형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도심 상권은 유동 인구 감소와 온라인 소비 확산이라는 이중 압박을 받고 있다. 반면 신흥 주거지와 혁신도시 주변 상권은 성장세를 이어간다. 소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기 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 구조와 생활 방식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경제 지도다. 포항을 중심으로 한 철강 산업 도시의 변화는 더욱더 상징적이다. 포스코의 전환 투자와 친환경 공정 도입이라는 과제는 미래의 경쟁력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지만 반면 현실적인 세계적인 관세장벽, 전기료 부담, K-스틸법의 후속 조치 지연으로 중소 철강업체와 지역 상권의 체감 경기는 가라앉고 있다. 미래의 ‘비전’이 아무리 밝아도 지역 경제는 당장 생존을 걱정하는 ‘속도의 불균형’이 나타나고 있다. 산업 고도화가 지역 전체의 활력으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과 정책적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주택시장에서도 유사한 신호가 감지된다. 입주전망지수 개선은 미분양 우려의 완화 때문이지만 실수요자의 구매 여력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건설·부동산 관련 지역 업체들의 체감 경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크다. 시장이 바닥을 통과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과거와 같은 급격한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인구 구조의 장기적 흐름이 관여하고 있다. 청년층 유출과 고령화로 소비 기반이 약화하는 가운데 산업은 적은 노동력과 더 높은 기술력으로 재편되고 있다. 과거처럼 인구 증가와 생산 확대가 동시에 이뤄지던 성장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지역 경제는 얼마나 성장하느냐보다 어떻게 버티고 재편하느냐가 중요한 시대에 들어섰다. 그렇다고 비관론에 머물 필요는 없다. 배터리 소재와 미래 철강, 미래 로봇, 첨단 부품 산업 등 대구·경북이 축적해 온 제조 역량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다. 중요한 포인트는 산업 전환의 성과가 지역 경제로 파급되는 통로를 연결하는 데 있다. 지표 반등이 삶의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지역 경제가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지역 경제의 미래는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변화의 방향을 읽고 준비하는 지역 공동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 지역 공동체의 선택은 지역 주민 개개인의 선택이 결정한다. 마침 우리는 그 선택의 마지막 기회를 오는 6월 맞이한다. 이번 선거는 다수결로 우리의 미래를 맡길 정치인을 뽑는 자리가 아니라, 당장 전환기를 맞이한 대구·경북 경제의 지자체별 과제를 누가 가장 슬기롭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에 주목해야 할 때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08

아랫목

인구감소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변화다. 한 가정에 한 아이가 자연스러운 시대, 집 안은 조용해졌고 형제자매 사이에서 부딪치며 배우던 양보와 타협의 기술은 점점 희미해졌다. 세대 간 공감하는 간극은 넓어져, 각자의 논리는 분명해지고,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시간은 점점 줄어든 듯 보인다. 내복이 잠옷이던 추운 겨울밤을 떠올려 본다. 구들장 밑으로 연탄 불길이 지나가고 나면 가장 먼저 따뜻해지는 자리가 있었다. 검게 그을린 바로 아랫목이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아랫목으로 모였다. 두툼한 이불을 펴고 온 가족이 둘러앉거나 누워 발을 맞댔다. 서로의 발이 닿는 것과 이불속 더운 공기와 어울린 발 냄새 또한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닿은 그 체온이 하루의 피로를 녹여 주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밖에서 들은 소식, 부모의 걱정과 식구들의 투정이 그 자리에 풀어졌다. 아랫목은 단순히 따뜻한 자리가 아니었다. 집 안에서 가장 따뜻함이 모이는 곳, 그래서 마음도 모이던 자리였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이치를 배웠고, 아이의 말을 들으며 어른은 세상의 변화를 체감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좋았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같은 천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추운 겨울날 온돌방 아랫목은 늘 가족의 마음을 먼저 데워 주었다. 지금, 우리의 집은 더 넓고 효율적인 구조이다. 하지만 함께 둘러앉을 아랫목은 사라졌다. 꾸며진 거실은 설렁하게 비어 있고, 각자 방의 휴대전화 화면은 또 다른 세상이다. 한 공간 아래 살지만 서로 다른 시간과 취향 속에 머문다. 대화는 짧아지고, 표정 대신 메시지가 오간다. 가족은 함께 있으되, 동시에 각자의 공간은 따로 있다. 편리함과 독립성은 시대의 흐름이다. 그러나 공동체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 아랫목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식탁에서, 거실 소파에서, 혹은 동네 작은 모임에서라도 우리는 서로 공감한다면 다시 함께 머무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서로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표정을 읽고, 침묵까지 공유하는 시간 말이다. 관계는 멀리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데워지는 것이다. 인구가 줄어들어도 우리라는 관계까지 함께 줄어들 필요는 없다. 아랫목의 정신은 공간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가장 따뜻한 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주고, 그 자리로 기꺼이 모이는 마음이 곧 공동체의 출발점이다. 비록 오늘의 사회가 각자의 방과 화면 속으로 흩어져 전통적 공동체를 말하기 어려운 구조일지라도, 아랫목의 따뜻함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자는 제안이다. 자리를 조금 내어주고, 대화의 속도를 늦추는 작은 배려가 모일 때 공동체는 다시 살아난다. 형태는 달라져도 좋다. 온라인이든, 작은 모임이든 그 안에 따뜻함을 나누는 마음이 있다면 충분하다. 인구는 줄어도 우리의 온기만은 줄지 않는 사회, 서로의 발을 다시 맞댈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해 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08

하품밖에는 버릴 게 없는

소는 하품밖에는 버릴 게 없다(고 한다) 버려진 소의 하품은 어디로 가는가 정처 없이 헤매다 우연히 내 입으로 들어와 나의 하품이 된다 내 뼈다귀를 소 뼈다귀로 만들고 내가 하루종일 쳐다보는 컴퓨터 모니터를 소가 일구는 밭으로 만든다 멍에 메고 일하면 기분 더럽지만 멍에라도 없으면 하루는 또 너무 길어 오늘 하루도 또 뭐라도 하며 보내야만 하고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밭을 일구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문득 하품밖에는 할 게 없어지고 하품 말고는 다 버려도 좋을 만한 존재가 되어 하아아암 늘어지게 하품이나 한번 해본다 하품이라도 내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결국 내 안에 갇혀 뼈빠지게 일하다 죽게 될 삶 하품이라도 빠져나올 수 있어서 ―황유원, ‘하품’ 전문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 , 난다) 이 세상 숨 쉬는 모든 것들은, 생을 마칠 때까지 잠시 머물 수는 있어도 멈출 수는 없다고 했다. 오래 남는 시 한 줄이나 영화 대사는 감동이나 교훈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독백으로 대화를 만들어 낸다. 황유원의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에는 ‘방학’ ‘연중무휴’ ‘평상’‘하품’ 등 멈추지 않는, 아니 멈출 수 없는 곤비한 삶에 대한 사유와 쉼 없는 존재의 역설로 쉴 틈이 없다 “하품밖에 버릴 게 없”는 소의 거대한 멍에는 소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하루종일 쳐다보는 컴퓨터 모니터”는 소가 일구는 밭과 다름이 아니다. 이건 ‘소’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색하려는 시인의 시공간을 뛰어넘은 진지한 시도인 셈이다. 하지만 화자는 지향점을 야심 차게 제시하거나 노골적으로 돌파해가지 않는다. 눈에 비친 삶의 인상들을 소리나 이미지를 안배해 과장 없는 일상의 독백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미 시인의 전작들에서 음악이나 그림을 통해 보여온 것들이 매번 새롭게 인식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건 그가 좋아하는 것들 악기든 공연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그리고 국립국어원을 경유한 사물과 언어의 감각에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넘나들며 혼융하는 장르의 흐름은 멈춘 듯 새삼 이어지며 팽팽한 어법이 된다. 시집에 수록된 시인의 작품들이 대부분 역설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간과 존재가 하나의 대상에 동시에 작용하는 그의 작업은 인용되지 않은 시 ‘연중무휴’의 “존재와 비존재에 초근접한 순간에도 잠시도 쉴 수 없는 게 존재의 운명이라는 듯” 삶의 순간 쉼의 순간에 처하는 불가해한 감정이랄 수 있겠다. “일 년째 비어 있는 카페 창문에는/연중무휴라는 네 글자가 남아 있었다/일 년 동안 쉬었으면서 연중무휴라니//비어 있는 동안에도 쉴 틈은 없다는 듯(···.) 소낙눈 내리는 삼월 아침/혀 없는 입처럼 텅 비었어도/열린 창으로 존재를 시리도록 환기시키며/카페는 오늘도 삶 숨쉼, 삶 숨쉼, 연중무휴로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시인의 탁월한 삶과 존재에 대한 은유적 감수성에 감탄하며 몰입할수록 시인이라는, 삶이라는 예술가는 하나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일요일의 화가(Sunday painter)’란 평일에는 주업에 종사하다가 주말에만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를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으로, 흔히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이를 ‘일요일의 예술가’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쨌든 이 표현이 마음에 들어 앙리 루소의 그림에서 풍기는 일요일의 정서까지 사랑하게 되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곧 삶이라는 아이러니가 된다. “결국 내 안에 갇혀 뼈빠지게 일하다 죽게 될 삶” 죽을 때까지 노동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멍에를 잠시나마 내려놓은 순간일 터이다. 그러니까, 소의 하품을 그려내는 이 신랄한 블랙 코미디를 통해 모든 반복 중에서 가장 극심한 반복이란 ‘일’과 같음은 말할 것도 없겠다. 긴 겨울 방학이 끄트머리에 걸려 있는 풍경은 삼월로 이행하는 이월과 같다. 이때 한순간이나마 방학을 방학으로, 쉼을 쉼으로, 잠깐이나마 ‘하품’처럼 머물러 볼 수는 없을까. “하아아암, 하품이라도 내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희정 시인

2026-03-08

[역사 에세이] 전쟁은 포수가 하는데, 공은 선비가 가져간다고?

전쟁은 위기 앞에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듯 보인다. 그러나 포성(砲聲)이 멎은 자리, 혹은 전투의 한복판에서도 오래된 신분의 질서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공동의 적 앞에 서 있어도 인간 사회의 위계(位階)는 여전히 작동한다. ‘신분·출신 차별과 갈등’은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과 신분의 묘한 함수관계가 기록으로 남은 첫 사례는 고대 로마다. 기원전 494년, 귀족(파트리키)이 정치를 독점하던 로마에서 평민(플레브스)은 전쟁에는 동원되면서도 정치적 권리는 거의 없었다. 결국 평민들은 도시를 떠나 ‘성산(星山, Mons Sacer)’으로 집단 철수했다. 이른바 ‘평민 철수’(Secessio Plebis) 사건이다. 외적과 싸워야 했던 로마는 병력의 다수를 차지한 평민의 이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귀족은 결국 양보했고, 평민 보호관(Tribunus Plebis) 제도가 탄생했다. “전투는 평민이, 통치는 귀족이”라는 구조에 대한 첫 집단 저항이었다. 성경에도 비슷한 긴장이 등장한다. 예수는 갈릴리 어부들, 세리(稅吏) 마태, 열심당원 시몬처럼 서로 배경이 다른 이들을 제자로 불렀다. 특히 세리는 로마에 협력해 세금을 걷던 직업으로, 당시 유대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는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였다. 혈통과 직업, 종교적 배경을 넘어선 선택이었다. 로마 말기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또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그의 갈리아 원정군은 주로 평민 병사들로 구성했다. 카이사르는 병사들과 땅바닥에서 함께 자고, 음식을 나누며 고난을 공유했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에 카이사르는 ‘병사들과 같은 행군 속도를 유지했고 눈·비를 가리지 않고 야영했으며, 병사 개개인의 이름을 기억하며 포상에 후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긴장은 조선 말 항일 의병 안에서도 나타난다. 의병은 ‘나라를 위해 싸운 민중의 군대’로 불리지만, 내부에는 양반·평민·천민의 구분이 여전히 작동했다. 을미·정미의병을 이끈 다수는 유학자 출신이었고, 실전 전투의 핵심은 포수·사냥꾼·상민이 담당했다. “전쟁은 포수가 하는데, 공은 선비가 가져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896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柳麟錫)의 부대에서도 산포수(山砲手) 세력과의 긴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유교적 명분과 엄격한 군율을 중시한 지휘 방식, 그리고 매복·기동전을 선호한 포수들의 실전 감각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다. 제천 관아 점령 이후 방어 전략을 둘러싼 이견이 누적되며 일부 세력이 이탈했고, 이는 일본군의 반격 국면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반면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실력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양반 중심 의병 구조 속에서도 전과(戰果)를 세우며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 더 나아가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신분의 벽이 한층 낮아졌다. 김좌진 휘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는 노비·머슴 출신 인물들이 중책을 맡았고, 이는 청산리 전투 승리의 동력이 됐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비상식적이고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세계관과 질서 속에서 보면, 그것은 오랜 관습과 신념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새로운 질서를 향한 요구가 한 공간에서 충돌하는 순간, 갈등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질서를 끝까지 붙들 것인가, 아니면 공동의 대의를 위해 경계를 허물 것인가. 로마의 성산(聖山) 몬스 사케르, 갈릴리의 어부들, 루비콘 강, 그리고 제천의 의병진은 서로 다른 시대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In the midst of crisis, will we continue to cling to the old order?”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6-03-07

총과 투표용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평소에는 정치인들이 하는 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국민들은 선거 날 투표권을 행사하며 비로소 강력한 정치적 의사를 발현한다. 국민은 투표를 통해 주권자임을 자각하고, 그 한 표를 잘 행사하기 위해 정치와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투표권이 있다는 것은 나라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뜻이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우리 투표권자의 연령은 만 18세 이상이다. 요즘 선거 연령을 더 낮추자는 목소리가 있지만, 학생들에 대한 정치적 선동과 학교의 정치화가 우려된다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교육과정은 정치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아예 손 놓아 버린 듯하다. 아이들이 올바른 정치적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조차 하지 않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지난 우리 역사에는 나라의 수호자 역할을 한 많은 청소년들이 있었다. 1960년 3·15 마산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이 얼굴에 박혀 순국한 김주열 열사의 나이는 17세였다. 그의 희생은 4·19 혁명의 촉발제가 되었고, 고등학생 다수가 시위에 참여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는 많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새벽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죽어간 문재학, 안종필 열사는 16세 고등학생이었다. 일제강점기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는 16세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 순국한 나이는 17세였다. 1950년에는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포항여중에서 학도병들이 북한군과 교전하며 나라를 지켰다. 이 포항여중 전투로 대부분이 전사한 학도병 71명은 모두 17세, 18세의 청소년들이었다. 이렇듯 수많은 청소년들의 피와 희생 위에 독립한 나라에서 민주화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청소년은 나이가 어려 정치적 의사를 형성하기에 미성숙하다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청소년들은 더 용기 있게 나라를 지키고 목숨을 희생했다. 그것은 모두 그들의 성숙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위기의 시기에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빚을 진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왜 지금이 평화로운 시기라고 해서 청소년을 정치적 미성년자로 그저 단정짓는 것인가. 선거권 연령을 낮춰 무조건 투표권을 쥐여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들이 정치를 바로 알고 선동당하지 않으며 정상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스스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과정에 관한 정치’를 가르치자는 것이다. 학교에서부터 정치를 ‘커서 하는 것’, ‘지금 너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한다면 오히려 성인이 되었을 때 무방비 상태에서 선동과 세뇌를 당하는 일을 초래할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의 뼈아픈 역사를 가진 독일은 아이들에 대한 정치 교육을 헌법적 사명으로 삼고 체계적으로 정치를 가르친다. 교실에서 정치 토론이 제도화되어 있고, 적극적인 비판과 토론을 통해 극단주의에 대응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내성을 길러 준다. 민주주의는 중립적 방관 속에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파괴적 선동과 극단주의에 대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정치 교육은 결국 민주주의를 지킨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로부터의 격리가 아니라, 총 대신 투표용지를 들 수 있게 하는 정치 교육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3-05

하이브리드 전쟁

잡종으로 해석되는 하이브리드(Hybrid)는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요소가 합쳐진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이상의 요소를 합치는 목적은 대개 성능이나 효율성을 높이는 데 있다. 페달과 전기모터가 함께 달린 자전거는 하이브리드 자전거, 휘발유와 전기를 동력으로 사용하는 자동차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라 부른다. 미국은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 등 정부 요인들이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미리 정확히 알고 정밀타격을 가했다. 미국의 정확한 정보력과 미사일의 정교한 타격 능력이 합쳐져 이란의 지휘부는 완전 붕괴된다. 같은 시간 이란 전역의 인터넷 접속은 평소 4% 수준으로 급감했다. 오늘날의 전쟁은 총과 탱크를 앞세운 과거의 전쟁과는 양상이 다르다. 사이버 공격, 여론조작, 경제 제재, 정보전, 심리전 등 보이지 않는 전장이 넓게 전개된다. 이른바 군사적 조치와 비군사적 조치가 총 동원돼 치르는 전쟁이다. 이를 하이브리드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 학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표적인 하이브리드 전쟁이라 명명한다. 군사 충돌 이전부터 사이버 공격으로 정보전이 전개되고 나라 안 여론을 분열시켜 자국 내 혼란을 조장한다. 선전포고가 없는 전쟁이다. 미사일이 날아오기 전 이미 전력망이 마비되고 금융시장과 환율이 흔들린다. 사회 전체가 전쟁터가 된다. 과거 전쟁이 군대와 군대 간의 싸움이었다면 국가시스템과 국가시스템 간의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지금 지구촌은 전쟁과 갈등으로 얼룩지고 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사회의 현대전을 바라보면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안보 태세는 어떤지 반면교사 해볼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05

토론의 자격

부정선거를 주창하는 극우 인사들과 군소 정당 대표의 토론이 화제가 된 모양이다. 실시간 접속자 30만 명, 누적 조회수는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솔직히 한심하다. 아무런 합리적 근거 없이 부정선거 따위를 외치며 정치 선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공론장에서의 발언권을 주면 어쩌자는 건가? 토론을 성립시킨 그 저의 역시 의심스럽다. 서로가 서로를 정쟁의 수단쯤으로 생각한 것 아니겠나. 토론은 민주주의의 미덕으로 자주 찬양되지만 모든 주장이 토론의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토론에도 최소한의 요건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가령 토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사실 기반을 인정해야 하고, 합리적 근거와 증거를 제시할 의무를 수용해야 한다. 또한 반박될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두어야 하는데, 이 조건이 무너지면 토론은 ‘공적 숙의’가 아니라 ‘선동의 무대’로 전락하게 된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관용의 역설’에 관해 논한 바 있다. 민주주의는 관용을 요하지만 그 관용은 무제한적일 수 없다는 논의였다. 한 사회의 관용이 불관용에 대한 관용까지 포함하게 되면 결국 불관용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어 관용적인 사람들과 실천마저 제거된다는 것이다. 관용의 역설이란 관용적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관용에 대해 불관용할 권리가 확보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토론은 단지 말의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가 동일한 규칙을 공유한다는 암묵적 합의 위에서만 가능하다. 예컨대 선거관리기관의 절차, 사법부의 판결, 검증 가능한 통계 자료 등은 논쟁의 전제가 돼야 한다. 만약 어떤 집단이 이러한 공적 장치 전체를 불신하며, 그 불신을 증명할 책임조차 지지 않는다면, 그들과의 토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경우 토론은 진실을 가리는 과정이 아니라, 허위 주장에 공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낳는다. “양쪽 의견이 있다”는 형식적 균형은, 사실과 허위를 동일한 수준에 놓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부정선거와 같은 근거 없는 음모론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민주주의는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한다. 하나는 허위 정보의 확산이고, 다른 하나는 제도에 대한 신뢰의 붕괴다. 제도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 제도의 보호 아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는 태도는 자기모순이다. 이런 모순을 비판 없이 수용하거나 자기 정치를 위해 동원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공허해지기 마련이다. 민주주의는 모든 말을 허용하는 체제가 아니라, 공통의 규칙을 존중하는 말만이 정치적 힘을 갖는 체제다. 그 규칙을 인정하지 않는 주장과의 토론은 숙의가 아니라 소모일 뿐이며, 때로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잠식하는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하다. 그런 와중, 거대 야당 대표는 부정선거 토론을 통해 “선거 관리 부실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다며 ‘선거시스템TF’를 구성하겠단다. 봐라, 이런 토론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 여기 있다. 토론에 참여한 자나 그를 이용하려는 자나 매한가지 아니겠나. 자기 정치를 위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을 도구화할 뿐인 자들을 어찌해야 할까. 한국 보수의 현재와 미래가 이렇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3-05

사라진 가장놀이

애처가와 공처가 차이를 묻는다. 난 대답했다. 그런 질문 자체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내 팬티는 내가 알아서 빨면 공처가이고 내 팬티 빨 때 마누라 팬티도 같이 빨면 애처가라는 말은 이십여 년 전부터 나돌던 이야기다. 주위에 힘없는 가장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서로 묵례하면서 겸연쩍게 웃는 모습이 남자들의 자화상이다.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던 반딧불이 세대는 이미 한참 지나간 이야기다. 장사꾼과 사업가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장사꾼은 물을 많이 뜨기 위해 양동이만 늘리고자 힘쓰지만, 사업가는 한꺼번에 다량의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부터 준비한단다. 근본 생각부터 차이가 나야 한다는 말이다. 집안에 가장 노릇도 마찬가지이다. 권위는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냥 나이만 먹는다고 저절로 권위가 생기는 시절이 아니기에 고도의 전략과 전술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대통령 꼴이 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아야 할 자리임에도 탄핵당하고 형사소추 당하고 있으니, 나라가 어디로 갈지 자못 걱정스럽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양아치들의 계급 놀음인 보스가 아니다. 일종의 리더십이 있는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는 위치이다. 보스는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이끌고 간다. “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가자”고 권고한다. 따라서 보스는 권위적이지만 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보스는 음흉하게 비밀리에 일을 꾸미고 들키면 발뺌하거나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남을 절대 믿지 않으며 겁을 주는 폭력에 의한 공포심을 심어주어 복종만을 요구한다. 아버지는 보스였다. 그게 남자라고 믿었다. 가끔 소리도 지르고 밥상도 한번 엎고, 술 드시고 늦게 들어와 자는 애들 깨워서 일장 연설도 하고. 그래도 절대 탄핵당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가장으로서 존경받지 못하고 늘 뒷전이거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젊은 시절 할아버지나 아버지 흉내 내면서 힘으로 짓누르려고 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김두한 시절 흉내 내던 보스 기질이 그대로 살아남았으리라. 농사짓던 시절 아버지의 권위는 하늘 이상이었다. 나라에서도 군사부일체니, 뭐니 하면서 아버지 권위를 부추겼다. 덕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는 잘 먹고 잘 놀다 가셨다. 세상이 이렇게 빨리 변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우리 세대까지는 어떻게 세력 유지하면서 버틸 줄 착각했다. 꿈은 바로 깨졌다. 대통령은 탄핵당하기 일쑤이고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됐다. 요즘 젊은 애들은 남자도 음식을 한단다. 서로 맞벌이가 많아 청소나 설거지도 여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작업구역으로 변모했다. 우리 때는 여자 일로 규정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거들어 주면 칭찬받았는데, 이젠 안 하면 바로 지적당한다. 다행히 아들이 없어 며느리에게 구박받으며 사는 아들 꼴을 안 봐서 다행이지만, 사위가 내 딸에게 잡혀 사는 것도 별반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내 딸이라 못 본 체할 뿐이다. 안사돈은 자신이 낳아 좋은 음식만 갖다 먹여 키워놓은 자식이 저 지경으로 사는 걸 보고는 천불이 나 어쩔 줄 모르고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05

어쨌건 전쟁은 비극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전역에 폭탄을 쏟아붓고 있다. 전쟁은 시작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이다. 이 전쟁으로 이란의 고위 지도자와 미국 군인들만이 생명을 잃은 건 아니다. 지난달 28일. 이란 미나브 지역에선 여자 초등학교가 폭탄에 피격됐다. 다수의 외신은 이 폭격으로 16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그날 숨진 아이들은 복잡한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나 종교적 갈등과는 무관한 죄 없는 이들이었다. 이란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으니 반격을 시작했다. 미사일과 공격용 드론이 이스라엘과 미군 기지가 있는 중동 전역으로 발사됐다. 거기서도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중구난방 폭탄이 날아다니는 중동에선 비행기를 띄울 수 없어 공항이 폐쇄됐고, 여행 중에 날벼락을 맞아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 등에서 발이 묶인 한국인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아랍에미리트에선 탄도미사일 포화에 3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다고 한다. 이번 전쟁은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싸움에서 중동 전역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알다시피 그 지역엔 친미국가가 여럿 있는 반면, 이슬람 시아파를 지지하며 이란의 편에 선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오랜 기간 지속된 종교·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확전(擴戰)의 위험성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며칠 전. 이번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으로 지상군을 파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렇게 되면 사망자는 더 늘어날 터. 미사일과 총알엔 눈이 달리지 않았다. 그러니,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못한다. 더 큰 비극이 기다리는 듯해 우려스럽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04

포항이 사라졌다

포항은 경상북도의 대표 도시다. 250만 경북 인구 가운데 거의 50만을 품고 있는 중심 도시다. 그러나 도시의 풍경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묘한 공백이 느껴진다. 분명 큰 도시인데, 정작 ‘도심’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과거 포항의 중심은 분명했다. 육거리 일대와 중앙상가, 죽도시장 주변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심장 역할을 했다. 사람이 모였고, 상권이 형성되었고, 도시의 기억이 쌓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중심은 점점 약해졌다. 상권은 낡아갔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새로운 주거지로 이동했다. 구도심은 천천히 힘을 잃어 갔다. 50만에 달하는 포항시민들 모두에게, 도시의 중심을 되찾는 일은 가히 전대미문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다음이다. 새로운 도심이 만들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포항의 주거환경은 남과 북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남쪽에는 이동과 효자동 일대가 커졌고, 북쪽에는 장성동과 양덕 일대의 신흥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주거지’일 뿐 도시의 중심은 아니다. 소위 거주 공간의 확장만 진행된 셈이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고 싶어 하는 공간,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소, 외부 방문객에게 ‘여기가 바로 포항이다’라고 소개할 만한 상징적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는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중심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숨을 쉬며, 경제 활동이 집중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도심이 있어야 도시가 살아 움직인다. 예를 들어 영일대 해수욕장은 분명 포항의 자랑스러운 공간이다. 바다와 해변,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다. 하지만 영일대는 관광 공간이지 도시의 중심 기능을 수행하는 도심(core downtown)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육거리 일대 역시 오랜 역사와 기억을 가진 장소지만 오늘날의 도시 규모와 기능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힘이 약해졌다. 결국 지금의 포항은 구도심은 약해지고 신도시는 분산되어 있으며 도시 전체를 묶어주는 새로운 중심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도시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미관이나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도심이 사라진 도시는 상권이 분산되고 문화가 축적되지 못하며 외부에서 도시를 기억할 상징도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제 포항은 주거 확장을 넘어 도시중심을 다시 세우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도심은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계획과 투자, 그리고 도시 비전이 함께 작동할 때 만들어진다. 포항이 어떤 도시가 될 것인지, 어디에 도시의 심장을 다시 세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시작되어야 한다. 시민이 찾아가는 도심, 외부 방문객이 기억하는 도시의 중심. 포항은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구도심을 더 이상 추억의 장소로 간직하게 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도심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바꾸어 사람들의 발길이 흐르고 경제가 느껴지며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철강도시 포항의 도심에 새로운 맥박이 뛰게 해야 한다. 구도심은 추억거리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 자산이 되어야 한다. 포항이 경북 제일의 도시로 버젓이 발전해 가기 위해서도, 도심 공간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흐름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04

부모보다 시민이 먼저인가요?

한국 부모들이 공동체 정신은 없이 개인적 탐욕으로 아이를 잘못 키운다고 비판하는 ‘탐욕스러운 돌봄’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어느 게시글에는 ‘알 만한’ 이들조차 부동산과 자식 교육 두 가지 앞에서는 딴사람이 된다면서 그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 게시글을 쓴 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부동산과 자식 문제만큼은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별로 없다. 진보를 자처하거나 능력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자녀를 위해 강남으로 이사하는 사례가 많다. 두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는 나 역시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었다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입시는 한국의 부모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의 서문에서 말하듯이 “돌봄의 어려움은 나 혼자 애쓴다고 덜어지지 않으므로” 양육을 사적인 헌신에 가두지 말고 모두의 책임으로 재사유하자는 제안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저자는 이런 주장에 논거로 제시한 것은 들러리 서는 아이들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부모 찬스’를 쓸 운이 없었던 것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능력 있는 부모들의 개인적인 탐욕을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불안과 욕망을 부추겨 공동체를 훼손하는 사회 전체의 탐욕을 더 비판한다. 이렇게 하여 저자가 도달한 결론은 부모인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돌보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사회 구성원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데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도 부모이기 이전에 시민이 먼저라면서 이 주장에 동의한다. 이런 주장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3년 전쯤 만난 어느 법조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자녀가 공부에 큰 재주가 없는 것 같다면서 그런 아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데 관심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며 공부에 재주가 없으면 다른 재주를 계발해야 하지 않나, 사회 구조가 어떻게 그의 행복을 책임질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저자의 주장에 의문이 생긴 두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자기 자식을 돌보는 데서 남긴 에너지를 어떻게 공동체 구성원을 돌보는 데 얼마나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오래전 두 아이가 아토피가 심해서 생협을 이용하다가 지역 공동체 활동으로 반경을 넓혔는데, 두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쏟는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자기들에게 신경 써달라고 여러 번 불평한 적이 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도 내 가족과 공동체 사이에서 균형 잡기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대치동 학원가에서 자녀가 5분이라도 찬 바람 맞는 것을 꺼리는 것을 탐욕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불법의 영역만큼은 엄격하게 단속해야 한다. 아이를 태우기 위해 도로에 불법 주차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니 비판하고 규제해야 한다. 부모들의 불법을 단죄하는 것은 사회의 모든 아이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노력과는 관계없지만 사회 구성원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 수 있는 토양이 된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04

어깨가 아픈데 왜 목을 치료할까

어깨가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데 목을 같이 치료한다고 하면 환자들은 의하해 하는 경우가 있다. 어깨가 아픈데 왜 목까지 치료를 하는지 과잉치료를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인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엔 당연한 반응이다. 아픈 곳이 어깨니 어깨만 치료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인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어깨 통증의 상당수는 어깨 관절 자체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어깨를 움직이는 근육들은 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과 등까지 이어져 있다. 특히 경추에서 나오는 신경들은 어깨와 쇄골을 지나 팔을 타고 손가락까지 연결되어 있다. 이 신경들에서 따로 분지하는 신경들은 등으로도 내려가고 어깨 깊은 곳과 바깥을 두르면서 내려간다. 따라서 목 상태가 나빠지면 어깨 근육의 힘도 약해지고 긴장도도 커져서 통증을 유발한다. 목 주변 근육이 지속적으로 긴장하면 경추의 신경이 지나가는 통로가 좁아지고 신경은 평소보다 자극에 더 민감해진다. 이때 실제 어깨 관절에는 큰 손상이 없어도 통증이 발생하거나 팔을 들 때 힘이 빠지는 느낌이 생긴다. 어깨가 뭉쳐 있거나 뻐근한 통증도 더 강하게 나타난다. 환자는 어깨만 문제라고 느끼지만 대부분 원인은 목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고 어깨와 목을 같이 치료하고 풀면 더 빨리 회복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고개가 앞으로 빠진 자세가 일상화된 현대의 어깨 통증은 더더욱 어깨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자세에서는 목 뒤 근육과 등 근육이 계속 긴장하고 어깨를 잡아당기는 힘이 커진다. 결과적으로 어깨가 뭉치고 어깨 관절에 작용하는 힘이 틀어지고 이에 특정 힘줄에 부담이 반복되어 시간이 지나면 회전근개 염증이나 이두근 통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깨는 치료를 반복해도 잘 낫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통증이 나타난 결과만을 치료하고 원인이 되는 목과 신경의 문제는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음파 검사를 해보면 흥미로운 경우가 많다. 심한 파열은 없는데 특정 근육만 과도하게 굳어 있거나 움직일 때 힘줄이 비정상적으로 당겨지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경우 목의 긴장을 풀어주고 신경 자극을 줄이면 어깨 통증이 예상보다 빠르게 줄어드는 일이 흔하다. 인체는 떨어진 부품처럼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목의 움직임이 제한되면 어깨가 대신 더 움직이게 되고 어깨는 부하가 축적된다. 반대로 목의 근육과 신경의 긴장이 풀리면 어깨 근육과 관절의 부담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치료의 방향은 단순히 아픈 부위에 침만 놓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부위가 아프게 되었는지를 찾고 그 원인인 목을 푸는 과정이 된다. 환자들이 목이 편해지면 어깨 뭉침이 훨씬 빨리 줄고 팔도 잘 올라가는 것을 경험하면 다음엔 목도 같이 풀어 달라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인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어깨 통증이 목 때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 어깨만의 파열이나 관절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통증이 오래 지속되거나 치료 반응이 느린 경우라면 어깨만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넓히면 더 나은 치료 결과를 접하게 된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3-04

포항 시민 신영학-과수원칼국수

제자리를 잘 지키는 것이 나아감보다 융숭함을 본다 개고생 끝에 오롯하게 생업을 유지하며 사람을 환대할 줄 아는 그 사과꽃 미소는 고난의 끝에서 길어 올린 소박한 인고의 결실이다 젊은 날의 방황과 설움과 밥벌이의 고난을 그는 항시 기억하며 살고자 한다 불평등 혹은 격차가 더욱 깊어지는 시절에 그는 사람의 길을 생각하며 국수를 끓인다 치열함과 절박함을 함께 녹여 낸다 따스한 세상이 그의 종착역이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제자리 지킴의 가치가 더욱 선연해진다. 술자리에서 보수와 진보를 두고 침 튀길 때 세상사에 별 관심 없는 그가 농담으로 무심히 던진 말이 자정 넘어 집으로 오는 길, 유독 귀에 남는다 청송 옆에 진보 있다 그 말은 먹고 사는 형편의 이리 불편함과 어려움을 슬쩍 일깨워 주려는 헛기침일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그는 살아가는 일에 늘 충실하며 진보적이라는 사실은 자명(自明)하다 과수원칼국수는 자명리(自明里)에 있다. …. 이 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자명과 청송과 진보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나 청송이라 불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 진보는 아득히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지명을 특정적으로 지칭하지 않음을 양해 바란다. 나는 다만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봄빛 가득한 사과꽃이 피길,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하는 나를 적당히 욕해 주시길. 신영학의 말에서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말에 함축된 의미가 너무 의연해서 오래 밤길 걸으며 생각했다. 마음으로 쓴 엽서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렇지만 우체부의 걸음이 휘청일 수도 있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3-04

관성에서 벗어나기

병오년 새해가 밝았지만 내 일상은 여전히 같은 궤도를 돈다. 해가 바뀌면 무언가 달라지리라 기대하지만, 아침에 눈 뜨면 익숙한 동선이 기다린다. 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람들을 만나는 반복. 그 반복이 나를 안정시키기도 했지만, 어느새 익숙함은 관성이 되어 나를 가만히 묶어 두었다. 새해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는데, 작년과 같은 궤도를 돈다. 지난해도 그렇게 흘렀다. 달이 지구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듯 내 하루도 판박이처럼 돌았다. 느슨하거나 게으르진 않았지만 돌아보면 남은 건 손에 닿지 않는 성과와 허접한 문장들뿐이었다. 칼럼을 쓰고 잡지에 원고를 실었지만, 내가 꼭 필요해서 쓴 글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었다. 작품집을 내는 작가들의 소식을 접할 때면 마음만 조급했다. 책상 위에 쌓인 그들의 작품집을 보며 봉투를 뜯지 못한 채 그냥 바라만 본다. 부러움과 자책이 번갈아 올라온다. 얼마나 더 글을 쓸 수 있을까. 건강 검진에서 의사는 건강에 이상은 없으나, ‘근력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그 말 한마디가 마치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마음은 스무 살인데 몸은 나이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이 불현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뒤늦게 근력운동을 시작했지만 막연한 불안과 의미 없는 조급함이 줄어들진 않았다. 그나마 헬스장에서 근력운동을 시작했다는데 위안을 얻었다. 관성은 나를 편안한 자리로 다시 데려다 놓고, 그 자리에 머물다 시간을 흘려보냈다. 계획표엔 야심 찬 목표들이 빼곡했지만, 연말이면 남는 건 아쉬움뿐이었다. 스스로를 부지런하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주어진 일에 밀려 나의 삶은 누군가가 짜 놓은 시간의 틈으로 흘러 들어갔다. 앞을 향해가는 대열에서 나만 뒤로 밀려났다. 익숙한 궤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를 고치기로 했다. 느슨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감이 있는 글쓰기. 도서관에서 글쓰기 강의하며 결과를 모아 한 권의 글쓰기 책을 내기. 집중을 위해 몸을 더 챙기고, 반시계 방향으로 운동장을 도는 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작은 저항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돌면 시간을 거스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숙달이 되면 궤도를 바꿀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술잔을 기울이며 나를 위로하고 설득해야 했다. 누군가의 성취를 부러워하기보다 내게 남은 하루를 어떻게 쓸지 묻기로 했다. 부지런함이 곧 생산성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되, 꾸준히 한 방향으로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작지만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고, 한 시간이라도 책 속에 머무르는 날을 쌓아 가기로 했다. 시간은 야박하게 흘러간다. 유통기한은 누구에게나 다가오지만, 그 속도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반시계 방향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돌면서 생각하리라. 내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반시계 방향으로 돌며 관성을 벗어나 나의 길을 가리라 다짐한다. 글을 쓰는 일이 내게 남은 중요한 일이라면, 이제는 관성에 기대지 않고 일부러 걸음을 바꿔 걸어야 한다. 시작은 늘 불안하지만, 살면서 쉽게 이루어진 일이 있었던가.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결과는 늘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삶은 늘 힘들고 만족스럽지 않지만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 보면 글이 내게로 다가오는 날도 오기를 소망한다. 묵묵히 길을 가다가 보면 어느 날은 단어 하나가, 또 다른 날은 문장 하나가 올라올 수도 있으리니. 문장들이 모이면 한 편의 글이 되고 책이 될 수도 있으리니. 내 꿈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리라. 작심삼일. 그러기에 하루하루를 살리라. 삶은 일생의 모든 하루의 집합임을 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휘둘려 한눈을 팔지도 않으리라. 먼 미래를 위해 살겠다고 하루를 허투루 보낼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만 생각하며 살면 되는 것을. 성실한 하루에는 작심삼일은 발도 붙이지 못한다는 걸 경험으로 안다. 그렇게 글만 보며 하루를 살아가리라. /김규인 수필가

2026-03-04

블랙스완의 충격과 회색코뿔소의 돌진

결국 터질 것이 터지고야 말았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의 주요 시설과 민간인 시설에 대해 대대적인 합동 공습을 벌이고, 이란이 이에 맞서 반격에 나서면서 중동은 물론 세계질서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는 예견된 위기이면서도 가공할 파괴력을 지닌 복합적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를 ‘블랙스완(Black Swan)’의 돌발성과 ‘회색 코뿔소(Gray Rhino)’의 경고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부해 보아야 한다. 나심 탈레브가 정의한 ‘블랙스완(Black Swan)’은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해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예외적 사건을 말한다. 반면 미셸 부커가 주창한 ‘회색코뿔소(Gray Rhino)’는 개연성이 높고 파급력도 크지만, 사람들이 설마 하며 무시하다가 결국 치명적인 충격을 입게 되는 위기를 상징한다. 지금 지구촌을 엄습한 중동전쟁의 위기는 이 두 동물이 동시에 날뛰는 형국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군사 행동은 그 자체로 글로벌 물류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의 폐쇄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지정학적 리스크를 넘어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글로벌 공급망과 에너지 안보, 그리고 우리 기업들이 직면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체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의 폭등은 기업들의 화석연료 의존도를 단기적으로 높이며 탄소중립(Net-Zero) 목표 달성을 지연시키게 될 것이다. 에너지 수급 불균형은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을 약화시키고, 고유가로 인한 물류비용 상승은 전 산업군의 탄소 발자국 관리에 비상을 걸게 된다(E).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 불안과 단절은 단순한 경제 손실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의 급등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먼저 타격을 입히며(S),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영역 내에서 관리해야 할 ‘인권 및 커뮤니티 리스크’를 증폭시키게 될 것이다(G). 우리 기업들은 이제 지정학적 불안정성을 경영의 ‘변수’가 아닌 ‘상수’로 보아야 한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한 공급망의 붕괴에 따른 예측 불가능성과 지정학적 리스크의 현실화 속에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의 대응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이번 사태는 돌발적인‘블랙스완’의 충격처럼 다가오지만, 사실 에너지 안보와 공급망 취약성이라는 오래된‘회색 코뿔소’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온 결과다.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특정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면적이며, 특히 지역경제의 대들보인 철강산업은 그 충격파의 정점에 서 있다. 지역철강업은 에너지 다소비 구조상 전력 생산을 위한 유가와 가스 가격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중동발 에너지 쇼크는 즉각적인 제조 원가 상승으로 이어져 단순한 수익성 악화를 넘어 ESG 경영의 ‘E(환경)’ 지표를 위협하게 된다. 치솟는 에너지 비용은 수소환원제철 등 저탄소 공법으로의 전환에 투입될 재원을 고갈시키게 된다. 고유가 상황에서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더 큰 비용 부담을 안게 된다. 철강 기업들은 이제 ‘탄소중립’이라는 장기 과제와 ‘에너지 수급’이라는 당면 과제 사이에서 거버넌스(G)의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다. 특정 지역에 편중된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수급 구조에서 탈피해 재생에너지와 원자력 등 에너지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고,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에너지 자립화 전략(E)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들로 공급망을 재편하는 공급망의 ‘리쇼어링’과 ‘프렌드쇼어링’ 가속화는 이제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거버넌스(G) 전략이다. 이것이 블랙스완과 회색 코뿔소의 복합충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중동의 위기는 지역산업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거울인 동시에, 더 단단한 지속가능성을 구축하라는 경고다. 역설적으로, 중동의 포성은 우리에게 ESG 경영의 엄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위기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블랙스완의 재앙이 되지만, 철저히 대비한 자에게는 회색 코뿔소를 길들여 앞으로 나아갈 기회가 된다. 이와 함께 글로벌 차원의 협력 강화도 필수적이다. 국제기구와 다자협약을 통해 에너지 시장 안정화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재생에너지 기술 공유 플랫폼을 확대해야 한다. 국내 기업은 공급망 디지털화와 ESG 데이터 투명성 확보에 투자해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하며, 정부는 탄소중립 R&D 지원과 그린 파이낸싱 확대를 서둘러야 한다. 전쟁 리스크 속에서 ESG는 단순한 경영 전략이 아닌 국가적 생존 전략으로 진화해야 할 때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뿐인 ESG가 아니라, 전장의 포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리스크 회복력’이다. 블랙스완의 날갯짓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회색 코뿔소의 뿔을 잡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담대한 ESG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3-04

균형과 느림

균형이란 뭘까.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상태일까, 아니면 어느 것 하나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알맞음일까. 우리는 균형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좋은 의미를 붙인다. 균형 잡힌 식사, 균형 잡힌 사고, 균형 잡힌 삶. 그 말 속에는 늘 안정과 성숙이 함께 따라온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일과 삶을 적절히 나누며, 타인의 말에도 쉽게 치우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어쩐지 안심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한다. 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겠구나, 중심이 단단하겠구나 하고. 균형 잡힌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어쩌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고백과도 닮아있다. 회사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정리하는 사람, 삶의 여러 영역을 적절히 나누어 관리하는 사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에서 영리하게 선을 긋는 사람. 그런 모습은 완성형에 가깝게 느껴진다. 마치 중심이 정확히 잡혀 있어서 어떤 외부의 힘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같은 모습을 요구한다. 왜 나는 이렇게 쉽게 기울어질까, 왜 감정이 먼저 앞설까, 왜 한쪽으로 치우쳤다가 뒤늦게 후회할까 하고선 자주 자책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존재할까?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가만히 서 있으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열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발끝에 힘을 주고 무게를 조금 옮기고 손잡이를 더 단단히 붙잡는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히 서 있는 것 같지만, 몸은 계속해서 미세하게 방향을 조정하고 있다. 그 작은 움직임 덕분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다. 균형은 가만히 버티는 힘이 아니라, 흔들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몸을 옮기는 능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유난히 느려지는 편이다. 이리저리 재보고, 가능한 경우의 수를 상상하고, 마음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사실 그동안 나는 고민이 드는 순간 결정을 빠르게 내리는 편이었다. 고민을 하는 시간은 늘 답답하고 두려움이 들었기에 빨리 결론을 내린 적이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서둘러 내린 선택은 종종 오래 마음에 남았다.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다는 찜찜함, 다른 가능성을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오래 뒤따랐다. 크게 후회를 한 뒤로는, 반대로 며칠을 두고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감정이 가장 크게 요동칠 때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않고 하루쯤 지나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속 급급함이 조금씩 내려갔다. 처음에는 확신처럼 느껴졌던 감정이 사실은 불안이었음을 알아차리기도 하고, 당장 피하고 싶었던 선택이 오히려 필요한 방향임을 이해하게 되기도 했다.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앞두면 나는 여전히 느려지고, 그 과정은 여전히 괴롭지만, 잠시 멈추어 이 상황 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보는 시간이 결국 나를 덜 후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단지 결정을 늦게 내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조금 더 오래 균형을 잡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균형을 이상적인 상태로 그려놓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고, 감정도 일도 관계도 정돈된 모습을 원한다. 그러니 조금만 삶이 한쪽으로 기울어져도 쉽게 불안해진다. 일이 바빠지면 ‘나는 지금 너무 일에 치우친 건 아닐까’ 걱정하고, 쉬는 시간이 길어지면 ‘이렇게 오래 쉬어도 되나’ 하며 초조해진다. 완벽하게 반듯한 상태를 상상해두었기 때문에 그 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실패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은 완벽히 정지된 화면이 아니다. 매일 다른 변수가 생기고, 감정의 온도도 달라지고, 우리의 에너지도 일정하지 않다. 그렇게 끊임없이 움직이는 조건 속에서 완벽한 균형을 기대하는 일은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인 바람일지도 모른다. 균형이란 결국 매일 조금씩 방향을 고치며 살아가기 위한 열렬한 몸짓이라 생각한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발을 옮기는 일, 한쪽으로 치우쳤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중심을 찾으려는 노력, 빠르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잠시 멈춰 서는 선택. 그것은 완벽함의 증명이 아니라, 흔들림을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균형 잡힌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도 아마 매일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없이 방향을 수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균형은 단단히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기보단, 기울어질 때마다 다시 중심을 찾으려는 의지다. 오늘도 나는 작은 외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겠지만, 그 대신 조금 더 오래 서 있기 위해 천천히 몸을 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느린 조정이 결국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할 것이다. /윤여진(시인)

2026-03-04

‘호락호락’도 락이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괜찮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신사역에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광고판에 호랑이 캐릭터와 함께 이런 문구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강의가 끝나고 왜인지 모를 실의에 빠져 있는 때였다.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누가 누굴 가르친담. 내가 괜히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건 아닐까?’ 몇 년간 나를 짓누르는 무력감에 무거운 짐이 어깨와 등에 더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 문구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따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괜찮다.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아. 출처가 궁금해서 알아보니 이미 밈으로 돌아다니던 문장을 가수 태연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 화제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귀여운 호랑이 캐릭터와 그 말이 무슨 관계가 있고 또 무엇을 광고하려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이미지와 문장은 내게 분명하게 남았고, 스스로 약간의 동력이라도 찾을 수 있게 되었으니 광고와 무관하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사실 나는, 제법 호락호락한 편인 것 같다. 부탁을 받으면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나쁜 말을 들으면 곧장 나쁜 말로 되받아치지 못한다. 외양이라도 좀 강해지고 싶은데 그건 태생적인 부분이라 어쩔 수가 없다. 키와 덩치가 그닥 크지 않은데 얼굴도 동그래서 좀 만만하게 생겼다. 심지어 목소리도 낮고 음성의 크기 또한 크지 않다. 전반적으로 별다른 포스가 없다. 스스로 위축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어디에서든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바로 쭈구리가 된다. 사람과 닿는 것도 무서워서 지하철이나 버스 옆자리에 누군가 앉으면 있는 힘껏 몸을 말곤 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잘 안 된다. 언제나 내가 제일 약하고 볼품없어 보인다. 이런 나지만 의외로 오프라인에서 하는 것들을 즐긴다. 특히 콘서트. 아무래도 좌석을 선호하지만 스탠딩도 아주 싫어하지는 않는다. 일어서서 뛰면서 함께 해야 더 즐거운 공연도 있다. 락이 그렇다. 엊그제 일본 록(J-Rock) 밴드 원오크락(ONE OK ROCK) 내한 콘서트를 보러 친구들과 잠실실내체육관에 갔다. 전부터 좋아하던 밴드라 기대가 됐다. 동시에 걱정도 됐다. 노래가 하나도 쉬운 게 없는데 이게 다 라이브가 되는 건가? 공연장 음향 상태가 안 좋으면 어떡하지? 나… 밖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사람들 속에서 음악에 집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양가적인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원오크락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등장했다. 그리고 오프닝 첫 곡으로 ‘Puppets Can‘t Control You’를 했다.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직전의 걱정이나 고민은 모두 기우라는 걸 알았다. 전율이 일었다. 두 번째 곡으로 한 건 ‘The Beginning’. 두 곡만으로도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다. 나도 열심히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다. 앞이나 옆에서 종종 작은 나의 영역에 침범해서 리듬에 몸을 맡겼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 순간 나는 누구든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원오크락의 음악 안에 빠져 노는데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쯤 더 해도 좋았을 테지만 모두가 예상했을 앵콜곡 ‘We Are’를 마지막으로 공연은 끝났다. 친구들은 나와 같은 감정이 되었는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보컬은 말할 것도 없이 끝내줬고, 악기들 또한 합과 움직임이 엄청났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결속력 같은 게 보이는 듯했다. 나도 저런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잠깐이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리 쉽게 바뀔 수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나는 더 나약하다. 공연장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치이고 자꾸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보면서 호락호락이라는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내 안에 원오크락이 준 에너지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호락호락. 하지만 호락호락도 락이 아닐까. 아니야. 확신을 갖자. 내가 설령 호락호락한 사람이라고 해도, 락처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심지어 락이 두 번이나 있는걸. 그래서 작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호락호락도 락이다. 가방을 안고 대중교통을 조용히 타고 있는 내 이어폰에서는 늘 락이 나오고 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나의 전투력은 이미 최고치에 달했다. 싫은 소리를 들어도 또 별말 못하겠지만 뭐 어떤가. 내 안에서는 다시 내가 짱이 되었다. 정말 강해지지는 못할지라도 너무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나에게 호락호락한 정도라면, 딱 괜찮을 것 같다. /구현우(시인)

2026-03-04

흔들리는 TK민심···여권 러브콜 통할까

보수진영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져 왔던 대구·경북(TK)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폭락하자 여권의 전방위 공략이 시작됐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최근 라디오방송에서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를 장동혁 체제로 치르면 잘해야 경북지사 한 사람 당선될 것”이라며 “대구도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지난달 28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2‧28민주운동 기념식에서 “알고 보니 대구가 이 땅의 내란을 막아냈던 빛들의 뿌리였다. 정부는 앞으로도 대구·경북 지역이 대한민국의 선도 지역으로 발전하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운동을 진보진영의 상징인 ‘빛’의 뿌리로 네이밍한 것이다. 2‧28민주운동은 1960년 3·15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정권이 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수성천변 선거유세에 학생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등교 지시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대구 고교생들의 시위사건이다. 김 총리 대구방문 하루전인 27일에는 정청래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가 대구 중구 2·28기념회관에서 현장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이젠 대구시민들이 민주당에도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정 대표는 이날 TK신공항 건설 등 지역 숙원사업 해결을 약속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약속대로 대구를 AI 로봇 수도로 우뚝 세우겠다”고 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지도부가 ‘윤 어게인’ 늪에 빠져 맥을 못 추는 틈을 타 민주당이 보수텃밭의 안방까지 치고 들어온 것이다. 민주당 대구시당도 최근 지역 밀착 공약을 쏟아내면서 공격적인 선거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달 23~25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NBS)에서는 민주당 지지율이 45%로 국민의힘(17%)을 2배 이상 앞질렀다. 특히 TK지역 정당지지율 조사에서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동률(28%)을 기록했다. 그동안 대선이나 총선 때마다 보수정당 후보 대부분이 TK지역에서 70~80%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된 것과 비교하면 충격적이다. 민주당 강득구 의원은 대구 최고위원 회의에서 “28%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변화의 신호탄이다. 민주당의 전국정당화가 현실이 될 수 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민주당은 현재 대구시장 후보에 ‘김부겸 전 국무총리 카드’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김 전 총리는 출마가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유력 인사들이 김 전 총리를 설득하는 중”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김 전 총리가 출마 의사를 굳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 전 총리는 지난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60% 넘는 득표율로 당선됐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이 대구시장 후보로 누굴 공천하느냐에 따라, 정권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민주당 후보의 파급력이 예상외로 커질 수 있다. 여당에서 정치적 비중이 큰 후보를 공천할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말이다. 국민의힘도 이제 ‘TK지역은 지팡이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민심과 지역발전을 토대로 한 후보를 공천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