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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신사의 휴대폰

여성 변호사들에게는 직업병이 하나 있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반드시 아래위를 살피는 것이다. 화장실에서의 몰카 촬영 사건을 워낙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직업병이 생겼다. 필자 역시 집이 아닌 곳에서 화장실을 사용할 땐 옆 칸에서 휴대폰 같은 무언가가 넘어온 것은 없는지, 천장이나 벽에 작은 렌즈 같은 것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닌지 습관적으로 확인한다. 실제로 이런 공공장소에서의 몰카 촬영 범죄는 상당히 많이 일어나고 있다. 변호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를 살피고 조심해야 하는 세상인 것이다. 혹여나 화장실에서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발견한다면 절대 소리를 지르지 말고 손을 뻗어 휴대폰을 낚아챈 뒤 문을 열지 않은 상태에서 112에 신고할 것을 권한다. 소리를 지르면 범인이 도망가 버리고 증거 확보도 어려워질 수 있다. 이제는 여성만이 조심할 일도 아닌 것 같다. 남성 화장실, 남성 사우나에서 남성의 알몸을 촬영하고 촬영물을 수집하는 범죄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난주에는 포항의 한 목욕탕 남탕에서 세신사로 근무하며 손님 1000여 명의 알몸을 몰래 촬영해 온 40대 남성이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는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포항 북구 소재 목욕탕 3곳에서 세신사로 일하며 손님들의 신체를 몰래 촬영했고, 그중에는 미성년자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건이 터졌으니 이제 목욕탕에서는 탕에 입장하는 세신사들의 소지품 검사도 해야할 것 같다. 이처럼 타인의 신체를 촬영하는 행위는 남녀를 불문하고 당연히 범죄이고 처벌된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약칭: 성폭력처벌법)에 따르면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 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이 죄는 촬영 피해를 당한 피해자 수만큼 복수의 죄이다. 세신사가 1000명의 알몸을 촬영했다면 1000개의 불법촬영죄가 성립하는 것이다. 또 범죄가 되는 촬영은 통상인의 관점에서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한 경우를 말하므로 얼굴이나 머리카락, 손을 찍는 것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촬영물을 어딘가에 제공하거나 전시한다면 또 다른 범죄가 추가된다. 성폭력처벌법에 따르면 불법 촬영물 또는 복사본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촬영 대상자의 허락을 받고 촬영한 촬영물이라도 나중에 허락 없이 이를 반포하면 역시 범죄다. 이런 불법 촬영물은 다운로드 받아서도 안된다. 이를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기 때문이다. 미성년자의 신체를 촬영했다면 이 촬영물은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이 되고, 촬영과 반포는 물론 시청·소지한 경우도 일반 불법촬영물보다 훨씬 중하게 처벌된다. 동네 목욕탕도 이제 직업병을 신경 써야 하는 곳이 되었나보다. 이제는 목욕탕에서도 어디에 카메라가 없는지 살펴야 하는 직업병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편안함을 기대하며 들어간 공간에서조차 먼저 의심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해졌다는 사실이, 가장 씁쓸한 현실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3-19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이유

기아란 장기간 지속된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의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를 의미한다. 가난해서 생활이 어려운 빈곤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지구상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기아 상태의 인구는 얼마나 될까. 최근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칼 스카우 사무차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지구상에서 기아에 시달리는 인구는 약 3억1900만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이는 최근 5년 사이 3배가 증가한 숫자“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시작한 이란전쟁이 6월까지 지속될 경우 무려 4500만 명에 이르는 기아인구가 추가로 더 늘 것이라는 우려의 발언도 했다. 지구상 일어나는 각종 전쟁은 인류의 보편적 안전과 행복을 위협하지만 특별히 빈민계층에게 주는 충격은 치명적이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지구상 기아인구가 증가하는 가장 큰 이유로 지구촌의 분쟁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세계기아지수에서 최악의 상황에 놓인 나라 10개국 중 8개 나라가 분쟁 중이다. 세계기아지수 2년 연속 세계 최하위 국가로 알려진 소말리아는 수십년 간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나라다. 분쟁으로 인해 경제위기가 이어지고 기후재난까지 겹친데다 국가는 이에 대응할 능력이 전혀 없다. 앞으로 특별한 대책이 없으면 지금과 같은 기아 상태가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다. 이란전쟁으로 호르무즈해협이 봉쇄되면서 세계 식량위기도 고조되고 있다. WFP는 빈민국에 보낼 식량물자 배송 지연과 물류비 인상, 식량공여국의 지원금 삭감 등이 발생하면서 지구촌 기아인구 구제에 비상이 걸렸다고 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 할 이유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19

정치는 타협이다

어릴 적 세계지도를 보면 난 정말 뿌듯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모든 것이 우리나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줄 알고 컸다. 솔직히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그랬는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니면서도 왜 우리나라가 있는 곳을 ‘극동(極東)’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시아라고 분류하더라도 ‘중동’은 되어야 하지 않냐는 의문이 늘 있었다. 선생님에게 물어봤으면 당장 답을 해주었겠지만, 당시 선생님이란 존재는 매를 들고 있는 하늘 같은 존재라 이런 엉뚱한 질문 같지 않은 질문을 하면 한 대 맞을 것 같아 감히 묻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중동을 개척했던 당나라 장군 고선지가 고구려 사람이란걸 당시 ‘자고 가는 저 구름아’라는 소설을 읽고 알았다. 진짜 고구려 사람이 맞냐고 선생님께 질문했다가 수업 중에 이상한 질문 한다고 얻어터진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는 그런 매를 부르는 질문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다진 터였다. 암튼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각 나라의 세계지도가 다르다는 것을 보았고 솔직히 많이 신기했었다. 각 나라의 위치는 세계지도의 중심이었고 유럽 지도를 보면 한국과 일본은 완전 동쪽, 즉 극동임이 분명했다. 좀 과장하게 표현하면 지도 맨 우측 구석에 처박혀있는 꼴이었다. 유럽 애들이 우리나라 위치를 잘 찾지 못하고 한국에 가는 것을 마치 해남 땅끝으로 가는 기분이 이해됐다. 면적 10만km²의 한국은 G20 국가 가운데 국토가 가장 작은 나라다. 시속 400km의 고속철로 1시간 반 만 달리면 더는 갈 곳이 없는 나라다. 영국이 G20 중 우리나라 바로 위의 작은 국가인데 면적은 우리나라의 2배(24만4000km)가 넘는다. 중국은 22개 성(省)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작은 성과 면적이 같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 중 하나라는 이야기다. 이 작다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아웅다웅하며 지금까지 근근이 살아왔다. 그래도 큰 자부심으로 지냈다. 간혹 능력 안 되는 정치인들이 나라를 이끌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무한정 발전하였다. 보릿고개 노래 부르던 우리나라가 세계 제7대 경제 대국이란다. 이건 그저 얻는 것이 절대 아니다. 똑똑한 국민은 정치 잘못하는 것을 늘 바로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나라 꼴을 보면 왜 이렇게 가슴 답답하고 한숨만 나오는지 모르겠다. 이 좁은 나라에서 젊은 애들은 애도 낳지 않는 나라에서 뭐 먹을 것이 있다고 이렇게 죽자고 싸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평생 이렇게 꽉 막힌 인간들은 처음 봤다. 경행록에도 “남에게 원수를 맺게 되면 어느 때 화를 입게 될지 모른다”고 했고, 제갈공명도 죽으면서 “적을 너무 악랄하게 죽여 내가 천벌을 받게 되는구나”라고 후회하며, 적도 퇴로를 열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요즘 돌아가는 것을 보면 거의 죽기 살기이다. 누가 날 죽이려 들면 어떤 사람도 그냥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는다. 원수를 꼭 갚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에 보복은 필수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는 이제 끊어야 하지 않을까. 비록 좁은 나라에 살지만, 배포는 좀 크게 통 큰 정치 한번 봤으면 싶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19

전쟁의 기억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수장이기도 했던 팔봉 김기진은 일제 말 매일신보에 ‘이 길로 가자’(1944년 9월 6일)라는 수필을 발표한 바 있다. 그중 한 대목이 인상적인데, 시골서 온 친구가 전화로 요즘의 안부를 물었나 보다. 별생각 없이 ‘문인보국회’ 일을 한다고 하자 버럭 그가 화를 냈단다. “이눔아 문인보국이 다 무어냐! 죽어라 죽어!” “에이 미친놈!”이라 답하며 전화를 끊은 김기진은 “문인보국이 다 무어냐”며 소리치는 저이의 심리를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전쟁의 승패는 자신과 관계없는 별개의 사건이고, 나 할 일은 따로 있다 하는 정신을 가지고 왜 살지 못해서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일, 흉내 낼 수 있는 일, 흉내 낼 수 있는 행동을 왜 하고 사느냐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라”라는 태도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김기진의 이 기록은 종국엔 ‘황국신민’의 서사로 귀결되지만, 내겐 그를 질타하고 있는 저 수화기의 목소리야말로 자기 내면의 불안한 반영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김기진을 향해 “죽어”라고 소리치는 저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기진 자신의 다른 일면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문인보국’의 사명을 흉내 내며 살고는 있지만, 사실 그의 내면은 완전히 분열되어 있으며, 바로 그 분열된 자아가 목소리로 회귀하여 ‘동원에의 곤경’을 토로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만큼 전쟁이란, 더욱이 전장에 동원된다는 건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는 항구적 위기 속에서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일제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별의별 논리와 이론, 제도와 법을 개발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내선일체’와 ‘동근동조’, 국어(国語, 고쿠고)상용화와 양어동원(론), 창씨개명 등은 결국 조선을 병참기지화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역으로 전쟁에 복무케 하는 일이 개인에게 얼마나 존재론적인 고비와 난관을 의미하는지를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가 집권한 뒤로, 세계가 얼마나 미국의 패권에 무력한지를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관세라는 명목으로 약탈을 자행하더니 이제 명분 없는 전쟁에 군함을 파견하라고 윽박을 지른다. 한국, 중국, 프랑스, 일본, 영국 등에 호르무즈 해협 통과 선박을 알아서 지키라는 형국이다. 각지의 주둔 미군에 감사하다면 빚을 갚으라는 거다. 유가 상승쯤이야 미국과 세계의 안전을 위해 아주 작은 대가에 불과하다고 엄포를 놓은 것도 불과 얼마 전 아니었나. 자기 정치의 보전을 위해 세계의 평화를 볼모로 ‘조폭’보다 못한 방식의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 그 협박이 전쟁의 기억을 일깨워 괴롭다. 얼마 전 끝난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센티멘탈 밸류’로 국제장편 영화상을 받은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다음과 같은 수상소감을 남겼다. “모든 성인은 아동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정치인에게는 투표하지 맙시다.” 그렇다. 이 모든 사달은 결국 미국 시민들의 그릇된 선택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국인이 아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그저 초조하게 사태를 관망하거나 세계의 누군가를 향한 호소 외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휩싸이는 요즘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3-19

공약의 무게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말이 많아진다. 불현듯 등장하는 것이 ‘공약’이다.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이 유권자를 향해 던지는 약속이 바로 공약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약이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듣기에는 호화롭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거나, 제목은 근사한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공약은 선거 때만 등장하는 말’이라는 냉소가 생긴다. 공약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니었다. 공약은 정치인이 시민 앞에서 책임과 실천을 약속하는 정치적 계약이 아닌가. 선거가 끝난 뒤에도 정치인에게 부채처럼 계속 남아야 하는 약속이 바로 공약이다. 좋은 공약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 제목만 근사해서는 안 된다. 선거 공약이 유권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주제가 선명하고 흥미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성과 실천 가능성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설명되지 않는 공약은 끝내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도시의 미래를 말하는 공약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창한 계획보다 현실적인 실행계획이 전면에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 공약 속에서 정치인의 경험과 걸어온 길이 느껴져야 한다. 유권자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공약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어떤 경륜을 쌓았으며 공약을 실행에 옮길 실천경로와 의지가 보여야 한다. 정치인이 살아온 시간과 현장에서의 경험이 공약 속에 녹아 있을 때에야 유권자는 비로소 그 약속을 신뢰하게 된다. 공약은 단순한 정책목록이 아니라 정치인의 삶과 역량을 보여주는 스토리여야 한다. 셋째, 공약의 결과와 혜택이 특정 집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제시되는 공약은 유권자 모두를 향한 약속이어야 한다. 일부에게만 유리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도시정책일수록 더욱 그렇다. 공약은 시민 누구에게나 그 장점이 고르게 전달되어야 하며, 도시공동체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공약이란 정치인의 상상력뿐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시민이 실제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도시의 미래에 분명한 도움이 되어야 하며, 약속이 현실 속에서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공약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화려해진다. 유권자가 알고 싶은 것은 호사스러운 언사의 뒤에 있을 진정성의 여부다. 공약이 얼마나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책임 있게 추진될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공약은 언변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은 결국 실천으로 증명된다. 선거철에 쏟아지는 수다한 공약들 가운데 유권자가 주목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그저 화려한 말인지 아니면 실천가능할 약속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결국 시민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조금씩 단단해진다. 공약이 가벼워지면 정치에 대한 신뢰도 함께 가벼워진다. 반대로 공약이 현실과 책임 위에 세워질 때 시민과 정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선거는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약이 지켜지는지, 약속이 현실에서 실천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까지 포함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완성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18

이름을 붙인다는 것

노자의 ‘도덕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진짜 도가 아니니, 이름 붙인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한계를 역설한 유명한 문장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대상을 백 퍼센트 온전하게 인식하기 어렵고, 인식한 부분조차도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러니 언어로 표현된 이름에 사로잡히면 대상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노자라는 사람이 언제 적 사람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문시되고 있는 데다, ‘도덕경’이라는 텍스트도 판본이 여러 가지라 어느 판본이 원본에 가장 가까운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거의 2500여 년 전 어느 인물이 쓴 문장을 사람들이 지금도 읽는다는 것은 그 텍스트가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다. 말이 홍수를 이루는 현대 사회에서 언어의 한계와 폐단을 강조하는 노자의 일갈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그럼에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언어의 힘을 빌려야 소통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러려면 언어의 한계를 강조하며 언어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비약할 것이 아니라 대상의 진짜 모습에 더 가깝게 이름을 붙이려는 노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특히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다.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는 슬픔이 포함하고 있는 엄청난 스펙트럼의 감정을 발견하여 이름붙인 신조어 사전이다. 존 케닉은 기존에 슬픔을 나타내는 단어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기존의 단어의 의미도 더 깊고 풍부하게 파고들거나 새로운 단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동안 슬픔(sadness)을 ‘희망의 부재’로 생각해왔지만, sadness의 원래 뜻은 ‘충분한’, ‘만족스러운’이라는 뜻이라면서 어떤 강렬한 경험으로 마음이 넘치도록 차오르는 상태라는 뜻이란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슬픔이 마냥 슬픔으로만 머물지 않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슬픔이라는 감정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하고 스스로 이름 붙인다. 그중 ‘디스토리아’(dystoria)라는 단어는 라틴어 dys-(나쁜)+historia(역사)의 합성어다. 디스토리아에 대해 저자는 ‘자신이 역사의 거대한 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는 기분:자신의 삶이 그 어떤 위대한 사명과도 무관하고, 세대의 고난도 알지 못하며, 상대할 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 손쉽게 높은 파도의 일부가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은 물방울 같은 기분’이라고 설명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을 협공하고 이란 역시 팽팽하게 맞서며 이제는 다른 나라도 강제 개입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분노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심연을 파고들고 보면, 개인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파도에 힘없이 떠다니는 작은 뗏목 같은 무력감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렇게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전쟁의 비극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18

어깨 안 올라가면 모두 오십견일까

어깨통증이 심하고 팔이 잘 올라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오십견으로 생각한다. 진료실에서도 오십견으로 진단받았다고 말하며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으나 팔이 올라가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오십견은 아니다. 어깨 관절은 우리 몸에서 가장 움직임이 큰 관절이며 구조도 복잡하다. 어깨는 관절뿐 아니라 회전근개, 관절낭, 인대, 점액낭 등 여러 조직이 함께 작용한다. 이 중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겨도 어깨 통증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회전근개에 염증이 생기거나 힘줄이 약해지면 팔을 들 때 통증이 심해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오십견은 어깨 관절을 싸고 있는 관절낭이 굳어 버리는 질환이다. 관절낭이 두꺼워지고 유착이 생기면서 어깨 안쪽이 굳어버리면서 움직임 자체가 제한된다. 그래서 이때는 통증뿐 아니라 실제로 팔이 잘 올라가지 않으며 머리를 감거나 옷을 입는 동작도 불편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깨 통증이 나타났다고 해서 단순히 한 가지 질환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어깨 관절의 구조와 움직임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어깨 통증이 심한 환자들의 상당수에서 어깨 관절이 앞으로 밀려 나와 있는데 이를 어깨의 전방 변위라고 한다. 일상생활이나 작업 시 어깨가 앞으로 말린 자세가 오래 지속되거나 반복되면 관절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회전근개와 주변 조직에 지속적인 부담이 쌓이게 된다. 부정렬이 반복되면 어깨 내부 조직에 염증이 생기고 관절낭이 굳어지면서 팔을 움직일 때 통증이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치료의 첫 단계는 추나 치료를 통해 전방으로 밀려 있는 어깨 관절의 위치를 바로잡고 틀어진 정렬을 교정하는 것이다. 어깨 관절의 위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 관절 내부에 가해지는 압력이 줄어들고 움직임도 훨씬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굳어 있는 어깨의 가동범위를 강제로 조금씩 늘리는 추나를 병행하고 환자도 매일 어깨의 가동범위를 좋아지게 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어깨 통증이 오래 지속된 경우에는 관절을 싸고 있는 관절낭과 주변 조직이 굳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내부의 혈액순환을 개선해 굳어 있는 조직이 풀리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한약 치료는 어깨 주변의 순환을 개선하고 관절 내부로 충분한 영양과 혈류가 공급될 수 있도록 도와 관절낭이 점차 부드러워지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관절은 단순히 외부에서만 치료한다고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순환과 회복 환경이 함께 좋아져야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돌아온다. 그리고 환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생활 습관이 있다. 바로 수면 자세이다. 어깨가 아픈데도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아픈 쪽으로 옆으로 누워 잠을 자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깨 통증을 더 심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습관이다. 체중이 어깨 관절에 직접 실리면서 이미 염증이 있는 힘줄과 관절낭을 계속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가 반복되면 통증이 더 심해지고 회복 속도도 느려진다. 따라서 어깨 통증이 있을 때는 절대 아픈 쪽으로 옆으로 누워 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깨 통증은 단순히 통증이 있는 부위만의 문제가 아니라 관절의 정렬, 내부 순환, 그리고 생활 습관이 함께 영향을 미친다. 정확한 원인을 찾고 관절의 구조와 움직임을 바로잡아 주는 치료가 이루어질 때 어깨 통증의 회복도 훨씬 빠르게 이루어진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3-18

철 위에 새겨진 땀

포스코 포항제철소에는 바다와 불, 쇠가 뒤섞인 냄새가 난다. 그곳이 일터인 남편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면 바닷바람에 섞인 용광로의 뜨거운 숨결까지 옷자락에 달고 함께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남편의 근무복을 마주할 때면 나는 땅 위의 둥근 문을 떠올린다. 도시의 길목마다 묵묵히 박혀 있는 맨홀 뚜껑을 사람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치지만, 나에게는 남편의 하루를 굳혀 만든 철의 얼굴처럼 보인다. 직원들의 열정적인 손길과 굵은 땀방울이 식어 굳어져야 비로소 단단한 제품으로 완성되는 맨홀이다. 그래서인지 맨홀 뚜껑을 보면 가끔은 그냥 지나치지 않고 들여다본다. 크기가 다양하고 문양도 제법 차별화되어 있다. 아파트 맨홀 뚜껑에 소나무와 학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을 때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정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흔적이 겹겹이 담겨 있어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맨홀 뚜껑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서는 안 된다. 가볍다면 장난스러운 손길에도 스치는 바람에도 열려 버릴 것이다. 도시의 안전을 지켜야 되는 책임이 암묵적으로 담겨 있는 약속이므로 함부로 열리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남편의 하루도 무겁다. 그의 어깨에 드리워진 삶의 무게는 쇳덩이만큼 진중하다. 도시는 그의 손끝에서, 그리고 수많은 회사 동료들의 귀한 노동으로 돌아간다. 불꽃이 튀는 산업현장에서 남편이 하는 일은 도시가 멈추지 않도록 철을 생산하는 일이다. 기술연구소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보내는 시간이 길고 뜨거울수록 그가 연구하고 실험하고 작업했던 결과물들은 마침내 여러 모양의 생산물로 세상에 태어난다. 철로 만드는 생산품들 중의 하나가 맨홀이다. 사람들이 눈 여겨 보지 않아도 도시의 흐름을 지키는 소중한 존재다. 아래로는 하수가 흐르고 전기가 달리며 열과 통신망이 숨 쉰다. 지하 깊숙이 뻗은 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길이 끊어지면 도시도 멈춘다. 도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많이 의지하며 살아감으로 맨홀은 늘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가정도 그렇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노력과 인내가 흐른다.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부의 분주한 손길도 필요하다. 밥을 짓고 난 후 퍼져 나오는 구수한 냄새, 식탁 위에 놓이는 따뜻한 국 한 그릇, 햇볕에 잘 말려진 뽀송뽀송한 가족의 옷 등은 내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 마냥 평범하고 무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식구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언짢은 기억이나 불쾌하게 쌓인 피로를 집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용히 덮어 두는 일도 아내와 엄마인 나의 몫이다. 집이라는 작은 도시도 보이지 않는 주부의 노력이 있어야만 지탱되는 순간이 많다. 그런 연유로 남편이 회사에서 하루를 버틸 때 나 역시 집안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뚜껑이 된다. 오늘은 포은오천도서관 옆을 지나다가 멈춰 선다. 샛노란 색에 둘러싸인 맨홀 뚜껑을 보고 발을 얹는다. 용광로의 숨결이 차가운 철판으로 식어 발밑에 놓였듯 남편의 하루가 내 삶 속에 단단히 놓인다. 나는 지금 철 위에 새겨진 남편의 땀 위를 걷고 있다. /정미영 수필가

2026-03-18

복권 당첨 사실을 숨긴 이유

최근 중국의 몇몇 언론이 보도한 기사 하나가 한국에서까지 화제가 됐다. 복권 당첨 사실을 자식들에게 숨긴 아버지 이야기다. 관련 소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평소엔 복권을 구입하지 않던 중국의 한 남성이 일생 처음으로 스포츠복권을 샀다고 한다. 복권의 번호 선택 방법도 알지 못했던 그는 판매점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동으로 번호를 고르는 패키지복권을 한국 돈 1만9000원에 구매했다. 그런데, 몹시 운이 좋았던지 그 복권이 1등에 당첨됐다. 남성이 손에 쥐게 된 돈은 16억 원. 중국에서건 한국에서건 결코 작지 않은 돈이다. 누구라도 감정적으로 흥분해 당첨 사실을 이곳저곳에 자랑하고 평소 사고 싶었던 걸 흥청망청 구입할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당첨자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복권을 처음 샀는데 이런 행운이 올 줄 몰랐다”며 담담한 태도를 보인 것. 이에 더해 거액의 복권 당첨 사실을 자신의 자녀들에겐 알리지 않겠다고 했다. 이유가 궁금해진 주변 사람이 “기쁜 소식인데 왜 알리지 않으려 하는가”라고 물어본 건 당연지사. 그 남성의 답변은 간명했다. 한 자식이 얼마 전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아이에겐 가치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이고, 노력 없이 큰돈을 얻는 걸 삶의 지름길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 여기에 더해 “당첨금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자녀들의 교육과 미래를 위해 투자할 것”이라 덧붙였다고.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걸 말로만 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직접 가르친 중국 한 아버지의 사례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당신이 복권 당첨자였다면 어땠을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18

비움이 남기는 자리

요즘 집 주변의 풍경이 자주 바뀌고 있다. 퇴근길마다 들르던 작은 동네 슈퍼가 말도 없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그 자리에는 인형뽑기 가게가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주말 아침 잠시 들르곤 했던 카페나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분식집도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익숙했던 가게들이 사라지고 빈 공간만 남은 거리를 보고 있자니 묘하게 어색하고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오가는 집 앞 거리는 하나의 익숙한 풍경이 되어서 오랜 시간이 되고 하나의 시절이 된다. 하루, 이틀,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눈에 익을 때쯤에 불현 듯 사라져 버린 풍경의 일부는 사라지고 나서야 시간의 무게를 뒤늦게 알아차리게 한다. 집 주변 풍경이 요즘 자주 바뀌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나는 최근 들어 집 안 내부의 오래된 물건들을 하나씩 교체하기 시작했다. 정말 어떤 계기나 뚜렷한 이유가 있진 않으나 갑자기 아주 오래된 물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고 너무 낡은 것들은 하나씩 버려가며 빈자리는 새로운 물건들로 채우고 있다. 오랜 기간 사용하던 침구나 인형 같은 물건들, 언제부터 사용했는지 모를 수저와 수건, 옷가지들 너무 낡고 오래된 가전 가구 등등. 물건을 하나씩 버리다 보니 단순히 물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들과 함께 묶여 있던 시간까지 한꺼번에 바깥으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건 속에는 많은 시간들이 깃들어있다. 물건을 구매했을 당시의 들뜬 기분이나 설렘, 사용하면서 느꼈던 만족감, 매일 또는 자주 사용하며 손에 익는 촉감, 늘 그 자리에 있어 제 역할을 다하던 모습, 시간이 지나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려지게 되는 순간까지, 여러 시간들이 갈무리 되며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원섭섭하게 간지럽다.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물건과 공간 속에 남겨 두고 살아간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물건이 아니더라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그 물건에는 자연스럽게 일상의 시간이 스며든다. 매일 사용하는 컵 하나, 늘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에도 어느새 일상의 시간이 조금씩 쌓인다. 그렇게 평범한 물건들은 특별한 의미가 없더라도 일상의 일부가 되어 간다. 그래서 익숙한 물건을 버리는 순간 단순히 물건이 사라졌다는 느낌보다, 그 물건과 함께 흘러가던 시간의 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감각이 남는다.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않는 편이기도 하다. 동시에 물건을 자주 사는 편도 아니다. 한 번 물건을 사면 그것이 낡고 헤져 더는 쓸 수 없을 때까지 사용하는 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물건을 버리는 일을 조금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미 내 손에 익숙한 것들, 보기에도 편안한 것들이 사라질 때 겪게 되는 낯선 불편함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변화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개운하다.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잠시 멈춰 서게 되지만, 그 빈자리는 곧 다음 시간을 위한 자리로 바뀐다. 비워진 가게 자리에는 또 다른 새로운 곳이 들어서고, 한두 번 방문해 보며 다시 내 삶에 필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쓰임이 다한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들였을 때 느끼는 편리함과 단정함 역시 또 다른 만족을 가져다준다. 긴 목욕을 끝낸 뒤처럼 몸과 마음에 붙어 있던 오래 묵은 퀘퀘함이 씻겨 내려간 듯한, 가벼움과 개운함만이 남는 것이다. 최근 집 근처 풍경이 많이 바뀌고, 오래된 물건을 하나씩 정리하며 주변 환경을 조금씩 바꾸어 가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삶은 끊임없이 채워지는 과정이라기보다 때때로 비워지며 다시 정돈되는 과정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것을 맞이하는 가장 좋은 태도는 무엇인가를 더 붙잡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것들을 조금씩 비워 두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시간을 위한 여백. 나이가 들수록 이런 변화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단순히 시간을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명을 다한 물건들을 억지로 붙잡고 있기보다, 새로움을 받아들이며 삶을 더 편리하고 반짝이게 닦아 가는 생활 습관과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요즘은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설렘과 쾌적함을 조금씩 즐기고 있다. 비워진 자리 위에서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고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과 채워지는 것들이 반복되며, 삶은 조금씩 앞으로 흘러간다. /윤여진(시인)

2026-03-18

나의 밥 친구, 수탉

작년 겨울, 100만 유튜버 납치 및 살인 미수 사건이 뉴스에 떴다. 헤드라인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어떤 원한이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악의라는 게 이렇게 커질 수가 있단 말인가. 유튜버가 무사해야 할 텐데. 걱정되어 기사 몇 개를 더 찾아보다가 해당 유튜버의 이름이 뜬 것을 보았다. 수탉. 어? 수탉? 수탉은 내가 정말 자주 즐겨보는 공포 게임 전문 유튜버다. 밥 친구, 그래, 홀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 눈과 귀과 심심하면 꼭 함께하는 이가 나의 밥 친구 수탉이다. 오랜 시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이동하거나 작업이 끝나 무료할 때도 늘 수탉은 나와 함께였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에게 강한 내적 친밀감을 느끼곤 했다. 비속어를 쓰지 않으며 재밌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도 좋았고 게임을 하다 종종 실수하면서도 “쉽네” 그렇게 말하며 대수롭지 않게 툭툭 내뱉는 유머 코드가 나에겐 딱이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학창 시절 시험이 끝나고 교실에서 링, 주온 이런 것들을 틀고 다 같이 볼 때면 나는 연신 손으로 눈을 가리곤 했다. 살짝 본 귀신의 비주얼이 너무 무서워서 꿈에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도 공포 영화를 보는 날에는 꼭 앞에 앉아 있었다. 무섭지만 즐기고 싶었다. 공포, 스릴러가 주는 감각이 다른 장르로는 채워지지 않았다. 하루는 동네 친구가 한국 공포 게임 화이트데이를 설치했다며 나를 초대했다. 직접 플레이할 마음은 없었기에 친구 옆에 앉아 교무실에 들어가 보라거나 전화는 받지 말라는 둥 괜히 입으로만 떠들어댔다. 경비가 쫓아올 때면 마치 현실에서 나타난 것처럼 둘이 호들갑을 떨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 친구는 주인공에 이입해서 게임을 진행했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저 그 모든 걸 바라보는 방관자이길 바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굉장히 흥미로운 공포 게임이 발매되어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혼자서는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다 몇 년 전쯤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수탉이 떠서 그가 진행하는 게임 영상을 봤다. 차분하고 흡인력 있는 목소리. 오늘 할 게임은- 하고 들어가는데 왠지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나와 달리 겁쟁이가 아니구나, 귀신의 집에 들어가더라도 이 사람에게는 내 앞을 맡겨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웬걸, 코너에서 행인 한 명이 불쑥 나타나자마자 그는 “엄마야!”하고 소리쳤다. 빠르게 호흡을 고른 후 그는 곧장 능청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별일 없으신가 해서 불러봤어요. 필요한 거 없으시려나?” 나는 말 그대로 빵 터졌다. 뭐야. 이 사람도 겁이 없는 건 아니었구나. 오히려 덤덤하게 반응했다면 나만 놀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나처럼 놀랐고, 우리가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 공포를 환기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폼을 잡으려고 한다기보단 유머 한 스푼을 넣어 공포를 중화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귀신에게 붙잡히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무빙~ 무빙~”하며 무서운 장면을 얼핏 우스꽝스럽게 만들곤 했다. 그렇게 하나둘 그를 통해 나는 온갖 공포 게임을 비교적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유튜버 납치 및 살인 미수 사건 기사를 본 이후부터 나는 그가 적잖이 걱정되었다. 범인들이 잡히고 수탉이 구출되었단 기사를 보았지만 그가 입은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당장 그를 떠올리면 웃고 즐길 수가 없을 것 같아 이전에 올렸던 영상들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방송을 그만둔다고 해도 상관없으니 그저 그가 빠르게 건강을 되찾기를 바랐다. 공포 게임 같은 것보다 훨씬 무서운 현실을 마주한 그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도 채 지나기 전에 수탉은 유튜브 커뮤니티에 수술 후 회복 중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것만으로도 속에 얹힌 무언가가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래도 아직 그의 이전 영상들을 보기엔 마음이 쓰였다. 게임 안이 아닌 게임 밖에서 수탉은 나아지려고 애쓰고 있을 테니까.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해를 넘기기도 전에 방송에 복귀한 것이다. 정말? 괜찮을까? 그렇게 힘들었던 그를 보며 웃어도 될까? 그런 마음도 잠시 그가 올린 첫 유튜브 영상을 보며 나는 웃음과 감탄을 동시에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게임 도중에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실수하자 “아, 원래는 쉽게 깨는 건데, 제가 회복이 덜 되어서 그렇습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라는 말로 넘겨버린 것이다. 수탉은 나의 밥 친구이자 슬픔과 고통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중화할 줄 아는 사람이다. 멀지만 가까운 마음으로 계속 그를 응원하고 또 함께할 것이다. /구현우(시인)

2026-03-18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②문예부흥의 발로 ‘일리리어니즘’

1805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육군은 아드리아해의 북쪽 이탈리아와 경계를 이루는 이스트라반도와 달마티아 해안지역을 접수해버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사바강 남쪽지역과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까지 접수한 나폴레옹은 이 지역을 통째로 묶어 ‘일리리아’라며 식민지배의 속주라고 분명히 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러한 역사적 무지가 이상한 방향으로 바람을 탔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슬라브민족 그들의 선인이 일리리아인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제국 당시에 이곳에서 살아가던 고대 원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을 도매금으로 몰아서 붙여버린 것이다. 자칫 남슬라브민족 전체가 일리리아민족에서 파생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즈음에서 크로아티아인을 일리리어니즘으로 일취월장 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나폴레옹 몰락 이후 이곳을 점령한 합스부르크제국마저도 이곳에 괴뢰정권을 만들어 왕국 이름을 ‘일리리언왕국’이라며 역사를 우습게 만들고 말았다. 뒤이어 크로아티아 언론이 한발 더 나아가 ‘일리리어니즘’을 핵심 주제로 각 지역의 지식인들의 주장을 시리즈로 싣는다. 모든 슬라브인이 살아가는 땅은 일리리아인 혹은 크로아티아인 영토라는 주장까지 대두된다. 이를 계기로 스스로 발칸반도 선주민을 받아들이면서 원 뿌리를 더 먼 과거까지 박아버린 셈이다. 그들로서는 나폴레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을 법하다. 용기백배한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도서관을 개관하면서 문예부흥에 기치를 세우고 성직자들을 동원해 일리리아 음악과 전설과 설화까지 샅샅이 뒤져 살려냈다. 일리리아인의 전설을 동원해 흙으로 돌아간 지 수천 년이 지난 전사를 일으켜 세워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마치 광개토대왕이 중국인으로 변신해 되살아나고, 알렉산드로스가 하등 상관없는 지금의 마케도니아공화국 민족영웅으로 되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과 세르비아인, 그리스인들 복장 터지는 일일 게다. 크로아티아 귀족은 물론 중산층까지 지지에 나서며 크로아티아 전역은 물론 슬로베니아와 가만히 있는 보스니아까지 합쳐 일리리아 남슬라브의 나라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19세기 초, 언론인들까지 가세한 ‘일리리아운동’은 언어의 통일로 일련의 성공을 거두면서 정치와 종교,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크로아티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자 이들의 꿈이 확대되면서 남슬라브 단일국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상은 크로아티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분포해 살아가던 세르비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슬로보니아지역, 달마티아까지 지지를 이끌어 냈다. 실로 나폴레옹과 일리리아의 힘이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1835년 ‘크로아티아 신문’이 발행된다. 뒤이어 문학잡지까지 세상에 빛을 보면서 남슬라브어의 통일과 남슬라브민족의 이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고 힘을 얻는다. 이에 귀족들까지 합세하자 크로아티아의 넓은 지역과 심지어 세르비아까지 즐겨 사용하던 ‘쉬토방언’으로 쓴 논문 등을 통해 미래의 크로아티아 통일국가에 대한 청사진까지 세상에 빛을 본다. 남슬라브민족 쉬토방언이 표준어로 성은을 입은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일리리아주의와 슬로베니아의 그들만의 리그는 세르비아의 입장에서 하룻밤의 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가 일리리아주의를 버리지 않았던 것은 민족의 단합에 이보다 더 좋은 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848 파리혁명과 독일혁명이 일어나고, 이를 지켜본 크로아티아인은 헝가리와의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남슬라브족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슬로베니아는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스스로가 주역이 되어야 한다며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늘 자국 내 이익과 시류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어쭙잖은 것을 벤치마킹해 크로아티아의 전 지역에서 헝가리어를 학교와 관공서에서 공식어로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법안까지 만들어 통과해버렸다. 기가 막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에 달려가 징징 짜면서 하소연 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빈 정부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네 말도 맞고, 저들 말도 맞다 했다. 이를 비판하는 세력도 있게 마련이었다. 1843년 크로아티아 이반 쿠쿨레비치를 비롯한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크로아티아 국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현실과 정체성을 장탄식했다. 그리고 남슬라브민족의 단결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단합을 위한 민족회의를 최초로 개최했다. 이반 쿠쿨레비치의 연설이 대 헝가리 투쟁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그의 간절한 호소와 노력으로 1845년 크로아티아 자치정부가 부활을 맞았고, 헝가리에 빼앗긴 주권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민족의 자존심인 종교 역시 헝가리교구에서 벗어나 자그레브 주교관구의 대주교관구 승격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17

7만 원의 회귀(回歸)

6개월 전, 어느 퇴색한 보도블록 위에서 마주쳤던 무구한 물질의 부름을 기억한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낙엽처럼 떨어져 나와 길 위를 부유하던 7만 원. 그것은 누군가의 소소한 성찬(盛饌)이었을 수도, 혹은 팽팽하게 당겨진 가계부 한 귀퉁이의 절박한 단추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무연(無緣)의 재화를 집어 들며, 그것이 내 소유가 아님을 인지하는 찰나의 도덕적 긴장을 느꼈다. 욕망의 사행성(斜行性)은 언제나 달콤한 속삭임을 동반하지만, 나는 그 서늘한 유혹을 뒤로하고 인근 지구대의 문을 밀었다. 낡은 지폐들이 경찰관의 손을 거쳐 장부의 건조한 기록으로 바뀌던 순간, 나는 비로소 그 돈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것은 도덕적 결벽이라기보다는, 타인의 상실감을 나의 횡재로 치환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윤리적 예의였다. 시간은 계절의 결을 따라 묵묵히 흘렀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만추(晩秋)의 낙엽으로, 다시 엄혹한 동토(凍土)의 침묵으로 이어지는 동안 길 위의 기억은 망각의 심연 속으로 서서히 침잠했다. 대가 없는 선의는 잊혔을 때 비로소 순수해지는 법이다. 나는 그 7만 원이 누군가의 품으로 돌아갔으리라 막연히 짐작하며, 그 선량한 결말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오늘, 휴대폰 화면 위로 날아든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고요한 일상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관할 경찰서에서 온 연락이었다. 6개월의 유실물 공고 기간이 만료되어, 법적 절차에 따라 그 재화의 소유권이 습득자인 내게 귀속되었다는 전언이었다. 잊고 있었던 소식이 전령처럼 찾아온 순간, 내 마음속에는 예기치 못한 봄기운이 차올랐다. 이 7만 원의 회귀는 물질적 증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6개월이라는 시간의 숙성 과정을 거쳐 내게 돌아온 일종의 ‘철학적 이자’와도 같았다. 내가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 속에 던져 넣었던 작은 신뢰의 씨앗이 반년의 겨울을 견디고 마침내 내 집 앞마당에 피어난 한 송이 봄꽃 같았다. 우리는 흔히 세상이 각박하다고 말하며 타인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이번 일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선의의 그물망’이 여전히 견고함을 증명해 주었다. 법이 정한 6개월이라는 기간은, 진정한 주인을 찾기 위한 기다림의 시간이자 동시에 습득자의 정직함을 시험하는 정화(淨化)의 시간이었다.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이제 이 돈은 ‘길에서 주운 횡재’가 아니라 ‘정당한 기다림 끝에 얻은 보상’이라는 새로운 명분을 입게 되었다. 창밖은 어느덧 연두색 생명이 움트고 있다. 목련의 봉오리가 부풀어 오르고 산수유의 노란 웃음이 번져가는 이 계절, 7만 원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화폐 단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내게 건네는 뒤늦은 세뱃돈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바르게 살아가려 애쓰는 선량한 시민에게 하늘이 내리는 소박한 격려사처럼 느껴졌다. 삶은 수많은 우연의 중첩이다. 하지만 그 우연을 어떤 빛깔로 채색하느냐는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6개월 전 내가 그 돈을 사유화했다면, 그것은 찰나의 유희로 사라졌을 것이며 내 마음 한구석에는 씻기지 않는 앙금 같은 부채감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공적인 신뢰의 영역에 그 돈을 기탁함으로써, 나는 반년 동안 ‘정직’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마음의 금고에 예치해 두었던 셈이다. 뜻하지 않은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번 소식은 나로 하여금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타인의 작은 친절들, 혹은 내가 세상에 던졌으나 잊고 있었던 사소한 배려들이 어쩌면 지금도 시간의 터널을 지나 내게로 돌아오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 믿음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이제 나는 경찰서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려 한다. 그곳에서 만날 7만 원은 반년 전의 그 낡은 지폐들이겠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봄의 전령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이 돈을 단순히 소비의 도구로 쓰지 않으려 한다. 이 기분 좋은 소식을 기념하기 위해 작은 일부라도 다시 세상의 그늘진 곳에 나누는 ‘선의의 연쇄 작용’을 고민해 본다. 꽃향기가 만개한 봄날, 길 위에서 시작된 작은 인연이 이토록 아름다운 회귀로 마침표를 찍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김경아 작가

2026-03-17

AI시대, 관리자는 왜 사라지는가

산업 현장에서 회의의 풍경과 보고의 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최근 산업 현자에서 인공지능의 존재감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과거 생산회의는 보고서와 경험 많은 관리자의 판단에 의존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실시간 데이터 화면이 회의를 대신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설비 가동률, 품질 편차, 안전 지표가 자동으로 분석되고 이상 징후까지 예측된다. 사람은 설명하기보다 화면을 확인하고 방향을 논의한다. 관리 방식 자체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AI)의 확산은 단순히 업무 효율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조직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가장 큰 변화를 맞는 영역은 ‘관리’라는 기능이다. 전통적인 관리자는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상위 조직에 보고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하지만 데이터 수집과 분석은 이제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한다. 보고를 위해 존재하던 관리 기능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많은 조직에서 관리자는 문제 해결자라기보다 정보 전달자로 머물러 있었다. 현장에서 올라온 내용을 정리해 보고하고, 지시 사항을 다시 전달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AI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순간 이러한 중간 단계는 급격히 축소된다. 정보의 흐름이 수직 구조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관리자의 소멸을 의미하기 보다 역할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제 관리자의 가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질문하는가’ 에서 결정된다. AI는 무엇이 발생했는지 알려주지만, 왜 중요한지 판단하지는 못한다. 조직의 방향성과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다. 제조 현장에서 개선 활동이 성공하는 조직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관리자가 답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정의하도록 돕는다는 점이다. “왜 이 공정에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가”, “이 데이터가 의미하는 위험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조직의 사고 수준을 높인다. AI는 분석을 제공하지만, 질문의 수준이 낮으면 결과 역시 평범할 수밖에 없다. 다가오는 AGI(일반인공지능·인간 수준의 AI) 시대에는 일정 관리, 보고서 작성, 성과 분석 같은 관리 업무 상당 부분이 자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관리자의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리자의 존재 이유가 달라진다는 신호에 가깝다. 통제와 감독 중심의 관리자는 줄어들고, 방향을 설계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리더의 중요성은 오히려 커질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조직은 관리자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관리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를 관리하던 시대에서 사람과 의미를 관리하는 시대로 이동하는 셈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조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관리가 아니라 더 깊은 리더십이다. AI가 관리 업무를 대신하기 시작한 지금, 조직이 던져야 할 질문은 명확하다. 관리자를 유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관리자가 앞으로 필요해질 것인가’이다. 미래의 관리자는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묻고 사람들의 가능성을 연결하는 질문자가 될 것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17

경험의 밀도가 도시공간을 살린다

공실의 시대, 사람들은 왜 더 이상 오지 않는가? 공실률 70%, 구도심의 쇠퇴, 죽어가는 상권. 이제는 너무 익숙한 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인구감소와 경기침체로 설명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늘의 공실은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공간이 21세기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생겨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과거의 도시는 기능에 따라 고정되고 분리되었다. 상가는 소비를 위한 곳, 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 사무실은 일하는 곳, 학교는 배우는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 기능을 따라 이동했고, 공간은 그 목적에 맞게 작동했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일하고 쉬고 만나고 소비하는 행위는 한 공간 안에서 겹쳐지고,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공간도 끊임없이 중첩된다. 많은 상업공간은 이런 변화에 아직도 충분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공실이 늘어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나온다. 소비가 온라인으로 이동하고 바깥 세상의 리듬이 초연결과 초개인화로 바뀌는 동안에도, 많은 상업공간은 여전히 진열과 판매 중심의 오래된 문법에 머물러 있다. 결국 사람들은 더 편리하고 더 빠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한 기능들을 먼저 온라인으로 옮긴다. 극장은 OTT에 밀리고, 활자 신문은 인터넷 기사로 대체되며, 단순 판매 중심의 상점은 플랫폼 커머스에 흡수된다. 많은 공간이 이제 사람들에게 굳이 찾아갈 이유를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 지점을 읽어내는 기준이 경험의 밀도다. 경험의 밀도란 단순히 사람이 많이 오는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 공간에서만 가능한 감각, 관계, 기억, 머무름, 우연성이 얼마나 두텁게 형성되는가를 뜻한다. 좋은 시장과 식당, 광장과 복합공간은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와 현장의 분위기, 장소의 기억을 함께 만든다. 사람은 상품만 사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 머물고 어떤 장면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도 그곳을 찾는다. 결국 공간의 경쟁력은 기능이 아니라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 경험을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미술관의 변화는 중요한 힌트를 준다. 과거의 미술관이 완성된 작품을 조용히 바라보는 공간이었다면, 오늘의 미술관은 작품이 저장되고 보존되고 운반되는 과정까지 감상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수장고형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는 현대인이 결과물만이 아니라 그것이 유지되고 관리되는 과정 전체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식당과 상점도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음식을 만드는 손길, 재료를 다루는 과정, 물건이 선별되고 포장되는 장면이 드러날 때 공간은 더 깊고 풍성한 경험의 장소가 된다. 결국 공실의 문제는 단순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경험의 밀도를 담아내지 못한 공간들이 비워지는 현상이다. 도시 재생의 핵심도 빈 점포에 어떤 업종을 넣을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머물게 할 어떤 장면과 경험을 기획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기능만 남은 공간은 죽고, 서사와 체류가 있는 공간만이 살아남는다. 비어가는 것은 점포가 아니라 경험의 밀도다. /조관필 한동대 교수

2026-03-17

장동혁 따라다니는 ‘야당심판론 프레임’

요즘 국민의힘을 보면 선장 없는 난파선을 보는 것 같다. 대구·부산·충청 등에서 공천심사를 둘러싼 파열음이 당을 산산조각 내고 있지만, 이를 해결할 리더십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충격적인 것은 국민의힘 공관위가 대구시장 선거에서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 충북도지사 선거에서는 김수민 전 의원을 공천하기 위해 무리한 컷오프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대구시장에 출마한 주호영 의원은 “유튜버 고성국씨가 이정현 전 의원을 공관위원장에 추천했고, 이진숙 전 위원장이 고씨와 손잡고 대구에서 선거운동을 한다”고 했고, 김영환 충북지사는 “특정인을 정해놓고 면접을 진행하다니 기가 막힌다”고 했다. 김 지사가 언급한 특정인은 장동혁 대표가 추진한 당명교체 작업 실무를 맡았던 김수민 전 의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장 대표와 관련있는 공천잡음이다. 선거에서 공천을 둘러싼 갈등이 없을 순 없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공관위가 현직 도지사까지 컷오프하며 특정인 공천을 시도한다는 의혹을 산 사례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난주 국민의힘 의원 전원이 모여서 ‘윤 어게인 반대’ 결의문을 채택한 것도 이러한 공천갈등을 없애기 위한 선제조치 성격이 강하다. 국민의힘은 지금 당 내분을 촉발시킬 뇌관이 곳곳에 있다. 국민의힘 윤리위에는 지난달 제명된 한동훈 전 대표의 대구 서문시장 방문에 동행한 김예지·박정훈·배현진·우재준 의원 등 친한계 인사 8명이 제소돼 있다. 그리고 서울시당 윤리위에서 ‘탈당 권유’ 중징계를 받은 고성국씨의 이의 제기 사건도 윤리위의 재심의 단계에 있다. 장 대표는 지난주 최고위원회의에서 “윤리위원회에 제소된 모든 징계 사건에 대해 지방선거가 끝날 때까지 추가적인 징계 논의를 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그의 진의(眞意)는 달리 해석되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징계 논의는 보류하되, 이미 집행이 완료된 징계와 당내 인사에 대해서도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장 대표가 ‘절윤’의 실천방안인 한 전 대표 제명 철회와 지난주 의원총회에서 나온 윤민우 윤리위원장, 장예찬 여의도연구원 부원장 등에 대한 인사 조치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최근 ‘혁신 선대위’ 출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를 장 대표가 아닌 새 얼굴로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흥행을 위해 장 대표를 보완하면서 유권자에게 쇄신 이미지도 줄 수 있는 인사가 선대위에 영입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지금 여권은 친여 유튜브에서 ‘이재명 대통령 공소 취소와 검찰보완 수사권 거래설’을 제기한 이후 혼란에 빠져있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이에 대한 반사이익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 유권자 시선이 야당의 내분과 공천잡음에 쏠려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인적 쇄신을 통해 극우세력과의 실질적인 ‘절연’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민주당이 제기하고 있는 ‘야당 심판론’은 6·3 선거일까지 계속 기승을 부릴 것이다. 선거일이 이제 80일도 남지 않았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17

사교육비가 남긴 교육 격차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망은 끝이 없다. 나는 비록 못 배웠지만 자식만큼은 반드시 공부시키겠다는 부모의 마음이 결국은 사교육 열풍으로 이어진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한 과외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과외를 전면금지한 7·30조치를 내린다. 공직자 자녀가 과외를 하면 공직자가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강력한 법규까지 만들었지만 시중에는 암암리에 과외가 성행했다. 7·30 조치는 2000년 헌법재판소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위헌판결을 내려 2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능에 등장하는 킬러 문항이 과외를 증폭시킨다는 여론으로 한때 정부는 수능시험 문제에 킬러문항을 배제하는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킬러문항이란 최상위권의 변별력을 높일 목적으로 출제되는 초고난이도 문제다. 학원의 도움없이는 풀기가 어렵다. 강남의 유수학원에 학생들이 몰려드는 이유라고도 한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우리나라 초중고생이 쓴 한해 사교육비 규모가 밝혀졌다. 27조원 정도다. 5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세를 보여 그 원인을 두고 설왕설래다. 교육부는 초등 돌봄이나 방과 후 학교 확대 등 정책적 효과가 일부 나타난 것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일각서는 학령인구 감소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준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문제는 사교육비 총액의 감소에도 고소득층일수록, 학업 성취도가 높을수록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것으로 조사돼 사교육비의 사회적 폐해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성적 상위 10%가 월 66만원 쓸 때 성적 하위 20%는 월 32만원을 써 두 배 차이가 났다. 계층 간 교육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17

봄은 이제 오려나?

봄이 가까워 오건만 춥다. 옛날에 배운 것, 꽃샘추위. 북쪽 오츠크해에서 차갑고 습한 고기압이 발달, 남쪽으로 내려온다. 차가운 북동풍이다. 기온이 급강하, 봄에 꽃이 피기 시샘하는 추위가 닥친다. 청량리 발 평창으로, 아침 9시 37분 발. 손발 관절의 통증에 밀려 눈을 뜬다. 아직 새벽이다. 무슨 꿈을 꾸웠나. 분명 기억으로 남겨야 할 꿈이었건만, 이즈음엔 잠에서 깨면 채집이 어렵다. 작고 낮은 침대가 무슨 관짝같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살아나는 중인가. 이효석은 불과 35년 1개월 20일만을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 세상 떠난 작가들. 나도향, 24년 4개월 27일. 이상, 26년 6개월 25일. 김유정, 29년 1개월 17일. 백신애 31년 1개월 6일. 강경애, 38년 6일. 짧다. 인생은 짧고 예술가의 인생은 더 짧은가 보다. 더 오래 산 작가들도 얼마든지 있잖더냐고?(누가 아니랬나요?) 청량리역은 롯데백화점 뒤에 큰 성냥갑처럼 숨어 있다. 3인의 출발 예정자 가운데 1인은 그저께 밤 낙오했고, 1인은 너무 늦어 기차 ‘이음’ 출발 시각 전에 올지말지란다. 커피. 어딨을까. 이런 땐 옛날 경성역 그릴(Grill) 같은 곳에 앉아 멋진 커피를 앞에 놓았을 텐데. 없다. 현대의 역사는 사각진 모형 경기장처럼 칸막이로 나뉘어 테이크아웃 커피만 즐비하다. 습관성 두통으로 디카페인을 마신 지 몇 달째지만 효과가 없다. 부실해진 위를 걱정해서 카푸치노를 마신다. 흐린 날의 양평은 우울해 보인다. 횡성은 근심스러워 보인다. 생각보다 일찍 와 걱정을 덜어준 1인은 흰 마스크를 쓰고 눈을 감고 묵상 중. 나는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메고 지고 싶지 않다. 어깨 통증, 목디스크 악화가 무섭다. 기차는 산, 강, 들, 또, 들, 산, 산, 강을 반복한다. 메마르다. 산빛, 들빛이 아직 재색이다. 푸른빛이 아직 감돌지 않는다. 비가 한번 왔건만 다시 한번 와야 하나? 예년엔 어땠더라. 한 해 한 해를 더해 수십을 더해도 아직 순환주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몸. 회의까지 시간이 남았다. 몇 번 들러본 장평에, 오늘 마침 장날이라니 들러보자 한다. 장평은 옛 교통 요지였다고 한다. 여기서 춘천도 가고 원주도 가고 제천도 갔더란다. 강릉 가는 고속철도 평창역 생기기 전만 해도 장평은 제법 큰 곳이었다 한다. 평창 장날에 장평 장도 함께 열기로 했다는데, 잘 안된단다. 불과 몇 집 안 나온 장터는 아직 겨울만 같다. 강냉이 튀긴 것에 뻥튀기 사들고 효석 아드님 이우현 선생께 갖다 드리겠다고, 장평 터미널 바로 옆 카페에서 ‘어울리지’ 않게 멋진 차를 한잔씩 하고 택시를 잡아탄다. 재단 사무실로 다들 오셔서 의사 정족수가 채워진다. 가난한 살림이라면 이우현 선생께서 화를 내시려나? 재단은 과제가 많다. 의견을 나눌수록 이효석 문학관만이라도 운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뿐이다. 돌아오는 길은 시간을 앞당겨 입석이다. 서서 이것저것 급한 일들 떠올리고 창밖으로 또 산, 강, 들, 들, 강, 산을 바라보다가 어느덧 양평 지나 창량리다. 서울이다. 역사 바깥에 혼자 서서 광장 내려다본다. 한기가 훅 끼친다. 서울은 봉평보다 더 춥다. 곧 비가 다시 한번 내리려나? 그럼 정말 봄은 오려나? 꽃이 피려나?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6-03-16

불행해질 권리

헉슬리는 자신의 저서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성이 거세된 몬드 총통에게 야만인 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락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신(神)을 원합니다, 시(詩)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1932년에 헉슬리가 집필한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기술, 과학, 쾌락, 통제가 결합 된 미래 사회를 통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관한 본질을 질문한 책이다. 전쟁도, 빈곤도, 갈등도 없는 공동체는 모두가 똑같이 안정적이다. 모두가 모두를 위해 존재 하고,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생기면 행복 약 ’소마‘를 먹으면 된다. 우울도 권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필요하지 않다. 공포가 아닌 쾌락을 통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세계. 결국은 통제까지도 사랑하게 만든다. 자유, 비판, 고통을 포기하고 얻은 대가가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하여 철학적 경고를 던진 책이다. 신세계의 미래는 어쩌면 현대판 기술주의의 세계일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기술주의‘는, 사회 운영을 기존의 정치제도가 아닌 기술에 맡겨야 한다는 사상이다. 정치인이 아닌 과학자, 엔지니어, 전문가가 사회의 운영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를 정치의 영역이 아닌 기술적, 합리적 관리 대상으로 보는 정치철학이다. 사회문제는 기술의 문제이며, 전문가가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최적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기술주의는 20세기 초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후 1930년대에는 경제를 화폐 대신 에너지 단위로 계산하자는 소위 기술주의운동까지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충돌하면서 쇠퇴하였다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서 오늘날 다시 등장하고 있다. 데이터 기반 행정, 알고리즘 정책, 인공지능 의사결정, 중앙은행의 기술관료 통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주의 가버넌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민주주의가 이념, 선동, 분열, 감정에 의하여 파괴되는 장면들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였다. 기술주의가 민주주의의 이러한 비합리적 요소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엔지니어들이 과학적 합리성의 바탕에서 소모적 정치 논쟁을 뛰어넘어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최근 ’미국을 누가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 중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의 피터 틸이 기술주의의 중심에 선 자들이다. 이들은 기술을 신봉한다. 특히 틸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민주주의를 의심한다. 틸은 기술이 정치보다 중요하며, 현대 민주주의는 혁신을 느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권력으로, 데이터가 통치로, 알고리즘이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기술주의로 전 세계를 하나의 운영체계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보 권력의 집중과 알고리즘 통치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하게 된다. 헉슬리의 신세계와 틸의 기술주의가 묘하게 겹치는 시대가 왔다. 기술주의의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내면의 병든 곳을 치료하는 약은 소마가 아니라 고통이요, 슬픔은 기쁨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6-03-16

라일락, 그리움 되다

3월 초순, 이웃 아파트의 정문 앞, 텅 빈 느낌이다. 아릿한 슬픔이 강물의 윤슬처럼 마음에 도진다. 지난해 이맘때 한 아침이었다. 볼일로 이곳을 지나는데, 무언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쳐다보는 순간, “아뿔싸! 라일락이 사라졌네! 어, 겹벚꽃나무 두 그루도 없어지고···.” 절로 나온 탄식이다. 해마다 나의 봄은, 라일락 보랏빛 꽃봉오리로 찾아와 꽃피며 내뿜는 향기에 홀려 겹벚꽃 고운 자태로 마무리되었었다. 그런 봄이, 잔인한 톱날에 댕강 잘려버렸다. 슬픔의 파도가 가슴속을 헤집었다. 이웃 아파트도 우리처럼 두 동에 같은 이름을 붙여 가, 나동으로 부른다. 우리는 두 동 모두 현관이 마당으로 나 있는데, 이웃은 나동만 현관이 마당 쪽이고 가동은 반대편 길 쪽에 있다. 그러니, 이웃 가동은 마당이 있고도 없다. 베란다가 마당 쪽이니 마당이 있다고 할 수가 있고, 현관이 반대편 길 쪽이니 마당은 없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웃은 지난해 이맘때 마당 아스팔트 포장공사를 했다. 그때, 가동은 동쪽 벽 옆의 봄 전령사 라일락 나무 한 그루와 남쪽 화단의 두 그루 아름다운 겹벚꽃나무를 잘라냈다. 더해, 현관 좌우의 향나무들도 모조리 베었다. 또, 겹벚꽃 곱던 화단의 화초들도 모두 없애고 폐콘크리트 자갈로 메웠다. 황량했다. 법에 따라 만든 조경을 무참히 없앤 집단심리의 작동 현장이었다. 도대체 왜, 이웃 가동주민은 수십 년을 식구처럼 함께 살아온 라일락 나무와 그 친구들을 모조리 베내고 뽑아버렸을까. 의문과 원망이 몰아쳤다. 달려가 따져보고 싶었으나 닿지 못할 일이라 그만두었다. 나동은 조경이 온전한 걸 보면, 가동은 반장이 바뀌었거나, 말발 센 사람들의 주장이 이겼거나, 둬 봐야 나동만 좋기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작년 이맘때의 나라 꼴이 이웃 가동주민 심성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국민이 12.3 비상계엄 대통령탄핵 찬, 반으로 갈라져 헌법재판소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타협보다는 막무가내 주장과 선동이 난무하여 국민 마음이 메말라가고 어두운 안개가 드리우게 했었다. 안개가 주민 분별심을 덮어 애꿎은 조경 식물에 화가 미쳤을 수도 있다.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비상계엄 선포가 내란으로 몰린 것을 국민이 다 아는데, 헌재는 탄핵을 인용했고 형사재판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이웃 아파트와 닮았지 싶다. 70여 년을 지켜온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침묵하는 다수 국민이 정당성을 의심하는 세력에 의해, ‘사법개혁 3법’에서 보듯 전체주의적 법제화의 길로 치닫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한 사실이 웬일인지 내겐,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라일락과 겹벚꽃나무와 조경 식물들을 매정하게 베어 버린 이웃의 심사와 맞닿아 보인다. 해방 이후, 걸출한 지도자들과 부지런한 국민이 함께 심고, 가꾸어, 꽃피운 위대한 선진 대한민국. 그 근간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라일락 나무처럼 잘려 나가는 것만 같은 걱정이 파도치는 요즈음이다. 보랏빛 라일락꽃과 향기가 그립다. /강길수 수필가

2026-03-16

AI 시대에 ‘석기시대 행정’

포항시 행정의 공백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시청에 전화를 걸어본 시민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일이 있다. 수차례 신호음만 울리다 끊기거나, 어렵게 연결되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담당자 출장 중”이라는 무성의한 안내뿐이다. 시청의 문턱 역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현재 포항시청 출입은 담당 공무원과 전화로 연락해 허락을 받아야만 가능하다. 민원을 해결하러 온 시민이 입구에서 발이 묶인 채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들여보내 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기묘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악성 민원으로부터 공직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에게는 입구에서부터 잠재적 문제 인물로 취급받는 듯한 불쾌감만 안겨준다. 행정 편의주의가 낳은 폐쇄 행정의 전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전화 연결의 벽이 시청 입구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항시 홈페이지 조직도 역시 시민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이 되고 있다. 조직도에는 담당 공무원의 이름과 행정전화 번호만 공개돼 있을 뿐, 실제로 시민들이 신속하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행정전화가 불통이 되면 민원인은 속수무책으로 답답함만 감내해야 한다. 담당자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전화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지만, 정작 연결되기란 쉽지 않다. 공무원의 명함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명함에는 사무실 전화번호만 덩그러니 적혀 있을 뿐 정작 긴급한 상황에서 연락할 수 있는 휴대전화 번호는 사라진 지 오래다.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면 업무는 그대로 멈추고, 민원인은 연결될 기약도 없는 사무실 번호만 붙잡고 전화를 반복해야 한다. ‘공직자 보호’라는 방패 뒤에 숨어 ‘소통’이라는 기본 책무를 내려놓은 모습이다. 여기에 점심시간 일제 휴무제까지 더해지면서 시민 불편은 더욱 커지고 있다. 창구 민원 공무원들이 점심시간에 맞춰 일제히 업무를 중단하면서, 점심시간을 쪼개 시청을 찾던 직장인들은 허탕을 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시민의 생활에 맞춰 제공돼야 할 행정 서비스가 오히려 시민에게 불편을 강요하는 형국이다. 문제의 본질은 ‘소통의 단절’이다. 세상은 이미 인공지능(AI)과 디지털 기술로 행정 혁신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민원 서비스 역시 온라인 플랫폼과 다양한 소통 창구를 통해 시민 접근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포항시 행정은 정작 시민과의 소통에서는 눈을 가린 채 벽을 쌓는 ‘블라인드 행정’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닫힌 출입문과 연결되지 않는 전화, 그리고 “출장 중”이라는 한마디 뒤에 숨은 행정이 계속되는 한 시민의 불만과 분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은 고스란히 행정을 향한 더 큰 심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임창희 선임기자 lch8601@kbmaeil.com

2026-03-16

자녀 사교육비에 무너지는 노후

한국의 사교육 시장 규모는 실로 천문학적인 수준이다. 지난 2024년 이미 29조2000억 원을 넘어섰고, 현재는 3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한 달 평균 1인당 사교육비는 45만 원에 육박한다. 서민 가정으로선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밖에 없다. 사교육 시장의 지속적인 팽창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걱정에서 시작된다. ‘남의 아이보다 학원에 덜 보내면 내 아들·딸의 성적이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향후 대학 진학과 취업전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지 않을까’라는 우려. 이는 자식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마냥 부모를 탓할 수만도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어느 지역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사교육에 적지 않은 돈을 쓰는 건 서울이나 지방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금액의 차이만 있을 뿐. 교육부는 최근 ‘2025년 초중고 사교육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서울의 학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66만3000원이었다. 전국적으로 봐도 45만8000이 넘었다. 사교육 참여율은 서울의 경우 82.6%였다. 지방도 이보다 크게 낮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치원부터 시작해 자녀를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낸 학부모 가운데 89%는 어떤 형태로건 사교육비를 지출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었다. 경제적 형편에 따라 지출액은 조금씩 다르지만 10명 가운데 9명이니 한국 학부모 거의 대부분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런 상황이니 “자녀의 사교육비가 부모의 안정적인 노후를 위협한다”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온다. 그렇다고 공부하겠다는 자식의 학원행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래저래 부모 노릇 하기 힘든 세상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16

청령포와 트럼프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자 돌연 대중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곳이 영월 청령포다. 청령포는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얽힌 곳이다. 단종 이홍위(李弘暐)는 1452년 열두 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권력의 화신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주고 1455년 상왕(上王)으로 물러난다. 그것도 잠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길에 오른다. 청령포는 남한강 지류인 서강이 동-북-서쪽을 휘감아 흐르고, 남쪽은 기암절벽으로 가로막힌 경이로운 지형으로 이뤄져 있다. 단종의 유배지를 청령포로 결정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탁견(卓見)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육지 속의 작은 섬으로 고립무원의 청령포를 무슨 수로 탈출할 수 있단 말인가?! ‘빠삐용’(1974)의 주인공 스티브 맥퀸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무슨 까닭인지 나는 이미 세 번이나 청령포를 다녀왔다. 한여름에도 봄철에도 청령포를 찾았지만, 가장 깊은 상념이 몰려든 시절은 삭풍의 한겨울이었다. 서강이 꽁꽁 얼어붙어 나룻배가 아니라, 걸어서 청령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칼바람이 얼굴과 귓전을 때리는데, 노산대(魯山臺)와 망향대에서 어린 단종을 떠올리려니 눈시울이 절로 뜨거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과 달리 세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김시습 평전’(2003)에서 심경호 교수는 단종의 사사(賜死)를 끝까지 주장한 이는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라고 기록한다. 단종이 세종의 아들 문종의 대를 이었으니, 단종을 죽이도록 세조를 교사한 인물은 두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늙은이들이 무슨 연유로 혈족의 손자를 죽음으로 내몬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조선 왕조의 태생적 한계에 주목해야 한다. 이성계가 개창(開創)한 조선의 권력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연합체였다. 양반 사대부의 협력에 크게 의지해야 했던 군왕들의 일방통행이 불가능했던 왕조가 조선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집현전을 통한 각종 제도개혁과 한글 창제 같은 대업을 이룸으로써 신권 강화의 기틀을 시나브로 만들어준 군왕이다. 문제는 병약한 문종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왕권 약화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치적인 변곡점에 일어난 정변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양녕대군은 이 정변에서 일찍이 수양대군의 편에 섰고, 훗날 효령대군이 단종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왕권 강화에 일익(一翼)을 담당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이란 요물(妖物)에 취해 인명을 살상하고, 제 한 몸과 일가 및 특정 집단의 편익을 도모한 자들이 적지 않다. 그 와중에 희생당한 이들의 통절(痛切)한 사연도 다채롭거니와 노산군의 이야기는 예나 지금이나 가슴 짠하다. 한 살 위인 정순왕후와 재회의 기약도 없이 헤어진 채 노산대에서 한없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사연은 눈물겹게 다가온다. 요즘 세계는 전쟁광 트럼프로 인해 거대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린란드를 탐하고, 베네수엘라를 침탈한 것도 모자라 이란을 공습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더니 다음 차례는 쿠바라고 적시한다. 이런 사태의 출발점은 권력에 도취한 자의 지독한 과대망상과 정신착란 아닐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3-15

동대구로 히말라야시다

히말라야시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히말라야 북서부와 아프카니스탄 동부가 원산지다. 상록 침엽수로 우리는 개잎갈나무라 부른다. 높이 최고 50m까지 성장하며 늘 푸른 잎과 아름다운 수형 때문에 공원과 가로수 등 관상용으로 많이 식재된다. 세계 3대 공원수로 꼽히며 인도서는 신의 나무라 부른다. 고대 이집트서는 이 나무 열매에서 기름을 추출해 미라에 발랐으며, 기름을 바른 미라는 몇백 년 가도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30년대에 도입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좋아해서 1970년부터 전국 곳곳에 심어졌다고 한다. 동대구로에서 범어로터리까지 식재된 히말라야시다도 이때 심어졌다. 동대구로 왕복 10차선 도로 2.7km에 걸쳐 심어진 히말라야시다는 어느덧 대구의 상징물이 됐다. 이처럼 긴 구간에 히말라야시다가 심어진 사례도 드물지만 대구의 관문인 동대구역에 내리면 바로 마주할 수 있어 대구를 기억하게 하는 나무로 자리를 잡았다. 대구를 떠나 모처럼 고향을 찾은 이들에게는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 겨울에도 푸른빛을 잃지 않는 상록의 기개는 대구시민의 꿋꿋한 기질을 연상한다. 시민들은 동대구로 히말라야시다 거리를 대구의 자랑으로도 여긴다. 동대구로를 지나가는 대구도시철도 4호선 공사가 7월부터 시작될 거로 알려진 가운데 대구의 명물 히말라야시다 가로수의 일부 훼손이 우려된다. 대구시교통공사는 대구 상징성을 고려, 가로수 훼손 범위를 최소화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정류장 일부 구간의 훼손은 불가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50년 이어온 동대구로 히말라야시다에 얽힌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한 공사가 돼야 할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15

일본의 ‘독신세’ 논쟁을 보며

요즘 일본에서는 이른바 ‘독신세 논란’이 가장 뜨거운 정책 논쟁 가운데 하나다. SNS에서는 “4월부터 독신세가 시작된다”는 말이 퍼졌다. 실제 독신자에게 새로운 세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저출산 대책 재원 마련을 위해 의료보험료에 ‘아동·육아 지원금’을 추가로 얹어 징수하기로 하자 이를 두고 일부에서 ‘독신세’라는 표현을 쓰면서 논쟁이 커졌다. 제도의 구조는 단순하다. 연봉 600만엔 정도의 직장인은 매달 약 600엔가량을 추가 부담하게 된다. 금액 자체는 크지 않지만 문제는 부담 대상과 수혜 방향이 다르다는 데 있다. 자녀가 없든 자녀 양육을 마친 고령층이든 같이 부담한다. 그러나 실제 혜택은 아동수당이나 육아 지원 등 자녀 가구에 집중된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왜 싱글이 육아 비용을 대신 부담해야 하느냐”는 불만이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설명은 다르다. 아이와 육아 가정을 사회 전체가 함께 지원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미래 노동력이며 장차 세금과 사회보험료를 내며 연금과 복지 체계를 떠받치는 세대다. 그럴 경우 무자녀인 사람 역시 결국 그 혜택을 받게 되므로 사회 전체가 비용을 분담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논리다. 결국 이번 논쟁의 본질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아이를 누가 키우는가.” 이 질문이다. 일본 정계에서 이 문제와 관련한 논쟁은 오래됐다. 2009년 민주당 정권은 “아이를 사회가 함께 키운다”는 철학 아래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하는 아동수당을 도입했다. 반면 당시 야당이던 자민당은 “육아 책임은 기본적으로 가족이 맡아야 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후 정책 방향은 바뀌었다. 자민당 정권에서도 유아교육 무상화와 아동수당 확대 같은 정책이 추진됐다. 출산율 하락이 그만큼 심각해진 때문이다. 일본의 출산율은 여전히 하락세다. 2024년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15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정책은 확대되지만 아이는 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최근 ‘육아 페널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이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인식이 그만큼 확산됐다는 의미다. 일본의 ‘독신세 논쟁’은 정책 차원의 갈등을 넘어 사실상 사회계약과 관련된 문제다. 아이를 낳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성장해 사회의 노동력과 납세자가 되고 결국 연금과 사회보장 체계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그 비용을 개인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 전체가 분담해야 할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 논쟁은 한국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명 수준까지 떨어졌다. 일본보다 훨씬 낮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저출산 정책을 지원금 확대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본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저출산 정책의 핵심은 돈이 아닌 사회적 합의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해야 하지만 그 이유를 국민에게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결국 일본의 ‘독신세 논쟁’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아이를 키우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아이 없는 사회를 받아들일 것인가.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3-15

쇼츠(Shorts)

점심 후 차 한잔을 위해 커피숍에 들어왔다. 눈에 들어오는 모두는 고개 숙여 손안의 작은 화면에 빠져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서도, 식당에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휴대전화 화면으로 향한다. 손가락 하나로 화면을 위로 밀어 올리면 다음 영상이 나타난다. 길어야 2~3분 남짓한 짧은 영상들, 이른바 ‘쇼츠’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켜는 순간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출근 준비를 하며 잠깐 본 영상이 이어지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몇 초의 시간에도 또 하나의 영상이 재생된다.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 “이 영상 하나만 더 보고 자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다음 영상을 이어 붙인다. 그렇게 10분 또 30분이 되고 어느 순간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우리는 분명 많은 것을 본 것 같지만, 막상 무엇을 보았는지 떠올리려 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다. 기술의 발전으로 시간을 더 효율적으로 쓰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어느 때보다 바쁘고 쫓기듯 살아간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강한 인상도 받지만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쇼츠는 즉각적인 재미와 반응을 제공하지만, 그 경험은 쉽게 내면에 남지 않는다. 화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자극은 계속되지만, 생각이 머물 여유는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웃고 놀라고 반응하지만, 영상이 끝나고 나면 묘한 공허함이 남는다. 짧은 시간 감정은 소진되었지만, 삶의 의미는 충분히 녹아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할 시간 없이 이어지는 정보들은 기억으로 남기보다 금세 사라지는 잔여물이 되기 쉽다. 미국의 기술 철학자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The Shallows)’에서 인터넷 환경이 우리의 사고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터넷이 정보를 빠르게 찾는 능력은 키워주지만 깊이 읽고 오래 집중하는 능력은 약화시킨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따라 화면을 넘기는 습관 속에서 우리의 뇌는 점점 빠르게 훑어보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그 결과 한 문장에 오래 머물며 의미를 곱씹는 능력, 복잡한 생각을 차분히 따라가는 능력은 점차 약해진다. 이 빠른 흐름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독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독서는 쇼츠와 정반대의 속도를 요구한다. 문장은 즉각적인 보상을 주지 않고 의미는 천천히 드러난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멈추고 되돌아가며 타인의 생각 속도를 따라 걷는다. 이 느린 과정속에서 주의력은 다시 우리 것이 되고 기억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결국 인문학적인 삶이란 더 강한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래 남는 의미를 선택하는 태도에 가깝다. 쇼츠의 세계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것은 단순히 화면을 끄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속도에서 내려와 자신의 삶에 맞는 리듬을 다시 찾는 일이다. 모두가 더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에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산책하며 사색하는 행위는,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지만 분명한 삶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3-15

바람꽃

수은주가 빠른 속도로 올라가며 언 땅을 살살 만지고 있다. 그럼에도 차바퀴 자국이 선명한 산 초입의 길은 아직 질퍽질퍽하다. 봄은 여린 것으로 시작된다. 양지 바른 곳에는 연초록이 살짝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피고 있다. 나무들은 줄기 끝에서 겨울을 서서히 털어내고 있지만 봄 숨결이 미처 닿지 못한 산자락이다. 계곡을 끼고 걷다 경사진 비탈길을 천천히 올랐다. 쌀쌀한 날씨에도 사람의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다. 여러 명의 사진작가들이 거의 바닥에 엎드려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부러져 누워있는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 사이를 잘 살펴보면 가냘픈 하얀 꽃과 눈이 마주친다. 바람꽃이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하고 하늘하늘한 모습이다. 무심히 지나치면 밟고 갈 수도 있어 발걸음이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초봄이면 바람꽃을 보러 다녔다. 사람의 손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에 봄을 불러들이듯 군데군데 무더기로 피어있는 꽃. 앙증맞은 꽃잎과 가녀린 줄기 사이로 바람이 불면 온몸이 흔들린다. 겨울의 강하고 거친 추위를 유연함과 부드러움으로 뚫고 일어서는 것이 그 꽃의 매력이다. 늘 강하고 싶었다. 그래야 거칠고 풍파 많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내 목소리를 높여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 단단한 겉모습으로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강함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작은 시련 앞에 그 강함은 쉽게 무너졌다 돌 지난 둘째를 유모차에 앉히고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유모차째로 아이가 넘어졌다. 안전띠를 묶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가 일어선 것이었다. 타일 사이 매끄럽지 않게 돌출된 부분에 부딪힌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숨넘어가게 우는 아이를 안은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갔다. 이마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수건으로 이마를 누르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우유를 타 입에 물렸다. 금세 수건이 빨갛게 변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원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집을 나섰다. 4살 된 큰아이는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경비아저씨께 부탁한 뒤 놀이터에 두었다. 집 근처에 보이는 병원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외과가 아니었지만 부탁을 드렸다. 다른 환자분들이 양보해주셔서 바로 의사선생님은 아이의 이마를 꿰매어 줄 수 있었다. 병원을 나오는데 그 때서야 놀이터에 두고 온 큰애 걱정에 가슴 한켠이 타들어갔다. 다행히도 큰애는 잘 놀고 있었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며 혼자 엄청 울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강함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바람꽃은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는 모습인데 그 이름에 바람을 담고 있다. 금방 흩어지고 무너질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만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지 않고 바람의 세기만큼 유연하게 같이 움직인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강함은 결국 단단함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바람이 불면 같이 흔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꺾이지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뜻밖의 말들에 상처 받고 예고 없는 이별이나 아픔에 중심을 잃을 때도 있다. 열심히 계획하고 실행하던 일들이 어그러져서 실망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야 한다. 연약해보이지만 아픔과 시련에 꺾이는 것이 아닌 유연함 속에 강함은 숨어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나 단단함 커다란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기다린 인내심 속에 그 본질은 숨어 있다.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시련 속에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 바람에 온몸이 휘어지더라도 꺾이지 않는 것. 강한 추위 속에서 고통의 긴 시간을 지나더라도 뿌리를 깊게 내리고 꽃을 피울 봄을 인내로 기다리는 것. 바람꽃이 내게 말해주는 것들이다. 진정한 강함은 유연함과 인내 속에 함께 하는 것이라고. 유난히 무리 지어 있는 하얀 꽃들이 나를 반긴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6-03-15

텍스트·이미지·음성·영상을 넘나든다 ‘멀티모달 AI의 시대’

지난주 우리는 파인튜닝과 프롬프팅, 인공지능(AI)을 내 것으로 만드는 두 가지 전략을 비교했다. AI 뇌를 바꾸느냐, AI와 소통하는 방식을 바꾸느냐의 차이였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텍스트로 AI와 대화했는데, AI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영상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오늘은 AI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수준을 넘어, 사진을 보고, 말을 듣고, 영상을 분석하는 ‘멀티모달(Multimodal) AI’의 영역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AI에게 눈과 귀, 그리고 영상 감각이 생겼다 멀티모달(Multimodal)이란 ‘여러 가지 양식(modality)’을 뜻한다. 기존 AI가 텍스트라는 단 하나의 통로로만 세상과 소통했다면, 멀티모달 AI는 텍스트·이미지·음성·영상을 동시에 받아들이고 처리한다. 비유를 들자면, 지금까지의 AI는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채 손으로 점자만 읽는 사람과 같았다. 텍스트라는 제한된 채널로만 세상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멀티모달 AI는 눈을 뜨고, 귀를 열고, 화면까지 보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이해하고자 할 때 글만 읽고 이해하는 것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대표적인 멀티모달 AI로는 OpenAI의 GPT-4o, Google의 Gemini 1.5 Pro, Anthropic의 Claude 3.5 Sonnet 등이 있다. 이들은 이미 이미지·음성·영상 입력을 모두 지원하며, 실시간 대화까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네 가지 감각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멀티모달(Multimodal) AI가 처리하는 네 가지 주요 입력 방식을 살펴보자. 첫째, 텍스트(Text) 즉, 문자는 여전히 AI의 가장 강력한 토대이며, 산업 전영역에서 널리 활용된다. 모든 멀티모달 처리의 중심에는 언어 모델이 있으며, 다른 양식들도 결국 텍스트로 변환되거나 텍스트와 결합 되어 처리된다. 둘째, 이미지(Image) 처리다. AI는 이제 사진 한 장을 보고 제품 불량을 잡아내고, X레이를 분석해 이상 소견을 찾아내며, 사용자가 찍은 식물 사진을 보고 병충해를 진단한다. 단순히 “이 사진에 뭐가 있어?”를 넘어, 이미지 속 맥락과 감정, 디자인의 완성도까지 평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적용 분야는 의료·제조·커머스 등이며, 데이터 처리량은 중간 수준이다. 셋째, 음성(Voice) 처리다. AI가 사람의 말을 듣고 텍스트로 바꾸는 것(STT)은 이미 익숙하다. 그러나 최신 멀티모달 A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양, 감정, 말의 빠르기까지 분석한다. 콜센터에서 고객의 목소리 톤만으로 불만 수위를 감지하고 대응 전략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금융 및 서비스 분야에 많이 활용된다. 넷째, 영상(Video) 처리는 멀티모달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다. 영상은 ‘시간이 흐르는 이미지의 연속’이다. AI가 영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장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장면과 장면 사이의 맥락 변화, 행동의 흐름, 화자의 감정 변화를 연속적으로 추적한다는 의미다. Google Gemini 1.5 Pro는 최대 1시간 분량의 영상을 통째로 분석해 핵심 내용을 요약하거나 특정 장면을 찾아낼 수 있고 한다. 이 영역은 지금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교육, 보안, 스포츠 분야 등이 대표적인 적용 분야라 할 수 있다. 이들 멀티모달 AI 기능은 이미 산업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몇 가지 활용사례를 살펴보면 아래 예와 같다. 제조업의 이미지·영상 결합 품질 검사 자동차 부품 제조사 K는 딥러닝 기반 비전 검사 방안을 제안한 특정 스타트업의 멀티모달 AI를 생산 라인에 도입했다. 카메라로 부품 이미지를 실시간 촬영하고, AI가 미세한 스크래치나 치수 불량을 0.1초 이내에 감지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영상 분석 기능을 추가해 불량이 발생하는 공정 단계를 역으로 추적, 어느 순간 어떤 동작에서 결함이 생겼는지를 영상 흐름으로 찾아낸다. 그 결과 결함 발생 빈도가 눈에 띄게 급감하여 품질 관리 비용을 크게 절감했다. 교육 현장의 영상 분석 AI 국내 한 에듀테크 기업은 온라인 강의 영상을 멀티모달 AI로 분석하는 서비스를 출시했다. AI는 강사의 말투, 판서 내용, 학생의 표정 변화(화상 수업의 경우)를 종합 분석해 이해도가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분석 리포트에 반영함으로써 해당 개념에 추가 설명이 필요합니다“라고 피드백을 해준다. 영상, 음성, 텍스트(자막) 세 가지를 동시에 처리한 결과다. 유통·커머스의 멀티모달 쇼핑 경험 국내 한 대형 쇼핑 플랫폼은 ‘사진으로 찾기’를 넘어 ‘영상으로 찾기’ 기능을 도입했다. 소비자가 인플루언서 영상에서 마음에 드는 장면을 캡처하거나 짧은 영상 클립을 올리면, AI가 영상 속 의류·소품을 인식해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품을 즉시 추천한다. 검색에 소요되는 불필요한 과정을 획기적으로 줄여 쇼핑의 피로도를 낮췄다.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멀티모달(Multimodal) AI 활용을 처음 시작한다면 세 가지 진입점을 추천한다. 가장 쉬운 시작은 이미지 분석이다. ChatGPT나 Claude에 사진을 첨부해 “이 계약서 사진에서 주요 조항을 정리해 줘”, “공장 사진에서 안전 위반 사항이 있는지 점검해 줘”처럼 활용해 보라. 별도 투자 없이 지금 당장 가능하다. 다음은 음성 연동이다. 회의 녹음 파일을 AI에 넣어 요약·분석하거나, 고객 상담 음성 데이터에서 주요 불만 유형을 자동 분류하는 것이 대표적 활용이다. 가장 고도화된 단계는 영상 분석 파이프라인 구축이다. n8n 같은 자동화 도구와 Gemini API를 연동하면, 영상이 업로드되는 순간 자동으로 분석 결과가 문서로 저장되는 워크플로우를 만들 수 있다. 교육 기관이나 제조업체에서 특히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 멀티모달의 미래 멀티모달 AI의 진화 방향은 명확하다. 실시간성과 통합성이다. OpenAI의 GPT-4o는 이미 화상 통화 중 상대방의 표정을 읽고 감정에 맞는 답변을 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Google의 Project Astra는 스마트폰 카메라가 비추는 실시간 영상을 AI가 보면서 대화하는 ‘눈이 달린 AI 비서’를 현실화했다. 한국에서도 변화가 빠르다.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X, 카카오의 KoGPT 모두 이미지·음성 처리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업그레이드 중이다. 2026년 이후에는 텍스트 AI와 멀티모달 AI를 굳이 구분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결국, 멀티모달(Multimodal) AI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즉 보고 듣고 읽고 느끼는 방식을 AI가 따라오고 있다는 신호다. AI에게 글만 주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미지를 찍고, 목소리를 담고, 영상을 보여주며 AI와 협업하는 시대가 지금 열리고 있다. 다음 주에는 개발 코드(Code)를 공유하는 오픈소스 AI와 그렇지 않은 클로즈드 AI의 전략 전쟁, LLaMA, GPT, Claude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이유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3-15

필사즉생 각오 없는 보수, 2018년 참패 잊었나

6·3 지방선거를 불과 80일 앞둔 국민의힘 모습이 점입가경이다. 의원총회는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단절을 결의하며 이른바 ‘절윤(絶尹)’ 노선을 선언했다. 하지만 장동혁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의 태도는 종잡을 수가 없다. 오히려 ‘절 윤’ 선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공천관리위원회가 후보자 접수 기간을 연장했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은 접수를 거부했다. 혁신선대위를 구성하라는 요구다. 장 대표는 “공천은 공정이 생명”이라며 오 시장의 요구를 일축했다. 여기에 강성 보수 성향의 유튜버 전한길씨가 반발하고, 이정현 공관위원장마저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민심은 차갑게 식어간다. 국민의힘이 방향을 잃었다. 선거를 앞둔 정당의 최우선 가치는 ‘승리’다. 그런데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패거리 싸움’에 매몰돼 있다. 현실은 냉혹하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3월 2주 차)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지지도는 47%, 국민의힘은 20%다. 지지율 차이가 갑절을 넘겼고, 국민의힘 비호감도는 70%에 달한다. 민주당은 39%다. 비호감도는 거꾸로 국민의힘이 갑절이다. 이대로라면 광역단체장 17곳 중 15곳을 민주당이 휩쓸었던 2018년 지방선거의 참패가 재현될 것이라는 우려가 단순한 기우로 들리지 않는다. 위기의 근원은 명확하다.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하는 노선과 특정 지역에 고립된 ‘TK당’으로의 퇴행이다. 문제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대구·경북(TK)조차 예 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갤럽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전국적으로 66%를 기록 중이다. 보수 세가 강한 TK에서도 49%, 부산·울산·경남(PK) 은 57%에 이른다. 특히 TK 지역의 무당층 비율은 31%로 전국 평균(28%)보다 높다. 이는 전통적 지지층마저 국민의힘에 실망해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맹목적 지지’가 아닌 ‘냉철한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 결국 ‘장동혁 노선’은 실패했다. 양대 정당 체제에서는 어차피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절대적 지지층’이 있다. 승부는 중도층에서 난다. 그런데 중도층 지지율에서 민주당(51%)과 국민의힘(12%)의 격차가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다. 장 대표의 간판으로는 지금의 국면을 타개할 동력이 없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최 소한 선거 기간만큼이라도 중도층을 흡수할 수 있는 새로운 얼굴과 전략으로 경쟁해야 한다. 이런 국면이 계속되면 중도층마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고, 보수 지지층 가운데도 지리멸렬한 국민의힘에 실망해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선거 이후에 다시 내부 경쟁을 하더라도, 지금은 ‘간판’을 바꿔 달고 사즉생의 각오로 임해야 할 때다. 극우 층에서 얼마나 더 표를 얻으려는 것인가. 어차피 이길 지역에서 이긴 정도로 지도부가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면 후안무치한 일이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 세력은 스스로를 ‘폐족(廢族)’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 처절한 성찰 끝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전국 모든 광역단체장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지금 보수 정당이 본받아야 할 것은 당시 그들이 보여준 처절한 자기반성이다. 기득권을 움켜쥔 채 입으로만 쇄신을 외치는 것은 지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했다. 지금 국민의힘 지도부가 보여주는 모습은 ‘나만 살고 당은 죽어도 좋다’는 식의 아집이다. 중앙정부를 포기한 대구·경북만의 고립된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일 뿐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 경제와 시도민에게 돌아온다. 오세훈 시장의 요구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보수 유권자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라. 선거에서 완패한 뒤 지도부가 물러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차라리 선거 전 일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는 것이 보수 전체를 살리는 길이다. 선거 결과를 보기 전에는 못 물러난다는 고집은 결국 ‘다 같이 망하자’는 소리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나보다, 내 패거리보다, 국민과 지역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을 던지는 용기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