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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군사력 ‘세계 5위’라는 착각

이재명 대통령은 “군사력 세계 5위인 대한민국이 스스로 방어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국방비가 북한 GDP의 1.4배임을 강조했다.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고 하겠지만, 자칫 ‘핵무기의 절대성’을 경시(輕視)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대통령의 인용 근거가 된 GFP(Global Firepower)의 평가는 핵무기를 제외한 재래식 군사력 순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진 대통령은 군사력의 강점과 약점을 국민에게 정확히 알리고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만약 국민이 “재래식 군사력 5위의 한국이 핵무기를 가진 재래식 군사력 31위인 북한의 핵 공격을 받는다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재래식 군사력이 아무리 강해도 핵무기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핵은 절대무기이고 비대칭전력’이기 때문에 ‘핵에는 핵’만이 유일한 대응책이다. 비핵국가인 한국이 한미동맹에 의한 ‘미국의 핵우산’으로 북핵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우리의 재래식 전력이 세계적 수준이고 자주국방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세계 5위의 재래식 군사력’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GFP가 발표한 군사력 순위는 20세기 기준으로 21세기 군사력을 평가했다는 약점이 있고, 핵과 같은 전략무기를 제외한 통계일 뿐만 아니라, 군사력의 상대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이러한 통계를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지피지기(知彼知己)’가 중요한 전쟁에서는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전략은 성공하지만 ‘주관적 해석’에 의한 전략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국방’과 ‘한미동맹’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자주국방이 “타국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국의 안전과 영토, 주권을 지켜내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가? 재래식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압도적이지만, 비대칭 전력인 핵무기가 우리에게는 없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로 공격해온다면 우리가 미국의 핵우산 없이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자주국방이라는 당위’와 ‘북핵 위협이라는 현실’ 사이에는 격차가 있고, 그 격차를 메꾸어주는 것이 바로 한미동맹이다. 현재의 남북대치 상황에서는 자주파와 동맹파의 대립, 즉 자주국방이냐 한미동맹이냐의 논쟁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장기적으로는 ‘자체 핵개발을 포함한 자주국방 능력’을 제고해나가면서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핵우산으로 북핵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단순한 참고자료에 불과한 GFP의 군사력 순위에 대한 과신이나 정치적 해석은 금물이다. 정치인들이 군사적 통계나 정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국가안보가 위험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6-04-06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포항 주변 바닷가 길과 산속 길을 드라이브하는 취미가 생겼다. 주말 하루는 차를 몰고 바닷가로 산속으로 떠난다. 정원 마당 정리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집사람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음악을 탐색한다. 덕성리 마을을 나서 곡강천 입구에 도달하기 전까지 약 5분의 시간에 우리는 그날의 드라이브 코스를 정한다. 바닷가로 갈 것인지, 산속으로 갈 것인지. 남쪽으로는 흥환, 구만, 대보, 구룡포, 양포, 감포, 전촌 쪽 바닷가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오천, 진전 고갯길 넘어 기림사길, 불국사, 보문단지 코스로 가기도 한다. 안계리 사골동 넘어 양동마을 쪽도 남쪽이라면 남쪽이다. 서쪽 산속 길은, 기계, 죽장, 두마 쪽, 기계, 죽장, 청송길 쪽, 유계리, 경북수목원, 상옥, 가사리, 입암길 쪽, 장사, 달산, 옥계, 부남 쪽이 주로 가는 길이다, 북쪽 바닷길은 강구에서 대진항으로 이어지는 블루로드 길이 단연 으뜸이다. 블루로드 길은 영덕에서 노물로 들어가는 길도 좋다. 가장 많이 다녀본 코스는 장사, 달산, 옥계, 가사리 코스이다. 절경이다. 옥계길을 가다 보면 중간에 계곡을 가로질러 하옥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넘어가는 고갯길 일부가 비포장길이 있기도 하고, 길이 험하여 집사람이 무서워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하옥을 가로질러 상옥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상옥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멋진 동네다. 상옥에서 나가는 길이 4곳이다. 가장 먼저 우측으로 청송 부남으로 가는 길이 있고, 좌측으로 청하 유계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온다. 거기 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가사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가사천을 따라 죽장 입암리로 가는 길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상옥의 남쪽은 성법리를 지나 기북 오덕마을로 이어진다. 상옥에서 성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가을에 단풍이 절경이다. 봄날 곳곳이 벚꽃의 향연이다. 지금은 단연코 영천댐 ‘벚꽃 백리길’이다. 기계를 지나 죽장으로 가는 길에 정자리를 지나 자동리로 좌회전하여 쭉 가면 된다. 한때 자양댐으로 불린 영천댐 벚꽂 백리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벚꽃 길이다. 벚꽃 시즌이면 매년 집사람과 2번 이상 가는 명소이다. 정자리에서 내려가는 길도 좋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코스도 좋다. 임고에서 죽장으로 가다가 충효리에서 좌회전하여 보현산 천문대 쪽 별빛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이다. 오늘 당장 커피 한 통 챙겨서 출발해 보시길. 물론, 차 안의 음악 중, 우순실의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는 필수다. ‘돌아보지 말아요/ 멈춰 서지 말아요/ 지난날들일랑 기억하지 말아요/ 떠난 내 뒷모습 정말 보기 싫어/ 그저 조금만 더 울고 갈께요/쳐다보지 말아요 생각하지 말아요/이렇게 가슴이 타버릴 줄 몰랐죠/ 뒤돌아 간들 무슨 소용 있나요/그땐 정말 내가 바보였나 봐/ 이젠 내가 철이 든 거죠/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람결에 띄울까 지쳐버린 마음을/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볼륨 UP!! /공봉학 변호사

2026-04-06

원픽족 되다

실시간 문자투표가 시작되었다. 마음이 급하다. 내 휴대폰으로 얼른 문자투표를 했다. 한 표라도 더 보태려고 아내 휴대폰으로도 문자를 보내려는데 안된다. 두 사람이 번갈아 휴대폰을 이리저리 만져봐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문자를 잘 보내던 두 사람이 급한 김에 혼침했나 보다.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메뉴를 찾아 문자투표를 성공시켰다. 이로써 우리 부부도 내 응원 가수에게 두 표를 보탰다. 낮에 옛 학교 동기 카톡에도 문자투표를 독려하는 영상을 올리고 투표 부탁을 해 두었다. 몇 주 전부터 대국민 응원 투표플랫폼에서 하루에 한 번씩 응원 투표도 했다. 그 결과, 내가 응원하는 가수는 최종 5위로 톱 7안에 들었다. 5번의 도전 끝에 성공한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 종편의 예능 프로그램 ‘현역가왕3’ 결승 2차전 때의 이야기다. 내 응원 가수를 TV에서 처음 본 것은 ‘미스트롯2’에서 였다. 경연에서 참가자들이 최선을 다해 열창하는 모습이 사람을 감동케 하는 데 매료되어 계속 시청했다. 그중 앳되고 아름다운 한 가수 K양이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되바라지지 않아 보여서 유심히 보게 되었다. 게다가 성씨도 같으니, 막내딸이라도 보는 듯했다. 예술의 목적이 미학(美學)이란 관점에서 그녀는 더 돋보였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 자꾸 듣게 된다’라고 노래 영상의 어떤 댓글이 말하듯, 그녀의 노래는 예술성이 높아 보였다. 이 계기가 ‘현역가왕1’부터 ‘현역가왕3’까지 다 시청하게 했다. 특히, 이번에는 대국민 응원 투표와 실시간 문자투표까지 하게 되었다. 퍼뜩, “나도 젊은이들처럼 ’원픽족‘이 되었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원픽’이란 말이 많이 쓰인다. 영어의 원픽(One-Pick)이 우리말 신조어가 되었다. 좋아하는 배우, 가수 등 예술인(artist)에 대해 주로 써오다가 요즈음은 여러 분야로 확대, 일반화된 느낌이다. 원픽은 아직 포털 국어사전에도 없다. ‘원픽족’이 오픈 사전에 있을 뿐이다. “원픽족은 ‘하나를 선택한다’는 의미의 원픽에서 파생된 신조어로 결정의 상황 속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뜻함”이라고 사전은 풀었다. 현대인은 선택의 파도 안에 산다. 수많은 대상 즉, 사람, 콘텐츠, 상품, 지식, 정보 등의 파도 속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대응이 바로 ‘원픽’이 아닐까. 여러 선택지에서 하나를 고르는 원픽. 남이 정한 것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질문, 비교, 분석, 고민하여 선택하는 원픽. 단순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 기준을 따라 당당히 해내는 원픽. 원픽은 사람을 원픽족으로 이끈다. 어찌 보면, 많은 사회현상을 원픽이란 돋보기로 살펴볼 수 있겠다. 나라 망칠 원픽의 예를 본다면, 여‧야를 불문한 대부분 ‘의원 나리들’이다. 선거철엔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유권자 원픽을 한다. 한데, 배지를 달고나면 뭔가 두려운 듯, 선관위 원픽으로 태세전환 하니 말이다. ‘가요 경선 프로그램 원픽족’은 시종일관 자기 선택 가수를 지지, 성원한다. 이처럼 의원 나리들도, 변함없는 ‘국민 원픽족’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빈다. /강길수 수필가

2026-04-06

빚내서 하는 주식 투자

빚으로 빚을 막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 여신금융협회는 삼성과 현대, 신한과 우리 등 국내 8개 전업카드사의 카드론 대환대출 잔액이 지난 2월 1조5001억 원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9월 1조3214억 원에서 13.5%가량 증가한 수치다. 카드사 대환대출이 증가세라는 이야기. 대환대출은 말 그대로 빚의 상환을 위해 다시 빚을 내는 걸 의미한다. 은행들이 신용대출의 문턱을 높이면서 급한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카드론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출 받은 돈의 상당 부분이 주식 투자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투자 전문가들은 ‘빚을 내가며 주식을 사고파는 행위의 위험성’을 때마다 경고하지만 이는 ‘한 방’을 노리며 짧은 시간에 주식을 매매하는 이들을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당분간 주식시장이 호항을 누릴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은 이런 세태에 기름을 부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세칭 ‘돌려막기’까지 해서 하는 주식 투자는 개인을 파산으로 내모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카드사에서 대환대출을 받은 이들이 늘고 있다는 건 대출자의 상환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연체율 상승으로 이어진다. 한국은행 통계의 의하면 올해 1월 말 기준 대출금 연체율은 4.1%. 이는 20년 8개월 만에 최고치다. 빚으로 빚을 막거나, 빚을 얻어 단타 매매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대출금 연체율이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다면 향후 카드사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경계해야 할 일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06

기억과 망각

지난 4월 3일은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 지 78년 되는 날이다. 제주 4·3 항쟁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난 도민들의 시위 운동과 대한민국 군경(軍警)의 무력 진압을 일컫는다. 추산에 따르면, 당시 제주 인구의 10%에 이르는 2만5000에서 3만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제주 4·3 항쟁인 셈이다. 어떤 이는 4·3 사건이라 하지만, 나는 4·3 항쟁이라 부른다. ‘사건’이라는 말에 담긴 가치 중립적이고, 어눌하며 밋밋한 표현은 희생자들의 넋을 온전히 기리지 못한다. 희생자의 80%가 군경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작전으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제주 구좌읍에 자리한 다랑쉬굴에 피신해 있던 주민 11명은 군경이 굴 입구에 피운 연기에 질식해 전원 사망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1978년 단편소설 ‘순이 삼촌’으로 4·3 항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항쟁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도 처절한 상처가 치유되지 않고 임시 봉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현기영은 ‘순이 삼촌’ 출간 이후 보안사에서 ‘빨갱이’ 소리를 들으며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진짜 빨갱이 형을 둔 ‘박통’ 시절에 일어난 일이다. 2003년 봄에 나는 처음 제주도에 간다. 그것도 공적인 업무를 위해서. 경북대 학생 70여 명을 인솔하여 4·3 항쟁 피해자와 그 흔적을 찾는 것이 주요 과제다. 어떤 마을에서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수두룩했다. 군경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결과다. 어린애든 부녀자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그들은 반공(反共)을 내세워 무차별적인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처음 찾아간 제주도에서 내가 만난 ‘한라산 소주’는 무척 특이했다. 병의 생김새나 알코올 도수는 대구와 다르지 않은데, 병뚜껑에 태극기가 선명했다. 그런데 제주도에 와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했더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태극기 내력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제주(濟州)도 대한민국의 일부입니다. 더는 우리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눈물겨운 한라산 소주 뚜껑에 새겨진 선명한 태극기 무늬가 기억에 선연하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은 “제주 4·3은 대표적인 국가폭력 사례이며,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간이 아무리 지났다 해도 국가폭력의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매우 적절한 발언이고 현명한 방향이 아닐 수 없다. 소설가 한강은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2021)에서 세 여성의 시각으로 제주 4·3 항쟁을 돌아본다.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다움 그리고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여러 각도로 조명하는 따뜻한 작품이다. 제목에 드러나 있는 것처럼 인간은 대물림하며 살아가는 현재의 존재고,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이음쇠다. 이음의 원리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이다. 국가폭력의 잔인하고 음습한 결과를 묻어두려는 행위는 의도된 망각이다. 망각은 어둠과 파괴를 향한다. 처절하고 참혹한 과거일수록 낱낱이 드러내 재발을 방지하는 편이 나을 터다. 세련된 망각을 딛고, 투박한 기억에 의지할 때 밝고 투명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릴 것이므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4-05

달의 경제학

많은 문학과 예술의 상징적 소재로 다뤄졌던 달이 경제의 대상으로 가치관이 바뀌고 있다. 신비스럽고 풍류와 낭만으로 가득찼던 달의 이미지가 퇴색하고 달이 가진 자원의 가치에 인류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과학적 탐구를 목적으로 출발했던 우주개발이 우주 자원개발을 통한 경제적 이익추구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는 말이다. 인구가 증가하고 부족한 지구촌 자원 고갈문제에 대한 해답을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 찾겠다는 인류의 노력이 본격화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난 2일 발사된 미국 우주선 아르테미스 2호의 목적은 지구와 우주를 연결하는 우주정거장 건설이다. 달에 장기간 머물 수 있는 기반과 물자수송, 착륙, 보급체계 등을 구축하기 위한 준비단계의 첫걸음이다. 과거 달 탐사가 국력 과시용이었다면 이번 아르테미스 2호 발사는 경제적 실익을 목표로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미 우주항공국은 달에는 지구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희토류와 헬륨-3와 같은 광물질이 풍부하게 매장된 것으로 보고있다. 특히 헬륨-3는 1g만 해도 석탄 20t 이상과 맞먹는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광물로, 핵융합 발전의 원료로도 높은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런 막대한 경제적 이익 때문에 달 탐사 경쟁에는 중국도 이미 뛰어든 상태다. 2018년 창어 4호를 달 뒷면에 착륙시킨 중국은 2024년 달 탐사 때는 세계 최초로 달 뒷면 토양을 채취해 지구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2028년, 중국은 2030년 달에 정주 여건을 갖춘 기지건설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달이 돈이 되는 루나노믹스(lunanomics) 시대를 향해 달 탐사 선점 경쟁의 서막이 올려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05

고유가에 흔들린 탈탄소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탈탄소를 가장 강하게 밀어붙이던 유럽이 지금은 오히려 ‘기름값 낮추기’에 나섰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국제 유가가 급등하자, 각국이 앞다퉈 연료세 인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스페인, 폴란드, 이탈리아 등 최소 10개국이 이미 감세를 결정하거나 검토 중이다. 유럽연합(EU)의 휘발유 가격은 ℓ당 1.87유로까지 올라 한 달 새 14% 상승했고, 경유는 30% 급등하며 2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고유가 문제가 아닌 유럽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에너지 충격’에 가깝다. 애초 유럽은 기름값을 낮출 생각이 없던 지역이다. 휘발유 가격 절반이 세금일 정도로, 탄소 감축을 위해 의도적으로 가격을 높여온 구조였다. 그런 유럽이 지금 그 세금을 다시 깎고 있다. 탈탄소 정책과 민생 안정이 정면으로 충돌한 결과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기름값이 오르면 물가가 뛰고, 물가 상승은 곧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미 경기 둔화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까지 겹치면 산업과 가계가 동시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꺼내 든 해법이 ‘한시적 감세’다. 시장 가격은 유지하되 세금으로 충격을 흡수하는 방식이다. 가격 자체를 억누르는 한국식 보조금 정책과는 결이 다르다. 다만 이 선택이 갖는 의미는 세제 조정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이 장면은 한국, 더 정확히 말하면 포항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포항 철강 산업은 에너지 비용에 가장 민감한 구조다. 전기로와 고로 모두 막대한 전력과 연료를 필요로 한다. 전기요금은 지난 몇 년 간 큰 폭으로 올랐고, 유가와 환율까지 높은 수준으로 흔들리고 있다. 중동 리스크까지 더해지며 부담은 더욱 커졌다. 유가 상승은 연료비는 물론 물류비와 원료비, 전력비까지 연쇄적으로 파급된다. 철강은 이 세 비용이 동시 작용하는 산업이다. 원가가 올라가면 수출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격을 올리면 수요가 줄고,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 수익성이 무너진다. 지금 포항 철강이 마주한 구조적 딜레마다. 유럽이 연료세를 낮추는 이유와 포항이 긴장해야 하는 이유가 겹친다. 에너지 가격이 흔들리면 산업 전체가 흔들린다는 점에서다. 문제는 정책 대응의 여지다. 유럽은 세금이라는 완충 장치를 갖고 있다. 상황에 따라 올리고 내리며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전기요금, 유류세, 보조금이 얽혀 정책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결국 기업이 비용 상승을 직접 떠안는 구조다. 특히 철강은 가격을 자유롭게 올리기 어려운 산업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수출 품목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즉시 철강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번 사태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에너지 문제는 더 이상 환경이나 정책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 산업 생존의 문제라는 것을. 유럽은 탈탄소라는 방향을 고수하면서도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상을 포기하지 않되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선택이다. 포항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탄소를 줄이면서도 버틸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비용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결국 답은 하나로 모인다. 탈탄소는 피할 수 없지만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 경제는 ‘친환경’이 아니라 ‘버틸 수 있는 친환경’을 요구하고 있다. /김진홍 경제에디터

2026-04-05

반려동물

옛날에는 주로 농촌에서 개를 길렀다. 묶어놓지도 않아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끼니때 쯤 들어와서 음식물 찌꺼기를 먹곤 하였다. 젖먹이 아기가 마당에다 똥을 누면 기다렸다가 먹어 치우는 것도 개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똥개다. 당시에도 개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긴 했지만, 결국은 식용을 위한 가축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좀 나아지면서 집집마다 대문이 생기고 개의 역할도 격상(?)이 되어 방범을 겸하게 되었다. 마당에 매어서 기르기 시작한 때였다. 개나 고양이 등에 대한 애완동물의 개념이 생겨난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였다. 주거환경의 혁신적 변화가 주요 원인이었다. 산업화·도시화로 급증한 아파트의 실내에서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시골 동네에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만 뜨면 서로 어울려 지냈지만, 핵가족이 폐쇄된 공간에 격리되어 살다 보니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 가족이나 이웃을 대신한 셈이었다. 배우자나 자식 대신 반려동물을 선택한 경우도 적지 않은 현실이다. 우리나라에 ‘반려동물’이라는 용어가 매스컴에 등장하며 캠페인이 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 지금은 법령과 공문서에도 ‘애완’ 대신 ‘반려’라는 용어를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이란 뜻으로 반려동물(Companion Animal)이란 용어가 공식화된 것이 발단이었다. ‘애완동물’이라는 장난감이나 소유물의 느낌을 주는 일방적·수직적 관계에서, 가족이나 친구의 느낌을 주는 상호적·수평적 관계로 인식이 바뀐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반려동물 인구는 1500만을 넘는다고 한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현대사회 특유의 고독과 단절이라는 심리적 요인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현대인들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사회적 소외를 경험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파편화되었고, 경쟁 중심의 사회구조 속에서 인간관계는 언제든 손익계산에 의해 변하는 불안정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대안으로 부상한 것이 반려동물이다. 개나 고양이는 동거인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며, 사회적 처지가 어떻든 변함없는 신뢰와 애정을 보낸다. 인간에게서 받은 상처를 동물을 통해 치유하는 ‘동물 매개적 위안’은 이제 현대인에게 하나의 생존방식인 셈이다. 사람은 관계를 추구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 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반려로 삼는 것은 그만큼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할 우려가 없지 않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온갖 갈등과 어려움을 피해서 반려동물과의 유대에 집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수만은 없는 이유다. 타인과의 이성적(理性的) 교류와 갈등 극복을 통해 얻게 되는 사회성과 인간에 대한 통찰이 결핍될 때, 또 다른 고립과 소외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휴머노이드라는 AI로봇이 반려동물의 역할을 상당부분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또 어떤 양상으로 인간의 삶과 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 것은 왜일까.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6-04-05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날파리를 잡았다 손바닥에 날파리의 눈알이 느껴진다 작지만 단단한 세계가 거기 뭉쳐 있다 어떤 암흑은 방금 선사된 것이다 내가 잘 놀라는 이유를 알고 있다 언제부터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놀라지 않으면 불안하다 놀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놀랄 일을 걱정하느라 머리가 꽉 차지 않으면 텅 빈 머리로 나는 하루 종일 나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 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다 ―황성희,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 전문 (‘너에게 너를 돌려주는 이유’, 아침달)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한다.”라는 클레의 유명한 공식을 황성희 시인의 시에 대입해 보면 어떤가. 우리가 문학을 감각 기관을 통해 구분한다면 소설은 후각이고, 시는 시각이라는 상징적 정의는 이 문법을 가능하게 한다. 화자는 이 찰나의 살생을 통해 존재의 무게와 실존적 불안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화자는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한 존재인 날파리를 죽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생명의 단단함에 대해 감각하는 것이다. “손바닥에 날파리의 눈알이 느껴진다”라고 했을 때, 화자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의 ‘눈알’이라는 구체적인 감각에 집중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는 대상을 단순한 해충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가진 주체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기실 날파리의 몸집은 “작지만 단단한 세계가 거기 뭉쳐”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하나의 생명이 작동하기 위한 완벽한 세계가 들어있을 테니까. 시인은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느껴지는 저항감을 단단함으로 표현하며, 생명의 밀도를 경이롭고 서늘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떤 암흑은 방금 선사된 것이다”라고 했을 때, 암흑은 날파리의 죽음이고, 시력의 상실을 뜻한다. 내가 손바닥을 침으로써 그 생명에게 영원한 어둠을 선사했다는 표현은, 가해자로서의 자각과 생사가 교차하는 섬뜩한 순간일 테니까.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회화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라고 정의했다면, 시에서 화자가 손바닥으로 타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의 내재성을 사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부터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를 들었는지도”에서 감각은 대상이 없는 감각 그 자체이다. 피부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재현이 아니라 신체가 경험하는 방식으로 생성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시의 놀라운 반전은 “놀라지 않으면 불안하다” “놀랄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이라는 언술에 있다. 화자는 일상의 평온함보다 충격과 사건에 길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송출한다. 손바닥을 마주쳐 생명을 죽이는 소리가 박수이건 타격음이든 이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오히려 자극 없는 정적을 견디지 못한다는 역설을 품고 있는 대목이다. 놀랄 일이 없다는 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로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불안증을 묘파하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인의 눈이다. 누구보다 예민한 촉수를 지닌 시인이 손바닥을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의 손에 작고 단단한 두 개의 동그란 세계를 선물해주고 싶은 이유” /이희정 시인

2026-04-05

의료 AI의 현주소···진단 보조부터 신약 개발까지

지난 12주 동안 우리는 AI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함께 들여다봤다. 기계가 패턴을 학습하는 원리부터, 트랜스포머 구조, 환각 현상, RAG, 파인튜닝, 멀티모달, 오픈소스 전쟁, 그리고 벤치마크의 진실까지. 열두 개의 퍼즐 조각이 완성됐다. 사실, 조금은 어렵고 재미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지식을 들고 현장으로 가보고자 한다. 2분기의 주제는 ‘산업별 AI 혁신’이다. AI가 어떤 모습이고 어떻게 생각한다는 강의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의료진과 함께 진료 행위에 참여하고, 공장의 생산 라인에 일하고, 법정 공방 자료를 분석하고 있는 현장의 AI를 확인하러 갈 것이다. 그 첫 번째 현장은 의료다. AI가 가장 뜨겁게, 그리고 가장 조심스럽게 도입되고 있는 바로 그 공간이다. 의사 옆에 앉은 AI 병원에서 AI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곳은 영상의학과다. CT, MRI, X선 사진을 판독하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하루에 수백 장의 영상을 검토하는 전문의의 눈은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피로해진다. AI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국내 의료 AI 기업 루닛(Lunit)이 개발한 유방촬영 판독 보조 소프트웨어 ‘루닛 인사이트 MMG’는 국내 상급종합병원 47곳 중 약 60%에 해당하는 28곳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96~99%의 정확도로 유방암을 검출한다. 이 수치는 단순한 기술 자랑이 아니다. 유방암 검진 워크플로우에서 AI를 분류 도구로 도입했을 때 의료진 업무량을 약 69.5% 줄이면서도 진단 정확도는 약 30.5% 향상 시켰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의사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의사가 더 중요한 판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잡무를 덜어주는 구조다. 영상 AI의 활약은 유방암에 그치지 않는다. 폐암 조기 발견을 위한 흉부 X선 판독 AI는 이미 다수 병원에서 운영 중이며, 안저 사진으로 당뇨병성 망막병증을 스크리닝하는 AI는 안과 전문의가 없는 1차 의료기관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응급 상황에서 AI의 가치는 더욱 극명하다. 뇌졸중 AI 진단 보조 솔루션을 개발한 제이엘케이의 경우, 전문가들이 평균 45분이 넘게 걸린 판독을 AI는 평균 12분 4초 만에 처리했고, 예측 성률은 전문가 평균(50%)을 크게 앞선 72%를 기록했다. 뇌졸중은 1분 1초가 생사를 가르는 질환이다. 그 시간을 30분 이상 단축한다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생명이다. 서울대병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국내 의료법과 진료 가이드라인, 의료 언어 체계를 반영해 의료진이 직접 개발에 참여한 의료 특화 대형언어모델 ‘KMed.ai’는 2025년도 의사 국가고시 벤치마크 평가에서 평균 96.4점을 기록했다. 의사 국가고시를 거의 만점에 가깝게 통과하는 AI라니, 상상이 가는가. 물론 이 AI가 당장 진료실에 앉는 것은 아니다. 진료 기록 작성, 진단 보조, 의사결정 지원 같은 역할을 맡아 의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도구로서 단계적으로 현장에 투입될 예정이다. 손목 위의 심장 전문의도 등장했다. 메디컬에이아이와 삼성전자가 공동 개발한 기술은 스마트워치로 좌심실수축기능부전(심부전)을 조기 발견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식약처 인허가를 획득했다. 10초짜리 심전도 측정만으로 심부전 가능성을 감지한다. 이제 병원에 가지 않아도 매일 손목이 심장을 감시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노벨상을 받은 AI, 신약의 지도를 다시 그리다 진단만이 아니다. AI는 신약 개발의 판도 자체를 바꾸고 있다. 전통적인 신약 개발은 평균 10~15년 간의 시간과 3조 원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는 고난도 작업이었다. 수많은 후보 물질 중 실제 시판에 성공하는 것은 극소수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고 불러왔다. 이 구조를 뒤흔든 것이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다. 신약 개발의 핵심은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한다. 단백질이 어떤 모양으로 접히느냐에 따라 어떤 약이 그것과 결합해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문제는 이 구조를 실험으로 밝히는 데 수년이 걸렸다는 점이다. 25년 전에는 박사 과정 학생이 단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파악하는 데 5년이 걸렸다. 알파폴드는 아미노산 서열을 입력하면 그 구조를 즉시 알려준다. 알파폴드2는 현재까지 2억 4천만 개 이상의 단백질에 대한 구조 예측을 완성했으며, 이는 인간이 생성한 약 1만 8천 개의 단백질 구조 데이터베이스를 수백만 배 넘어선 규모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수십억 년이 걸렸을 작업을 AI가 해낸 것이다. 이 공로로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CEO와 존점퍼 연구원은 2024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는데, AI 연구자가 노벨 화학상을 받은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국내에서도 신테카바이오와 파로스아이바이오 등 AI 신약 개발 전문 스타트업들이 이 흐름에 합류했다. 이들은 AI로 발굴한 항암제와 희귀질환 치료제 후보 물질들을 임상 단계로 끌어올리고 있으며, 전통적인 신약 탐색 기간을 수년에서 수개월로 압축하는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 제약 바이오 기업들도 그 흐름에 올라타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AI 기반 데이터 레이크 구축과 디지털 트윈 기반 자동화 생산 환경을 추진 중이며, SK바이오팜은 AI를 활용해 차세대 신약 파이프라인을 준비하고 있다. AI 신약 개발이 더 이상 연구소 이야기가 아니라, 국내 대기업의 핵심 전략이 된 것이다. 조심해야 할 것들 - 기대와 현실 사이 그러나 의료 AI에는 냉정하게 직면해야 할 현실도 있다. 국내에서 400개가 넘는 AI 기반 의료기기가 시장에 출시됐지만, 성능이 아무리 높아도 의료진의 업무를 오히려 가중 시키면 상용화는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이 좋아도 현장에 녹아들지 못하면 그것은 반쪽짜리 혁신인 것이다. 신약 개발에서도 마찬가지다. AI 신약 개발은 후보 물질 발굴과 임상 1·2상에서 성공률을 높였지만, 최종 관문인 3상의 유효성과 안전성 평가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시각이 여전히 크다. AI가 설계한 약이 실제 환자에게 효과적이고 안전한지를 확인하는 긴 여정은 아직 진행 중이다. 데이터 편향 문제도 짚어야 한다. 특정 인종이나 성별에 편중된 의료 데이터로 훈련된 AI는 다른 집단의 환자에게 부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 민감한 환자 개인정보 보호와 사이버 보안 문제까지 더하면, 의료 AI가 넘어야 할 과제는 기술 너머의 영역까지 이어진다. 의료 AI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은 하나다. 현행 의료법상 AI는 의료 보조도구에 해당하며, 최종 진단 권한과 책임은 의사에게 있다. AI가 발견한 이상 징후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어야 한다. 속도와 정확도는 AI에게, 책임과 판단은 의사에게. 이 역할 분담이 흔들리는 순간, 의료 AI는 혁신이 아닌 위험이 된다. 지역 의료 현장을 생각해 보자. 전문의가 부족한 지방 중소 병원에서 AI 영상 판독 보조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서울 대형 병원 수준의 진단 보조가 가능해진다. 포항을 비롯한 경북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응급 의료 취약 지역 주민들의 골든 타임을 지켜줄 현실적 대안으로 AI 기반 원격 판독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다. 의료 격차를 좁히는 데 AI가 기여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시나리오인 것이다. 기술이 지방을 살리는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의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의사가 달라지는 것이다 AI 의사가 진료실에 앉는 날은 아직 멀었다. 그러나 AI가 영상을 먼저 보고, 위험 신호를 알리고, 신약 후보를 추려내는 작업을 하는 동안 의사는 더 깊은 곳에서 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의사의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전문성이 향할 곳이 달라지고 있다. 노벨상을 받은 AI가 신약의 지도를 그리고, 손목 위의 센서가 심장을 지키고, 새벽 응급실에서 AI가 뇌졸중 여부를 12분 만에 판별하는 세상. 그 세상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펼쳐지고 있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4-05

남은 건 장동혁 대표의 결단뿐이다

선출직 공직자가 선출된 지 1년쯤 지나면 대충 평가가 나온다.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는 말이 나올 때도 있다. 표를 던져 그 공직자를 선출한 사람이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다. 의원내각제 국가라면 그럴 때 곧바로 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선거할 수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해 8월 26일 선출됐다. 7개월이 조금 지났다. 대체로 6개월은 허니문 기간이라고 한다. 6개월간은 야당이 대통령 비판을 참는다. 업무를 파악하고, 자리에 걸맞은 의견을 결정하고, 그것을 추진할 진용을 구성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하고, 성과를 내는 것은 기다려야 한다. 국가는 아니지만, 장 대표는 하지 않는 게 문 제다. 장 대표를 향한 비판은 취임 초부터 매우 거세다. 국민의힘 안에서, 보수 진영 안에서 비판이 더 심하다. 그만큼 당의 존립이 걸린 문제다. 당의 혼란이 파산할 수준이다. 국민의힘 사정이 허니문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장 대표의 리더십이 이미 바닥을 보였다. 장 대표 측은 ‘내부 총질’이라고 비난한다. 민주당 정권의 횡포에 힘을 모아 맞서야 하지 않느냐고 핏대를 올린다. 비판하지 않으면 잘 굴러갈지, 문제가 없게 되는 건지 회의적이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잘못 끼운 단추를 고쳐 끼우지 않으면, 옷을 바로 입을 수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판 목소리에 귀를 막고, 내부 총질이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결과는 탄핵이었다. 장 대표도 꼭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윤 어게인’ 이다. 정치인은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 민심이라는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다. 바다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고, 파도를 거스르면 뒤집힌다. 윤 전 대 통령은 민심과 반대 방향으로 폭주했다. 국민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마이 웨이만 고집했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민심이 따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반대로 대중의 눈치만 보며 뒤를 따라가는 건 포퓰리즘이다. 윤 전 대통령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들었다. 극단적인 성향의 유튜버들이 가짜뉴스로 만든 가짜 세상에 살고 있다. 분별력을 잃었다. 정권이 무너지는 것도 몰랐다. 보수세력의 표로 대통령이 되 었지만, 보수세력을 무너뜨렸다. 정치인은 책임을 져야 한다. 민심을 외면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보수 세력을 붕괴시킨 데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 윤 전 대통령은 한 번도 마음을 담아 사과하지 않았다. 아직도 극단적 지지 세력을 선동해,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 장 대표는 다른가. 민심과 거꾸로 폭주하던 윤 전 대 통령을 흉내 낸다. 민심에 대한 공감은커녕, 관심도 없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 지지율은 67%, 부정 평가는 22%다. 민주당 지지율은 48%, 국민의힘은 18%다. 국민의힘 지지율이 서울은 13%, 경기도는 17%다. 선거가 두 달 뒤다. 어떻게 선거를 치를 건가. 대구·경북은 안전한가. 국민의힘 35%, 민주당 26%로, 이 지역만 겨우 앞섰다. 그런다고 무조건 표를 줄까. 보수세력마저 등을 돌리는 건 또다시 윤석열의 실패를 반복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다. 누가 이 지경을 만들었나. 윤 전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그렇지만 그는 흘러간 과거다. 이미 처벌받고 있다. 결국 장 대표 책임이다. 윤 전 대통령과의 절연하려는 의원들 목소리를 슬쩍 묵인했을 뿐, 장 대표가 직접, 제대로 반성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절윤’ 탓에 지지율이 떨어졌다며 분개했다고 한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게 공천 작업을 망쳐놓고, 법원 탓만 한다. 법원이 제동을 걸기 전에 민심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신뢰가 무너졌다. 민주당 정부의 실책, 지나친 독주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야당이 신뢰를 잃어 버리니, 무슨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실패했다. 장동혁 대표도 실패했다. 그래도 보수 정당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보수 정당이 없는 민주당 독주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이런 상태로는 선거 참패를 피할 수 없다. 굳이 결과를 봐 야 하나. 구차한 변명으로 연명할 건가. 이런 지경이 되도록 많이 왔다. 이제 멈춰야 한다. 장 대표가 결단할 때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4-05

81회 식목일

산림청은 올해를 ‘범국민 나무심기 원년’으로 정했다. 산림청은 범국민적 나무심기 식목일 행사를 지난 3월 제주에서부터 시작했으며 5월까지 정부 부처와 기업, 시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나무심기 캠페인를 벌인다. 나무심기를 통해 신규 탄소흡수원을 확충하고, 기후위기 대응과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이행을 실천하겠다는 것이 캠페인의 취지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년 전 우리나라 산림의 공익적 가치를 수량화해 발표한 적이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산림의 공익적 가치는 모두 259조원으로 평가됐다. 당시 국내 총생산의 13.3%에 해당한다. 기능별로는 온실가스 흡수 저장기능이 97조원, 산림경관 제공기능 32조원, 산림휴양 기능 28조원 등이다. 산림의 공익적 가치를 국민에게 돌아오는 혜택으로 환산하면 1인당 499만원에 이른다고 했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우리는 지구의 허파라 부른다. 전 세계 산소의 20%를 생산한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아마존 우림지대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함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늦추고, 기후변화를 완화해주는 특별한 역할에 우리가 더 주목을 해야 한다. 숲은 동식물의 서식지로 생물의 다양성을 제공할 뿐더러 생태계 균형을 유지시켜 준다. 물 순환과 토양 보존을 통해 수자원과 환경을 보호하는 등 지구와 인간 삶에 있어 유익한 필수 환경이다. 어쩌면 숲의 이런 기능이 인류에게 매일 건강한 하루를 제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식목일은 단순히 나무만 심는 날이 아니다. 심어진 나무를 아끼고 잘 가꾸어 보다 많은 건강한 숲을 조성해야 한다. 나무를 심는 것이야말로 지구와 인류를 위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4-02

촉법소년 연령 하향, 해답이 아니라 시작이다

중학생이던 아들이 초등학생인 여동생이 서랍 깊숙이 숨겨놓은 일기를 훔쳐보다가 걸렸다. 아들에게 “너 동생 일기 몰래 보면 안 돼. 비밀침해죄라는 게 있다”라는 변호사 엄마다운 잔소리를 하니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 “어차피 난 촉법소년이라 상관없어.” 요즘 아이들이 이렇다. ‘촉법소년 =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 것이다. 촉법소년의 촉(觸)은 ‘닿을 촉’이다. 촉법소년이란 법에 닿았으나 처벌되지 않는 소년을 의미한다. 형법 제9조는 촉법소년을 형사미성년자라고 하면서 14세가 되지 아니한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다. 하지만 14세 미만의 소년에 대해 아무런 처분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년법에 따라 범죄행위를 한 10세 이상 14세 미만인 아이들에겐 소년법상 보호처분을 내릴 수 있다. 소년법상 보호처분은 교육 수강 명령이나 사회봉사명령부터 소년원 송치까지 가능한 결코 가볍지 않은 처분이다. 결론적으로 14세 미만인 자가 범죄를 저지르면 어떤 처분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10세 이상이라면 소년보호처분을 통해 범법행위를 교정하고 교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만 10세 미만이라면 살인죄를 저질러도 형사처벌은 물론 어떠한 보호처분도 내릴 수 없다.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이 촉법소년 연령을 13세 미만으로 낮추는 방안을 지시한 이후 정부 주도로 촉법소년 연령 개정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14세 미만을 13세 미만으로 바꾸는 방안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금의 14세 미만 기준은 1953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마트폰과 AI, 인터넷을 사용하며 7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하고 있고, 정신적·육체적 성숙도 상당히 이루어진 지금의 청소년들을 70년 전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이제는 촉법소년 연령을 낮출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13세 이상은 모두 형사처벌하자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지금도 13세, 14세의 범죄는 대부분 소년보호처분으로 처리되고 있기 때문에 촉법소년 연령이 한 살 낮아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중학교 2, 3학년들도 “난 촉법이라 괜찮아”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요즘, 촉법소년 연령을 낮추는 것은 소년의 형사책임에 대한 국가의 태도와 사회 인식이 변화했다는 상징적 메시지가 될 것이다. 또한 가해자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기존 촉법소년 제도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므로, 소년범죄 피해자의 보호와 권리 회복을 더 고려하겠다는 사회적 선언이 될 수 있다. 촉법 연령을 낮추는 것을 해답으로 끝내선 안 된다. 연령 기준만 낮추고 소년범죄의 분석과 예방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13세 미만으로 조정된 촉법소년의 문제는 도돌이표일 것이다. 촉법소년 범죄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적절한 교육과 보호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국가적 인력과 인프라 확보에 힘써야 한다. 소년보호처분을 조금 더 세분화하고 개선해야 하며, 이미 존재하는 소년보호처분도 적극 활용해 아이들이 다시 범법의 경계에 가지 않도록 이끌어야 한다. 처벌의 문턱을 낮출수록, 그 보호의 책임은 더 무거워지는 법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4-02

노인의 앞날

행정복지센터에서의 일이다.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고성이 들렸다. 사연인즉, 노인 한 분이 대중교통비 환급 문제로 직원과 대화를 나누다, 옆에서 기다리던 청년과 시비가 붙었나 보다. 어르신이 너무 큰 소리로 외쳐서 듣고 있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은 자신의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목소리가 커진 것일 뿐, 화를 낸 건 아니라고 외쳤지만, 좀처럼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 곁에 있던 주변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씩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다음 주 어느 날이었다.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위해 면허시험장에 방문했는데, 맨 끝 창구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또 뭐지 싶어서 가봤더니 이번엔 노부부가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어떤 어르신이 운전면허증 재발급에 필요한 사진을 너무 옛것으로 가져온 탓이었다. 규정상 6개월 이내의 사진이 필요했다. 담당 직원은 최근 사진으로 다시 가져오시라 안내했고, 어르신은 이것도 분명 내 사진이니 그냥 처리해달라는 실랑이가 오고 갔다. 사실 현장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했다. 하지만 어르신은 자신과 같은 노인에게 신분증 사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면서, 이발도 못한 이런 행색으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난감해하는 담당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나도 힘들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직원 여럿이 노인 분을 안쪽 어딘가로 안내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그곳을 서둘러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항의하던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한 셈이었다. 한 분은 귀가 안 들렸을 뿐이고, 다른 한 분은 행정에 관한 시비였지만 대단히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규정과 방침을 지키지 않거나 못한 어르신의 항의를 묵살하기 어려운 ‘노인의 사정’이라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저 어르신들은 마치 선량한 직원을 괴롭히고 시민들에 불편을 끼친 훼방꾼처럼 취급됐다. 문득 세월이 흐른다는 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늙는다는 건 우선 후천적 장애를 겪게 된다는 것 같다. 들리던 게 안 들리고, 보이던 게 안 보이거나 거동이 힘들어지는 것으로, 즉 몸의 불편으로 우선 감지되는 것 아니겠나. 또한 늙는다는 건 행정이나 키오스크와 같은 사회 시스템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 같다. 아마 노인들을 위한 행정 서비스조차 어르신들은 절차를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노인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일상 상당 부분을 의탁해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 의존한다. 나만 해도 부모덕에 공부했고, 지금은 아내 덕에 직장을 다닌다. 인간이란 본래 취약한 존재이다. 그 취약함은 단순한 약점이 아니라 불가피한 상호 의존과 돌봄의 조건이 된다. 관계가 존재론의 최소 단위이다. 인간이란 나 홀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살만큼 살았다고 오인되는, 마치 세상의 짐처럼 여겨지는 노인들의 앞날에도 사회의 많은 관심이 모아져야겠다. 노인의 모습이야말로 모두의 근미래일테니 말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6-04-02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팔과 다리에 쥐가 자주 나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해결책이 영양제다. 약국에서 권하는 마그네슘 제제를 사서 복용하는 일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됐다. 실제로 마그네슘은 근육 경련 완화에 도움이 되는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선택이 정확한 진단과 상관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몸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은 채 “좋다더라”라는 말만 믿고 약을 먹는 습관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상화된 모습이다. 최근 주변을 둘러보면 약을 챙겨 먹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비타민은 기본이고 각종 건강기능식품, 심지어 특정 질환을 예방하거나 기능을 강화한다는 약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실제로 보건복지부의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약 90%가 3개월 이상 처방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심혈관 질환 등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질환을 생각하면 약물 복용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약을 ‘필요해서’ 먹는 것과 ‘막연한 기대’로 먹는 것 사이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우려스러운 현상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건강 정보가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병원 치료보다 자연 요법이나 약초를 더 신뢰하며 검증되지 않은 방법에 의존하기도 한다. 중병을 앓다가 산속에서 약초를 먹고 완치됐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반복됐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대부분 개인의 경험담일 뿐 의학적 근거로 보기 어렵다. 현대 의학이 축적해 온 치료 방법과 약물의 역할을 무시한 채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기대는 것은 오히려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의 기능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젊을 때 아무리 강인했던 신체라도 세월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병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환상보다는 증상을 관리하고 삶의 질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진단과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의사의 처방에 따른 약물 복용과 정기적인 검사, 생활 습관 관리가 기본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정작 필요한 관리보다 편의와 습관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건강검진이나 진료는 미루면서 영양제나 건강식품에는 쉽게 손이 간다. 또래 친구들과 모여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는 약부터 찾는 모습 역시 낯설지 않다. 몸은 분명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지금, 약과 건강에 대한 태도 역시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 약은 분명 많은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정확한 이해 없이 남용되거나 근거 없는 정보에 흔들린다면 약은 치료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이 될 수 있다. 결국 건강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순하다. 자기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다. 약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 역시 이제는 경험담이 아니라 근거와 책임 위에서 다시 정리되어야 할 때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방송에서 한때 글루타치온이 유행이더니 요즘은 ‘알부민’이 뜬다. /노병철 수필가

2026-04-02

천주교 순례성지 괴산 연풍순교성지와 수옥폭포

과하지 않을 정도의 서늘함은 어떤 것일까. 장식처럼 보이는 돌 하나에도 그렇게 많은 슬픔과 비애, 역사적 기록과 사연들이 존재함이란 그리 쉽지 않다. 연일 부딪치는 이기에 찬 과욕과 욕심에, 잠시라도 편할 날이 없는 일상이 자리하는 요즘이고 보면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행지는 과연 어딜까. 그 해답에 근접하는 장소 하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눈물의 여왕’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시청률을 담보로 대중에게 각인된 드라마 중 하나로, 바로 충북 괴산군 연풍면에 자리한 “연풍순교성지”도 그중 하나의 촬영지였다.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면, 우리나라 천주교 박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아픈 역사를 떠올리는 영성의 장소기도 하다. 그곳의 경관 속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세파에 찌들어 몸속에 내재던 숱한 원망과 미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버리게 된다. 연풍순교성지에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고 싶을 때, 아이와 함께 역사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 좋은 곳을 찾는다면 이곳은 그 해답이 될 수도 있다. 그저 드넓은 잔디밭과 소나무와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순교지 둘레길을 느긋하게 자연스럽게 걸으면 될 듯하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역사와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힐링 여행지는 바로 이곳이구나 하고 저절로 실감하게 된다는 의미다. 연풍성지의 공간 구성은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이다. 첫인상을 있는 그대로 피력하자면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구성으로 꾸며진 거대한 유럽풍의 정원 같다고나 할까. 찾아든 방문객들을 자연스럽게 순교의 성지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장점이 있다. 처음 연풍성지에 들어서면 드넓은 마당과 정제된 듯한 정갈한 풍경들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연풍순교성지 안내도’에는 연풍대성당과 순교터를 지나 십자가의 길과 형구틀을 차례로 지난 다음, 향청이 있는 옛 공소를 돌아보는 8자 동선이 추천되어 있다. 적벽색의 벽돌로 이뤄진 대성당은 딱 봐도 이국적이다. 거기에 가미된 엄숙함과 주변의 정갈함이 기품으로 승화가 되는 아름다움이 그대로 발산된다. 성당 뒤로 펼쳐지는 백두대간의 조령산(1026m)과 백화산(1063.5m)이 그려내는 굽이치는 능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거대한 산수화 병풍 하나를 만들어 낸다. 옛 연풍향청의 건물과 높이 9.5m의 십자가상, 우리나라 최초의 대주교 노기남 바오로의 입상과 루카 황석두의 묘소를 차례로 돌아볼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형구돌’이다. 일명 ‘형구틀’이라고도 불리는 반석 같은 커다란 돌이다. 조선시대 가톨릭 신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고안된 사형 도구로, 돌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져 있다.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에 세운 후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 구멍에서 이를 잡아당겨 죽이는 잔혹한 교수형 형구였다. 조선 정조 15년(1791) 신해교난 이후 연풍 땅에 은거하여 신앙을 지켜가던 교인 추순옥, 이윤일, 김병숙, 김말당, 김마루 등이 순조 1년(1801) 신유교난 때 이곳 연풍성지에서 처형당했다. 그래서 이곳을 발굴하고 정리 작업을 하던 중 박해 때 이들을 죽이는 도구로 사용된 형구돌 3개가 발견이 되었던 것이다. 1963년 천주교회가 연풍공소의 예배소로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의 향청 건물을 사들였는데, 그 전에 헌병주재소, 경찰서 등으로도 사용된 건물이었다. 1968년 한국천주교 103 성인에 속한 황석두의 고향도 이곳 연풍으로 드러나면서, 지금의 연풍순교성지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된 계기였다. 한국천주교 103 성인의 한 사람인 루까 황석두는 순조 13년(1813) 연풍현 병방골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일생을 종교에 헌신하다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회장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한 인물이다. 성지의 왼쪽에는 순교현양비가 세워져 있으며, 그 앞에는 지금 형구돌을 유물로 전시해 그 의미를 더한다. 천주교 박해에 관련된 배경 설명, 연풍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안내는 연풍성지의 이해를 돕고, 짧은 방문에도 의미 있는 탐방의 목적을 배가시킨다. 단체 순례뿐 아니라 혼자 찾는 방문객에게도 부담 없는 동선과 휴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조용히 머물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요즘의 트렌드인 빠르게 소비되는 관광지와 달리, 이곳은 오래도록 천천히 걷고 멈추며 생각하게 만드는 공간이라고나 할까. 계절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봄과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지고 연분홍 영산홍과 철쭉들이 피어나 생동감을 듬뿍 선사해, 지금 계절에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장소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연풍성지는 일상의 소음을 내려놓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충분한 여백을 제공한다. 역사적 의미와 정서적 울림을 동시에 지닌 천주교 순례지라, 순례자에게는 신앙의 뿌리를, 여행자에게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선물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성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떠하듯 오래도록 잔잔한 여운의 기품으로 남아 있을 곳이다. 예로부터 괴산은 수려한 자연과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연풍성지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는 수옥폭포가 있다. 연풍순교성지와 연계할 수 있는 가장 추천할 만한 수려한 자연 그대로의 경관지로, 조령 제3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이루어진 폭포다. 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졌는데, 고려 말기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하여 초가를 지어 행궁을 삼고, 조그만 절을 지어 불자를 삼아 폭포 아래 작은 정자를 지어 비통함을 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 벚꽃이 만개할 때 이곳을 방문한다면 산책길은 환상적인 꽃길이 될 것이다. 연풍순교성지의 위치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홍문2길 14이다. 관람 시간은 오전 9시 30~오후5시 30분으로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 수옥폭포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다. 참고 하기 바란다. /지홍석 수필가·여행 칼럼니스트

2026-04-02

폭등하는 유류할증료

항공사와 해운사가 유가가 오를 때 이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비행기와 선박 운임에 부과하는 걸 유류할증료라 부른다. 유류할증료는 싱가포르 현물시장의 2개월치 항공유 평균가격에 따라 바뀐다. 단계별 조정액이 있다. 짐작하다시피 유가가 오르면 할증액도 상승한다. 반대로 기름값이 내리면 인하되는 방식. 미국·이스라엘의 침공과 폭격에 대항해 이란이 중동산 원유를 실은 배가 오가는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국제 유가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앞으로는 더 오를 것이란 어두운 전망도 나온다. 덩달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려는 이들이 지불해야 할 유류할증료도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항공권 가격의 10~20% 정도를 차지하는 유류할증료가 부담스러운 수준이 되고 있는 상황. 최근 항공업계는 오는 5월 국제선 유류할증료가 현행 최고 수준인 33단계로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4월 유류할증료보다 15단계가 높아지는 것이다. 재론할 것 없이 폭등이다. 대한항공은 4월부터 중국과 일본 지역의 유류할증료를 2만1000원에서 5만7000원으로 올린다. 미국 서부와 파리 등 유럽은 7만9500원에서 27만6000원으로 인상된다. 운행거리가 긴 미국 동부 도시의 경우엔 9만9000원이던 유류할증료가 30만3000원으로 조정됐다. 지난달보다 최소 2배에서 3배가 오른 가격이다. 유류비는 항공기 운영비의 30%를 차지한다. 높은 유가가 지속되면 항공사 경영에도 빨간불이 켜질 게 명약관화다. 전쟁으로 인해 높아진 기름값이 여행자와 항공사를 동시에 위협 중이다. 갖가지 곤혹스러움과 어려움을 부르는 전쟁의 끝이 아직 보이지 않으니 더 큰 문제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01

공약은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내놓는 가장 중요한 ESG 보고서

최근 중동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권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시선이 6·3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 쏠려 있다. 전국민적 관심사인 지방선거 이슈를 ESG(환경·사회·거버넌스)의 시각에서 분석해 보면, 이번 공천 정국은 단순한 후보 선출을 넘어 ‘정치적 ESG 거버넌스’가 시험대에 오른 매우 중요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 공천과 공약을 ESG 프레임으로 분석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환경(Environment)의 관점에서 기후 위기 대응이‘표’가 되는 선거이다. 이제 지방자치단체장은 행정가를 넘어 지역의 ESG 경영자(CEO)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기후 위기 대응 능력이 결여된 후보는 지역의 미래 경쟁력을 훼손하는‘리스크’가 될 수 있다. 두 번째, 사회(Social)의 관점에서 정당의 후보자 공천과정의 ‘사회적 책임’과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성·청년 할당제 준수 여부와 전과 및 도덕성 검증이 형식적 기준 준수가 아닌 논란이 되는 부적격 후보는 기업의 공급망 실사처럼 엄격하게 배제해야 한다. 세 번째, 거버넌스(Governance)의 관점에서 “밀실 공천인가, 데이터 기반의 투명 공천인가”가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 기업이 사외이사를 선임할 때 투명한 절차를 거치듯, 정당 또한 공천 기준(KPI)을 사전에 공개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적 거버넌스’ 확립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묻지마 투표’를 방지하기 위한 정당의 공시 의무가 중요하다. 이 같은 관점에서 포항시장 후보자 공천을 분석해 보면, 최근 국민의힘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사전 유출 의혹’이나 ‘대리전 논란’은 전형적인 거버넌스 리스크이다. 포항은 인구 50만 이상의 특례시로서 중앙당이 직접 공천을 관리하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절차적 정당성’이 중요하다.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이 지역구 국회의원과의 관계(Internal Governance)에 의존하는지, 아니면 시민이라는 주주(Shareholder)의 목소리에 집중하는지를 매섭게 지켜보고 있다. 국민의힘은 이번 공천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 포항의 신뢰 자본 훼손이라는 상당한 거버넌스 리스크를 발생시켰다. 포항의 대전환을 이끌 동력은 결국 거버넌스(Governance)에서 나온다. 관료적 타성에 젖은 행정으로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 개별 후보자 공약을 통해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시정이 얼마나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될 것인가를 살펴보면, 안승대 후보는 30년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한 ‘리스크 관리형 거버넌스’를, 문충운 후보는 시장 직속 혁신 기구를 통한‘데이터 기반 디지털 거버넌스’를 강조한다. 박용선 후보는 경북도의회 부의장 출신의 소통력을 바탕으로 한‘협치 거버넌스’를, 박대기 후보는 공천 과정부터 강조해 온‘도덕적 청렴 거버넌스’를 강조하며, 박희정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오랜 시의원 경험을 바탕으로 ‘투명한 행정 절차’를 전면에 내세운‘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제시한다. ESG의 ‘S’관점에서 후보들 모두 경제 활성화를 외치고 있지만‘포용적 성장’이 핵심으로 읽힌다. 박대기 후보의 ‘영일만회의’같은 시민 참여 플랫폼이나, 문충운·안승대·박용선 후보가 제시하는 각기 다른 지역 발전 모델들이 과연 포항의 고질적인 남·북구 간 격차를 해소하고, 청년들이 머물고 싶은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무엇보다 인구 감소와 남·북구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가치 창출 역량이 중요해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국민의힘 후보자들 공약에선 ESG가 요구하는 사회적 가치가 보이지 않지만, 민주당 박희정 후보의 가세로 ‘S’ 분야의 논의가 ‘인프라 구축’에서‘사람과 안전’으로 확장되고 있다. 철강산업의 위기가 노동자의 숙련도 저하나 일자리 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에 방점을 둔 것으로 근본적인 노동·안전 중심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다. 포항에 있어 ESG의 ‘E’는 선택이 아닌 생존이다. 탄소국경세(CBAM) 등 글로벌 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산업의 수소환원제철 전환과 이차전지·SMR(소형모듈원전) 등 신산업 밸류체인을 누가 더 전문성 있게 이끌어갈 수 있는가가 최우선 검증 대상이다. 특히 박대기 후보가 언급한 SMR 소부장 허브 조성과 문충운 후보의 이차전지 글로벌 데이터 플랫폼과 수소환원제철 전환 인프라 구축의 구체적인 기후 기술(Climate Tech) 공약은 포항의 미래 먹거리와 직결되므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박용선 후보는‘시민 체감형 녹색 복지’를 내세우며 기존 ‘포항 그린웨이’를 고도화하고 산단 주변에 대규모 녹지벨트를 조성하는 ‘그린시티 포항’을 강조한다. 기업 규제 대응보다는 시민의 삶의 질과 직결된 환경 개선에 방점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이에 반해 안승대 후보는 산업 유치와 도시재생 과정에서의 환경 정비 수준으로 접근하고 있어, 구체적인 탄소중립 로드맵 보강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박희정 후보는 기존 후보들이 산업 경쟁력 강화 차원에서 탄소중립을 언급한데 비해, ‘국가적 과제와 지역 생존의 결합’으로 정의한다. 포스코의 수소환원제철을 단순한 공법 변경이 아닌 ‘산업 전환의 모범 사례’로 만들겠다는 ESG 전략으로 분석된다. 포항은 지금 ‘세계적 철강 도시‘라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ESG 선도 도시‘라는 새로운 미래로 도약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이번 포항시장 후보의 공약은 각기 다른 색채를 띠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포항의 지속가능성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야 한다. 이제 포항 시민들은 질문해야 한다. “누가 포스코의 용광로를 가장 친환경적으로 바꾸면서도(E),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을 지키고(S), 그 과정의 이익을 시민들에게 가장 투명하게 돌려줄 것인가(G)?” 이 질문에 답하는 후보가 포항의 100년 미래를 책임질 ’ESG 경영 시장‘이 될 것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

2026-04-01

청렴하지 않은 공직자는 도둑이다

선거철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이 쏟아진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 도시를 바꾸겠다는 비전, 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런데, 유권자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이 사람은 청렴한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의 삶을 책임진 자가 청렴하지 않으면, 그는 곧 백성의 도둑이다(牧民之官 不廉 卽民之盜).‘ 문장은 도덕적 훈계를 넘어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사사로이 사용하면, 그는 ’나쁜 사람‘을 넘어 ’도둑‘이라 경고한 것이다.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세금은 시민이 땀흘려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오고 정책과 행정은 시민의 삶을 바꾼다.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비리나 일탈일 뿐 아니라 시민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청렴을 미덕 정도가 아니라 공직의 존재 조건으로 본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 오래된 경고를 다시 떠올린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가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것은 아니라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공직을 맡겠다는 사람이 공식적으로 혐의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과연 공동체의 신뢰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공직은 생계를 직업에 머물지 않는다. 유권자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권한이며, 그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평가를 전제로 한다. 공직자의 청렴은 ‘선택적 미덕’이 아니라 ‘필수적 조건’이다. 좌와 우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권력을 다루는 최소한의 기준이어야 한다. 지방자치의 영역에서는 도덕기준이 한층 더 엄격해야 한다. 중앙권력과 달리, 지방의 권력은 시민일상의 구체적인 영역에 직접 닿아있다. 각종 인허가, 개발필요와 예산배분 등 시민의 하루하루와 맞닿은 결정들이 지역 권력자의 손을 거친다. 집행과정에서 청렴성에 대한 의심이 개입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흔들린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을 혼동한다는 데 있다. 법원은 법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가린다. 그러나 유권자는 그보다 더 넓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공직을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방 선거는 선택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기준을 선언하는 행위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맡길 것인가, 어느 정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할 것인가를 투표를 통해 드러낸다. 의혹이 제기된 상태에서도 문제의식 없이 공직을 맡긴다면, 공동체 스스로 기준을 낮추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다산의 경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공직자가 청렴하지 않다면, 그는 단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극심한 손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도둑’인 것이다. 공적권한을 사적으로 훼손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시민의 이익을 훔친다. 선거의 계절에 다시 묻는다. 누구에게 이 도시의 내일을 맡겨야 하나. 그 질문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결국 하나다. ‘그는 청렴한가'.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01

퀄리아를 배우다

‘퀄리아’라니, 무슨 꽃 이름 같기도 하고, 나무 이름 같기도 한 이 이름의 정체는 바로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같은 것을 보고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느낌을 갖거나 심지어 엉뚱한 다른 물건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은 이 ‘퀄리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퀄리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읽은 뇌과학 교양서, ‘인간을 읽어내는 뇌과학’이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는 뇌과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만한 주제를 골고루 설명하고 있다. 퀄리아도 그 중 하나다. 정신이나 의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현대 뇌과학 분야에서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자르려야 자를 수 없는 ‘퀄리아’에 대한 연구 성과가 꽤 쌓여있다고 한다. 퀄리아 자체는 관찰할 수 없지만 그 사람의 행동만으로도 그 존재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세상과 접촉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을 갖는 모든 것이 퀄리아를 형성한다. 색깔은 물질의 속성이 아니라 뇌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주관적 느낌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같은 빨간 사과를 보지만 빨강은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하고 사과의 맛 역시 사람마다 다르게 인식한다. 퀄리아는 감각마다 존재하는데, 시각 퀄리아, 후각 퀄리아, 청각 퀄리아, 미각 퀄리아, 촉각 퀄리아 등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실체가 아니라 나의 주관이 만들어낸 환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퀄리아를 없애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퀄리아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잘 감각하기 위해 좀 더 느리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부 전공은 심리학이니 빼고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대학원 진학부터 따지면 인문학에 종사한 지 40년이 지났다. 한 번도 휴학한 적 없고 다른 일에 전업으로 종사한 적이 없으니 아무리 게을렀다고 해도 이만하면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고전 평론가가 6, 70대에 들어서서 공허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 공부로 지혜와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던 일이 생각난다. 예를 들어 ‘논어’를 읽을 때는 유학이 세상 최고이고, ‘도덕경’을 읽을 때는 도가 사상이 최선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중인격적인 혼란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런 지식이 그 사람의 허무를 어떻게 극복하게 해줄까 하는 의문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감각하는 모든 것, 모든 느낌과 생각이 퀄리아라는 주관적 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라니, 그렇다면 고통이나 통증 역시 퀄리아일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객관적 실체가 아니게 된다. 그것을 알면 인생의 짐이 가벼워지고 세상의 갈등이 줄어들 것이다. 이런 퀄리아 이야기를 듣자노라니, 삶의 공허를 조금이라도 넘어서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문제의 답까지 얻은 기분이 든다. 그것도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덤으로 말이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4-01

살이 찐게 아니고 붓는 것입니다

체중이 늘었다고 해서 모두 살이 찐 것은 아니다. 진료실에서 “요즘 살이 갑자기 쪘다”고 말하는 환자들 중 일부는 살이 찐 게 아니라 부종인 경우가 많다. 특히 몇 주 사이 2~3kg 이상 급격히 체중이 늘었거나 아침·저녁 몸무게와 부기 차이가 크다면 단순 비만이 아닌 순환 장애로 인한 부종을 의심해야 한다. 지방·근육은 단기간에 증가하기 어렵지만, 체액 정체는 순환이 무너지면 빠르게 몸에 쌓여 체중 변화가 두드러진다. 부종이 의심되는 경우, 손으로 정강이 아랫부분을 눌렀을 때 피부가 천천히 돌아오거나 양말 자국이 오래 남으며, 체중 증가에도 몸이 단단해지기보다 무겁고 퍼지는 느낌이 든다. 또한 기상 시 부기가 심해지고, 피로감과 함께 비 오는 날 몸이 더욱 무거워지며, 얼굴 윤곽(눈두덩이, 턱선)이 흐릿해지는 증상이 동반된다. 식사량 변화가 없는데 체중이 늘었다면 순환 문제 가능성이 높다. 부종은 단순히 물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분이 제대로 이동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정체되면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는 혈액순환과 림프순환 그리고 자율신경의 조절이 관여한다. 스트레스, 수면 부족, 불규칙한 식단등이 종합되어 지속되면 자율신경 균형이 깨지고 혈관의 수축과 이완 조절이 둔해진다. 여기에 운동 부족이나 근육량 감소가 겹치면 혈액을 심장으로 밀어 올리는 펌프 기능도 떨어지면서 체액 정체가 더 심해진다. 그 결과 체액이 말초에 머물고 잘 빠지지 않으면서 붓기가 반복된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단순한 외형 변화에서 끝나지 않는다. 순환이 떨어지면 근육과 관절에 피로가 쌓이고 목과 어깨 통증이나 허리 불편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두통, 어지럼, 소화불량, 수족냉증과 피로 같은 전신 증상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검사상 큰 이상이 없는데도 몸이 계속 무겁고 피곤하다면 순환과 자율신경 문제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해결 역시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효과가 떨어진다. 식사를 줄이거나 운동만 늘리면 일시적으로 체중은 줄 수 있지만 순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시 붓고 다시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과도한 다이어트는 근육량을 감소시켜 오히려 순환을 더 떨어뜨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몸이 스스로 순환을 회복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치료는 막힌 순환을 풀고 자율신경 균형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약을 통해 전신적인 순환 기능을 보강하고 정체된 수분이 빠져나갈 수 있는 창출이나 방기 마황과 같은 약제를 이용해 수분의 배출을 도와준다. 부분적인 부종이면 순환이 저하된 부위를 정확히 찾아 침과 약침 등으로 치료를 할 수 있다. 순환이 회복되면 붓기가 빠지면서 몸이 가벼워지는 변화를 비교적 빠르게 느낄 수 있다. 몸이 자주 붓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단순히 살이 쪘다고 단정짓기 보다 현재의 순환 상태를 점검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붓기는 몸의 흐름이 막혀 있다는 신호다. 이 흐름이 회복되면 체중 변화와 상관없이 몸은 훨씬 가볍고 편안해진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4-01

봄을 깨우는 물소리

3월의 숨결을 온전히 느끼는 날이었다. 햇살이 머무는 자리는 따뜻하고 바람이 스치는 자리는 아직 겨울의 서늘함을 놓지 않았다. 계절은 그렇게 두 겹의 온도로 흔들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꽃소식이 날아들었다. 상춘객도 많겠지만 나는 물소리를 찾아 계곡으로 향했다. 내연산 품에 안겨 있는 계곡 주변 너럭바위에 걸터앉았다. 돌에 닿는 물소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겨울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듯 차가운 물인데도, 물소리에는 분명 초록 봄을 부르는 싱그러움이 담겨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산 아래 개울로 내려갔었다. 산 중턱에 자리 잡았던 외가를 조금 벗어나면 오솔길이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가만가만 내려가면 물소리가 나를 따라왔다. 그때 산골짜기를 흘러내렸던 물은 지금보다 훨씬 크게 들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어렸기에 물소리가 엄청 크게 다가왔던 것이리라. 물줄기가 바위를 두드리며 내는 소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 조금씩 다른 높이와 깊이로 울리며, 서로 다른 음을 겹쳐 하나의 긴 노래를 만들고 있었다. 노래는 산 위에서 시작되어 마을로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소리에 집중했다. 온몸의 세포를 활짝 열었다. 겨울 동안 닫혀 있던 내 몸의 무딘 감각들이 깨어날 수 있도록 귀로만 듣기보다 온몸에 스며들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랬더니 바위에 닿은 물방울이 튀어 올라 손등에 떨어질 때마다, 정말로 굳어 있던 감각들이 하나씩 풀려나는 것 같았다. 물은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서서히 따뜻해졌다. 내연산 바람이 갑자기 불어왔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바람 속에는 분명히 다른 숨결이 섞여 있었다. 겨울의 바람이 직선으로 지나간다면 봄의 바람은 어딘가 부드럽게 굽어 흐르는 느낌이었다.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부딪히자 또 다른 소리가 만들어졌다. 물소리 위에 얹히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 자연은 그렇게 여러 겹의 화음으로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길에는 아직 잎이 나지 않은 나무가 서 있었다. 앙상한 가지는 마치 겨울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손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더니 나뭇가지 끝에는 분명히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주 여린 빛깔의 싹이 보였다. 나의 눈을 가까이 가져가야만 겨우 보일 만큼 미세하게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도 벌써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나는 손끝을 물에 살짝 담가 보았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곧바로 차가움이 익숙해졌기에 두 손을 물에 담갔다. 내가 흐름을 방해해도 물 은 계속 흐르고 흘렀다. 그 흐름 속에는 멈춤이 없었다.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결국은 봄에 의해 흘러가 버리듯이 사람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에게만 유독 얼어붙어 있다고 믿었던 고통의 순간이나 멈춘 것처럼 느껴지던 시련의 순간도, 사실은 아주 느리게 흘러서 나를 비켜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봄을 깨우는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비로소 알아차렸다.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깨어나는 것이라고. /정미영 수필가

2026-04-01

삶을 꾸리는 계획

나는 원래 계획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획을 세우는 행위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계획 싫어주의자’였다. 계획이라는 건 왠지 모르게 완벽해야 할 것 같았고, 괜히 하나하나 다 따져야 할 것 같았다. 여행 계획이라면 오랜 시간을 들여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완벽한 동선을 짜고, 혹시 모를 변수까지 고려해야 하는 난해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생각해야 한다면 차라리 아무 계획 없이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늘 마음 가는 대로 즉흥적으로 살았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움직이고, 하고 싶은 것을 그때그때 선택하며 우연과 운명에 기대는 방식. 그게 더 자유로운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됐다. 준비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사소한 손해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며 후회가 짙게 남았다. 특히 여행에서 그 차이는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막상 도착해서야 알게 되는 정보들이나 이미 지나쳐버린 기회들, 미리 알았더라면 훨씬 더 즐길 수 있었을 순간들 등. “아, 여기 이거 꼭 해볼 걸.”,“왜 이걸 미리 안 찾아봤지?” 같은 후회가 반복됐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자 점점 ‘조금만 미리 준비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행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거나 대비를 하지 않아서 생기는 손해 보는 일들이 늘어날수록 아쉬움은 커져만 갔고, 그 이후로 아주 작은 것부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거창하거나 완벽한 계획이라기보단 하루에 해야 할 일 몇 가지를 적어보며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해야 할 목록을 작게 하나씩 적어가다 보니, 성취의 보람을 느끼기 시작했고 점점 내게 잘 맞는 기록 방식과 계획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면 대비된 상태가 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덜 흔들리고, 시간의 흐름에 끌려가기보다 내가 시간을 주도하여 끌고 간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내가 계획한 일을 실제로 해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이었다. 그 성취감은 단순히 할 일을 끝냈다는 정도의 기분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제대로 사용했다는 만족감에 가까웠다. 그렇게 내게 시간을 기록하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지금은 하루를 계획하고, 일주일을 정리하고, 한 달의 흐름을 미리 그려본다. 시간을 나눠서 바라보기 시작하니, 이전에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거대한 시간이라는 대상이 점점 구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가 쌓여 일주일이 되고, 일주일이 모여 한 달이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한 달이 결국 나의 1년이 된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1년이라는 시간마저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조율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면서 맞이한 또 다른 변화는 쉬는 법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소파에 무기력하게 누워 시간을 보내는 것을 휴식이라 여겼지만, 어떻게 잘 쉬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늘 남았다. 이제는 쉬는 날이면 밀린 집안일을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평일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계획해 시간을 보낸다. 새로운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리거나, 보드게임을 하거나, 밀린 콘텐츠를 보고, 가볍게 운동을 하는 식으로. 이렇게 시간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휴식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시간의 흐름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일정을 기획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행위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어렵고, 때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날도 있다. 계획을 세우다보니 알게 된 새로운 점은, 계획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얼만큼 알아보고 준비를 하고 대비를 세우던, 완벽한 계획은 없다. 중요한 건 계획의 완성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그러니 어쩌면 계획이라는 건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 시간을 내가 선택한다”는 아주 기본적인 마음가짐. 그 하나만으로도 삶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윤여진(시인)

2026-04-01

빈티지

구제 가죽 재킷을 입고 나타난 내게 친구는 말했다. “새 옷 좀 사. 소매가 다 뜯어졌잖아.” 나는 그게 바로 멋이라고 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일렉 기타에 레릭(오래 사용되어 수십 년 연주한 것처럼 일부러 낡은 외관을 만드는 것)이란 걸 만들기도 해. 그게 그냥 깨끗한 상태의 기타보다 비싸.” 얼굴에 불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어 인터넷에서 검색한 다음 이미지와 가격을 보여주었다. 친구가 연신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얘기했다. “그게 멋이야.” 이렇게 보면 내가 굉장히 힙하게 입고 다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멋이라는 걸 정말 모른다. 누가 쓰던 것을 가져와 다시 쓰는 일을 딱히 선호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남들보다도 유별나게 좋아하지 않았다. 그 흔한 중고 거래를 가볍게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나의 스마트폰에는 당근 앱 같은 것이 깔려 있지 않다. 그러나 그런 면이 옷에 있어서는 제법 관대해졌다. 몇 년 전에 승용, 혜경, 다영이라는 친구들과 부산으로 여행을 다녀온 다음부터였다. 지금도 패션에 조예가 얕다 못해 습자지 수준이지만 부산 여행 전에는 더 심했다. 검은 티셔츠, 검은 바지, 검거나 흰 신발. 주위에서 다들 ‘흑백영화냐’며 핀잔을 줘도 나는 꿋꿋했다. 심지어 겨울이 오면 모자, 목도리, 패딩까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꽁꽁 싸맸다. 교실 앞문을 열며 담임 선생님이 툭툭 내뱉던 어둠의 자식이 바로 나였다. 다만 조금 기준이 있는 어둠의 자식이었다. 회색에 가까운 것이 아는 완연한 검은색이어야 함. 새 옷이어야 함. 그림이 프린팅되어 있거나 로고가 전면에 크게 새겨져 있으면 안 됨. 특별한 무늬가 없는 깔끔한 블랙이어야 함. 티셔츠든 바지든 펑퍼짐하면 안 됨. 그런 나를 여행 메이트들이, 특히 승용은 용납하지 못했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가 갈 곳이 있다고 했다. 국제시장의 한 구제샵이었다. 간판도 세월을 피해 가지 못한 듯 보이는 그 가게에 승용과 혜경은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사장님이 코디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다 해주시니 그에 맞춰서 구매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대체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구제샵을 제대로 들어가 본 게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일단 구경부터 해볼게.” 내가 말하자 승용과 혜경 그리고 다영이 동시에 답했다. “아냐.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 넌 자아를 갖지 마.” 구제샵에는 온갖 종류의 옷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옷으로 뒤덮인 채였다. 오래된 옷으로 이루어진 무덤 같았다. 손을 넣으면 바로 거기에 빨려 들어가 안에 갇혀 질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둘러보고 있는 사이 사장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승용은 망설임 없이 사장님께 나의 옷을 봐달라고 했다. 사장님이 처음 꺼내든 옷은 아주 펑퍼짐한 바지와 하얀 티셔츠였다. 살면서 한번도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었다. “통이 너무 크지 않아?” 나의 말에 승용은 요즘 다 이렇게 입는다며 나의 감각이 너무 올드하다고 했다. “아니 내가 올드해? 오히려 이런 펑퍼짐한 게 90년대 패션 아니야…?” 승용은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한심하다는 투로 언제 적 슬랙스를 입고 있냐며 빨리 갈아입으라고 부추겼다. 처음 입어본 구제 옷은 너무 낯설었다. 바지 품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했고 티셔츠는 곧 흘러내릴 기세였다. 그 위에 걸친 청재킷 또한 거인이 입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헐렁거렸다. 아무래도 전체가 다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사장님은 또 다른 바지를 입어보라 권했고 그건 내겐 한 벌도 존재하지 않는 하얀 바지였다.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마지못해 입고 거울 앞에 선 순간 거기 지금까지와는 낯설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내가 있었다. 연한 갈색 블레이저를 함께 입으니 그 또한 제법 어울렸다. 무릎 쪽이 헤지고 그런 것이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그렇게 몇 벌을 더 입어보고 느꼈다. 오래된 옷은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것을. 파도를 맞으면 맞을수록 안온해지는 백사장의 모래처럼. 추천받은 옷들을 전부 구매하고 다시 입고 왔던 슬랙스로 갈아입으니 몸이 뻣뻣해진 기분이었다. 완전히 이해하진 못해도 빈티지의 매력을 조금은 엿보게 되었다. 오래된 것이라고 그저 낡은 것이 아니다. 오래된 것은 지난 시간을 잊지 않는다. 오래된 것은 상처가 많아서 나를 다정하게 안아준다. /구현우(시인)

2026-04-01

대구시장 선거, 이젠 국힘 ‘독무대’가 아니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 일정이 본격 시작됐다. 예비후보 6명의 역량을 평가하는 1차 토론회도 그저께(30일) TBC 대구방송에서 열렸다. 마침 이날은 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한 날이어서, 대구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김 전 총리와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의 역량을 비교하면서 토론회를 지켜봤을 것이다. 토론회에서 6명의 후보들은 한목소리로 “위기의 대구경제를 살리겠다”면서 다양한 공약을 쏟아냈다. 하지만 대부분 공약이 이미 여러 차례 거론됐거나, 대구시 재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유권자들은 실현 가능성을 자세히 따져보면서 지지 후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2차 토론회는 오는 13일 열린다. 토론회에서 각 후보가 지적했다시피, 현재 대구가 처한 정치·경제적 현실은 어둡기 짝이 없다. 대구경제는 3년 연속 전국 최하위권에 머물며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이러니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김부겸 전 총리는 30일 대구시장 출마를 선언하면서 “대구가 점점 더 나빠지는 이유는 대구의 정치 때문”이라고 했다. 정치인들이 일을 하지 않아도 유권자가 표를 찍어 주니까 경제가 엉망이라는 소리다. 아마 공감하는 대구시민이 많을 것이다. 이번 대구시장 공천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국민의힘 지도부는 아직도 대구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지역인 줄 알고 있다. 대구 민심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다. 공직자윤리위원회에 공개된 대구지역 국회의원들의 재산 신고 내역을 보고, 일각에서는 ‘국민의힘이냐 서울 강남의 힘이냐’는 비아냥도 나온다. 대구는 지금 이재명 정부가 집권한 이후 주요 현안이 대부분 스톱된 상태다. 행정통합은 호남만 됐고, TK신공항 건설은 재원이 없어 하염없이 표류하고 있다. 2차 공공기관이전도 행정통합이 된 호남지역에 우선 배정될 것이 확실시된다. 대구시민들의 식수원인 낙동강 물은 언제 또 오염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민주당의 경우, 중량감 있는 김 전 총리가 대구시장 후보로 나서면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여당 프리미엄’을 활용하고 있다. 김 전 총리는 핵심 공약으로 대구·경북 행정통합 재추진, 민군 통합공항 이전 완수, 2차 공공기관 유치(IBK기업은행 등) 등을 제시하며, “제가 책임지고 완수하겠다. 당 대표도 약속했다”고 했다. 앞서 정청래 민주당 대표는 김 전 총리를 만나 “‘무엇이든 다해드림’ 센터장이 되겠다”고 했다. 조승래 민주당 사무총장도 얼마 전 GRDP(지역내 총생산) 최하위권인 대구 경제를 거론하며 “공항·공공기관 이전과 같은 현안 해결을 위해 대통령, 중앙정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김 전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 지도부가 노골적으로 대구현안을 해결하려면 ‘김부겸 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유권자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이러한 ‘여당 프리미엄’에 대응해 민심을 얻으려면 예비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대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대구 현안과 관련한 설득력 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 시민들은 새로운 정치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31

노킹스 시위

작년 6월 14일 미국 워싱턴에서는 유례없는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돼 국민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다. 이날 군사 퍼레이드에 동원된 병력만 6600명에 달했고, 전차부대, 블랙호크 헬기, 자주포 등 최신 군사장비와 폭격기 등이 등장했다. 전례가 없던 행사가 치러진 배경은 미육군 창설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날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79번째 생일과 겹쳐 행사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대측은 북한식 군사 과시, 권위주의 상징, 트럼프의 생일파티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미국의 반트럼프 정치단체인 50501은 이날 전국에 걸쳐 트럼프의 권위적 행동을 비판하는 시위를 펼쳤다. 50501은 50개 주에서 50개 시위를 하는 하나의 운동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노킹스(N0 Kings)다. “왕이 없다”는 뜻이다. 미국이 군주제 국가가 아니고 민주주의 국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국은 건국 당시 영국 왕정에 맞서 독립한 공화국으로 구호 자체가 역사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 작년 10월 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트 대통령에게 천마총 금관의 모형을 선물했다. 이를 두고 반트럼프 시위대는 “왕이 되고 싶어 하는 트럼프에게 진짜 왕관을 주면 어쩌나” 하며 볼멘소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중동전쟁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미국 전역에서 또다시 대규모 노킹스 시위가 벌어졌다. 주최측은 3300여 곳에서 800만명 이상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라 했다. 지지율 36%로 떨어진 트럼프가 최악의 궁지로 몰리는 것은 아닐까. 이후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31

어린 왕들과 왕관의 무게

역사는 종종 왕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쓰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왕관의 무게를 기억한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고려 말 비운의 군주 창왕(昌王)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비극의 대명사로 각인된 조선 제6대 왕 단종과 비교되면서, ‘단종보다 더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 어린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창왕은 고려 제33대 국왕으로, 우왕이 위화도 회군 직후 폐위된 뒤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성계 세력이 내세운 ‘폐가입진(廢假立眞)’ 논리에 휘말리며 명나라의 공식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재위 1년 만에 폐위되는 운명을 맞았다. 사망 당시 단종은 16세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등학교 1학년 또래였다. 창왕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의 나이인 9세에 생을 마감했다. 두 왕 모두 왕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두 어린 왕의 비극은 그들이 죽음에 이를 만한 실책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재위 기간 역시 단종은 약 3년, 창왕은 1년에 불과했다. 통치권을 제대로 행사하거나 국정을 어지럽힐 물리적 시간조차 사실상 없었던 셈이다. 창왕 역시 고려 말 격변기의 소용돌이를 피하지 못했다. 아버지 우왕이 강제 폐위된 뒤 신진 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왕실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정치적 공격 속에서 결국 아버지와 함께 강화도에서 참수됐다. 어리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단종이나 창왕보다, 강력한 권력과 개혁 의지를 가진 수양대군이나 이성계가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더 적합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서양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린 군주들의 비극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존 1세(1316년)는 태어나자마자 국왕이 되었지만 불과 4일 만에 사망했다. 역사상 가장 짧은 재위 기간으로 기록된다. 영국에서는 이른바 ‘탑 속의 왕자(Princes in the Tower)’ 사건(1483년)이 대표적이다. 에드워드 5세는 12세에 즉위했지만 숙부 리처드 3세에게 권력을 빼앗긴 뒤 동생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숙부가 왕권 안정을 위해 조카들을 제거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지만, 후대 왕인 헨리 7세의 배후설 등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며 지금까지도 영국사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왕자들 역시 15세기 영국 왕실의 권력 암투 속에서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된 사례다. 이처럼 단명한 어린 국왕들의 죽음은 개인의 자질이나 과오와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권력 투쟁이 격화될수록 정통성은 정치적 수단으로 변질되고, 보호자나 후견 세력이 없는 어린 왕은 가장 먼저 무너지는 취약한 고리가 되기 쉽다. 하이에나는 무리에서 벗어난 사자, 호랑이 새끼를 가차 없이 물어 죽인다. 자연계의 이런 모습은 ‘힘의 논리 앞에서 정통성과 정의가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냉혹하게 보여준다. 보호막이 걷힌 사자 새끼들이 들개의 먹잇감이 되듯, 정치적 풍랑 속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존재 역시 결국 왕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너무 어렸던 어린 왕들이었다. /한상갑 경북부 에디터

2026-03-31

제조업의 미래와 Cell 리더십

제조업의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많은 기업이 자동화 설비, 스마트 공장, 데이터, 시스템에 막대한 투자를 한다. 물론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현장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성과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사람’, 그 중에서도 ‘리더’임을 알 수 있다. 제조업은 다른 산업과 다르게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든다. 작업자의 작은 실수 하나, 설비의 미세한 이상 하나가 곧바로 품질 불량과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작은 조직(Cell)의 리더 역할은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라, 현장을 이해하고 문제를 즉시 해결하는 ‘실행 책임자’에 가깝다. 현장에는 늘 답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개념이 바로 ‘겐바(現場)’다. 일본 제조 혁신의 핵심 철학으로 알려진 이 개념은 ‘문제는 현장에 있고, 해답도 현장에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장을 직접 보고 듣고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만 진짜 문제가 드러난다. Cell 리더는 ‘현장의 CEO’ 역할이고 의사결정, 개선, 성과 책임을 스스로 수행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표준’이다. 제조업은 표준 위에서 움직이는 산업이다. 표준이 무너지면 품질은 흔들리고, 품질이 흔들리면 고객은 떠난다. 리더는 표준을 만드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켜지도록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표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능력 또한 필수다. 이때 필요한 것이 ‘지속적 개선’이다. 흔히 말하는 PDCA 사이클은 계획(Plan), 실행(Do), 점검(Check), 조치(Action)의 반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문서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다. 개선은 일부 전문가의 몫이 아니라, 현장 구성원 모두가 참여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결국 제조업 리더십의 핵심은 사람이다. 설비는 투자로 확보할 수 있지만, 사람의 참여와 몰입은 리더십만으로 만들어 진다. 현장의 작업자가 문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스스로 개선에 나서는 라인과 공정 조직 단위의 Cell 리더십은 강한 현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반대로 문제를 감추고 지시만 기다리는 조직은 아무리 좋은 설비를 갖추어도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일본의 도요타자동차는 ‘현장중심’과 ‘지속적 개선’을 기반으로 최고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왔다. 그들의 경쟁력은 설비가 아니라, 현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개선하는 문화에 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리더들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결과다. 혁신의 정체를 경험하고 있는 기업은 공장의 라인 단위 리더와 리더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산 라인, 공정 단위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책임의 현장을 보고, 생산, 품질, 원가 등 문제를 들어내고, 사람을 참여시키는 Cell 리더십이 혁신의 출발점이다. 제조업의 미래는 거창한 전략이 아니라, 오늘 현장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달려 있다. 그 중에는 언제나 리더가 있다. 결국 좋은 설비가 아니라, Cell의 현장 리더가 기업 경쟁력을 만든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

2026-03-31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③유고슬라비즘의 확산

1848년 파리혁명의 영향으로 독일혁명이 연이어 일어나자 중부유럽과 발칸반도 내 민족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본격화된다. 이때 헝가리에서 반 합스부르크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력시위가 발생한다.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합스부르크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크로아티아를 부추겨 헝가리를 치도록 치밀한 계획을 짰다. 크로아티아에 슬라보니아와 달마티아는 물론 자그레브까지 헝가리로부터 독립을 미끼로 군사를 동원해 헝가리를 치도록 종용했다. 크로아티아로선 목이 빠지도록 바라던 바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합스부르크제국 육군대령 요시프 옐라취치를 크로아티아 왕인 반에 올려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다. 이때 세르비아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두 정치지도자가 처음으로 함께 군사행동을 개시하게 된다. 실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1848년 7월 옐라취치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로 진격했다. 이때 세르비아 군대가 후방에서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면서 헝가리를 압박했다. 러시아마저 제국 내 중소 민족의 반란을 우려해 오스트리아를 돕겠다고 나서면서 졸지에 헝가리는 공공의 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1849년 5월 헝가리의 이유 있는 반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강대국과의 약속은 휴지에 불과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은 크로아티아의 소신 있는 노력에도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렸다. 헝가리 지배에서는 벗어났다곤 하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 속국으로 존재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배신감을 느끼기도 전에 당장 민족의 앞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떨어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면서 1862년에는 독일제국은 게르만민족만의 단합을 부르짖는다. 동시에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토 일부 공국들을 흡수해버린다. 오스트리아의 항전도 독일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터키와 함께 점차 제국의 기력을 잃어갔다. 오스트리아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러시아의 도전을 받아 또 망신창이가 되면서 긴 세월 동안 유럽을 호령하면서 해가지지 않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19세기 후반,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헝가리로서도 만만하게 변해버린 오스트리아에 도전장을 내밀고 왕실은 하나로 하되, 공동의 군대와 평등한 외교와 경제정책에 합의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한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독립의 꿈에 부풀어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또 다시 해안도시와 내륙이 갈라지는 아픔을 겪으며 이들의 지배 속으로 들고 말았다. 지겹도록 피지배자의 역사가 이어졌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편입된 슬로베니아와 달마티아를 제외하고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는 헝가리에 끈질기게 괴롭힘 당했다. 이때 강력한 리더십으로 대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주창한 안테 스타르췌비치가 크로아티아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극우 ‘권리당’을 창당해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그리고 훗날 크로아티아 극우민족주의의 ‘우스타샤’(크로아티아어로 반란이란 뜻의 ‘우스타샤’란 단체가 자주 등장한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크로아티아민족주의는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즘까지 확산하면서 세르비아는 물론, 심지어 역사적으로 늘 치고 박았던 불가리아 청년들까지 합세했다.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려 만만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넘보았다. 세르비아인이 살아가는 곳은 모두 세르비아국가라는 대세르비아주의처럼, 이곳 보스니아에 가톨릭인구 18%를 크로아티아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이미 오스만트루크 이전 크로아티아 중세왕국이 차지했던 보스니아 브르바스강 서남지역을 장악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자주의 열정은 탄력받았다. 헝가리는 크로아티아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재정 독립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위기감을 느낀 헝가리는 두 민족을 갈라놓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짰다. 그해 10월 가장 염려하던 보스니아지역을 오스트리아가 완전히 자신들의 영역으로 집어삼키면서 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서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선택은 소수민족의 탄압, 즉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압제였다. 이는 두 민족 사이에 차별화를 가함으로써 갈라놓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헝가리는 이들에게 독립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얼토당토 않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연합정당 내의 세르비아인 지도자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이때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였으니, 밖에서 보았을 때 크로아티아인은 방관자로 낙인 찍혀 누명을 쓰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최일선 방어선(세르비아인들이 자치행정을 구성하면서 자신들 의지로 살아가던) 보이나 그라니짜 지역을 크로아티아 행정구역으로 넘기면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 정착한 세르비아인 반감이 극에 달했다. 헝가리 계획대로 두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면서 20세기 민족 간 폭력에 당위성이 쌓여가고 있었다. 훗날 또 한 편의 가공할 폭력의 새판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