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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학력 여성과 저출산

세상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변화하면서 여성의 교육 기회가 늘어났고, 사회 참여 역시 눈에 띄게 높아졌다. 출발 시기가 조금씩 다를 뿐 이는 동양과 서양이 크게 다를 바 없다. 여권 신장의 세계를 살고 있는 건 한국 여성들도 마찬가지. 현대사회의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은 언제 어디서건 고학력 여성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아직 선입견과 오해도 없지 않다. “학력이 높고 고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아이 낳기를 꺼린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특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양에 비해 동양에 더 많은 게 사실. 그런데, 고학력 여성이 출산을 기피한다는 건 맞는 말일까? 최근 미국인구학회 학술지에 발표된 ‘일본에서 교육이 결혼과 출산에 미치는 인과적 효과’라는 제목의 논문이 이 물음에 답하고 있어 주목받았다. 위에 언급된 연구엔 일본 와세다대 교수뿐 아니라, 같은 동양 문화권의 싱가포르 대학 교수 등 4명이 참여해 광범위한 분석을 진행했다. 연구 결과 고학력 여성들은 초혼과 초산을 다소 늦추긴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학력 여성과의 차이는 사라졌다고 한다. ‘많이 배운 여자가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건 말 그대로 선입견이었던 것. 이에 논문 작성을 함께한 연구진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출산 감소를 이해하려면 교육보다는 제도적 요인에 주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고 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 도출이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선 고학력 여성들을 탓할 게 아니라, 남성 육아휴직의 확대와 출산 후 경력 단절에 따른 불이익을 없애는 등 시스템 개선이 보다 절실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18

TK신공항, ‘선거용’으로만 이용될까 걱정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대구·경북(TK)신공항 건설 예정부지인 대구 군위군을 방문해 ‘관권 선거’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대구는 여·야 대구시장 후보가 초박빙 판세를 보이고 있어 정치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날 신공항 부지를 시찰한 이 대통령은 “재원 문제 등으로 사업 추진이 지연돼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 사업 장기화에 따른 재정 부담 규모에 관해 대구시 관계자에게 꼼꼼하게 물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신공항 건설 현장을 찾은 날은 마침 지방선거 후보자 등록이 끝난 날이었다. 청와대에선 “선거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하지만, 국민의힘은 “노골적인 선거운동”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사실 사전선거일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에 이 대통령이 TK지역을 방문한 것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현재 대구시장에 출마한 김부겸 민주당 후보와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는 TK신공항 건설 재원 조달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중이기도 하다. TK신공항 건설은 K2 군 공항과 대구국제공항을 군위·의성 일대로 이전하는 사업이다. 민간 공항 건설의 경우 정부의 재정 재원 방식으로 추진되지만, 사업비가 약 11조5000억원에 이르는 군 공항 이전 비용은 대구시가 먼저 부담한 뒤 K2 후적지를 개발해 회수해야 하는 구조(기부 대 양여)다. 이전 비용이 대구시 올해 예산에 육박할 정도로 커 대구시는 6년째 부지 보상도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군 공항 건설 사업에 국비지원 근거를 담으려면 우선 국회에서 ‘기부 대 양여’ 방식으로 규정된 ‘신공항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 여당과 정부 도움 없이는 신공항 건설이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 대통령은 군위방문 후 SNS를 통해 “이번 사업이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정부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고 했고, 김부겸 후보도 “법을 개정해 신공항 재원조달 방식을 국가지원사업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만큼, 앞으로 두 사람은 이번 대구시장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특별법 개정에 적극 나서 주길 바란다.

2026-05-17

안동서 한일정상, 지방시대 열 도시외교 되길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19일과 20일 경북 안동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갖는다. 지난 1월 이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 고향인 나라현을 방문, 양국 정상회담을 가진 것에 대한 화답 형식으로 이 대통령 고향인 안동을 다카이치 총리가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아닌 지방 소도시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이뤄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의전과 숙소, 경호 등 많은 불편에도 지방도시에서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양국 정상 최초로 고향을 상호 방문해 두 정상 간 정서적 유대감 강화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에 큰 힘이 된다는 것이다. 또 양국이 갖고 있는 공통의 문제인 수도권 집중, 저출생, 고령화, 인구감소 등의 구조적 위기를 지방도시에서 극복해보자는 시도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지방도시의 활성화를 통해 국가균형발전을 꾀하자는 지방시대를 여는 상징적 외교로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인구 15만의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로 불리는 곳으로 하회마을, 병산서원 등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보유한 우리나라 대표의 역사문화도시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가면서 가장 한국적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또 하나 한일정상회담이 갖는 특별한 의미는 글로벌 관광도시로서 안동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APEC을 통해 지방도시인 경주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안동 또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됨으로써 글로벌 관광지로서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수도권으로만 인구와 경제가 집중되면 대한민국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하기가 어렵다. 지방의 도시들이 각자의 특성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경제력이 커질 때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커지는 것이다. 한일정상의 안동회담은 지방도시의 가치를 조명하는 매우 좋은 기회가 된다. 소외된 지방도시에서도 글로벌 정상회담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또 이번 안동 정상회담의 외교가 지방도시 외교로 확장되는 전기가 되길 바란다.

2026-05-17

외로움부 장관

개인의 외로움도 국가서 관리한다? 외로움을 국가가 관리해야 할 만큼 현대사회에서 외로움은 심각한 사회적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1인 가구 급증, 양극화 및 불평등 심화 등으로 사회와 단절된 생활을 하는 인구는 늘지만 정부 대처는 미흡하다. 외로움이 고독사로 이어지고 우울증이나 치매 등으로 발전하는 사회문제에 대응할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은 국민건강에 해를 끼치는 외로움을 공적영역에서 다룬다. 외로움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하며 관련 부서도 만든다. 영국은 성인 상당수가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고, 이것이 건강과 직접 연결된다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 장관을 임명했다. 영국 사례를 연구한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대책 담당장관을 신설했다. 일본사회의 고독사 문제 해결과 고독으로 인한 건강악화나 노동력 상실에 따른 사회적 비용증가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도 외로움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2024년 한해만 3000명이 넘는 이가 고독사했다. 고독사란 가족과 단절된 생활을 하다 홀로 임종을 맞고 뒤늦게 시신이 발견된 경우다. 여론조사에서 국내 성인의 절반 이상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거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으로 사는 사람이 는다는 것이다. 노인층뿐 아니다. 1인 가구 증가로 젊은층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최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적 고립문제를 담당할 부서를 만들고 복지부 차관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외로움으로 죽을 수 있는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나라 최초 시도다. 그 역할에 기대를 걸어보자.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7

노화 탈출속도

세계적인 발명가이자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1948~)이 2032년부터 노화 속도보다 노화의 치료와 복구 기술 발전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 주장하여 화제(話題)다. 이것은 노화로 인한 손상의 누적보다 노화를 치료하는 기술 발전이 빨라짐으로써 시간이 갈수록 기대 건강수명이 계속 연장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간단히 표현한 것이 ‘노화 탈출속도(LEV)’다. 커즈와일은 지금부터 3년 후인 2029년 ‘범용 인공지능(AGI)’이 일반화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범용 인공지능은 ‘컴퓨터로 사람과 같거나 그 이상의 지능을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그는 지구상의 모든 인간 80억 명의 지능을 능가하는 ‘초지능(ASI)’이 2040년 초에 등장하리라는 사실도 지적한 바 있다. 경이롭고도 전율할 만한 사건이 발생할 날이 가까운 것이다. ‘노화 탈출속도’가 구체적으로 실행되면, 인간은 지금처럼 1년을 살면, 수명이 1년 줄어드는 게 아니라, 1년 늘어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 필연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지가 된다는 얘기다. ‘노화 탈출속도’의 최초 수혜자는 부자들이 되겠지만, 신약(新藥)의 특성상 몇 년 지나지 않으면, 약값이 대폭 저렴해질 것이기에, 보편적인 수혜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나는 커즈와일의 미래 예측을 대중 강연에서 꺼내곤 하는데, 반응이 각양각색이다. ‘노화의 종말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생로병사가 생명체에 고유한 운명일진대, 그걸 피해갈 수 있겠는가, 또한 젊어진다는 게 긍정적인 결과인지 모르겠다는 회의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다. 반면에 회춘(回春)과 무병장수를 쌍수 들어 환영하는 사람도 적잖다. 언젠가 디지스트(DGIST)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다가 만난 학생 하나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뇌과학을 공부한다는 20대 초반의 그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500년은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이것이다. “500년 인생 행로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생각해봤니?” 일론 머스크도 최소 120년에서 150년은 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근미래 호모사피엔스의 평균 수명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른바 100세 시대라는 현대에 적지 않은 고령자들이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면서 늘그막에 육신과 정신의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닌 시대가 21세기의 본질이다. 낙상, 치매, 뇌졸중으로 요양원 침상에서 신음하는 고령 환자들을 생각해보면, 지금과 여기에서 우리가 준비할 사안을 숙고해야 할 것이다. 어떤 슬기로운 사람은 그것을 충분한 수면, 적절한 스트레스 관리, 술과 담배 절연, 하루 2시간 운동의 생활화 같은 철칙으로 요약한다.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오래 버티는 자가 미래 기술의 혜택을 입는다.’ 영화 ‘황산벌’에서 김유신은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만약 독자 여러분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자 한다면, 실천할 수 있는 항목을 골라 즉시 실행에 옮기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오래 버티는 근본적인 힘이 될 것이므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6-05-17

지역경제와 인구소멸 위기 극복할 지도자를

6·3 지방선거가 성큼 다가왔다. 대구경북에서는 정당별로 치열한 예선을 거쳐 후보 경선이 어렵게 마무리되었다. 여대야소 국회로 구성되어 있는 현재, 거대여당의 일방적 입법이 추진되고 있는 심각 상황이다. 지방선거에서라도 양당의 균형과 조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여당의 일방적 개헌 입법 추진은 좌절되었지만, 민주당이 발의한 이른바 ‘조작기소 특검법’이 어떻게 결판이 날지 모른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헌정 체제와 사법 질서에 어떤 후폭풍이 몰려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얼마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가 진행한 기소조작 국정조사에서 해당 증인을 호출하여 검찰의 조작과 고의성을 밝힐 기소 조작 혐의를 전혀 입증하지 못하고 끝났기 때문에 이번 지자체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큰 변수 중의 하나다. 민주당은 특정인의 피소가 검찰 조작에 의한 것이므로 재판 계류 중에 있는 사건의 공소를 취소하려는 특검 법안을 이미 제출했다. ‘공소 유지 여부 결정’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재판을 강제로 기소 중단 내지는 취하하겠다는 초법적 기획이다. 여당은 ‘조작기소 중단 특검’ 법안 상정 과정에 예상되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계엄과 내란 동조 재판에 연루된 단체장 후보에 대한 재판 문제도 제기할 공산도 없지 않다. 올 초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 사업과 행정 통합 두 가지 다 국비 지원에서 배제되었다. 향후 4년간 광주 전남에 비해 20조원 국비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될까? 그럼 점에서 이번 대경 지역 지방선거의 최대 쟁점은 두 가지 국가적 사업의 예산 배제에 따른 후속 국비 확보 전략이 될 전망이다. 김부겸 후보자가 공적자금 5000억을 빚내고, 정부특별지원금 5000억을 확보하겠다는 공약은 법적 근거가 없는 전혀 없는 빈말이다. 국가 예산은 관련 사업의 특별법안에 근거하여 국비 지원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번 지자체 선거 핵심 공약 사업인 통합신공항 건설 사업과 대구경북 시도 행정 통합 문제는 관련 특별법안의 수정 입법안 절차를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번 선거 후보자들은 정부가 위 두 가지 사업을 지자체에 떠넘기지 말고 전액 국비지원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각 후보들은 현재 핵심 과제인 대구경북지역 경제 활성화 방안과 지역 인구소멸 방지를 위한 특단의 전략과 공략 제시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지방선거 후보 경선 과정에서 기초단체장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후보들의 전과기록이나 자질 의혹의 문제점들이 많이 불거졌다. 공천 과정의 공정성 문제와 얽혀져 어느 때보다 논란이 많이 제기되었다. 공천 과정의 공정성 시비가 선거 후에도 쉽게 수그러지지 않을 듯하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실천력과 추진력 있는 인물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현 집권 여당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대구경북의 미래 경제발전을 위해 국비 지원에만 일방 의존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구경북 지역민들 스스로 단결하여 자립, 자강과 갱생을 이끌 지도력을 갖춘 인물을 선택하여야 한다. 누구를 뽑아야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이다.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국가미래연구원 고문

2026-05-17

트로트

요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트로트를 빼놓기는 어렵다. 한때는 부모 세대의 음악, 혹은 회식 자리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배경음 정도로 여겨졌던 트로트가 이제는 방송의 중심에 서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탄생하고, 공연장은 팬들로 가득 찬다. 계속되는 이 현상은 단순한 복고 열풍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 안에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이 함께 쌓여 있다. 그래서인지 트로트에는 유난히 사람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한과 흥,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버텨낸 시간의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으며, 빠른 산업화와 치열한 경쟁 속을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정서는 여전히 깊은 공감과 위로로 이어진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Distinction : A Social Critique of the Judgement of Taste·1979)’에서 사람의 취향은 개인의 순수한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트로트는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과 생활의 감각이 축적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흐름이 이제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는 미국 코첼라 같은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서도 트로트 기반의 무대가 시도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K-팝 중심으로 소비되던 한국 음악이 점차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한국적인 것이 더 이상 오래된 과거의 이미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이다. 트로트 자체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의 단순한 구성에서 벗어나 발라드와 록, 댄스와 EDM 같은 요소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하고 있다. 무대 연출 역시 훨씬 세련되고, 공연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이제 트로트는 단순히 ‘옛 음악’이 아니라 현재의 대중음악 환경 속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장르가 되었다. 이 변화는 지역 문화 현장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지역 축제나 기념행사 무대를 보면 트로트 가수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세대를 가리지 않고 안정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연장을 찾는 중장년층의 열기는 상당하다. 팬덤 문화 역시 활발해졌고, 이는 침체된 지역 공연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다. 다만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고민도 생긴다. 어느 순간 지역 행사 무대가 지나치게 하나의 장르에 집중되기 시작하면 클래식이나 재즈, 국악, 실험적인 공연 등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관객 역시 자연스럽게 익숙한 장르만 찾게 되고, 새로운 음악을 접할 기회는 줄어든다. “지역 행사에 가면 결국 트로트겠지”라는 예상이 굳어질수록 문화의 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문제는 트로트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트로트는 세대를 연결하고, 지역 공연장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 중요한 문화적 힘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트로트의 인기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장르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문화는 익숙함만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낯선 음악과 새로운 경험 속에서 더 풍요로워진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2026-05-17

봄밤엔, 돼지들이 자라나고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 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 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 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오르고 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 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 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 풀어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 싶은 봄밤이다 ―장옥관, ‘봄밤이다 1’ 전문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문학동네)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운 봄밤이 있다. 사물은 그것이 놓이는 시공간에 따라 다른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장옥관 시인의 이 시는 봄의 강력한 자장을 정공법으로 다루고 있는데, 인용 시에서 “돼지”는 “봄밤”을 활성화하는 동적인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이다. 봄밤에 돼지라니, 시인의 상상력이 펼쳐내는 면적이 크다. 그럼에도 멀어지기는커녕 외려 좁아지는 골목처럼 밀착해 온다. 흡사 마술봉이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꽃길을 내고 폭죽을 쏘며 땅속을 파고 있는 것 같다. “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 “벚나무 아래”를 “하이힐을 신고” 돌아다니는 “시커먼 돼지들은” “천 마리 만 마리”로 팽창한다. 달은 또 어떤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푸는 화자의 봄밤은 강력한 자장을 지닌 커다란 ‘몸’이 된다. 인용되지 않는 같은 제목의 또 한 편을 보자면, 봄밤은 “긁어도 다시 긁어도/ 가려움 가시지 않는 몸”이라고 했다. 이때 “가려움”이란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그리움의 대상일 텐데, 가령 “서른두 살에 혼자가 된 어머니 보름달”은 “달아오르는 요강처럼 뜨고, 오줌이 뜨거운 어머니”처럼 화자의 가려움은 식지도, 좀처럼 사라지지도 않는다. 두 편의 봄밤은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사뭇 다른 정서를 만들어 내고 있다. 하지만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의 ‘몸’이라는 장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리되지 않는 미학의 동일한 영토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초월과 일상이 상응하는 상상의 공간이란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닌, 몸에 의한, 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캄캄한 하수구” 같은 곳곳의 골목을 신나는 공연장으로 만드는 환상적인 장면이 지나간 후, 다른 봄밤에선 “내가 내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그러니까 네가 좀 이해를 해다오”라는 전형적인 로맨스가 펼쳐진다. “이해하나마나 달은 뜨고 바닷물이 끓어넘치고/ 고양이는 밤새/ 붉은 꽃잎 점점이 뿌리며 울며불며 다니는” 밤이다. 빠진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꿈일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꿈과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환상의 날개를 떼고 현실로 내려와 발을 내딛는 순간 몸과 유리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자의 봄밤은 시인의 상상력이 제공하는 부재의 환상에 젖줄을 대고 있는 듯하다. 시에 드러난 활기와 비애를 걷어내고 현실과 환상의 허들을 넘을 수 있는 것은 기실 “봄밤”이라는 몽상적인 시간대가 있어 가능한 것이다. “여린 꽃잎들이 돼지 콧잔등을 때리고”, “깻잎머리 여중생들이 침을 퉤퉤 뱉는”봄의 생명력으로 넘친다. 결구에 닿았을 때 “캄캄한 하수구처럼 흘러드는 봄밤”은 사뭇 달라질 법한데, 끝끝내 화자는 천 마리 만 마리 풀어놓았던 돼지들을 거둘 생각이 없다. “풍선에 매달아 하늘로 띄우고픈 봄밤” /이희정 시인

2026-05-17

교육 AI의 가능성과 한계 ···개인화 학습의 현실

40여 년 전, 교육학자 벤저민 블룸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한 명의 교사가 한 명의 학생을 일대일로 가르치면 평범한 학생도 상위 2%의 성취를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모든 아이에게 전담 교사를 붙여 줄 나라는 없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개인 교사’는 교육의 오래된 꿈으로만 남아 있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그 꿈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지치지 않고, 24시간 답해 주고, 학생마다 다른 속도로 설명해 주는 ‘AI 튜터’. 과연 AI는 그 오랜 꿈을 이뤄 줄 수 있을까? 오늘은 그 가능성과,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 그 한계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 가능성··· 6주 만에 2년 치를 배우다. 가장 인상적인 증거는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세계은행이 2024년 나이지리아 에도주의 고등학생 8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이다. 방과 후 6주 동안, 교사의 지도 아래서 학생들이 AI와 대화하며 영어를 공부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AI를 쓴 학생들의 성취도는 그렇지 않은 학생보다 평균 0.3 표준편차 높았는데, 이는 보통 학교 교육 1.5~2년 치에 해당하는 향상이었다. 세계은행이 비교한 전 세계 교육 프로그램의 80%보다 효과가 좋았다. 핵심은 ‘AI 에게 무엇을 시켰는가’였다. 연구진은 AI를 답을 베끼는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질문을 던지는 ‘튜터’로 설계했다. 그리고 교사가 옆에서 학생이 딴 길로 새지 않도록, AI가 틀린 말(환각)을 하면 바로잡도록 도왔다. 수업에 더 많이 참여한 학생일수록 더 많이 늘었다. AI가 ‘잘 쓰이면’ 어떤 일이 가능한지를 보여 준 사례다. 이런 흐름은 빠르게 번지고 있다. 칸아카데미의 AI 튜터 ‘칸미고’, 구글·오픈AI 등이 내놓은 학습 전용 모드까지, 글로벌 교육 기업들은 앞다투어 개인화 학습 도구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강점은 비슷하다. 학생이 막히면 같은 개념을 수준에 맞춰 몇 번이고 다시 설명해 주고, 틀린 부분을 그 자리에서 짚어 주며, 면박을 주거나 지치는 일이 없다. 한 명의 교사가 서른 명에게 동시에 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 현실··· 1조4000억 원과 8.1%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정부는 2025년 3월, 세계에서 가장 야심 찬 실험에 나섰다. 수학·영어·정보 교과에 ‘AI 디지털교과서(AIDT)’를 도입한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해 맞춤형 문제를 내주는, 바로 그 ‘개인 교사’의 꿈이었다. 그러나 1년 뒤 성적표는 냉정했다. 2025년 12월 감사원 발표에 따르면, 3년간 1조4000억 원이 투입된 이 사업에서 AIDT를 열흘 이상 사용한 학생은 평균 8.1%에 그쳤다. 한 번도 접속하지 않은 학생이 60%였다. 감사원은 현장 의견 수렴이나 시범 운영 없이 졸속으로 추진된 점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결국 AIDT는 ‘교과서’라는 법적 지위마저 잃고 ‘교육자료’로 격하됐고, 일부 교육청은 2026년 예산 편성을 보류했다.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교사가 준비되지 않았고, 학교 현장이 설득되지 않았으며, ‘왜 이것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좋은 도구도 쓰는 사람과 환경이 받쳐 주지 않으면 비싼 애물단지가 된다는, 오래된 교훈의 재확인이었다. 또 하나의 묵직한 숙제는 데이터다. AIDT는 학생의 학습 이력을 잘게 분석할수록 똑똑해지지만, 그만큼 483만 학생의 민감한 기록이 국가와 민간 기업의 서버를 오간다. 미국과 EU가 최근 아동 교육 데이터 보호 법제를 강화하고, EU가 교육용 AI를 ‘고위험’ 등급으로 분류한 것도 같은 우려에서다. 개인화의 정확도와 정보 보호는 쉽게 맞바꿀 수 있는 거래가 아니다. ■ 더 깊은 한계 ··· “성적은 올라도 배움은 사라진다” 더 근본적인 질문도 있다. AI가 정말 ‘학습’을 돕는가? 아니면 ‘학습한 척’을 돕는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연구팀이 튀르키예 고등학생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서늘한 답을 내놓는다. 챗봇으로 공부한 학생들은 문제 풀이 단계에서는 성적이 크게 올랐다. 하지만 AI를 치우고 시험을 보자, 종이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보다 오히려 평균 17% 낮은 점수를 받았다. 답은 얻었지만, 실력은 남지 않은 것이다. 이른바 ‘인지적 오프로딩(cognitive offloading)’ 현상이다. 기억하고 계산하고 판단하는 일을 자꾸 외부 도구에 맡기면, 그만큼 우리 뇌는 덜 쓰이고 덜 자란다. 카네기멜런대와 마이크로소프트의 2025년 연구, MIT의 ‘인지 부채(cognitive debt)’ 연구도 비슷한 경고를 보낸다. AI를 신뢰할수록 비판적 사고는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뇌가 20대 중반까지 자라는 청소년에게, 생각의 과정을 통째로 건너뛰는 습관은 위험하다. ■ 그래서,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면 AI를 교실에서 다시 몰아내야 할까. 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이지리아와 한국, 튀르키예의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오히려 다른 길이 보인다. 성패를 가른 것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설계’였다. 효과를 본 경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AI가 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지게 했다. 둘째, 교사가 사라지지 않고 학습의 설계자이자 코치로 남았다. 셋째, 학생이 ‘AI 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을지’를 스스로 고민하게 했다. 반대로 실패한 경우는 기기와 예산만 쏟아붓고, 정작 사람과 수업 설계를 놓쳤다. 올해 OECD가 펴낸 교육 분야 생성 AI 보고서의 결론도 같은 맥락이다. 범용 챗봇을 검증 없이 교실에 들이면 학생은 ‘수동적 소비자’가 되고 교사는 ‘감독자’로 전락한다. 교육은 분명한 교육적 목적으로 ‘설계된’ AI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 지역은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자가 생각하는 ‘AI 교육특구’ 구상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AI 교육특구’는 하나의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 구상의 출발점은 ‘AI를 잘 쓰는 학생’이 아니라 ‘AI와 함께 지역의 문제를 푸는 학생’에 있다. 앞서 본 ‘성과와 학습의 분리’라는 함정을, 제도 설계 단계에서부터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설계의 핵심 장치는 세 가지다. 첫째, 학생이 매주 ‘AI에게 무엇을 물었고, 결과는 어땠으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를 적는 메타인지 일지를 의무화한다. 답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둘째, 3개월·6개월·1년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과정에서 학생이 직접 철강 산업의 탄소 배출, 인구 감소, 해양 환경 같은 포항의 실제 현안을 다루게 한다. 가상의 문제집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도시’가 교재가 된다. 셋째, 교사는 지식 전달자에서 물러나 ‘학습 설계자이자 코치’로 역할을 바꾼다. 나이지리아 실험에서 교사가 맡았던 바로 그 역할이다. 이를 떠받치는 것은 지역의 자산이다. 포항에는 포스텍(POSTECH)의 AI 대학원, 한동대, 그리고 국내 유일의 애플 디벨로퍼 아카데미가 있다. 여기에 포스코·포항테크노파크 같은 산업 현장과 교육부의 ‘교육발전특구’ 제도를 결합하면, 학교 혼자가 아니라 대학·기업·행정이 함께 학생을 키우는 생태계가 만들어진다. 그동안 부서별로 흩어져 있던 단기 교육 사업들을 하나의 성장 경로로 꿰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포항만의 처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에나 옮길 수 있는 원칙이 담겨 있다. 지역의 대학·기업을 학교와 연결할 것, 그 지역이 실제로 안고 있는 문제를 학습의 소재로 삼을 것, 기기 보급보다 교사 연수와 수업 설계에 먼저 투자할 것, 그리고 학생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하는 힘’을 남길 것. 광주가 ‘AI 교육원’을 세워 도시 전략과 학교 교육을 잇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화려한 장비를 들이는 일보다 ‘왜’와 ‘어떻게’를 먼저 설계하는 도시가, 결국 앞서갈 것이다. ■ 닫는 말 개인화 학습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AI는 그 꿈을 ‘저절로’ 이뤄 주는 마법이 아니다. 좋은 망치가 좋은 목수를 만들지 못하듯, 좋은 AI가 좋은 학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블룸이 발견한 일대일 교육의 힘은, 사실 기술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끝까지 살피는 관계’에 있었다. AI는 그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 다만 교사가 더 많은 아이를 더 깊이 살필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손잡이는, 결국 사람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5-17

스승의 날에 생각하는 속수례

전통 유교사회에서는 스승을 임금이나 부모님처럼 최고의 존경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을 썼다. 유교의 핵심 가치인 효(孝) 충(忠) 예(禮)란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임금에겐 충성을, 스승에게는 예를 갖춘다는 의미로 군사부일체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조선시대에는 제자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할 때 존경의 뜻을 담은 예물을 준비해 갔다. 이때 가르침에 대한 예물로 준비한 한 묶음의 육포를 속수라 하고, 예의를 지키는 절차를 속수례(束脩禮)라 불렀다. 성균관 입학식 등에서 엄격히 지켜져 왔던 그 시대 풍습이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 배우고자 감히 뵙기를 청합니다”라고 제자가 말하면 스승은 “내 학식이 부족하여 도움이 적을까 두렵다”는 식으로 대답을 한다. 이런 의식은 왕세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세자가 성균관에 나가 속수례를 한 내용이 소개된다. 스승의 날을 맞아 스승에 대한 예절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전례의 예법인 속수례를 직접 체험하는 행사를 벌이는 학교들도 간혹 있다. 스승에 대한 시대적 예우는 옛날 같지 않으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 의미의 행사여서 한편으로는 마음의 위안이 된다. 스승을 찾아가 속수례라는 절차를 밟던 그 시절 스승의 위상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 현실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특히 상당수 교사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교단을 떠난다는 소식은 우리시대 스승의 위기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 교권 회복을 도울 범국민적 각성이 필요하다. 스승을 임금과 동일시하지는 않더라도 “선생님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 것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5-14

포항 위기대응지역 연장, 경제회복에 총력을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11월 고시한 포항시의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 지정 기간을 6개월 연장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포항지역에 대한 고용안정을 위한 각종 지원은 올 11월 20일까지 유예된다.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은 고용사정이 급격히 악화될 우려가 있는 지역을 정부가 선제적으로 지정해 고용유지, 직업훈련, 생계안정 등을 지원하는 제도다. 기업에는 고용유지 지원금 등이 지원되고, 근로자에게는 생활안정자금 융자와 직업훈련 생계비 등이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된다. 중국산 저가 철강의 국내시장 침투와 미국의 고관세 부과 등으로 철강산업이 침체에 빠지면서 포항지역 중소철강업체들이 공장 가동을 줄이고 인력 감축에 나서자 지난해 11월 정부는 포항지역을 고용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번 6개월 연장 조치로 지역의 고용 안정유지를 도모할 수 있게 된 점은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철강산업 침체로 인한 고용불안이 여전히 지역에서 해소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해 연장기간 동안 지역 산업계가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관건이다. 정부의 지원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이번 연장 조치에 부응해 산업계가 6개월을 마지막 골든타임으로 생각하고 경제회복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정부 지원을 활용해 숙련된 인력의 유출을 막고, 구직자들에게는 맞춤형 교육을 실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 특히 철강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이차전지, 수소 등 미래먹거리 산업으로 눈을 돌려 고용위기지역 지정을 새로운 돌파구 찾는 기회로 삼는 지혜도 발휘해야 한다. 산업계의 노력에 병행해 경북도와 포항시 등 행정기관도 근로자의 고용안정과 경제위기를 극복할 전략을 짜고, 행정력을 총 동원해 경제회생의 강력한 후원자가 돼야 한다. 포항은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대표 도시다. 수십 년 동안 한국경제를 견인해온 철강산업 도시로서 자부심이 넘치는 도시다. 정부의 이번 조치가 경제위기 극복의 대전환점이 되도록 중력이산(衆力移山)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26-05-14

대구도시철도 4호선 건설, 다시 ‘안갯속으로’

여야 대구시장 후보들이 대구 도시철도 4호선을 이미 설계된 ‘AGT(철제차륜 경전철)’ 방식 대신 3호선과 같은 ‘모노레일’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약을 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도시철도 4호선은 현재 3호선 역인 ‘수성구민운동장역’을 환승역으로 해서 동대구역, 경북대, 엑스코를 거쳐 이시아폴리스까지 이어지는 12.6km 노선이다. 최대 15m 높이의 콘크리트 교각에 설치된 상판 위로 철제 바퀴 전동차가 달리는 AGT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논란은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와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가 4호선을 모노레일 방식으로 전환하겠다고 공약하면서 비롯됐다. 김 후보는 “AGT 방식은 소음과 일조권 침해 등으로 주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 장기적으로 모노레일 방식인 3호선과 서로 호환이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했고, 추 후보도 “주민 공감이 없는 SOC 사업 추진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4호선은 모노레일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했다. 두 후보가 공통으로 모노레일 방식을 공약으로 채택한 이유는 소음과 일조권 침해, 경관 훼손 등에 대한 주민 민원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적인 걸림돌이다. 4호선은 이미 국토부가 AGT 방식으로 사업계획을 승인했으며, 오는 9월 착공하기로 돼 있다. 지난 2020년 12월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 이후 지금까지 들어간 사업비만 378억 원이다. 특히 4호선을 모노레일 방식으로 바꾸려면 철도안전법을 개정한 뒤, 기본계획 수립 등 절차를 다시 거쳐야 해 공사가 늦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투입된 설계비 등 수백억 원의 매몰 비용과 공사 지연에 따른 건설비 증가가 큰 부담이다. 대구시로선 곤혹스러운 입장이 됐다. 주민 설명회와 공청회 등 여러 차례 갈등 조정 과정을 거쳐 겨우 궤도에 오른 4호선 건설사업에 대해 유력 대구시장 후보들이 공법 변경을 공약으로 내걸자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대구 북구 주민들의 최대 숙원사업인 도시철도 4호선 건설 사업이 원점 재검토될 가능성이 커져 사회적 논란이 불가피하게 됐다.

2026-05-14

이혼이라는 하산

지난 겨울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가볍게 월포 용산으로 첫 등산을 했고, 내연산 선일대와 문수봉, 삼지봉을 차례로 등정했다. 새벽 등산으로 간 비학산의 가파른 코스 중간, 포항 시가지와 동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암바위에 앉아 쉬며 시원한 생수를 마실 땐 사람이 자신의 육체와 자연만으로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얼마 전엔 내연산 향유봉에 다녀왔다. 아침 일곱 시 반에 등산을 시작했는데, 하산해 보경사에 도착한 시간이 다섯 시 반이었으니 장장 열 시간의 산행이었던 셈이다. 향유봉에 올랐다는 기쁨과 성취감도 컸지만, 가장 뿌듯했던 것은 열 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끝내고 안전하게 하산한 것이었다. 등산한 지 8시간쯤 되자 발바닥이 아프고, 기계적으로 걷고 있는 다리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고비마다 눈앞에 펼쳐지던 내연산 곳곳의 절경은 이런 신체적 한계와 통증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등산을 하다 보면 정상까지 오르는 것보다 하산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큰 집중력과 균형 감각이 필요하다. 오를 때와 달리 내려올 땐 조금만 집중하지 않아도 미끄러지거나 낭떠러지 옆에서 휘청거리는 등 위험한 순간이 생긴다. 정상에 올랐을 뿐, 하산할 때 사고가 난다면 그것은 등산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등산을 하며 얻은 기쁨과 건강을 원동력으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또 다음 등산을 기약하기 위해서도 안전하게 하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보면 결혼과 인생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인생이라는 등산의 일부에 불과하다. 부부가 불가피하게 헤어지게 되었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이혼이라는 결혼생활의 하산을 잘 해놓아야 한다. 조급하게 이혼했다가 뒤늦게 후회하고 생활고까지 겪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전 부인이 원하는 대로 재산분할을 해주고 자녀들에 대한 양육비도 고액으로 정해 이혼했던 분이 상담을 왔다. 당연히 전 부인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어주었고, 몇 년간은 이분도 자유를 찾는 듯했다. 무리를 해서 양육비를 보내며 전처와 자녀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업이 힘들어지자 양육비를 보내지 못하는 달이 생겨났다. 그동안 많은 돈을 받은 전처가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이들의 엄마는 바로 형사고소와 감치 신청, 운전면허 정지 등의 모든 조치를 취해왔다. 조금 시간이 걸리고 변호사 비용이 들더라도 이혼할 때 형편에 맞는 적정한 수준의 재산분할과 양육비를 정했더라면 이런 상황은 없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돈이 생기면 주겠다는 상대방의 말만 믿고 조급하게 양육비나 재산분할금을 적게 정해 이혼했다가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다. 하지만 법원을 통해 한 번 정한 양육비 등을 변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혼이라는 매듭을 잘 짓고 헤어지는 것은 결혼이라는 등산의 실패가 아닌 완성이 되기도 한다. 인생의 한 고비에서 무사히 하산한 이후에야 비로소 인생의 다음 단계를 시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세라 변호사 △고려대 법과대학, 이화여대 로스쿨 졸업 △포항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26-05-14

‘물-에너지융합’

한때 전기요금은 전기요금대로, 수도요금은 수도요금대로 따로 확인하는 일이 당연했다. 고지서 따로 사이트 따로 생활 속 절약 정보도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폭염과 가뭄이 일상이 된 지금은 물과 에너지를 따로 볼 수 없다. 정부가 5월 공모전을 통해 ‘물-에너지 융합’을 적극 알리려는 것도 그 이유다. 더 눈여겨볼 대목은 국가 차원의 핵심 과제가 멀리 있는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안동 임하댐의 수상태양광, 대구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의 지능형 물기술처럼 대구·경북의 인프라가 이미 그 가능성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자부심에 머무르지 않고, 주민이 체감하는 복지 기술로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다. ‘물-에너지 융합’은 어렵게 들릴 수도 있지만 뜻은 단순하다. 물을 공급하고 정화하는데 에너지가 들고,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도 물이 필요하니 둘을 하나의 순환 체계로 함께 관리하자는 발상이다. 대구·경북은 이 전략을 시험하고 키우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대구는 폭염 대응과 도시 수요관리가 시급하고, 경북은 풍부한 전력 생산 기반과 넓은 농촌·산업 현장을 함께 안고 있다. 그래서 이 지역의 ‘물-에너지 융합’은 단순한 기술 실험이 아니라 도시의 생활 안전, 농촌의 물복지, 산업의 안정 공급을 한꺼번에 풀어내는 지역 발전 전략이 될 수 있다. 전면적 통합을 서두르기보다는 전력 AMI(지능형 원격검침 인프라)와 수도 데이터를 단계적으로 연계해 누수·요금급증·취약계층 이상 징후를 먼저 잡아내는 현실적 접근이 더 설득력 있다. 국내외 사례가 주는 시사점도 분명하다. 이제 경쟁력은 개별 설비 하나가 아니라 ‘물과 에너지를 함께 줄이고 함께 돌리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안동 임하댐 수상태양광은 낮에는 태양광, 밤에는 수력이라는 발상을 기존 송전선로 활용과 결합해 혁신성을 보여줬고, 지역사회 수익 환원 모델까지 더해 상생의 가능성을 키웠다. 대구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에너지 저감형 수처리 기술을 실증하고 수출로 연결하는 글로벌 전초기지로 성장하고 있다. 앞으로 대구는 신도시·산단·하수처리장 같은 도시 공간에서 스마트 물관리와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을 촘촘히 묶는 도시형 모델을 키워야 한다. 경북은 스마트팜, 양수발전, 농촌 상수도 현대화처럼 물과 에너지를 함께 아끼는 도농복합형 모델을 넓혀야 한다. 과제도 남아 있다. 수도와 전력, 개인정보와 요금체계가 아직 따로 움직이는 만큼 제도 정비와 부처 간 협력이 따라줘야 한다. 기술만 앞서가고 주민 설명이 늦으면 정책은 힘을 잃는다. 그래서 ‘물-에너지 융합’은 거창한 구호보다 생활 언어로 다가가야 한다. 누수 경보를 빨리 받고, 폭염 때 더 안전해지고, 요금 부담을 줄이며, 취약한 이웃의 안부까지 살필 수 있다면 주민은 이 정책의 필요성을 바로 이해할 것이다. 대구·경북은 이미 실험장이 아니라 선도 무대가 될 조건을 갖췄다. 이제 남은 일은 지역의 물과 전기를 따로 보던 오래된 습관을 넘어, 지속 가능한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일이다. 그 실천이 쌓일수록 대구·경북의 다음 발전 모델도 더 또렷해질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5-14

스승의 날이 되묻게 하는 것들

5월이 되면 어김없이 스승의 날이 찾아온다. 평생교육원에 다니는 지인이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선물을 하자면서 돈을 거둔다고 해서 냈단다. 지인은 교단에 있다 정년퇴직한 분이라 씁쓰레 웃는다. 하고 싶으면 혼자 하면 되는 것을 꼭 선동하는 사람이 있단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그날 하루 선물로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평소 태도에서 마음 자세가 갖춰져야 하는데 특정한 날에만 저렇게 요란을 떠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돈 거둔 사람이 선생님에게 가장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며 웃음을 짓는다.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 탄신일과 같은 날이다. 세종대왕처럼 존경받는 스승 상을 기리자는 상징적 의미가 덧붙여졌지만, 그 출발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은사를 찾아뵙던 작은 실천이었다. 강경 여고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이 5월 8일을 맞아 스승을 찾아간 것이 시초였다. 이 날이 어버이날과 겹쳐 일주일 뒤로 미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취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때 스승의 날은 학생들이 돈을 걷어 선물을 마련하는 날이 되었고,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촌지와 선물이 교사와 학생, 학부모 사이의 관계를 왜곡시키기도 했다. 스승의 존엄은 교육적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지, 봉투의 두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잘나가는 부모를 둔 친구들이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때가 가정방문 이후와 스승의 날 이후라는 것은 아무리 철부지 어린 나이라고 해도 알 수 있었다. 이 같은 폐단이 사회문제로 번지자 스승의 날 행사는 위축되었고, 아예 행사를 없애거나 휴업하는 학교까지 등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사의 권위는 과거의 절대적 위치에서 벗어났고, 오늘날 교사는 법적 책임과 민원에 시달리는 노동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학생과 학부모의 과도한 요구, 교육활동에 대한 불신, 사고 발생 시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돌리는 풍토는 교실을 위축시키고 있다. 물론 과거의 권위주의적 교사상을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체벌과 차별이 묵인되던 시대를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사를 단순한 서비스 제공자나 감정노동자로만 보는 시선 또한 교육을 황폐하게 만든다. 교육은 계약관계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이의 책임감과 배우는 이의 존중이 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스승의 은혜’ 노랫말처럼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다. 그렇다고 교사를 무조건 신격화하자는 뜻은 절대 아니다. 스승은 스승다워야 하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하며, 학부모는 교육의 동반자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다. 존경은 선물로 살 수 없고, 권위는 법으로 강제할 수 없다. 교실 안에 상호 신뢰와 책임의 문화가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스승의 날은 형식적인 기념일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을 되새기는 날이 될 것이다. 스승의 날이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은 선물 문화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다. 교사의 권위와 학생의 인권이 조화를 이루는 학교, 학부모의 협력과 국가의 책임 있는 교육 정책이 뒷받침되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되찾아야 할 진정한 교육의 모습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5-14

봄꽃 나들이 트리플 크라운, 경남 함안 오월의 봄

경남 함안의 지형은 전체적으로 남고북저다. 군의 북쪽 경계선을 따라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서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 가면서 고도가 높아져서다. 이러한 지형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세인 북쪽으로는 산, 남쪽으로는 물이 흐르고 평야가 펼쳐져 있는 것과는 상반된다. 오죽했으면 물이 왕이 있는 북쪽으로 향해 거슬러 흐른다고 하여 예로부터 ‘역수의 고장’이라고 홀대까지 받았을까. 그러나 모든 것에 영원한 것은 없다. 지세가 낮아 낙동강과 남강의 빈번한 범람으로 오랜 세월 홍수의 피해를 겪었으나, 홍수를 막기 위해 쌓은 둑이 많아 지금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고나 할까. 남강을 낀 군북면·법수면·대산면과 낙동강을 낀 칠서면·칠북면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넓게 펼쳐져 농경지로 이용되고, 그 언저리 땅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꽃들의 잔치가 벌어진다. 이번 주에는 5월을 대표하는 꽃들을 탐방하는 코스로 그 역할을 해보고자 한다. 다양한 색상의 탐스러운 꽃 작약을 원 없이 볼 수 있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거리며 가슴속에 내재 된 순백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샤스타데이지(Shasta daisy)’도 절정인 곳이다. 선홍빛 꽃양귀비와 눈꽃처럼 섬세한 흰 안개꽃, 수레국화가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을 자아내는 꽃단지도 포함된다. 계절의 여왕에 가장 잘 어울리는 구성인 셈이다. 제일 먼저 소개할 곳은, 함안군 칠서면의 ‘강나루 생태공원’이다. 그곳에는 해마다 청보리 작약 축제가 열리는 장소다. 가장 큰 매력이라면 초록빛 청보리와 분홍빛 작약꽃을 동시에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약 42만㎡ 규모의 청보리밭과 작약꽃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청보리의 싱그러움과 작약의 화사함이 함께 어우러져 다른 지역 축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축제가 끝났다고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축제 기간이 지났다고 작약이 전부 지는 것은 아니다. 5월의 중순까지는 작약꽃을 충분히 제대로 감상할 수가 있다. 두 번째 꽃 탐방지는 악양 생태공원이다. 샤스타데이지와 수레국화가 만발하는 곳으로, 칠서 강나루 생태공원과는 차량으로 약 30분 정도 떨어져 있다. 오전이나 오후에 강나루 생태공원과 일정을 나눈다면, 그 공백기에 점심시간까지 곁들이면 그리 먼 거리도 긴 시간도 아니다. 남강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전국 최장 길이의 둑방과 주변의 수변 및 습지와 연계하여 자연 친화적인 문화공간으로 조성된 장소다. 사계절 내내 볼거리가 풍부하다. 어린이 놀이시설, 야외공연장, 방문자센터 등의 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가족 단위로 찾을만하다. 4월의 꽃잔디를 시작으로 샤스타데이지와 금계국이 차례로 장관을 이루고, 다양한 야생화 및 핑크뮬리를 식재해 볼거리를 제공한다. 자연 속에서 힐링을 만끽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일 수 있는 장소다. 악양 생태공원에는 지금 샤스타데이지가 절정이다. 샤스타데이지는 일명 “샤스타 국화”라고도 불리는데, 국화과의 여러해살이의 초본 식물로 알려져 있다. 1890년대 미국의 원예가이자 식물학자인 루서 버뱅크(Luther Burbank)가 여러 종의 데이지를 교배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샤스타데이지란 이름은 미국 캘리포니아 북쪽에 있는 샤스타 산(Mt. Shasta)에서 따온 것이다. 샤스타 산은 만년설이 있는 화산으로 늘 눈이 쌓여있어 흰 산(White Mountain)이란 별명이 있다. 샤스타데이지의 깨끗한 흰색 꽃잎이 눈을 연상시켜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걸로 여겨진다. 지난해보다 식재 면적이 훨씬 더 넓어졌다. 약 3000평 규모의 샤스타데이지 꽃밭을 조성하여 더욱 풍성한 경관을 선보인다. 꽃밭이 펼쳐진 주변 남강의 둑방에는 푸른빛이 매력적인 수레국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새하얀 샤스타데이지와 파란 수레국화가 어우러져 악양 생태공원만의 청량하고 다채로운 봄 풍경을 연출하는 것이다. 샤스타데이지가 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노란 금계국도 만개할 것으로 예상되어, 악양 생태공원의 봄꽃 풍경은 한층 더 풍성해질 게 분명하다. 조금 더 걸어보는 트레킹을 원한다면 바위 절벽에 매달린 함안 악양루를 왕복할 수도 있다. 조선 철종 8년(1857)에 세운 정자로 한국전쟁 이후에 복원하였으며, 1963년에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옛날에는 ‘기두헌’이라는 현판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청남 오재봉이 쓴 ‘악양루(岳陽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생태공원 둑방에서 남강 주변으로 데크 로드가 설치되어 있어, 발 아래의 남강과 건너편 악양둑방길의 꽃양귀비 물결을 원경으로 감상하면서 걸을 수 있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곳이 바로 함안의 악양 둑방길이다. 생태공원에서는 도보로 20분, 차량으로 약 3분 정도의 거리다. 왕복 7.2㎞에 이르는 탁 트인 둑길과 13㏊ 규모의 광활한 둔치에는 지금 ‘악양둑방 봄꽃 경관단지’가 운영되고 있다. 붉은 양귀비와 수레국화, 안개꽃이 어울려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는데, 그 끝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져 있다. 오는 25일까지 이어지는 운영 기간에는 함안군과 법수면 악양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농특산물을 판매하는 ‘특산물 직거래 장터’도 함께 열린다. 싱그러우면서도 화려한 봄의 색깔은 어쩌면 각 지자체의 축제에서 정점을 찍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하는 추세다. 그러나 아무리 뜻이 있다고 해도 환경이 받쳐주지 못하면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경남 함안은 이제 축복받는 지역일지도 모른다.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칠서에는 강나루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남강의 물결이 지나는 곳에서는 ‘악양 생태공원’과 ‘악양 둑방길’이 조성되어 많은 탐방객을 불러 모을 수 있으니 말이다. 5월의 함안은 온통 꽃 잔치다. 광풍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이유가 되었다. 하루 만에 다양한 꽃들을 즐기고 섭렵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보잘것없는 글들이, 어느 누군가에게는 하나의 여행 이정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기도 하다. 글·사진/지홍석 수필가·여행 칼럼니스트

2026-05-14

혼자라는 깊이

사람들은 종종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움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누군가 없이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 여행을 가는 일들을 어딘가 쓸쓸한 장면처럼 여긴다. 나는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 오래 머물다 보면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해질 때가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와 관계 속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된다. 알게 모르게 상대의 표정과 말투를 살피고, 분위기에 맞춰 반응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계속 조율하며 정작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놓쳐버리게 된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내 안에서 아주 작은 감정들이 요동치고 있음을 미세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무엇 때문에 피곤했는지, 어떤 순간에 괜히 서운했고 무엇이 좋았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런 감정들이 쉽게 묻혀버리지만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는 그 감정들이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조용히 남아 머무르는 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며 내 자신에게 솔직해지게 된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고,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 자체도 달라진다. 밥을 먹을 때는 음식의 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같은 거리를 걸어도 햇빛의 세기나 온도, 공기의 냄새, 초여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같은 사소한 장면들이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대화와 웃음 속으로 흘러갔을 순간들이 혼자일 때는 공들여 찍는 사진처럼 오래 머무른다. 그래서 혼자는 세상을 더 느리게 바라보게 만든다. 빨리 지나쳐버렸던 감정과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느리게 감각하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해지는지를 조금씩 다시 발견하게 된다. 혼자의 가장 큰 힘은 아마 ‘깊이’에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시간은 넓게 퍼져 나간다. 웃고 떠들고 여러 감정을 나누며 바깥으로 확장된다. 반면 혼자 있는 시간은 안쪽으로 깊어진다. 생각 하나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 풍경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 수도 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복잡했던 마음이 혼자 조용히 걷는 시간 속에서 갑자기 정리되기도 한다. 억지로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으며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회복의 과정에 가깝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이 언제나 완전한 충만함만 주는 것은 아니다. 혼자 여행을 가거나 낯선 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문득 외로움이 밀려오는 순간들도 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봤을 때,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무심코 웃음이 나오는 순간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종종 ‘이걸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이들이나 연인을 볼 때면 괜히 마음 한구석이 조용히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기에 오히려 사람의 소중함도 더 선명해진다. 늘 곁에 있을 때는 익숙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존재들이 떨어져 있는 시간 속에서는 그 의미가 더 또렷해진다. 좋은 것을 봤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말하지 않아도 생각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마음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혼자는 나를 외롭게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더 깊게 이해하게 만드는 시간 같기도 하다. 혼자 있는 동안 사람은 내가 결국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 익숙한 사람 곁에 앉아 있을 때의 편안함, 평범해서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들이 다시금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어쩌면 혼자의 힘이란 외로움을 견디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힘인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시간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된다. 무엇이 자신을 지치게 했는지, 어떤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삶을 원하는지 같은 마음의 결들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충분히 가까워진 사람은 타인에게도 이전보다 더 다정하고 깊은 마음을 내어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본 사람만이 타인도 더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 /윤여진(시인)

2026-05-14

바닐라 라떼에 대한 찬양

나에게는 몇 가지 작업 루틴이 있다. 카페에 가서 너무 해가 들지 않는 자리에 앉는 것. 시는 노트에 펜으로, 걸어 다니면서 직접 손으로 쓰는 것. 음악 작업은 데스크탑 또는 노트북으로만 하는 것. 가끔은 이런 반복이 답답해서 완전히 바꿔서 해볼 때도 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면 나 자신이 익숙한 감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수없이 루틴을 바꾼다고 해도, 변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바닐라 라떼.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를 즐겨 마시지만 작업할 때는 반드시 바닐라 라떼를 시킨다. 그건 어느 카페에 가도 마찬가지다. 친구들이 종종 왜 그렇게 바닐라 라떼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냥 당이 떨어져서라고 답하곤 한다. 거짓은 아니다. 하나 그게 이유의 전부도 아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 카푸치노나 카페 모카 같은 것을 시켜보기도 했다. 묘하게도 그럴 때마다 작업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할 때 아메리카노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건 이미 작품 내외적으로 쓴맛을 제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쓴맛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을 중화해줄 수 있는 건 단맛 외에 없다. 다른 걸 하나씩 먹어봤을 때, 카푸치노는 덜 달고 카페 모카는 너무 달았다. 내게 필요한 건 적당한 단맛이다. 아직까지 바닐라 라떼만큼 적절한 단맛을 찾지 못했다. 단 음식이 뇌를 활성화하고 인지 능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건 지난 세기부터 진행된 수많은 연구에 따라 검증된 사실이다. 뇌는 우리 몸이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의 약 20%를 소모하며, 그 주요 에너지원은 포도당이고, 혈중 포도당 농도가 적정 수준일 때 기억력과 집중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섭취하면 혈당 스파이크를 일으킨다고 하니… 내게 적절한 양은 바닐라 라떼 그란데 사이즈(473ml) 정도다. 마감까지 1시간이 걸리든 10시간이 걸리든 나는 한 잔 이상은 마시지 않는다. 양은 결코 변하지 않지만 날씨에 따라 종류는 달라진다. 아이스냐 핫이냐. 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므로 조금만 춥다고 느껴지면 바로 따뜻한 것을 시킨다. 특히 쌀쌀한 한겨울에 따뜻한 바닐라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딱딱했던 어깨도 조금은 말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바닐라 라떼 한 모금은 멍때리기, 인터넷에서 아이쇼핑하기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예열 과정인 셈이다. 카페에 갈 여유 없이 집에서 급하게 마감을 해내야 할 때는 조금 난감하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당을 채울 만한 무엇은 보이지 않고 물이나 이온 음료 혹은 맥주만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 때에 술을 마실 순 없으니 물로 목을 축일 따름이다.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경우를 대비해 내가 쟁여두는 것이 있는데, 그건 초콜릿이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그런 초콜릿은 아니다. 마트나 편의점을 가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 초콜릿, 특히 가나 초콜릿을 좋아한다. 다른 초콜릿은 가끔 질리곤 하는데 이상하게 가나 초콜릿만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쌓아놓으면 너무 많이 먹게 될까 봐 딱 두세 개 정도만 냉장고에 넣어둔다. 70g이 든 초콜릿 하나가 나의 하루치 정량이다. 바닐라 라떼가 없을 때 당을 수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만일 바닐라 라떼도 없고 가나 초콜릿도 없다면? 그럼 나는 연신 쓴맛을 보기만 한다. 작업물 내에서 느낀 쓴맛은 중화되지 않고 입 안을 내내 맴돈다. 이온 음료를 마셔도 단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건 마감 시한이 아니다. 마감 시한이 임박했음에도 나를 도와줄 적절한 단맛이 없는 것이 두렵다. 몰입에 꼭 필요한 부품이 빠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하다 여겨질 수 있지만 바닐라 라떼와 가나 초콜릿이 없는 나는 맨발로 현관을 나서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고지방, 고당분 음식을 계속 먹으면 뇌의 보상 회로가 변해 무의식적으로 단 음식을 더 찾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단 음식을 통해서 도파민이 나오도록 시스템이 변화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나는 바닐라 라떼를 원해서 마신다기보단 이미 바닐라 라떼의 노예가 된 셈이다. 이미 나의 뇌와 마음은 작업-바닐라 라떼-마감 이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닐라 라떼는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다. 하나 아쉬운 건 근래 의사 선생님이 내게 카페인을 줄이라고 권했다는 것이다. 그럼 저의 작업은요? 저의 바닐라 라떼는요…? 아쉬운 대로 요즘엔 디카페인 바닐라 라떼를 마시고 있다. 연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이 단맛은 다른 음료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다. 내가 글쓰기를 멈추는 날이 오지 않는 한 바닐라 라떼를 끊을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구현우(시인)

2026-05-14

로즈데이

사랑하는 이를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1년 내내 지속돼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때론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그럴 땐 정성 담긴 선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매년 5월 14일은 로즈데이(Rose Day)다. 나이 지긋한 세대에겐 생소하겠지만, 젊은 연인들은 이날 서로에게 장미를 선물하며 마음 속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다. 색깔에 따라 장미의 꽃말은 다양하다. 붉은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 분홍 장미는 행복한 사랑, 하얀 장미는 순결한 사랑이라고 한다. 어느 것 할 것 없이 좋은 의미를 담고 있기에 연인들의 미소를 부를 듯하다. 센스 있는 사람이라면 장미와 함께 향수나 립스틱을 건네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받는 사람의 기쁨이 더 커질 것이니. 실제로도 5월 14일엔 꽃가게에서 장미의 판매량이 반짝 상승세를 보이기도 한다고. 로즈데이에 얽힌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코로나 19 사태’가 심각했던 시기엔 서로간의 접촉이 여의치 않았기에 장미가 덜 팔렸다는 것. 장미를 전하며 키스하는 것도 부담스럽던 몇 년이 있었다는 게 벌써 먼 옛날 기억 같다. 로즈데이를 상업적 전략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발렌타인데이는 초콜릿 제조사가, 빼빼로데이는 과자 회사가 판매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로즈데이 역시 장미를 포함한 꽃을 유통하는 업자들의 마케팅 전략일까?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소박한 장미 한 송이를 전하며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손가락질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사랑은 시대불문 귀하고 소중한 가치니까.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5-13

스승으로 가득한 세상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교실마다 카네이션이 오가고 감사편지가 쌓이던 날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 의미도 많이 옅어졌다. 달력 위 기념일의 하나쯤으로 지나간다. 교육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스승’이라는 단어가 어딘지 낯설고 무거운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스승들을 만난다.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만 스승은 아니다.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세상은 스승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에게나 일을 처음 배웠던 시절이 있었다. 서툴게 보고서를 쓰고, 거래처 전화를 떨리는 목소리로 걸고, 세상 물정을 몰라 우왕좌왕하던 때가 있었다. 한마디 조언을 건네주던 선배가 스승이었다. 짧은 충고 하나가 오래 남아 삶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특별한 가르침도 아니었지만, 묵묵히 일하는 뒷모습,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 실패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침착함 등이 우리를 조금씩 바꾸었다.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를 바라보며 세상을 배웠다. 동네 어귀에서 만났던 이웃들도 스승이었다. 삶이 어려워도 얼굴빛을 잃지 않던 사람들, 가진 것은 늘 부족해도 늘 남을 챙기던 사람들, 작은 약속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던 사람들. 그들은 우리에게 강의를 하지는 않았지만, 삶을 가르쳤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았을까. 사람은 교실에서보다 사람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끊임없이 부대끼던 친구들도 스승이다. 친구를 ‘함께 노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지만, 지나고 보면 친구야말로 가장 오래 곁에서 서로를 가르친 존재들이었다. 어떤 친구는 용기를 가르쳤고, 어떤 친구는 실패를 견디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친구는 인간이 얼마나 외롭고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함께 웃고 싸우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면서, 우리는 관계의 어려움과 소중함을 배우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가까이에 있었기에 오히려 인식하지 못했던 스승들이 있다. 부모와 가족. 어린 시절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여긴다. 밥을 차리고, 학비를 마련하며, 늦은 밤까지 기다려주는 일이 마치 원래 그런 것인 양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부모가 되어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군가를 끝없이 책임지고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일인지를. 부모는 말로 가르치기보다 삶으로 가르쳤다. 인간의 인내와 책임, 그리고 사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스승들도 너무나 많다. 책을 지어준 저자들. 젊은 시절 밤을 새워 읽었던 문장 하나가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였다. 어떤 철학자의 질문은 오랫동안 마음속을 떠돌며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어떤 소설가는 인간의 슬픔과 아픔을 깨닫게도 하였다. 독서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스승을 만나는 일이 아니었을까. 세상은 생각보다 거대한 교실이다. 스승들로 가득 찬 널따란 교실이다. 평생 배우면서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배웠고, 누군가를 가르치며 살아간다. 이어지는 배움의 사슬 속에서 인간은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되어 간다. ‘스승의날’이란 결국, 그렇게 오래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와 연결에 대해 깨우치고 감사하는 날인가 싶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5-13

특별법 통과로 탄력받는 포항 AI센터 건립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산업 진흥에 관한 특별법(AIDC 특별법)이 지난 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인공지능(AI) 산업의 경쟁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AIDC 특별법의 통과로 국내 AI 인프라시장에도 큰 변화가 예고된다. 이번 특별법은 단순 지원하는 정책 수준을 넘어 인허가 절차 간소화, 전력공급 규제 완화, 시설기준 완화, 투자 활성화 등 조속한 AIDC 구축과 투자유치를 위한 규제완화가 핵심 내용이다. 특히 비수도권 AIDC에 대해 전력계통 영향평가를 면제하고 발전사업자와 직접 전력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은 에너지 자립도가 높은 포항에 매우 유리한 내용이다. 포항에는 오픈 AI와 삼성, 네오AI 클라우드가 공동으로 동남권 글로벌 AI 테이터센터 건립을 추진 중이다. 오천읍 광명일반산업단지 부지에 40MW급 AI데이터센터를 구축한다. 6월에 착공해 내년 연말까지 준공을 계획하고 있다. 2단계 사업으로는 같은단지에 200MW급 데이터센터도 짓는다. AI 데이터센터는 현대 산업의 쌀이자 AI의 고속도로다. AI 데이터센터가 포항에 들어선다는 것은 포항이 첨단지식기반 도시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강산업으로 국가 근대화를 이끌고, 이차전지로 모빌리티시장을 선점한 포항이 이제는 AI 센터가 더해짐으로써 디지털 경제의 핵심거점으로 발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포항이 구미와 울진을 제치고 AI 데이터센터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우수한 전력 인프라, 철강과 이차전지 수요를 AI 인프라와 연결할 수 있는 강점, 포스텍과 같은 우수한 대학과 잘 갖춰진 연구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점 등을 잘 활용해 AI 연관산업을 유치하고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유출되지 않고 지역에서 일할 수 있도록 AI 생태계를 만들어 가는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포항시는 특별법 시행에 맞춰 원스톱 지원 체제를 더 공고히 해 많은 기업이 불편 없이 입주하도록 하는 동시에 포항이 국내 AI 혁신의 거점으로 우뚝 서도록 열정을 쏟아야 할 것이다.

2026-05-13

대구관광객 200만 시대 열릴 수 있을까

대구 관광업계가 대구시장에 출마한 여야 후보들을 차례로 초청해 토론회를 하면서 지역 관광산업의 문제점이 부각되고 있다. 대구 관광업계 전직 회장단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구 관광을 사랑하는 모임’은 지난달 28일 민주당 김부겸 후보에 이어, 12일에는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를 초청해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대구시의 관광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에는 대구지역 호텔·숙박업소·의료관광·MICE(복합전시산업)·인바운드 업계 관계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추 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기조발제를 한 덱스코(대구 국제회의 기획사) 한상돌 대표는 “지난해 한국 방문 외국인 관광객은 1894만 명으로 역대 최대였지만 수도권 집중률이 81%에 달했다. 그러나 대구 방문 외국인은 37만 명(1.2%)에 불과했다”며, 그 원인을 홍준표 전 시장 취임 이후 대구관광재단, 대구의료관광진흥원, 대구컨벤션뷰로 등 관광 관련 조직 통폐합과 예산 삭감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토론자로 나선 박재영 BL성형외과 이사는 “2019년 대구는 비수도권 최초로 외국인 의료관광객 3만 명을 유치했고 의료 수입만 1200억 원 규모였다. 그러나 지금은 의료관광 예산이 42억 원에서 6억 원 수준으로 줄어 해외 홍보센터 운영이 중단됐다. 의료 관광 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며 걱정했다. 사실 대구는 코로나 이전 외국인 환자가 3만 명을 돌파하며 의료관광 선도 도시로 평가받았지만, 지금은 ‘메디시티 대구’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외국인 환자 수가 뚝 떨어졌다. ‘굴뚝없는 산업’으로 불리는 관광업은 대구경제 활로를 찾을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외부인에게 대표적으로 내세울 만한 관광 콘텐츠가 없어 관광객을 수도권과 부산, 제주도 등에 뺏기고 있는 실정이다. 대구시민의 자부심인 동성로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날 토론회에서 추 후보가 “한국을 찾는 관광객 가운데 최소 5%(150만~200만명)는 대구에 오도록 하겠다”고 한 공약에 기대를 해본다.

2026-05-13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

한달 전쯤 ‘손석희의 질문들’에 출연한 김애란 작가의 화법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시청자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손석희의 어떤 질문에 김애란 작가는 “소설을 ‘집’이라고 생각한다면, 사회적 주제를 집의 콘크리트나 뼈대로 세우지 말고 그 집을 나갔을 때 그 사회적 공기가 몸에 냄새처럼 배어서 바깥 공기와 만나서 환기되는 식으로 상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손석희의 표현대로 ‘(내 작품을) 사회적 메시지로 규정해서 독자들에게 부담드리고 싶지 않아요.’라고 해도 될 말을 이렇게 길게 말하면, 짧고 빠르게를 추구하는 요즘 세상에 답답하게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 영상에 많은 시청자가 감동했다는 댓글을 달고 있다. 짧게 말해도 될 말을 길게 말하기의 대가로 프루스트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 1913년 1권이 출간되고 1921년 작가 사후 1927년까지 14년에 걸쳐 7권으로 완간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는, 처음에는 출판해 주는 곳이 없어 자비로 출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출판되자마자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 전문 작가나 일반 독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책이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가 첫 책 출간을 제안받고 이런 책을 누가 읽겠냐고 거절했다고 할 정도로(후에 지드는 그 거절이 자기가 평생에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통탄했다고 한다.), 이 책은 묘사가 너무 상세하고 문장이 길어서 엔간한 집중력이 없으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책이다. 프루스트는 왜 이렇게 읽기 어렵게 자세히 썼을까.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에 그 이유가 나온다. 1919년 젊은 외교관 해롤드 니콜슨은 리츠 호텔에서 열린 파티에서 프루스트와 만난 이야기를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주 근사한 사건이었다. 나는 그에게 위원회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얘기했다. 나는 “흠, 우리는 보통은 10시 정각에 모입니다. 뒤에는 비서들이 있고요···.”라고 말했다. “아뇨, 아뇨! 말씀을 너무 빨리 하시네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주세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악수, 지도들, 종이가 스치는 소리, 옆방의 홍차, 마카롱 쿠키들을 이야기했다. 그는 아주 열중해 들으면서 가끔씩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선생님,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라고 끼어들었다. 이런 문장을 읽노라면 우리는 그것을 경험한 화자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이 ‘빨리 하지 않을 때’ 연민을 느낀다고 한 말에 동의하게 된다. 빨리 하지 않을 때 얻는 또 다른 이득은 자신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정신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급변하는 사회에도 원인이 있지만, 쇼츠나 릴스, SNS 같은 단발적이고 즉각적인 인터넷 문화에 매몰된 탓도 크다. 이렇게 천천히 자세히 말하려면 큰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김애란은 집중력을 우리 시대의 도덕이라고 했을 것이다. 김애란이나 프루스트만큼 자세히 관찰하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문학을 읽으며 연민과 자기 챙김을 회복하면 좋겠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5-13

자다가 종아리에 쥐가 나는 이유

밤에 자다가 갑자기 종아리가 뒤틀리듯 아파 깜짝 놀라 깨는 사람들이 많다. 쥐가 났다고 표현하는데 종아리 근육이 갑자기 강하게 수축하면서 극심한 통증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대부분은 몇 분 지나면 풀리지만 자주 반복되면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다음날까지 근육통이 남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그네슘 부족이나 피로를 원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허리, 골반, 혈액순환, 자율신경 긴장까지 복합적인 영향을 받는다. 종아리 근육은 다리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허리에서 내려오는 신경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특히 허리 4번, 5번, 천추 부위 신경이 예민해져 있거나 골반 정렬이 틀어진 경우 종아리 근육이 지속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일 수 있다. 오래 앉아 있는 직장인이나 운전을 많이 하는 사람들 허리가 자주 뻐근한 사람들에게 야간 종아리 경련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엔 괜찮다가 밤에 누워 몸이 이완되는 순간 신경과 근육의 균형이 무너지며 갑자기 강한 수축이 발생한다. 실제로 허리디스크 초기 환자들 중에는 허리 통증과 함께 종아리 당김이나 야간 경련 증상을 호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혈액순환 문제도 중요하다. 종아리는 ‘제2의 심장’으로서 혈액을 위로 밀어 올리는데, 운동 부족이나 오래 서 있는 생활, 하체 근육 긴장 등이 지속되면 내부 순환이 떨어지고 피로 물질이 쌓인다. 이런 상태에서는 작은 자극에도 쉽게 경련이 일어난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근육량 감소와 혈관 탄력 저하가 함께 오기 때문에 야간 쥐 증상이 더 흔해진다. 젊은 사람보단 노인들한테 특히 많이 발생하는 이유다. 그리고 몸이 긴장 상태를 오래 유지하면 교감신경이 과흥분되고 근육 역시 충분히 이완되지 못한다. 낮 동안 긴장했던 몸이 밤에 갑자기 이완되는 과정에서 근육 수축 신호가 비정상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단순히 영양제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허리와 골반 정렬을 바로잡고 긴장된 종아리 근육과 신경 주변을 함께 치료해야 한다. 추나 치료를 통해 허리와 골반의 균형을 맞추고 뭉친 종아리 근육과 신경 주행 부위를 풀어주는 치료를 시행한다. 최근에는 초음파를 이용해 긴장된 근육이나 신경 주변을 정확히 확인하면서 약침 치료를 하는 경우도 많다. 눈으로 구조를 직접 보면서 치료하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접근이 가능하다. 특히 비복근과 가자미근 주변 근막 긴장 좌골신경 주행 부위 유착 등을 함께 치료를 해주면 좀 더 확실히 치료가 된다. 결론은 혈액순환문제라 노인들은 혈액순환과 근육 회복을 돕는 한약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자기 전 종아리 스트레칭을 가볍게 해주고 오래 앉아 있었다면 하체를 충분히 움직여 주는 것이 좋다. 안마기를 이용하거나 손으로 종아리를 충분히 마사지 해주면 도움이 된다. 여름에 갑자기 경련이 나면 물 대신 이온음료를 복용하고 물을 지나치게 적게 마시는 습관도 근육 경련을 악화시킬 수 있으니 물은 적당히 섭취하는 것이 좋다. 평소 발목이 잘 붓거나 다리가 차가운 사람들은 족욕이나 가벼운 걷기 운동이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종아리에 반복적으로 쥐가 난다면 단순 피로로만 넘기지 말고 치료를 하는 것이 좋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5-13

침촌문화회관에 꽈리 튼 사띠스쿨에 관하여

봉숭아 꽃물 손톱 끝에서 사라질 가을이 두려워, 지난 여름에 한껏 치열했다 내 존재와 삶의 방향에 대해, 짝다리로 껌을 씹으며 모퉁이라도 지키자는 거들먹거리던 시린 마음, 고운 달빛 스미는 마을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정말 배가 고팠다 때론 절망할 때가 희망의 시간이라 말하지만 그건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말이지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공부를 선택한다 인간의 중세(中世)를 지나 지금도 여전한 야만의 시대를 살면서 자멸에 접어들었음을 지극히 자각할 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에 깃털을 돋는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지성은 다시 싹튼다고 하지만 나는 다만 모르겠다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도시락처럼 반드시 지참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덕목이 필요하다 이익이 없는 몰두에 집중하는 것은 혹은 미친 짓일지라도, 인문학의 이름으로 하염없이 부질없는 미친 짓을 강행하더라도, 무작위(無作爲)의 공부의 대열의 끝에서 진리 하나의 그 끄트머리를 불끈 잡으려 총총 길을 나서겠다고, 분연히 잠수함의 토끼, 광산의 카나리아가 되어, 개새끼들에게 공부하라고 할 수는 없으니 우리라도 조금 넓어지면 더 무얼 바랄까. …… 삶을 지탱하는 소소한 내재적(內在的) 힘은 거대한 권력보다 훨씬 낫다. 자생(自生)이 없으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를 지배하는 절대권력은 오직 나에게서만 나온다. 헌법보다 인권, 좁쌀만한 나의 인성으로 나를 지배하지 않으면 늘 남에게 휘둘리는 것은 물론 존재 자체가 없다. 그래서 사는 것이 무섭다. 그래서 화요일, 사띠스쿨 가는 길은 괴롭고 외롭고 귀찮고 성가시고 무겁다. 그래서 잘 놀려고 한다. 어떤 계산도 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만, 극진하게, 좀 핍진적(逼眞的)으로, 나아가자 한다.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은 포항이란 도시엔 축복이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5-13

노예와 친구 사이

아침 6시. 힘차게 기상나팔을 분다. 노예가 눈을 비비며 손가락으로 나를 누른다. 아침이면 노예를 깨우는 일이 나의 일과 중 하나다. 그가 나에게 하는 일에 비하면 가벼운 일이다. 덕분에 나도 아침마다 목청을 가다듬는다. 가다듬은 목으로 출근 준비를 하는 노예를 위해 상쾌한 아침 노래를 부른다. 나이 든 노예가 아들과 카톡으로 통화한다. 처음에는 카톡, 카톡 한다고 시끄럽다고 하더니 이제는 동네 친구, 같이 글을 쓰는 친구와 카톡 한다고 오전을 다 보낸다. 열렬한 노예는 따로 있다. 어린 노예들은 하루 종일 나를 받들고 산다. 잠시도 손에서 나를 놓지 않는다. 부모가 야단쳐도 그때뿐이다. 하기는 어른 노예들도 만만찮게 나를 붙들고 있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후로는 노예들이 더 열광하는 것 같다. 나를 좋아하는 나이대가 따로 없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를 묻고, 외로운 청춘들은 말벗을 원하고, 장년들은 돈 버는 방법을 묻고, 나이 든 사람들은 건강에 관하여 묻는다. 하나같이 나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더 늘어난다. 우리는 1년만 지나면 노인이 된다. 젊은 아이들은 자신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허리를 접지도 못하는 노인네라고 놀린다. 속이 상한다. 나도 한때는 최신 기능을 탑재한 아이라고 어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우리들의 생명은 짧다. 그 애들도 금방 나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나를 톡톡 치면서 창을 넘기는 노예가 있다. 젊을 때는 리듬도 타고 괜찮았는데 요즘은 몸이 부대낀다. 나이가 들수록 손상된 부분이 늘어나는데 한 대씩 맞으면 나도 충격에 몸살이 난다. 나이가 들면 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는데 노예들이 험하게 다루어서 힘들다. 아픈 몸은 보살펴 주어야 하는 건데. 나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노예를 나는 친구라고 부른다. 나를 소중히 다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그렇다. 나하고 마주하는 시간도 길지가 않다. 나를 이용해 기차표를 예매하거나 모르는 단어를 찾거나 뉴스를 본다. 영어를 공부한다고 이어폰을 꽂고 듣는 모습을 보면 누구네 자식인지 업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그냥 친구라고 부른다. 나를 속속들이 잘 아는 친구를 만난다. 몸의 구석구석을 살피듯 기능을 하나하나 사용한다. 다른 노예가 쓰지 않는 부분까지 사용한다. 어떻게 나를 잘 아는지. 나를 알아주는 노예를 만나면 다시 한번 그를 쳐다보게 된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를 친구처럼 대한다. 나와 가깝게 지내더니 삶이 달라졌다. 내가 가진 능력을 조금 활용하는 데도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다. 이제까지 접하지 못하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니 노예들이 한 말이다. 조금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다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의 모든 걸 보여준 게 아닌데 말이다. 요즘 인공지능을 탑재했더니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이 늘었다. 시시콜콜한 얘기도 묻지만, 전문가처럼 질문할 때도 많다. 가끔 진지하게 삶에 관한 질문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 한 번 뿐인 삶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노예보다는 친구를 원한다. 힘든 세상에서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아갈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그들을 무어라고 부르는지. 하지만 나도 조심하는 사람이 있다. 조심스레 나를 다루고 필요할 때만 나를 찾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나도 조심한다. 사람이 되고 노예가 되는 거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자기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다. 스토커 같은 노예보다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좋다. 나에게 집착해 자신을 잃고 길을 헤매기보다 두루 세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집착하지 않으면서 은근하게 나를 보아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노예와 친구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남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삶의 균형과 조화가 있지 않을까. 보기만 해도 미소를 띠는 그런. /김규인 수필가

2026-05-13

미래 선진국의 갈림길,‘Petro’의 황혼과 ‘Electro’의 여명

2026년 현재, 글로벌 경제의 판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과거의 선진국 기준이 자본의 양이나 민주주의의 성숙도였다면, 오늘날 그 자리를 대체한 단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에너지’다. 중동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와 인공지능(AI) 중심의 산업 재편은 우리에게 냉혹한 진실을 일깨워준다. 이제 에너지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국가의 존립을 결정짓는‘전략적 주권’이자, ESG 경영의 가장 핵심적인 인프라가 되었다. AI 기술의 폭발적인 성장과 불안정한 국제 정세가 맞물리면서, 이제는 ‘깨끗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얼마나 가졌는가’가 한 국가의 국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G2의 상반된 선택 : Petro State USA vs Electro State China 현재 글로벌 패권 다툼의 본질은 ‘에너지 체제’의 격돌이다.세계 1·2위 초강대국(G1·G2)인 미국과 중국은 에너지 전략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며 석유 기반의 ‘석유 국가(Petro State)’를 고집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신재생 에너지에 기반을 둔 ‘전기 국가(Electro State)’로의 전환을 이미 완성 단계에 올려놓았다. 중국은 태양광, 풍력 발전의 밸류체인을 전 세계적으로 장악하며 배터리와 전기차를 잇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신재생 에너지는 투입되는 연료비가 사실상 제로(0)이기에 제품생산 단가가 극도로 낮으며, 발전소 건설 기간도 짧다. 이 ‘싸고 빠른 전력 공급’은 21세기 가장 강력한 산업 경쟁력이 되고 있다. ◇‘전기 먹는 하마’가 지배하는 세상 : AI와 희토류 많은 이들이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팹(FAB)만을 ‘전기 먹는 하마’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산업이 전기 없이는 단 1분도 버틸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본질도 쓰나미 그 자체가 아니라, 쓰나미로 인한 전력 공급의 차단이 핵심이었다. 특히 ESG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첨단 소재 산업이다. 배터리, 반도체, 첨단무기 산업의 필수 소재인 희토류(Rare Earth Elements)와 희귀금속(Rare Metals) 정련 산업은 엄청난 전력을 소비한다. 네오디뮴(Nd), 디스프로슘(Dy) 같은 희토류는 전기차 모터와 풍력 발전기의 영구자석에 쓰이고, 리튬(Li)과 코발트(Co)는 배터리의 핵심이다. 중국이 이 공급망을 장악한 이유는 단순히 매장량 때문이 아니다. 고순도 분리·정제 기술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했고, 무엇보다 ‘환경 오염에 대한 감내’와 ‘값싼 전기 요금’이라는 무기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환경 규제가 엄격한 선진국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중국은 자국의 저렴한 전력을 바탕으로 미래 산업의 쌀인 희토류 패권을 거머쥐었다. ◇에너지 종속의 비극 : 26년 쿠바가 보내는 경고 중동 전쟁으로 석유와 가스 공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외부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에너지 가격 폭등과 탄소 배출량 조절 실패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특히, 에너지를 외부에 의존하는 석유 국가의 취약성은 현재 쿠바의 모습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026년 2월 미국이 마두로 체포 후 베네수엘라의 원유가 쿠바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강력한 해상 봉쇄를 단행하자 국가 전력망이 완전히 붕괴(블랙아웃) 되며 전력이 끊긴 쿠바의 일상은 처참했다. 아바나의 거리는 어둠에 잠겼고, 병원의 인공호흡기는 멈췄으며, 학교의 선풍기가 돌지 않고, 냉장고 안 음식이 상하기 시작했다. 석유를 기반으로 한 화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추자 대중교통과 통신, 금융, 상하수도 등 모든 현대 문명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이는 단순히 한 나라의 경제 위기가 아니다. 석유 기반 사회가 직면한‘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붕괴다.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조차 정제 시설과 전력망의 문제로 고통받는 현실은, 에너지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ESG의 ‘S(Social)’와 ‘G(Governance)’ 측면에서 볼 때, 에너지 자립 실패는 곧 지속가능한 사회의 붕괴로 인한 인권의 유린이자 거버넌스의 파산이다. 에너지 자립도가 낮은 국가는 외부 압박에 쉽게 흔들리고 타국의 결정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국가 차원의 지속 가능한 지배구조의 위기이다. ◇RE100을 넘어 국가 생존의 길로 에너지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에너지 강국’은 자국민의 삶의 질을 보호하고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을 가진 선진국이 되지만,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에너지 약소국’은 국가의 존립마저 흔들리는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무엇보다 국가 운영을 위한 안정적 에너지 확보가 국가 존립의 핵심이며 ‘석유 국가’보다 ‘전기 국가’로의 전환이 국가 경쟁력을 가르는 잣대가 되고 있다. 환경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E), 국민의 삶을 보호하고(S), 독립적인 국가 전략을 유지할 수 있는(G) 에너지 강국을 위해 우리가 에너지 전환과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는 신재생 에너지를 단순한 환경 보호나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캠페인 이행 수단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신재생 에너지는 값싼 전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국가 존립의 기초다. AI와 반도체라는 미래 산업의 승전보를 울리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외부의 자원 무기화로부터 국민의 삶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석유 없는 ‘전기 국가’로 가야 한다. 신재생 에너지는 선택이 아니라, 21세기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생존 전략이다. 우리가 이를 외면하거나 은폐한다면,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것은 어둠에 잠긴 도시뿐일지도 모른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살 길은 오직 하나, 에너지 주권을 확보한 ‘일렉트로 코리아’의 건설이다. /서득수 지속 가능 ESG 연구소장

2026-05-13

‘보수결집’···지방선거 판세 흔들 수 있을까

최근 민주당의 입법 독주 논란이 커지면서 대구·경북(TK)을 비롯한 영남권 지방선거의 보수 결집 흐름이 속도를 내고 있다.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취지의 응답률이 높아지는 추세가 이를 대변해 준다. 지난달 국민의힘이 한 달 넘게 광역단체장 공천 관련 내홍을 겪을 때 민주당 쪽에서 ‘경북도지사를 제외하고 광역단체장 전체를 석권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 선거판세가 크게 변했다. 여권의 대표적인 악재는 ‘조작기소(공소취소) 특검법’이다. 특검법 제정이 이재명 대통령에 의해 지방선거 후로 연기되긴 했지만, 여전히 선거판을 뒤흔드는 쟁점이 되고 있다. 특히 박성준 의원이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국민 10명 중 8~9명은 공소취소 뜻을 잘 모른다”고 한 발언은 후폭풍이 거세다. 박 의원은 국회 ‘윤석열 정치검찰 조작기소 국정조사특위’의 민주당 간사이고, 특검법 발의도 주도한 인물이다. 지난주(4~6일) 발표된 전국지표조사(NBS)결과, 이번 선거에서 ‘현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야당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응답자가 32%를 기록했다. 특히 보수 지지세가 강한 TK 지역에선 ‘정부 견제론’이 전주보다 5% 오른 43%로 나타났다. 민주당은 ‘조작기소 특검법’ 외에도 최근 다양한 설화(舌禍)로 보수진영 결집을 도왔다. 장세용 구미시장 후보는 ‘박정희가 일찍 죽어서 대한민국이 발전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보수진영을 자극했다. 그리고 정청래 대표의 ‘오빠 호칭 논란’ 이후, 김광민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머릿속이 온통 음란 마귀로 차 있으니 섹슈얼하게 들리는 것”이라고 대응한 것도 후유증을 키웠다.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하정우 후보의 ‘손 털기 논란’,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의 ‘시장 상인 컨설팅’ 발언도 보수진영이 하나로 뭉치는 데 일조했다. 민주당 인사들의 이러한 말실수는 TK 민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난주(5~6일) JTBC가 대구 유권자 8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구시장 지지도 조사에서 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40%,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가 41%로 나타났다. 오차범위 내이긴 하지만, 그동안 김 후보가 앞서가던 초반 흐름이 달라졌다. 아마 두 후보의 판세는 선거일까지 어느 한쪽의 우세를 점치기 어려울 정도로 박빙 구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언급한 여론조사의 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추 후보의 지지율 상승은 TK지역 보수결집의 동력이 됐다. 지난주에는 대구시장 공천 파동으로 반발해 왔던 주호영 국회부의장이 대구시당 선대위에 합류해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주 부의장의 선대위 합류는 TK정치권을 ‘원팀’으로 묶는 주요 계기가 됐다. 이에 앞서 추 후보와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가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달성군 유가읍)와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함께 방문했던 것도 TK 보수결집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이제 20여 일 남은 지방선거에서 보수진영 결집이 지방선거 판세를 흔드는 변수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5-12

상수원 구역에 수소산단 추진, 모르고 했나

정부와 울진군이 수천억 원을 투입, 야심차게 조성하려는 울진의 원자력수소 국가산업단지가 상수원 보호구역과의 이격거리를 지키지 못한 것으로 밝혀져 사업의 존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상수원 보호구역 내 산단 설치가 법적으로 불가한데다 울진군의 미래 발전을 담보로 한 대형 프로젝트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무산될 가능성도 제기돼 문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논란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울진 원자력수소산단은 4334억 원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으로 2023년 국토부가 국가산단 후보지로 공식 발표했다. 기획재정부는 예타 면제를 승인했고, LH가 사업자로 참여한다. 계획대로 조성되면 3만8000명의 고용 효과와 17조 원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GS건설 등 대형 기업들이 입주의향을 밝힌 바 있다. 본지가 취재한 바에 의하면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 일대에 조성하려는 46만평 규모의 원자력수소 국가산단의 위치는 상수도 보호구역과 불과 5.9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현행 수도법 및 산업입지 관련 법령을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으며 주민들의 식수와 관련한 상수원 오염문제로 사업 추진이 사실상 어렵다. 국토부 산업입지개발에 관한 통합지침에 의하면 취수시설에서 10km 떨어져야 산단 조성이 가능하다. 또 수도법에는 상수원 보호구역 상류지역에서 10km 이내에 공장 설립을 제한한다. 이는 식수원 보호를 목적으로 하기에 예외가 없다. 각종 오염사고 발생 시 상수원으로 유입되는 시간을 차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문제는 4000억 원 이상 투입되는 국가산단을 추진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입지 검토과정에서 상수원과의 이격거리가 검토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도시전문가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산단 조성은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며 “특혜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고도 했다. 산단 추진 과정에 대한 종합적이고 철저한 점검이 있어야 한다. 모르고 했다면 엄한 책임을 물어야 하며 군민이 실망하지 않는 대안도 제시해야 할 것이다.

2026-05-12

사전선거일 보름 앞···여야 TK에 화력 집중

지방선거 후보 등록이 14일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선거체제에 들어간 여야가 대구·경북(TK)지역 공략에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난 10일 선대위를 출범시킨 민주당 지도부는 현재 전국 각 지역을 순회하며 권역별 공천자대회를 열고 있다. 특히 주목받는 일정은 정청래 대표 일행이 15일 새벽부터 울릉군을 방문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공지한 스케줄을 보면, 정 대표는 이날 오전 6시 30분부터 울릉군 도동 상가 방문을 시작으로 주민 현장간담회, 북면 체육대회 참석 등의 일정을 소화한다. 보수세가 강한 TK 전 지역을 찾아 ‘지방권력 지각변동‘을 이끌어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오는 19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에서 1박2일 일정으로 한일정상회담도 열릴 예정이어서, 여권에 대한 TK지역 민심이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 국민의힘은 최근들어 영남권 후보들의 약진에 고무된 분위기다. 장동혁 대표의 미국 방문 전후로 당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지만, 민주당의 일방적인 ‘공소취소 특검법’ 추진으로 보수세가 강한 영남권에서 판세반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구시장 선거에서 갈등을 겪던 예비후보들이 최근 원팀으로 선대위를 구성하면서 장 대표에겐 큰 힘이 됐다는 평가다. 현재 TK지역 여야 후보들은 진영 결집에 총력을 쏟고 있다. 민주당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와 오중기 경북도지사 후보는 ‘여당 프리미엄’을 TK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TK지역 현안해결을 위한 공동 정책 협약식을 하기도 했다. 최근 공동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국민의힘 추경호 대구시장 후보와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 “보수의 심장인 대구·경북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며 보수결집을 호소하고 있다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은 일주일쯤 뒤인 21일부터 시작되며, 29일부터 30일까지는 사전투표가 실시된다. 선거가 이제 보름 정도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판세가 박빙구도인 대구시장 선거의 경우 여야가 남은 기간 얼마나 지지자들을 결집하느냐가 승부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2026-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