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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도시자연지수’

대구경북 주민에게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이면 폭염이 일상을 흔들고, 한 번 비가 쏟아지면 도시는 금세 침수와 교통 혼란에 휩싸인다. 대기오염과 열섬현상까지 겹치면 도시의 삶은 더 팍팍해진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단지 날씨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도시의 숲과 하천, 녹지와 토양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열을 식히고, 물을 머금고, 시민의 숨통을 틔우는 생태계 서비스도 함께 약해진다. 그래서 국제사회와 국내 정책 현장에서는 도시의 회복력을 높이는 대안으로 자연기반해법(NbS)을 꾸준히 강조해 왔다. 하지만 아직 국내는 지자체마다 지표가 제각각이라, 어떤 사업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는지 과학적이고 공통된 기준으로 평가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 짜게 될 ‘광역지자체 기후위기 적응대책’에 이런 빈틈을 메울 공통 언어인 ‘도시자연지수’가 필요하다. ‘도시자연지수’는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우리 도시는 자연과 얼마나 잘 공존하고 있는가”를 숫자로 보여주는 건강검진표에 가깝다. 녹지가 얼마나 있는지 뿐만 아니라, 도시 확산은 어떤지, 시민이 자연에 얼마나 쉽게 접근하는지, 온실가스와 생물다양성은 어떤 흐름인지, 행정은 얼마나 책임 있게 대응하는지까지 함께 본다. 이런 지표가 있으면 도시숲, 하천 복원, 투수성 포장, 옥상녹화 같은 사업이 보여주기식인지, 실제로 폭염과 홍수에 버티는 힘을 키우는지 판단할 수 있다. 다만 지표가 만능은 아니다. 지역별 지형과 산업 구조, 인구 밀도, 데이터 축적 수준이 다른 만큼 현실에 맞는 해석과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숫자를 맞추는 행정이 아니라, 도시의 변화를 제대로 읽는 지표로 써야 한다는 뜻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도시자연지수’를 도시계획과 환경보전 목표를 잇는 도구로 쓰기 시작했다. 독일 베를린 사례는 ‘도시자연지수’를 실제 적용해 도시의 생물다양성 목표와 정책 데이터를 연결해 본 첫 사례로 주목받는다. 국내에서도 국립생태원과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이 워크숍을 열어 기준선 평가와 시범도시 논의를 시작했다. 시사점은 분명하다. 처음부터 모든 지표를 한꺼번에 완벽하게 적용하려 하기보다, 온실가스·접근성·토지보호·도시확산·식생피복 등 당장 측정 가능한 핵심 지표부터 시작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대구와 경북의 도시지역도 마찬가지다. 폭염 취약성, 하천과 녹지축의 연결성, 산업단지와 생활권의 불투수면, 시민의 녹지 접근성을 먼저 점검하고, 이후 종다양성·형평성·도시 외부 영향 같은 난이도 높은 지표로 넓혀가야 한다. 즉, 단계적 확대가 오히려 가장 빠른 길이다. ‘도시자연지수’의 진짜 가치는 위험을 미리 읽고, 예산을 더 똑똑하게 쓰고, 시민이 체감하는 안전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 대구경북은 폭염, 집중호우, 고령화, 산업도시 구조 전환이라는 복합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그래서 특히 자연을 도시 관리의 변수가 아니라 핵심 인프라로 봐야 한다. 앞으로는 도시생태현황지도, 기후위기 적응대책, 탄소중립 전략을 따로 굴릴 것이 아니라 ‘도시자연지수’라는 공통 틀 안에서 연결해야 한다. 대구경북이 먼저 준비하면 기후위기에 끌려가는 도시가 아니라, 변화를 설계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3-26

남성 육아휴직 제도의 문제점

남성 육아휴직 제도가 처음 도입되던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씁쓸하다. 당시만 해도 남자가 육아휴직을 신청한다는 것은 많은 사업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실제로 한 남자 직원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대부분의 소규모 사업주가 느꼈을 감정은 놀라움과 당혹감에 가까웠을 것이다. 제도는 이미 만들어졌지만, 현실의 현장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남성에게까지 육아휴직을 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남성 육아휴직 사용을 적극 장려해 왔다. 육아를 여성에게만 맡기던 사회 구조를 바꾸고, 부모가 함께 아이를 돌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는 분명 의미 있는 변화였다. 그러나 정책의 취지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현실과 맞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몇 명의 직원이 전부인 소규모 사업장에서는 직원 한 명의 장기 휴직이 곧바로 운영 부담으로 이어진다. 대체인력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휴직자가 복귀하면 인적 구조가 다시 흔들리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시로 채용한 대체인력을 내보내는 일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부담이 제도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육아휴직 기간 발생하는 보험 부담이나 퇴직금 적립 문제, 대체인력 채용 비용 등은 대부분 사업장의 몫으로 남는다. 규모가 큰 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지만 영세한 사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사업주와 직원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과 불신이 생기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육아휴직 제도의 혜택이 특정 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의 상당수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종사자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대부분이 중소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역설적인 결과다. 급여 수준이 낮은 근로자일수록 휴직 기간의 소득 감소를 감당하기 어렵고, 복귀 이후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크다. 결국 제도는 존재하지만 정작 필요한 사람들은 사용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저출산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다. 정부는 수십조 원의 예산을 투입하며 다양한 출산 장려 정책을 시행해 왔지만, 출생아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는 정책의 규모보다 정책 설계가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육아휴직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소기업과 자영업 현장이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대체인력 지원과 비용 보전 같은 현실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제도가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정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제도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거창한 구호보다 현실을 세밀하게 살피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장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는 종이 위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제는 정책의 숫자보다 정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돌아봐야 할 때다. 곧 선거철이다. 배부른 사람이 이긴다면 배고픈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노병철 수필가

2026-03-26

흥해9경에 ‘흥해농요’를 더해, 10경으로

옛 선비들은 풍광이 빼어난 곳을 유람하거나 머물면서 그곳의 승경을 일정한 수로 묶어 소개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팔경(八景)으로 관동팔경, 단양팔경이 그러한 예이다. 이들 승경은 아름다운 경관의 대명사이자 그 지역 자연경관의 정수를 나타낸다. 팔경의 유래는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 8경이 탄생한 것은 중국 사람들이 ‘팔(八)’이라는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소상팔경은 송나라 때 중국 명승지 호남성 동정호 남쪽 언덕 양쯔강 중류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합쳐지는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 8곳을 말하는 것으로 산시청람[山市晴嵐,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산시(山市)], 연사모종[煙寺暮鐘, 연무(煙霧)에 잠긴 절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상강에 밤비 내리는 장면], 원포귀범[遠浦歸帆, 먼 포구로 돌아가는 돛단배], 평사낙안[平沙落雁, 평평한 모래밭에 기러기떼가 내려앉는 장면],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비친 가을달], 어촌낙조[漁村落照, 저녁놀이 붉게 물든 어촌의 풍경], 강천모설[江天暮雪, 저녁눈이 강과 산을 뒤덮고 있는 풍경]을 말한다. 중국에서 유래된 8경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팔경문화를 전국적으로 유행시켰는데, 그에 따라 경북엔 경북팔경, 포항엔 포항팔경이 등장했고, 마을 단위까지 확대되어 지역별로 많은 8경, 9경, 10경을 탄생시켰다. 포항시 흥해도 마찬가지다. 조선시대 흥해에는 흥해십경(興海十景)이 있었다. 흥해군수 류세무(柳世茂,1524~1588)가 선정한 흥해10경은 동해조돈[東海朝暾, 동해의 아침 일출], 서산모우[西山暮雨, 서산의 저녁나절에 내리는 비], 남산완월[南山翫月, 남산에 떠오르는 달], 북정송객[北亭送客, 북정(北亭)에서 떠나보내는 나그네], 죽헌매악[竹軒梅蕚, 죽헌(竹軒)의 매화], 봉림순채[鳳林蓴菜, 봉림 마을의 순채(蕙菜, 나물 이름)], 위루망진[危樓望辰, 위루(危樓)에서 바라보는 별], 곡강범주[曲江泛舟, 곡강 어구에 뜬 배], 칠포관어[七浦觀魚, 칠포에서 구경하는 물고기], 천곡심승[泉谷尋僧, 천곡사를 찾아가는 스님]이다. 2022년 흥해 사람들은 사방기념공원, 해오름전망대, 곤륜산 활공장, 칠포리 암각화, 천마지 둘레길, 북천수, 이팝나무 군락지, 영일민속박물관, 도음산 천곡사 등 흥해의 승경 아홉 곳을 흥해9경으로 선정하고, 해마다 그에 따른 문화축제를 하고 있다. ‘흥해9경 문화축제’는 흥해의 관광명소인 9경을 소개하는 행사로 참가자들이 버스를 타고 9경을 직접 방문, 명소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을 즉석에서 인화하는 체험행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흥해9경을 보면서 필자는 흥해의 자랑인 흥해농요가 빠졌다는 데서 아쉬움을 느낀다. 흥해농요는 옛날 동해안 최대의 곡창지대인 흥해의 넓은 들판에서 흥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함께 동작을 맞추고 지루함을 달래면서 불렀던 노래로 최근 (사)흥해농요보존회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경상북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흥해의 큰 자랑거리다. 흥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논할 때는 흥해농요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농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경치가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인근 청하현의 8곳 승경을 담은 해월루팔경(海月樓八景, 청하읍성 내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8경)에는 봉송효월[鳳松曉月, 봉송정(鳳松亭)의 새벽달), 용수만하[龍峀晩霞, 용산의 저녁 안개], 조경노도[釣鯨怒濤, 조경대(釣鯨臺)의 성난 파도], 학봉귀운[鶴峯歸雲, 호학봉(呼鶴峯)으로 돌아가는 구름], 상평목적[上坪牧笛, 상평들 목동들의 피리소리], 개포어요[介浦漁謠, 개포(월포)의 고기잡이 노랫소리], 도산석봉[桃山夕烽, 도리산(桃李山)의 저녁 봉화], 송우촌연[松郵村燃, 송라 역촌의 저녁연기]라 하여 눈에 보이는 경치가 아닌 귀로 듣는 경치인 ‘목동의 피리소리’, ‘고기잡이 노랫소리’도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흥해 학천리(鶴川里) 일원의 9가지 승경인 학천구경(鶴川九景)에 도음석조(禱陰夕照), 아미신월(蛾眉新月), 운대조일(雲臺朝日), 오강청풍(梧岡淸風), 향천정화(香泉井花), 백야농가(白野農歌), 산사고종(山寺孤鐘), 한천모연(寒泉暮煙)이 있는데, 여기에도 오강청풍[梧岡淸風, 오강(梧岡)의 맑은 바람], 백야농가[白野農歌, 백야(白野)의 농사짓는 노래], 산사고종(山寺孤鐘, 천곡사(泉谷寺)의 외로운 종소리]처럼 촉각적, 청각적 요소가 들어 있다. 특히 농가(農歌), 즉 농요(農謠)가 들어 있음이 눈에 띈다. 이러한 요소들은 시각 위주의 경치를 오감(五感)으로 느끼게 만드는, 경치를 낭만적 분위기로 이끄는 멋진 장치가 된다. 그러기에 필자는 이 기회에 기존의 흥해9경에다 ‘흥해 농요’를 더해 ‘흥해10경’으로 선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초여름 동해안 최대의 곡창지대인 흥해평야에서 농부들이 논마다 물을 그득 잡아놓고, 그곳에서 “이 논바닥에 모모를 심어~”하면서 ‘모심는소리’를 부르는 풍경이야말로 ‘흥해의 진경(眞景)’이 아닐까?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6-03-26

포항은 새로운 산업문명을 향한 도약의 도시다

현재 인류가 사용하는 에너지 체계는 거대한 전환의 끝자락에 와 있다. 이 전환은 단순한 에너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구조가 바뀌는 과정이다. 그 흐름을 단순화하면 두 갈래로 정리된다. 하나는 전기에너지이고, 다른 하나는 수소에너지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분리된 체계가 아니다. 전기는 전기저장장치(ESS)와 2차전지로 저장되고, 다시 수전해(水電解)를 통해 수소로 전환된다. 전기와 수소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하는 하나의 순환 구조다. 이 구조는 앞으로의 산업 질서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과거에는 석탄과 석유가 산업을 움직였다면, 앞으로는 전기와 수소가 산업을 움직이게 된다. 더 중요한 점은, 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글로벌 시장이 강제하는 새로운 규범이다. 탄소중립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생산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태양광과 풍력 같은 자연 에너지를 전기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확대되어야 하고, 축산분뇨와 음식물 등 유기성 폐기물을 활용한 에너지 생산도 병행되어야 한다. 나아가 에너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내에서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성이다. 여기서 포항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포항은 더 이상‘철을 만드는 도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전기와 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을 재구성하는 도시로 도약해야 한다. 포항과 그 인근 지역에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생산과 수소 생산 인프라가 구축된다면, 포항은 대한민국 산업 대전환의 중심 거점이 될 수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이 추진하고 있는 저탄소철강기술과 수소환원제철은 그 전환의 핵심이다. 철을 만들면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기술은 단순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산업 문명의 방향을 바꾸는 사건이다. 이 기술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포항은 세계 철강 산업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일자리의 문제다. 산업 전환은 단순히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재생에너지 설비 구축, 수소 생산 및 저장 인프라, 전력망 확충, 그리고 수소환원제철과 같은 신기술 산업은 대규모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한다. 단순한 일자리 증가를 넘어, 고부가가치 기술 인력과 청년 인재가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는 것이다. 특히 포항은 기존의 철강 산업 기반 위에 새로운 에너지 산업을 결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시다. 이는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강점이며, 산업 전환 과정에서‘일자리 감소’가 아니라‘일자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산업 전환이 곧 지역 쇠퇴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 재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항이 보여줄 수 있다. 이 과정은 산업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된다. 에너지 전환은 시민의 삶과 직결되며, 지역경제와 노동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기술과 정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의 인식 변화와 사회적 합의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ESG의 사회(S)가 작동해야 하는 이유다. ESG는 더 이상 기업의 선택적 전략이 아니다. 환경(Environment)은 탄소 감축과 에너지 전환을 요구하고, 사회(Social)는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불평등을 조정하며, 지배구조(Governance)는 이러한 변화가 책임 있게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기준이 된다. ESG는 산업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동시에 국가 경쟁력의 기준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25년 10월 1일 출범한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환경과 에너지를 분리해서 다루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국가가 기후와 에너지를 하나의 통합된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이다. 그동안 우리는 환경은 규제로, 에너지는 산업으로 분리하여 다루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둘을 나눌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에너지는 곧 탄소이며, 탄소는 곧 산업 경쟁력이다. 이 변화는 정부 조직에서 시작되어 시장과 산업 구조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국제 질서는 이미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탄소를 기준으로 한 무역 규범이 형성되고 있으며, ESG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은 시장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제 기업은 무엇을 생산하느냐보다 어떻게 생산하느냐로 평가받는다. 탄소를 줄이지 못하면 수출이 막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히 철강 산업은 이 변화의 중심에 있다. 탄소 배출이 많은 산업일수록 더 강한 압력을 받게 되며, 그만큼 빠른 전환이 요구된다. 수소환원제철은 이러한 압력에 대한 대응이자, 동시에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이다. 하지만 전환에는 비용이 따른다. 그리고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이 부담을 떠안는 구조라면 전환은 지속될 수 없다. 이것이‘정의로운 전환’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대한민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기후위기를 단순한 환경 문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산업과 국가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할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앞으로 50년의 국가 경쟁력이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전기는 에너지의 중심이며, 수소는 그 확장이다. 탄소는 비용이 아니라 질서이며, ESG는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다. 이 모든 요소를 하나의 구조로 통합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새로운 산업 문명을 설계할 수 있다. 포항은 그 전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수소환원제철, 재생에너지, 전력 인프라, 그리고 시민의식이 결합될 때 포항은 단순한 산업도시를 넘어 탄소중립 문명의 모델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정부에서 RE100이라는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RE100을 제도화하기 위한 관련 입법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으며, 산업과 시장은 이미 그 기준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 RE100은 아직 하나의 완성된 법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대한민국 산업을 움직이는 사실상의 규범이 되었다. 법보다 먼저 현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K-기후·에너지·환경은 하나의 선언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새로운 질서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다. 전기와 수소, ESG와 책임, 그리고 RE100. 이 세 가지 축 위에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포항이 서 있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

2026-03-25

미세먼지 유감

멀리 보이는 하늘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누렇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탓이다. 24일과 25일 대구와 경북 모두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를 표시하는 수치가 ‘나쁨’을 나타내고 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엔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적지 않다. 입을 가린 채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기도 한다. 미세먼지란 대기 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로 눈으로는 확인이 어렵다. 여기엔 질산염과 황산염, 암모늄이온 등이 섞여 있다. 미세먼지 속에 함유된 중금속은 당연지사 건강에 해롭다. 오랜 시간 미세먼지에 노출되면 면역력 저하는 물론, 천식과 기관지염 등에 걸릴 수 있다. 학자들은 미세먼지가 심혈관 질환과 피부 질환, 눈병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매년 봄마다 미세먼지가 반복되는 원인은 뭘까? 중국 동쪽에 밀집된 많은 수의 공장에서 생겨난 오염물질 섞인 먼지가 지구의 자전으로 발생하는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오는 탓이다. 중국발 미세먼지에 피해를 입는 지역에는 북한과 일본도 포함돼 있다. 호흡기와 심혈관계 질환이 있는 사람들과 알레르기·천식 환자, 면역력이 약한 아이와 노인은 외출할 때 KF 규격에 맞춘 황사용 마스크를 쓰는 게 미세먼지로부터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의사들은 손발과 눈 주위를 깨끗이 씻고, 물을 자주 마시라고 권유한다. 개나리와 벚꽃을 시작으로 색깔 고운 봄꽃이 반가운 손님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계절이 왔지만, 미세먼지란 이름의 불청객도 함께 들이닥친 3월 말. 누런 하늘색이 마음까지 우중충하게 만들 수도 있는 날들이다. 미세먼지가 속히 물러가고 희망과 꿈을 상징하는 봄이 제 빛깔을 찾길 기다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25

쇼츠 속죄

무아지경으로 쇼츠를 내리다 보면, 나의 관심사와 멀거나 심지어는 내가 싫어하는 종류의 영상을 맞닥뜨리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알고리즘이 일을 못 한다고 구시렁댔는데, 다시 생각하면 알고리즘이 일을 너무 잘해서 그런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더는 너한테 보여줄 영상이 없으니 그만 보고 일어나’라는 뜻으로. 다람쥐 얼굴에 난 종기를 짜는 영상이나, 낯선 언어로 진행되는 결혼식 중계 영상을 볼 때쯤엔 이미 하루가 자괴감으로 점철된 후이다.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하루를 허무하게 날리고 말았다는 자괴와 오늘도 기어코 해야 할 일을 미뤘다는 죄책감이 소용돌이친다. 이럴 때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하거나 청소를 하는 대신, 긴 영상을 보는 것으로 ‘쇼츠 속죄’를 하고자 한다. 우리는 ‘단(短)의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는 물론이고, 드라마나 책까지 누군가 ‘3분 요약’을 해주기를 바란다. 이제는 3분도 너무 길다며, 30초로 요약하는 쇼츠들까지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사고가 점점 짧아지는 게 너무나 명백해 보인다. 나 또한 긴 영상을 배속 없이 보기 힘들 때가 종종 있다. 지루한 부분은 건너뛰고 도파민 터지는 핵심만 보고 싶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긴 영상을 배속과 건너뛰기 기능 없이 보는 벌을 내리곤 한다. 그것이 바로 쇼츠 속죄이다. 열 살 무렵, 잠시 필리핀에 산 적이 있다. 스마트폰이 없던 그 당시 내 유일한 즐거움은 열흘에 한 번 엄마와 함께 근처 한인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한국 드라마 비디오를 빌리는 것이었다. 실제 방영 날짜보다 늦게 볼 수밖에 없고, 엄마가 바쁜 날에는 감상이 며칠씩 미뤄질 수밖에 없었던 그 드라마를 보는 순간만을 나는 늘 손꼽아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온 후, 나는 더 이상 드라마를 챙겨보지 않게 되었다. 드라마의 긴 분량과 쪼개진 회차가 너무나 큰 숙제처럼 느껴진 탓이다. 그렇지만 내게도 유난히 좋아했던 몇 드라마들이 있었는데, 바로 미드 시트콤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모던 패밀리’를 사랑했다. 사람들이 ‘프렌즈’에 열광할 때도 한눈팔지 않고 ‘모던 패밀리’를 보고 또 보았다. 시즌 11까지의 긴 분량이었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쇼츠 속죄를 할 때 주로 보는 영상이 바로 이것이다. 쇼츠 속죄의 핵심은 ‘이미 아는 내용을 집중해서 보는 것’이다. 시트콤은 매회 흥미롭고 희극적인 에피소드 덕분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몹시 지루할 수밖에 없는 장르이기도 하다. 매회 같은 등장인물과 배경, 상황이 연속되는 데다 몇 회차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도 아니기 때문에 잠시 한눈팔기도 쉽다. 그런 의미에서, 시트콤은 여러모로 쇼츠 속죄에 최적화된 장르인 셈이다. 며칠 전, 어김없이 쇼츠 속죄를 하기 위해 ‘모던 패밀리’를 틀었다. 진지하게 스마트폰을 없애야 하나 고민하며 ‘모던 패밀리’를 두 시간쯤 봤을 때 속죄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떠올랐다. 내가 왜 시트콤을 좋아하는지, 시트콤이 왜 쇼츠와 반대 지점에 있다고 여기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트콤은 우리 삶의 장면을 압축해 놓은 것 같다. 기쁘고 슬픈, 즐겁고 우울한, 쓸쓸하지만 발랄한 삶의 순간들이 모두 담겨 있다. 인물들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깨달음을 얻거나, 혹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언제나와 똑같지만 조금은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가 쇼츠에 중독된 것은, 어쩌면 삶이 너무 멀게 느껴져서가 아닐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잊기 위해 자극적인 영상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어떤 고민도 무용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모던 패밀리’의 클레어는 완벽한 엄마이고 싶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필은 쿨한 아빠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매번 망신을 당한다. 클레어의 아빠인 제이, 동생 미첼, 그들의 파트너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보는 이의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처절한 모습이 내내 그려진다. 그럼에도 에피소드가 끝나면 이들은 어김없이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다. 대단한 화해도, 그럴싸한 결론도 없다.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래도 오늘이 무사히 끝났다는 것, 그리고 내일도 비슷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만 남는다. 어쩌면 쇼츠 속죄란 그 장면을 보기 위한 과정인지도 모른다. 건너뛸 수 없는 일상의 지루함을 배속 없이 견뎌내는 연습.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내일을 기약하는 것. 그것이 나의 하루에 보내는 작은 속죄이다. /양수빈(소설가)

2026-03-25

저마다의 시차

얼마 전 연휴의 끝자락,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섭외를 해 주셨다. 나는 라디오에 출연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추억이 많아서 애착을 갖게 되는 매체이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정성스런 질문을 준비해 주시는 것도 언제나 기쁘다. 무엇보다 내가 정성들여 만든 음악을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시간까지 주어진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이번에도 반가운 마음으로 섭외 요청에 응했는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제작진 분들께서 라이브로 노래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해 주셨다는 것이다. 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이 아니다. 단지 그 프로그램이 아침 여섯 시,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었다는 게 다소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 시간에 일어나서 방송국에 가는 것만 해도 쉽지는 않은 일인데 목을 풀려면 더 일찍 일어나야 한다. 좋은 컨디션을 만들지 않으면 실수 할 확률이 높아지는데 생방송이라 돌이킬 수도 없으니 상당히 높은 난이도의 미션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 저런 것 따져 가면서 일을 가려서 받는 건 직업인으로서 성실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일종의 도전정신을 품고 출연을 수락했다.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려면 보통 스케줄 시간보다 세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한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씻고 외출 준비를 한 뒤 운전대를 잡았다. 연휴 끝물 새벽의 도로는 아직 한창 밤잠을 자고 있는 듯, 한 시간 반 거리의 목적지에 40분 만에 도착했다. 하기야, 매일 열두 시 쯤 자서 여섯시 반은 되어야 일어나는 내게 이 시간대는 당연히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인 셈이었다. 그런데 다섯 시 조금 넘어 도착한 스튜디오 건물 안에서는 조금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안내데스크에는 이미 보안요원 한 분이 말끔하게 차려 입고 또렷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진작에 도착해서 방송을 준비하고 계시던 피디님이 나를 스튜디오로 안내해 주셨고, 기술감독님과 진행자분도 분주하게 생방송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거나 다름없다고 여겼던 매일 이 시간이 이 분들에게는 당연한 듯이 일터에 나와 분주하게 업무를 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여섯시, 생방송이 시작되자 청취자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보냈다. 이 시간에도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도로 위를 달리는 기사님들, 그리고 여기 방송국에 계신 분들처럼 일찌감치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시작한 분들, 새벽을 달려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가는 분들, 일찍 일어나 가족들 밥을 챙기는 분들까지.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침 해보다 먼저 일어나 이미 한창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사연 주신 분 중에 밭에 나가 아욱을 베며 방송을 듣고 계신 노년의 여성 청취자가 계셨다. 퍼렇게, 그러다 벌겋게 밝아오는 아침 하늘을 뒤로 하고 늦겨울의 밭에 서서 풀을 베는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니 그 성실함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방송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 시침은 비로소 평소의 나도 일어나곤 했던 시간대를 지났다. 그 또한 가만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아 기르게 된 지금이야 일곱 시 전에 눈을 떠 아기 챙기기 시작하지만 그 전에 내게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던가. 게임을 하거나 티비를 보다가 새벽녘에야 침대에 누워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시간, 어쩌다 친구와 술자리가 길어지면 이제야 혼미한 정신을 붙들고 집으로 비틀대며 들어가곤 했던 시간이었다. 그때도 세상의 시간은 흐르고 그처럼 분주히 누군가들의 생활도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매일 24시간을 살지 않는다. 그리고 저마다 다른 시차에 적응한 채로 생활을 영위한다. 어떤 이에게는 저녁 여덟 시가, 또 어떤 이에게는 새벽 두 시가 언제나 지워진 시간일 것이다. 아침 여섯 시를, 열 한 시를 살아가는 일이 좀처럼 없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다. 누군가가 무의식 너머로 사라지고 없는 때의 세상은 다른 이들이 저마다의 성실함으로 채운다. 또 그들이 생활의 전원을 끄고 다음 하루를 준비하는 그 틈을 또 다른 이들의 부지런함이 메운다. 일 년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 24시간 편의점처럼 이 세상과 그것이 운영되는 시스템은 수많은 사람들이 졸린 눈을 비벼가며 교대로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른 아침 노래 세 곡 부르는 일쯤이야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음 한 음, 정성스럽게 노래를 불렀다. 그 시간 깨어 있는 모든 성실한 이들에게 바친다는 마음으로. /강백수(시인)

2026-03-25

공천(公薦), 어찌 해야 하는가

국민의힘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구 50만 이상 선거구의 기초자치단체장 후보 공천을 중앙당에서 진행하고 있다. 당헌과 당규에 따라 절차를 밟았겠지만, 이 결정의 정치적 함의는 가볍지 않다. 지방자치의 본령을 어떻게 지키고 당내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느 선까지 유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관련하여, 중앙당의 포항시장 공천과정은 포항 시민들에게 상당한 우려를 가지게 한다. 지방자치는 말 그대로 ‘지방이 스스로 다스리는’ 시스템이 아닌가. 유권자들이 일상과 직결된 문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는 구조가 바로 지방자치여야 한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어느 선거보다 지역민생의 맥락과 생활의 숨결이 중요하다. 누가 후보가 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지역 주민의 판단과 참여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출발점이 중앙당의 자의적 판단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지방자치의 본질을 포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지역 언론기관들이 진행한 수차의 여론조사에서 1, 2, 3등에 오르며 도합 40% 내외의 지지를 받았던 후보들이 공천 과정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중앙당의 컷오프를 통과한 후보 네 사람의 평균 지지율을 모두 합해도 30% 미만이다. 지역시민들의 표심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보인다. 절반에 가까운 포항지역 민심이 중앙당에 의해 소외된 결과를 빚었다. 시민들이 가진 중앙당에 대한 신뢰마저 금이 가지는 않을까. 공천이 실질적 최종선택권이 되는 구조에서, 권한이 중앙으로 집중되면, 유권자의 선택에 따른 정치적 경쟁이 사실상 제한된다. 미국은 어떨까. 공화당과 민주당은 후보를 중앙당이 정하지 않는다. 선거에서 후보는 지역의 예비선거, 프라이머리(Primary)를 통해 결정된다. 당이 특정 인물을 선호하거나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최종 선택은 언제나 지역 유권자의 몫이다. 지역 주민과 지역 당원이 예비후보들을 직접 경쟁에 붙여 후보를 가려낸다. 후보선택 권한이 지역공동체의 유권자들에게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닌가. 중앙당이 후보를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에서는 정치가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후보가 지역 유권자보다 중앙당 지도부를 더욱 의식하게 되고, 선거의 언어도 생활의 언어보다 정당의 구호에 가까워진다. 중앙당이 지역의 구체적 현실과 정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지역은 일상과 생활의 문제로 움직이지만, 중앙정치는 정치 이슈와 권력 구도에 민감하다. 지방자치가 중앙에 예속되고, 주민의 삶과 정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 지역 국회의원들이 결정과정에 개입하는 현상도 시민들이 직접 원하는 후보를 가늠해 가는 과정에 장애물이 된다. 공천관리위원회는 그 소임인 ‘공정한 관리’에 집중할 일이지 ‘공천의 결정’에 천착할 일이 아니다. 포항시민들이 당연히 담당해야 할 선별권을 중앙당이 집중적으로 행사한 일은 우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중앙당 권한의 남용이며 폭거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는 공당으로서 국민의힘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천은 누구의 것인가. 답변이 중앙이 아니라 지역을 향할 때, 지방자치는 이름뿐인 제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25

일상 위협하는 에너지 위기, 강력한 대응 필요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4일 국무회의에서 확대·장기화되는 중동전쟁이 우리 경제와 민생에 미칠 중대한 위기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정부 차원의 비상체계를 선제적으로 가동할 것을 지시했다. 실제로 중동발 에너지 위기는 기름값 폭등으로 나타났고, 최근에는 비닐과 포장재 등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시장의 불안이 확대되는 분위기다. 특히 원유에서 나오는 나프타의 생산 부족으로 다음달부터는 플라스틱이나 확학제품의 생산이 차질을 빚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일부 품목의 사재기 조짐도 보인다. 지금 세계에너지 시장은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밝혔듯이 역사상 최악의 에너지 안보 위협에 처해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쟁 조기 종식 발언과는 달리 전쟁이 언제 끝날지 여전히 미지수로 보여진다. 중동전쟁은 전쟁 한 달 만에 중동지역 9개국에 걸쳐 최소 40개의 에너지 시설을 심각히 파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나도 정상화돨 때까지는 상당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측이 된다. 또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당장 풀린다 해도 최소 4개월 정도 공급부족 사태는 빚어질 거란 관측도 있다. 정부도 석유최고가격제 시행을 시작으로 25일부터는 공공기관 승용차 5부제 시행에 들어갔다. 15년 만에 등장한 제도다. 민간에게는 자율 참여를 요청하지만 상황이 나빠지면 단계적으로 민간에게도 5부제 참여를 의무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중동발 에너지 위기 비상대응 전략은 빠르게 시행할수록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 특히 국민에게 에너지 위기 사정을 소상히 알리고 동참을 유도해야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에너지 파동 이후 기름값 상승과 더불어 시중에는 물가불안이 번지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달 생산자 물가가 6개월 연속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고, 그 여파가 소비자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4월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수급난이 경제 마비를 초래할 것이란 위기설이 나도는 달이다. 정부의 선제적이고 강력한 조치로 민생과 경제, 산업의 안정을 꾀해야 할 것이다.

2026-03-25

‘공천파동’에 가려진 국민의힘 대구시장 경선

국민의힘 대구시장 공천을 두고 6명의 예비후보가 본격적인 경선 체제에 들어갔지만, 의외로 선거 캠페인이 조용하다. 대부분 후보가 관변·시민단체, 행사장을 찾거나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공약을 알리는 정도다. 기초단체장 후보들처럼 시내 주요 교차로에서 출퇴근 인사를 하는 등 공개적인 행보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아마 공천 컷오프를 당한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당 공관위에 재심을 요구하며 항의하는 사태가 부담으로 작용한 것 같다. ‘공천 파동’ 와중에 눈에 띄는 선거운동을 했다가는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로선 주 의원이나 이 위원장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쪽에 무게가 실리는 만큼, 후보들은 선거전에 총력을 쏟는 것이 정상적이다. 국민의힘 대구시장 예비경선에는 윤재옥(4선)·추경호(3선)·유영하(초선)·최은석(초선) 의원, 홍석준 전 의원, 이재만 전 동구청장이 맞붙는다. 4명의 현역 의원과 2명의 원외 후보가 대결하는 구도다. 조만간 민주당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출마를 선언할 경우, 예비경선 승부의 핵심 변수는 ‘김 전 총리와의 경쟁력’이 될 것이다. 6명의 후보들은 4월 14일까지 개별 선거운동과 2차례의 토론회를 통해 유권자로부터 ‘대구시장으로서의 역량’을 검증받게 된다. 투표는 15~16일 이틀간 진행되며, 본경선 진출자 2명은 17일 발표된다. 선거인단(당원) 투표 비중이 70%에 달하는 만큼 현역의원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겠지만, 원외 후보들도 인지도가 높은 만큼 합동토론회 등을 반전의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유권자로선 예비경선 과정을 통해 본선 경쟁력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현재 다양한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 예비후보 중 민주당 김 전 총리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서는 경우가 거의 없다. 김 전 총리가 ‘여당 프리미엄’에다 높은 인지도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 후보들이 민심을 반전시키려면, 예비경선 과정에서 대구의 백년대계를 놓고 치열한 정책대결을 벌여야 한다.

2026-03-25

4세 고시 금지를 환영한다

3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학원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법안은 학원 운영자가 유아를 대상으로 원생을 모집할 때 선별해서 받거나 수준별 반 배정을 목적으로 시험을 보고 평가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앞으로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9월부터 실행되는데, 이를 위반하면 영업정지나 등록 말소 등 행정처분을 받거나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처분받는다고 한다. 레벨 테스트가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니고 몇십 년 전부터 있어 온 관행이지만, 최근의 경향은 새로운 국면이다.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3~4세부터 영어학원에 보내면서 4세 이하까지 레벨 테스트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4세 고시, 7세 고시가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런 뉴스를 접하니, 30년 전에도 돌이 안 지난 아기를 영어 과외 시킨다고 해서 헛웃음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극소수의 개인적인 선택이었을 테고 레벨 테스트도 없었을 테니 지금에 비하면 크게 염려할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아들이 이것을 순순히 수행할 리 없다.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니 부모들은 안정적인 학습 상태를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다.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유아 대상으로 ADHD 처방이 급격히 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5세 미만 어린이에게 비급여로 3만 8천 정이 처방되었고, 5세에서 9세 아동에게는 3년 누적 3271만 정 중 650만 정이 비급여라고 한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는 입학 시험을 쳐야 했는데 중학교 때는 스트레스로 복통에 시달렸고,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월요일마다 1교시에 시험을 쳤는데 시험 때마다 설사가 나서 시험을 20분도 못 보고 중간에 나와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레벨 테스트는커녕 시험 볼 환경을 아예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글도 모르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아이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인으로서 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래도 작은아이는 뭔가 아쉬움이 있었는지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일찌감치 과외든 학원이든 학습 대열에 편입시킬 거라고 별렀다. 그러나 두어 달 후 출산을 앞둔 요즘에는 뭔가 심경에 변화가 왔는지 아기의 학습 코치는 내게 맡기겠다고 선언한다. 조선시대 관리 등용문이었던 과거 시험에서 율곡 이이는 10번 응시하여 9번이나 장원 급제했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역사에서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하나는 율곡이 장원이라는 명예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 시험 자체가 결국 시험 기술에 능통한 사람이 상위 성적을 독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반정 이후에는 산림이라 불리는 재야 학자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레벨 테스트를 포함하여 모든 시험을 철폐할 수는 없으나 시험의 폐해는 작지 않다. 그것이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부작용은 훨씬 더 커진다. 올해 하반기부터 4세 고시, 7세 고시가 금지된다고 하니, 올해 출산하는 아기들은 물론 현재 3세 이하 유아들의 스트레스는 좀 줄어들 것 같다. /유영희 인문학자

2026-03-25

냄새와 음식맛이 안느껴져요

감기가 다 나았는데도 냄새를 잘 맡지 못하거나 음식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환자들이 의외로 많다. 열도 없고 콧물도 멈췄는데 유독 후각과 미각만 돌아오지 않는 경우다.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식사의 즐거움이 줄어들고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도 떨어진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낫겠지 하고 기다리다가 몇 달, 길게는 수년 동안 그대로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상태는 감기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손상된 후각 세포와 감각 기능의 회복이 지연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가벼운 감기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코로나나 독감처럼 증상이 강했거나 오랜 기간 감기로 고생한 이후에는 비교적 자주 나타난다. 냄새를 맡고 맛을 느끼는 과정은 생각보다 매우 정교하다. 코 안에는 냄새를 감지하는 후각세포가 존재하고 이 신호가 후각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냄새를 인식하게 된다. 감기를 앓는 동안 코 점막과 기관지에 염증이 생기고 부종이 지속되면 후각세포나 신경이 손상될 수 있으며 회복이 늦어질 경우 후각 저하로 이어진다. 코로나 이후 이러한 증상이 많이 알려진 것도 같은 이유다. 또한 음식의 맛은 단순히 혀의 미각만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후각과 함께 작용한다. 따라서 후각 기능이 떨어지면 음식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여기에 더해 감기 이후에도 코 점막과 내부 환경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되면 냄새 입자가 후각세포까지 충분히 도달하지 못해 증상이 이어질 수 있다. 코막힘이 심하지 않더라도 기능적인 저하는 남아 있는 것이다. 결국 구조적인 문제뿐 아니라 기능 회복의 지연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 이 과정은 몸의 면역 상태와 회복 능력 그리고 자율신경의 안정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율신경이 불안정하면 코와 기관지의 혈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점막 회복이 지연되고 신경 재생 역시 더디게 진행된다. 겉으로는 감기가 나은 것처럼 보여도 내부적으로는 아직 회복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흔히 말하는 면역력이 떨어졌다거나 기력이 쇠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의학적으로는 이를 폐 기능 저하와 기혈 순환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폐는 코로 열린다고 하여 후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염증 이후 남은 습담과 순환 저하는 감각 전달을 방해한다. 기혈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으면 신경 기능 회복도 자연스럽게 늦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치료의 핵심은 손상된 감각 기능의 회복을 돕고 전반적인 회복 속도를 높이는 데 있다. 비강 점막 상태를 개선하고 후각신경 기능을 회복시키며 동시에 자율신경을 안정시키는 접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보다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적절한 치료를 통해 점막과 신경 기능이 회복되면 회복 기간을 단축하고 후유증을 줄일 수 있다. 감기 이후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는 회복이 지연되고 있다는 신호다. 방치할 경우 장기간 지속될 수 있고 치료가 늦어질수록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 조기에 상태를 점검하고 회복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6-03-25

헝그리 파이터

내 성격이 거칠다고 나의 사랑의 과정이 생략된 건 절대 아니에요 내가 햄버거만 먹는 건 또 아니에요 내 마음을 사소한 것들이 데워준다는 사실과 내가 코스모스를 좋아한 건 치명적 약점이었지요 내 주먹은 단지 손가락들의 고아원 나는 전봇대에 기대서서 추억과 희망의 껌을 씹어요 나의 반대편의 것들의 인력(引力)이 나를 무릎 꿇게 해요 나를 키운 건 양희은 아줌마 나를 압박하는 건 조용필 아저씨 나는 다만 폭발력이 부족한 게 흠이에요 나는 아마 이 시대의 피가 아닌가 봐요 나는 쉽게 타협할 줄도, 그런 기교도 없어요 나는 지금 희망은 별로 없지만 그러나 가능성 그 자체라고 굳게 믿어요 나는 다만 가난의 절망이 그것으로 끝날까 봐 걱정 정도는 해요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의심도 해요 내 마음만 바꾸면 새파란 창문 하나쯤은 만들 수도 있어요 나의 음악은 휘파람이고요 나는 늘 상대가 없는 싸움만 하고 있어요 나는 결국 싸움의 과정 그 자체이며 그것은 끝이 없으리라 나름대로 야무지게 생각하고 있어요. ........................................ 위대한 수학자 존 포보스 내쉬 주니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가 생각하는 걸 나도 생각한다고 그가 생각하리란 걸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무엇을 두고 나라고 할 것인가!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6-03-25

불심을 깨우다

공방으로 들어서니 길게 누운 불화(佛畫)들이 나를 맞는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수문장처럼 마주 본다. 아미타회가 그려진 후불탱화와 호법신을 묘사한 신중탱화가 게으름을 피우며 바닥에 뒹군다. 오백나한의 이야기는 끝이 없고 석가모니불의 영취산에서 설법 장면이 그려진 영산회상도가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다. 문경 하늘재 골짜기에서 경북 무형문화재 제39호 김종섭 불화장(佛畫匠)을 만난다. 장인에게 관음불교미술연구원은 불화를 그리는 공방이요 불화의 맥을 이어주는 공간이다. 흩어진 마음을 다잡는 기도처요, 힘이 들어 쉬는 삶의 쉼터이다. 그림은 돌을 찾는 일에서 시작한다. 색깔이 좋으면 작은 돌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돌을 집어 든 장인의 입가에 미소가 돈다. 돌을 씻고 같은 색을 모아 기계에 넣고 철판의 간격을 좁혀가며 돌을 간다. 씻을수록 선명해지고 갈수록 작아지고 장인의 바람은 커진다. 가루를 모아 채질하는 장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가루의 은은한 빛깔이 작업장에 번진다. 그릴 때마다 몸을 씻고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빗는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깨끗한 몸가짐과 단정한 옷차림에 말이 없다. 스님이 되어도 환속하여도 기도하고 자신을 닦는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불화를 통하여 부처에게 다가가는 몸가짐은 그대로이다. 붓을 잡으면 그림과 하나가 된다. 정신을 모아 선을 그으면 시간도 정지한 듯 머문다. 주위는 고요하고 새 한 마리 울지 않는다. 손은 리듬에 맞추어 점을 찍고 선을 긋고 면을 칠한다. 한 점 한 점 찍어나가는 흰 점이 입체감을 더한다. 검은 선으로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처의 몸. 상호에 마지막으로 점을 찍는다. 부처님이 번쩍 눈을 뜬다. 장인이라도 마음 씀에 따라 상호는 다르게 그려진다. 불화에서 상호가 중요하다는 장인은 법당에 올라가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받아들여지면 부처님의 얼굴을 그린다. 수십 년을 그려도 상호는 그릴 때의 마음이 반추되어 나타난다. 그릴 때마다 얼굴이 다르다고 말하는 장인이 눈을 크게 뜬다. 손이 떨리거나 힘이 들어갈 때, 몸을 씻고 법당으로 간다. 절을 올리고 앉아 참선에 든다. 시간이 흐르면 손끝이 가벼워진다. 불화를 그리는 일에 몸과 마음은 두 개가 아니다. 몸이 마음을 따르고 마음은 몸을 따라서 나아간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 때 붓끝에 부처님이 담긴다. 돈을 생각하면 한낱 그림에 불과하다. 물욕이 눈 앞을 가리면 부처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굳게 믿는 마음이 있어 불화를 그린다. 애착도 있지만, 사십여 년 한결같이 붓을 잡게 한 힘이 따로 있다. 소원을 이루어달라는 기원은 아니다. 부처를 통해 중생을 깨워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산업 사회의 압축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 짧은 기간에 이룬 부(富)에 익숙하여 정상적인 돈의 흐름에는 만족을 모른다. 기회를 틈타서 큰 이익을 얻으려 한다. 늘 한몫 챙기려고 생각한다. 투기의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물욕에 가까이 서 있는 한 부처를 만나기는 힘이 든다. 월등한 세력으로 사람을 꼼짝 못 하게 누른다. 쉽게 고르고, 함부로 다루고, 그냥 내보낸다. 돈으로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려 한다. 한 줌의 권력을 행사하느라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다. 사람을 막 대하느라 머리 위의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한다. 부처와는 멀리 떨어진 별에 산다. 상대방에게 중상모략을 일삼고, 공천받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칼자루를 쥔 자에게는 굽신굽신한다. 공천에서 탈락하면 다시 모인다. 그들에게 굳은 마음은 찾기 힘이 든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부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불성이란 마음을 부처답게 가지는 일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성을 만날 수 있다. 불쌍히 보고 높이 보고 너그럽게 보는 마음만 간직하고 있다면. “부처님 되세요.” 장인이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넨다. 장인은 불심을 그리고 중생은 부처의 마음을 읽으며 자신에게 내재된 불성을 깨운다. /김규인 수필가

2026-03-25

영덕 풍력기 사고, 정밀진단 후 원인 꼭 밝혀야

23일 경북 영덕풍력발전단지 내 발전기에서 불이나 작업 중이던 근로자 3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풍력단지는 지난달에도 풍력발전기 1기가 쓰러져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곳이어서 풍력발전기 안전관리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망한 근로자 3명은 이날 오전 현장에서 풍력발전기 정비작업을 벌이고 있다가 블레이드 부분에서 화재가 나면서 변을 당했다. 소방당국은 “정확한 발화 원인을 조사 중”이라고 밝히고 있고 영덕풍력 관계자도 “작업 중 스파크가 생긴 것인지 전기합선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고만 한다. 문제는 영덕풍력발전기의 사고가 불과 한 달여 만에 또다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영덕풍력발전단지는 우리나라 최초 산지풍력으로 조성된 곳이다. 2005년 영덕읍 창포리에 24기를 건설해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보통 풍력기의 설계수명을 20년으로 보나 풍력기 운영사인 유니슨은 지난해 영덕군에 연장허가를 신청, 3년 연장 승인을 받았다. 이번 사고와 관련 전문가들은 단순한 기계 결함을 넘어 설비의 노후화, 기상조건 그리고 관리체계의 미흡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20년 사용한 풍력발전기라면 날개를 지탱하는 베어링이나 내부 기어박스의 피로도가 누적됐을 가능성이 크고, 풍력기가 해안가에 위치한 특성상 염분이 포함된 해풍에 장시간 노출돼 금속구조물의 부식이 가속화됐을 가능성도 예상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또 수십m 높이의 타워나 블레이드 내부의 미세균열 등은 일반적인 점검으로 발견하기가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도 사고를 일으킬 원인으로 분석을 한다. 특히 사고가 난 풍력단지는 불과 10개월 전 전문기관의 안전진단에서 풍력단지 내 발전기 모두가 이상없음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풍력발전기의 관리체계에 허점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풍력발전기 노후화 문제는 이젠 전국적 현상으로 짚어야 할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사고 원인에 대한 철저한 점검과 조사가 선행돼야 제의 3사고도 막고 피해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2026-03-24

국힘 공천파동은 TK를 ‘텃밭’으로 보기 때문

국민의힘의 대구·경북(TK) 지방선거 공천갈등이 확산하고 있다. 공천심사에서 컷오프된 유력후보 중에는 무소속 출마를 고민하는 사람도 있어 국민의힘 본선 판세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장 경선에서 배제된 주호영(대구 수성갑) 의원은 공천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면서 탈당 및 무소속 출마 여부를 고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만약 주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면 대구시장 본선 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민주당에서 김부겸 전 국무총리가 출마할 경우 국민의힘 후보가 누가 되든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주 의원과 같이 컷오프된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23일 공관위에 재심요구서를 접수했다. 이 전 위원장은 당에 공천 심사 기준 및 평가 결과 공개, 재심사 진행, 공개 면접 등을 요구했다. 국민의힘은 포항시장 공천 과정에서도 홍역을 앓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1·2위를 달리던 김병욱 전 국회의원과 박승호 전 포항시장을 컷오프했기 때문이다. 김 전 의원은 “공정한 경선이 이뤄질 때까지 단식투쟁을 하겠다”고 했고, 박 전 시장은 “특정 후보를 밀기 위한 짜여진 공천 심사”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장동혁 대표는 이러한 공천파동과 관련, “공관위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했다. 사실상 이정현 공관위원장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당 지도부와 공관위의 충돌을 피하겠다는 생각이다. 이처럼 공천파열음이 계속되자 TK지역 국민의힘 지지율도 바닥권이다. 지난 20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전화면접)에서 국민의힘 TK 지지율은 28%에 그쳤다. 지난해 8월 장 대표 취임 이후 최저치다. 반면 민주당의 TK 지지율은 29%였다. 오차범위내이긴 하지만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TK지역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국민의힘을 앞선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공관위가 TK지역에서 민심을 무시한 공천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지지율 쇼크’다. 아직도 국민의힘 지도부가 TK지역에는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다.

2026-03-24

‘김부겸 카드’, 대구 보수정서 흔들 수 있을까

민주당이 6·3지방선거 대구시장 후보로 김부겸 전 국무총리를 낙점할 것 같다. 국민의힘이 당내 계파 갈등과 공천 잡음으로 극도의 혼란을 겪는 와중에 ‘보수텃밭’까지 넘보며 지방권력 싹쓸이를 하겠다는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민주당이 김 전 총리를 차출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지난 2005년 치러진 10·26 대구 동구을 재선거가 데자뷔처럼 떠오른다.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치러진 동구을 10·26 재선거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선 이강철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공천됐고,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10명이 넘는 공천 신청자가 있었지만 유승민 당 대표비서실장이 전략공천됐다. 비례대표로 국회에 첫 입성한 유 의원은 당시 박근혜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공천됐다. 유 의원은 민정당과 민자당 의원을 지낸 대구의 거물 정치인인 유수호씨의 아들이다. 대구에서 오랫동안 정치활동을 해온 이강철 수석은 2003년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나의 오랜 동지이자 친구”로 소개할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대구에 있는 집까지 팔아 선거캠프를 지원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자연히 재선거에서는 ‘여당 프리미엄’이 주 이슈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구 지하철 3호선 건설이다. 선거열기가 한창 뜨거워질 때 이강철 후보는 당시 조해녕 대구시장을 만나 지하철 3호선 건설 설계비가 국비에 반영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물론 언론에서도 이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하지만 ‘여당 프리미엄’은 ‘박근혜 정서’를 이기지 못했다. 선거결과는 유 의원이 52%를 득표하며 승리했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에서 김 전 총리가 등판할 경우 대구시민들은 ‘보수정서’와 ‘여당 프리미엄’ 중 어느 쪽을 선택할지 주목된다. 이미 민주당에선 김 전 총리 차출 과정에서 ‘여당 프리미엄’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정청래 대표는 23일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김 전 총리가 대구시장이 되면 낙후된 대구의 발전을 이끌어 낼 강력한 리더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앞서 조승래 당 사무총장도 GRDP 최하위권인 대구 경제를 거론하며 “공항·공공기관 이전과 같은 현안 해결을 위해 대통령, 중앙정부와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김 전 총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당 지도부가 적극 나서서 대구현안 해결을 위해서는 ‘김부겸 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유권자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힘 대구 국회의원들도 최근 김 전 총리를 당선시키기 위해 민주당이 내놓을 ‘선거용 보따리’를 잔뜩 경계하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대구의원 전원 명의로 “민주당이 TK통합법안을 김 전 총리의 선거공약용으로 남겨놓기 위해 처리를 지연시켜 왔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되는 TK지역 정당지지율을 보면 국민의힘과 민주당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일 정도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대구의 산적한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힘 있는 여당 후보가 등판하게 되면, 대구시장 선거판세가 요동칠 수 있는 정치환경이 이미 조성돼 있는 것이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6-03-24

부산시장의 삭발

정치인의 삭발은 정치적 현안에 대한 본인의 강력한 의지와 결기를 드러내는 특별한 수단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정치인이 삭발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시도한 것은 1987년 박찬종 전 통일민주당 의원이 처음인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의원은 그해 12월 첫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며 삭발을 했다. 2019년 영국 BBC 방송은 “한국 정치인은 왜 삭발하는가” 라는 제목의 한국 정치인의 삭발 문화를 조명한 적이 있다. 당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삭발 소식을 전하면서 BBC 방송은 “한국에서 삭발은 유교적 가르침에 기반한 것”으로 해석하고 “이는 전통적 시위 수단”이라 말했다. 삭발 시위는 한국말고도 외국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2015년 홍콩의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은 홍콩 최고지도자인 행정관의 직선제를 요구하며 단체 삭발을 했다. 중국 정부가 이를 거부했지만 시위 강도는 더 거세졌다. 2018년 미국에서도 한 여고생이 총기 규제를 요구하며 삭발 시위를 벌인 일이 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진 삭발은 당사자가 누구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결심의 표현이다. 특히 우리나라서는 야당 정치인이 현 정권에 대한 반대 의지를 나타낼 때 잘 사용한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처리를 요구하며 국회 본관 앞에서 삭발을 했다. 지방선거를 겨냥해 야당 단체장이 삭발투쟁이라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박 시장은 “같은 지역발전법인데 전북은 되고 부산은 왜 안되는지”를 여당에게 물었다” 야당 단체장의 삭발 투쟁, 지방선거전이 격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6-03-24

새로운 도약의 갈림길에 선 철강산업

2025년 글로벌 철강산업은 긴 조정 국면을 이어왔다. 미국발 관세 정책, 중국 부동산 경기 침체, 글로벌 제조업 둔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철강 수요를 전방위로 압박했다. 철강산업이 중심인 포항철강산업단지 역시 이러한 흐름을 피해 가지 못했다. 생산 실적은 13조8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6.2% 감소했고, 수출도 31억3000만 달러로 5.7% 줄었다. 고용 인원까지 줄어들면서 전반적인 하락세를 보인 한해였다. 그러나 주요 기관들은 2025년을 철강 경기의 저점으로 보고 있으며, 2026년부터는 점진적 회복 국면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다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은 세계 철강 생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부동산 경기 침체로 철강 수요가 감소하고 있다. 중국이 과잉 생산되는 철강을 수출로 밀어냐면서 글로벌 시장은 부담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서 가격 경쟁이 한층 심화되는 근저에는 중국 철강의 수출 확대가 자리한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에 미국의 관세 정책 불확실성과 중동 지역 갈등에 따른 유가 변동성도 철강 산업의 위험 요인 변수로 남아 있다. 국내적으로는 노란봉투법과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기업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내 철강대기업들은 이러한 환경 파고를 넘기 위해 양적 성장보다 질적 경쟁력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포스코는 기존 고로 중심의 생산 체계를 넘어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과 전기로 확대 전략을 추진하며 자동차 강판과 전기차 소재 등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사업 구조 재편에 나서고 있다. 현대제철 역시 자동차 강판 중심의 고급 강종 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전기로 투자 확대와 탄소 저감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문제는 중소 철강기업들이다. 포항철강산업단지만 보더라도 대부분 여전히 어려운 경영 환경에 직면해 있다. 올해 산업단지의 생산 전망은 글로벌 철강 경기 부진과 통상 압박, 중국발 공급 과잉 등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도 전년 대비 약 5% 증가한 14조5812억 원 수준으로 계획돼 있다. 각 기업들은 연초부터 고삐를 바짝 되고 있다. 하지만, 기대한 수출이 글로벌 교역 둔화와 환율 변동성, 미국 관세 정책 등의 영향으로 제대로 될지 의문이다. 현재 전망으로는 전년도 수준인 31억3875만 달러 정도만 달성해도 성공일 듯 하다. 여기에 포항철강단지 중소기업 제품의 주요 수요처인 국내 건설 경기가 아직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발목을 잡고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장기간 이어진 철강 경기 침체로 투자 여력이 제한된 상황에서 전기요금 등 에너지 비용 상승까지 겹쳐 기업들의 경쟁력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철강산업의 회복을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철강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인식하고 변화된 시장 환경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건설 수요 회복을 위한 지원과 철강 수입 증가에 대응하는 비관세 장벽 강화, 그리고 전기요금 등 에너지 비용 부담 완화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2026년은 철강산업이 단순한 경기 반등을 넘어 구조 전환의 분기점이 되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 경쟁력과 친환경 전환, 그리고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산업 구조 재편이 철강산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우리 철강 산업은 지금, 새로운 도약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전익현 포항철강산업단지관리공단 이사장

2026-03-24

혁신은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기업 혁신을 이야기할 때, 잭웰치, 일론 머스크 등 ‘천재 한 사람’이나 ‘스타 플레이어’를 떠올린다.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혁신은 200명의 단원이 함께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에 가깝다. 수많은 악기가 정확한 타이밍과 호흡으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하나의 음악이 완성된다. 그 음악은 한 사람의 작은 실수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기업 역시 다르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을 세우고, 몇몇 핵심 인재가 탁월한 성과를 낸다고 하더라도, 조직의 한 부분에서 엇박자가 나기 시작하면 전체 혁신은 금세 균열을 보인다. 연주자 직원과 지휘자 리더, 악보인 표준에 따라 합주·협업으로 하나 된 조화가 성과를 만든다. 생산 현장의 작은 품질 문제, 중간관리자의 소극적인 태도, 지원 부서의 비협조적 대응. 이 모든 것은 개별적으로 보면 사소해 보일지 몰라도, 전체 관점에서는 혁신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변수로 작용한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의 공정에서 발생한 불량이 다음 공정으로 전이되고, 결품, 납기 지연과 원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문제의 본질은 특정 개인의 역량 부족이 아니다. 전체 시스템이 하나의 리듬으로 움직이지 못한 데 있다. 즉, 혁신의 실패는 ‘누가 못했는가’가 아니라 ‘왜 함께 맞추지 못했는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단원이 같은 악보를 보고, 같은 지휘를 따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소리는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다. 기업 혁신도 마찬가지다. 방향과 비전, 전략, 목표, 운영제도, 평가 체계가 서로 어긋나지 않고 정렬되면, 조직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각 부서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서로 다른 음악을 연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리더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지휘자가 템포를 놓치거나 균형을 잡지 못하면, 아무리 뛰어난 연주자라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기업에서도 리더는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조직의 리듬을 맞추고 불협화음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혁신은 사람과 시스템, 실행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한 기업에서보면, 혁신 실행의 구성 축이 한쪽 쏠림 현상이 되면, 엇박자로 성과는 지지부진하게 되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안전관리와 설비관리가 균형 있게 진행되지 못하고 안전에 치우치면 사고의 본질적 문제인 설비의 불안정으로 더 큰 사고가 이어질 수 있다. 운전과 정비의 역할과 협업이 잘 되면 생산, 품질, 안전까지 성과를 만들 수 있다. 각자의 소리는 다르지만 음정과 박자 길이만큼 연주하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법이다. 결국 혁신은 독주가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구성원이 함께 만들어내는 정교한 합주다. 그 합주의 완성도는 가장 뛰어난 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약한 한 부분에서 결정된다. 기업이 진정한 혁신을 이루고자 한다면, 이제는 ‘누가 더 잘할 것인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함께 맞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6-03-24

공황장애는 ‘연예인병’인가요?

최근 공황장애 환자가 급증하며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상 환자 수는 4년간 40% 이상 증가해 2021년 20만 명에 달했으며, 특정 직업군을 넘어 청소년부터 중장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에 동국대 사공정규 교수의 공황장애 원인부터 치료법, 일상 전략을 체계적으로 다룬 5회 연재 칼럼을 게재한다. 증상 완화가 아닌 일상 회복에 초점을 맞춰, 환자와 가족에게는 위로와 실용 정보를, 일반 독자에게는 마음 건강을 지키는 법을 전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2010년 즈음부터 여러 유명 연예인이 공황장애 경험을 공개하면서 이 질환은 비로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공황장애는 한동안 특정 직업과 연결된 병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은 분명하다. 공황장애는 일부 사람의 병이 아니다. 우리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질환이다. 10여 년 전 진료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치료 후 많이 좋아진 한 중년 여성이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공황장애 치료를 받았어.” 딸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엄마가 무슨 연예인이야?” 그 시절 공황장애를 바라보던 사회의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공황장애는 나약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오랫동안 긴장과 스트레스를 견뎌온 몸이 보내는 신호에 가깝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교감신경이 활성화된다. 몸은 긴장하고 심장은 빨라진다. 이 반응 자체는 지극히 정상이다. 다만 그 활성화가 과도하게 치솟는 순간, 공황발작이 나타난다. 이때 사람들은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숨이 막히며 “이러다 죽는 것 아닐까” 하는 공포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실제 위험을 의미하지 않는다. 몸의 경보 시스템이 과하게 울린 상태일 뿐이다. 잠시 과열된 반응이 만들어낸 신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경험을 한다. 공황장애의 평생 유병률은 약 3%로 보고된다. 100명 중 3명이다. 우리나라 인구를 기준으로 보면 약 150만 명이 일생에 한 번은 공황장애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결코 드문 질환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도 있다. 공황장애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연예인은 남성이 많았지만 실제 환자는 여성에게 더 흔하다. 일반적으로 여성 환자가 남성보다 약 두 배 많다. 평균 발병 연령은 약 25세이며, 치료받는 환자의 상당수는 30~50대에 집중되어 있다. 삶의 책임이 가장 무거운 시기와 겹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누군가의 고백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라는 안도와 용기를 준다. 실제로 연예인들의 공개적인 경험은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공황장애에 대한 인식도 점차 변화하고 있다. 치료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지면서 실제 치료 환자도 빠르게 증가했다. 2010년 약 5만 명에서 2023년 약 24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혼자 버티고 있다. 당뇨나 고혈압이 그렇듯 공황장애 역시 누구에게나 나타날 수 있는 질환이며,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숨겨야 할 병도 아니고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치료를 시작하면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 치료를 경험한 환자들은 공통된 변화를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라고 묻는다. 그러나 치료가 진행되면 질문이 달라진다. “왜 이제야 이해했을까.”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공황장애는 삶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이해되지 않았을 때만 삶을 멈추게 한다. 편견이 사라지는 순간, 회복은 이미 시작되고 삶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 사공정규 33년 차 공황·불안 전문의이자 ‘힐링닥터’로 알려진 그는 증상 호전을 넘어 삶의 근본적 회복을 위한 치료에 주력한다. 동국대 의대에서 3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며 진료·연구·교육에 힘썼고,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메사추세츠 종합병원(MGH)에서 방문교수와 임상연구원으로 활동했다.

2026-03-24

대지의 거울, 우유니에서 보낸 ‘영원의 하루’

나는 호텔로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도 우유니의 비현실적인 풍경 속 장면들이 눈에 선하여 설레는 기분과 행복감이 가시지 않는다. 우유니 소금 사막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풍경을 넘어, 인간의 영혼과 대자연이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는 곳이다. 우유니(Uyuni)로 향하는 길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례와 같았다. 해발 3600미터의 고지대, 희박한 공기에 입술은 바짝 말라갔지만, 지평선 끝에서 마주한 거대한 소금 바다는 단숨에 나를 압도했다. 그곳은 단순한 자연의 풍경이 아니었다. 수만 년 전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솟아오른 뒤, 태양이 물기를 말려 남긴 ‘지구의 기억’이다. 문득, 수백 년 전 이 척박하면서도 아름다운 땅을 지배했던 잉카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이 사막은 무엇이었을까.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거인 튜누파 여신이 아이를 잃고 흘린 슬픈 눈물과 젖이 고여 만들어진 ‘여신의 눈물’이라고 전해진다. 태양의 자손이라 여겼던 잉카인들은 이 하얀 평원을 바라보며 태양신 ‘인티(Inti)’가 내려준 가장 거대한 거울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 땅의 자식이자 하늘의 일부임을 매일같이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잉카의 사제들이 이 흰 정적 속에서 바쳤을 기도를 상상하자, 발밑의 소금 결정들이 마치 오래된 경전의 문구처럼 반짝였다. 새벽녘, 나는 인티(Inti)의 부활을 목격했다. 우유니의 아침은 차가운 청색 정적 속에서 시작된다. 해가 뜨기 직전, 세상은 온통 차가운 쪽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신 인티의 숨결이 닿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첫 빛줄기는 소금 대지 위로 긴 황금빛 화살을 쏘아 올린다. 어둠에 잠겨 있던 백색 평원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부드러운 분홍빛으로 물든다. 잉카인들이 그토록 숭배했던 그 찬란한 빛이 수면 위로 반사될 때, 비로소 깨달았다. 하늘의 태양과 땅의 태양이 맞닿아 세상이 두 개의 빛으로 채워지는 순간을. 그것은 빛의 탄생이자, 매일 아침 반복되는 우주의 창조였다. 안데스산맥 너머로 해가 저물어갈 때, 우유니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해 질 녘의 빛은 아침의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격정적이다. 하늘은 붉은 포도주를 쏟아부은 듯 핏빛으로 타오르고, 그 아래 사막은 거대한 자수정 판처럼 보랏빛으로 일렁인다. 잉카인들이 ‘파차마마(Pachamama, 대지의 어머니)’에게 감사를 바쳤을 그 장엄한 시간, 세상의 경계는 완전히 허물어진다. 붉게 물든 구름이 발등을 덮고, 타오르는 불길 위를 걷는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이것은 자연이 선사하는 가장 사치스러운 환송회이며, 낮과 밤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신들의 작별 인사였다. 빛의 향연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면, 우유니는 비로소 지구의 경계를 넘어 우주의 일부가 된다. 공기가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은 제 안에 품고 있던 모든 별을 소금 대지 위로 쏟아낸다. 고개를 들면 은하수가 거대한 강물(Mayu)처럼 흐르고, 발밑을 내려다보면 다시 그 은하수가 똑같은 깊이로 펼쳐진다. 상하 구분이 사라진 암흑 속에서, 나는 마치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때 들려오는 것은 바람의 소리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별들의 노래였다. 수만 년 전 잉카의 조상들이 들었을 그 노래. 쏟아지는 별빛이 소금 결정에 부딪히는 듯 쟁쟁거리는 환청이 고요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별들은 깜빡이며 태고의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잉카인들은 이 별의 노래를 들으며 계절을 읽고 운명을 점쳤으리라. 사막을 떠나오는 길, 낡은 등산화에는 하얀 소금 가루가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훈장을 털어내지 않았다. 이 소금 가루에는 잉카의 신화와 태양빛, 그리고 별들의 노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유니는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인간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그저 자연이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 잠시 머물다 가는 짧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을. 비록 번잡한 도시로 돌아가겠지만, 내 영혼의 한 조각은 영원히 그 하얀 거울 속에서 인티의 빛을 받으며 파차마마의 품에 안겨 별들의 노래를 따라 유영할 것이다. 하늘과 땅이 맞닿고, 신과 인간이 함께했던 그곳. 우유니는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잃기’였다. /김상국(세종대 명예교수)

2026-03-24

왕과 사는 남자 이우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400만을 돌파하였다. 이 영화가 나오기 11년 전, 단종이 묻힌 장릉의 무덤 앞에서 엄흥도를 소환한 사람이 있다. 시인 이우근이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첫 페이지에 ‘장릉(단종의 무덤)에서’란 시가 그것이다. 장항준 감독이 이우근 시인의 시를 보고 영화 ‘왕사남’을 만들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영화 ‘왕사남’과 시 ‘장릉에서’의 싱크로율은 거의 100%이다. 거두절미하고 시를 감상해 보자. “엄흥도는 생각했다/ 스스로의 불심검문이 가장 어렵고 가장 사소하나 가장 의로운 일은 들의 풀꽃처럼 지천에 널려 있어,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을 비켜 가리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짚신을 끌며 지게를 메고 자못 비장하지만 비루한 본성은 감출 수가 없었다/ 껍질을 벗고 나면 반상도 남루인 걸 주검에 꽃필 일이야 없겠지만 어린 생애는 그래도 빛을 잃지 않고 꿈길을 기웃거리다 내 곁으로 왔다/ 이것이 왜 나의 운명인가, 그의 어린 아내의 초조한 눈빛이 더욱 사무친다/ 아픈 것은 어찌 됐던 급한 대로 닦아주고 여며 주면 마음이야 편할 것이다/ 몸속의 피가 묽어지도록 비를 맞으며 개울을 건너는 것은, 취모검 위로 맨발로 걷는 듯 불의한 사람의 강을 건너는 마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동행하는 심정은 낯설고 황망하다/ 그러나 일말의 동정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산이 대책 없이 착함이라/ 이만큼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역사를 세우는 것도 별로 손해되는 일은 아니리라/ 어린 손의 한기는 그 생애만큼 차갑고 본성에 가까운 그리움에 지친 저 감은 눈은 이미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저 어린 나랏님은 다른 세상의 문을 열리라/ 많은 이별에 지쳐 떠나는 길도 더디기만 할 것인즉 오히려 남은 사람의 슬픔의 몫이 더욱 비참하다/ 그것을 나는 아무도 몰래 가슴에다 묻는다/ 나 같은 아랫것에겐 변절도 사치, 애초 그 뜻도 몰랐다/ 엄흥도는 그렇게 생각했다”-이우근 시 ‘장릉에서’ ‘왕사남’을 보신 분들은 위 시의 주제가 영화의 전편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손의 한기는 그 생애만큼 차갑고 본성에 가까운 그리움에 지친 저 감은 눈’의 구절을 읽노라면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영화의 장면보다 더 애절하다. 이우근은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글과 사람을 배우고 튼튼하게 인생의 바닥으로 나섰다. ‘문학선’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을 내었다. ‘숙자는 힘이 세다’ ‘죽여 줄께요’ ‘라이더’ 등 그의 시에 숨은 주제는 모두 사람이다. 예금통장은 엄두조차 내질 못하는 사람들의 질경이 같은 삶들을 지고(高)는 아니더라도 지선(善)의 자리에 놓는다. 그의 시는 읽는 내내 아프다. 그러나 시가 끝날 때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죽음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단종처럼 사는 남자. 시인 이우근이다. 헐벗은 광야를 지나 치유의 숲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23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이 있다. 진실은 감추려 해도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숨기는 것을 비판하거나 비꼴 때 쓰는 말이다. 사람 손바닥은 작다. 어린아이는 손바닥에 사탕이 올려지면 온 세상을 가진 듯 웃는다. 사실 손바닥은 많은 것을 쥘 수는 없다. 빵 한두 개, 과일 한두 개, 얼마간의 돈, 옷 한두 벌을 쥘 수 있을 뿐이다. 한데, 인간은 그 손바닥에 천하를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려 들기도 한다. 급기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살려고도 한다. 음모론(陰謀論·conspiracy theory)이 바로 그런 손바닥의 하나다. 국어사전은 음모론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이라고 풀이한다. 또, 미국 언어학자 촘스키는 “음모론이란 이제 지적인 욕설이 되었다. 누군가 세상의 일을 좀 자세히 알려고 할 때 그걸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들이대는 논리다.”라고 말했다. 나도 촘스키의 말에 동감한다. 음모론은 복잡한 세상 현상을 단순하게 콕 집어 올리는 기술이기도 하다. 세계는 크고, 불확실하며, 단순하지 않다. 경제는 나라와 지구촌이 얽히고설켜 있고, 정치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충돌한다.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사건들은 명확한 원인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음모론이다!” 이 한마디는 혼란과 의혹을 불식시키는 마법처럼 식별하지 않는 가슴들을 파고든다. 지난달 27일 오후 6시 10분부터 다음 날 오전 1시 28분까지 7시간 18분간 유튜브 채널 펜앤마이크 TV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인가”란 주제로 끝장 토론이 있었다. 패널로 음모론 주장 측으로 제도권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가, 반대 측은 전한길 강사, 박주현 변호사, 이영돈 PD, 김미영 대표 4명이 참가했다. 토론은 동시 시청자가 최대 32만 명을 기록했고, 이달 3일까지 조회 수가 605만 명을 돌파, 온라인 정치 콘텐츠로서는 이례적 흥행을 보였다는 보도다. 눈여겨볼 점은 나이별 시청자 구성이다. 주최 측 보도에 따르면, 13~17세가 1.4% 약 8만4000명, 18~24세가 7.4% 약 44만7000명, 25~35세가 20.6% 약 124만7000명으로 추산된다. 합하면 10대부터 30대 중반까지가 전체의 29.4%로 177만8000명 수준이다. 다만, 실시간 유입·재시청·알고리즘 확산 효과까지 감안할 때 청년층 누적 인원은 220만 명 이상으로 분석된다고 했다. 나도 처음부터 끝까지 토론을 시청했다. 처음일 장시간 토론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 음모론 주장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 같았다. 특히, 미국 대학에서 컴퓨터 과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이준석 대표가 상대가 제시하는 통계적 근거를 무시하는 태도는 측은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간 제약에 통계적 근거 설명이 부족했다면, 과학과 경제학도답게 되레 충분한 설명을 요구해야 했다. 하지만, 600만이 넘는 시청자가 우리 선거에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이번 끝장 토론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다. 부디, 우리 제도권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 주장들을 해결해 나가기 바란다. /강길수 수필가

2026-03-23

경북 산불 복구는 제자리···당국 관심 멀어졌나

작년 경북 북부지역에서 발생한 초대형 산불이 일어난 지 꼭 1년 지났다. 그러나 피해 주민 10명 중 6명은 아직도 임시 거처인 컨테이너에서 생활 중이다. 1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보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그 당시 모습에 머물러 있다. 당국이 지원한 주택 보상비로는 치솟은 자재비와 인건비 등을 감당할 수 없어 새집 지을 엄두를 못낸다. 주택 전소 피해자의 42%가 집 짓는 것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생계수단이던 과수원 복구에도 나서야 하나 묘목을 심고 수확까지 최소 5~7년이 걸려야 해 당장 먹고 살 방법이 없다. 특별법이 보장하는 생계 지원 기간은 고작 6개월뿐이다. 모두가 살길이 막막하다고 호소한다. 산불로 피해를 입은 공장시설도 복구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가 지원하는 재건비로는 공장시설을 복구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영세 업주들은 이 상태로 가면 도산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이다.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경북 산불 피해 자료에 의하면 지난 1월 기준으로 조립주택 등 임시주거 시설에서 거주하는 피해 주민이 무려 4102명에 이른다. 주택피해 복구는 산불 당시 피해를 본 주택 3818동 가운데 195동만 복구됐다. 현재 복구 공사가 진행 중인 주택도 299동밖에 안 된다. 산불피해 지원 특별법 제정으로 복구가 잘 될 듯 요란 떨었지만 아직 4000명이 넘는 가구가 컨테이너 임시거처에 살고 있을 정도로 특별법의 효력은 미미하다. 정부 지원의 보상금을 받고도 집을 지을 수 없으니 생활비에 돈을 쓰다보니 빈털터리 신세가 된 주민도 많다. 불안한 주거생활의 연속으로 피해주민의 87%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호소한다. 지금이라도 이재민들이 재기할 수 있는 실질적 보완책이 나와야 한다. 주택 신축에 도움을 줄 저금리 장기금융 지원이나 임시거주 기간 연장, 전기료 감면 혜택 등 피해 주민들이 피부로 느낄 지원책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그들에게 희망을 갖고 살아갈 비전을 주어야 농촌의 부흥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2026-03-23

대구시장 놓고 치열한 수싸움 벌이는 與野

국민의힘 공관위가 지난 22일 대구시장 후보 공천을 위해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 등 3명을 컷오프(경선 배제)하고 윤재옥·추경호·유영하·최은석 의원과 이재만 전 대구 동구청장, 홍석준 전 의원 등 6명의 후보로 예비경선을 치르기로 했다. 예비경선에서는 TV토론회 과정 등을 거쳐 본경선에 오를 2명을 선정한다. 공관위가 그동안 높은 지지세를 보여온 주 의원과 이 전 위원장을 컷오프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적지 않은 후유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주 의원은 “승복할 수 없다. 바로 잡겠다“고 했고, 이 전 위원장도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그동안 대구시장 공천을 둘러싸고 ‘중진의원 컷오프’, ‘후보 내정설’ 등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이정현 공관위원장은 이날 공관위 회의 직전까지도 ‘중진 컷오프’를 밀어붙였다가, 장동혁 대표로부터 심각한 대구 민심을 전해 듣고는 경선 방침으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컷오프 대상을 두고 장 대표는 지지율이 낮은 1명만 거론했지만, 이 위원장이 주 의원과 이 전 위원장을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위원장으로선 인지도가 높은 두 후보를 배제함으로써 그동안 주장해온 ‘교체’ 명분은 확보했다. 이처럼 국민의힘 경선이 어수선한 틈을 타 민주당은 대구시장 카드로 김부겸 전 국무총리를 차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승래 사무총장은 최근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김 전 총리와 소통을 해왔다”면서 “대구의 주요 현안을 잘 풀어나갈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현재 대구가 홍준표 전 시장의 중도 사퇴 이후 대부분 현안이 표류하고 있어 여권의 힘이 절실한 상황이라는 것을 이번 선거전에 집중 활용하는 모습이다. 만약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김 전 총리를 대구시장에 공천할 경우 ‘보수텃밭’의 정치지형이 어떻게 바뀔지 예측할 수 없다. 최근 발표되는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TK지역 민주당·국민의힘 지지율이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2026-03-23

2분기 전기요금 동결된다지만

이란과 미국·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인한 원유 수급 위기와 에너지 대란이 우려되는 가운데 다행스런 소식 하나가 최근 전해졌다. 23일 한국전력은 올해 2분기에 적용될 연료비 조정단가를 지금과 동일한 KWh당 +5원으로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내달부터 6월까지 전기요금은 현재와 같은 수준이 될 전망이다. 가정용 전기요금은 12분기 연속이고, 산업용 역시 6분기 연속으로 동결된 것. 하지만,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통상 전기요금은 기본요금과 전력량요금, 기후환경 요금, 연료비 조정요금으로 구성된다. 이 중 연료비 조정요금은 최근 3개월간 유연탄, 액화천연가스 등의 단기적인 에너지 비용 변동분을 토대로 정해진다. 지난 3개월 동안 유연탄과 LNG 가격이 소폭 떨어지며 연료비 조정 단가에 인하 요인이 발생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폭격과 잇따른 이란의 보복 공격이 시작된 이후인 2월 말부터는 국제 유가가 큰 폭으로 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향후 폭등의 가등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한국전력의 2분기 연료비 조정에는 아직 이런 상황이 반영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2022년과 2023년 LNG 가격 급등 시기에 한국전력에 적지 않은 영업적자가 쌓여있는 점도 걱정스럽다. 지난 2021년 이후 현재까지 한전의 누적 영업 적자는 29조 원에 육박한다. 서민들은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시름을 덜었지만, 이란과 미국·이스라엘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 전기를 포함한 에너지 위기의 위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걱정거리 하나가 더 생겼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3-23

팬덤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

‘팬덤(fandom) 정치’가 뉴노멀(new normal)이 되었다. 확증편향에 갇힌 강성 당원들이 공당(公黨)의 공론장을 지배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화 된 팬덤’의 독선이 문제다. 정치인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팬덤을 이용하려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휘둘리고 있으니 참으로 ‘웃픈 현실’이다. 팬덤 정치는 왜 위험한가? 비이성적 팬덤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팬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도덕적 절대주의자’이다. 오직 자신만 ‘깨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성찰과 반성은 ‘도덕적 열정’의 방해물로 간주한다. 정의의 기준은 ‘이적(利敵)행위’ 여부에 있으며, 적을 이롭게 하면 악이고 적에게 타격을 주면 정의라는 것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이견(異見)은 허용되지 않으며, 견해를 달리하면 ‘배신자’ 낙인을 씌우거나 ‘좌표 찍기’를 하는 등 집단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정치 팬덤들은 민주주의 원칙인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증오와 혐오’를 먹고 산다. 팬덤의 속성인 도덕적 절대주의, 편 가르기, 성찰 없는 확증편향 등은 이성적 토론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와 정면충돌할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게다가 소명의식을 망각한 정치인들은 팬덤을 이용하여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가 하면, 극단적 정치유튜버들은 악성 팬덤에 편승해서 돈벌이에 급급하고 있어서 ‘공동선을 추구해야 할 정치’가 ‘개인적·영리적 목적의 전쟁’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러한 팬덤 정치를 끝내려면 무엇보다 정치인들의 각성이 시급하다. 정치인들은 팬덤을 이용해서 정치적 목적(당권, 공천 등)을 추구하다가 어느덧 팬덤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루소(Jean J. Rousseau)가 “좋은 정치는 좋은 시민을 만들고, 사나운 정치는 사나운 시민을 만든다.”고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인이 균형감각을 상실하면 공동체를 이끌어갈 판단력을 잃게 된다. 정치인은 팬덤의 극단적 선동정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하며, ‘팬심’(팬덤의 마음)이 아니라 ‘민심’(국민의 마음)을 받들어야 한다. 선거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양 극단의 ‘시끄러운 팬덤’이 아니라 ‘조용한 중도층’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한편 주권자인 국민의 각성도 절실하다. ‘정치의 수준은 국민의 수준’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깨어있는 시민’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깨어 있는 시민은 ‘보편적 정의’와 ‘선택적 정의’를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며, 편향적 진영논리나 양극화 정치의 유혹, 그리고 확증편향의 덫에 빠지지 않는다. 깨어있는 시민은 정치현상을 ‘감정적 편향’이 아니라 ‘이성적 균형’으로 판단해야 하며, 강성 팬덤들의 공격에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정치인은 정치인다워야 하고, 주권자는 주권자다워야 한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6-03-23

오픈소스 AI vs 클로즈드 AI

지난주 우리는 인공지능(AI)이 눈을 뜨고, 귀를 열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음성, 영상을 넘나드는 멀티모달(Multimodal) AI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한 발 더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처럼 강력한 AI를 만드는 회사들이 왜 어떤 곳은 기술을 모두 공개하고, 어떤 곳은 철저히 감추는 것일까? “내가 수천억 원을 들여 만든 기술을 왜 공짜로 줘야 해?”와 “함께 만들어야 더 좋은 게 나오지 않을까?” 이 두 경영 철학의 충돌이 지금 AI 산업을 뒤흔들고 있고, 이 전쟁은 단순한 기업 간 경쟁을 넘어, AI의 미래가 누구의 손에 놓일 것인가를 결정짓는 싸움이 되고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두고 실리콘밸리의 천재들도 아직 답을 내놓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레시피를 공개하느냐, 마느냐 AI 모델을 음식점 레시피에 비유해 보자. 수십억 원을 들여 개발한 비밀 레시피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오픈소스(Open Source)’는 이 레시피를 누구에게나 공개하는 방식이다. 누구든 내려받아 자신의 주방에서 그대로 요리할 수 있고, 마음껏 변형하거나 개선할 수도 있다. 반면 ‘클로즈드 소스(Closed Source)’는 완성된 요리만 판매하고 레시피는 절대 공개하지 않는 방식이다. 손님은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무엇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AI에서 ‘레시피’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모델 가중치(weight)와 학습 코드다. 오픈소스 AI는 이것을 모두 공개해 누구든 자신의 컴퓨터나 서버에서 직접 돌릴 수 있다. 클로즈드 AI는 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라는 창구를 통해 접근만 허용하고, 내부 구조는 결코, 공개하지 않는다. 요리는 먹을 수 있지만, 주방에는 들어올 수 없는 방식인 것이다. 클로즈드 진영 — “품질과 안전, 둘 다 우리가 책임진다” 코드를 공개하지 않는 클로즈드 AI의 대표 주자는 세 곳이 있다. 첫 번째는 OpenAI의 GPT 시리즈다. 우리가 잘 아는 ChatGPT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이름에 ‘오픈(Open)’이 들어가지만, GPT-4 이후로는 클로즈드로 전환했다. GPT-4o, o3, 그리고 최근 공개된 GPT-4.5까지, 최신 모델은 API와 ChatGPT 서비스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OpenAI는 “검증되지 않은 강력한 AI가 세상에 그대로 풀리면 위험하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결국 상업적 이해관계가 더 크다”고 반박한다. 회사 이름에 ‘오픈’을 달고 정작 가장 클로즈드 전략을 택했다는 역설은, AI 업계에서 꽤 유명한 농담이다. 두 번째는 Anthropic의 Claude 시리즈다. 2024년부터 Claude 3.5, 3.7 Sonnet, Claude 3.5 Haiku 등을 잇달아 선보이며 챗봇 시장의 강자로 자리 잡았다. Anthropic은 처음부터 클로즈드 전략을 고수해 왔다. 공동 창업자 다리오 아모데이는 “AI는 핵무기에 맞먹는 잠재적 위험을 가질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며, ‘헌법적 AI(Constitutional AI)’라는 자체 안전 원칙을 전면에 내세운다. 윤리와 안전을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삼은 클로즈드 전략이다. 세 번째는 Google의 Gemini 시리즈다. Gemini 1.5 Pro, 2.0 Flash 등 주력 모델은 클로즈드로 운영하면서, 경량 버전인 Gemma 시리즈는 오픈소스로 공개하는 이중 전략을 취한다. “최고 성능은 우리가 독점하되, 생태계 확장은 오픈소스로”라는 영리한 계산이다. 세계 최대 검색 엔진과 유튜브, 안드로이드를 보유한 Google이 오픈소스 카드까지 쥐었다는 사실은, 경쟁사들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압박이다. 오픈소스 진영 — “AI는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오픈소스 진영의 최강자는 단연 Meta의 LLaMA(라마) 시리즈다. 일반인이 여전히 Facebook으로 인식하는 메타는 2023년 LLaMA를 처음 공개한 이후, LLaMA 2, 3, 3.1, 3.3을 잇달아 출시하며 오픈소스 AI 생태계의 기준점을 세웠다. 최신 Llama 3.3 70B 모델은 성능 면에서 GPT-4 급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마크 저커버그는 “오픈소스 AI가 미국의 기술 경쟁력을 지킨다”는 말로 이를 정치·경제적 의제로까지 끌어올렸다. 또한, 프랑스의 스타트업 Mistral AI는 유럽산 오픈소스 AI의 기수다. Mistral 7B, Mixtral 8x7B, 그리고 최근 Mistral Small 3.1까지, 비교적 작은 크기에도 뛰어난 성능으로 전 세계 개발자의 주목을 받았다. “AI 주권”을 내세우며 미국 빅테크에 의존하지 않는 유럽의 AI 독립을 외치는 이 회사는, 오픈소스로 개발자 커뮤니티의 신뢰를 쌓고 기업용 유료 서비스로 수익을 내는 하이브리드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2025년 초 AI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름도 있다. 중국 스타트업이 오픈소스로 공개한 DeepSeek-R1이다. “중국산 AI가 OpenAI를 넘봤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쏟아졌고, 공개 직후 미국 나스닥 시장에서 엔비디아 주가가 하루 만에 17%나 폭락했다. DeepSeek-R1의 핵심은 비용이었다. OpenAI가 수천억 원을 쏟아부은 결과물에 버금가는 성능을, 수십 분의 일 비용으로 구현했다는 주장이 업계를 뒤흔들었다. 이 사건은 “AI는 무조건 막대한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상식을 깼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 있다. 중국 알리바바 클라우드가 개발한 Qwen(천원) 시리즈도 주목할 만하다. Qwen 2.5는 코딩과 수학 분야에서 GPT-4를 앞선다는 벤치마크 결과도 있다. 이 밖에도 Microsoft가 지원하는 Phi 시리즈, 삼성이 참여한 SOLAR, ETRI의 EXAONE(엑사원) 연구 공개 버전 등 한국에서도 오픈소스 모델 생태계가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 처리에 특화된 국내 모델들은 영어 중심의 글로벌 모델이 놓치는 맥락과 뉘앙스를 더 정교하게 잡아낸다는 강점이 있어 앞으로 기대가 된다. 왜 다른 길을 걷는가 — 철학인가, 전략인가 두 진영이 다른 선택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경영 철학의 차이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냉혹한 비즈니스 계산이 숨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클로즈드(Closed) 진영의 논리는 명확하다. 첫째는 수익 모델이다. API 사용료와 구독료가 핵심 수입원이기 때문에, 모델을 공개하는 순간 경쟁자가 무료로 복제해 간다. 둘째는 안전이다.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포된 강력한 AI가 범죄나 허위 정보 생성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다. 오픈소스 진영의 반박도 만만치 않다. 여기서 Meta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흥미롭다. Meta는 AI 모델을 직접 팔아 돈을 버는 비즈니스가 없다. Meta의 수익은 광고다. AI 생태계 전체가 발전하고 개발자들이 Meta의 인프라와 플랫폼을 쓸수록, Meta의 광고 비즈니스도 함께 성장한다. 결국 메타에게 오픈소스 AI는 ‘공짜 뿌리기’가 아니라, 경쟁자인 OpenAI와 Anthropic의 유료 모델을 무력화하는 전략 무기인 셈이다.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 자유냐, 편의냐 그렇다면 일반 사용자와 기업에게 이 전쟁은 어떤 의미일까? 오픈소스 AI의 최대 장점은 자유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무료로 쓸 수 있고, 내부 데이터가 외부 서버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환자 정보를 다루는 병원, 기밀 문서를 다루는 법무법인이라면 내부 서버에 직접 설치해 쓸 수 있어 보안 걱정이 크게 줄어든다. 단점은 기술적 진입장벽이다. 모델을 돌릴 수 있는 고성능 서버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Llama 3.3 70B 급 모델을 원활하게 운영하려면 고성능 GPU 서버가 필수다. 클로즈드 AI의 장점은 편의성과 성능이다. 회원 가입만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의 AI를 당장 쓸 수 있다. 지속적인 성능 업데이트와 기술 지원도 보장된다. 단점은 비용과 의존성이다. 서비스 요금이 오르거나 정책이 바뀌면 대응하기 어렵다. 2024년 OpenAI가 API 가격 정책을 여러 차례 바꾸면서 곤란을 겪은 기업들이 적지 않았다.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의 경우에는 현실적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클로즈드 AI로 빠르게 시작하고, 규모가 커지거나 데이터 보안이 중요해지면 오픈소스 전환을 검토하는 단계적 전략이 합리적이다. 제조기업이라면, 품질 검사나 설비 데이터 분석처럼 민감한 공정 정보를 다루는 영역에서 오픈소스 모델을 내부 서버에 직접 구축하는 방식이 장기적으로 유리할 수도 있다.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진영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OpenAI는 최근 일부 소형 모델을 오픈소스로 공개했다. Meta는 일부 기업용 서비스를 유료로 실험 중이다. Google은 Gemma와 Gemini를 통해 양 진영을 동시에 공략한다. 이제 “우리는 완전히 오픈소스”나 “우리는 완전히 클로즈드”라고 단언하기 어려운 혼전의 시대다. 결국 오픈소스냐 클로즈드냐의 싸움은, AI 기술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 그 이익이 어떻게 분배될 것인가를 둘러싼 전쟁인 것이다. 소수 빅테크기업이 AI를 독점하는 세계와, 누구든 AI를 만들고 개선하고 활용하는 세계 — 어느 쪽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줄지, 그 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이 전쟁의 구경꾼이 아니라, 선택하는 사용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2026-03-22

“누가 얼굴이 아닌 열쇠로”

순수하게 겨울이 얼린 얼음처럼 지켜진 것 같은 세계 언 늪이 녹으면 부서지는 유리 열쇠들 미래의 텅 빈 정원에서 누가 지문이 아닌 열쇠를 쓰는지 늪 속으로 사라지는 열쇠들 잠기는 비밀들 한없이 가라앉는 비밀은 오랜 빛이 되는데 누가 얼굴이 아닌 열쇠로 이 여린 비밀을 숨겨두는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빛처럼 세계를 묻어둔 사람 먼 늪 속의 빛으로 깊이 지켜질 것 같은 약속은 투명한 열쇠가 스치면 열리는 바닥이 있다는 것 ―안미린, ‘폐정원’ 전문 (문학과사회, 153호) 안미린의 연작이기도 한 ‘폐정원’은 차갑고도 투명한 겨울처럼 단단하게 잠겨 있다. 누가 이 세계를 잠근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열 것인가. 화자의 이 세계는 ‘유리 열쇠’라는 도구로만 열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언 늪이 녹으면 열쇠도 부서진다”니. 이 세계가 얼마나 불신과 연약한 약속 위에 서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누가 열쇠를 쓰는지, 누가 비밀을 숨기는지는 중요하지 않거나 모호하다. 대신 ‘얼음’, ‘늪’, ‘유리 열쇠’, ‘지문’, ‘얼굴’, ‘빛’이라는 물질들이 서로 스치고, 부서지고, 가라앉으며 사건을 주도한다. 화자는 왜 선명한 지문이나 얼굴 대신 불안하기 그지없는 유리 열쇠라는 사물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이는 개인적 욕망이기보다 이 세계를 여닫는 행위와 질서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리 열쇠는 인간의 손에 쥐어진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가라앉고 스러지며 늪과 섞이는 생동하는 물질처럼 인식된다. 예컨대 인간의 지문이 지워진 자리에 사물의 열쇠가 놓이는 것처럼 사라진 정원에서 물질들이 스스로 맺는 약속과 그들만이 생동하는 감각이 있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이나 카렌 바라드(Karen Barad)는 물질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이를테면 고체인 ‘얼음’이 액체인 ‘녹는 늪’이 되듯 ‘부서지는 열쇠’는 결국 파편이 되어 종내에는 빛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물질은 마치 살아 있는 객체로 표상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화자가 말하는 비밀이 언제까지 고정되어 있지 않을 것임을 희망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늪’이라는 물질 속으로 침잠하며 ‘빛’이라는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물질로 현현한다. 사물은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사건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다. “투명한 열쇠가 스치면 열리는 바닥”처럼 바닥을 여는 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열쇠와 바닥이라는 두 물질 사이의 접촉이라는 물리적 사건일 테니까. “그들은 거울을 사용한다(They Do it with Mirrors).” 이 문구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의 한 제목이다. 결국, 세계의 진실은 인간이 파헤치지 않아도 언젠가 ‘투명한 열쇠’를 만나기만 한다면 열릴 것이다. 스스로가 제 몸을 열어 보이는 주문처럼 말이다. “투명한 열쇠가 스치면 열리는 바닥” /이희정 시인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