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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한 남자 이야기

▲ 김재원 국회의원며칠전 일간신문 경제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우리투자증권 사장에 김원규 전무가 취임했다. 김 전무는 우리투자증권 사상 처음으로 사원에서 사장에 오른 인물이다. 김 전무는 1960년 생으로 대구상고와 경북대를 나와 1985년 LG투자증권에 입사했다. 이후 금융상품영업팀장, 강남지역 본부장, 퇴직연금그룹장, WM사업부 대표 등을 지냈다. 김 전무의 사장 선임은 우리투자증권 역사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LG투자증권 시절을 포함해 우리증권과 합병해 탄생한 우리투자증권까지 사원에서 사장에 오르는 인물로는 처음이기 때문이다`사실 김 전무는 1961년생이다. 3남 1녀 중 2남으로 위로 형과 누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산골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대구상고 야간에 진학했다. 그 무렵 그의 부친은 법원의 판결을 받아 누이와 그의 나이를 올려줬다.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상고졸업반이 되어도 은행에 취업할 나이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억지로 나이까지 고쳐 공무원시험 응시연령에 도달한 그의 누이는 대구 원화여고 재학중에 9급공무원이 되었다. 그 역시 은행취업을 목표로 하던 상고재학생이었지만 진학반으로 옮겨 경북대학에 진학했다. 간신히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학비걱정이 뒤따랐다. 결국 말단 공무원으로 취업한 누이가 등록금을 보태주었고, 스스로도 과외교사, 경양식집 종업원으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독자들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김원규 사장은 나의 친형이다. 그는 내가 대학 2학년 때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투자증권의 전신인 LG증권에 입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증권회사 객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며 일했다. 그가 누이에게서 학비를 타 썼듯이,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나는 형에게서 돈을 받아 책을 사고 기숙사비를 내면서 공부를 했다. 사실 형은 막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서울에서 생활하던 터라 카드 돌려막기를 하면서까지 내게 힘겹게 돈을 주고 있었다. 어렴풋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오늘까지 아는척 하지 못했다. 그후 내가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은 동생의 부담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형은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오늘까지 근무하면서 임원이 되고, 전무가 되어 드디어 사장의 자리에 올랐다.형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성실한 사람이다. 특별한 재주는 없지만 무던하게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 동안 정치판에 뛰어든 동생이 야당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나, 비주류로 떠돌던 때에는 정부소유 금융회사의 임원으로서 알게 모르게 힘겨워 했다. 인사가 다가오는 겨울철이 되면 동생 때문에 직장에서 잘릴까봐 잠을 못 이룬다고도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번에도 친박 정치인의 친형이라는 이유가 또 장애가 될 뻔했다. 이래저래 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동생이었다.회사원이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사장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영광된 일이다. 그래서 적지 않은 언론매체에서 나의 형에 대해 자세히 보도했다. 그 기사에서 `1960년생`이라는 구절에서 시선이 멈춘다.형과 누나는 나이를 고쳐 한해라도 먼저 취업해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사실 누이도 대학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애걸복걸했지만 뻔히 아는 집안형편에 뜻을 접고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누이의 희생으로 형이 대학을 갔고, 나도 형에게 큰 고통을 주면서 대학을 마쳤다.형의 작은 성공을 보면서, 나는 형이 지방대학을 나와 맨주먹으로 열심히 살아서 성공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학벌이니 배경이니 하는 우리사회의 성공방정식을 깨버렸으면 한다. 그래서 1961년에 태어났음에도 1960년생이 돼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1등이 아닌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됐으면 한다.

2013-07-12

엄마의 밥상

▲ 김재원 국회의원“얘야, 오늘은 내가 밥을 차려줄테니, 그냥 집에서 밥 먹자” 3년전 이맘때의 일이다. 이미 20여년 전 홀로 된 엄마는 아버지가 남겨준 대구 경북대학교 부근의 작은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가끔 집에 들르는 막내아들과 나들이하는 것은 빈한한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엄마의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면소재지에 있는 안평장터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백고무신을 신고 10리길을 걸어야 했지만 장터 입구에 있는 왁자지껄한 중국집에서 아버지가 사준 자장면 한 그릇으로도 즐거워했다. 그래서 농사일이 끝나고 담배수매로 목돈을 쥔 아버지가 몇 일씩 집을 나가 그 돈을 다 쓰고 돌아와도 별말 없이 남편 앞에 밥상을 차려내던 엄마였다.사별한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인지 엄마는 가물에 콩 나듯 찾아온 자식들과 허름한 아파트 단지 근처 중국음식점에 가서 가벼운 외식만을 해도 무척 좋아했다. 나는 한 두번 엄마와의 나들이만으로도 효자가 된 듯 착각했다. 엄마는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이 천년만년 기다리고 있다가 밥 한번 사주면 소녀처럼 좋아하는 무던한 존재였다.그런데 그날따라 엄마는 나에게 밥상을 차려내겠다고 했다. 엄마가 차려낸 밥상에는 수북한 밥 한 공기와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국, 그리고 김치와 나물반찬이 전부였다. 엄마가 평소 먹는 밥상이었지만 입맛이 없다며 엄마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밥상위의 된장국이 소태처럼 짰다.“엄마, 국이 너무 짜요”엄마는 말했다. “요즘은 짭쪼름해야 입맛이 도니 소금을 많이 퍼 넣어서 그럴거야”장성한 4남매와 남편이 모두 떠난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던 엄마는 그 무렵 폐암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늙은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우리 형제는 뒤늦은 회한에 가슴을 쳤다. 형은 `우리가 죽일 놈`이라고도 했다. 독한 항암치료 탓으로 엄마는 이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소금국 보다 짠 된장국을 입으로 퍼 넣으며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지친듯 거실 바닥에 돌아누운 엄마의 등짝이 보였다. 새끼들이 떠난 노인의 쭈그러진 등짝은 사실 너무도 허전해서 바라볼수록 눈물이 났다. 모든 새끼들을 업어키운 위대함 뒤에 홀로 남은 외로움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소태같은 된장국에 내 눈물까지 섞어서 밥을 말아 얼른 퍼 먹어치웠다.그로부터 석달 동안 엄마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와 수술로 고통스럽게 버티다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막내아들인 나와 손잡고 나들이 하던 작은 즐거움은 그날 이후 단 한번도 더 누리지 못했다.남은 자식들은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엄마를 고향마을 뒷산의 아버지 산소옆에 묻었고, 엄마가 남겨준 아파트와 예금을 해약해 나눠가졌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갈대밭에서 살아가는 염낭거미의 어미는 갈대잎을 말아 만든 알집에 알을 낳아 알이 부화될 때까지 그곳을 지킨다. 새끼는 알에서 깨어 나와 첫 번째 탈피를 하면서 눈앞에 있는 어미에게 달려들어 어미의 살을 파먹는다. 어미는 새끼에게 몸을 먹이로 내주고, 새끼는 어미의 몸을 먹고 자라나 성체가 된다.가쁜 숨을 쉬며 등을 보이고 누워있던 그날의 쓸쓸하고 허전한 엄마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등에 내 몸은 기대어 잠들며 자랐고, 마침내 홀로 섰지만 엄마는 늙고, 병들어갔다. 어미의 살을 파먹고 자라난 염낭거미의 새끼처럼 나도 엄마의 살을 파먹고 살아온 것이다.세상의 모든 생명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계절 오월이 되면 나는 그날 엄마가 차려준 마지막 밥상이 생각난다. 깊이를 모를 엄마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알지도 못하고 훌쩍 보낸 회한과 후회로 가슴을 친다.

2013-05-03

변해야 산다

▲ 김재원 국회의원신문을 읽을 때마다 왜 이렇게 큰 종이에 인쇄하는지 궁금했었다. 큰 종이에 인쇄하면 돈이 적게 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신문이 나올 초창기인 1712년 무렵 영국의 신문사들은 신문의 페이지 수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페이지 수를 줄이려고 지금과 같은 크기의 종이를 선택했다. 1855년에 이르러 세금이 없어졌고, 큰 종이에 신문을 인쇄하려면 엄청난 추가 비용이 드는데도 신문사들은 기존의 판형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메트로`라는 무료 신문이 발행된 후 2003년에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타블로이드판`이 처음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판매량이 급등하자 `타임즈`와 `가디언`도 새로운 변화에 합세해 작은 신문을 찍어 매출이 크게 신장했다.왜 그토록 오랫동안 기존의 신문 크기를 바꾸지 못한 걸까? 정말로 그동안 아무도 작은 종이에 인쇄하려는 생각을 못했을까?물론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은 많았다. “신문 크기를 줄여서 읽기 편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라는 제안은 꾸준했지만 늘 외면당했다. 독자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타블로이드판 신문은 독자로부터 대환영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유도 모른 채 타성에 젖어 다수의 선택을 무조건 추종하는 경우가 많다. 익숙한 현상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래서 힘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십수년 전 필자가 변호사로 일할 때의 경험담이다. 당시만 해도 변호사가 구속된 형사사건의 변호를 맡으면 구속된 피의자를 구치소에서 한두번 만나 얘기를 듣고, 수사기록을 통해 사건내용을 파악한 후 재판에 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 과정에 구치소에 구금된 피의자와는 두세 번 정도 만나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그러나 필자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는 무조건 구치소에 가서 피의자들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또 수요일에는 사건 진행과정과 의뢰인이 궁금해 하는 사안을 편지로 정리해서 구치소의 이메일로 보내 목요일 오전에 이메일 편지가 의뢰인에게 도달되도록 했다. 결국 나의 의뢰인은 매주 월요일 오전에 자신의 변호인을 구치소 안에서 만나 애로사항을 얘기했고, 목요일에는 다시 변호인의 편지를 받았다.사건을 맡긴 의뢰인들의 반응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 원하지 않던 결과가 나오더라도 의뢰인들은 “할만큼 했다. 수고했다”는 반응이 많았다.나 혼자의 힘으로 변화를 가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으나, 사람들과 함께 현상을 바꾸는 것은 집단적인 타성 때문에 무척 어렵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세상으로 들어가는 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저항이 따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타성을 깨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변화와 발전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정치 일선에 있는 필자는 사람들 앞에 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변화를 얘기한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변화의 싹을 틔우기 위함이다. 생각이 변해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변하고, 지역이 변해야 내 나라가 변한다.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나라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얼마전 지역구 사무실의 외벽 현수막이 봄바람에 찢어져 새로 교체하게 되었다. 나는 현수막을 제작하는 후배에게 외벽의 문구를 다음과 같이 주문해서 걸게 했다.`아내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꾸겠습니다. 청년정신(靑年情神)! 국회의원 김재원`

2013-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