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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미움도 싫어함도 깨끗이 씻어 버리니…’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 회주이자 조계종 원로의원 종상 대종사가 원적에 들었다. 종상 대종사는 지난 8일 오전 1시 2분 불국사에서 법랍 60년, 세수 76세로 입적했다. 1948년 전북 임실군에서 출생한 종상 대종사는 1965년 법주사에서 월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으며, 1973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석굴암 주지, 청계사 주지, 불국사 주지, 불교방송 이사, 동국대 이사 등을 지냈다. 금강산 신계사 복원추진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불국사복지재단·성림문화유산재단 등을 맡아 교육, 남북관계 개선, 문화 관련 소임에도 열중했다. 2020년 11월 조계종이 비구에게 주는 가장 높은 법계(法階)인 대종사(大宗師)에 올랐으며 2022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됐다. 열반 직전까지 불국사 회주와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 분당 석가사 주지, 불교텔레비전BTN 명예이사로서 활동하며 불국사 교구 및 종단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종상 대종사는 ‘미움도 싫어함도 깨끗이 씻어 버리니 헐뜯고 칭찬함이 어디에 붙겠는가. 초연히 생사를 해탈하니 금까마귀 하늘 뚫고 날아가네’라는 뜻을 담은 “혐시탕척 훼예하류 초연탈생사 금오철천비”(嫌猜蕩滌 毁譽何留 超然脫生死 金烏徹天飛)를 열반송으로 남겼다. 열반송은 승려가 입적에 앞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남기는 말이나 글을 의미한다. 장례는 조계종 원로회의장으로 치르며 영결식과 다비식은 오는 12일 불국사에서 엄수된다. /황성호·윤희정기자

2024-11-10

장수홍 전 청구그룹회장 별세

청구아파트와 TBC 대구방송을 만든 장수홍(張壽弘·사진) 전 청구그룹 회장이 지난 2일 오후 9시 50분쯤 용인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1세이다. 1942년 12월 19일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북사대부고, 부산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일본어를 배우려고 건축잡지를 보다가 주택 사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73년 대구 수성구 범어동에서 자본금 2000만원, 사원 10명으로 청구주택개발공사를 세웠다. 1978년 주택건설업자 등록을 하며 청구주택으로 사명을 바꿨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아파트 건설 사업을 벌였다. 이후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을 전후해서 대구 시내 곳곳에 고층 아파트를 지었다. 그는 1982년 서울지사를 세우고 전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986년 서울 중계동에 분양한 아파트 청약경쟁률이 37대1로 당시까지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1990년 분당에선 수도권 신도시 최고인 203대1까지 올랐다. 수도권 신도시 주부들 사이에 청구아파트가 큰 인기를 끌었다. 1987년 삼양코아, 1989년 청구조경을 설립하고 1991년 경일상호신용금고, 1995년 왕십리역사를 인수했으며, 1994년 TBC 대구방송을 창립했다. 1996년에는 블루힐백화점(현 롯데백화점 분당점)을 개점했다. 1994년 그룹 종합조정실을 설치해 그룹의 모양새를 갖췄다. 한때 재계 서열 30위권에 올랐다. 1996년부터 미분양 아파트가 늘며 자금 압박설이 퍼졌고, 1997년 말 법정관리를 신청, 부도를 내며 청구그룹이 공중 분해됐다. 대구방송은 1999년 귀뚜라미보일러에 지분 매각됐다. 이후 재기를 모색한 적도 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유족은 부인 김시임씨와 2남 1녀(장경진·장동진·장은진), 며느리 장평·서미희씨, 사위 장동균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 5일 오전 7시, 장지 용인아너스톤. 02-3410-3151. /김재욱기자 kimjw@kbmaeil.com

2024-11-03

끝내 스러져 ‘아침이슬’이 된 ‘대학로의 별’ 김민기

“고인의 뜻에 따라 조의금과 조화는 정중히 사양합니다.”  한국의 신문과 방송 거의 모두가 작곡가이자 가수, 뮤지컬 연출가이자 극장 학전(學田) 운영자였던 팔방미인 예술가 김민기(1951~2024·사진)의 사망 소식을 알린 22일. 이 한 줄의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사람은 죽음의 순간에 그 진가가 드러내는 법. 김민기는 생전에도 자신의 능력을 환금(換金)하겠다는 욕망과는 무관하게 살았다. 그러니, 사후에 무슨 꽃과 돈이 필요하겠는가? 그의 유언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이 말 앞에선 ‘과연 김민기답다’라고 할 수밖에. 1970년 서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한 김민기는 그림이 아닌 포크 음악의 매력에 빠진다. 홍안(紅顔)의 열아홉 소년 김민기의 가슴을 저리게 했던 건 또 있었다. 평생 일해도 결코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달동네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것. 이는 김민기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인텔리겐치아 의식에서 벗어나 민중지향적인 음악을 만들어 무대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대 철학과를 다닌 소설가 김영현(69)은 신림동 판자촌에 사는 헐벗은 아이들을 보며 ‘나 혼자 공부해서,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대 군사독재는 영민하고 이타적인 청년들을 겁박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시대 속에서도 김민기는 돌올한(두드러지게 뛰어난) 예술적 성과를 삶 내내 보여줬다. ‘아침이슬’을 필두로 ‘가을 편지’ ‘상록수’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처럼 오랜 시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노래를 만들었고, 시인 김지하(1941~2022)가 쓴 희곡 ‘금관의 예수’ 극음악을 작곡했다. 1974년 군대에선 “너의 노래가 유신 반대 운동에서 불리고 있다”는 이유로 보안대 조사를 받고 영창도 갔다. 하지만, 그런 수난도 김민기의 의지와 예술적 열정을 꺾지 못했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과 한국 뮤지컬의 전설이라 불러도 좋을 ‘지하철 1호선’은 사라진 김민기와는 무관하게 아주 긴 세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후대는 2024년 7월 21일을 ‘겸양하고 사심 없던 예술가 김민기가 타계한 날’로 기록할 터.  김민기의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유족으로는 아들 둘과 아내가 있고, 발인은 24일 오전 8시다. 장지는 천안공원묘원./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4-07-22

전통 바느질 ‘누비’ 기술 대중화 김해자 누비장 별세…향년 71세

전통 누비의 명맥을 이어오며 대중화에 앞장서 온 김해자 국가무형문화재 누비장 보유자가 지난 13일 별세했다. 향년 71세.195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바느질의 기초를 배우고 중학교 졸업 후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옷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왕실 침방나인이었던 성옥염 씨와 선복 스님에게 바느질과 누비를 배웠다. 1980년대 초 15년간 경남 창녕에서 살면서 누비에 전념하며 다수의 제자를 길렀다. 그는 박물관의 유물과 구전으로 전해진 전통 기법을 아는 이들을 찾아가 배우는 등 명맥이 거의 끊긴 전통 누비를 되살린 주인공으로 1996년 누비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국내 뿐 아니라 해외 전시회에도 작품을 출품해 누비옷의 대중화에 앞장선 그는 일평생 누비 제작의 문화재적 가치를 선양하는데 이바지하고, 전통 누비 기법의 보존과 전승활동에 헌신했다. 2000년부터 경주 탑동 공방에서‘누비공방’을 운영하며 명맥이 거의 끊긴 전통 누비를 되살리고 세계에 알린 장인이었다.유족으로는 자녀 배진여씨가 있다. 빈소는 동국대 경주병원 장례식장 특2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6일 오전 9시, 장지는 경주하늘마루다. /윤희정기자

2024-04-14

‘퇴계 이황’ 16대 종손 이근필 옹 7일 별세

‘퇴계 이황 선생’의 16대 종손 이근필 옹이 7일 향년 9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이황’ 선생의 직계인 故이근필 선생은 자(字)가 성유(聖幼)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인천 제물포고교에서 3년간 한문을 가르치다 귀향, 고향인 도산초등학교에서 새로이 교편을 잡아 교장으로 퇴임했으며, 작고 전까지도 퇴계 종택에서 종무를 돌도며 국내 유림 사회에서도 큰 어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살아생 전 그는 수백 년 세월 동안 유가의 예법을 지켜오면서도 ‘종손의 말이 곧 법’이라는 종가 문화를 개선하고자 2011년 210명으로 구성된 ‘문중운영위원회’를 구성해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는 민주적 의결기구를 만드는 등 종손의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특히, 청력 손실로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는 건강에도 종택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들을 환대하며 ‘조복(造福. 복을 짓는다)’에 앞장섰다. 고(故) 이옹은 지난 2021년 대선 당시 도산서원을 찾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도 ‘조복’ 글귀를 선물하며 정치인들도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고인은 또 ‘남의 선행을 알리자’는 ‘양선(揚善)운동’을 폭넓게 벌여 왔다.  아울러 고인은 2001년 11월 퇴계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설립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의 주춧돌을 놓았으며 퇴계학 스터디그룹 거경대학(居敬大學)을 운영하기도 했다. 퇴계종손으로서 지난 2020년 서원 역사 600여년 최초로 도산서원 향사에 여성 초헌관을 임명하는가 하면 몇 해 전부터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불천위 제사를 저녁 6시로 바꾸는 등 ‘옛 것을 지키되 고집하지 않는’ 선비정신을 실천하는 본보기로 칭송받기도 했다.  고인은 슬하에 1남 3녀를 뒀다. 상주는 외아들이자 차종손인 이치억(李致億)씨로, 현재 국립공주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다. 장례식장은 안동병원 장례식장 8호실에 마련됐다.  5일장으로 모셔진다. 발인은 11일이고, 장지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선영이다. /피현진기자

2024-03-07

안동간고등어 탄생 주역 권동순씨 별세

권동순(67·사진·안동간고등어 고문) 전통문화콘텐츠개발사업단 대표가 10일 오전 지병으로 별세했다.권 대표는 다양한 향토 문화상품 개발을 통해 안동 전통문화의 발전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전력해 왔으며, 특히 간고등어를 안동 특산품으로 탄생 성장시킨 주역이다.안동간고등어는 2000년 창업 첫해 4억 원의 매출을 시작으로 2007년 280억이라는 매출을 올려 안동을 간고등어의 고장으로 만들었다.또한 한해 전 세계로 고등어 20t가량을 수출하면서 고등어를 안동의 주력 수출 상품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안동 8대 종가집의 종부 음식을 한곳에 모은 ‘예미정’도 그의 노력과 헌신 끝에 선을 보일 수 있었다.고인은 매일신문 기자로 재직하면서 지역의 다양한 사회 분야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한국지역언론보도 대상 등을 수상하는 등 기자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으며, 퇴직 후에는 후배 기자들을 위해 이육사 기자상을 제정하는 등 후배 언론인들의 사기진작과 발굴에도 힘썼다.이런 노력으로 권 대표는 지난 2020년 안동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살아생전 그는 “어떤 일을 해야 지역이 발전할 수 있는지 늘 생각하고 있다. 안동은 어쩔 수 없이 문화유산을 경쟁력으로 삼아 발전해야 하고, 그 속에서 지역 경제가 발전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해 왔다.또한, “지역 언론의 선배로 후배 기자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육사 기자상 제정도 육사 선생을 기리자는 뜻이 가장 크지만 지역 기자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고민한 결과”라고 강조하기도 했다.빈소=안동병원 장례식장 2호실 박미희(예미정 대표) 남편상, 권용재·권지은 부친상, 권기순(영주시 문수면장), 권광순(조선일보 경북취재본부 차장) 형님상, 권용대·권용훈(한국경제신문 기자) 백부상. 발인 12일 오전 9시, 장지 와룡면 선산 연락처 054) 840-0030. /피현진 기자

2024-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