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품이랄까 몰골은 말이 아니지만, 경북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376-2번지 한 자리에 500여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노거수를 만났다. 성내리 마을은 조선시대 영해부(영덕, 영양, 울진)의 관아가 있던 유서 깊은 문향의 마을이다. 마을 주민의 보호 속에 느티나무 노거수는 원 줄기는 고사 되었지만, 다른 줄기가 길게 뻗어 담장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수세는 매우 약해 보였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시멘트 담장으로 둘러쳐진 좁은 공간에 팽나무와 함께 나무의 신이 좌정한 당우와 갇혀 있다시피 했다. 영덕 성내리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 신령스럽게 여겨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어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목은•신돌석 같은 위인의 정신적 바탕은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 주민들이야 나무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높은 담장으로 접근을 막았다지만, 노거수는 햇볕과 바람, 뿌리에서 물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여 생육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무의 지속적인 성장과 건강을 위해서 통풍이 잘되도록 담장을 헐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 본다. 담장 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 들어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다행히 성내리 마을 박광환 노인회장과 조청해 주민이 친절하게 사다리를 가져다주어 담장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무 앞에는 제단과 노동신위(路東神位)란 비가 세워져 있었다. 박광환 노인회장은 정월 대보름날이면 온 마을이 이 나무 아래 모여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기원의 소지를 태운다고 했다. 영해 향교에도 제사를 지내는 나무가 있다고 하면서 한번 가 보기를 권했다.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발걸음 옮겼다. 영해 향교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고 몇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곳에 제당과 함께 느티나무와 향나무 노거수에 금줄이 쳐져 있었다. 나무 앞 안내판에 “영해 향교 내 이 자리는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이 지역에 파병 윤씨가 틀을 잡고 영해 박씨가 세를 누리며 살던 때부터 토속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재사를 올리던 곳이다. 지금은 300여 세대의 보금자리로서 매년 정월 보름날의 전통 제례에 따라 마을 제사를 올리고 있다.”라고 하는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고사한 느티나무에서 맹아가 발아하여 자라고 있는 나무의 주변에 목책을 둘러쳐서 보호하고 있었다. 이를 보면서 성내리 마을 주민은 노거수 보호의 지극함을 느꼈다. 한 마을에 두 곳의 나무를 당산목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도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향교로 들어가라는 하마비(下馬碑)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이는 겸손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아온 조선 선비의 품의가 돋보였다. 영해 향교에도 대문에는 열쇠가 채워져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담장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마침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바람에 함께 들어갈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언덕 위에 있는 영해향교 마당에서 또 다른 노거수와 마주했다. 바로 회화나무 두 그루다. 회화나무는 예로부터 선비의 기상과 학문적 이상을 상징하는 나무로, 선비나무,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회화나무를 집 안에 심으면 학문이 높은 인물이 나오고, 대문 앞에 심으면 잡귀가 드나들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특히 양반가에서는 출세와 벼슬, 학덕을 상징하는 길상목으로 여겼다. 회화나무 가지마다 맑은 기품을 품고 서 있는 모습은 오래전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들의 의연한 뒷모습을 닮았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은은히 흔들려, 마치 경전의 장(章)이 바람에 읽히듯 속삭인다. 향교의 마루에 앉아 글을 읽던 선비들은 이 나무를 두고 “하늘의 지혜가 깃든 스승”이라 여겼을 것이다. 회화나무는 정신을 바로 세우는 묵언의 교사였다. 회화나무는 향교의 담장을 넘어 저 멀리 칠보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풍경이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동해의 바다를 볼 수 없지만, 칠보산 정상이라면 동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칠보산을 보면서 동해의 무한한 에너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요산요수( 樂山樂水)란 말이 있다. “이는 자연 풍광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길게 산다.”고하는 뜻이 품어 있는 말이다. 회화나무와 칠보산을 바라보면서 동해를 연상하게끔 하는 이 풍광은 선비들의 삶에 자연히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영해 향교는 고려 후기, 충목왕 1346년에 세워졌다. 수백 년 동안 책 읽는 소리와 향내가 흘렀다. 임진왜란의 불길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고, 또다시 고쳐 세워지며, 마치 불사조처럼 살아온 건물이다. 이곳의 기둥들은 세월을 버텨낸 나무의 뼈처럼 우직하고, 회화나무는 그 역사를 곁에서 묵묵히 증언해 왔다. 나무를 경외시하는 영해 주민의 자연관을 보면서 그들의 삶이 보였다. 나무의 넉넉한 품은 주민들의 정신적 뿌리로 작용하여 이곳 출신의 사람들에게 삶의 지혜와 용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향교와 바로 이웃한 괴시리 전통 마을은 목은 이색 선생의 고향이다. 기와 담 골목마다 세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2백 년, 3백 년을 견뎌낸 고택들이 흙담에 기대어 서 있다. 마을을 걸으면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고, 선비들의 발자취가 돌길에서 소곤거린다. 목은 선생은 혼란의 고려 말에 학문의 불씨를 지켜낸 대학자이다. 정도전과 정몽주, 이성계에게 사상적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목은의 정신은 곧 새로운 나라 조선의 근간이 되었다. 또한 영해는 의병장 신돌석 장군을 낳은 고장이다. 평민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산맥을 넘어 퍼졌고, 그의 전술은 일본군조차 두려워했다. 끝내 배신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 울분과 정의는 지금도 영해 땅의 바람 속에 살아 숨 쉰다. 성내리의 노거수는 마을의 시간과 기억을 지탱하는 살아 있는 뿌리다. 사람들은 나무를 신령스럽게 여기고 제사를 올렸으며, 나무는 그들의 기원을 묵묵히 품었다. 이런 자연의 경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를 중시하는 정신으로 이어졌다. 목은 같은 대학자와 신돌석 같은 영웅이 태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적 바탕은 바로 이 땅의 나무로부터 길러진 것이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노거수 앞에 서면,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인간은 겸허해진다. 바람에 흔들리되 쓰러지지 않는 나무처럼, 우리도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노거수는 지금도 말을 걸어오는 현재의 존재다. 그것은 마을을 지켜온 뿌리이자, 사람을 길러낸 품이며, 역사를 이어온 숨결이다. 영해의 노거수와 향교, 그리고 그 땅에서 태어난 이들이 남긴 정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한 그루의 노거수처럼 묵직한 울림으로 서 있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신돌석 장군은... ---------------------------------------------------------------------------- 신돌석 장군(申乭石, 1878~1908)은 경북 영덕 출신으로, 평민 신분에서 항일 의병장이 된 인물이다. 본명은 신태호이나 어린 시절 이름인 ‘돌석’으로 불렸다. 1896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그는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의병 활동을 시작했고, 1906년 을사늑약 이후 본격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관군을 공격했다. 의병은 최대 3천 명에 달했으며, 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과 유격전을 펼치며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일본군은 그를 ‘태백산 호랑이’라 불렀다. 그러나 1908년, 배신한 옛 부하의 손에 독살당하며 짧은 생을 마쳤다. 비록 활동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신분을 넘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항일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독보적 인물이다. 영해에 신돌석 장군의 기념 공원이 있다.
■경북 제1호 지방정원 사람을 쉬게 하는 건 그늘이다. 그늘을 내리는 건 나무다. 수많은 여름 길 위에서, 여름 땡볕 아래서 알게 되었다. 답사는 단지 보는 일이 아니다. 걷고, 멈추고, 그 안에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그 일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곳에는 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흐르고, 고요가 깃든 숲이 있었다. 천년의 숲 정원은 역시 그런 장소다. 몸이 먼저 쉬고, 마음이 따라 멈추는 곳. 천년의 숲 정원은 동남산 자락, 메타세쿼이아 숲 사이로 이어진 정원이다. 이름부터 남다르지 않은가. ‘경상북도 지방정원 천년의 숲 정원’. 2022년 6월, 경북 제1호 지방정원이 되었고, 전국에서 여섯 번째로 지정된 대형 숲 정원이다. 행정도시 한편에 마련된 인공 정원이 아닌, 오래된 숲을 따라 조성된 살아 있는 공간이다. 숲의 바람은 깊고 부드럽다. 천년의 숲 정원은 단지 나무만 드리운 장소가 아니다. 사계절을 품은 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지는 사이, 숲은 계절을 전한다. 경북의 제1호 지방정원이자 전국 여섯 번째 대형 숲 정원 동남산 자락 32.8ha 규모… 9개 주제로 다채롭게 펼쳐져 계절을 품은 다양한 식물들이 꽃 피우고 지며 사계절 전해 바람에 실린 물소리와 아이들 웃음… 선계에 온 듯한 기분 ■종합안내도로 먼저 읽는 숲 정원 입구에 설치된 종합안내도를 먼저 짚고 가야 할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숲에 각각의 특색을 갖춘 작은 정원들이 마련되어 있다. 각각의 이름은 곧 정원의 성격이 되고, 성격을 읽다 보면 곧 숲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나무 아래 있으면 시간도 함께 눕는다. 천년의 숲 정원은 32.8ha 규모로, 사계절정원과 꽃보라정원, 미르정원 등 9개의 주제 정원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정원은 단순히 나무와 꽃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살아 있는 풍경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안내도에는 각각의 길목에 숲의 성격과 정원의 이름이 그려져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엔 생태연못이 있고, 숲이 깊어지는 곳엔 무궁화정원과 전통정원이 숨어 있다. ■누구나 풍경이 되는 외나무다리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종이 팸플릿을 들고 천천히 걷기도 한다. 처음 만나는 길은 세상의 둔탁한 길과 숲 사이를 잇는다. 입구를 지나 정원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 아치형 돌다리가 보인다. 돌다리 너머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나무들이 나란히 서 있다. 흠잡을 데 없이 쭉 뻗은 길은 시원함마저 선사한다. 작은 개울 위에 다소곳이 놓인 돌다리는 흙길과 숲 사이를 잇는 첫 번째 통로다. 바닥은 물기 없이 말랐어도 짙은 나무 그늘은 큰 위로가 된다. 무심코 건너려던 찰나,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트인다. 숲의 결이 단숨에 드러난다. 돌다리 아래 길게 뻗은 개울은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물길은 곧고 맑다. 개울 양옆으로 나무들이 서 있다. 나무들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하늘을 찌를 듯 자라며 시간을 쌓는다. 나무 사이사이로 햇살이 내리고, 바람은 길게 불어간다. 숲과 숲이 마주 보는 개울 어디쯤 외나무다리 하나가 누워 있다. 개울을 중심으로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켜온 것처럼. 어느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곧고 빼곡하다. 그러나 하나의 나무는 개울을 가로지르며 이쪽과 저쪽, 두 숲을 잇는다. 서 있는 나무들이 하늘과 대화한다면, 누운 나무는 땅과 물 그리고 사람을 품는다. 자신을 밟고 누구든 건너게 한다. 외나무다리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단절된 숲을 부드럽게 이어준다. 개울, 나무, 외나무다리가 서로 맞물려 만든 풍경은 현실의 결을 벗어난다. 순간, 발밑의 흙도 하늘도 모두 아지랑이에 잠긴 듯 울렁거린다. 초록빛이 겹겹이 눈앞을 감싸고, 낮과 밤, 땅과 허공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혼몽한 감각 속, 풍경은 시각이 아닌 감각의 결로 스며든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젖어드는 몽환의 숲 말이다. 초록은 단지 색이 아닌 숨결처럼 피어오르며 현실의 감각은 서서히 멀어진다. 숲길을 걷고 있지만, 허공을 걷는 느낌처럼 가볍다. 어디선가 초록의 요정이 따라오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비현실의 기운이 일렁이고, 나무 하나가 하품하며 문득 걸어 나와 말을 걸 것 같다. 물소리는 주문처럼 흐르고, 바람은 또 다른 속 사귐처럼 들린다. 눈을 감고 뜨는 사이, 어딘가 묘하고 낯선 세계로 이어지는 문이 열릴 것 같다. 숲은 나를 부드럽게 혼몽의 가장자리로 이끈다.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외나무다리 위에 선 사람과 물 위에 비친 사람의 실루엣은 바람 따라 흐트러졌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림자는 풍경 속 또 하나의 선이 되고, 움직임 없는 울림으로 번진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않는다. 셔터 소리조차 정적을 깨뜨릴까 조심스럽다. 바라만 보아도 머리끝까지 환하게 밝아지고 맑아진다. 숲은 그늘이 아니라 빛이다. 나무들이 햇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햇살을 이끄는 거다. ■마음 끌리는 대로 걷는 여러 개의 정원 무궁화 길은 길게 이어진 절정의 무대다. 흰색, 분홍빛, 연보라 꽃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나란히 나란히 나아간다. 벌들이 왕왕대며 꽃 사이를 분주히 옮겨 다닌다. 작은 날갯짓이 떨림처럼 느껴지고, 그 진동이 공기를 따라 퍼져나간다. 벌들의 왕왕거림은 흡사 어떤 언어처럼 들린다. 무궁화는 피어 가만가만하고, 벌은 피어 있는 시간의 중심을 장악한다. 꽃보라정원에는 자줏빛 에키네시아가 촘촘히 피어 있다. 중심이 짙고 가장자리가 연한 꽃잎들은 불꽃처럼 퍼지고, 정원의 숨결을 물들인다. 나비 한 마리가 꽃 위에 내려앉는다. 이 정원은 향과 빛, 그리고 고요의 흐름이 겹쳐진 꿈같은 공간이다. 사계절정원은 계절을 담은 시간의 병풍 같다. 봄의 잔잔한 화사함과 여름의 생동이 맞닿아 꿈틀댄다. 마치 계절끼리 바통을 주고받듯 색을 물려준다. 꽃들의 배열은 의도되지 않은 질서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한 걸음마다 계절이 바뀌고, 두 걸음마다 향이 바뀐다. 계절을 건너는 숲속의 작은 환상이 펼쳐지듯 아름답다. 미르정원은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곡선은 마치 우주의 축선처럼 부드럽고 정확하다. 물길이 중심을 따라 흐르고, 바람은 둥글게 돌아 나간다. 발아래 그림자마저 곡선을 따라 흘러간다. 미르정원은 중심이 아니라 흐름에서 완성된다. 걸으면 걸을수록 안쪽으로 들어가고, 그 끝은 다시 출발점이 된다. 암석원에는 거칠고 단단한 에너지가 솟구친다. 물결처럼 배치된 암석에서 자연의 오래된 기도문이 읽힌다. 돌 사이사이로 자라는 식물들이 바위의 숨을 이어간다. 무언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의 식물 정원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경계는 희미해지고, 생명은 느리게 이어진다. 수변정원은 물을 품은 세계다. 정원 둘레를 따라 흐르는 물줄기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물풀과 수생식물이 서로 얽힌다. 바람은 물 위에서 한층 더 가볍게 흘러간다. 물소리는 말보다 깊고, 리듬보다 자유롭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부레옥잠은 마치 시간을 잊은 것처럼 고요하다. 왕의 정원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수목과 포석, 그리고 조용히 선 돌 하나까지도 품위가 있다. 이곳의 침묵은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처럼 다가온다. 지나가는 바람조차 자세를 낮추는 듯, 정원은 스스로의 무게로 자리를 지킨다. 천년의 미소원은 가벼운 입꼬리처럼 휘어진 오솔길을 따라 펼쳐진다. 꽃과 풀, 나무가 서로의 거리를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친밀하다. 이름 덕분일까. 모든 것이 웃고 있는 듯하다. 풍경이 조용히 인사하고, 나무가 작은 농담을 건네는 듯한 느낌. 발길이 부드러워지는 정원이다. 5산 3물길은 천년의 숲 정원의 골격이다. 다섯 개의 숲 언덕과 세 개의 물길이 교차하며 숲의 숨결과 언어와 품격을 결정한다. 각각의 산은 거대한 힘차게 솟아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잇는 실처럼 흘러간다. 직접 걸어야만 이해되는 지도 같다. ■시간과 그늘의 여운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둣빛 옷과 모자를 쓴 작은 존재들이 나무 사이를 종종거리며 걷는다. ‘아···.’ 숲 어디에서부터 따라온 요정 같다. 바람 끝에 실린 물소리와 나뭇잎의 떨림, 아이들의 웃음이 겹쳐져 현실의 가장자리처럼 느껴진다. 빛은 공기 중에 머물고, 모든 것이 조금 떠 있는 듯한, 묘한 선계의 문턱에 서 있는 기분이다. 숲은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건네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오래된 쉼 하나를 내어, 나를 조용히 불러 세운다. 나무 아래 흘러간 시간이 그늘이 되고, 그늘이 다시 나아갈 용기가 된다. 걷고, 바라보고, 멈춘 모든 순간이 어느새 내 안의 풍경이 된다. 천년의 숲은 단지 꽃과 나무를 품은 정원이 아니다. 이 숲에는 사람이 있고, 쉼이 있고, 오래 기억될 여운이 있다. 발걸음을 떼어 돌아 나와서도 한참 거기 남은 듯한, 그런 여운으로 숲은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끝>
50대를 넘긴 사람들에게 짜장면은 음식이 아니다. 추억이다. 졸업식이나 입학식이 있던 날. 1500원짜리 꽃다발을 들고 학교를 찾아온 엄마가 사주던 500원짜리 짜장면. 그날의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애틋하고 훈훈하다. 고소한 냄새까지 고스란히 소환된다. 짜장면은 양파와 감자 등 채소와 돼지고기를 춘장과 함께 볶아 굵은 면발 국수에 올려 먹는 한국화된 중국 요리다. 물과 녹말가루를 넣지 않고 재료를 볶아낸 간짜장, 여러 가지 해물을 더한 삼선짜장, 고기와 채소를 잘게 다져 소스를 만든 유니짜장 등이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메뉴. 대중가요 노랫말에도 등장하고, 영화나 TV 드라마에서도 무시로 볼 수 있는 짜장면은 그 유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두고 아직도 논쟁 중이다. 다만, 19세기 후반 중국 산둥에서 하역 작업을 위해 인천으로 건너온 노동자들이 춘장에 국수를 비벼먹는 걸 보고 만들게 됐다는 게 유력한 가설. 중국과 일본 요리는 물론 유럽 요리, 미국식 스테이크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짜장면은 아직도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외식 메뉴 가운데 하나다. 앞서도 말했지만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 짜장면은 음식이 아닌 추억이므로. 1960년대 20~30원이던 짜장면은 1970년대 중반엔 200~250원으로 가격이 올랐고, 현재는 7000원 안팎을 지불해야 먹을 수 있다. 트러플 등 귀한 재료를 넣어 호텔 중식당에서 판매하는 짜장면은 5만원도 넘는다고.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얼핏 봐도 여든 안팎의 노인이다. 머리숱은 성글고, 눈가엔 자글자글 주름이, 팔뚝엔 검버섯이 점점이 피었으니. 여름이었고 날씨는 뜨거웠다. 커다란 솥이 김을 뿜어대는 주방은 더 더웠을 터. 그래도, 이 영감님 “타앙~ 탕~” 수타면을 연신 치대면서 웃는다. 그 웃음, 썩 보기 좋았다. 짜장면을 포함해 중국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해박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선배가 주방에 들리도록 큰소리로 물었다. “128가닥인가요?” 면을 치다 말고 힐끗 홀 쪽을 돌아본 영감님의 대답은 짧았다. 역시 웃는 낯이다. “256가닥이오.” 사실 짜장면(‘자장면’이라 쓰면 이상하게 맛없게 느껴진다)을 ‘영남의 요리’라 부르기엔 무엇하다. 그러나, 이건 짜장면 이야기가 아니다. 경상북도 청송군에 살았던 ‘마법사’에 관한 전설 혹은, 설화니까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네다섯 해 전이다. 일로 찾은 청송에서 지인을 통해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읍내에 짜장면, 짬뽕, 탕수육 정도만을 만들어내는 단출한 식당이 하나 있는데, 청송군수와 청송경찰서장은 거길 못 간단다. 당연한 질문이 던져졌다. “왜요?” 사연은 이랬다. 한 노부부가 청송에서만 40년 가까이 중국집을 운영했다. 종업원 없이 남편은 주방을 책임지고, 아내는 홀 서빙을 맡았다. 맛있는 집은 금방 입소문이 난다. 동네 사람들만으로도 식당이 미어터졌다. 군수건 경찰서장이건, 아니 대통령이라도 왜 맛있는 짜장면이 먹고 싶지 않겠는가? 짜장면은 누구에게나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는 마법 같은 음식이니까. 군수는 군청의 국과장 몇 대동하고, 경찰서장은 부하직원 두엇 거느리고 짜장면 먹으러 갔겠지. 근데, 이 식당 주인 할머니 성격이 보통 아니다. 바쁠 때는 누구도 말을 붙이기가 어렵단다. 타지에서 온 손님은 “카드 결제가 되니, 안 되니”로 다투기 싫어 아예 받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그런 할머니가 군수나 서장 앞이라고 말을 참을 리 없다. “당신이 오면 직원들이 편하게 밥을 못 먹으니 앞으론 우리 집에 오지 말아요.” 이런 공포담(?)을 듣고 찾아가 식당 테이블에 앉으니 살짝 겁이 났다. 내 돈 주고 점심 먹으면서 타박이라도 들을까봐. 그런데, 기우(杞憂)였다. 식당 메뉴의 전부인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각각 하나씩 주문하고, 고량주 한 병까지 청했다. “지금은 바빠서 탕수육은 안 돼.”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잠시 후 고량주와 함께 갓 볶은 짜장소스를 조그만 그릇에 담아내 왔다. ‘강술 마시지 말고 이걸로 안주 해’라는 뜻이었겠지. 오버하는 친절보단 외려 말없는 그 배려가 더 좋았다. 영감님은 수타 경력이 56년이라고 했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다. 10대 후반에 중국집 주방에 들어가 거기서 잔뼈가 굵고, 거기서 결혼을 하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길렀다. 그리고, 고단하게 병든 몸이 남았다. 그럼에도 동그란 얼굴을 떠나지 않는 저 미소는 뭐지? 커다란 나무 도마에 밀가루 반죽을 종일 치대야 하는 수타는 중노동 중의 중노동이다. 20~30년쯤 하면 짜장면·짬뽕 팔아 버는 돈보다 병원 물리치료비와 한의원 침값이 더 든다고 한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크게 없었을 영감님은 오롯이 자신의 정직한 노동만으로 식구를 부양했을 터. 힘겹지만 고귀한 행위였음을 재론할 필요가 있을까? 희미하고도 선명한 미소는 지난한 56년 노동을 견디게 해준 영감님만의 진통제나 마취제가 아니었을지. 첫 방문 뒤 1년쯤 지났을 때 경북 영주시에 출장갔다가 일부러 길을 돌아 한 번 더 ‘마법 같은 짜장면’을 먹으러 그 식당에 갔다. 영감님은 물론, 나를 기억하는 할머니의 웃음까지 볼 수 있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은 탕수육도 주문해 맛봤고, “사위가 새 냉장고를 사줬다”는 할머니의 자랑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빌었다. ‘청송 256가닥 짜장면의 마법’이 오래 계속되기를. 지난달. 이 글을 쓰기 위해 청송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통해 비보(悲報)를 들어야했다. “그 식당 3년 전에 문 닫았어요.” 다행히 영감님과 할머니 모두 돌아가시진 않았다고 했다. 아마도 종일 수타면을 치고, 몰려드는 손님들 음식을 가져다 줄 기력이 모두 소진했기에 폐업을 선택했겠지. 누구에게나 세월이란 그런 것이므로. 그럼에도 아쉬움이 커 전화를 끊고는 이런 혼잣말을 했다. “256가닥 청송의 마법이 사라졌구나.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겠구나.‘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9-02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노토반도 강타 600여명 숨지고 등록된 문화재만 460여건 피해 현장 투입 전문가•자원 봉사자 불상•고문서 등 200여건 구출 1월 26일은 ‘문화재 방재의 날’ 전국 사찰•성곽 소방훈련 시행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무너지는 돌담 앞에서 7월의 교토, 한여름 특유의 습한 바람이 국제회의장 문틈을 타고 들어왔다. 리쓰메이칸대 국제회의장은 한국과 중국, 일본 3개국의 학자와 관계자들로 가득했다. 제19회 문화유산과 역사 도시 재해 저감 심포지엄이 막을 올린 7월 12일 회의장의 분위기는 무겁고 진지했다. 불과 반년 전 일본 열도를 뒤흔든 노토반도 지진의 상흔이 여전히 생생했기 때문이다. 참석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일본 발표자들에게 향했다. 피해를 겪은 당사자의 목소리가 앞으로 다가올 재난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가장 먼저 연단에 선 이는 요시토미 신타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 교수였다.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문화재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의 기억"이라면서 "그러나 최근 재해의 빈도가 높아지며 이 기억을 잃을 위험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이어폰을 꽂은 통역사들의 속삭임만이 흘러나왔다. 참가자들은 눈을 내리깔고 메모지에 빠르게 펜을 움직였고, 누군가는 화면에 떠오른 피해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무너진 기와, 무더기로 쌓인 석재, 불에 그을린 목조 건물이 빔프로젝터에 비쳤다. 요시토미 교수의 발언은 경고이자 선언이었다. 일본은 수십 년간 방재 연구기관을 세우고 문화재 보호 시스템을 구축해왔지만, 최근 기후변화와 연쇄 재난 앞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 노토반도 지진의 교훈 이날 가장 주목받은 발표자는 하라다 이시카와현 교육위원회 문화재과장이었다. 그는 단상에 올라 목례를 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새해 첫날, 진도 7.6의 강진이 노토반도를 강타했다. 사망자는 600명을 넘었고 전파된 주택만 6000여 동에 달했다”. 그는 스크린에 띄운 슬라이드를 가리키며 “한겨울 단수와 정전 속에서 주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흩어지고 버려지는 문화재를 볼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지진은 문화재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발굴 현장은 무너지고 옛 사찰의 불상은 기둥에 깔려 부서졌다. 이시카와현에 등록된 문화재는 국·현 지정만 881건, 시·정촌 지정까지 합하면 2400건이 넘는데, 무려 460여 건이 피해를 입었다. 돌담이 갈라지고, 목조 건물은 반쯤 주저앉았으며 수백 년 된 고문서는 빗물에 젖어 갈기갈기 찢어졌다. 하라다 과장은 "지진 발생 일주일이 지나도록 피해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주민은 차 안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고 그 와중에 문화재는 폐기 위기에 내몰렸다”라면서 당시의 긴박함을 회상했다. 이때 투입된 것이 ‘문화재 구조대’였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전문가와 자원봉사자 3900여 명이 피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무너진 집터에서 불상과 고문서를 꺼내 임시 보관소로 옮겼다. 구출된 건수만 200여 건. 박물관, 지자체, 연구자들이 함께 나선 전례 없는 협력의 장이었다. 하라다 과장은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직면한 한계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응급조치는 무료로 시행했지만, 본격 수리에 들어가게 되면 소유자의 부담이 크다. 생활 재건이 우선인 상황에서 문화재 복구는 늘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등록 문화재 문제도 이야기했다. 등록 절차가 길어 피해가 나도 지원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고, 앞으로는 지정·등록을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청중석의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화재는 공공재이면서도 사유재산인 경우가 많아 보호와 소유의 경계가 늘 고민거리였다. ◇ 연구소에서 현장까지 일본의 문화재방재 정책은 1950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면 소유자와 지자체는 반드시 방재계획을 수립해야 하며 문화청은 내진 보강과 방화 시설 구축에 재정 지원을 한다. 리쓰메이칸대 역사도시방재연구소는 그 정책을 연구와 현장으로 연결하는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의 충격을 교훈 삼아 2003년 설립한 이 연구소는 교토라는 역사 도시를 기반으로 전통 건축물의 내진 보강 기술, 시민 방재 훈련, ICT 활용 아카이브 구축 등 다양한 실험을 해왔다. 요시토미 교수는 특히 ‘시민 참여’를 강조한다. 매년 1월 26일은 일본의 ‘문화재 방재의 날’. 이날은 전국 사찰과 성곽에서 일제히 소방 훈련이 시행된다. 불을 피운 모의 훈련에서 주민들이 소화기를 들고 뛰어드는 모습은 이제 교토의 흔한 풍경이 됐다. 교토의 전통 가옥 밀집 지역에서는 ‘시민 소화전’도 설치됐다. 2024년 1월, 교토 니넨자카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형 참사로 번지지 않은 것도 이 장비 덕분이었다. 주민이 직접 물을 뿌려 불길을 초기에 잡은 것이다. 일본은 문화재를 디지털로 보존하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3D 스캔과 드론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고, 지진 위험 지역 문화재의 위치를 디지털 대장으로 관리한다. 노토반도 지진 때도 이러한 데이터가 신속한 대응에 큰 힘이 됐다. 교토 심포지엄은 화려한 선언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재난을 겪은 도시가 흘린 눈물과 땀을 나누는 자리였다. 일본은 노토반도 지진을 계기로 문화재 구조대라는 혁신을 세웠고 국가·지자체·연구기관·주민이 함께하는 방재 체계를 다져왔다. 그러나 미등록 문화재의 사각지대와 소유자 부담 문제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이번 심포지엄과 인터뷰는 분명한 메시지를 남겼다. 문화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의 기억이며 미래 세대에 전해야 할 자산이라는 점이다. 일본의 경험은 한국에도 중요한 울림을 준다. 방재 없는 보존은 허상이고, 기억을 지키는 일은 국경을 넘어선 공동의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글·사진/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대구 치과계가 국립치의학연구원 유치를 위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 12월 연구원 설립의 근거가 되는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보건복지부는 현재 타당성 조사와 기본계획 수립 용역을 진행 중이다. 다음 달 ‘국립치의학연구원 설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 연구’ 용역 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며, 정부는 올해 말까지 후보지와 공모 방식을 확정할 계획이다. 전국 치과 산업의 90% 이상이 집적된 대구는 기공·위생·의료기기 전 분야가 맞물린 융합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연구원이 설립되면 중복 투자를 줄이고 신기술 상용화를 촉진하는 효율적 체계를 마련하는 동시에,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국가 균형발전 모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치과계가 한목소리를 내는 배경은 바로 이러한 구조적 당위성에 있다./편집자주 일자리 없어 떠나는 ‘우수 인재’ 연구•개발 기회의 장 넓혀줘야 정보석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장 정보석<사진>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장이 “국립치의학연구원이 대구에 설립돼야 지역의 심각한 인재 유출 문제를 막고 산업과 연구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며 연구원 유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대구 중구 아시아덴탈 사무실에서 만난 정 협회장은 “대구는 이미 임플란트와 치과기기 생산에서 국내 최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연구원 설립의 최적지”라고 말했다. 현재 대구치과의료기기산업협회는 제조업체, 수입업체, 도소매 업체가 함께 참여하는 지역 치과 산업의 대표 조직으로, 산업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정 협회장은 18대 집행부에서 활동한 뒤 올해 19대 회장으로 연임하며 약 3년째 협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사업이사, 부회장 등을 오래 맡아 협회 운영을 가까이서 경험했기에 현안과 과제를 잘 알고 있다”며 “책임감과 무게를 크게 느끼지만, 지역 치과 산업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협회 운영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는 전시회 유치를 꼽았다. 덴티스 등 굵직한 기업 뿐아니라 성장잠재력 큰 中企와도 시너지 세계적 치과산업 전시회 개최 등 국가경쟁력 강화 입지 구축해야 정 회장은 “대구·경북에도 치과 산업 기반이 튼튼하지만, 지역이라 세계적인 치과 산업 전시회 유치가 어렵다”면서 “독일 쾰른 같은 작은 도시가 세계 최대 전시회를 여는 것을 보면, 대구도 치과 산업 중심지로서 충분히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치과의료기기 인허가 제도와 규제 개선도 현안으로 꼽았다. 그는 “고등급 의료기기는 인허가 절차가 까다롭고 비용 부담도 크다”며 “연구원과 협력해 기술 검증과 지원 체계가 마련된다면 기업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 회장은 대구의 치과 산업 현황과 국립연구원 유치의 필요성을 연결 지으며 “대구는 덴티스, 메가젠, 세양, 세신 등 굵직한 기업뿐 아니라 성장 잠재력이 큰 중소업체도 많다. 연구원이 설립되면 이들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면서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며 “무엇보다도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청년 인재들을 붙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 “대구·경북 지역은 경북대·영남대·계명대 등 이공계 학과와 치과 관련 학과가 밀집해 있음에도, 졸업생들이 지역 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수도권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연구원이 설립되면 지역 기업과 연결된 연구·개발 기회가 확대돼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를 수 있고, 외부 우수 인력까지 유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구는 국내 임플란트 생산액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연간 수출 규모도 수천억 원에 달한다”며 “대구가 이미 국가 치과 산업의 중심지라는 점은 통계로 입증된다. 연구원 설립은 지역의 이익을 넘어 국가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정 회장은 “대구가 세계적인 치과 산업 전시회를 주도할 수 있는 도시로 성장하길 바란다”며 “중장기적으로는 창의적인 기술 개발이 절실하다. 연구원이 그 허브가 된다면 대구 치과 산업은 세계 시장에서 더욱 확고한 입지를 가질 것”이라고 재차 필요성을 밝혔다. AI접목 디지털 덴탈 헬스케어 등 미래분야 주도적 참여 길 열릴 것 오미정 대구·경북치과위생사협회장 오미정<사진> 대한치과위생사협회 대구·경북회장이 “국립치의학연구원이 대구로 유치되면 치과위생사와 학생들이 지역에서 전문성과 진로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결정적 기반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오 회장은 현재 두 번째 임기 중반부를 이끌고 있다. 그가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노인·장애인 전문 치과위생사 제도’다. 내년 3월부터 시행되는 통합돌봄 정책에 발맞춰 대구에서는 전국 최초로 수도권 외 지역에서 해당 양성과정을 대구보건대학교에서 개설한 만큼 제도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 오 회장은 “요양기관에서의 실습까지 포함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치과위생사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며 “지역에서도 충분히 수준 높은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 회장은 지역에서 이뤄지는 교육과 연구 기회에 대해서는 불균형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대구·경북에도 치위생학과가 있는 대학이 14곳이나 되지만, 전문 교육과 연구 기회는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면서 “배우고 싶어도 서울로 가야 하고, 교통비가 교육비보다 더 많이 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석·박사 과정, 전문 자격 과정 등 고급 교육 기회를 지역에서 확보하지 못한다면 인재는 계속 수도권으로 유출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지역대 치위생학과 14곳 되지만 전문교육·연구기회 수도권 집중 산학협력 프로젝트 등 참여 기회 커리큘럼 표준화 등 전문성 키워 문제의 해법으로는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를 꼽았다. 오 회장은 “연구원이 설립되면 지역 대학의 커리큘럼을 표준화하고,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이 직접 연구와 실습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면서 “치과위생사뿐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도 커다란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구에는 임플란트 기업과 치과 의료기기 업체가 밀집돼 있다. 연구원이 설립된다면 치과 산업, 대학, 연구 인력이 긴밀히 연결돼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며 “AI와 빅데이터를 접목한 디지털 덴탈 헬스케어 같은 미래 분야에서도 치과위생사가 주도적으로 참여할 길이 열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협회의 단합력 역시 강점으로 내세웠다. 그는 “대구·경북 치위생사협회는 회원과 학생, 교수들이 힘을 합쳐 활동한다. 디덱스(DIDEX) 봉사단만 해도 100명 넘는 학생들이 참여하고, 14개 대학 중 10곳 이상이 협력한다”며 “학생과 현장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갖춰져 있어 치과의사 단체도 자연스럽게 협력하게 된다”고 했다. 특히 연구원 설립이 예방과 돌봄 분야에서 치과위생사의 역할을 확장할 수 있는 발판임을 역설했다. 오 회장은 “노인의 구강 관리가 치매 예방이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연구들은 대부분 치과위생사가 주도해왔다”면서 “치과의사가 임상과 치료에 집중한다면, 치과위생사는 구강보건과 예방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다. 연구원은 이 전문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치과위생사가 단순 보조자가 아니라 국민 구강건강을 지키는 전문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며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는 그 과정을 앞당길 중요한 계기”라고 덧붙였다. 대구·경북, 치과기공 인재의 보고 노하우 전수할 ‘교두보’ 구축 필요 김노국 대구치과기공사협회장 “대구·경북은 치과기공 인재의 보고(寶庫)인 만큼 기공사들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습니다.” 김노국<사진> 대구치과기공사협회장의 목표다. 김 회장은 협회장에 취임 당시 가장 먼저 주력한 것이 임원진 구성의 세대교체라고 했다. 그는 “협회 임원진을 2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고르게 참여하는 구조를 마련했다”며 “세대마다 생각과 취향이 다르듯 협회 운영도 다양한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협회는 봉사와 장학, 체육대회 등 회원 복지 활동을 더 폭넓게 이어갈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회장은 2010년 임플란트 관련 특허를 내고, 나사가 풀리지 않는 보철 구조를 개발했다. 이 기술은 현재 품질 경쟁력을 인정받아 국내 주요 치과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김 회장은 “다양한 경험이 많은 50대 이상 치기공사 수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곳이 대구”라며 “개인적 성과를 넘어 선배와 후배 기공사들의 경험이 더해져야만 치과 산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제가 선배들에게 받은 기술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돌려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50대이상 치기공사 전국 2번째 관련학과 졸업생 年 200명 넘지만 지역 정착 인력은 10명도 채 안돼 교육서 일자리까지 ‘선순환’ 절실 특히, 김 회장은 국립치의학연구원 대구 유치에 대해서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김 회장은 “치의학연구원은 치과의사·기공사·치과산업체·대학이 모두 힘을 합칠 수 있는 구심점이자, 우리 업계의 미래 생존전략”이라며 “대구는 이미 치과 산업 생태계가 집적된 도시이며, 여기에 전국 기공사 면허자 중 1만 명 이상이 대구·경북 출신일 정도로 인적 자원도 풍부하다”고 전했다. 다만, 현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대구·경북 치과기공소에서 젊은 기공사를 고용하고 싶어도 인재들이 다양한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빠져나간다“며 “전국에 치과기공학 전공자는 약 1000명 졸업하는데 대구·경북의 대구보건대·수성대·김천대 등에서 배출된 졸업생은 200명 이상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일하는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현실을 막으려면 지역에 연구원 같은 거점 기관이 꼭 필요하다”면서 “연구원이 들어서면 청년들이 지역에 남아 일하고, 선배들의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전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대구시치과기공사회는 대구 치과기공계의 글로벌 교류에 물꼬를 텄다. 지난 6월 엑스코에서 ‘2025 대구광역시치과기공사회 학술대회 및 치과기자재전(DDTIX 2025)’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치과기공계의 글로벌 교류와 관련 “제2회 국제학술대회를 준비 중인데, 대구시의 지원을 받아 더 큰 규모로 발전시킬 계획”이라며 “연구원 유치와 함께 국제적 위상도 키우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김노국 회장은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공부하고, 다시 대구에서 일하며 살 수 있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치과기공사회가 회원들의 권익을 지키고, 산업과 연구, 교육이 연계되는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테니 후배들이 대구를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글·사진/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
2025-08-31
■소란을 품은 정적의 연못 한여름이 깊숙이 내려앉은 연못이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그러나 고요함 아래, 물풀은 사방으로 뻗고 연잎은 서로의 몸을 밀치며 자리를 넓힌다. 나무는 그늘을 짙게 드리우고, 바람은 유영하듯 잘도 지난다. 아무도 없으니 고요하고, 아무도 없기에 많은 생명은 제 뜻대로 자란다. 고요하다는 건 멈춤이 아니라, 소리 없는 확장이 된다. 연못 둑을 따라 뿌리내린 나무는 제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운 채 기세를 세운다. 한쪽으로 기운 듯하지만 단단하고, 굽은 등줄기엔 시간이 층층이 내려앉아 물기 어린 흙을 힘껏 끌어당긴다. 매미는 고요를 뚫고 터지듯 운다. 서출지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울음을 받아낸다. 숨이 막힐 지경인 한낮의 열기 속에, 연못은 한치 흔들림 없이 가라앉아 있다. 수면은 팽팽한 긴장을 머금었다 풀어지며 하늘을 담는다. 연못 물은 고인 듯 살아 있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은 고요가 오히려 연못을 더 넓게 보이게 한다. 소란한 매미도, 바람의 숨결도 물속에 스며들 뿐, 연못은 가만가만 모든 것을 품는다. 나보다 먼저 바람이 다녀간 흔적이 연잎 위에 남는다. 잎들은 가볍게 흔들리며 그늘과 빛 사이를 나누고, 틈마다 빛은 제 몸을 풀어 번진다. 연못 가장자리에 물풀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수면 아래에 몸을 숨긴 물고기들이 미세한 흔적을 남긴다. 개구리 한 마리가 놀란 듯 움찔하며 물속으로 뛰어든다. 그럴 때마다 연못은 가볍게 숨을 쉰다. 부레옥잠과 연꽃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저들만의 질서를 잘 이루어 사는 듯하다. 신라 소지왕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동남산 자락 완만한 기슭의 서출지 낮은 터에 남산 계곡서 흘러든 물 고여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져 배롱나무•소나무 등이 주변을 감싸고 안쪽에는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 동쪽에 자리잡은 정자 이요당과 함께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 ■글이 나온 연못 서출지 서출지(書出池)다. 경주 남산동, 동남산 자락의 완만한 기슭에 자리 잡은 연못이다. 동서로 누운 자그마한 연못은 주변에 비해 터가 낮아 물이 모이기 좋은 위치다. 남산 계곡에서 흘러든 물이 고이는 곳이니, 예로부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으로 알려졌다. 배롱나무와 소나무, 잡목들이 조밀하게 연못을 감싸고, 아래로는 수로가 이어져 물이 흐르도록 되어 있다. 연못 안쪽에는 붓꽃, 부레옥잠과 연꽃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며, 둑을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동쪽에는 이요당이 있어 연못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낸다. 이 가만가만한 공간은 남산 품 안에서 사계절 내내 다른 표정을 띠며 숨을 쉬는 공간이 된다. 8월 한낮의 햇살이 살갗을 파고든다. 연잎은 땡볕을 받아내며 얇은 그림자를 품는다. 물풀은 제각각의 자리에 번져 있고, 그 사이로 연꽃 한 송이가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수면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물결 위엔 오래된 전설이 한 겹 얹힌 듯 연꽃이 나를 부른다. 서출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담고 태어난 연못이다. ‘書出池(서출지)’, 한자를 풀어 보면 ‘편지가 나온 연못’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 제2, 소지왕조(炤知王條)에는 서출지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월 보름, 소지왕(신라 제21대 왕)이 행차를 나섰다. 남산 자락, 양피촌 들녘을 지나던 왕의 수레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뒤를 따라 쥐 한 마리도 나타났다. 놀랍게도 쥐가 말을 했다. “저 까마귀를 따라가십시오.” 기이한 기운을 느낀 왕은 장수를 보내 까마귀를 쫓게 했다. 까마귀는 남산 남쪽, 못 가로 장수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만 까마귀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장수가 아쉬움에 못 가장자리에 멈춰 선 그때, 물 한가운데서 거칠고 푸른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이 글을 반드시 왕께 전하시오.” 장수에게 봉투를 건네고 노인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장수는 왕에게 봉투를 전했다. 왕은 봉투를 펼쳤다. “이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왕이 무슨 뜻인지 몰라 하자 옆에 있던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백성이옵고, 한 사람은 왕이시옵니다. 부디 열어보소서.” 왕이 봉투를 열자 단 세 글자가 쓰인 편지가 있었다. “射琴匣(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라.” 왕은 대궐로 돌아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 침실엔 작은 거문고 상자가 있었다. 왕이 활을 들어 상자를 향해 시위를 당기자 왕비가 말렸다. ‘뚝’, 활에 맞은 나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났다. 상자 안에 승려가 죽어 있었다. 왕비와 함께 반역을 꾀했던 승려였다. 왕은 죽음을 면했고, 왕비는 곧 처형되었다. 글이 물에서 나왔다 하여 이 연못은 ‘書出池(서출지)’라 불리게 되었다. 정월 대보름날 소지왕을 살려준 까마귀에게 찰밥을 주는 ‘오기일(烏忌日)’이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경주 지역에서도 정월 대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 찰밥을 묻어두는 ‘까마귀 밥주자’라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 불교 공인 이전, 토착신앙과 새로운 사상의 충돌의 암시가 이 연못에 서린 까닭일까. 까마귀와 쥐는 전통 신앙의 화신처럼 등장했고, 풀 옷 입은 노인은 미래를 예언하는 매개자였을 것이다. 노인의 기이함 속에서 생명은 구원되고 왕권은 이어졌다. 이 이야기는 신라사의 균열을 보여주는 듯하다. 연못 가장자리 둑을 천천히 걷는다. 발밑엔 잔돌이 깔려 있고, 풀잎은 바람 따라 낮게 고개를 젖힌다. 한낮의 햇살이 연잎 위로 내려앉고, 수면은 고요하다 못해 멈춘 듯하다. 그 물 위로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든다. 검은 그림자가 연못을 가로지른다. 문득, 풀 옷을 입은 노인이 봉투를 내밀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가 누구였는지, 왜 하필 왕에게 글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연못엔 여전히 노인의 신비스러운 기척이 남아 있는 듯하다. 잔잔한 수면 아래, 전설은 마치 오래된 유물처럼 가라앉아 있다. 배롱나무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물 위로 떨어진다. 그 붉은 조각이 천천히 돌며 퍼져나간다. 까마귀와 쥐는 신이 보낸 전령이었을까. 왕비와 승려의 음모를 막은 글귀는 정말 이 물속에서 떠올랐던 걸까. 산책 끝에 다시 연못을 바라본다. 뜨거운 여름빛 아래, 서출지는 여전히 고요하다. 오래된 이야기처럼 아무도 없는 연못엔 영험한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이적의 선행이 깃든 물 위의 정자 이요당 이요당은 연못 끝자락 물 위에 있다. 물과 나무 사이, 빛과 바람이 스쳐 가는 자리에 마루를 얹고 기와를 이고 앉아 있다. 유연한 지붕, 아름다운 곡선에 얹힌 시간을 가늠해 본다는 건 무의미한 일일 테다. 모든 곡선이 부드럽고, 모든 직선이 오래되어 고풍스럽다. 낮은 마루, 묵은 기둥, 모든 것이 서출지에 반영되어 한껏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더한다. 건물은 물 위에 올려져 있고, 처마는 연못을 향해 열려 있다. 수면 위를 따라 흐르는 바람이 마루를 통과하고, 연잎의 흔들림은 건물 그림자와 맞닿는다. 이요당은 물과 함께 숨 쉬는 살아있는 집이다. 이요당(二樂堂)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임적(任適, 1612~1672)이 지은 정자다. 서출지 연못가에 돌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당초에는 3칸 규모였으나 이후 다섯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ㄱ자 모양을 띠게 되었다. 남산 능선을 등진 정자는 서출지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어 연못을 훤히 내다보는 구조다. 이요당이라는 이름은 ‘요산요수(樂山樂水)’에서 비롯되었다.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긴다는 의미를 지닌 말로, 자연 속에서 벗처럼 지내는 선비의 삶을 담아낸다. 정자는 격식을 갖추되 화려하지 않다. 기둥은 차분히 아래로 향하고, 처마 선은 남쪽으로 부드럽게 그어진다. 마루 아래로는 연못의 기운이 스며들고, 그 기운은 다시 처마로 오른다. 임적은 남산 아래 양피촌에 살던 선비였다. 가뭄이 극심할 때, 땅속 깊은 물줄기를 찾아내어 자신의 마을은 물론, 이웃 마을까지 물이 부족하지 않도록 살폈다. 임적은 평소에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의복과 식량을 나누었다 전한다. 그의 덕망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이요당은 그가 자연을 벗 삼아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던 자리다. 이요당은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서출지의 전설을 내려다보는 자리이자, 삶의 물줄기를 함께 나누던 인물의 정신이 머문 공간이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면, 연못의 수면에 배롱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계절마다 연꽃이 피고 진다. 기와지붕 아래 남긴 선인의 삶은 가만가만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이요당 건너편, 남쪽 언덕에 그의 아우 임극(任極)이 지은 산수당(山水堂)이 자리하고 있다고는 하나 오늘은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두 형제가 나란히 남산 자락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삶은 오늘날까지 연못을 거닐며 보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정자는 시간이 흘러도 기울지 않고, 정자에 깃든 선행과 겸허함은 여전히 바람결에 실려 전해진다. 가만가만 걷기 좋은 연못이다. 서출지와 이요당은 숨겨둔 마음을 꺼내보기에 좋은 자리다. 나무 그림자에 들고, 물풀 사이를 스치고 오는 바람에 젖다 보면, 어느새 잊고 지낸 누군가의 얼굴과 그리움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물풀 옷을 입은 선인이 전하듯, 마음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연서 한 장이 나를 향해 조용히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2025-08-27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볼 수 없는 것을 실제로 본다는 것은 소름 돋는 경이적인 일이다. 노거수를 찾아 나선 지도 25여 년이 지났지만, 좀처럼 보기 힘든 사실의 광경을 목격했다. 한 나무의 두 가지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붙어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지(連理枝)라 하고, 두 나무의 가지가 하나의 가지로 된 것을 연리목(連理木)이라 한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효도, 사랑, 우정의 징표’로 귀하게 여기고 많은 사람이 경외감을 가진다. 이에 대한 전설과 함께 신비롭고 또한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두운 땅 속에서 운명처럼 서로 만나 아무런 보호막 없이 모진 세월 겪으며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 나누는 사이로 하나의 숨결이 된 검고 굵은 뿌리줄기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무심한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들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신비로움 품어 그런데 땅속에 있어 보이지 않는 두 그루 나무의 뿌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하나의 뿌리로 된 연리근(連理根) 것을 발견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한 2003년 봄에는 알 수도 볼 수도 없었던 흙 속에 숨겨져 있었다. 10여m 떨어진 느티나무 두 그루의 굵은 뿌리가 하나로 붙은 연리근이 바깥세상으로 나와 나의 눈앞에 떡하니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연리근을 만져보고 또 살펴보았다. 연리지와 연리목은 가끔 보아 왔지만, 이렇게 굵은 뿌리의 연리근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은 떨렸다. 땅속에 있어야 할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 노출되어 있으니 신기할 수밖에 없다. 뿌리를 덮고 있던 흙이 빗물로 인하여 유실되어 연리근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 신비하고 경이로움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연리근 느티나무 노거수가 살아가는 곳은 경북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산 75번지이다. 일명 못골마을이라 한다. 마을 입구 언덕 위에 도로와 들판을 내려다보면서 살아가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380살, 키 20m, 가슴둘레 4.6m, 앉은 자리 폭이 27m나 되었다. 이웃 나무는 이보다 나이도 키도 가슴둘레 굵기도 작은 느티나무이었다. 1993년 7월 7일 보호수로 지정되어 시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정자와 의자 등 편익 시설을 설치하여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를 찾아와 포개지고, 마침내 한 생명의 숨결을 나누는 은밀한 사이가 된 것이다. 아무도 볼 수없는 흙 속에서 그들은 은밀한 사랑을 나누었을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에 알려져 세월과 비바람을 견디며 서로의 생을 지탱해 주는 조용한 사랑이 아직도 뜨겁게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하고 하얀 뿌리가 아무런 보호막이 없이 모진 세월의 풍파에 발가벗겨졌으니 얼마나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을까.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가까이 자라면서 접촉 부위의 형성층이 유착되어 물과 양분이 오가게 된 상태이다. 동일 수종일 때 유착이 잘 일어나지만, 토양 조건에 따라 다른 수종 사이에서도 드물게 관찰된다고 한다. 생태학적으로는 두 나무의 뿌리 경쟁 대신 상호 연결을 통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적응으로 보인다. 이는 식물사회의 생존을 위한 협력이다. 내가 처음 올 때만 해도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 있었는데, 그동안 비로 인한 흙의 유실로 뿌리가 땅 바깥으로 노출되었다. 10여m 떨어진 두 나무가 힘을 합쳐 뿌리로 경사진 흙의 유실을 붙잡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무들이 미리 알고 생존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 토양의 유실을 막아내기 위해 연리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땅 바깥세상에 드러난 연리근의 괴이한 모습은 하나의 걸작품이고 인연은 고래힘줄 같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뿌리가 어두운 땅속에서 어느 순간 운명처럼 서로를 만났다. 그 만남은 서로의 숨결을 느끼고 마침내 두 뿌리는 하나가 되었다. 마치 세월이 조각한 거대한 조형물 같다. 검고 굵은 뿌리줄기는 마치 오래 잠든 용의 등처럼 굽이치고, 비바람이 깎아낸 굴곡마다 시간의 손길이 새겨져 있다. 거친 살결 위로는 이끼가 푸른 숨을 내쉬고, 틈새마다 어린잎이 고개를 들어 줄기 인양 새 생명의 문장을 써 내려간다. 두 나무의 뿌리는 흙 속에서 이미 오래전 서로의 숨을 섞었을 것이다. 가뭄에도, 장마에도, 그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물줄기를 나누어 마셨고 폭풍의 밤엔 서로의 몸을 버팀목 삼았다. 이제 그들의 뿌리는 누가 먼저였는지 가릴 수 없는 하나의 심장, 한 몸의 맥박이 되어 땅 위로 드러나 있다. 마주 선 두 나무가 하나의 뿌리로 이어진 모습은 연인보다 더 깊은 결속이다. 형제보다 더 질긴 인연을 보여준다. 연리근이라 불리는 이 결속은 힘겨운 세월을 살아내는 나무들의 동맹이자 연대다. 폭풍이 몰아쳐도, 가뭄이 길어져도, 서로의 뿌리에 의지하며 버텨낸 증표이다. 숨은 인연으로 땅 위에서 보이지 않아도, 땅속에서 맺어진 끊을 수 없는 연결로 외부의 시련을 무릅쓰고 이어지는 영원한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양분의 나눔과 상생으로 뿌리를 통해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부부, 형제, 우정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 안에는 다투지 않고, 서로의 생존을 위해 한 몸이 되기를 택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사람의 인연도 이와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억지로 끊으려 하지 않고, 서로의 결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우리 인간 사회에 본보기가 아닐까. 한 뿌리의 민족이 좌우 이념으로 갈라져 두 나라의 정부를 세우고 서로를 적대시 하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계절마다 연리근 느티나무의 모습은 변주를 거듭한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이 뿌리 틈새에서도 솟아나 오래된 나무의 숨결에 젊음을 더한다. 여름이면 푸른 이끼가 뿌리를 감싸고 더위를 식혀준다. 가을에는 황금빛 잎이 쌓여 마치 뿌리가 금빛 옷을 입은 듯하다.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 사이로 흰 눈이 내려와 뿌리 위를 덮으며 오랜 결속을 포근히 감싸준다. 연리근 나무를 보면서 누군가는 형제를, 누군가는 친구를, 누군가는 연인을, 또 누군가는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을 떠올릴 것이다. 바람은 가지를 흔들지만, 그 뿌리의 결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두 나무는 지금도 묵묵히 서서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함께 늙고 함께 사는 일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연리근에 얽힌 전설 연리지와 유사하지만, 땅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라는 점에서 더 은밀하고 깊은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연인의 환생 설화: 신분 차이로 결혼하지 못한 남녀가 죽어 각기 다른 나무로 환생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뿌리가 땅속에서 만나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이 세상에서는 맺어지지 못했지만, 사후 땅속에서라도 평생 함께하는 부부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부부 장수 설화: 부부가 오랜 세월 한집에 살며 해로하다 죽은 뒤 무덤가에 심은 두 그루 나무가 뿌리로 이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집안의 화목과 번영을 상징하는 길조로 여겼다. ▲마을 수호목 설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연리근으로 이어져 마을의 복을 지키고 재난을 막는다고 믿었다. 매년 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가 2026학년도 수시모집을 시작하면서 학생 맞춤형 장학제도와 혁신적인 교육 환경으로 주목받고 있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생이 행복한 대학, 지역과 함께 성장하는 대학’이라는 비전을 바탕으로 다양한 지원과 교육환경을 구축하고 있다. 1인당 평균 398만원 장학금 지급 경찰·공직 등 맞춤형 진로 상담 52억 투입 기숙사·강의실 보수 경주시와 신산업 전문인력 양성 □ 학생 맞춤형 지원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양한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학생 1인당 평균 398만 원에 달하는 장학금이 지급되며, 200여 종의 장학제도를 통해 매년 총 264억 원이 지원된다. 특히 수시 최초합격자에게는 100만 원, 충원 1차 합격자에게는 50만 원의 장학금이 주어지고, 고교 추천 인재 장학을 통해 100만 원이 지원되어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여준다. 또한, 대학일자리플러스센터에서는 학생들에게 맞춤형 진로·취업 상담을 제공하며, 경찰·공직·공기업 진출을 위한 공공 인재양성반을 운영해 실질적인 취업 역량 강화를 돕는다. 통학버스와 KTX·SRT 경주역 셔틀버스 운행으로 학생들의 생활 편의도 배려하고 있다. □ 쾌적한 캠퍼스 환경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학습과 생활환경 개선에도 과감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최근 52억 원을 투입해 기숙사와 강의실, 실습실 등 교육 공간을 전면 리모델링했다. 또한 휴게 쉼터 정비와 도서관 내 카페 및 갤러리를 조성해 학생들이 더욱 쾌적한 캠퍼스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기부를 통해 조성된 상징 조형물과 도서관 미디어월은 대학 구성원의 자긍심을 높이고 활기찬 캠퍼스 문화를 이끌고 있다. □ 지역 혁신 생태계 선도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경북도 RISE 사업의 거점 대학으로서 지역 인재 양성과 산업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K-U시티 SMR 인력 양성’, ‘K-LEARNing 대학 평생직업 교육 체제’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경주시와 함께 ‘경주형 K-IDEA Valley’ 프로젝트를 통해 신산업 전환에 필요한 전문 인력 양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 제조업 성장 지원은 물론, 평생학습 플랫폼 구축과 지역 네트워크 강화로 지역사회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 종합 메디컬 캠퍼스로서의 위상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의대·한의대·간호대를 두루 갖춘 경북 유일의 종합 메디컬 캠퍼스로서 의료 인재 양성의 산실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2025학년도 의대 정원 확대에서 지역인재 전형을 76명으로 늘리고, 경북 지역 학생 32명을 새롭게 선발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지역 의료 인력 부족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동시에, 대학의 건학이념을 구현하는 의미 있는 성과로 평가된다. □ 경쟁력으로 증명된 등록률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의 경쟁력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5학년도 신입생 모집에서 정원 내 1816명 중 1815명이 등록해 99.9%라는 압도적인 등록률을 기록했다. 이는 대학의 교육 역량과 신뢰도를 방증하는 수치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선택받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 2026학년도 수시모집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는 2026학년도 수시모집을 통해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고 있다. 학생 중심의 모듈형 교육과정, 지역과의 상생 협력 모델, 미래형 시그니처 모듈 등 차별화된 교육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관계자는 “우리 대학은 학생이 행복한 환경을 바탕으로, 지역과 함께 성장하며 세계로 뻗어가는 글로컬 인재를 키워내고 있다”며 “2026학년도 수시모집은 학생들이 꿈을 현실로 만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6학년도 수시모집 94% 선발… 전형 방법도 단순화 우리 대학 이렇게 뽑는다 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가 2026학년도 수시모집에서 전체 모집정원의 94.3%인 1747명을 선발한다. 원서 접수는 오는 9월 8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다. 올해 수시모집에서는 여러 가지 변화가 이뤄져 수험생들의 부담을 크게 줄였다. 먼저, 학생부 교과 성적 산출에서 3학년 2학기 성적은 제외됐고, 한의예과와 의예과에서 과학Ⅱ 과목 가산점이 축소됐다. 또한, 한의예과와 간호학과 일부 전형의 수능최저학력기준은 기존보다 1등급 완화됐고, 불교추천 인재 전형에서는 교리문답이 절대평가(P/F)로 변경돼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전형 방법도 단순화됐다. 교과 전형은 대부분 교과 성적 100%로 선발하며, 면접전형은 교과 70%와 면접 30%를 반영한다. 면접 문항은 사전에 공개돼 수험생들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다. 종합전형은 의·한의예과와 간호학과만 단계별 전형을 적용하고, 나머지 학과는 서류 100%로 평가한다. 수능최저학력기준은 의·한의예과와 간호학과에만 적용된다. 또한, 학과 개편도 이루어졌다. 조경·정원 디자인학부는 ‘조경·정원 디자인학과’, 뷰티메디컬학과는 ‘뷰티아트산업학과’, 바이오제약공학과는 ‘바이오·화학융합학부’, 에너지·전기공학과는 ‘원자력·에너지·전기공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새로운 ‘엘리트스포츠 전공’도 신설됐다. 장학 혜택도 주어진다. 정원 내 최초합격자는 100만 원, 충원 1차 합격자는 50만 원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며, 경주·포항·울산 지역 고교 졸업자에게는 추가로 100만 원을 지급한다. 학생 1인당 평균 장학금은 398만 원으로 전국 대학 상위권 수준이다. 강종임 입학처장은 “학생 친화적인 전형 변화와 풍부한 장학 혜택으로 수험생의 부담을 줄였으며, 많은 학생이 WISE 캠퍼스에서 꿈을 실현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입학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성호 기자 hsh@kbmaeil.com
아래 기사는 본지 홍성식 기자가 한국기자협회 인터넷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편집자 주 2000년대 초반 이야기다. 지금은 한국작가회의로 이름을 바꾼 문인단체가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로 불리던 시절. 작가회의 사무실은 서울 지하철 5호선 공덕역 지척에 있었고, 기자 초년병이던 나는 그 사무실을 아버지 집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 당시 작가회의 이사장은 소설가 이문구(2003년 타계). 시인 김정환이 상임이사였다. 그날도 요즘처럼 폭염이 이어지는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문구 이사장과 김정환 상임이사, 시인 이시영, 지금은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는 소설가 전성태 등이 사무실에 모였는데 누군가 “오늘 점심은 시원하게 냉면 어때?”라고 제의했다. 당시 서른한 살 젊었던 기자가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날이다. 업력이 수십 년에 이르는 유명짜한 평양냉면집 을밀대가 마포구 염리동에 있었고, 작가회의에서 도보로 10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초면으로 인사 나눈 평양냉면은 어땠냐고? “감동스러운 맛 아니었냐” 지레 짐작해 묻는 이들이 적지 않겠지만, 천만에.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송아지 목욕시킨 물에 거칠게 툭툭 끊어지는 거무튀튀한 면을 담아낸 맛대가리 없는 국수라고 느꼈으니. 평양냉면과의 첫 만남은 별반 유쾌하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근데 왜였을까? 아주 가끔씩 그 밍밍한 국물과 거친 면발이 떠올랐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들이 떠오르는 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듬해엔 10번쯤 그 냉면집을 갔고, 그 다음해엔 20번쯤 갔으며, 경상북도 포항으로 주거를 옮긴 후 볼일 보러 서울에 갈 때면 가장 먼저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마포역 뒤편 염리동으로 갑시다”란 말을 반복했다. 국회의원이며 전 통일부장관인 이인영(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초대 의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곳도 그 냉면집이다. 수행원 없이 혼자 냉면을 먹으러 온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줄을 서서 입장해 묵묵히 냉면 그릇을 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후 이인영은 세상 어떤 정치인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기자가 거의 유일하게 ‘싫어하지 않는 정치인’이 됐다. 국회의원 정도 되면 특권의식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쨌건. 잡설이 길면 추하다. 냉면 이야기로 돌아가자. 냉면의 역사는 유구하다. 80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치적(治績)을 칭송받는 동시에 수많은 아들·딸과 손자·손녀를 둔 행복했던 조선의 왕 세종은 고기와 더불어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 조선이 기울어가던 무렵. 당시 실권세력인 신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왕으로 ‘픽업된’ 나무꾼 출신의 철종은 보위(寶位)에 오른 후 자신을 호위하는 무인들에게 “더운 여름에 수고들이 많다”며 냉면 한 그릇씩을 하사했다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이다. 내친김에 또 다른 ‘차가운 국수’ 이야기 하나 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영화 ‘친구’를 만든 감독 곽경택이 개봉 직후 한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오래전 기사지만 이런 대목을 읽은 기억이 선명하다. “밀면과 돼지국밥을 먹어야, ‘아, 내가 부산에 왔구나’라는 게 몸으로 느껴집니다” 운운. 이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공감했기에 그랬다. 밀면과 돼지국밥은 곽경택과 동일하게 부산에 태를 묻은 기자도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음식. 사실 평양냉면의 맛에 투항하기 전엔 ‘부산의 냉면’이란 별칭을 지닌 밀면을 매해 여름 10~20그릇씩 먹었다. 밀면은 평양냉면과 달리 면에 메밀을 섞지 않는다. 그래서 면발이 하얗다. ‘화이트 누들’이란 또 다른 별호(別號)가 생긴 이유다. 자, 곧 점심시간이니 정리하고 냉면 먹으러 가자. 밀면도 좋고. 평양냉면은 꾸밈과 자극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해 무미(無味)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맛을 낸다. “에헴” 헛기침으로 폼을 잡는 봉건시대 지주와 닮았다. 그렇다면 밀면은? 시뻘건 양념장과 노오란 달걀지단으로 장식하고, 가능하면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야 제맛이다. 그러니, 차가운 국수 한 그릇조차 오뉴월 호사로 귀하게 여겼던 소작농과 닮지 않았나? 한국에선 여름마다 지주와 소작농의 다툼, 아니 ‘냉면과 밀면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당신은 누구를 응원하려는가?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5-08-26
둘 모두 감칠맛 가득한 시원한 여름 별미인 평양냉면과 밀면. 두 음식은 뭐가 어떻게 다른 걸까? 먼저 평양냉면에 대한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의 설명을 읽어보자.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차가운 국물에 말아먹는 음식이다. 양념을 적게 하여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은 담백미(淡白味)를 즐기는 게 평양 사람들. 이런 풍토에서 형성된 것이 바로 평양냉면이다.” 여기까지가 평양냉면의 탄생 배경이라면 아래 부연은 제조법에 관한 것이다. “예전엔 꿩을 삶은 국물을 이용하였으나 꿩을 구하기 힘들어진 지금은 쇠고기와 사골을 사용한다. 육수와 동치미 국물을 반반 정도로 섞어 소금·묽은장·식초로 간을 맞춘다. 사리는 메밀가루와 녹말을 섞어 익반죽한 후 틀에 넣고 눌러 국수를 뺀 다음 삶아서 만든다. 배와 얇게 자른 동치미무 등을 올려 먹는 게 보통이다.” 자, 이번엔 밀면에 관한 정보를 알아볼 차례. ‘밀면의 기원’에 관해서 3가지 가설이 있다. ‘위키백과’를 인용해 요약한다.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이 배고픔을 달래려 만들어 먹었다는 게 첫 번째 가설이다. 북한 함경도에서 내려온 피난민 모녀가 부산에 식당을 차리면서 생겨난 음식이라는 게 두 번째 가설. 마지막 하나는 진주 밀국수냉면에서 유래되었다는 가설이다. 밀면이 냉면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메밀가루가 아닌 밀가루로 면을 만든다는 것. 영남 사람들이 선호하는 자극적인 맛을 내기 위해 각종 양념이 사용되기에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난다. 이것 역시 슴슴한 평양냉면과 다른 점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태풍, 홍수, 산불 등의 재난은 지자체 단위로 되풀이되지만, ‘재난지역 선포’와 같은 사후 조치에 집중됐다. 사전 예방 차원의 체계적 방재 시스템이 자리 잡지 못한 것이다. 이번 기획은 지자체 실정에 맞는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구축 필요성을 제시하고, 농어촌 곳곳의 소중한 유산을 어떻게 지켜낼지를 탐구한다. 고령화 등으로 재난에 더 취약해진 자연 속 국가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일본의 경험을 토대로 경북은 물론, 전국 차원의 정책 수립에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예정이다. 2016년 경주·2017년 포항 강진 불국사·보경사 등 기와 떨어져 훼손땐 100% 원형 복원 불가능 장마에 부여 고분군 토사 유실 작년 국가유산 69곳 직접 피해 한국형 방재 시스템 구축해야 <글 싣는 순서> 1. 산불 등 재난에 취약한 국내의 문화유산 2. 실제 재난으로 소실된 지역별 문화유산 3. 일본의 문화재 방재 연구기관 경험 4.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 성공 사례 5. 한국형(K)-문화재 방재 정책의 방향성 ◇ 지진이 흔들어 놓은 문화유산의 현장 2016년 9월 12일 경북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5.8의 강진은 한국이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줬다. 문화재청 조사에 따르면, 당시 불국사 등 목조건축 문화재에서 지붕 기와가 탈락하는 등 비구조적 피해가 확인됐다. 이듬해 2017년 11월 발생한 포항 지진(5.4) 때도 보경사와 내연산 사찰 등에서 기와 탈락과 구조 부재 손상 등이 이어졌다. 문화재 피해 건수는 31건에 달했다. 복원 과정에서의 취약성도 여실히 드러났다. 우리나라 국보·보물 문화재 10점 중 7점은 파손되더라도 복원에 반드시 필요한 정밀 실측조사 보고서가 없어 원형 복원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실제로 국보 24호 경주 석굴암과 보물 1744호 불국사 대웅전은 지진이나 화재로 훼손될 경우 보고서 부재로 인해 100% 원형 복원이 불가능하다. 문화재청 자료 결과, 목조건축 국보·보물 180점 가운데 9점은 ‘정밀실측조사보고서’가 없다. 여기에는 불국사 대웅전 외에도 대구 파계사 원통전, 제주 향교 대성전 등이 포함된다. 석조문화재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총 571점 가운데 70% 이상이 자료조차 없다. 경주 석굴암을 비롯해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충주 고구려비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13년 문화재청 의뢰로 한국지진공학회가 실시한 지진재해 안전성 평가에서도 전국 석조문화재 152점 가운데 30점이 ‘경계’ 등급을 받아 내진 보강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양호’는 23점, ‘보통’은 99점에 그쳤다. 이 평가는 지반 조건, 주변 환경, 구조 및 부재 구성, 보존 상태 등을 지표로 삼아 가중치를 적용해 산출한 결과다. 문화재청은 경주·포항 지진 이후 뒤늦게 ‘문화재 내진 보강 종합대책’을 마련해 정밀 안전진단과 보강 공사를 확대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 산불, 불길 속에 사라져간 역사 지난 3월 경북과 강원, 경남을 휩쓴 대형 산불은 한국 문화유산 보존사에서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됐다. 불길은 의성 고운사와 안동, 청송, 영양, 정선, 울산, 하동까지 이어지며 보물 2건을 포함한 문화재 30건을 집어삼켰다. 국가지정문화재 11건, 시·도지정문화재 19건이 피해를 입었다. 의성 고운사의 연수전과 가운루(보물)는 불길에 휩싸여 흔적만 남았다. 수백 년간 불교문화를 품어온 전각 두 채는 이번 산불로 완전히 사라졌다. 관덕동 석조보살좌상,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등 불상 유물도 그을음 피해를 입었다. 안동에서는 천연기념물인 구리측백나무숲 0.1㏊가 불에 탔고 만휴정 원림, 백운정, 개호송 숲 등이 잇달아 훼손됐다. 청송 역시 피해가 컸다. 기곡재사, 병보재사 등 수많은 고택과 재사가 불길에 휩싸여 사라졌다. 영양의 천연기념물 답곡리 만지송은 가지 일부가 훼손됐으며 울산 울주군의 목도 상록수림은 0.1㏊ 규모의 피해를 입었다. 강원 정선의 명승 백운산 칠족령 일대는 0.5㏊가 소실돼 경관이 크게 손상됐다. 하동에서는 고려 장군 강민첨을 기리는 두방재의 부속 건물 두 채가 전소됐고 수령 900년을 자랑하던 두양리 은행나무도 일부가 불에 탔다. 사실 산불은 한국 문화유산의 오랜 적이다. 2005년 강원 양양 산불로 사적 제495호 낙산사가 전소됐고 2008년에는 서울 숭례문(국보 제1호)이 방화로 무너져 내렸다. 2010년 부산 범어사에서는 보물 제1461호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되거나 훼손됐다. 한 승려는 “건물은 다시 지을 수 있어도, 그 안에 깃든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 폭우가 삼킨 성곽과 고분 지난해 장마철 쏟아진 기록적 폭우는 전국의 문화유산을 휩쓸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산불이 화마라면, 홍수는 또 다른 파괴자였다. 국민의힘 김승수 의원이 문화재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23년 장마철 국가 유산 피해·조치현황’ 자료에 따르면 폭우로 인해 69곳의 국가 유산이 직접 피해를 입었고 9곳의 주변 지가 파손돼 총 78곳에서 풍수해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체적인 피해 사례도 속속 보고됐다.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국보)에서는 막새기와 두 장이 떨어져 나갔고, 강원 철원 한계산성(사적)의 천제단 석축 일부가 무너졌다. 충남 공주 공산성(사적, 백제역사유적지구)은 만하루 누각이 침수되고 성벽 일부가 붕괴됐으며 부여 왕릉원 고분군(사적)에서는 봉분 사면이 일부 무너져 토사가 유실됐다. 또 전남 순천 낙안읍성에서는 담장이 무너지고 내아·동헌의 기와가 떨어졌으며 성벽과 기둥까지 손상된 것으로 확인됐다. ◇ 일본, 고베 대지진 계기 문화재 방재 체계 강화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은 일본의 문화재 방재 정책에도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당시 대규모 피해를 계기로 정부는 지진 대응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고 건축물 내진 성능 강화를 위한 제도적 보완에 나섰다. 내진 보강 사업은 문화재를 포함한 주요 건축물까지 확대됐다. 특히 일본은 매년 1월 26일을 ‘문화재 방화의 날’로 지정해 왔다. 이는 1949년 화재로 소실된 호류지 금당(사찰의 중심 전각)을 교훈 삼아 1955년부터 시작된 제도로 문화청 주관 아래 지방자치단체·소방·주민이 함께하는 합동 훈련과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진행된다. 화재를 비롯한 재난으로부터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예방 중심의 체계가 자리 잡은 것이다. ◇ 한국형(K)-문화유산 방재 시스템의 과제 한국 역시 더 이상 복구 중심의 대응에 머물 수 없다. 앞으로는 △문화재별 위험도 평가와 맞춤형 관리계획 수립 △3D 스캔을 활용한 디지털 아카이빙 확대 △지진·산불·홍수에 대응하는 통합 매뉴얼 마련 △주민 참여형 방재단 운영과 정부 차원의 예산 지원이 필수적이다. 지진은 기와를 흔들었고, 산불은 사찰을 태웠으며, 폭우는 성곽과 고분을 무너뜨렸다. 자연재해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가차 없이 집어삼키고 있다. 복구만으로는 부족하다. 예방과 대응, 기록과 교육을 결합한 한국형 문화유산 방재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문화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정체성과 기억, 그리고 미래 세대와 이어지는 다리를 지켜내는 일이다. /단정민기자 sweetjmini@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중장년층 여가 활동의 대세로 자리 잡은 파크골프가 이제는 문경을 대표하는 도시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 시기 해외여행의 길이 막히면서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일반 골프는 MZ세대의 발길이 줄며 다소 주춤해졌다. 그러나 저렴한 이용료와 부담 없는 접근성을 갖춘 파크골프는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새로운 여가 문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문경은 전국 동호인들의 발길을 모으는 ‘파크골프의 성지’로 부각되고 있다. 8월의 무더위 속에서도 문경의 파크골프장은 연일 북적이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동호인들이 흥덕동 영강변 코스를 가득 메우며 ‘문경 파크골프 열풍’을 실감케 한다. 2023년 대회때 동호인 이목 집중 17개 시도 2500명 참여 ‘대성황’ 명품 코스 소문 ‘꿈의 구장’ 데뷔 영강변 45홀 경기장 공식 인증 숙박·식당 매출↑지역 경제 효자 ◇전국 최고 대회, 문경이 만들다 문경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23년 열린 제2회 문경새재배 전국 파크골프대회였다. 이 대회는 총상금 규모가 크고, 무엇보다 우승자에게 1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지면서 전국 동호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나치게 큰 상금이라는 일부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국 17개 시·도에서 2500여 명이 몰려드는 성과로 이어졌다. 대회를 앞두고 관내 숙박시설 예약이 꽉 차고, 시내 식당가가 활기를 띠는 등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이 됐다. 영강을 끼고 자리 잡은 문경파크골프장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문경 동호인들이 직접 관리해온 코스 품질이 호평을 받았다. 잔디 관리와 코스 정비에 쏟은 정성이 외지 동호인들의 발길을 붙잡았고, “한 번쯤 문경에서 라운딩을 해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이후 전국에 수많은 파크골프장이 생겼지만, 문경새재배 대회는 여전히 ‘꿈의 무대’로 불리고 있다. 대회 시기 문경찻사발축제와 문경새재 탐방 등 관광자원과 결합된 효과도 크다. ◇잘 갖춰진 인프라, 경쟁력의 원천 문경시 흥덕동 영강변에 자리한 문경파크골프장은 45홀 규모의 정규 경기장이다. 2023년 대한파크골프협회의 공인 인증을 받았으며,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시설을 갖췄다. 지난해에는 27홀 구간에 7억 원을 들여 야간 조명 시설을 설치, 여름철에도 시원한 밤 라운딩이 가능해졌다. LED 투광등 67개와 조명타워 12개가 설치되어 동호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경시는 읍·면 단위까지 파크골프장을 확대하고 있다. 농암면 대정숲(9홀), 동로면 황장산(9홀), 가은읍 청솔공원(9홀), 흥덕동 영강체육공원 내 온누리 파크골프장(9홀) 등이 잇달아 문을 열었다. 특히 대정숲과 청솔공원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솔향 그윽한 그늘에서 운동을 즐길 수 있다. 현재 산양 금천, 당포1리, 반곡, 영순 등에도 새 파크골프장이 조성 중이다. 한 주민은 “예전에는 파크골프를 즐기려면 멀리 나가야 했지만, 이제 집 근처에서 손쉽게 운동할 수 있어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 이웃들과의 소통도 많아졌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시민 열정과 친절, 인기의 비결 문경시민들의 파크골프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현재 문경 지역 동호인만 1500명을 넘어섰으며, 읍·면마다 동호회가 만들어지거나 신규 회원 모집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대정숲, 청솔 파크골프장 개장 시 각각 100명 넘는 회원들이 가입할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인구가 적은 동로면에서도 동호인 증가로 골프장 증설이 추진되고 있다. 문경은 문경새재와 백두대간을 비롯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약돌돼지·약돌한우·오미자 같은 특산물까지 더해져, 파크골프 대회와 관광을 동시에 즐기기에 최적의 도시로 꼽힌다. 대회 참가자들은 경기를 마친 뒤 관광과 먹거리를 함께 즐기며 큰 만족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문경시민들의 친절이 도시 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인상이 오히려 관광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문경시는 몇 년 전부터 ‘친절 운동’을 펼쳐왔다. 식당, 교통, 서비스업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동참해 방문객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보여주고 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의 가장 큰 자산은 친절”이라며 “관광객과 파크골프 동호인들이 경기의 즐거움뿐 아니라 문경시민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문경을 찾은 전국 동호인들은 “문경은 코스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의 친절이 최고의 매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 지역경제·도시 브랜드 상승효과 문경 파크골프장은 단순한 운동 공간을 넘어 지역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대회나 단체 방문이 이어지면 숙박업소, 식당, 상가의 매출이 함께 늘어난다. 이와 동시에 도시 이미지도 달라진다. ‘문경은 관광 도시’라는 인식에서 ‘문경은 스포츠와 여가의 도시’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문경은 파크골프라는 생활 스포츠를 매개로 도시의 미래 전략을 만들어가고 있다. 중장년층의 건강을 지키는 동시에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지역경제까지 활성화시키는 ‘세 마리 토끼 전략’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파크골프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문경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 스포츠와 관광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주민은 “운동을 하면서 건강도 챙기고, 대회가 열리면 외지인들과 교류할 수 있어 활력이 생긴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문경시 관계자도 “파크골프가 이제는 지역 대표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도 읍·면 단위까지 고르게 시설을 확충해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 파크골프 파크골프는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정에서 고령자도 즐길 수 있는 생활체육으로 고안됐다. 1984년에는 일본파크골프협회가 설립되고, 경기 규칙과 장비 기준을 세워 일본 전역으로 빠르게 퍼지며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1999년 대한파크골프협회가 창립됐고, 2000년대 전국 지자체가 잇따라 파크골프장을 조성하고 있으며, 현재 전국 1천여 개 코스, 동호인 50만 명 이상으로 시니어 대표 생활체육으로 성장했으며, 중국·대만·미국·유럽 등으로 확산, 국제대회와 세계연맹 출범 논의가 활발하다. /고성환기자 hihero2025@kbmaeil.com
143개소 굴뚝원격감시체계(TMS) 운영 오염물질 배출 농도·배출량 실시간 관리 인근 지역민 영향 등 주의 깊게 모니터링 ‘러닝플랫폼’으로 제철소 전체 공정 학습 환경 리스크 선제적 파악 위해 역량 강화 폐기물 등 다양한 환경분야 자격증 도전 적재적소 인재 배치 이후 교육 병행 지원 가족친화적 복지 제도로 일과 가정 균형 저탄소 프로세스 전환 성공적 추진 확신 △ 자기소개를 해달라. 포스코 환경자원그룹 환경관리섹션에서 근무 중인 최광식 사원이다. 2020년 6월에 포스코에 입사 한 현재 5년차 사원으로 제철소 환경 관리 중 대기 분야 업무를 맡고 있다. 우리 그룹은 철강 생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 영향 문제를 최소화하고, 관련 환경법 규제에 대해 조업부서와 관청, 지역민들과 소통 및 대응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제철소 구현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는 부서이다. 그중 나는 대기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데, 우리 제철소에서는 관련 법에 따라 굴뚝에 측정기기를 설치하여 오염물질 배출 농도, 배출량 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게 되어 있다. 이를 TMS(Tele-Monitoring System : 굴뚝원격감시체계)라 부르고, 포항제철소는 현재 143개소의 TMS 측정기기를 운영 중이며, 환경법으로 정한 기준 농도 이내로 배출되는지가 확인된다. 이때 나는 이 TMS가 신뢰할 수 있는 측정값인지 분석하고, 현장 및 환경청과 소통하여 기준치를 초과하지 않도록 운영·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포항제철소는 주거지와 인접해 있기에 환경 관련 민원이 접수되면 이에 대응하고, 사내에 설치된 미세먼지, 악취, 소음 측정기기의 데이터 확인을 통해 인근 지역민들에게 영향은 없는지 등을 늘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있다. 특히 포스코는 지금까지 대규모 환경투자를 진행하는 등 오염물질 배출 저감을 위해 노력 중인 만큼, 환경 관련 부서에 있는 나도 관리에 적극 힘을 쓰고 있다. △ 현재 소속된 팀을 소개해달라. 환경관리섹션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나누며 함께 일하고 있다. 입사 전에는 제철소의 크고 위험한 설비들로 인해 근무 분위기가 다소 경직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팀 분위기를 직접 경험하며 놀라움을 느꼈다. 또 얼마 전 3분기 팀파워 활동으로 테마파크에 가서 다 함께 놀이기구를 타고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자고 의견을 나눴었다. 평소에는 늘 따뜻하고 재밌는 우리 팀원들이지만, 업무를 할 때는 냉철한 시각으로 서로의 일을 내 일처럼 고민해주고,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라 우리 팀이 자랑스럽다. △ 포스코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어렸을 때부터 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집 근처 공원과 하천에서 시간을 보내며 환경의 소중함을 느꼈고, 이러한 경험이 환경공학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학부 때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기업들이 환경을 고려하는 과정과, 환경 문제를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 포스코가 대기오염 저감 설비, 수질 개선, 부산물 자원화 등 다양한 환경 분야에 투자하는 사례를 접하며, 환경 보호를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실천한다고 느꼈다. 이를 통해 포스코에서의 환경 분야 실무 경험을 쌓아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사회적 책임 실현에 함께 기여하고 싶다고 생각해 입사하였다. △ 입사 이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 내가 입사하기 2개월 전인 2020년 4월 3일부터 ‘대기관리권역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은 대기오염원을 체계적이고 광역적으로 관리해 지역주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쾌적한 생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오염물질 농도만 규제했지만, 대기관리권역법 시행 이후에는 농도뿐만 아니라 사업장의 배출량까지 함께 규제하게 되었다. 해당 법에 따라 나의 업무에도 변화가 생겼다. 입사 당시 포항제철소는 기존 32개소 외에 2배가 넘는 78개소 굴뚝에 굴뚝자동측정기기를 새로 설치 신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신규 투자 시설의 위치와 공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환경청에 신규 측정기 설치 신고를 진행하기 위해 이해관계자와 소통하고 현장을 직접 뛰어다녔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특히 2020년 이후부터 측정기기 설치 의무로 인해 배출량이 실시간으로 산정되고 있는데, 할당량 준수를 위해 회사 사람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어 함께 뿌듯해지곤 한다. 당시에는 신고 시 필요한 방대한 양의 서류와 측정기기 정합성 검증 작업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장 담당자들과 함께 고민하고, 시공사, 환경공단 및 경험 많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기한 내에 업무를 완료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이 협업 능력을 기르고 환경 업무를 진행하는 데 큰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큰 프로젝트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평소 어떤 노력들을 하는지? 업무 경험이 쌓일수록 환경 관련 지식뿐만 아니라 제철소의 전체 공정을 잘 알아야만 환경 리스크를 발생 전에 찾아낼 수 있다고 느꼈다. 포스코에는 담당 직무 외에도 어학, 제철소 상세 공정 등 다양한 분야를 온라인으로 학습할 수 있는 ‘러닝플랫폼’이라는 사내 교육 프로그램이 있다. 나는 이를 통해 직무 역량을 키우고자 제철 공정에 대한 온라인 교육을 수강하며, 해당 공정이 환경 업무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강한 강의를 바탕으로, 관할 환경청이나 관계 기관에서 공정과 관련된 질문을 받을 때, 환경과 접목하여 답변할 수 있었다. 현재는 환경과 관련된 자격증으로 대기, 수질, 위험물을 취득한 상황인데, 앞으로는 통합적인 환경관리 업무를 위해 폐기물 처리, 소음·진동, 온실가스 등 다양한 환경 분야의 자격증에도 도전해보고자 한다. △ 포항제철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순간은? 우리 회사에서 환경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큰 자부심을 느낀다. 특히 우리 회사는 안전·환경·보건 부서에 각각 적합한 인재를 배치하고, 배치 이후에도 현장 경험과 다양한 교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실제 공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 리스크를 사전에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이 매우 만족스럽다. 흔히 대기업 내 환경 담당자는 안전이나 보건 등 여러 업무를 동시에 맡아야 해 환경 분야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포스코에서는 환경을 중심으로 대기, 수질, 자원재활용 등 세부 분야로 전문성을 확장할 수 있어 매우 좋다.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 선후배님들 덕분에, 업무 중 궁금하거나 어려운 점이 생기면 실질적인 조언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이처럼 체계적인 지원과 풍부한 학습 환경 속에서, 환경 전문가로서 한 단계씩 성장해 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고, 포항제철소에서 근무하는 것에 대해 더욱 큰 자부심을 느낀다. △ 회사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평소에는 축구 경기를 보는 것도 좋아해서, 아내와 함께 스틸야드에서 열리는 홈 경기를 무료로 관람하며 소중한 추억을 쌓고 있다. 축구 직관을 해야 응원할 맛이 나는데, 항상 열띤 경기장 분위기를 즐기며 경기를 구경할 수 있어 행복하다. 최근에는 결혼을 하면서 회사에서 결혼축하금과 신혼여행 지원금을 받아 더욱 뜻깊고 행복한 신혼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앞으로 출산 장려금이나 육아기 단축근무 등 가족친화제도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일과 가정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싶다. 이처럼 회사의 다양한 복지제도 덕분에 일과 가정 모두에서 만족감을 느끼며, 회사에 대한 애정과 소속감도 더욱 깊어지고 있다. △ 국내 철강업계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로서, 앞으로 어떤 변화나 발전을 기대하고 있는지? 최근 글로벌 수요 둔화, 중국산 저가 공세, 탄소중립, 관세 이슈 등으로 철강업계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환경 업무를 하면서 만난 이해관계자들로부터 포스코의 시황에 대한 우려 섞인 질문을 받을 때마다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극복할 것이라 믿고 있다. 국가기간산업으로 성장해 온 포스코가 정부, 지역사회, 철강업계와 협력해 저탄소 프로세스 전환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것이라 확신한다. 나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패러다임에 맞춰 성장하고 싶다. 포항제철소가 지역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제철소로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변화하는 새로운 공정과 발생할 수 있는 환경 이슈를 사전에 파악하며, 현장, 지자체, 지역 주민들과 소통해 가교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인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선후배님들과 협력해 이 전문성을 현장의 환경 진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환경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5-08-24
“한국의 전통 문화 예술과 현대의 작품이 공존하는 한국실에서 한국 문화의 자존심을 느낀다.” 202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한국실을 특사 방문한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윤광조 작품 ‘혼돈’ 앞에서 남긴 감상평이다. 동행한 BTS멤버 RM은 “멋지죠? 좋아하는 게 닮은 거 같아요,”라고 하는 영상이 국내외에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분청사기(粉靑沙器)의 대가’ ‘세계 도예의 거장’ 윤광조. 그는 자유분방한 감성을 표현한 조선의 분청사기를 오늘날 K-문화, 한국예술의 글로벌리즘으로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다. 9월 3일부터 서울 코엑스에서 열리는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에 국내 정상의 화랑 가나아트 초대전에 참여하기 위해 출품작을 포장하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최순우·장욱진 화백 지도로 ‘분청’ 입문 觀·律·心經 등 주제 10년마다 연작 시리즈 참선 후에 물레 버리고 圓→角·面 변용 불심·자연·우주 관통하는 예술 세계 전념 美 필라델피아·시애틀·버밍햄갤러리 등 세계 최고 갤러리·유명공간에 작품 전시 9월 국내 정상 화랑 가나아트서 초대전 □국제무대서 더 잘 알려진 도예가 윤광조 회갈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로 표면을 마무리하는 분청사기는 청자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우리나라 고유의 도자 양식이다. 15세기 도자기를 대표하는 분청사기는 상감, 인화, 박지(양각), 조화(음각), 덤벙, 귀얄문양 등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일반 서민들은 물론 왕실에서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그 영광은 뒤이어 등장한 백자에 밀려 한낱 사금파리로 지층 속에 묻히고 말았다. 500년 세월이 흐르도록 박물관 수장고 한쪽 구석에서 잠자던 분청사기를 뉴욕 한복판에 내놓아 오늘날 한국 도자사를 새로 쓰게 한 아티스트 윤광조. 그가 1994년부터 둥지를 틀고 있는 경주 안강 ‘바람골’은 전세계 도예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윤광조의 성취는 세계 유수 갤러리의 초대전과 국내외 유명 공간에 포진해 있는 작품들이 증명해준다. 그는 1982, 83년 한미, 한불·한독 수교 100주년 기념 ‘한국현대도예전’에 참가 하면서 세계적인 화랑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2002년 프랑스 가나-보부르화랑으로부터 첫 초대를 받는다. 이듬해에는 동양 예술가로는 처음으로 세계 최상급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기획전을 갖는 한편, 독보적인 도예 전문 화랑인 영국 베쏭갤러리, 미국의 각 대학 갤러리 등에서 잇따라 기획전을 열어 세계 유명 예술가 반열에 이름을 올린다. 해외 초대전에서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그의 ‘심경’(心經)을 8만9500달러(한화 약 1억5백만 원)에 소장한 데 이어, 빌 게이츠 어머니가 운영하는 시애틀미술관도 구입에 나서 윤광조는 ‘흙을 보석으로 빚는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한다. 이를 시작으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아트, 브리티시 뮤지엄, 로열 뮤지엄, 매리어몬트, 스미소니언 내셔널 뮤지엄 등 정상급 갤러리들이 그의 작품을 앞다투어 전시하게 된다. □“도자기는 꼭 둥글어야 하나” 물레 탈피 윤광조에게 분청사기는 운명이었다. 작품에서 보이는 큰 두 흐름, ‘자유’와 ‘자연’이 그의 이력과 겹치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46년 함북 함흥에서 완고한 집안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속박’에 못 견뎌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출했다. 자유를 찾아 방황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간 형의 권유로 홍익대학교 공예과에 입학해서 도자기를 전공하게 된다. 윤광조는 대학 2학년 때 분청사기 도록을 보고 첫눈에 반한 후, 대학 4학년 때 동아공예대전(동아일보사 주관)에 ‘분청 문방구 세트’를 출품하여 대상을 거머쥔다. 수상을 계기로 ‘전통의 현대화’에 고심한 결과, 이미 2002년 호암갤러리(서울) ‘분청사기 명품전Ⅱ:한국미의 원형을 찾아서’ 기획전에서, 현대 분청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는다. 당시 호암갤러리는 별도 공간을 마련하여 공식적으로 ‘대가’라는 호칭을 붙여주면서 명실상부 우리나라 최고 도자 아티스트임을 알린다. 2004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고, 2008년에는 경암학술상 예술부문에서 수상하기에 이른다. 명성에 걸맞게 과천 현대미술관과 서울공예박물관이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한편, 리움미술관(구 호암미술관)도 작품을 다수 소장하여 무게감을 더하고 있다. 윤광조의 작품은 불교 색채가 강하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무심’(無心)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다. 그에게 불교는 단순히 작품에 새기는 행위를 넘어 예술의 화두다. “1985년 작업이 꽉 막혀버리더라고요. 방황하다가 지리산 정각사에서 15일 간 4만 배 절을 하고 나니까 손에 꽉 잡히는 게 있어요. ‘물레를 안 돌리면 어떤가, 꼭 도자기는 둥글어야 하나?’ 화가들이 구상, 추상을 넘나들듯 4만 배 끝에 물레를 버렸어요. 태토를 쌓아 올려서 각(角)을 세우고, 두드려 붙여 면(面)을 만들면서 과감하게 원(圓)의 굴레에서 벗어난 거죠.” □전통-자연 현대-자유 세계적 보편성 획득 그의 작품이 세계성을 획득하기까지는 불심(佛心)에 더해 또 하나 비결이 있다.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보면 도공들이 표면을 장식하고자 밑그림을 그린 흔적은 없다. 옛 도공과 달리, 윤광조는 내적 심상(心象)을 밖으로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케치한다. 윤광조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전통은 눈에 보이는 어떤 양식을 말하기보다, 오랜 세월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양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적 공감대”라고. 그런 만큼 그의 예술표현은 ‘공감대’의 찰나를 포착하여 형상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이처럼 확고한 예술철학이 저류(底流)로 흐르기 때문에 그의 분청사기가 세계인의 심성에 자연스레 스밀 수 있었던 것이다. 윤광조가 나름 예술적 토대를 세우기까지는 큰 두 스승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그를 이끈 두 스승은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과 장욱진 화백. 윤광조는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최순우 관장의 제자를 자청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최순우 전 관장은 윤광조가 30대에 신세계미술관 초대전을 열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주는가 하면, 첫 공방을 지었을 때 ‘급월당’(汲月堂)이란 호를 내려주기도 한다. 장욱진 화백은 직접 윤광조의 전시장을 찾아 연적 등 문방구를 구입하면서 인연을 맺는다. 사제의 연을 맺은 두 사람은 현대화랑에서 ‘장욱진-윤광조 도화합작전’을 열어 30분 만에 매진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한평생 예술의 길을 이끌어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두 스승에게서 전통과 우리 것, 그리고 예술적 감성을 내림 받은 윤광조의 조형 언어는 거의 10년마다 독특한 연작(連作)과 시리즈로 나타난다. 1970년대 입문기에는 ‘지월’(池月) ‘조화’ ‘산중생활’ 같은 자연 언어가 강조되고, 80년대 와서는 ‘관’(觀) ‘율’(律) ‘정’(定)처럼 관념, 추상에 몰입한다. 90년대 들어오면 기존의 관념 세계에 더해 ‘심경’(心經) ‘월인천’ 같은 경전 작품에도 몰두한다. □“하늘의 별에도 가닿을 듯한 기분” 극찬 조선 전기의 분청이 거칠지만 소박하고, 자유분방한 장식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윤광조는 이 기법을 단순 복원에 그치지 않고 현대인의 미감(美感)에 맞게 변형 발전시켰다. 경륜을 쌓아가면서, 그는 전통 도예의 정체성 위에, 세계 무대에도 경쟁력 있는 ‘글로벌 도자 언어’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삶에 대한 회의로 큰 홍역을 치렀던 2000년대 들어와 그는 ‘Chaos’(혼돈) ‘New’ ‘산중일기’ 시리즈, ‘산동’(山動) 같은 연작들을 쏟아내게 된다. 특히 ‘산동’ 시리즈의 경우, 어느 날 그가 작업실에 앉았는데, 산이 움직여 성큼 한발 앞으로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그와 같은 살아있는 감각을 광폭의 스펙트럼으로 섬세하게 구현해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윤광조 분청사기가 서양인들도 공감하는 ‘자유의 언어’와 ‘자연의 형태’를 획득하기까지는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에게서 힘입은 바 크다. 윤광조는 2003년 미국 시애틀 미술관 ‘마운틴 드림’ 초대전 때, 3개월간 매일 아침 브랑쿠시 전용관에 들러 30분 정도 명상하듯 작품 감상을 했다. 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를 보고 눈물을 흘리자 미술관 경비원이 다가와 “I understend you(이해할 수 있어)”라면서 그의 어깨를 토닥거려준 감동은 잊지 못한다.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버트 워서맨(Burt Wasseman)은 “인간의 기질 안에는 하늘에 걸린 별에 가 닿고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윤광조의 예술은 하늘의 별에도 가닿을 수 있을 듯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윤광조, 그는 오늘도 경주 바람골에서 짚 뭉치로 앞산을 그리고, 꼬챙이로 반야심경을 새긴다. 그러면서 평론가 필립 루이스(Philip Lewis)의 표현대로 천진한 웃음을 머금고 세계를 향해 권한다. “분청 한잔 하시죠.”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
2025-08-21
■ ‘신라로 돌아왔다’는 그들의 착각 일제는 유독 신라 문화유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석굴암, 불국사, 금관총 등은 집착의 중심에 있었다. 그들에게 신라의 유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정복의 증거였고, 제국의 조선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과시할 수단이었다. 신라를 조선과 분리하여 특별한 문명으로 포장했다. 조선은 무능한 나라였고, 신라는 자신들의 옛 속국이라 믿으며 착각에 빠져 있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신화가 바로 그들이 내세운 허상의 출발이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하고 고구려와 백제까지 복속시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일본 고대사 속 가장 중요한 정복 신화였다. 메이지 정부는 신공황후 삼한정벌설을 국가 역사로 편입했고, 교과서와 지폐, 그림과 엽서에 반복해 새겼다. 신공황후의 후예라 자부하던 일본은 조선을 ‘잃었던 고토(古土)’라 칭하며 환호했다. 그들의 신화는 허구였다. ‘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에도 신공황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임나일본부설과 마찬가지로 날조된 정복담이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이 신화를 철석같이 믿었다. 역사를 도구 삼아 침략을 합리화하며, 식민교육에 깊이 새겨 넣었다. 그들에게 경주는 허위의 신화를 구현할 무대였다. 대한제국 말, 통일신라의 왕경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초라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폐허를 보며 감격했다.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경주를 보고 외쳤다. “경주여, 경주여! 나는 우리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신라를 일본의 옛 땅으로 착각했고, 제국의 기원으로 떠받들었다. 신라는 그들에게 과거의 속국이었고, 조선 병합은 과거의 회복이라 믿었다. 환상은 그렇게 확신으로, 확신은 침략으로 이어졌다. 허구의 신화 믿고 역사 왜곡한 일제 신라를 식민 지배, 정당화 수단으로 불국사·석굴암 등 문화유산에 집착 1915년 전후 경주의 새 명소로 각광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 제거 작업 전통 목조 전각 건립 등 석굴암 복원 ■석굴암, 경성으로 이송하라 석굴암은 숨겨진 것이 아니었다. 불국사 인근 사람들은 석굴암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석굴은 인근 사람들에게 이미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마치 자신들이 찾아낸 것처럼 ‘발견’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1907년 무렵, ‘토함산 동쪽 사면에 커다란 석불이 묻혀 있다’는 소문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우체부 김 씨가 우편을 배달하던 중 범곡 근처에서 무너진 천장을 목격하고 전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는 우체국장에게 석굴 안에 흙이 가득 차 있고, 돌부처들이 가득 묻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기무라 시즈오(木村靜雄),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등 일본인 관리와 사진사, 문화재 협잡꾼들이 뒤늦게 현장을 답사한 뒤 확산된 것뿐이었다. 세상을 등지고 조용히 존속하던 불전은, 그렇게 입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1909년,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 제2대 조선통감)가 경주를 방문했다. 그는 경주의 고적을 둘러본 뒤 석굴암으로 향했다. 당시 의병 활동으로 나라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경성 최고 권력이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석굴암은 그들에게 그만큼 중요했다. 소네는 석굴암을 경성으로 옮기고자 했다. 경상도 관찰사에게 해체와 이송에 필요한 예산을 올리라고 지시했다. 석굴암은 그에게 탐욕의 대상이자 대단한 전리품이었다. 그는 땅속에 묻혀 있던 대리석 소탑을 가져갔다. 뒤이어 문화재 전문가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가 경주로 파견되었다. 그는 석굴암을 둘러보고 ‘동양에서 비교할 수 없는 걸작’이라 평했다. 그의 평가는 제국의 확신을 더했다. 기무라 시즈오는 석굴불을 경성으로 옮기라는 소네 통감의 명령을 받고 고민했다. 그는 이송비 계산서를 끝내 올리지 않았다. 경술국치가 다가오고 정세는 복잡했다. 경성 이송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 현지 일본인 관리들의 소극적 태도도 작용했다. 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서두를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석굴암은 토함산에 남게 되었다. 석굴암의 존재는 제국에도 알려졌다. 일제는 석굴암을 조선에서 발견한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여겼다. 수백 개의 석재를 조립해 만든 인공 석굴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석굴과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경주로 온 사람들 1912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석굴암 방문 이후, 석굴은 더 이상 조용한 산속의 불전이 아니었다. 수리를 거친 뒤 점차 외지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1차 수리 공사가 마무리된 1915년을 기점으로 경주는 새로운 여행지로 떠올랐다. 서울과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온 뒤, 자동차로 갈아타고 경주로 향했다. 불국사까지는 차로 이동했지만, 석굴암은 여전히 토함산의 산길을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불편함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1920년대 들어 수학여행단의 발길도 이어졌다. 울산의 불교소년단, 경주의 계남학교, 서울의 보성고보까지 다양한 곳에서 학생들이 경주를 찾았다. 이들은 하루 동안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관하고, 절에서 숙박하거나 고물진열관을 둘러보며 일정을 마쳤다. 석굴암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일제의 관광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제국은 석굴암을 조선 병합의 상징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석굴은 사진엽서에 담아 문화정책의 선전물로 기능했다. 그러나 경주로 온 조선인의 걸음에는 조용한 저항이 담겨 있었다. 조선 선각자들은 그 흐름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조선의 정신을 전하고자 했다. 석굴암은 우리 조상이 남긴 위대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조국의 자취가 뚜렷한 곳에 학생들을 데려가 깨우치려는 마음이 있었다. 선조의 숨결을 직접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언의 교육이었고, 말 없는 위로였다. 비록 외세의 감시 아래 이루어진 여정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깊고 분명했다. 경주는 우리에게는 민족의 뿌리가 살아 있는 성지였다. 학생들에게 우리 민족의 정신과 예술을 새기려는 선각자들의 마음이 석굴암을 지켜냈다. ■우리 손으로 되살려낸 문화유산 1960년대, 석굴암 복원은 우리 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일제가 훼손한 것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학자들과 기술자들이 머리를 맞댔다. 백 년의 상처를 지우는 일은 고되고 지난했다. 일제가 덧씌운 콘크리트를 걷고, 내부의 숨결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는 신중했다. 본존불 머리 위에 그들이 새겨 놓은 ‘일본(日本)’을 지웠다. 훼손이 심했던 만큼 복구는 더뎠다. 곰팡이와 석태는 본존불의 어깨를 타고 자랐고, 구조는 뒤섞인 채 회복이 어려웠다. 첫 번째 복원은 전실 공간에 전통 목조전각을 짓는 일이었다. 법당의 격이 다시 세워지고, 조각상들은 비와 눈, 바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었다. 침묵 속의 불사는 그제야 제 자리를 찾았다. 두 번째는 콘크리트 돔 문제였다. 조각상과 얽힌 구조물은 쉽게 뜯을 수 없었다. 대신 그 위에 또 하나의 돔을 씌웠다. 시멘트 독성의 침투를 막기 위한, 정교하고 조심스러운 선택이었다. 세 번째는 진입로 양쪽의 시멘트 옹벽 철거였다. 흉물 같은 콘크리트 제방이 사라지고, 석굴암은 비로소 법당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이했던 전경은 사라지고, 신라의 숨결이 되살아났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팔부신중의 완성이다. 일제는 여섯 상만을 세웠고, 나머지 둘은 진입로 옹벽에 비틀려 놓았다. 아수라와 금시조는 오랜 세월 동떨어져 고립되어 있었다. 이 둘은 우리의 기술로 제자리를 되찾았다. 일렬로 늘어선 신중의 행렬에 합류했고, 전실 공간의 구성은 균형을 회복했다. 조화와 위엄,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야차 상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공사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존재였다. 장마와 폭설, 폭염과 한파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상처 위에 복원의 손길이 닿았다. 신중상의 재배치와 전각의 건립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었다. 문화유산을 바로 세우고 민족의 정신을 되찾는 일이었다. 우리는 침탈된 문화유산을 되살려, 박제된 전리품이 아니라 살아 있는 성전으로 되돌렸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존엄과 자긍심의 선언이었다. 비가 그쳤다. 전각을 빠져나오니, 100년을 훌쩍 돌아 나온 듯 눈앞이 사뭇 낯설다. 어디를 떠돌다 온 것인가. 전각 위 빗방울에 씻긴 잔디가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난다. 둥근 형상은 마치 위대한 것을 꼭꼭 품고 있는 왕릉 같다. 음지를 덮은 이끼처럼 고요한 산기슭, 물기 어린 공기 속을 가만가만 걷는다. 우리 조상이 남긴 찬란한 문화유산, 그 안에 새겨진 사유가 불쑥 솟아 마음 한구석을 울린다. 오랜 굴곡과 상처를 딛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켜낸 시간이 위대하게 다가온다. 함께 걷는 외국인 소녀가 조용히 돔을 올려다본다. 이국의 낯선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눈빛 가득 경외가 스며 있는 듯하다. 한 인류의 유산을 마주한 이방인의 떨림과 놀라움은 어떤 것일까. 젖은 숲길에 접어들 무렵, 그녀의 감탄이 가만가만 미소로 번진다. “Oh my gosh. Korean cultural heritage, Seokguram, so magnificent and great!” (맙소사, 한국의 문화유산 석굴암, 정말 장엄하고 위대해!) 그녀의 눈빛 속에서, 나는 우리의 것을 다시 본다. 내가 가진 것이 곧 세상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자산임을, 이국 소녀의 눈빛에서 비로소 실감한다.
2025-08-20
경북 울진의 왕피천이 낙동정맥 동쪽 산마루를 타고 흘러내린 만 가지의 물줄기가 하나 되어 동해로 흘러간다. 그 굽이치는 푸르고 맑은 물길이 장장 62km이다. 동해를 거쳐 태평양을 하나로 잇는 생명의 하천이다. 이처럼 하천은 물질과 에너지를 전 세계로 이어지는 지구의 동맥이다. 한국의 마지막 청정 하천이라 불릴 만큼 원시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수달, 열목어, 하늘다람쥐 등 희귀 생물이 서식하며, 각종 고산식물과 야생화가 계절마다 어우러진다. 천연기념물 제96호 지정 350살 굴참나무 오랜 시절 풍파로 상처투성이 된 몸통 동서로 8m씩 뻗은 가지 지탱하며 건재 한때는 길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해 와 100년 넘게 자라온 수산리 해변 소나무들 1890년대부터 방수·방풍 목적 식재 ‘유전자보호림’ 지정 430여 그루 관리 가장 큰 나무 둘레 2.2m 높이 18~20m 여기에 더하여 도보여행 명소로도 사랑받는다. 부처의 그림자가 물에 비친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신라 고찰 불영사와 명승 제6호로 지정된 불영계곡, 천연기념물 제155호로 지정된 석회암 동굴로, 종유석과 석순, 지하수 웅덩이가 어우러져 신비로운 자연미를 자랑하는 성류굴, 천연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된 350살 굴참나무,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된 수산리 소나무 숲 등이 왕피천 물줄기에 자연이 빚어놓은 이 보석 같은 경관과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태의 상징이 되고 있다. 사계절 내내 숲과 계곡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힐링의 길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중 울진에서 불영사로 가는 근남면 수산리 381-1 번지, 도로변 언덕 위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수산리 굴참나무와 왕피천 하류, 동해와 맞닿은 해변에 펼쳐진 소나무 유전자보호림을 찾았다. 서로 이웃하고 있어 먼저 굴참나무를 만났다. 천연기념물 굴참나무는 과거를 말하고, 유전자보호림 소나무 숲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 둘을 이어주는 왕피천은 지금도 묵묵히 흐르며, 세월의 이야기와 생명의 노래를 동해로 실어 나른다. 왕피천 너머로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마을 어귀 언덕 위 덩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백 번의 여름을 맞이하고 보냈을 굴참나무의 모습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지나가는 바람과 햇살을 견딘다. 키는 20m, 가슴둘레는 6m이다. 가지는 동서로만 8미터씩 뻗어 있어, 마치 양팔을 벌리고 세상을 감싸안는 듯하다. 상처투성인 몸은 주민들이 외과수술로 잘 치료하여 아직 건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안내판에 한때 이 나무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였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불영사를 찾아가는 스님이나, 석류굴을 향하던 나그네들이 이 나무를 기점으로 남은 거리를 짐작하고 쉬어 갔을 것이다. 지도가 없던 시절, 나무 한 그루가 방향이자 위로였고, 기다림이자 약속이었다. 굴참나무 아래에서 이마의 땀을 식히고, 소매를 걷어 왕피천 물을 떠 마시던 그들의 숨결이 이 나무의 껍질 어딘가에 고요히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오래 사는 거대한 굴참나무는 드물다. 참나뭇과의 낙엽활엽교목으로 깊은 숲속에서도 잘 자라고, 바람이 센 언덕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나무껍질은 두껍고 울퉁불퉁한 코르크처럼 발달해 있으며, 껍질은 예부터 굴피라 불려 지붕을 이던 생활 자재가 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다. 열매인 도토리는 지난 우리 조상들의 가난한 시절에 흉년을 버티게 해준 구황식품이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한 기호식품으로 산행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수산리 굴참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인내, 삶의 기억이 가지마다 스며든 생명의 상징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조용히 우리를 품고 있는 커다란 마음이다. 굴참나무를 뒤로하고 바닷바람이 쉬어 가는 곳 수산리 왕피천 생태공원 숲을 찾았다.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나란히 선 녹색의 병풍이 되어 세찬 바닷바람을 막아섰다. 숲의 소나무들은 백 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 백 년을 바닷모래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벌리고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바람을 막고 물길을 막아섰다. 태풍 하이선이 할퀴고 간 꺾인 한 소나무의 단면을 보았다. 베어진 그의 몸에 나이테는 107개의 고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매년 단 한 줄씩 성실하게 새겨진 그 세월의 문장은 말이 없지만 그 속에는 지금까지의 기후 환경을 고스란히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연대연륜학이 발달하여 언젠가는 이 나이테가 울진 왕피천의 기후를 밝혀내리라 믿는다. 수산리 해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생태공원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자연을 보전하거나 훼손된 생태계를 복원하여 생물들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을 조성한 공간으로, 사람들에게는 자연을 관찰하고 체험하며 휴식과 치유를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생태공원이다. 다양한 생태 요소들이 공원 내에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에게는 생태 교육의 장, 어른들에게는 삶의 여백을 채우는 쉼터가 되고 있었다. 지난 7월 10일 명산과 문화유산을 체험하는 문화단체인 명문단(회장 권경수) 회원 100여 명이 이곳 생태공원을 찾아 숲 체험을 하였다. 수산리 해안의 왕피천 생태공원은 100년 넘게 자라온 소나무 숲이 바다와 왕피천이 만나는 모래땅 위에 펼쳐져 있었다. 해풍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가꾼 이 숲은 오늘날 국가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생명과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자연 교과서로써의 역할 하고 있었다. 1938년 발행된 ‘조선의 임수’라는 자료에 의하면 수산리 주민들이 방풍과 방수의 목적으로 1890년경부터 ‘수산송림’을 가꾸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력 2월 1일 식수 일로 정하고 초지에 천연생 소나무를 이식하고 도벌과 벌채 금지로 보호 관리에 힘써 현재 아름다운 숲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산림청은 이 숲을 유전자보호림으로 지정하여 특별 관리하고 있으며 현재 100살이 넘는 소나무 430여 그루가 아름다운 공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장 큰 소나무 둘레가 2.2 m 높이가 18에서 20m 정도나 되었다. 마치 한 세기를 넘어온 장정들이 하늘을 향해 도열해 있는 듯하다. 과거에는 군부대가 주둔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울진군이 조성한 생태공원으로 바뀌어, 주민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쉼터가 되었다. 이 숲을 ‘지속 가능한 시간’이라 부르고 싶다. 생명의 다양성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유전자의 보루이다. 보이지 않는 그 속의 유전자가 언젠가는 또 다른 숲의 씨앗이 될 것이다. 보존이란 과거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지키는 이 나무 한 그루, 그 안에 깃든 유전자의 무게는 시간보다 무겁고, 말보다 깊다. 수산리 유전자보호림, 생태공원은 다음 세대를 위한 생명의 약속이다. 유전자보호림(遺傳子保護林)이란… 유전자보호림은 생물종의 유전적 다양성과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가 지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특별한 산림이다. 희귀하거나 지역에 고유한 수종, 또는 유전적 형질이 우수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생태적으로 중요한 공간으로, 산림 자원의 원형을 지켜가는 생명의 저장고라 할 수 있다. 지정 목적은 첫째, 유전자원을 장기적으로 보전하고, 둘째, 산림생태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며, 셋째, 미래의 산림 복원이나 품종 개량을 위한 연구 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다. 특히 기후변화나 병해충 등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전적 형질을 지닌 산림 자원이 필요하다. 유전자보호림은 그러한 미래 대응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생태적 자산이다. 경북 울진군의 수산 송림 유전자보호림은 왕피천 하구의 모래땅 위에 조성된 소나무 숲으로, 100년 이상 자라온 나무들이 해풍과 바닷물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소나무들은 해안 방풍림이나 기후에 강한 숲 조성을 위한 중요한 유전자 자원으로 평가받는다. 산림 생명의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거점이다. 오랜 세월 자연이 길러낸 유전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 숲에서 우리는 생명의 다양성을 배우고, 그 가치를 지켜야 할 책임 또한 함께 느끼게 된다. /글·사진=장은재 작가
공학자들은 ‘바퀴’를 인류 역사를 괄목상대시킨 효과적인 발명품으로 지목한다. 비행기가 생기기 전 바퀴 달린 수레는 인간과 물품의 이동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여기에 증기기관에 더해지면서 기차가 등장한다. 1804년. 영국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이 만든 증기기관차가 하얀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진귀한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221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한국도 도시 곳곳을 기차가 연결하고 있다. 시속 300km에 육박하는 속도로 달리는 고속열차도 흔해졌다. 8개월 전엔 부산(부전)과 강원도 강릉을 잇는 동해선도 완전 개통됐다. 지난달 중순. 동해선 기차를 타고 울산을 출발해 8박9일간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동해, 정동진을 거쳐 강릉까지 취재여행을 했다. 기차에 편안하게 앉아 푸른 파도 부서지는 해변을 바라볼 수 있었고, 각 지역이 동해선 개통 이후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수도권 관광객 북적이던 ‘강릉 커피거리’ 부산•경북 사투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와 바다와 가장 인접한 구간은 강릉~정동진 상행선 오른쪽•하행선 왼쪽 창가가 ‘명당’ 글 싣는 순서: 1. 철도 왕국 일본에서 찾는 ‘지역 관광’의 미래 2. ‘당일치기 여행’ 맞춤 일본 철도 3. 관광으로 인구 소멸 위기 ‘호쿠리쿠’ 살리기 4. 일본 기차 여행의 꽃이 된 ‘도시락’ 5. 울산, 이제는 ‘유잼(U-재미) 도시’다 6. 철도 불모지 경북, 동해선 개통 후 새 역사 시작 7. 이번 역은 “천만관광 해양도시 삼척입니다” 8. 강릉, ‘철도 날개’ 달고 동해안 비상 ▲동해선 철길 지나는 도시들, 사회·경제적 상승효과 기대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동해선 철도의 역이 만들어진 대도시는 물론, 중소도시도 크건 작건 ‘철도 개통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향후 더 큰 사회·경제적 상승효과를 기대하는 건 불문가지. 일본 간사이대학 아베 세이지(安倍 誠治) 교수의 논문 ‘일본 고속철도의 미래’는 향후 동해선이 지나는 도시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추측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대목이다. “(일본 고속철도) 신칸센의 효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도시 재개발 효과다. 신칸센은 도시간의 시간거리를 단축시켜 사람들의 행동권이나 상권의 확대를 가져왔다. 신칸센의 개업에 의해 가장 변모한 것이 신칸센역 주변이다. 신칸센역의 개설에 따라 역 주변의 터미널 기능이 향상되고, 거기에 동반해 도시 구조가 변화하고, 교통 체계의 재편이나 중심 업무지역의 형성이 촉진됐다.” 강릉에 도착한 첫날. 창해로 일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된 ‘강릉 커피거리’를 찾았다. 제법 큰 규모의 커피숍을 운영하는 40대 남성은 “지금까진 서울과 경기도에서 오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는데, 올해 1월 동해선 개통 이후론 가게에서 부산과 경북 사투리가 자주 들을 수 있다”며 웃었다. 다음날 산책을 하고 점심도 먹을 겸 들른 경포대해수욕장에선 우즈베키스탄 부자(父子)를 만났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직장을 다니고, 아들은 대구 한 대학에서 한국어를 공부한다고 했다. 둘은 대구를 출발해 포항과 삼척을 거쳐 강릉으로 휴가를 온 터였다. 강릉과 정동진의 해변에선 동해선 열차 탑승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아베 세이지 교수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기차가 지나는) 역 주변 땅값이 올랐는데,토카이도 신칸센의 연선 중 가장 변모한 곳이 신요코하마역과 신오사카역 주변이다. 게다가 신칸센역에 인접한 호텔이나 백화점,다양한 점포가 신설돼 활기찬 공간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수요가 개척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거리의 매력도 만들어졌다. 토카이도 신칸센의 개업은 연선지역의 도시 재개발과 지역 개발의 촉진제가 됐던 것이다.” 지가(地價) 상승과 고급 숙박시설의 신축, 늘어나는 상점이 가져올 지역경제 활성화, 여기에 도시 재개발의 촉진…. 일본의 과거 사례는 동해선이 지나는 여러 도시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아직은 지켜봐야 할 단계이긴 하지만. ▲옆구리에 바다를 끼고 달리는 즐거운 경험을 해보려면… 동해선 기차의 매력은 무엇보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게 아닐까? 특히 갓 연애를 시작한 젊은 연인이나 신혼부부라면 이를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낭만으로 느낄 듯하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연인과 부부만은 아니리라. 그러니, 9일간 10번 이상 동해선 기차를 타고 남북을 오르내린 기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용한 정보 하나를 제공하려 한다. 바다와 가장 인접해 동해선 기차가 달리는 건 정동진-강릉 구간이다. 10분 가까이 출렁이는 해변을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 기차 객실에서 바다가 보이는 건 물론이다. 동해-정동진 구간과 묵호-동해 구간에서도 짧은 시간 바다와 만날 수 있다. 상행선 기차의 경우 오른쪽 창가 좌석, 하행선일 경우엔 반대로 왼편 창가 좌석이 ‘바다 전망 명당’이다. 그러니, 동해선 기차를 예약할 때 참조하시기를. 삼척∼강릉, 기차와 자동차 중 어떤 게 빠를까? ‘ITX 마음’·‘누리로’ 1시간 소요 휴가철·명절엔 열차 이용 편해 올해 1월 1일 개통된 동해선을 운행하는 기차는 편안함과 속도 2가지 면에서 모두 자동차를 압도할 수 있을까? 소박한 실험은 이런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마음먹었으니 미룰 것도 없었다. 아침을 먹고 삼척역으로 차를 몰았다. 운전은 경력이 30년에 가까운 지인에게 맡겼다. 삼척역에서 강릉역까지의 거리는 약 60km. 지난 7월 중순의 평일 낮. 교통 정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삼척역을 출발한 자동차는 1시간 6분 만에 강릉역 앞에 도착했다. 교통 법규와 규정 속도를 정확하게 지키며 달렸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기차의 삼척역-강릉역 구간 운행 소요 시간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동차와 거의 비슷하다. 하루 8편이 운행되는 이 구간을 ‘ITX 마음’과 ‘누리로’ 열차는 빠르게는 1시간 1분, 느린 경우 1시간 7분이면 달려간다. 물론, 동해안 휴가철이거나, 설과 추석 등 명절이면 자동차보다 기차를 타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평소라면 “기차가 훨씬 빠르다”고 확언하기 어렵다는 걸 실험의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편안함과 안락함 차원에서 보자면 기차의 손을 들어줄 이들이 더 많을 듯하다. 출렁이는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시원한 맥주나 사이다 한 잔 마시며 유유자적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건 기차여행이 자동차여행을 압도하는 부분이 분명하다. 동해선 개통 이후 주말은 물론이거니와 평일에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자동차를 집에 두고 동해선 기차에 오른다.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부부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빙그레 짓는 웃음. 이건 깨끗하고 연착 없는 ITX와 누리로 열차가 만들어준 미소가 아닐까 싶다. <끝>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2025-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