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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자정능력을 잃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지난 한 주 많은 국민이 분노와 허탈을 경험했다. 서민들에게는 너무 낯선 사람들을 장관 후보로 만났다. 성실한 사람은 넘을 수 없는 선을 ‘이 정도는…’이라며 어물쩍 넘어가는 뻔뻔함을 보았다. 증인도 모두 거부하고, 자료도 내지 않고,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배짱을 부렸다.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갑질은 서민들의 서러운 기억을 소환했다. 대부분의 서민은 을(乙)로 산다. 갑질을 하고도 ‘뭐가 문제냐’라는 민주당 태도에 ‘을지로위원회’가 사기라고 깨닫는다. 눈을 똑바로 뜨고, 끝까지 거짓말하는 장관 후보에 질려버렸다. 을을 보호하는 장관이 아니라, 을에게 갑질해본 장관이다. 이진숙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불법 조기유학이나 논문 표절만 문제가 아니다. 기본 교육정책에 대한 구상은커녕, 개념조차 없었다. 오죽하면 ‘모르면 동문서답하라’는 쪽지를 앞에다 붙여놓고 답변했을까. 민주당 고민정 의원은 “어떻게 기본적인 질문에도 답변을 못 하나. 굉장히 실망스럽다”라고 분개했다. 더 화가 치미는 건 국민의힘이다. 국민은 속이 터지는데, 야당 청문위원은 남의 다리만 긁는다. 언론에 공개된 내용에서 한발도 더 나간 게 없다. 그것도 중언부언, 우물쭈물, 요령부득이다. 준비를 한 건지 의심이 든다. 오히려 여당 의원, 친여 시민단체의 후보 사퇴 요구가 신선하게 들린다. 한국이 1.5당 체제로 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자해적인 비상계엄이 국민의힘 입지를 부숴버렸다. 의석만 적은 게 아니라 싸울 줄도 모른다. 전략은 없고, 고함만 지른다. 아니 고함도 지를 줄 모른다. 혼자 흥분할 뿐 유권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여당에는 할 말도 못하면서 당권 다툼은 피를 튀긴다. 극단적인 선동이 난무한다. ‘공천=당선’이라는 안일함에 젖은 의원들은 정권보다 당권이 관심이다. 이성은 사라지고, 선동가가 설친다. ‘윤 어게인’으로 뭘 하자는 건가. 다시 쿠데타라도 해 복귀시키겠다는 건가. 비상계엄은 실패했으니, 무장 폭동이라도 하자는 건가. 국민의힘을 해체하는 길로 몰아간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찬양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같은 일을 부추기는 꼴이다. 정신 나간 사람들 아닌가. 수많은 정당이 명멸했다. 국민의힘이 소멸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민주당이 절대 권력이 되는 건 민주당은 물론 민주주의에도 위기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인인 존 달버그 액턴 경은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주당이 행정권은 물론 입법권까지 압도적으로 장악했다. 검찰과 법원을 겨냥해 사법권까지 쥐려 한다. 진영화는 우리 편을 무조건 옹호하는 방향으로 정치를 왜곡했다. 조국 사태가 그 전형이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서도 부패한 아첨꾼들이 설치는 판이 깔린다. 견제받지 못한 권력은 안으로부터 곪기 마련이다. 견제할 야당이 없으면 집권당이라도 스스로 정화 작업을 해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8년 동안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박 전 대통령은 내부 정화 장치를 가동했다. 대통령의 친인척, 고위공직자, 여당 정치인부터 감시하고, 단속했다. 권력기관끼리도 견제시켰다. 서정쇄신(庶政刷新) 등으로 서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절대 권력을 건드리지는 못하지만, 장기 집권을 이어간 기반이다. 김병기 민주당 원내대표는 “특별하게 결격에 이를 문제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모든 부담을 이 대통령에게 떠넘기는 고백이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도려내지 않으면 종양은 번지기 마련이다. 원칙 없는 인사는 이재명 호 밑바닥에 썩은 나무를 까는 꼴이다. 회생불능인 국민의힘에게는 유일한 반전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민주당 강득구·김상욱 의원은 “윤 정권과 달라야 한다”라며 이진숙·강선우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경실련은 두 후보가 ‘자질 미달’이라며 지명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친여 시민단체들이 진영의 틀을 벗어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신선하다. 그만큼 문제가 많은 후보자라는 뜻이겠지만, 야당이 구실을 못 하니, 그렇게라도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7-20

다시 오고, 머물고 싶은 ‘희망찬 영양’을 위하여

‘지방소멸’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은 시대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에게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 문제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민선 8기를 시작하며 스스로 다짐했다. 영양을 지키자. 그리고 누군가 다시 돌아오고,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만들자고. 지방소멸은 더는 막연한 걱정이 아니다. 이미 현실이고, 피해갈 수 없는 흐름이다. 그래서 사람이 떠나는 곳이 아니라, 살아갈 이유가 있는 곳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풍력발전 기금을 통해 복지 재원을 확보하고, 공공임대주택과 LPG 배관망, 전원마을 조성 등을 통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부터 하나씩 마련해가고 있다. 행정의 기초는 예산이다. 민선 8기 초반, 영양의 연간 예산은 2800억 원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도비 공모사업에 매달리고,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낭비를 줄이며 버틸 수 있는 구조부터 만들었다. 올해 예산은 5167억 원이다. 두 배 가까운 확충이다. 예산이 늘었다는 건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교육, 복지, 산업, 도로, 환경 등 군민의 삶과 연결된 모든 곳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는 동력이 생겼다는 뜻이다. 재정의 체력을 갖췄고, 이제는 더 먼 곳까지 달릴 수 있게 됐다. 영양은 오랫동안 교통 3무 지역이라 불려왔다. 고속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고, 4차선 도로도 없는 땅. 때로는 스스로도 낙담했을 정도로, 단절과 고립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총 5309억 원 규모, 37개에 이르는 도로·방재·하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도 31호선 선형 개량, 지방도 정비, 자라목재 터널과 답곡 터널 개통 등 끊겼던 길을 잇고, 위험했던 구간을 안전하게 바꾸고 있다. 길이 연결돼야 사람도, 물자도, 기회도 들어온다. 교통은 단지 이동수단이 아니라 지역의 생명줄이다. 이제는 누구나 더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영양을 만들고 있다. 영양은 농촌이다. 그리고 나는 늘 말해왔다. 농업 없이 영양을 말할 수는 없다고. 그래서 농민이 편하게 농사짓는 환경부터 만들고자 했다. 농작업 대행반 운영, 계절근로자 도입 확대, 농업인 보험료 지원, 과수산업 육성, 유통망 정비. 겉으로 드러나진 않아도, 뿌리처럼 현장을 지탱해주는 정책들이다. 특히 홍고추 전국 최고가 수매, 농산물품질관리원 영양분소 승격 건의 같은 일들은 한 해 농사를 마친 농민들의 손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다. 농업은 여전히 이 지역의 생명줄이고, 그 가치는 지켜야 한다. ‘숲, 물, 공기’. 영양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다. 이 자연은 그대로 두어도 훌륭하지만, 지역 발전과 연결된다면 더 의미가 있다. 자작나무 숲 에코촌 조성, 자작누리 산촌명품화, 삼지수변공원 정비, 바들양지 경관림 조성… 생태 기반을 활용한 관광 인프라가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다.자연을 지키며 관광을 키우고, 관광을 통해 사람이 들어오고, 그 사람들이 다시 머무를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영양이 가야 할 길이다. 정책이 아무리 정교해도, 행정의 마지막 목적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작고 구체적인 일들에 집중해왔다. 기초연금 확대, 65세 이상 대상포진 무료 예방접종, 건강검진비 지원, 바로민원처리반 운영, 소방서 신설, 정주여건 개선, 온단채 조성, 신재생에너지 보급 등. 이 모든 일들은 군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 데 목표가 있다. 사는 데 불편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고, 필요한 걸 제때 받을 수 있는 고장. 그게 내가 만들고 싶은 영양의 모습이다. 민선 8기 4년 차. 이제 남은 1년은 마무리가 아니라 도약의 시간이다. 그동안 다져온 기반 위에서 더 높이, 더 멀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산불 피해 복구부터 시작해 농업 혁신, 관광 개발, 정주환경 개선, 복지 확대, 교통망 확충까지 우리가 만들어낸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군민 모두의 인내와 참여, 함께 버틴 시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영양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영양에 오고 싶은 사람들, 이곳은 희망의 땅이다. 떠나는 곳이 아니라 돌아오는 곳, 잠시 스쳐가는 곳이 아니라 오래 머무는 곳. 그런 영양을 만들기 위해 남은 시간, 흔들림 없이 달릴 것이다. 나는 행정가 이전에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다. 그래서 더 잘 알고, 더 책임감을 느낀다. 이 고장을 지키는 일, 끝까지 책임지겠다. /오도창 영양군수

2025-07-20

흔한 듯 흔하지 않는 내 이름

패키지 여행은 바쁘고 흥미롭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같은 버스에 올라 함께 여행을 한다. 외도 가는 배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신상을 적어야했다. 버스 뒷자리에 앉았던 나는 승선명단을 눈으로 훑었다. 30여명의 일행 중 같은 이름이 세 명이었다. 다행이라면 성이 다른 것이랄까. 다음 날은 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8명이 한 케이블카에 올랐다. 바다 위를 거쳐 산 정상에 오르는 코스이다. 앞에 앉은 여자의 이름을 친구가 불렀다. 같은 이름 중 한 명이다. 반가움에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케이블카 타는 내내 그 흔한 이름으로 인해 생겼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등학교 2학년 학기 초였다. 시험을 보고 선생님이 이름을 불러가며 시험지를 나눠주셨다. 내 이름이 불렸다. 네하고 일어서는데 다른 아이도 같이 일어섰다. 선생님이 우리 반에 같은 이름이 있구나 하시며 나와 보라고 하셨다. 시험지를 본 다른 아이가 자기 것이라고 했다. 시험지를 다 나눠주신 후 선생님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나보고 일 년 동안 시험 볼 때마다 작은 전영숙이라고 쓰라고 하셨다. 같은 이름의 다른 친구는 큰 전영숙으로 쓰라고 하시며. 그 한해 시험 볼 때마다 이름 앞에 ‘작은’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작은 키가 더 부각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흔한 이 이름은 한때 ‘영숙이, 숙제했어’라는 유행어로 코미디 프로에 나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한글로는 흔한 이름인데 한자로 쓰면 거의 없는 내 이름이 자주 못마땅했다. 대학시험 때였다. 입학원서를 학교에서 단체로 작성해서 냈고 수험표만 받았다. 아뿔싸. 이름의 한자가 달랐다. 선생님께 이야기하니 괜찮을 거라고 하시며 시험에 그냥 응시하라고 했다. 마음으론 걱정이 되었다. 면접날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면접장에 들어갔다. 서너 분의 교수님이 앞에 앉아 계셨다. 그 중 키가 크고 체격이 좀 있는 교수님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셨다. 도대체 어떻게 자기 이름을 한자로 제대로 쓰지 못하느냐고 하면서 이런 학생은 합격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큰 교수님이 화를 내시니 더 마음이 졸아들었다. 담임 선생님이 작성한 것이라 하니 핑계대지 말라고 하시며 더 크게 화를 내신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불합격하면 큰일인데 싶어 진땀이 흘러내렸다. 벌벌 떨고 있으니 옆에 계신 교수님이 안 됐다 생각했는지 얼른 나가라고 하셨다. 혼난 것으로 끝난 면접은 내내 기억에 남았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최초로 드러내는 것으로 한 사람을 특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또한 집안이나 집단의 소속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이름은 특정 시대의 가치관이나 사회상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에게 어울리며 앞으로 그 삶을 살아가기에 적합한 뜻을 가진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다. 부모의 바람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명소를 통해 태어난 아이의 사주와 맞는 이름을 지어오기도 했다. 늘 흔한 이름이 불만이었던 나는 가끔은 개명을 생각하기도 했고, 글을 쓰면서 필명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쉽게 그것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여러 가지의 상황을 상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망설이게 했던 것은 몇 년 전 주고 받았던 아버지와의 대화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이름 지어준 것과 흔하지 않은 한자 이름에 대해 투덜거렸을 때 아버지는 그 이름을 짓기 위해 큰아버지와 몇 날 며칠 옥편을 뒤졌노라고 말씀하셨다. 전영숙(全瑛琡), 이것이 내 이름이다. 이름 석자에 임금 왕(실제로는 구슬 옥)을 넣으려고 애를 썼다고 하셨다. 그만큼 고결하고 귀하게 왕비처럼 살기를 바랬다고 하시며. 농담처럼 난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왕비의 삶이 아버지 생각처럼 편하고 귀하기만 하냐고. 얼마나 힘들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자리인 줄 아시냐고. 한 사람의 인생이 어찌 늘 잔잔한 물결이기만 했을까. 그걸 아시면서도 자식이 조금 덜 고생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사랑이 내 이름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평범하기만 한 내 이름 한자에 숨어 있는 아버지의 바람을 마음 깊이 이해한 것은 나 역시 많은 풍파를 겪은 후여서일 것이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개명도 필명도 쓰지 않기로 했다. 흔한 듯 흔하지 않은 내 이름. 이런 이야기를 싣고 케이블카는 산 정점을 돌아 내려가고 있었다. 같은 이름의 여행객과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보지 못하더라도 행복하자는 덕담을 서로 주고 받았다. /전영숙 시조시인

2025-07-20

김호령과 함평 타이거즈의 감동

2016년 10월 11일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프로야구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 0대 0으로 팽팽한 9회말 트윈스가 원아웃 주자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나는 상황. 김용의가 좌중간으로 날린 타구는 의심할 여지없이 끝내기 안타로 보였다. 혹 외야수가 잡는다 하더라도 3루 주자의 태그업 득점을 막을 가능성은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외야수들은 공을 포기한다. 잡아봤자 경기는 끝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이거즈 중견수 김호령은 수십 미터를 전력질주한 끝에 공을 잡았다. 그러고는 혼신을 다해 송구했다. 타이거즈는 탈락했지만 김호령의 눈물겨운 투혼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201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꼴찌로 지명된 김호령의 선수 경력은 보잘 것 없다. 규정타석을 채운 게 단 한 시즌에 불과하며 통산 타율도 2할4푼밖에 되지 않는다. 뛰어난 외야 수비와 주루 능력을 가졌음에도 공격력이 약해 만년 후보다. 나이가 들며 경쟁력을 점차 잃어 2군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불성실하고 거들먹거리기라도 하면 차라리 미워할 텐데 누구보다 성실하고 묵묵하며 바른 인품을 가진 선수라 팬들에겐 아픈 손가락이다. 죽어라 공부하는데 고시에서 매번 낙방하는 막내아들 보는 마음이랄까. 150억원의 사나이 나성범, 경기 출장이 언제나 보장된 최원준, 2024년 우승에 역할을 한 이우성, 백업 선수로 나름의 팬덤을 거느린 박정우 등이 외야를 점거하는 사이 김호령은 자리를 잃었다. 점차 팬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지던 중 기회가 왔다. 나성범이 올해도 부상으로 ‘유리몸’이라는 오명을 쓴 채 이탈했고, 이우성과 최원준은 ‘철밥통’이라 할 만큼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음에도 처참한 부진을 거듭하다 2군으로 내려갔다. 이들 외에도 김도영, 김선빈, 윤도현, 이의리, 곽도규, 황동하 등 주전들의 부상이 겹치면서 2군 선수들이 1군에 대거 콜업될 때 오선우, 김석환, 고종욱, 박민 등과 함께 김호령도 올라왔다. 타이거즈의 2군 경기장이 전남 함평에 있는 관계로 팬들은 이들을 ‘함평 타이거즈’라고 부른다. 주전들이 뛸 때 10개 팀 중 9위로 추락해 있던 팀은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믿을 수 없는 선전에 힘입어 6월 승률 1위를 기록하며 단독 2위로 올라 왔다. 이 기간 동안 ‘함평 타이거즈’는 팬들의 심금을 울리는 장면을 연일 보여줬다. 만년 유망주 꼬리표를 뗀 오선우의 꾸준한 활약은 물론 중요한 경기 막판 승부처에 대타 역전 홈런을 친 김석환, 타석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어떻게든 출루해내는 이창진 등이 그랬다. 고종욱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매 경기 매 타석마다 간절함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6월 29일 경기에서 634일만에 3안타를 친 그는 수훈선수 인터뷰 도중 임신한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다 눈물을 펑펑 쏟았다. 가장 뭉클한 건 역시 김호령이다. 7월 5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 첫 타석에서 올 시즌 첫 홈런을 치더니 다음 타석에서는 프로 데뷔 첫 만루홈런을 치며 생애 처음 한 경기 두 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두 번의 홈런 장면에서 다른 선수들이 다 하는 그 흔한 ‘빠던(타격 후 배트를 요란하게 던지는 쇼맨십 행위)’이나 화려한 세리머니도 없었다. 늘 그렇듯 열심히 베이스를 돌다가 타구가 담장을 넘는 걸 확인한 순간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줍게 기쁨을 표현했다. MVP로 선정돼 인터뷰를 하면서도 달변은 아니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과 겸손함을 눌러 담아 소감을 말했다. 그날 많은 타이거즈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남이 잘 되기를 이처럼 바란 적이 없다고들 했다. 착하고 성실하고 겸손하고 묵묵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오랜 시간을 견뎌 마침내 빛을 보는 서사를 김호령은 우리에게 보여줬다. 주전 선수들이 돌아오면 김호령을 비롯한 ‘함평 타이거즈’는 다시 2군으로 내려갈지 모른다. 하지만 2025년 여름, 이들이 보여준 절실함과 감동의 야구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별 감흥 없이 함부로 흘려보낸 한 경기가 그들에겐 인생을 건 도전이었다. 소중히 생각지 않고 마땅한 권리인양 여겼던 한 타석이 그들에겐 평생 꿈꿔 온 순간이었다. 김호령의 수줍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 야구 앞에 진실하고 노력 앞에 정직하며 기회 앞에 간절한 사람이 잘 되는 걸 계속 보고 싶다. /이병철(시인)

2025-07-20

미지의 행성에서

요즘 나는 ‘플래닛 크래프트’라는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 있다. 게임은 단순하다. 지구에서 무거운 죄를 저지른 게임 속 주인공은 자신의 형량을 없애기 위해 이름도 없는 외계 행성으로 떠나야만 한다. 형량을 없애는 대신 주어진 주인공의 임무는 외계 행성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지구의 환경을 만드는 것, 그리고 머지않아 외딴 행성에 홀로 떨어진다. 주인공은 미지의 행성을 떠돌며 맵을 넓히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과 음식, 공기 등의 자원을 끊임없이 모아야만 한다. 홀로 외롭게 떨어진 행성은 때론 아름답기도, 또 때로는 빛 한줌 없는 어둠속에 잠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갖게도 한다. 그럴 때마다 통신 기기에 ‘라일리’라는 사람이 말을 걸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약간의 팁을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어둠을 더듬어 나가며, 결국 이 행성을 지구처럼 테라포밍 후 탈출해야 하는 게임이다. 게임 속 아이템은 꽤나 디테일하다. 철, 마그네슘, 규소, 티타늄, 코발트를 모아 약한 인간의 피부를 보호할 수 있는 우주복을 만들고 일정 시간 버틸 수 있는 산소통도 만든다. 희귀 광물인 알루미늄으로 각종 추가 장비나 실험 공간 등을 건설하고, 우라늄을 캐서 로켓이나 제트백을 만들기도 한다. 각 광물은 특정 구간에서만 만날 수 있고, 또는 시간에 따라 캘 수 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꽤나 오랜 기간 맵을 직접 돌아다니며 지리를 익혀야만 한다. 이 게임의 묘미는 어둠 속에 잠긴 지형이라던가 붉은 색으로 뒤덮인 기괴한 지형, 나무가 거꾸로 자라는 지형 등 실제 외계 행성을 탐험하는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모래 먼지로 뒤덮인 장소는 한치 앞도 안 보이기 때문에 지나치기 쉽고 때론 무섭기 때문에 피하곤 하지만 호기심으로 그 지형을 점차 파고들다 보면 결국 가장 한가운데에 가장 값어치 있는 광물이 있는 이벤트가 숨어 있는 등, 실제 모험을 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안겨 준다. 게임은 위협을 가하는 악당이나 깜짝 놀라게 하는 공포스러운 요소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에게 쫓기듯 바삐 움직여야 한다. 광물이나 씨앗을 캐서 꽃과 나무를 자라게 하고, 미생물을 연구해서 물 속 식물과 물고기를 만들어 내고, 유전자를 연구해서 동물을 탄생시키는 등등, 말 그대로 황무지였던 외계 행성 속의 창조주가 되어 꽤나 집중해서 플레이하게 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겨우 집 근처만 맴돌던 나는 점차 행성 곳곳을 누비며 다니게 된다. 두려움으로 내딛던 유난히 공포스럽던 땅도 게임의 막바지에 이르면 텔레포트를 타고 앞마당을 거닐 듯 가볍게 날아다닌다. 결국 모든 것은 처음과 시작이 어려울 뿐, 거듭 반복된다면 결국 익숙해질 것이고 또 다른 나만의 노하우가 생길 것이며 그러다보면 결국 모든 행동은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 이야기를 하기 조금 부끄럽지만, 근래의 나는 조금 불안했다. 이직한 회사 내 조직에서 빠르게 적응해야 할 것만 같았고 내가 잘하는 것을 충분히 어필하면서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조급함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면 참 좋으련만, 이상하게도 나는 시선과 관심이 압박감처럼 느껴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렇게 까지 움츠러들 필요는 없을 텐데,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거듭 속상해졌다. 고민만 늘어가는 나날들 속에서 결국 단순하고도 명쾌하게 답을 내려준 것은 게임 속 미지의 우주였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멈춰 있는 대신 계속해서 행동하며 나아가는 일이 아닐까. 게임은 중반부부터 아주 놀랍게도 지루해진다. 같은 자원을 캐고 같은 일을 하며, 배가 고프다는 알림이 울리면 밥을 먹고, 산소가 떨어졌다는 경보음이 울리면 산소를 흡입한다. 점차 필요한 자원은 많아지지만 해야 하는 일은 대부분 매우 비슷하기에 지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을 잃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 출퇴근 하는 일상의 루틴처럼, 게임 속에서도 일정한 일을 견디고 행동하지만 결국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다음 챕터로 넘어가게 되는 지점을 마주하게 된다. 새로운 행성에서도 나의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 그러기 위해선 그저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수밖엔 없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결국 해내고 있다 보면 결국 이 모든 고민에 더욱 능숙히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윤여진(소설가)

2025-07-20

고(故) 안철택 교수 영전에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란 말은 깊은 울림을 준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진다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인연이 있으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오는 일도, 세상과 작별하는 일도 모두 인연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달려있다는 말이니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7월 6일 한낮의 땡볕이 내리비치는 순천만 국가정원을 허위허위 걷다가 숨이 턱에 차는 느낌과 만난다. ‘인문 여행’이란 이름을 가진 전남대-경북대 교수들이 오랜만에 순천에서 만난 것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장 순천(順天)의 대표적인 명소 국가정원을 걷는 것은 고역이었으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수로 옮긴 저녁 자리에서 가슴 서늘한 전화가 불쑥 나를 찾는다. 아끼던 대학 후배 교수가 세상을 등졌다는 비보(悲報)였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경북대 교수들에게 안타까운 상황을 말한다. 일순 아연실색하는 동료들의 표정이 어둡다. 지난 4월 초부터 몸과 마음의 고통을 호소했던 후배 교수의 부음에 망연자실한 얼굴이 역력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22년 봄 연구실에서다. 전화 통화로 미리 통성명은 했던 터였고, 따라서 낯설지 않은 대면이었다. 더욱이 그는 마주 대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남다른 능력의 소유자였다. 오랜 유학 생활을 경험한 그였기로, 나는 자연스레 이런저런 분야의 서책에 관한 이야기를 그와 함께했다. 넓고도 깊은 그의 독서 편력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 후로 여러 차례 만남으로 그와 자연스레 교분을 키울 수 있었다. 특히 전태일 열사 기념관 신축 기금 모집에 열렬하게 헌신하는 그의 모습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자기에게 맡겨진 과업을 뚝심 있게 추진하는 열정과 헌신적인 활동성은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아는 것은 아는 대로 실천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용기 있는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堅持)했다. 그의 열망은 한국 사회의 공적 인식과 실천적 지평을 도이칠란트 수준까지 고양하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인 주권자들의 앎과 실천의 영역을 더 넓고 깊게 확장-심화하는 것을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분단과 전쟁, 빈곤과 독재, 장기간에 걸친 군사 쿠데타로 얼룩진 우리나라를 멋진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 불탔던 인물이 그였다. 그 문제에 관해 그와 심도(深度) 있는 논의를 진척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겐 남는다. 언제부턴가 나는 각각의 개인이나 사회 혹은 국가는 나름의 역사적-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그에 따른 발전과 변화 양상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통일 도이칠란트는 우리의 참고서는 될지언정 교과서는 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던 터다. 이런 이야기를 뒤로 미뤄야 하는 작별의 시각이 너무도 불시에 찾아왔다. 여수의 저녁놀이 아름다웠지만, 쓸쓸해진 마음에 좋아하는 술도 마다하고 눈길이 자꾸만 헛헛해진다. 이튿날 아침 소주로 그의 명복을 빌면서 작별 고한다. ‘안 선생, 부디 평안하게 영면(永眠)하시게!’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7-20

대구 두류공원의 꿈

미국 뉴욕시 맨해튼구에 위치한 센트럴파크 공원은 해마다 25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미국 최고의 명품공원이다. 공원의 규모가 작은 나라지만 모나코보다 크다. 공원 안에 동물원과 야생보호구역이 있다. 중앙에 큰 호수도 있다. 본래는 뉴욕시의 땅이었으나 무허가 채석장과 가축농장, 판자집 등이 무질서하게 들어섰던 것을 한 저널리스트의 제안으로 개발이 시작됐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 살 땅도 부족한데 빈땅을 공원으로 개발한다고 불평을 해댔다. 하지만 과감한 개발로 지금은 뉴욕시민의 자랑이자 세계적 명소가 됐다. 당시 공원 설계사는 “지금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지 않으면 100년 후에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도심의 공원은 시민의 휴식처이자 여가 공간이다. 시민에게 단순히 휴식만 제공할 뿐 아니라 도시의 공기를 맑게 한다. 더운 여름의 기온을 3~5도 가량 낮춰주기도 한다. 특히 자연경관을 보호하고 시민들의 건강과 정서 안정에 기여한다. 나라마다 도시공원을 권장하고 지원하는 것이 대세다. 대구 두류공원의 국가도시공원 지정 여부가 관심으로 떠올랐다. 국가공원으로 지정되면 공원 관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류공원을 관할하고 있는 달서구는 오래전부터 두류공원의 센트럴파크화를 꿈꾸어 왔고 연구용역까지 벌였다. 센트럴파크 말고도 영국의 하이드파크나 밴쿠버의 스탠리파크 등은 도심공원으로서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규모도 크고 멋진 경관의 도심 속 자연공원으로서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센트럴파크를 꿈꾸는 두류공원의 꿈을 응원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7-20

고립된 청년, 보이지 않는 ‘지역사회 위기’

청년 고립은 단순한 외로움을 넘어 삶의 다방면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다. 이는 개인의 미래뿐 아니라 사회적 우울과 자살 등 다양한 문제를 유발한다. 기존 대응은 고독사 예방과 1인 가구 지원에 집중했으나, 이제는 정서적 관계 형성을 위한 실질적 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청년 고립은 경제 활 단절, 지역사회 연결망 상실, 사회 참여 배제라는 세 가지 축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이는 직업 부재를 넘어 경제 활동 기회 박탈, 최소한의 관계망 부재, 다양한 사회 활동 참여의 소외를 포함한다. 초기에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보일 수 있지만, 장기화할수록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악영향을 미치며 삶의 전반에 걸쳐 위협을 가한다. 경상북도 거주 청년 중 약 7.8%가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여 있다는 최근 조사는 전국 평균(6.3%)보다 높은 수치로, 약 1만명의 은둔형 청년 중 3500명 이상이 6개월 이상 외부와 단절된 상태임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통계를 넘어 사회 구조적 위기의 신호로 해석되어야 한다. 고립은 경제적 단절, 심리적 침체,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시작점이다. 많은 은둔·고립 청년들은 학업, 직장, 관계에서의 실패 후 회복 기회를 찾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시민’으로 전락한다. 이러한 고립은 개인의 일시적 문제가 아닌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문제로, 생산성 저하와 사회 통합 저해 등 사회·경제적 비용을 급격히 증가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 개입하느냐이다. 대부분의 정책은 위기가 가시화된 이후에야 복지체계에 편입된다. 그러나 고립 청년 문제는 선제적 발견과 예방 중심의 접근 없이는 실효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역 공동체는 조기 발견–심리 회복–사회 재참여의 흐름을 만드는 실천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경상북도는 올해부터 은둔 청년 전수조사와 맞춤형 심리지원 사업을 본격화한다고 한다. 그리고 청년을 비롯한 사회적 고립가구를 사전에 발굴하고 정기적인 안부 확인을 위한 ‘행복기동대’, 경북행복재단 산하 사회적 고립 해소 및 고독사 예방을 위한 ‘경상북도사회적고립예방지원센터’가 보다 촘촘한 사회적 지원체계를 위해 활약하고 있다. 포항시에서도 경북 최초로 사회복지관의 지역밀착형사업인 ‘숨은 이웃 행복센터’라는 간판을 걸고 포항지역 6개 읍면동에 사회복지관을 부설로 설치하였다. 숨어 있는 노인, 청년 등을 발굴하고 치유하기 위해 선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사업들이 작금의 문제에 대한 일회성 사업이나 행사성 사업에 그쳐선 안 된다. 청년 고립은 그 자체로 지역 공동체의 건강성을 위협하는 지표다. 우리는 이들의 침묵 속에서 사회의 미래를 읽어야 한다. 문제는 드러나기 전부터 존재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위기’를 먼저 보는 눈과 그것에 응답하는 정책의 감수성이다. 고립으로 인한 위기는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아프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고 청년들이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사각지대에 은둔하고 있는 고립 청년들에 대한 시민들의 깊은 관심과 공감적 자세가 절실하다. /이형 포항 학산사회복지관장·철학박사

2025-07-20

환대, 사람됨의 조건

며칠 전, 세탁기 없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래전이지만, KBS ‘일요스페셜’에 세탁기 안 쓰는 사람으로 출연했을 만큼 세탁기를 안 썼다. 잠시 세탁기를 들인 적도 있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오래지 않아 없앴다. 그런데 석 달 전 손목에 이상이 생겨 빨래를 짤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세탁기를 사게 된 것이다. 마침 중고거래 장터에 새 상품이 반값에 나왔다. 인수하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하고 용달비를 추가로 물어야 해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물건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세탁기용 수도가 없다는 것이다. 세탁기 쓸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오래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집수리센터에 가서 사진을 보여주고 견적을 받았으나 직접 와서 보고는 못 하겠다고 한다. 사진만 보고 부른 견적이 너무 싸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비용 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했지만 이유도 묻지 못하고 중고거래 동네생활에 사정을 올렸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나눔으로 해주겠다고 나섰다. 전문업자도 안 한다는 일을 생면부지 남을 위해 나서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이유를 물었다. ‘생활 속에서 부품 몇 개로 DIY로 할 수 있는 간단한 일들을 도와드리는 것뿐, 금전을 받을 만큼 전문은 아닙니다. 우울한 일상에서 몰랐던 것도 배우게 돼서 해드립니다.’ 드디어 세탁기가 들어와서 나눔 해주시는 분이 오기로 했다. 하필 전날 폭우가 내리쳐서 계단참에 빗물이 흥건히 고였길래 얼른 나가서 물웅덩이를 말끔히 쓸었다. 집안 여기저기 널려있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다 치웠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돈을 지불하는 집수리업자가 와도 이렇게 했을까 의문이 들면서 ‘환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환대’는 김현경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그의 대학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출간된 지 10년이 되어가는데도 지금도 여러 독서 모임에서 선정되고 있다. 사람을 교환가치로만 생각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묵직한 문제의식이 시의성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현경은 프롤로그에서 그림자나 웃음, 눈물이 없다면 사회에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우화 몇 개를 소개하며 그림자나 웃음, 눈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만 환대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림자나 웃음, 눈물을 환대할 줄 아는 마음이라고 재해석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공공성을 창출하는 ‘사람’이 되는 조건이 바로 환대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눔을 해준 분은 동네생활의 몇 글자만 보고 기꺼이 도움을 약속했고 90분에 걸쳐 세탁기 수도를 연결해주고는 공구 가방을 따릉이에 싣고 ‘손목 아프지 마세요’ 인사를 남기고 어떤 선물도 거절한 채 홀연히 떠나갔다. 김현경은 환대와 증여를 구분하면서 준 것을 잊어야 환대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나눔해준 그 분이야말로 진정으로 환대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다만, 받은 것도 잊어야 환대라는 저자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준 사람은 잊어도 받은 사람은 잊지 않는 것, 그것이 환대의 완결이 아닐까.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7-20

‘물순환촉진법’

지난 몇 년간 우리는 기후변화의 위력을 피부로 느꼈다. 기록적인 폭우로 대구 도심의 도로가 순식간에 흙탕물에 잠기고, 연이은 가뭄에 청도 운문댐이 바닥을 드러내는 모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도시를 뒤덮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는 빗물이 땅으로 스며들 길을 막아버렸고, 왜곡된 물의 흐름은 기후변화라는 ‘위협 증폭기’를 만나 홍수와 가뭄이라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물관리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때이다. 지난해 10월 시행된 ‘물순환 촉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물순환촉진법)이 바로 그 전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물순환촉진법’은 무엇이 달라지는 것일까? 핵심은 ‘통합’과 ‘회복’이다. 이 법은 빗물을 더 이상 빨리 내다 버려야 할 골칫거리가 아닌, 땅에 스며들게 하고(침투), 잠시 머물게 하여(저류), 다시 사용하는(재이용) 소중한 자원으로 바라본다. 이를 위해 ‘물순환 촉진’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는 단순히 재해 예방을 넘어 깨끗한 물 공급, 수생태계 보전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활동이다. 법은 투수성 포장, 빗물정원, 인공습지 같은 ‘물순환 시설’을 체계적으로 설치하도록 장려한다. 특히 물순환 왜곡이 심각한 지역을 ‘물순환 촉진구역’으로 지정해 국가가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관리하게 된다. 환경부가 국가 전체의 청사진(국가물순환촉진기본방침)을 그리면,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특성에 맞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워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국고 보조를 통해 사업 비용을 지원하고, 관련 제품의 품질을 인증해 주는 제도로 산업 발전도 꾀하게 된다. 세계의 선진 도시들은 이미 도시가 거대한 스펀지처럼 기능하는 ‘스펀지 시티’로 변모하고 있다. 독일은 건물의 지붕이나 주차장처럼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는 ‘불투수면적’이 넓을수록 하수도 요금을 더 내게 하는 ‘빗물세’를 도입했다. 이는 시민들이 스스로 옥상에 정원을 가꾸고, 마당에 투수 블록을 깔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미국 포틀랜드시는 ‘깨끗한 강 보상(Clean River Rewards)’ 프로그램을 통해 빗물정원 등을 설치한 시민에게 수도요금을 직접 깎아준다. ‘물순환촉진법’ 시행을 계기로 대구·경북은 기후 위기 시대에 지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발판으로 삼는 선제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첫째, 안정적인 ‘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국고 지원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독일의 빗물세처럼 지역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재원 조달 체계를 조례로 제도화하는 방안을 공론화해야 한다. 둘째, ‘제도개선’과 실행 조직 구축이 시급하다. 물순환 정책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를 세워 부서 간 칸막이를 허물고, 전문가와 시민이 참여하는 거버넌스를 활성화해야 한다. 셋째, ‘물순환촉진법’에 명시된 ‘지원센터’나 ‘전문인력 양성기관’과 같은 핵심 기관을 우리 지역으로 유치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대구·경북이 물산업 선도도시로 도약하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물순환촉진법’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쥔 지금이야말로 대구·경북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물 안심 도시’로 거듭날 절호의 기회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7-17

복날이 뭐지?

달력을 보니 초복이 코앞이다. ‘복따름’을 해야 이 더운 날씨를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지 싶어 삼계탕집에 전화를 돌렸으나 이미 허탕이다. 어지간한 집은 예약조차 받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니 더운 날씨에 더 더운 듯하다. 불난 집 앞에서 부채질한다더니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친구가 ‘복따름’이 아니라 ‘복달임’이라고 단어를 수정해 준다. 대충 알아먹으면 될 것을 지적질이다. 닭 한 마리도 못 먹어 헤매는 사람보고 부아를 돋운다. 시청에 가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시장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에서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그중에는 개고기 먹지 말자는 취지에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칠성시장 개 판매 장소를 없애 달라고 시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울 경동시장의 개 도살장이 없어지고 국내 3대 개 시장 중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과 부산 구포시장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대구 칠성시장의 개 시장을 폐쇄해 달라는 것이었다. 복날쯤에 어김없이 나오는 ‘개고기’ 이야기는 이제 식상하다. 보신탕, 보양탕이라 부르는 개고기는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 중 하나였으나 시대가 개고기 먹는 것을 거부하고 있으니 방법이 없다. 이젠 법으로 못 먹게 되다 보니 강짜 부린다고 될 일도 아니다. 복날에 복달임을 위해 가족이나 이웃이 모여 노는 것은 ‘복놀이’라 한 것을 보면 가족 친지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더위를 이겨보자는 뜻이 강한 것 같다. 특히 어른들 여름에 기력이 빠질까 싶어 챙기는 의미로 여름 들어갈 때 한 번, 중간에 한 번 그리고 여름 끝날 때쯤 마지막으로 건강을 챙겨드리는 마음에서 복놀이를 한다. 이게 우리가 복날을 챙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복은 어른들 여름 나시라고 영양가 있는 음식 챙겨드리는 날로 배웠고 여태 그렇게 해왔다. 애들 외숙모가 시집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초복날 일이 터졌다. 집사람이 갓 시집온 처남댁에게 초복 날 장인어른 안 챙긴다고 나무란 것이다. 찾아뵙지도 못하면 전화라도 해서 안부를 여쭙는 것은 상식이건만, 그냥 넘기는 바람에 장녀인 집사람이 열이 뻗혔다. “우리 집에선 초복 행사 같은 건 없어예.” 아마 처남댁 집에선 초복이란 행사 자체가 없었던 모양이다. 모르면 처남이라도 언질을 줘야 하건만 똑같았다. 갑자기 팔에 소름이 돋아 딸들에게 시집가서 초복 행사 가볍게 여기다가 아비 어미 욕 먹이지도 말라고 ‘단디’ 교육했다. 이제 삼십여 년이 흘러 장인어른도 돌아가셨고 애들도 삼십 대에 접어들어 각자 결혼해 생활이 바쁜 것 같다. 가족끼리 함께 밥을 먹는 시간도 거의 없는지라 밥상머리 교육인지 뭔지도 해 본 적이 까맣다. 문득 시대가 형식적인 절차나 예절 방식 같은 것이 없어지는 느낌이다. 편한 세상에 살면서 피곤하게 절차 따지는 것이 우습게 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모든 게 대충 대충이다.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전화 한통으로 안부만 물어줘도 될 일인데 이조차 허례허식으로 치부한다면 할 말이 없다. 괜히 복날에 복잡한 식당 찾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집에서 수박이나 시원하게 한 통 잡아야겠다. /노병철 수필가

2025-07-17

상선약수의 교훈

중국의 철학자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삶의 기본이라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누구와 다투지도 않고 억지로 무엇을 하지도 않으려하며 오히려 만물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도가사상의 창시자인 노자는 물은 겸손하며 유연하고 포용력이 있으면서도 강인함이 있다고 풀이했다. 그는 자연 순리에 따르는 삶을 옳은 태도라 가르쳤다. 물은 흔하지만 과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물질이다. 지구상 생물체를 살 수 있게 하는 물질이다. 물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다. 바다는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열을 저장해 기후를 부드럽게 한다. 사람의 인체도 70% 이상이 물이다.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려면 매일 1~5l의 물을 먹어야 탈수를 예방할 수 있다. 사람 몸에 물이 2%가 부족하면 갈증이 오고, 5%가 부족하면 뇌사 상태가 된다고 한다. 물은 컵에 담으면 컵 모양이 되고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그릇 모양이 된다. 물의 유연하고 정직한 기질처럼 사람도 남을 이롭게 하고 겸손하게 사는 것이 노자의 상선약수에 담긴 의미다. 한 나라의 장관은 행정부의 으뜸 관료다.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갖는다. 국민들 앞에 모범이 되고 깨끗해야 함은 물론이다. 국정에 대한 신뢰도 그로부터 시작된다. 이재명 정부의 장관 청문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으나 장관 후보자들의 자질 문제를 두고 청문회가 파행으로 흐르고 시끄럽다. 한 나라의 장관으로서 자질이 있는지 여부는 앞으로 그들이 일해 보면 안다. 후보자들이 만약 장관이 된다면 노자의 상선약수의 마음 정도는 가져야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7-17

‘케이팝 데몬 헌터스’

몇 주 전부터 초등학생인 딸이 “엄마, 진짜 재밌는 만화가 나왔어, 꼭 봐”라고 해 보게 된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요즘 전 세계적 흥행으로 41개국에서 글로벌 영화 부분 1위를 기록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줄여서 ‘케데헌’. ‘케데헌’ OST 6곡이 빌보드 핫 100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하더니, 그중 ‘골든’은 가상 아티스트 최초로 빌보드 1위라는 기록을 썼다. ‘케데헌’은 K-POP 그룹 ‘헌트릭스’가 주인공인 애니메이션이다. 조선시대부터 사람들의 혼을 빼앗아 온 악귀들을 물리쳐 온 헌터들은 아름다운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혼을 지켜 온 히어로들이었다. 헌터들은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대를 이어 이어 왔고 현대에 들어와선 가수의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이번엔 악귀들이 이이제이로 근사한 보이 그룹의 모습으로 나타나, 멋진 외모와 춤, 귀에 쏙쏙 박히는 노래로 사람들의 혼을 빼앗으려 하고, 현재의 헌터스인 헌트릭스가 이를 막으려 싸우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이 영화는 미국 자본과 일본 제작사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 영화지만 케이팝 스타와 한국인, 한국 문화, 거리의 모습을 디테일하게, 이질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리더 루미가 몸이 허해져 삼계탕을 먹으러 간 식당에선 숟가락과 젓가락이 냅킨 위에 놓여 있고, 삼계탕엔 파채가 들어가 있다. 주인공 루미와 진우는 낙산공원 성곽길과 북촌마을에서 만난다. 헌트릭스 멤버들이 콘서트에서 에너지를 쏟기 전 먹는 김밥과 떡볶이, 순대, 컵라면과 같은 분식들도 잘 표현되어 있고, 멤버들이 일상생활에선 수면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까지 한국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인가 싶을 정도로 우리의 실생활과 문화를 잘 묘사했다. 주인공 루미와 진우의 메신저 역할을 해주는 호랑이와 까치는 우리 민화 ‘호작도’에서 따온 모습인데, 이런 흥행을 짐작하지 못했던 제작사에서 굿즈 제작을 하지 않은 탓에 국립중앙박물관 민화 호랑이 굿즈가 엉겁결에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도 있다. 한국의 모습 그대로가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 세계를 열광하게 하는 세상이 되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국의 모습 그대로이기만 해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음이 이번 ‘케데헌’ 열풍으로 증명됐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을 창출하여 세계의 모범이 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한다” 라는 김구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칼로 이긴 것은 이긴 자도 진 자 모두 행복할 수는 없고, 힘으로 이긴 것도 소외되고 짓밟히는 누군가를 남기기 마련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인 미국의 대통령은 요즘 돈으로 다른 나라를 이겨보려 하는 듯한데, 미국의 이 관세 쇄국 정책은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을 경제적으로 힘들게 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통보 받은 관세 시한을 앞두고 고심 중이고,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전 세계 환율과 증시가 출렁거린다. 문화로 이기는 것만이 모두가 행복하게 이기는 길인가 보다. 대한민국이 계속해서 문화로 이기는 나라가 되길 희망한다. /김세라 변호사

2025-07-17

세르반테스 생가 앞에 선 여행자

스페인 마드리드 근교의 도시를 걸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칼라 데 에나레스의 조용한 거리 한복판이었다. 과거의 숨결이 배어 있는 건물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붉은 벽돌과 마당에는 아담한 정원이 있는 가정집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16세기 중산층 집이었다. 하지만 소설 ‘돈키호테’의 저자인 세르반테스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세르반테스가 여기에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틔웠고, 허구 속 진실을 추구하는 문학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벅찼다. 문학의 세계가 물리적 공간이 되어 나를 맞이할 것만 같은 이곳은 다른 어떤 박물관보다도 정적이 깊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세르반테스의 고된 삶의 무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레판토 해전에 참가해서 부상을 입었고, 해적에게 붙들려 5년 동안 알제리에서 포로 생활을 했던 그였다. 숱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돈키호테’를 출간해 인기를 얻었지만, 여전히 생활이 힘들었다. 병으로 사망한 뒤,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를 약 400년이 지난 2014년에 스페인 정부에서 찾았다고 한다. 생가 앞 도로에는 길게 뻗은 의자가 있었다. 의자에는 익숙한 두 동상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로 팔을 벌려 정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다른 이는 팔짱을 낀 채 푸근한 인상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 같은 사내였다. 그들은 바로 세르반테스와 산초 판사였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앉아서 가만히 대화를 들었다. 내 따스한 눈길에 차가운 청동의 어깨 위로 문학이 스미는 듯했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웃음은 머금었지만, 마음속에는 웃음보다 더 오래 머문 질문이 있었다. ‘왜 그는 돈키호테를 써야만 했을까?’ 내가 갖고 있는 책 속의 서문을 보면 ‘기사도 이야기들이 세상과 대중 사이에서 떨치고 있는 세력과 권위를 부수어버리는 것이 목적’이라는 문구가 있다. 현실을 보지 못하고 과거에 사로잡힌 기사를 통해 무분별한 이상주의와 현실도피를 비판했다. 그러나 단지 풍자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세르반테스는 스스로도 가난했고, 투옥되었으며, 군인으로서 전쟁의 상처를 입었다. 그는 돈키호테를 통해 자신의 좌절과 꿈을 투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단지 회한으로 쓰지 않았다. 현실은 고달프지만 인간은 꿈을 꾸고 웃음을 잃지 않기에 아름답다. 그러니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도 어쩌면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리라. 그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었고, 웃음 속에 눈물과 철학을 스며들게 했다. 돈키호테는 꿈을 좇고, 산초 판사는 땅을 딛는다. 이상과 현실, 허구와 사실을 표현한다. 이상은 허무가 아니다. 비록 이룰 수 없더라도, 꿈을 향해 걸어가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고귀하게 만든다. 세르반테스는 그것을 알았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세르반테스는 둘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 둘이 함께 길을 떠나야 비로소 이야기가 완성되고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 앞의 동상도 서로 등을 맞대거나 외면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시 펜을 들었다. 너무 늦었다는 사람들의 말도, 삶의 거센 풍랑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결국 이야기를 끝까지 써냈다. ‘돈키호테’ 1부는 58세였을 때, 2부는 68세가 되던 해에 세상에 나왔다. 그의 생가 박물관 앞에 선 여행자, 나는 문득 한 가지 바람을 품었다. 세르반테스로부터 실패를 견디는 자만이 진짜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배웠으니, 나만의 돈키호테와 나만의 산초, 그리고 나만의 풍차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담히 써내려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었다. 진심이 깃든 수필집 한 귀퉁이에 쓰인 내 문장이 세르반테스처럼 오랫동안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정미영 수필가

2025-07-16

곡강천(曲江川)

곡강천 상류로 가면 깊고 융숭한 풍경을 형성시키는 존재들이 있다 갈대와 억새가 풍성하다 그들은 무성해도 질서는 정연하다 천천히 술렁거리는, 바싹이는 소리가, 귀를 뚫고 마음에 거대한 뿌리를 심는다 어슬렁거리는 느린 자세이지만 확실한 연대(連帶)의 자세를 보여준다 전진(前進)의 의미를 안다 고인돌이 왜 주위에 산재(散在)해 있는지 충비 순량의 절개도 천하삼절길의 의미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부분일 뿐이다 다만 하나의 꼭지점이 된다 변곡(變曲)이라 말하지 마라 그저 곡강의 완곡한 흐름, 그 푸른 깊이를 저물도록 바라보았다 냇물보다 깊고 강처럼 길게 흘러 바다에 이르는 법을 오래 바라보았다 인생은 길게 바라보는 사람의 몫이다 승리든 쟁취든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을 가지기에 그 공허(空虛)를 알지 못한다. 완곡하게 사래질을 하며 물러서는 곡강천을 다잡아 같이 걷는다 민물의 해조음(海潮音)을 듣는다 가당찮지만, 가능한 삶. ……. 갈대나 억새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는 늘 좋다. 황동규 선생의 시 구절,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장면을 보여주며는 나는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읽은 시지만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대학로에서, 출판회관에서, 초상집에서 잠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을 보듯 곡강천을 음미하며 오래 걸었다. 그는 너무 말라 있었고, 나도 늙어 간다. 곡강천만 내내 푸르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7-16

곤혹스러운 질문

우리 한글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고 쉬운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순식간에 글자의 원리를 깨닫고 읽어내는 것을 볼 때이다. 손주들이 글눈을 뜰 때는 주로 간판을 읽었다. 유치원을 오갈 때, 신호등 앞에서 정차해 있으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글자를 가리키며 읽게 하고, 잘못 읽으면 바로잡아 주는 식이었다. 좀더 크자 움직이는 차에서 손자와 손녀는 간판을 읽되 게임을 하곤 한다. 간판의 글자를 거꾸로 읽거나, 받침 없이 읽는 내기를 하고, 그렇게 읽어낸 소리가 우스운지 깔깔댄다. 무의미한 소리가 재미있는지 더 많은 간판이나 글자를 읽어내려 겨룬다. 몇 자 안되는 간판보다 움직이는 버스나 택시의 광고 문구를 먼저 찾아 읽는 게임을 하더니, 요즘엔 현수막의 긴 문장이나 광고 문구를 찾아 읽는 식의 게임으로 발전한 것을 본다. 그럴 때 애들 눈에 포착된 현수막은 대체로 정당 현수막이어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대부분의 광고 현수막은 일정한 장소에 설치된 현수막 게첨대에 있어서 아이들 눈에는 포착이 안되는 것 같았다. 대신 정당 현수막은 대부분 교차로의 사방에 불법적으로 게시되어 있어 정차할 때마다 눈에 잘 띄는 게 문제였다. 지난 4월 선거 때에는 난무하던 그 많은 현수막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현수막의 수와 양뿐 아니라 엄청나게 선정적인 내용엔 기함할 정도였다. 작년 12월부터 상호 비방 현수막이 덕지덕지 붙었었고, 선거 기간엔 무법천지 현수막으로 도배되었다. 선거라서 참아주자 했더니 선거도 끝난 최근엔 또 다른 내용, 서로 다른 정당을 비방하는 현수막이 교차로마다 걸려있어 눈살을 찡그리게 한다. 문제는 그걸 읽는 눈이 저 어리고 해맑은 아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어제 본 현수막, 그 중에서도 많이 순화한 현수막 하나를 예로 들어본다. ‘부적격·무능력·부도덕 장관 임명 반대 국민 눈높이로 송곳 검증하겠습니다.’를 단숨에 읽던 손녀가 어김없이 묻는다. “할머니 부적격은 뭐야? 무능력은 뭐야? 부도덕은 뭐야?” 단어 설명을 예를 들어 대강 해 주니 이해가 되었던지 “그러면 왜 그런 사람을 장관에 임명한대?” 송곳 검증이 아니라 송곳 질문을 해댄다. 이런 해맑은 질문에 현명하고 깔끔하게 대답해 낼 할머니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나는 대강 얼버무리면서 마침 바뀐 신호등에 고마워하며 자동차의 엑셀에 화난 발을 올린다. 정당 현수막은 읍면동에 2개씩만, 어린이보호구역과 소방시설 주면은 설치 금지, 보행자나 차량 운전자의 시야를 가릴 우려 있는 교차로, 횡단보도, 버스정류장엔 몇 미터 이상 높이 설치해야 한다지만 이 법조차도 눈가리고 야옹이다. 디지털 시대, 얼마나 좋은 모바일 매체가 많은가. 이런 시대에 저런 구닥다리 정치광고를 하다니 참으로 한심한 국회요 정당이다. 정치 혐오 일으키지 않는 현명한 국회나 정당은 애당초 글렀나 싶다. 흉물스러운 현수막 게시하는 정당이나 국회의원 낙선운동을 한다면 없어질까. 글눈 뜬 아이들에게서 곤혹스러운 질문을 받고 싶지 않은 이 할미의 심정을 누가 알아주려나. 슬픈 나라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7-16

나는 왜 쉬어도 피곤할까

요즘처럼 과로하지 않아도 분명히 쉬었는데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잠을 자도 개운치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은 단순한 피로를 넘어선 신체 전반의 조절 이상일 수 있다. 한방에서는 이런 상태를 기가 허하다 또는 진액이 부족하다라고 설명을 했고 최근 과학은 부교감신경의 기능이 저하된 것으로 본다. 현대인의 생활은 겉보기에는 편해졌지만 내면의 긴장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스마트폰의 알림, 업무 압박, 대인관계의 부담은 교감신경을 항상 깨어 있게 만드는데 이는 반대로 부교감신경의 회복 시스템을 억제한다. 부교감신경은 우리 몸이 재생하고 회복하며 에너지를 저장하는 데 필수적인 시스템이다. 잠을 자는 동안, 식후에 쉬는 동안, 혹은 명상이나 호흡을 할 때 이 신경이 작동을 하는데 늘 긴장 상태에 놓인 사람의 경우 이 회복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한의학에서는 이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지치는 상태를 정기가 약해진 상태 혹은 진액이 고갈된 상태로 보고 약을 썼다. 특히 여름철 무더위와 과도한 발한, 식사 불균형, 야간 활동의 증가 등은 체내 수분과 기운을 빠르게 소모시키고, 비위장의 소화 및 흡수력 저하로 이어진다. 이럴 때는 충분히 쉬더라도 회복을 위한 에너지가 없기에 피로가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환자한텐 진액을 보충하고 기를 채워주는 처방을 활용한다. 맥문동이나 당귀 숙지황 같은 약재들로 진액과 기를 동시에 보충해준다. 비위가 허약하여 기운이 오르지 않고 항상 나른한 경우에는 인삼과 황기 같은 약재를 사용해 비위를 보하면서 기를 끌어올리는 약을 사용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교감신경이 항진되어 심화가 위로 치솟아 잠을 방해하고 심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경우에는 산조인 복령 등 안신 작용을 가진 약재를 활용해 뇌와 신경계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일상에서는 기계처럼 쉬는 것이 아니라 회복되는 휴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정해진 시간에 자고 일어나기, 식사 후 바로 눕지 않기, 가벼운 산책과 복식호흡, 땀을 너무 많이 흘리지 않도록 체온 조절하기, 단 음식이나 인공 감미료 섭취 줄이기 등이 모두 부교감신경을 되살리는 실질적 행동이다. 명상이 가능하면 명상을 하루에 30분 가량 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다. 명상은 교감신경을 낮추고 부교감 신경을 올리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명상이 힘들다면 걷기나 천천히 달리기 같은 육체 운동을 꾸준히 해도 도움이 된다. 이와 함께 한방치료가 병행된다면, 단순한 휴식보다 훨씬 깊고 근본적인 회복이 가능해진다. 쉬어도 피곤한 사람은 이미 몸의 회복 회로가 마모된 상태다. 단순히 잠자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다. 에너지를 쌓을 수 있는 몸의 조건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한의학 치료가 가장 빠른 방법일 수 있디. 한의학의 처방들은 수천 년간 이런 쪽의 회복에 효과적인 것이 검증되어 왔다. 기혈진액의 밸런스를 조절하고 자율신경의 균형을 맞춰주는 방향으로 치료한다. 피로는 단순의지력 부족의 문제로 보지 말고 몸이 도와달라고 보내는 구조신호로 보고 적극적인 치료와 휴식으로 부교감신경의 회복 능력을 올려 보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7-16

여당에 주목하지만, 야당은 한참 멀었다

정당은 정치적 결사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적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권력 쟁탈전에 머물지 않는다.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 비전의 경합이며, 더 나은 나라 운영을 위한 집권 능력의 시험대다. 유권자는 이 경합에서 신뢰할 만한 손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다. 그렇게 정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다. 위임받은 정권을 경영할 위치에 서면 여당이 되고, 위임에 실패한 정당은 야당이 된다. 여당에게는 국정을 이끌 책임이 있고, 야당은 비판과 견제와 함께 대안을 제시하고 차기 정권을 준비해야 한다. 국민의 바람은 한결같다. 정권이 누구 손에 있든 국민의 일상을 평온하게 돌보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가. 정치 현실은 여전히 허술하고, 무엇보다 야당의 모습이 안타깝다. 여당이 조기 대선을 통해 급하게 들어선 정권인 만큼, 정책 라인업이나 장관 후보 선임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틈도 보인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독립적이긴 하지만 권한은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는 책임성을 동반해야 한다. 지금 여당은 국민을 설득하거나 불안을 달래기보다는, 수적 우위로 밀어붙이려는 인상을 준다. 국민의 기대만큼 잘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더 걱정스러운 쪽은 야당이다. 여당이 흔들릴수록 야당은 국민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대안세력의 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야당에게 그런 책임 의식이나 준비가 보이지 않는다. 비난은 있으나 대안이 없고 감정적인 대응은 있으나 체계적인 전략은 없다. 여당의 국정운영이 다소 일방적이라면, 야당의 대응은 지나치게 산만하다. 민주정치에서 야당은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다. 국가를 운영할 능력과 도덕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정권을 다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비판할 줄 아는 야당을 넘어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 야당이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바라는 야당의 모습이다. 여당이 국정을 잘못 이끌 경우에 공백을 메울 신뢰할 만한 야당이 없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여당의 실수보다 야당의 무능이 더 무서운 이유다. 야당에게는 정권 탈환을 위한 비전도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준비도 국민에게 다가서는 언어도 부족해 보인다. 여당의 정책에 반사적으로 반대할 뿐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여당의 무능함이 야당의 존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당은 여당보다 더 성실하고, 더 준비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나서야 한다. 나라 살림은 여당이 하지만, 살림이 제대로 되는지 살피고 방향을 잡는 데는 야당의 몫이 크다. 여당이 밀어붙인다면, 야당은 정제된 언어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반사적인 대응에 그치고 국민의 고통에 둔감하며 정권교체만을 외치는 현수막 구호로는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기 어렵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있다. 정권교체도 집권 경쟁도 그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여당에 기대를 걸지만, 야당이 이렇게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나라의 더 큰 문제다. 국민은 기억한다. 어느 당이 권력을 잡았는가보다, 누가 우리의 삶을 유능하게 책임질 것인지를. /장규열 고문

2025-07-16

국민은 강선우·이진숙이 부끄럽다

상식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질문 해보자. 당신은 집 변기가 고장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하는가? 그게 조언이 필요한 문제인가? 세칭 한국과 미국 명문대를 나와 국회의원을 거쳐 한 나라 장관을 하겠다는 사람이 ‘깨우쳐 줘 도움을 준다’는 조언이란 단어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의정 활동을 돕는 보좌진에게 입법에 관한 조언이 아니라, 변기 수리에 대한 노하우를 조언해 달라 한 격이다. 변기가 망가졌다면 수리 업체에 전화하면 된다. 전화기 버튼 누를 손가락이 있다면 조언 없이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다. 또 하나. 당신은 지난밤 먹고 남은 닭고기를 쓰레기와 함께 챙겨 내려와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먹는가?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실소했다. 변명에는 설득력이 담겨야 한다. 그래야 수긍할 수 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이번엔 이 나라 교사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자신이 공격 받으면 공격의 화살을 제자에게 돌리라고 하는가? 그런 방식으로 곤경에서 벗어나는 자를 ‘스승’이라 부를 수 있을까? 교육부장관 후보자 이진숙은 논문 표절 의혹이 거세지자 ‘실질적 저자는 작성 기여도가 큰 본인’이라 해명했다. 이는 ‘표절한 사람은 내가 아닌 제자’라는 이야기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2차대전 때 유대인을 가르치던 교사 한 명은 울부짖는 아이들을 차마 버리지 못해 함께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들어갔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고, 죽음을 피해갈 수 있었음에도. 지금껏 ‘스승’이라 불렸을 이진숙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진보 진영에서조차 두 장관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7-16

내 마음의 에어컨

햇살이 나를 누르고 있다. 7월의 태양은 사람을 말리는 것이 아니라 눌러 짓누른다. 그늘에 있어도 더웠고, 냉방이 잘 된 실내에 들어가도 더운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냉기가 피부를 덮어도 마음속까지 닿지 않으면 더위는 여전히 내 안에서 끓는다. 바쁜 일상 속에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작년에 보고 올해는 처음이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식당 창가에 앉자 웃음소리 사이로 철썩이는 물빛이 가볍게 스며들었다. 반가움은 말보다 눈빛으로 먼저 전해졌고 잔잔한 바다와 뜨거운 햇살, 시원한 바람이 그 순간을 환하게 감싸 주었다. 식사가 나왔다. 접시의 색감과 감바스의 마늘 향이 테이블을 감쌌고 카프레제의 토마토는 싱그럽게 빛났다. 여름은 성난 소처럼 쨍쨍거렸지만 바다는 여전히 반짝였다. 수박 주스 잔에는 투명한 얼음이 천천히 녹고 우리의 마음도 청량함으로 채워졌다. 음식을 흘리며 먹어도, 우걱우걱 씹어 먹어도, 새우 껍질을 마구 까도 흠이 두렵지 않은 편안함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목적은 없었다. 그저 어디라도, 조금이라도 더 시원한 곳을 찾아 나섰다. 바닷바람을 기대하면서. 몽돌 해변에 도착하자 바람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바다는 거짓말처럼 조용했고 바람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대듯 우리를 향해 한결같이 불어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몽돌 위에 누웠다. 각자의 온기와 각자의 무거움을 품은 채. 바닷가에 3명이 나란히 누워 “우리 가을에는 여행을 갈까?” “우리 팔찌 하나 맞출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깔깔대며 웃었다. 그러더니 한 명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물새의 깊은 속을 항구는 알까.’ 우리의 노래는 떼창으로 이어졌고 옛날 유행가에서 찬송가까지 이어졌다. 노래는 마치 얼음 조각처럼 하나하나 내 안으로 들어왔다. 내 마음속에 있던 열기, 조급함, 서운함, 어쩌면 말 못한 외로움까지 서서히 녹였다. 바깥은 에어컨으로 시원해도 갱년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서 탈진할 때가 있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알았다. 내기 진짜로 필요로 했던 것은 낮은 온도의 공기가 아니라 ‘함께 있음’이라는 시원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방식으로 더위를 피하려고 애쓴다. 강한 냉방, 차가운 음료, 그늘, 물놀이. 하지만 정작 식혀야 하는 것은 마음이다. 짜증, 서운함, 조바심, 염려 같은 마음의 열은 기계로는 식지를 않는다. 그것은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독이는 ‘존재의 온기’로만 가능하다. 결국 우리를 진정으로 식히는 것은 찬바람이 아니라 묵묵히 옆에 앉아주는 누군가의 숨결이다. 마음을 식히는 바람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곁에 머문 존재가 조용히 건네는 온기에서 비로소 분다. 온도를 낮추는 것은 기계지만 온도를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날의 노래와 바람, 친구들과의 떼창, 그리고 몽돌 위에 누운 시간이 나에겐 ‘마음의 에어컨’이었다. 세상이 너무 뜨거워서 달아오른 나를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한 냉기. 사람이 사람을 식혀주는 건 공기의 냉기보다 더 오랜 지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가끔 너무 더운 말들을 내뱉고, 너무 뜨거운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마음을 식혀줄 무언가를 갖고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그게 바다일 수도, 노래일 수도, 친구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다. 혹은 무심코 들은 “괜찮아”라는 말일 수도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어떤 순간에 마음의 온도를 낮출 수 있었는지를.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는 에어컨이 되어본 적은 있는지를. 여름은 계속된다. 기온도, 뉴스도, 삶도 뜨겁다. 몽돌 위에서 불렀던 노래처럼 아무 이유도 조건도 없이 곁에서 있어 주는 존재 하나가 마음의 온도를 내릴 수 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에어컨을 찾아내고 누군가의 에어컨이 되어주는 일, 그게 여름을 견디는 우리의 방식일지 모른다. /김경아 작가

2025-07-15

역사 속 세르비아 민족정신대세르비아주의 탄생

세르비아인은 부족장을 ‘추판(Župan)’이라고 불렀다. 9세기 중엽 추판 블라스티미르는 자신이 견고하게 다져놓은 나라의 안정을 비잔티움제국과 친교를 통해 획득하려고 했다. 비잔티움제국을 괴롭히던 제1불가리아 제국은 멸망한 틈을 타 세르비아는 12세기에 들어와 내부적으로 큰 변화를 맞는다. 지금의 몬테네그로 수도 포도고리차에서 세르비아 부족 중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네마냐가 세르비아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다. 그를 추판 앞에 위대함을 붙여 ‘위대한 추판’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로마 교황에게 일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며 끊임없이 추인을 시도했다. 나라 안정과 발전을 위해 세르비아인 대부분이 믿고 있던 정교를 중심으로 단합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서기 476년 서쪽 로마가 오도아케르에게 함락당한 이후 기독교권을 이용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권력 중심에 있었다. 그에 의해 왕권을 인정받은 스테판 네마니치는 날개를 단 듯했다. 기실 교황청에 뇌물을 바치고 겨우 추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마와 경쟁 관계였던 비잔티움제국은 12년 전 성지탈환을 빙자한 4차 십자군에 의해(메메트 2세 때보다 더한) 치욕적인 약탈을 당한 후, 프랑크인과 베네치아인에 의해 정략적으로 세운 라틴 황제 시대였다. 이때를 기회로 스테판 동생 사바 네마니치가 전면에 나섰다. 1219년 그는 비잔티움으로 달려가 왕국의 백성 모두 비잔티움제국 영향 아래 동방정교를 믿음으로 가진 하나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동방정교 독립교구로 승인 받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르비아 초대 대주교에 임명된다. 네마냐 왕조가 생산되고 100여 년이 흐른 후 위대한 세르비아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의 상징이자, 세르비아 역사상 최전성기를 구가한 스테판 듀산이 등장한다. 그는 세르비아 역사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군주, 세르비아 최초 황제로 등극하는 영웅이다. 국경을 마주한 불가리아제국도 눈치를 보며 숨을 죽여야 했다. 특히 비틀거리는 비잔티움제국 영토를 야금야금 내 것으로 만들었다. 발칸반도 전역, 오늘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까지 장악해 제국 영역에 포함시켰다. 1331년에는 발칸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자로 거듭났다. 그래서 후세 역사가들은 스테판 듀산 앞에 ‘강자(强者)’라는 별칭을 붙여 이미지를 상승시켰다. 그가 승승장구한 데에는 지리적 이점도 작용했다. 동․서로마 사이에서 교역로를 장악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를 이용한 막강 용병으로 영토 내 반란을 진압하면서 북쪽 마케도니아 전역을 손에 넣는다. 스테판 듀산 스스로 ‘세르비아와 그리스의 왕’이라 부르며 자신이 통치하는 모든 영역에 세르비아 정교회 확산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비잔티움제국은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제국은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하필이면 호시탐탐 발칸반도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트루크제국에게 SOS를 타전하고 말았다. 오스만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샘이다. 결국 이 잘못된 판단이 세르비아 네마냐 왕조 멸망은 물론 천년을 넘어 이어오던 비잔티움제국 종말을 앞당겼으며, 더 길게 보면 발칸반도 이슬람화의 초석으로 작용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렸던 스테판 듀산, 1355년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에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오던 도중 급작스레 죽어버리고 만다. 세르비아의 걸출한 영웅이 쓰러지자 곧바로 제국은 몰락의 기운이 요동쳤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스테판우로스 앞에 네나먀 왕조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로 ‘약자(弱者)’라는 별칭을 붙여 ‘약자 우로스 5세’라며 세르비아인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비잔티움제국은 자신들이 불러들인 오스만트루크제국이 압박을 가해오자 급기야 로마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를 비롯해, 불가리아, 보스니아, 헝가리 등 십자군이 꾸려지면서 기독교 연합군이 결성된다. 그러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오스만트루크제국 적수가 되지 못했다. 1363년과 1371년 두 번에 걸친 마리짜강 전투에서 우로스를 비롯해 그 형제들까지 전사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르비아 귀족들은 듀산의 후손 라자르를 왕으로 옹립하고, 오스만제국에게 대항하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기력이 다한 후라 때는 늦었다. 코소보에서 오스만과의 한 판 대결은 결국 세르비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오스만제국과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검은새의 들녘’ 코소보전투다. 역사를 거스르면 세르비아인 가슴에 피로 새겨진 정기와도 같은 땅 코소보에 알바니아인이 정착해 살면서 나라를 세운 작금의 현실이 이들로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을 법하다. ‘지리란 역사가 그려 놓은 화판’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5-07-15

사회주의 속을 알면 길이 보인다

우리 나라는 중국을 얘기하지 않고 경제와 무역을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1992년 8월 24일 국교를 수립하고 빠른 속도로 무역 규모가 커지고 있다. 수출은 이미 미국을 넘어섰고, 수입은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되고, 우리네 밥상까지 침투해 있다. 하지만 중국에 투자를 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을 알려면 사회주의 사상과 통치체제, 기업과의 연관성을 알 필요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사회주의 사상과 통치시스템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현실에 맞게 수정된 중국식 사회주의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체계는 국가 운영뿐만 아니라 기업 전략과 혁신시스템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다. 혁신 관점에서 보면, 공산당의 영도, 인민 중심, 공공 이익 우선, 계획 경제 요소와 시장 경제 요소의 병행 운영 등을 볼 수 있다. 최근 시진핑 신시대의 국가 전략 주요 내용은 첫째, 국가-시장 통합 운영이다. 시장원리에 따라 자원 배분의 결정적 역할을 하되 정부가 언제든 전략적 분야를 통제한다. 이것을 인지 못하고 자본주의처럼 시장원리에만 인식한 기업들이 투자에 나섰고, 일순간 어떤 명분의 공산당 통제에 설비조차 그대로 둔 채 야밤 도주 철수하는 등 낭패를 보았다. 둘째, 과학기술 자립자강이다. 서방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혁신 역량 구축을 수십 년 전부터 선진 국가에 유학을 보내는 등 인재 역량을 확보해 왔다. 셋째, 다 같이 부유한 나라이다. 지역, 업종별 격차 해소와 중산층 확대를 위한 사회 안정을 추구한다. 이러한 것들의 성공 여부는 정부의 정책 일관성과 지속성, 그리고 인민들의 신뢰성에 있다. ‘마차 타고 로켓을 쏘는 나라’라는 것은 중국을 상징하는 말이다. ‘자립 자강’ ’혁신형 국가건설‘, ’제조 25‘ 등의 국가 전략은 기업 혁신 전략과 연계된다. AI, 바이오, 항공우주, 양자 과학 등 미래를 위한 전략 산업에 막강한 투자를 하고 국유기업이 선두 역할을 한다. 중국 기업의 혁신은 시장 주도와 국가 주도의 혼합형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국유기업 혁신은 전략 산업에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고 R&D 예산과 인재를 국가가 지원하는 체제이다. 민간기업 혁신은 시장 중심으로 민간이 주도하되 정부가 규제 및 자금, 세제 인센티브로 조정한다. 성공한 기업은 통신의 화웨이, 전기차의 BYD, 알리바바 등이 있다. 즉 국가 정책과 국유 기업의 월드 클래스 수준들이 연이어 창성되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1996년 중국 북경과 상해를 처음 갔을 때와 2008년 P사의 해외법인 청도 사업장을 지도하기 위해 갔을 때 기업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보통 사회주의 사상은 스스로 하는 주인 정신보다 시켜서 하는 마인드로 인식하고 있다. 청도 사업장은 혁신이 도입되고 스스로 개선하는 모습을 보고, 사회주의 사상에도 혁신 활동을 통해 마인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국가의 기업 지원체계와 혁신 마인드까지 장착하니 중국 사회주의 경제적 부상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혁신은 생각과 문화를 바꾼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7-15

울릉도에서 펼쳐진 문화예술 이벤트

에메랄드빛 바다로 둘러싸인 신비의 섬 울릉도에서 깃발 작품들이 일제히 나부꼈다. 하얀 바탕의 천과 종이에 시(詩)를 품거나 묵향을 머금기도 하고, 울릉도·독도의 자연경관을 담은 작품 사진이 깃발로 만들어져 울릉군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의 손에 쥐어져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나풀거리곤 했다. 간혹 독도를 가거나 다녀온 관광객들의 손에 들려진 손태극기와 깃발 작품이 어우러져 이색적인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은 지난 주 울릉군 도동항 일원에서 열린 2025 경북문화재단 예술거점지원사업의 일환으로 포항꿈틀로사회적협동조합에서 기획·주관한 ‘명불허_어전’ 2회차 체험형 테마 행사의 일부이다. 여기에 참여한 단체는 포항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포항서예가협회를 비롯 아라동화창작·사진모임포스·퐝프렌즈 등 4개 팀으로, 각 단체별 특색을 살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컨셉으로 이벤트를 진행했다. 사진모임포스에서는 울릉도와 독도의 자연경관을 사진작가가 촬영한 풍경사진 작품을 현수막천에 실사출력, 깃발형태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나눠주면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국토와 독도 사랑을 일깨워줬다. 또한 아라동화창작과 퐝프렌즈에서는 즉석에서 즐길 수 있는 간단한 체험도구를 통해 사전에 3D로 프린팅된 오방색 작은 모형배 위에 시(詩) 구절을 깃발 형태로 메모지처럼 꽂아 배부하는 활동을 진행하면서 진수식(進水式)의 의미를 암시하기도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포항서예가협회 작가들은 정사각·직사각형으로 디자인된 현수막원단에 울릉도 주민 또는 관광객들이 신청한 희망·염원의 글귀를 한글·한문·캘리그라피 등의 서체로 즉석에서 깃발에 휘호해 나눠주는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일련의 퍼포먼스는 울릉의 바닷가에서 진수식의 의미를 떠올리며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깃발을 만들고, 그 깃발에 이야기를 담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깃발로 이어지고 모여서 또 하나의 진수식이 되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바다를 삶터로 삼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어촌의 전설이나 유래담을 문화예술적인 접목으로 재현함으로써 다소의 안도와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국토의 막내’같은 문화의 변방 울릉도에서 어부들의 바람인 진수식을 모티프로 예술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 시도가 신선하고 고무적이다. 뱃길이 멀고 바람과 파고가 외세만큼이나 심한 독도는 민족의 자존심이자 울릉도 사람들에게는 앞마당이고 텃밭일 것이다. 어로의 곤고함을 뱃노래로 달래고 풍어와 만선(滿船)의 염원을 깃발로 나부끼게 하여 삶의 파도를 헤쳐가는 어부들에게 있어서의 진수식은, 간절한 마음이자 기원이며 소망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라져가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보존, 계승으로 대안을 강구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이처럼 깃발작품 퍼포먼스 같은 ‘찾아가는 문화 이벤트’를 비롯, 재작년 가을에 도동항에서 열린 ‘울릉도 독도 해녀문화제’같은 문화행사가 주기적으로 열리게 된다면 문화예술의 기반이 취약한 울릉주민들에게 문화생활 향유와 정서순화에 도움을 줄 것이다. 울릉도만의 독창적이고 체계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의 기획·운영으로 천혜의 관광자원과 더불어 문화예술이 꽃피어나길 기대해본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7-15

그리운 금강산

국민가곡으로 잘 알려진 ‘그리운 금강산’은 1961년 처음 만들어진 곡이다. 작사자 한상억은 은행원이자 시인이었고, 작곡가 최영섭은 음악 교사였다. 두 사람은 강원도가 고향인 가까운 사이라 한다. 이 가곡은 국민가곡으로 불릴 만큼 국내서도 유명했지만 세계적으로 50여명의 성악가들이 음반에 노래를 실을 정도로 잘 알려진 노래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음반 녹음을 했다. 금강산은 북한의 강원도에 있는 명산이다.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나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던 산이다. 중국 북송의 시인이자 학자인 소동파는 “고려에 태어나 한번 만이라도 금강산을 보고싶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태종은 명나라 사신이 오면 금강산 타령을 하는 바람에 귀찮아 했다는 얘기도 있다.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의 높이는 1638m다. 1000m 이상 봉우리가 무려 60여 개에 달하고, 크고 작은 봉우리가 하도 많아 우리 선조들은 일만이천봉이라 불렀다. 특수한 기후와 지리적 조건으로 무려 1100여 종의 식물과 300여종의 동물이 서식한다. 전란 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거의 없지만 기록에 나오는 사찰과 암자만 180여 개에 달했다. 계절 때마다 바뀌는 모습이 변화무쌍하여 문헌에 등장하는 별칭이 9개다. 대표적 이름이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다. 금강산이 북한의 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금강산의 독특한 지형과 경관, 불교문화의 성지 등이 유네스코 위원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수수만년 그리운 산” 언제쯤 가보려나. /우정구(논설위원)

2025-07-15

동네북 신세가 된 ‘TK 정치’

6·3 대선 이후 대구·경북(TK)이 정치 사회적으로 ‘동네북’ 신세가 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야에서 나오는 ‘찐윤 세도정치’나 ‘언더찐윤’ 같은 생소하고 비아냥대는 정치 단어들이 대부분 TK사회를 겨냥하고 있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지난주 당 혁신위원장을 사임하면서 당내에 ‘찐윤 세도정치’ 카르텔이 있다고 했다. 세도정치는 조선후기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며 온갖 전횡을 저지른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처럼 찐윤 그룹이 당내 인사를 비롯한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폭로성 발언이다. 누가 들어도 TK 출신이 주축인 당 지도부를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국민의힘 김근식 서울 송파병 당협위원장은 ‘찐윤’의 구성원에 대해 “윤석열 완장 차고 관저 가서 술 얻어먹고 호가호위하던 국회의원”이라고 했다. 대선 직전 국민의힘에서 민주당으로 당적을 바꾼 김상욱 의원은 최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찐윤’과는 또 다른 ‘언더찐윤’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언더찐윤’이 누구를 지칭하느냐는 질문에는 “대구·경북, 부산·경남, 울산, 강원에 있는 의원이다. 20∼30명쯤 된다. 언론에 나서지 않고 수면 아래에서 조용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김 의원은 최근 여기에 포함되는 일부 중진의원 실명을 거론하면서, “이들은 늘 말없이 무리를 이루며 무슨 사태가 벌어지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변화를 거부하고 이익을 챙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권성동·이철규·윤상현·나경원 의원과 같은 ‘친윤’ 의원과는 행동에 차이가 있다고 했다. 두 의원의 발언이 주관적이고 과장이 섞인 부분이 있지만, 정계에서는 ‘언더찐윤’의 존재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지낸 김성태 전 의원 같은 경우에는 “김상욱 의원 말이 맞다”고 공개적으로 동의하기도 했다. 최근 발표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힘 지지율이 급전직하하고 있다. 10%대로 떨어진 경우도 종종 나온다. 지난 11일 공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보면, 정당 지지도에서 민주당은 43%, 국민의힘은 19%를 기록했다. 갤럽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20%대 아래로 떨어진 것은 2020년 11월 17~19일 이뤄진 조사 이후 처음이다. 놀라운 것은 TK지역에서도 국민의힘 지지율(27%)이 민주당(34%)에 역전당했다는 사실이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참조) 이러한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힘에 대한 TK지역 민심이 급속도로 이반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나는 TK지역민의 이러한 정치성향 변화가 사회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인 신호로 보고 있다. 외부에서는 아직도 이 지역이 국민의힘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자들만 사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TK지역민들도 이제 특정 정당에 대한 ‘묻지마 지지’가 지역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터득해 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찐윤’ 카르텔로 지목된 TK의원들은 이 지역 민심을 잘 분석해보길 바란다. 다음 총선이 아직 3년이나 남았다며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심충택 정치에디터 겸 논설위원

2025-07-15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 이제 정부가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됐다’…무엇보다 안전이 최우선 아닌가

무안공항의 안타까운 참사는 울릉공항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울릉도 미래 교통망의 핵심인 울릉공항은 안전할까였다. 그전부터 울릉공항 활주로에 대한 논란이 있었기에 군민들은 무안공항 사고를 바라보면서 더욱 의구심을 가졌다. 한번 심도 있게 따져봐야 한다는 의견은 어느새 공사 중인 활주로를 연장해야 안전하다는 방향으로 흘렀고, 결국 울릉 주민 대표들로 구성된 ‘울릉공항 활주로 연장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군민의 이름으로 활주로 연장의 필요성이 공식화됐다. 울릉공항은 당초 50인승 소형 항공기 기준으로 활주로가 설계됐었다. 활주로 길이는 1,200m다. 이는 활주로 시설 등급 중 최저 수준에 해당한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소형항공기의 기준을 기존의 50인승에서 80인승으로 상향 조정했다. 울릉공항의 취항 기종 역시 80인승 항공기로 변경됐다. 비행기를 띄우는 회사 입장에선 50인승 보다는 80인승을 구매해야 사업성이 나온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또 분명 그렇게 할 것이다. 이미 향후 주력 기종으로 80인승 항공기가 검토, 고려되고 있다. 이 비행기는 수송력, 경제성, 비용 대비 효율성, 그리고 안전 운항 측면에서 모두 적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제는 현재의 1,200M 활주로 여건으로는 이 기종의 안정적 운항이 어렵다는 점이다. 항공기 제작사들은 이에 대해 현재 공사 중인 활주로로도 80인승 항공기의 운항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울릉도의 특이한 기상 여건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분석이라는 게 지역 주민들의 입장이다. 실제로 현 활주로 조건에서 80인승 항공기를 운항하려면 이착륙 중량을 대폭 줄일수 밖에 없다. 이 경우 탑승 인원과 화물 적재량 감소로 이어져 경제성 부분에서 기대 이하의 차질은 불가피하다.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울릉도에서 최대 순간 풍속이 25노트 이상을 기록한 날은 연평균 138일에 달한다. 풍속이 이 수준을 넘으면 80인승 항공기의 결항률과 사고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도 연평균 강수일수는 144일, 강수량은 1,538mm에 이르며, 겨울철에는 평균 2m 이상의 적설량을 기록하는 등 전국에서 손꼽히는 기상 악조건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울릉도 주민들은 활주로와 종단 안전구역의 연장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활주로 연장 요구가 ‘무조건적인 안전성 강조’에만 치우쳐 타당성과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한다. 또 활주로 연장에 1조여 원이 소요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추산만 무성하게 나돌고 있다. 그러나 울릉군민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그저 황당무계하다. 지금까지 활주로 연장에 대한 구체적인 비용 산정이나 타당성 조사가 진행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울릉공항 완공까지는 여전히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이라도 전문기관의 용역을 통해 연장 시 추가 비용, 현재 활주로의 안전성, 기상 리스크 등을 면밀히 분석하고 과학적·체계적으로 접근했으면 한다. 이런 요구는 활주로 연장이 그리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측도 상당하기에 더욱 필요하다. 가두봉을 기준으로 서면 통구미 방향으로 200~300m 연장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구간은 수심이 현재 활주로 공사 구간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기술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여서 정부가 한 번 들여다봤으면 한다. 이제는 단순한 감정적 주장이나 막연한 안전성 강조를 넘어, 비용 대비 안전성, 경제성 등 다각적인 분석을 토대로 합리적이고 정당하게 활주로 연장을 요구할 때다. 울릉도의 미래 교통망은 과학적 데이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5-07-15

깎기, 뽑기

출퇴근길에 학교 담장 곁을 걸어서 오간다. 10년째다. 중간이 대문이고 양쪽으로 담장이 있다. 담장 밑과 보도블록 사이엔 폭이 한 뼘쯤 되는 모래흙 부분이 있어, 풀들이 화단 삼아 잘도 살았다. 으레 보던 풀들이라 재작년 3월까지는 관심 없이 지나다녔다. 그해 4월 초 어느 아침, 북쪽 담장 아래서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았다. 마치 그 옛날 젊은 엄마를 만난 듯, 반가운 존재가 보였기 때문이다. “반가워! 도시 대로 가에서 너를 다 만나다니, 넌 내 ‘행운’이야”라며 이름 지어주고, 첫인사를 나누었다. 사진도 찍었다. ‘행운’ 앞에 잠깐 머무는 동안, 내 맛봉오리와 후각세포는 어느새 그 옛날 응달에 잔설이 하얗던 이른 봄 고향 아침 밥상에 갔다. 밥상엔 젊은 엄마가 ‘행운’으로 끓인 국이 올랐다. 행운의 풋 내음, 풋 맛이 단박에 허기를 채워나갔다. 엄마는 어디서 뜯었는지, 해마다 이른 봄이면 꼭 그 국을 밥상에 올렸다. 높바람에 겨우내 얼었던 몸과 마음을 국은 녹여내고도 남았다. ‘행운’의 고향 이름은 ‘구시디’다. 논밭 두렁, 도랑 가, 길 가 등 모래 쌓인 곳에 잘 자라는 구시디는 언제나 진초록 깔끔이다. 줄기와 잎이 연약하고 작아 다른 풀들이 자라기 전 이른 봄에 잘 보인다. 구시디의 표준말은 ‘벼룩이자리’다. ‘모래별꽃’이란 이름도 있다. 어린잎은 일종의 세제로서 소독에 쓰기도 하고, 데쳐서 나물로도 먹고, ‘구시디국’도 끓인다. “아, 어찌 이런 일이!….” 학교 담장이 가까워지자 저절로 나온 말이다. 작년 늦봄 한 출근길에서다. ‘행운’이 벗들과 어우렁더우렁 살던 담장 아래. 풀들은 다 없어지고, 사막 모습만 휑하게 남았지 않은가. 풀들이 자라나고, 꽃 피우며, 열매 맺는 모습을 바라보던 행복도 뽑혀버린 풀들과 함께 깡그리 뽑힌 마음이다. 올핸 초여름에 벌써 두 번째 뽑기를 당했다. 황량, 쓸쓸하다. 왜, 풀들을 깎지 않고 뽑아냈을까. 환경미화에 별난 교장이나, 담당자가 왔나보다 하면서도, 상실감과 애틋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날, 고향에서는 김맬 때 외는 풀을 안 뽑았다. 벌초만 했다. 냉이같이 뿌리를 먹는 나물만 캐지 다른 나물, 꼴, 사료, 거름 용 풀들은 뜯거나 깎거나 베었다. 풀은 뽑기‧캐기보다, 뜯기‧깎기‧베기를 하는 게 맞다. 고마운 생명을 살리며, 자원으로 재이용도 해야 하니까 말이다. 풀 뽑기를 한 담당의 생명경시 마음이 죄 없는 ‘행운과 그 벗들’은 물론, 내 행복도 그만 유명을 달리하게 하고 말았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깎기’보다 ‘뽑기’에 얼빠졌다 싶다. 해방 후 80년을 심고, 깎고, 가꾸어 온 것들을 뽑아버리는 집권세력의 행태가 곳곳에 번진다. 기존 제도를 ‘깎기’ 곧, 다듬고 가꾸어나갈 생각은 않고 ‘뽑아 없앨 궁리’의 먹구름만 피워대니 말이다. 자기편 욕망 충족이 목적인 게 뻔한 것들을 ‘국민의 뜻’이라고 호도하면서…. 뽑거나 캐기보다 뜯거나 깎기 중심으로 살아온 게 우리 사회다. 정치권은 부디, 이를 버리지 말고 이어나가 깎고, 다듬어 복된 나라로 가꾸어주기를 두 손 모아 비는 마음 간절하다. /강길수 수필가

2025-07-14

99 vs 1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99 마리 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마태)’ 예수가 이토록 기뻐한 한 마리 양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 홀로 가는 한 마리 양이 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이라고 이름 붙여진. 남겨진 99마리는 1마리 양이 무엇 때문에 길을 잃었는지, 왜 홀로 가는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다만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99 마리는, 무리 속에서 안전하게 머물면서 길 잃은 한 마리 양의 위험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99마리는 한 마리 양을 반드시 찾아내어 무리 속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입을 모아 외친다. 그리고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그 양은, 겉 모습은 같았으나, 무리를 떠나기 전의 그 양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길을 잃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길을 잃어본 사람만이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길을 잃어야 한다, 진리와 참된 세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은 진리 앞에서 길을 잃어야 한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무리에서 이탈된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로만 보아서는 양의 이야기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의 이야기는 세렝게티 초원 영양무리에 관한 장면이 아니다. 불가에서의 출가는, ’구도에의 길에 나서는 시작‘을 의미한다. 처와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선 싯다르타가 구도행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출가는 단지 가출에 불과했을 것이다.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 양이 무리를 떠난 이유를 알아야 한다. 1 마리는 99 마리가 머무는 ’그 무리‘ 를 염려했으며, 99마리가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는 ’그 길‘ 을 의심했다. 99마리가 든든한 배를 두드리며 달콤한 잠이 든 그 순간에도 1 마리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너고, 열사의 사막을 지나, 험준한 설산을 넘었다. 99마리와 1마리가 만났을 때, 99마리는, ’드디어 어린 양을 찾았다‘라고 기뻐 외쳤으나, 1마리는, ‘너희들이 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찾아 왔다’ 라고 조용히 말했다. 길 잃은 양은 집단의 안일함을 거부한 의식의 개별자이다. 방황 속에서 진리의 음성을 듣고자 길을 떠났고, 진리를 묻기 위해 길을 잃었다. 구도란 길 잃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길을 잃어야 비로소 진실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 광야를 달리는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수타니파타)’ 그렇다. 진리의 세계로 가는 길은 고독하고 멀다. 그 길은 동행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도 예수도, ‘홀로 가라’ ‘방랑자가 되라(도마)’고 했다. 삶을 치열하게 사는 사람은, 무소의 뿔처럼 고독하며, 길 잃은 양처럼 절박하다. 예수는 진리의 샘을 찾아 나선 한 마리 양을 찬양했다, 존재가 자기 자신을 묻기 시작하는 순간, 99마리의 울타리 안에 안주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네 삶 속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길을 잃어보자. 고요히 정좌하여 평온하게 호흡하면서 내가 속한 이 집이, 가는 길이 온전한지를 들여다보자. 당신도 언젠가는 부처와 예수처럼 길 잃은 한 마리 양이 되어 온전하게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공봉학 변호사

2025-07-14

중도(中道)에 서는 것

‘딱지’ 붙이기가 성행하는 세상이다. 자기 생각과 다른 사람에게 가장 듣기 싫을 법한 ‘별명’을 붙여준다. 세상은 속스러워져서 정권이나 언론, 정당이나 하던 짓을 일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프레임’ 씌우기도 ‘동물농장’의 ‘나폴레옹’처럼 ‘영특하게도’ 알아차려 잘도 활용한다. 한번 ‘프레임’을 상대방에게 씌우면, 일단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갇혀 버리면 여간해서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프레임’ 정치가 횡행한 지 오래, 이제 이 ‘정치’는 역사학자들의 것이 되고 문학인의 것이 되었다. 최근에 접한 신조어 ‘프레임’ 중에 ‘틀포티’라는 말이 있다. 챗GPT에 물어보면, ‘틀니를 낀 40대’의 준말이라 한다. ‘틀’은 틀니에서 왔고, ‘포티’는 영어 ‘forty’에서 왔다. 원래 ‘뜰딱’이라는, 노년층 상대의 끔찍한 ‘프레임어’가 있었던 것을, 이제는 ‘40대’에 적용한 것이다. 구시대적 사고방식에 ‘찌들어 있다’는 뜻을 갖는다. ‘유사역사학’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프레임 씌우기다. ‘pseudo-history’란 원래 ‘학문적 기준과 검증 절차를 따르지 않고 편견, 상상, 음모론 등에 기반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주장이나 체계’다. 좋은 의미를 가질 리 없다. 그러니 이 말은 다른 사람이나 입장을 향해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일단 뒤집어 씌우면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불명예, ‘독’이 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자신이 당할 수도 있음은 생각지 않는다. 이런 말 중에 요즘 시국과 관련해서 특히 유행하는 말은 ‘극우’니 ‘극좌’니 하는 말이다. 이것은 이념상의 스펙스럼 가운데 양쪽 극단에 선 입장을 가리킨다. 이것이 우리나라 경우에 적용되면 그 효용이 단박에 드러난다. ‘부정선거’를 말하면 ‘극우’라는 ‘딱지 붙이기’에 꼼짝없이 당하기 쉽다. 학자나 문학인은 그래도 지성인이라 하는데, 남한테 그런 딱지를 붙이고 안심하고 만족해 한다? 끔찍하다. 먼 옛날 샤카족(釋迦族)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오랜 고행 끝에 해탈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그것은 ‘중도(中道)’에 서는 것이었다. ‘중도좌파’니 ‘중도우파’니 하는 말을 하지만 ‘샤카무니(釋迦牟尼)’에게 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 ‘구담 실달타(瞿曇 悉達多)’는 당시 ‘사문(沙門)’들, 곧 수행자들의 ‘화두’에 대해 전혀 차원 다른 통찰을 보였다. 사문들은 ‘세상’이 본디 있다거니 없다거니, ‘자아’라는 것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고들 있었다. ‘석가’는 이 두 개의 극단적 입장을 ‘버리고자’ 했다. 그런데 그 ‘버린다’는 것은 양극단의 중간쯤에 서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양극단을 해체하고자 했다. ‘자아’라는 것, ‘나’라는 것은 본디 있다고도 없다고도,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고민한다. 과연 이 지독한 ‘딱지붙이기’의 세상에서 ‘중도’에 선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새로운 사유의 차원을 열 수 있을까? 과연 ‘나’는 프레임 붙이기에 빠지지 않고 사유의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7-14

특검 서슬에 말 바꾼 고위 공직자들

다소 고루하지만 먼저 ‘명심보감’의 한 구절부터 읽어보자. “양약고어구 이어병(良藥苦於口 利於病) 충언역어이 이어행(忠言逆於耳 利於行)”. 어려울 것 없는 한자다. 풀어 쓴다. 좋은 약은 입에는 쓰지만 병을 고치고, 진실을 담은 말은 듣기 거슬리지만 인간의 행동을 바로잡게 한다는 의미일 터. 그게 최고 권력자건 필부(匹夫)건 제 앞에서 아부하고 아첨하는 인간을 골라내기는 쉽지 않다. 아부와 아첨의 말은 너무나 달콤해 사람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왕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로 ‘간신과 충신을 골라내는 혜안(慧眼)’을 꼽았다. 통치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에도 쓴소리와 비판은 아끼고 그저 ‘잘하고 계십니다~’를 연발하는 간신을 곁에 둔 왕은 말로가 좋지 못했다. 바른 소리를 한다고 충신을 멀리 보낸 왕들 역시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경우가 흔했다. ‘간신’의 가장 큰 특징은 상황과 자리를 봐가며 말을 바꾼다는 것. 이를 번의(飜意)라 하고 공자는 번의하는 신하를 역적보다 멀리하라고 충고했다. 선현의 옛말은 틀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지난 윤석열 정권 아래서 고위직 공무원을 맡았던 이들이 최근 들어 말을 바꾸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들려온다. 김성훈 전 대통령경호처 차장과 ‘대통령실 실세 중 실세’로 불리던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 격노설’ ‘체포 방해 혐의’ 등과 관련해 뻔뻔하게 ‘번의’를 했다고 한다. 간신이라 불러 마땅하지 않은가? 이런 간신들을 곁에 두고 정치를 했으니 윤석열 씨의 몰락은 이미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