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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정부가 중동전쟁으로 인한 고유가, 고물가 등 국민 부담을 덜어줄 취지로 소득 하위 70% 국민에게 1인당 최소 10만에서 최대 60만원까지 지원금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지원금은 위기 대응능력이 부족한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한부모가족 등 취약계층에 대해 이달 27일부터 우선 지급한다. 나머지 국민은 5월 18일부터 소득기준에 따라 선별 지급할 예정이다. 이번 고유가 피해지원금 혜택을 받는 국민은 모두 3256만 명이며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은 국비, 지방비 합쳐 6조1000억원이 소요된다. 대구는 군위와 남구, 서구 경북은 영덕, 봉화, 상주, 청도, 의성, 영양, 청송 등 인구감소지역 주민은 특별지원지역으로 분류, 최대 25만원을 받게 된다. 이란전쟁의 장기화로 한국경제 전반에 먹구름이 끼고 있다. 기름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화물차 기사, 자영업자, 농민, 어민 할 것 없이 서민가계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화물운송 노동자들은 유류비 부담 때문에 달릴수록 손해라며 차량운행을 멈추고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나섰다. 영세 자영업자는 움츠러든 경기에 한숨을 짓고 영농철의 농민은 대폭 오른 농자재값 때문에 한숨을 쉰다.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는 분위기다. 이때 국가가 피해지원금을 서민경제에는 숨통을 틔우고 경기회복의 불씨로 삼는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특히 국제유가는 지정학적 리스크로 전쟁이 끝나더라도 가격이 쉽게 떨어질 것 같지가 않다. 기름값이 오를 때마다 국가재정을 투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 지급하는 피해지원금이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더 정교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행정의 완벽한 관리가 필요하다. 정부는 장기적 차원에서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집중하고, 민원접촉이 많은 지자체는 누락되는 가구가 없도록 관리해야 한다. 지원금은 오는 8월 말까지 사용하지 않으면 자동소멸 된다는 점도 알려 전액 소비가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또 부정수급 방지와 지역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가맹점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국민의힘 경선에서 배제된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최근 만나 대구시장 후보 단일화 문제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 의원은 지난 10일 KBS라디오에 출연해 “지난 7일 이 전 위원장을 만나서 향후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논의했다. 대화 가운데 단일화 관련 논의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최종경선에서 뽑힌 국민의힘 후보와 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대결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무소속까지 나오면 민주당에 대구시장직을 상납하는 것”이라며 “두 사람이 무소속 출마 후 단일화해서 민주당과 일대일 선거구도로 가야한다”고 했다. 이 전 위원장도 지난 9일 BBS 라디오에 출연해 “대구시장 선거는 김부겸 대 우파 후보 1명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대구시장 외에는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두 사람이 요구하는 단일화 방안은 ‘경선과정에 두 사람을 포함시켜 달라’는 것이다. 현재의 경선 예비후보 6명 중 누가 뽑히더라도 선거가 어려운 만큼, 두 사람을 포함시킨 후보 단일화를 통해 ‘주호영·이진숙’ 지지자들도 투표장에 나오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국민의힘 대구 국회의원들은 지난 주말 기자회견을 열고 “대구시민을 개인적인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는 데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경선 절차에 두 사람을 포함시킬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이다. 국민의힘은 지난달 30일 대구시장 경선 후보 1차 토론회를 한 데 이어 13일 2차 토론회, 15∼16일 당원 투표(70%)와 여론조사(30%)를 거쳐 17일 최종 경선에 나설 후보 2명을 추린다. 최종 후보가 확정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대구시장 경선 절차에 대한 국민의힘 입장이 단호한 만큼, 앞으로 주 의원과 이 전 위원장의 무소속 출마 여부에 따라 대구시장 선거 판세는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무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국민의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수안방’마저 민주당에 내줄 수 있다.

칼럼

계약서 한 장 검토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숙련된 변호사라도 수십 페이지짜리 계약서를 꼼꼼히 읽고 위험 조항을 짚어내려면 반나절은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AI)은 같은 작업을 한 시간 이내에 처리한다. 영국 법무법인 Bird & Bird의 변호사 엘데르 산토스는 “며칠 걸리던 계약 분석이 한 시간 이하로 단축됐다고 말하며 법률 업무 수행 방식이 재편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법률 분야는 AI가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깊숙이 스며든 전문직 영역 중 하나가 되었다. 리걸테크의 시대가 열리다 법률(Legal)과 기술(Technology)의 결합, ‘법률 기술’ 분야는 이제 글로벌 법조계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비즈니스 리서치 인사이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법률과 관련된 기술 시장은 2026년 약 141조 원 규모에서 출발해 2035년까지 연평균 27%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약 215조 원 규모로 확대될 전망이다. AI 기술이 그 폭발적 성장의 엔진인 것이다. 법조계의 AI 활용과 관련된 변화의 속도를 보여주는 수치가 있다. 렉시스넥시스(LexisNexis) 2024년 조사에 따르면, 생성형 AI를 업무에 활용하지 않는 변호사 비율이 61%에서 15%로 급감했고, 업무용 생성형 AI 사용자는 11%에서 41%로 4배 가까이 늘었다. 톰슨 로이터 보고서는 로펌(Law Firm)과 기업 법무팀이 전문직 중 AI 도입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밝혔으며, 영국 대형 로펌의 75%가 AI를 사용 중이다. 법조계가 초기의 관망 자세를 접고 AI를 실무 도구로 본격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계약서 검토, 반나절이 한 시간으로 법률 AI가 가장 먼저, 가장 뚜렷한 성과를 낸 영역은 계약서 검토다. 기업 법무팀은 매일 수십, 수백 건의 계약서를 다룬다. 납품 계약, 임대차, 투자 계약, 비밀 유지협약 등 각각의 계약마다 독소 조항을 걸러내고, 불리한 조건을 수정하며 법적 리스크를 평가하는 일은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면서도 본질적으로 반복적이다. AI는 이 반복의 굴레를 깨고 있다. 톰슨 로이터가 발표한 ‘퓨처 오브 프로페셔널스 리포트 2025’에 따르면, AI 활용을 통해 법률 전문가 1인당 연간 약 240시간의 업무 시간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AI 도입에 따른 실질적인 성과(ROI)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240시간이면 하루 8시간 근무 기준으로 한 달 치 업무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국내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법무법인 율촌은 AI 기업 Bhsn과 협력해 지능형 법률 AI 시스템 ‘아이율’을 전사적으로 구축해 2026년 1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기존 사내 지식관리 시스템에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AI가 문맥 단위로 이해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구조이며, 외부 데이터 전송을 차단한 폐쇄형 RAG 아키텍처를 적용해 보안을 강화했다. 법무법인 세종은 글로벌 리걸테크 기업 하비(Harvey)의 생성형 AI를 해외 자문 업무에 시범 도입했다. 하비는 오픈AI 기술 기반으로 전 세계 250여 개 기업과 로펌이 사용하는 법률 전문 AI다. 하비는 최근 싱가포르 국부펀드 GIC와 세쿼이아 캐피털로부터 2억 달러(약 2600억 원)를 추가 유치하며 기업 가치 110억 달러를 인정받았다. 법무법인 김앤장도 법률 용어에 특화된 번역 AI 시스템을 자체 개발하고, 고객 정보 보호를 위한 온프레미스 기반 AI 솔루션 구축을 추진 중이다. 판례 460만 건, 이제 수초에 해결 법률 업무에서 판례 검색의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한다. 비슷한 사건에서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파악하는 것은 소송 전략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대법원 판례만 수십만 건, 하급심까지 포함하면 수백만 건에 달한다는 점이다. 사람의 힘으로 관련 판례를 모두 훑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내 리걸테크 기업 로앤컴퍼니의 AI 법률비서 ‘슈퍼로이어’는 460만여 건의 판례 데이터를 학습해 신청서나 서면 초안을 2분 안에 처리한다. 엘박스는 2025년 8월 검찰과 정식 계약을 체결해 법리 검토, 유사 판례 검색, 유무죄 판단 기준 분석 등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정식 계약 이후 엘박스 AI를 업무에 활용하는 검사와 검찰수사관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법리 검토와 유사 판례 검색 등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평가가 많다고 전했다. 리걸 AI는 판례를 찾아주는 수준을 넘어, 기업의 법적 리스크 전체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경고:법정에 나타난 ‘가짜 판례’ 그런데 이 흐름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잇따랐다. 미국 뉴욕의 30년 경력 변호사 스티븐 슈워츠는 챗GPT를 이용해 항공사 소송 서면을 작성하다가 존재하지 않는 판례 최소 6건을 법원에 제출했다. 해당 판례들에는 가짜 사건명과 사건 번호, 심지어 허위 인용문과 내부 참조까지 포함돼 있었다. CIO 미국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AI가 만들어낸 허위 판례를 검증 없이 제출한 변호사에게 제재금 5만5000달러(약 8,000만 원)를 부과했다. 이후 플로리다주 법원도 AI 가짜 판례를 그대로 제출한 변호사에게 1년 정직 처분을 내렸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해 8월 서울북부지법 민사 사건에서 원고 측이 제출한 서면에 존재하지 않는 대법원 사건 번호가 포함됐고, 재판부는 판결문에 이 사실을 명시하며 원고 패소를 선고했다. AI가 만든 가짜 판례 및 증거가 각급 법원에 제출되는 사례가 잇따르자,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법관 8명과 변호사 2인 등 10인으로 구성된 ‘AI 활용 허위 주장·증거 제출 대응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해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 TF는 허위 판례 제출 적발 시 해당 변호사에게 소송 비용을 부과하거나 대한변호사협회에 징계를 의뢰하고, 소송서류에 AI 사용 사실을 고지 하며, 내용 정확도를 검증하도록 민사소송규칙을 개정하는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AI 변호사는 오지 않는다 이쯤 되면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AI가 결국 변호사를 대체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은 아니다. 법률 AI는 여전히 ‘환각’ 현상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법률은 단 하나의 오류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영역이다. 또한 의뢰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예측하며, 법의 취지와 현실 사이에서 최선의 전략을 고르는 것은 여전히 인간 변호사의 고유 영역이다. 미국변호사협회(ABA)는 법률 AI 활용 시 변호사가 준수해야 할 윤리적 의무로 역량을 갖출 의무, 의사 교환 의무, 비밀 유지 의무, 감독 의무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AI에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AI의 작업을 감독하고 그 결과물의 정확성을 확인할 의무를 강조한다. 도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최종 책임은 변호사에게 있다는 뜻이다. 일반 시민도 법률 서비스의 달라진 환경을 활용할 수 있다. AI 기반 법률 서비스로 기초 정보를 미리 파악한 뒤 전문 상담에서 더 핵심적인 조언을 얻는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단, AI가 제시하는 법률 정보는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 법률 해석은 사건의 구체적 사실관계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최종 판단은 반드시 전문가와 함께해야 한다. 법률 AI는 변호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가 정말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는 도구다. 그 도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다루는 법조인이 그렇지 못한 법조인을 압도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서용운 계명대 글로벌 창업대학원 벤처창업학과 교수

네타냐후 총리는 이스라엘 역대 총리 중 최연소 출신이면서 최장수 총리다. 그는 총리 외에도 11선 의원을 지냈고, 국방장관, 외교장관, 보건장관 등을 겸직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지도자 중 가장 강력한 지도자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정치적 평판은 극과 극으로 나뉘어지는 인물이다. 특히 일부 비판론자들은 그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개인의 안위를 위해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날 선 비판을 쏟아 붙는다. 네타냐후 총리는 현재 뇌물, 사기, 배임 등 3가지 부패 혐의로 재판 중이다. 그는 전쟁과 국가 비상사태를 이유로 재판 출석을 자주 미루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법개혁을 밀어붙이려 한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전쟁을 지속하는 이유는 전쟁이 끝나는 날이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날이기 때문이라 지적을 한다. 미국과 이란 간의 휴전 논의가 실패로 끝나면서 향후 전망도 어둡다. 네타냐후 총리는 미국과 이란의 휴전 협의가 진행 중임에도 레바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바 있다. 세계가 희망하는 종전에 찬물을 끼얹은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전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헤즈볼라를 계속 공격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서방국가들은 네타냐후가 호르무즈해협 개방에 최대 걸림돌이란 지적도 했다.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미국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밝히지만 실제로는 네타냐후가 독자적인 군사 행동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이스라엘을 이란의 핵위협으로부터 완전히 구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인지 아니면 전쟁을 자신의 안위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중동전쟁의 가장 큰 변수는 트럼프보다 네타냐후가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언제부턴가 나라 곳곳에 휴양림이 하나둘씩 세워져 오가는 길손들의 훌륭한 쉼터 구실을 하고 있다. 국토 면적의 65% 정도가 산으로 이뤄져 있는 산악국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알뜰한 행정이라 하겠다. 봄비가 제법 많이 그리고 자주 내리는 시기에 금원산 자연 휴양림에 다녀온다. 그곳에서 느낀 소회(所懷)가 적잖게 깊고 다채로워 짤막한 글로 옮긴다. 유안청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밤새 멈추지 않는 곳에서 유숙함은 특별한 경험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낮과 밤에 따라 기능 분화가 심화(深化)된다. 낮에는 시각이 밤에는 청각이 특화되는 것이다. 빛이 넘쳐나는 한낮에 눈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지만, 어둠이 지배하는 한밤중에는 귀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한다. 연암 선생은 ‘열하일기’에서 이 점을 입증한다. 한밤중 바깥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바람 소리인지, 물소리인지, 빗소리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실천가들에겐 심상(尋常)한 노릇이겠지만 말이다. 이튿날 아침에 비는 그쳤지만, 바람은 드세게 불었고, 물소리도 어젯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되 구름장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에 의지해 짧은 등정(登程)을 시도한다. 일주일 사이에 두어 차례 오신 봄비와 거센 바람으로 산벚꽃잎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떨어져 있다. 숲속 오솔길의 야트막한 바위들 틈새에 온갖 여린 풀들이 각자의 하늘과 대지에 의지해 환한 얼굴로 각자의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내가 알아본 것은 남산제비꽃, 현호색, 고사리, 광대나물 정도다. 이름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다. 하나의 존재를 수용하는 첫 번째 관문은 이름 아닌가?! 우리는 커다란 나무와 이름난 꽃들은 잘 기억한다. 영춘화(迎春化), 매화, 산수유, 살구꽃, 벚꽃, 목련, 박태기, 수수꽃다리, 배꽃 등속은 환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꽃다지, 제비꽃, 민들레, 갈퀴나물, 엉겅퀴, 뽀리뱅이, 지칭개, 씀바귀, 애기똥풀, 양지꽃, 고들빼기 같은 작은 풀이나 꽃에 이르면 사정이 완연히 다르다. 크고 높고 이름난 것은 누구나 알아본다. 반대로 작고 낮고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무시당한다. 노자는 ‘도덕경’ 52장에서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柔曰强)”이라 설파한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노자는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의 상대성에 주목하면서 양자의 조화와 공존에 자연의 이법(理法)이 있다고 본 것이다. 산벚꽃이 하얗게 뿌려진 길섶 틈틈이 여린 풀잎과 꽃들이 피어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오고 감의 ‘무상(無常)’을 새삼 생각한다. 벚꽃이 그토록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유한한 생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1년 내내 피어있는 벚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여길 사람이 있겠는가! 유한성에 기초한 순환에서 우리는 무상과 함께 영탄(詠歎)의 순간을 만나는 것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는 양태를 보면서 화합에 기초한 상생과 조화를 깨우치지 못한 유대교도와 개신교도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인 것을 알지 못한 채 고귀한 인명 살상에 몰두하는 학살자들의 얼굴이 낙화(落花)와 자꾸 겹쳐지는 봄날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요즘 뉴스에는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으로 촉발된 에너지 가격 상승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환율 역시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겉모습은 국제 정세 이야기지만 그 파장은 이미 일상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고 있다. 시민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생업을 위해 차량을 운행해야 하는 이들에게 주유소 가격은 하루 단위로 체감되는 변수다. 움직여야 수입이 발생하는 구조에서 에너지 비용 증가는 곧바로 소비 축소로 이어진다. 여가와 취미, 외식과 같은 선택적 소비는 어느새 ‘사치’처럼 느껴져 뒤로 밀렸다. 먹거리 물가도 마찬가지다. 수입산 농·축·수산물 가격은 운송·에너지 비용과 환율 상승이 겹치며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구조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반면 소득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당연히 고정된 수입 속에서 가계는 더 촘촘한 지출 관리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지역 산업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포항·경주·구미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산업벨트는 제조와 유통이 결합된 구조다. 제조업의 핵심인 수입 원자재 가격도 상승 압력이 거센데다, 이를 이용한 제조과정에 드는 산업용 전력 비용 역시 부담이다. 원재료와 에너지 비용이 같이 오르는 전형적인 비용 상승 국면이다. 이는 곧 수익성 저하로, 기업의 투자와 고용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가계에는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주택 담보 대출을 받은 가계는 원리금 상환 압박까지 받고 있다. 과거 대비 다소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기준금리는 장기간 동결 상태다. 물가 불안이 이어지면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여건이다. 결과적으로 가계와 기업 모두 비용 증가와 불확실성이라는 이중 부담에 직면해 있다. 결국 시민의 선택지는 단순해지고 있다. 지출을 보다 정교하게 관리하고, 제한된 자원 안에서 합리적인 소비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과거보다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소비를 선택하는 ‘경제적 판단의 일상화’가 요구되는 시기다. 앞으로의 여건도 낙관하기는 쉽지 않다. 중동 지역의 긴장이 완화되더라도 에너지 시장의 불확실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언제든 공급 리스크가 재부각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에너지 가격의 변동성을 상수로 만들고, 산업 전반의 체질 변화를 요구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지금의 위기는 특정 도시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항과 경주, 영천, 구미, 대구를 아우르는 대구·경북 전반이 같은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지역 산업과 경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어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시기일수록 지역 산업체와 노동자들은 방향을 공유하며 한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산업의 지속성과 회복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대응과 협력이 엇박자를 내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도시의 행정 역시 이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시민의 삶과 지역 기업의 회생을 뒷받침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결국 위기 국면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지역 경제의 향방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김진홍경제에디터

딸아이와의 사소한 말다툼은 아주 평범한 한마디에서 시작됐다. “어른들께는 톡 말고 전화로 해야지.” 무심코 꺼낸 말이었는데, 딸은 곧바로 되물었다. “왜 꼭 전화여야 해?” 그 짧은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서로의 말이 엇갈리면서 대화는 금세 기 싸움처럼 변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처음 듣는 말을 알게 됐다. ‘콜 포비아(call phobia)’. 전화를 걸거나 받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는 이야기였다. 솔직히 그때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에게 전화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약속을 잡을 때도, 미안한 마음을 전할 때도,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전화였다. 목소리의 떨림, 잠깐의 침묵, 말끝의 뉘앙스까지도 다 의미 있는 소통이라 믿어왔다. 그런데 딸에게 전화는 오히려 부담이라고 했다. 예고 없이 울리는 벨소리가 사적인 공간을 깨뜨리는 느낌이고, 바로 반응해야 한다는 압박이 싫다는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딸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 안에도 나름의 질서와 감정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짧은 문장 하나, 이모티콘 하나에도 아이의 기분이 묻어 있었다. 답장이 늦어도 예전처럼 서운해하기보다 지금은 바쁜가 보다 하고 기다리는 법도 배우게 됐다. 전화처럼 즉각적이지는 않지만, 그 나름의 호흡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딸이 말한 콜 포비아는 단순한 예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감정,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식이었다. 전화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과 감정을 바로 마주해야 하지만, 메시지는 한 번 더 생각하고, 다듬고, 때로는 미룰 수도 있다. 그 차이가 아이에게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전히 전화의 가치를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분명해졌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처럼 마음의 무게가 실린 순간에는, 여전히 목소리가 더 깊이 닿는다고 믿는다. 실제로 얼마 전, 딸에게 짧은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별다른 말은 아니었지만, “괜찮냐”는 한마디에 아이가 잠시 말을 고르던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문자로는 느낄 수 없는 온기가 전해졌다. 그래서 요즘 나는 예전처럼 방식을 고집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상황에 따라,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 따라 방식을 건너간다. 아이가 편안해하는 메시지로 시작해, 필요할 때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건다. 예전 같으면 설득하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저 함께 맞춰 가려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화 또는 메시지가 아니라, 서로를 향해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가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전화가 더 익숙한 사람이고, 딸은 메시지가 더 편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조금씩 건너가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방식은 다르더라도 관계는 이어진다. 그날의 작은 말다툼 덕분에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관계는 옳고 그름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깊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어른이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한 걸음 건너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손철호 지역문화포럼 따로또같이 대표

앤디 워홀의 전시회를 보러 갔다. 일요일이라 사람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적어 편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는 대중문화와 소비사회의 이미지를 예술로 끌어올린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이다. 동일인물의 색감을 달리 하거나 캠벨 스프 캔 등 일상에서 쓰이는 물건을 소재로 삼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앤디 워홀은“나는 상업 미술가로 출발했고 비즈니스 아티스트로 끝맺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전시회를 보다보니 광고와 앨범 표지 영화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알게 되었다. 친구와 나는 구두를 뱀으로 표현한 광고 앞에 멈춰 섰다. 전율이 느껴졌다. 미혹, 매혹, 유혹이라는 단어가 깊이 마음에 들어왔다. 예쁘고 높은 하이힐을 신던 시절도 있었지만 내게 구두는 이제 절대적으로 발이 편해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이제는 신을 수 없는 하이힐을 신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구두를 보며 뱀을 떠올린 발상이 놀라웠다. 문득 아들의 미술학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학부모 초청 수업시간이었다. 원장님이 아이들의 작품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 중 한 아이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 기억에 남아있다. 바다 속을 그렸는데 바탕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원장님은 무척 잘 그린 것이라 했다. 왜 저 그림을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당연히 바다는 파란색 계열을 써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원장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물었다. 왜 빨간색으로 바다를 칠했느냐고. 다섯 살인 아이는 물고기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피를 흘려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구태의연한 생각을 뛰어넘는 신선한 발상이라며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혹시 집에서 아이들이 생각지 못한 그림을 그리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왜 그렇게 했는지를 꼭 먼저 물어보라고 당부했다. 고정된 생각은 창의성을 떨어뜨린다며. 아기 상어라는 동요를 즐겨 듣는 손녀에게는 정해진 색이 있다. 아빠는 파랑, 엄마는 분홍, 자기는 노랑, 할머니는 주황이다. 아기 상어에 나오는 색이 아이의 머리에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색종이로 무엇을 만들던, 색칠 공부나 그림을 그리던 파랑은 아빠색인 것이다. 다른 색은 절대 아빠를 대신할 수가 없다. 이제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하는 손녀가 이미 색에 대해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척 안타깝다. 어떻게 그것을 깨뜨리고 다양성을 가지고 가게 할 수 있을지가 은근히 고민이다. 한 가지로 굳어버린 생각이나 이미지는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생각을 다르게 한다는 것, 관점을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초등학교 글쓰기에서 비틀어 생각하기, 새롭게 생각하기 입장 바꿔 생각하기 등을 시도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또는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삶에 있어서 발상의 전환은 무척 필요한 일이다. 경직되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어 변화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동력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의 틀을 계속 깨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고 그 시간을 즐기는 친구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생각과 사유를 배워가고 있다고 했다. 전적으로 친구의 생각과 노력에 동의하면서 우리는 틀에 갇히지 말자고 서로를 응원했다. 글을 쓰는 일도 무한하고 다양한 생각 속에서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요즘 더 깊이 느끼고 있다. 앤디 워홀의 구두를 다시 한 번 더 보고 그의 유연하고 독특한 생각과 예술을 향한 그의 치열함을 배우고 싶었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의 전시회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회를 나서는 발걸음이 자꾸 뒤로 돌아가고 있는 듯 했다. /전영숙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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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의 ‘정치 풍향계’

국회의원이 대통령 방탄경호원인가

생수병에 소주를 채우는 의원들이 답답했다. 한심한 의원들의 언행이 언짢다 못해 참담했다. 지난 9일 수원 지검 앞. 민주당 의원들이 편의점에서 소주 4병과 생수 3병을 샀다. 카메라 앞에서 소주를 생수통에 바꿔 넣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고는, 진술을 조작해 기소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반박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걸로 무엇이 입증됐다는 건지 어리둥절하다. 국회 ‘윤석열 정권 조작 기소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조작 기소 국조특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다. 이들은 검찰이 이화영 전 경기도 부지사에게 연어회로 파티를 열어주고, 쌍방울 대북 송금 사건의 주범이 이재명 대통령이라고 진술하게 회유했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뭐 하는 건가. 국회의원이 그렇게 한가한가. 이란 전쟁으로 세계가 위기다.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됐다. 우리가 완전히 의존하는 미국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주역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유무역과 관련한 기존 합의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져 버렸다. 유럽 동맹들을 손보겠다고 위협했다. 한국을 콕 집어 표적으로 삼았다. 그는 지난 6일 북한이 핵탄두를 45개 갖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북한은 이제 핵무기를 넘어, 악마의 무기라는 ‘집속탄’까지 실험했다고 위협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머리를 숙였는데도, 북한은 겨우 외교부 국장을 내세워 “멍청한 바보들의 희망 섞인 해몽”이라고 모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국무위원장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 이 대통령은 양측으로부터 모두 무시당하고 있다. 한국 주가가 이 정부 들어 크게 폭등했다. 그런다고 안심할 수 있나. 롤러코스터에 타고 있다. 조그만 자극에도 요동친다. 그만큼 불안하다는 증거다. 관리를 잘하면 더없이 좋은 자산이다. 하지만, 한순간에 폭락할 위험도 안고 있다. 국민의 대표들이 생수통에 소주 채우기나 보여줄 한가한 때가 아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권익을 챙겨야 할 대변자다. 사리사욕, 당리당략을 도모해도, 최소한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 있어야 한다. 지금 그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나. 아니면 권력자의 방탄막이 되려고 기를 쓰나. 이들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공소 취소를 요구하는 의원 모임을 만들었다. 안팎으로 비판받았지만 자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마저 “이상한 모임”, “미친 짓”이라고 질타했겠나. 그런데도 당내에 ‘조작기소국정조사 특별위원회’를 발족하고, 국회에도 국회 국정조사특위까지 만들었다. 굳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경호조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무리를 지어 대통령 경호를 지상 과제로 내세운다. 그걸 무슨 훈장이나 완장, 깃발처럼 휘두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제8조는 “감사 또는 조사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계속 중인 재판 또는 수사 중인 사건의 소추에 관여할 목적으로 행사되어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1988년 제정 당시부터 있던 조항이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정치만큼 부패 위험이 큰 집단이 없다. 견제도 쉽지 않다. 국회 다수당이 면죄부를 남발하면 정치 부패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지금 민주당의 행태가 그런 우려를 증명한다. 민주당은 대북 송금 사건을 수사한 박상용 검사를 직무 배제하고, 탄핵 소추하겠다고 위협한다. 이 대통령이 연루된 사건들을 공소 취소해 원천 무효로 만들겠다고 한다. 정권을 쥔 민주당 의원들이 증인들을 일일이 만나 ‘회유’ 진술을 종용한다면, 그들이 비난한 대로, 연어회로 진술을 유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장영수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치가 사법을 좌우한다는 것은 법과 정의가 사라진 무법천지가 초래될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문제가 있다면 정상적인 법 절차로 해소하는 게 옳다. 이들이야말로 정상적인 법 절차로는 이 대통령이 혐의를 벗기 힘들다고 믿는 게 아닌가. 민생은 뒷전이다. 과잉 충성으로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보신을 꾀한다. 부당하게 개입할수록, 이 대통령의 혐의만 굳혀준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6-04-12

탄탄의 풍경소리

‘탄탄의 풍경소리’ 孤峯頂上을 향한 깨달은 구름 한 점

어릴 때는 참 무료했다. 시간이 꼭 멈추어 선 듯, 술도 마셔야 하는데, 담배도 피우고 이성도 만나야겠는데, 너무도 세월이 슬로우로 흐르더란 말씀이다. 그때 시간을 죽이려 오락실을 드나들거나 학교 뒷동산에 숨어들어 발랑까진 조숙한 몇몇 까까머리 친구 녀석들과 담배도 피우고 야한 외국 칼라사진도 주고받으며 세월을 낚거나 그 일도 정 따분하여 지면 즐겨 읽던 책이 있었으니, 남로당 좌익 아버지의 원죄를 짊어지고 평생토록 연좌제의 낙인을 끌어안고 살다가 세상 떠난 김성동 선생의 『만다라』란 장편소설과 일본 역사소설의 거장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번역한 『대망(大望)』이라는 이름의 소설책 이었다. 훗날 세월이 한 참을 흐른 후에 보니, 참으로 내 ‘인생의 바이블’이기도 했고 ‘인생의 지침서’로 자리 잡았다고도 하겠다. 만다라는 지금 읽어도 어려운 불교용어와 대망은 수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두 서사적 특징, 그것이 내 인생의 방황과 맞물려 많은 통찰을 하게끔 한 이유는 ‘불교적 깨달음과, 야마오카 소하치가 그려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다림의 달인’으로 미화한 부분에 충분히 매료 된 이유에서였다고 하겠다. 이만 각설하고, 얼추 30년도 더 된 에피소드지만, 난 그때 속리산 법주사에서 중물(치문)을 들이고 있었다. 장판때(강원)좀 묻히라는 스승의 당부를 받들어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법주사 큰방에서 살 때, 무작정 지루한 시간을 죽여야 하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워야 하던 차에, 참 크게 매료된 큰 인물이 있었다. 불교사의 마지막 전설적인 큰 스님 ’월탄대화상(月誕大和尙)‘이신데, 꼭 속리산 청동 미륵대불처럼 법당(풍체)도 장대하시고 한국 근, 현대불교사에 있어 미륵불처럼 장엄히 우뚝서신 어른스님의 산중토굴인 ’미륭당‘을 드나들거나 큰 스님 주석처(駐錫處)인 청주 무심천변 용화사(龍華寺)에 머물 때, 만나진 인연이 각생, 각운 두 형제 스님이다. 월탄화상의 문하(門下) 여러 스님 중에 많은 스님들과도 그 인연의 깊이가 깊다고 하겠지만, 그중 가장 인간미 넘치는 각생스님과는 유독 많은 추억이 있다. 어렵고 힘든 시절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주기도 하고 여행도 함께하며 궁색한 처지에는 엽전도 나누어 쓰며 더불어 어울렁 더울렁 살았는데, 지금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무심도인(無心道人)이었던 각생스님은 세속의 미련이 깊지 않아서인지, 그리 명이 길지 못해 갓 회갑을 넘기고는 운명을 달리했다. 그 때 각생스님을 그리며 내가 쓴 몇 자의 글이 있는데, 아마도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형님, 속리산 시절이 마냥 그립습니다. 공양간에서 삼색 나물에 참기름, 고추장 넣고 맛나게 비벼 먹은 점심공양은 지금도 가끔 군침을 돌게 합니다. 올해 초 음지에 서러운 듯 나 홀로 핀 선홍빛 진달래가 채 지기도 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실속 없이 분망하기만 했던 못나고 무정한 아우를 찾아오셨을 때 그저 바쁘다는 핑계로 놀아드리지도 못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가시니 이제야 가슴을 치며 후회가 막급할 뿐 입니다. 운제산의 초겨울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낙엽이 한 올도 없이 우리네 인생처럼 헐벗어 있습니다. 깊은 밤이 되었지만 밖에는 바람 소리만 을씨년스럽고, 고즈넉한 산중 깊은 암자에선 저 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각생 형님! 얼추 30년 성상이 다 되어가는 형님과의 지난 세월을, 그 수많은 추억을, 이제 가슴에 묻어야 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시기도 시간에 법당에서 촛불이 춤을 추며 타들어 가고 잠시 눈을 감고 무상계를 한편 독송해 보았습니다. 수일 전 2시간 남짓 다비 후 남은 형님의 한 줌 유골을 보며 허망하고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황급히 자리를 뜨며 산길을 내려오는 동안 내 모습도 저러하지 않겠는가 하는 무상의 가르침이 내내 교훈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그 순간 훌륭한 명상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합니다. 죽음이 늘 멀리에 있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있었음을 망각하고 살다가 오늘 죽음을 생각한 하루는 삶을 생각하는 하루보다 더 값진 하루였습니다. 각생 형님! 죽은 자를 기리는 제삿날은 또 누군가의 생일날이듯, 살고 죽는 것이 어찌 둘이겠습니까?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난 이들이 떠날 때면 다시는 살아서는 더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가슴 아픈 영원한 이별에 이 중생은 통한의 눈물이 흐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 빈손으로 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벌거벗고 와서 옷 한 벌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채로 훌쩍 고독사(孤獨死)로 가신 각생 형님! 다음 생에는 눈 깜짝할 사이 번갯불에 콩 볶아 내는 그런 짧은 세월을 사는 허망한 인생살이는 이제 그만두시어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산다는 주목이나, 오랜 세월 산다는 나무로 태어나서 천 년 만 년 세월을 굳게 우뚝 서 견디어요. 다음 생에는 골골 아프지도 말고 백 년도 못사는 인생 노릇보다 모진 비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천년쯤만 살아보자구요. 속리의 천년 세월 묵묵히 지켜보는 정이품송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살길을 걸어봅시다. 아우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삶이란 덧없는 집착에서 벗어나 여여하게 남은 인생 세찬 삶의 여정을 굳굳하게 잘 걸어서 다 마치고 난 뒤에 저승에서 다시 형님을 뵈올 때는 우리 스승님의 간곡하신 당부로 미처 마시지 못하고 참아야 했던 곡차나 실컷 배가 터지도록 마실 텝니다. 天堂佛刹 천당불찰 隨念往生 수념왕생 快活快活 쾌활쾌활 이제 천당이나 부처님 계신 곳에 마음대로 태어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쁘고 기쁜 일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각생스님 영전에 받치는 나의 마지막 조사였다. 속가에서는 피를 나눈 형제의 인연으로 각운은 각생의 아우였으나, 한 은사스님의 문하에서 출가하여 각운은 다시 각생의 사형이 되었다. 그러한 각운스님과도 함께한 기억에 가물가물 하지만, 용화사에서 몇날 며칠을 밥도 먹고 곡차도 한 잔하며 더불어 살던 그때의 각운스님은 사판(事判)이기도 했지만, 늘 이판(理判)을 꿈꾸던 수좌(首座)이기도 하여서 수북이 쌓인 불전(佛錢)을 손금이 다 닳도록 세다가도 “이놈의 노릇은 그만두어야지”하며 늘 좌복에 대한 미련을 지니고 살던 이였다. 좌복이란 단순히 방석이 아니라, 이를테면 ‘단두대’이기도 하다. ‘나’라는 아상(我相)이 죽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삶(깨우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은사스님이 주신 깨달을 각(覺)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명을 밝히려는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이며 제 몸에 불을 지피는 자기와의 고독한 투쟁이다. 좌복 위에 앉은 수좌의 등줄기는 늘 서릿발 같이 곧두서야 하며, 그 기세는 마치 굶주린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듯 절박해야 하며, “한 생각 일어나지 않으면 온 우주가 멸하고, 한 생각 깨어있으면 만물이 거기서 살아난다.” 이것이 눈 푸른 수좌가 시시때때로 품고 지키는 자리(座)의 무게라 하겠다. 어린 시절에 아궁이 연탄 불꽃 위에서 얻은 육신의 흉터를 평생 지니고 사는 각운은 채워 질수 없는 아픔과 결핍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 시절 60년 대 쯤에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끼니보다 더 깊었던 마음의 허기를 늘 품고 있었으니, 그‘유년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어쩌면 눈 푸른 납자(衲子)각운은 누구보다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도 늘 치열했다. 온기의 발원지에서 얻은 잔인한 큰 상처, 발가락이 몇 개 잘려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몸뚱이에 새겼지만, 그 뜨거웠던 통증이 훗날 수행자의 길에서 마주한 그 ‘번뇌의 불길’과 어쩌면 그리 닮아 있었다. -파격(破格)을 보이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각운(覺雲)’은 깨달음조차 집착하지 않는 무심(無心)의 극치를 말한다. 구름이 청산(靑山)을 감싸 안고 있지만 청산을 속박하지 않고, 청산을 떠날 때 백운은 미련을 두지 않는다. 진정한 도인이란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버린 사람이다. 금가루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듯, 깨달음의 자취가 남아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참된 구름이 아니다. 백운은 떠돌아도 자취가 없고 지니어서 집착하는 바 없이 행운유수(行雲流水), 구름에 달 가듯이 흐르는 물처럼, 인연 따라 사라지고 인연 다하면 그저 소멸할 뿐, 그 어디에서도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증명하는 삶이다. 각운은 수십 안거를 나며 이제야 말길이 끊어진 격외선(格外禪)도리를 넘어선듯하다. 그의 내공에서는 논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 와 있는 듯, 이제 계란으로 바위를 쳐 그 바위를 깨려는 몸부림을 감행하려 한다. 문: 무엇이 수좌의 본분입니까? 답: 서쪽 산에 해 지니, 동쪽 계곡에 달이 뜨는구나. 이 문답 속에 모든 것이 있다.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가 곧 깨달음의 현현(顯現)이며 낙처(落處)가 분명하다 하겠다. 그 수행이 깊은 수행자는 진리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존재 자체로 푸른 하늘의 구름처럼 당당하고 여여(如如)할 뿐. 이제 각운에게 서슬 퍼런 칼 한 자루, ‘취모검(吹毛劍)’이 쥐어져 있으니 그 칼의 용도가 자못 궁금하다. 구참이 된 각운스님이 청산이 되려하는지, 백운이 되려하는지, 이제 더 좀 두고 볼일이다. 그 갈증의 끝이 과연 어드메인가? 萬里靑天 一點紅日 만리청천 일점홍일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만 리 푸른 하늘에 붉은 해 하나 솟아오르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니와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

2026-04-10

사설

경북도 무상 돌봄사업, 저출산 극복 단초되길

경북도가 저출생 대응과 양육 부담 완화를 목적으로 시작한 무상 돌봄사업(K보듬 6000)이 올해부터는 전 시군으로 확대된다. 경북도는 사업비 173억원을 들여 올해는 22개 시군 97개소에서 무상 돌봄 사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도는 이를 통해 연간 20만명 이상 돌봄 수요가 충족되고, 맞벌이, 교대근무, 자영업 등 다양한 가구의 돌봄 공백에 실질적인 도움이 돌아갈 것으로 본다고 했다. 경북도의 K보듬 6000은 2024년 7개 시군 53개소에서 시작해 이듬해는 12개 시군 71개소로 확대했다. 지난해까지 모두 17만여 명이 돌봄 혜택을 본 것으로 집계된다. K보듬의 6000이란 숫자는 아이가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간 약 6000일을 의미한다. 경북도가 아이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전적으로 돌봄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특히 이 사업은 휴일을 포함한 365일 온종일 돌봄체계를 유지하는 장점이 있다. 맞벌이 부부, 교대근무, 자영업자까지 자녀 양육공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주민의 반응도 좋다. 또 전국 최초로 0세 특화반을 운영해 생후 60일부터 12개월 미만 영아도 돌본다. 무상으로 운영으로 주민의 경제적 부담을 들어준다. 아파트단지 1층이나 기존의 돌봄 인프라를 활용해 접근성도 좋은 편이다. 부모들이 안심하고 경제활동에 전념할 수 있으니 구미, 김천 등지서는 이용 주민의 긍정 반응이 이어진다고 한다. 국가데이터처에 의하면 경북도내 2025년 합계출산률은 0.93명으로 전년보다 0.03명이 증가했다. 전국 평균보다도 0.13명이 더 높다. 또 경북도내 혼인건수도 2023년 8128건에서 2024년 9067건, 2025년에는 9160건으로 늘어나 앞으로 출생아 수 증가 가능성을 엿보게 하고 있다. 출생아 수 증가나 혼인건수 증가 원인은 다양하다. K보듬 6000은 그 다양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저출생 극복은 작은 물줄기가 큰 강을 이루듯 각 분야에서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하다. 경북도 돌봄사업의 안정적 정착을 기대한다.

2026-04-09

사설

국힘 리더십 실종···꼬여가는 대구시장 공천

국민의힘이 대구시장 공천파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비경선에서 컷오프시킨 주호영 의원과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의 반발이 지속되면서 갈수록 혼란이 짙어지는 모습이다. 이러한 대구 발(發) 보수진영 내분은 국민의힘의 전국적인 지지기반을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당내에서는 “이제 너무 엉켜서, 실타래를 완전히 잘라내야 할 상황인지 풀어야 할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말도 나온다. 주호영 의원은 8일 “이번 대구시장 경선 컷오프는 있어서도 안 되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면서, 법원 가처분 기각 결정에 대한 항고심 판단을 끝까지 지켜본 뒤 최종 거취를 정하겠다고 했다. 당 안팎에서 쏟아지는 불출마 요구에 선을 그으며 법정투쟁을 끝까지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주 의원은 컷오프 효력을 정지해 달라며 법원에 낸 가처분 신청이 기각되자 지난 6일 서울고법에 항고했다. 이진숙 전 위원장도 이날 “대구시장 도전 외에 다른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CBS라디오 인터뷰에서 보수 후보 간 단일화 가능성에 관한 질문에 "결국 한 명의 후보로 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무소속 출마를 한 뒤 국민의힘 최종후보와 단일화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문제는 이러한 대구시장 후보 공천파동이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데도 이를 해결할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중재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모두가 손을 놓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의힘이 이처럼 심각한 내홍을 겪는 사이 민주당은 TK지역 외연 확장을 위해 당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정청래 대표는 8일 대구에서 최고위원 회의를 열고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가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면서 “TK 행정통합을 민주당이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김부겸 후보도 이번 주 중 ‘1호 공약’을 발표하면서 지지기반 다지기에 나선다. 국민의힘이 공천파동에 대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대구시장 선거를 치르게 되면, 보수정치 전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

2026-04-09

팔면경

교단을 떠나는 선생님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직업군으로 인식되는 교사직은 시대흐름에 따라 다소 변동은 있으나 대체로 희망 직업으로서는 인기가 높은 편에 속한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매년 조사하는 학생들의 직업 선호도 조사에서 교사는 십수 년째 선두그룹을 지키고 있다. 2023년 조사를 보면, 초등학생은 교사를 운동선수, 의사 다음으로 세 번째 희망 직업으로 꼽았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의사, 연구원, 운동선수 등을 제치고 교사를 1위로 꼽았다. 과거 기준으로 하면 교사 직업은 보수 면에서 회사원과 큰 차이가 없는 데다 사회적 예우도 나쁘지 않아 오랫동안 학생이나 학부모의 희망직업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교사들의 이직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 교육기반이 자칫 흔들릴까 봐 걱정된다는 교육계의 목소리가 있다. 국회교육위원회 소속 김대식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의하면 2020년 6704명이던 전체 중도퇴직 교원 수가 2024년에는 7988명으로 1200여 명이 늘었다. 특히 저연차 교원 중심으로 중도 퇴직이 늘고 있고, 수도권보다는 비수도권에 집중되는 것으로 분석이 된다고 한다. 교사 이직이 늘어난 이유는 다양하다. 대기업 등 민간기업과 비교해 연봉 격차가 갈수록 커지는데 대한 박탈감을 꼽는 사람도 있다. 또 교권침해로 인한 스트레스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라 한다.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에 대한 교사들의 심리적 부담을 퇴직 이유로 꼽는다는 것이다. 과중한 행정업무도 다른 이유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존경받으면서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이 무너진 것이 교사를 교단 밖으로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정구(논설위원)

2026-04-09

주재원의 시대지성

벌거벗은 임금님의 교훈

‘벌거벗은 임금님’, 누구에게나 친숙한 안데르센의 동화다. 권력의 위선을 이보다 더 쉽고 직관적으로 표현한 우화는 드물다. 임금의 허영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허구적 상상력에 매료되고 마침내 벌거벗은 채 행진을 감행한다. 모두가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권력 앞에서 사람은 진실보다 먼저 안위를 택한다. 위선과 침묵은 그렇게 새로운 질서가 된다. 마침내 한 아이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온다. “임금님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 한마디는 권력 앞에 길들여진 침묵을 깨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하게 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오늘날 국제정치에도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향해 군사행동에 나서고, 그 여파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누군가는 생명을 잃고,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는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시민들조차 유가와 환율, 금융시장의 동요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 전쟁은 총성이 닿는 곳을 넘어, 평범한 일상과 오랜 기간 형성해 온 국제질서까지 함께 허문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비판은 사라지고, 외교적 차원의 공식 논평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힘센 국가의 일방적 폭력을 잘못이라 부르지 못한다. 냉혹한 국제 질서에서 국가의 힘은 곧 명분이 되고, 침묵은 생존 전략이 된다. 물론 국제정치는 냉엄하다. 국가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계산에 의해 움직인다. 특히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모든 사안을 도덕적 언어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안보와 외교,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 있는 자의 행동에는 관대하고, 약한 자의 저항에는 엄격한 국제질서는 정의롭지 못하다. 원칙이 국력에 따라 달라지고, 도덕이 진영에 따라 변한다면, 그 세계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권력은 늘 화려한 언어와 장엄한 명분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사람들은 거기에 압도되고, 침묵은 신중함으로 포장되며, 비겁은 현실주의라는 합리적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런 장식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분명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임에도 전 세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진을 바라보는 군중들처럼 숨죽이며 다음 행보를 지켜본다. 지금 우리에게는 잘못된 전쟁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동맹이라는 이유로 판단까지 위탁하지 않는 이성, 힘 앞에서도 원칙을 접지 않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임금의 행렬은 늘 성대하다. 주변은 간신들의 아첨과 박수로 가득하고, 침묵은 충성으로 오인된다. 그러나 그 행렬을 멈추는 것은 대포도, 군대도 아니다. 단 하나의 진실한 외침이다. 지금 전 세계가 기다리는 말도 결국 그것일지 모른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4-09

남광현의 이슈 브리핑

‘물 수요관리 종합계획’

이제 물 문제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가도 금세 가뭄이 이어지고, 도시에는 사람이 몰리고 산업은 더 많은 물을 요구한다. 대구·경북도 이런 복합 위기 한가운데 있다. 예전처럼 댐을 더 짓고 관로를 더 놓는 방식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건설비는 커지고, 입지는 줄고, 환경 갈등도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 정책의 중심은 “어디서 더 가져올까”에서 “지금 가진 물을 어떻게 덜 새게 하고, 더 똑똑하게 쓰고, 다시 쓸까”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물 수요관리의 출발점이다. ‘물 수요관리 종합계획’은 어렵게 들리지만 뜻은 단순하다. 새 물을 찾기 전에, 우리 손안의 물부터 제대로 관리하자는 계획이다. 크게 보면 세 축으로 이뤄진다. 첫째, 물이 생산·공급되는 단계에서 누수를 줄이고 유수율을 높이는 일이다. 둘째, 한 번 쓴 물을 다시 활용하는 재이용 단계다. 셋째, 가정과 건물, 공장 같은 최종 사용 단계에서 절수 설비와 효율적 소비를 늘리는 일이다. 강점은 분명하다. 댐 하나를 새로 짓지 않아도 물·예산·탄소를 함께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제5단계(2026~2030) ‘물 수요관리 종합계획’은 이런 관점을 더 체계화해 지역별 목표관리와 데이터 기반 행정, 주민 수용성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ESG형 거버넌스로 나아가고 있다. // 해외와 국내 사례도 방향을 보여준다. 미국 캘리포니아는 도시 물관리계획을 5년마다 세우며, 수요관리와 가뭄 대응, 재이용수 활용을 함께 다룬다. 일본 도쿄는 1982년 15%였던 누수율을 장기적인 관 교체와 기술 투자로 3.2% 수준까지 낮췄다. 국내에서도 노후 상수관로 정비를 마친 지자체들은 평균 누수율을 10.8%포인트 낮추는 성과를 냈다. 이런 흐름은 대구·경북에 더 절실하다. 2023년 기준 대구의 유수율은 93.8%, 누수율은 1.9%로 비교적 우수하지만, 경북은 유수율 74.6%, 누수율 20.5%로 격차가 크다. 즉, 대구는 공공시설·대형건물 중심의 절수, 스마트 관망, 가뭄 단계별 수요절감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처럼 맑은 물은 더 이상 무한한 자연의 선물이 아니라, 경제적 비용과 고도의 기술력, 그리고 이웃 지자체 간의 치열한 협상을 통해 확보해 내는 가장 값비싸고 희소한 사회적 공공재다. 대구·경북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물을 얼마나 더 끌어오느냐보다, 지금 있는 물을 얼마나 오래 버티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과제도 분명하다. 노후 관로 정비, 재이용수 인식 개선, 데이터 기반 관리, 지역 간 협력 체계가 더 촘촘해져야 한다. 하지만 방향은 이미 나와 있다. ‘물 수요관리 종합계획’은 절약 캠페인이 아니라 도시와 산업, 농촌을 함께 지키는 생존 전략이다. 새 물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흘려보내던 물 그냥 지나치던 습관, 손보지 않던 시스템 안에 있다. 대구는 도시형 효율 관리의 모범을 만들고, 경북은 광역 물 안보 전략을 세운다면, 이 계획은 단순한 행정 문서를 넘어 대구·경북의 미래를 떠받치는 필수 행동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6-04-09

노병철의 요지경

오류를 바로잡을 의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불편함을 느낀다. 머리로는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쉽게 따라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믿어 온 지식일수록 더 그렇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이런 경향은 더 강해진다.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기존의 믿음을 지키려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단정해 놓은 것을 이해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논쟁이 싫다면 그냥 똥이라 부르고 넘어가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자신 역시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 느끼는 씁쓸함도 적지 않다. 이러한 모습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충남 공주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을 처단한 뒤 인천 형무소에서 탈옥한 김구가 승려로 변장해 이곳에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다. 절에는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와 ‘법명은 원종’이라는 안내문도 세워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김구가 머물렀던 곳은 대광명전 앞의 백범당이 아니라 마곡사 인근 암자인 백련암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많은 방문객은 백범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그곳이 은신처였다고 믿는다. 한번 굳어진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 사례다. “눈 덮인 들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된다.”라는 시구는 흔히 서산대사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 시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의 ‘야설’이라는 작품이다.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일부 사찰과 안내문에는 여전히 서산대사의 시로 소개되어 있다. 익숙한 이름이 더 권위 있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내용을 반복하는 일은 역사 이해를 흐리게 만든다. 문학사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이어진다. 한국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라는 통설 역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친구 이식의 문집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만, 해당 자료가 후대에 편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더구나 허균이 남긴 다른 한글 작품이 없고 작품 속 시대 상황이 그의 생애와 맞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 무명의 작가가 허균의 명성을 빌려 작품을 발표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허균의 작품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런 오류가 발견되어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문적 논쟁은 계속되지만, 대중의 인식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 여부보다 익숙함이 더 큰 힘을 갖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두가 어느 정도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틀린 것을 바로잡기보다 그대로 두는 편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식과 역사라는 것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되는 과정에서 발전된다. 작은 오류라도 바로잡으려는 노력 없이 쌓인 정보는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물론 일상의 삶에서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따져가며 살 수는 없다. 하지만 틀렸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는 태도는 필요하다. 사소해 보이는 것도 정확하게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쌓일 때 우리의 역사와 문화도 조금 더 또렷해질 것이다. /노병철 수필가

2026-04-09

박창원의 포항 민속문화 이야기

보경사 사명대사 진영에 그려진 수염

규모가 큰 사찰에 가면 조사당(祖師堂)이나 진영각(眞影閣)이 있고, 거기엔 고승들의 진영(眞影)이 봉안돼 있다. 진영이란 글자 그대로 ‘참모습’이란 뜻으로 흔히 초상화 또는 영정이라고도 한다. 포항 보경사의 경우 이름은 다르지만 원진각(圓眞閣)이 그런 역할을 한다. 원진각은 본래 고려말에 보경사 주지를 지내면서 보경사를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圓眞國師)를 기리기 위해 지었으나 후에 보경사를 창건한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의 진영을 함께 모시면서 진영각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사찰에 진영이 가장 많이 봉안된 고승은 아마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長)으로 크게 활약한 사명대사(四溟大師)일 것이다.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김천 직지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금강산 건봉사에서 승병을 일으켜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공을 세웠고, 해인사에서 입적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 보니 표충사, 직지사, 건봉사, 해인사는 물론 통도사, 월정사, 동화사, 범어사, 보경사 등 사명대사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전국 20여 개의 사찰에서 그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건봉사와 표충사에는 동상까지 세워두었다. 보경사 원진각에는 창건주인 지명법사(智明法師)와 중창주인 원진국사를 비롯한 고승들의 진영 15점이 봉안돼 있다. 여기에는 수염이 텁수룩한 모습의 사명대사도 있어 눈길을 끈다. 다른 열네 분의 고승들은 수염이 없는데, 사명대사만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사명대사가 보경사에 주석한 일은 없지만, 보경사 오층석탑의 조성기인 ‘내연산보경사금당탑기(內延山寶鏡寺金堂塔記)’(1588)를 지은 인연으로 해서 대사의 진영을 모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경사를 비롯하여 전국의 유명 사찰에 봉안된 사명대사의 진영은 한결같이 수염이 텁수룩한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 동상도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수염 기른 승려’를 상상하기 어렵기에 참배객의 입장에서는 의아스럽다. 사명대사의 진영 중 가장 이른 시기인 임진왜란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는 동화사 진영에도 사명대사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실제로 수염을 길렀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삭발은 수행의 필수 과정이기에 승려들은 출가할 때 당연히 머리를 깎는다. 삭발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외모에 신경 쓰지 않으며, 승려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도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따라 하는 것 자체가 본받으려는 의미가 있다. 수염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사명대사의 진영은 모두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표현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 사명대사는 실제로 수염을 길렀다.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수염 기른 사명을 보고는 머리는 깎았으면서 왜 수염은 그냥 두었느냐고 묻자, 머리를 깎은 것은 속세를 떠났다는 뜻이고, 수염을 기른 것은 대장부의 기개를 나타낸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후 전후 협상을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일본에 건너갔다가 쓴 ‘대마도객관(對馬島客館)’이란 시에 자신의 수염 이야기가 나온다. 病扃賓館痛生牙 坐筭平生百不嘉 削髮作僧長在路 留鬚效世且無家 (후략) 위의 시 4행 留鬚效世且無家(수염 길러 세속을 배웠으나 집이 없다네)에 수염을 길렀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사명대사가 수염을 기른 것이 확실해 보인다. 김정중(金正中)의 ‘기유록(奇遊錄)’(1792)에는 사명대사 진영에 그려진 수염을 보고 쓴 기록이 전하는데, “서산영당(西山影堂)에 이르니, 당은 모두 두 채로 벽에 두 초상을 걸었는데, 하나는 서산(西山)이고 하나는 송운(宋雲), 곧 서산의 고제(高弟)인 사명당(泗溟堂)이다. 머리는 깎았으나 수염은 몇 치나 되니(仍到西山影堂, 堂凡二楹, 壁掛二綃像, 一則西山, 一則松雲, 是西山之高弟泗溟堂也, 祝髮而髥表數寸)”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때에도 사명대사 진영은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소설 ‘임진록(壬辰錄)’에는 임진왜란 후 사신으로 임명된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겪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염 이야기다. “왜인들은 사명대사를 구리로 만든 집에 모셨다. 그리고는 문을 잠그고 사면에 숯을 쌓고 불을 피웠다. 사명당이 그 간계를 알고 사면 벽에 ‘서리 상(霜)’ 자를 써 붙이고, 방석 밑에는 ‘얼음 빙(氷)’ 자를 써놓고 팔만대장경을 외니 방 안이 빙고(氷庫) 같았다. 이튿날 아침, 왜인들이 사명대사가 죽었겠거니 하면서 문을 열어 보니 사명대사의 눈썹에는 서리가 맺혀 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는 게 아닌가. 사명대사는 놀라는 왜인들을 보고 “왜국이 남방이라 덥다 하더니 어찌 이러하게 차냐?” 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전규태 주해 ‘홍길동전·전우치전·임진록’ 참조) 이처럼 사명대사는 실제로 수염을 길렀다. 전국 여러 곳의 사찰에 걸려 있는 초상화와 곳곳에 세워져 있는 동상의 수염은 실제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다만 처음부터 길렀다기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끄는 장수가 되면서 ‘이미지 관리’의 필요에 의해 길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기에 사명대사 진영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기개가 서려 있는 장수의 이미지가 묻어난다. 동화사 진영에는 아예 화제(畫題)를 사명당대사(四溟堂大師)가 아닌 사명당대장(四溟堂大將)이라 적었을 정도다. /박창원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6-04-09

김진홍 경제에디터의 관점

포스코 직고용 확대가 포항경제에 미칠 영향

포스코가 협력사 직원 7000명을 직접 고용하기로 했다. 숫자만 보면 고용 정책의 변화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의 본질은 수치적인 채용 확대가 아니다. 철강 생산 방식과 지역경제 구조를 동시에 바꾸는 ‘체질 전환’에 가깝다. 철강 산업은 오랫동안 원·하청 구조를 기반으로 운영돼 왔다. 대규모 설비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 특성상 다양한 협력업체와의 분업 체계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험의 외주화’와 생산 책임의 분산이라는 구조적 문제가 늘 따라붙었다. 이번 결정은 이 틀을 혁신하겠다는 선언이다. 포스코가 직접 고용을 택한 것은 안전을 비용이 아닌 경쟁력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생산과 안전을 하나의 체계로 묶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특히 탈탄소와 고부가 철강으로의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점에서, 현장 통제력과 공정 연계성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조건이 됐다. 이 변화는 포항 경제에도 적지 않은 의미를 던진다. 포항은 여전히 제철소 중심의 단일 산업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에서는 포스코의 고용과 임금이 곧 지역 소비와 직결된다. 협력사 인력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고용 안정성과 소득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소비 여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다만 단기적인 소비 증가만으로 이번 결정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이미 이들은 지역에서 일하고 소비해 온 인력이다. 숫자 자체가 지역경제를 단숨에 끌어올릴 정도는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더 중요한 변화는 ‘사람의 이동’이다. 불안정한 일자리에서는 사람은 떠난다. 특히 청년층은 더 빠르게 움직인다. 반대로 안정적인 일자리는 사람을 붙잡는다. 포스코의 이번 결정은 고용자의 지위 변경 차원이 아닌 포항에 머무를 이유를 만들어주는 장치다. 이는 인구 감소로 고민하는 지역에 있어 가장 근본적인 해법 중 하나다. 물론 부담도 있다. 협력업체 중심으로 형성된 기존 산업 생태계는 재편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부 업체는 역할 축소나 구조 조정이라는 현실을 마주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산업이 변하지 않으면 지역도 버티기 어렵다. 지금의 선택은 ‘불편한 변화’를 감수하고라도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결국 이번 조치는 포스코가 정부 방침과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대승적 차원에서 내린 결단이다. 원하청 구조의 획기적 개선을 통한 현장 안전관리체계를 혁신함으로써 통합 관리와 책임 경영으로 나아가는 노사상생모델 구축의 신호탄이다. 철강 산업은 지금 거대한 전환의 한가운데 서 있다. 탈탄소, 보호무역, 공급 과잉이라는 삼중 압력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비용 절감이 아니라 구조 혁신이 필요하다. 포스코의 7000명 직고용은 그 변화의 시작일 수 있다. 이 선택이 일회성에 그칠지, 아니면 포항 산업의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는 이제 실행에 달려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번 결정이 한 기업의 고용 정책에 그치지 않고 포항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김진홍경제에디터 kjh25@kbmaeil.com

2026-04-08

팔면경

미국과 이란, 종전의 길 찾기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과 폭격, 이에 저항해 이란이 중동 내 미국의 주요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면서 시작된 전쟁이 1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세계 각지로 원유를 공급해온 호르무즈 해협이 이란의 봉쇄조치로 막히면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다. 유가는 폭등하고, 주가는 널뛰기를 지속하고, 석유화학물질로 만들어내는 각종 생활필수품 공급에도 비상이 걸린 상황인 것. 전쟁은 먼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실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란 전쟁’ 이전보다 30% 가까이 오른 주유소 기름값은 가계를 주름지게 했고, 쓰레기봉투를 사재기하는 보기 드문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물가 상승에 대한 서민들의 걱정도 갈수록 커졌다. 천만다행으로 8일 오전 외신을 통해 반길만한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과 이란이 앞으로 2주간 휴전할 것에 합의했다고 한다. 7일 밤까지만 해도 미군이 이란 내 각종 시설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예고하고 있었던 터라 우려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휴전 협상에는 파키스탄이 중재자 역할을 하며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 시간 2주 연장을 제의한 파키스탄의 의견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의 즉각적이고 안전한 개방’을 휴전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간 이란은 대외적으론 미국에 대한 결사항전을 선언하면서도 파키스탄의 2주 휴전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왔다. 전쟁이 오래 지속될수록 돌이킬 수 없이 피해가 커질 게 분명하니까. 이 기간 동안 두 나라가 적극적 협상을 통해 휴전이 종전(終戰)으로 가는 평화의 길을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6-04-08

칼럼

포스코 직고용, ‘결단의 크기’만큼 ‘실행의 정교함’이 필요하다

포스코가 협력업체 근로자 7천여 명을 직고용하기로 결단했다. 오랜 갈등을 매듭짓고 지역사회와 산업 현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이번 결정은 단순한 고용 형태의 변화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와 직결된 책임 있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더욱 뜻 깊다. 다만 큰 결단일수록 그 이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발표 자체만으로 모든 과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평가는 선언의 순간이 아니라, 그 결정 효과가 현장에 얼마나 안정적으로 안착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번 직고용이 진정한 상생의 결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과제도 적잖다. 노사정이 전환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현실적 과제들을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 직고용 전환의 대상과 기준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투명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같은 현장에서 함께 땀 흘려온 이들 사이에서 충분한 설명 없이 희비가 엇갈린다면, 기대했던 상생은 또 다른 불안과 상대적 박탈감으로 바뀔 수 있다. 특히 전환 대상에서 제외되는 인력들에 대해서는 어떤 보호와 지원 방안이 뒤따를 것인지 분명한 설명과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둘째, 기존 협력업체의 존립 문제에 대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오랜 시간 포스코와 함께 생산 현장을 지탱해 온 포항 산업 생태계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이번 조치가 오랜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협력업체의 경영 기반이 급격히 흔들려 또 다른 고용 불안이나 지역경제의 부담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협력업체가 앞으로 어떤 역할로 지역 산업과 공존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도 함께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직고용 이후의 처우와 근무체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일도 중요하다. 고용 형태의 변화가 실질적인 책임감과 소속감으로 이어져야 하고, 기존 인력과 전환 인력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한 관리가 뒤따라야 한다. 또 과도기적 상황에서 안전관리와 생산운영에 단 한 치의 공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직고용의 핵심 취지 중 하나가 안전관리체계의 혁신에 있는 만큼, 그 성과 또한 현장에서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포항은 철강과 함께 성장해 왔다. 포스코의 변화는 곧 포항의 변화다. 수천 명의 고용 안정이 가져올 긍정적 파급효과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이 결정이 지역 협력업체 생태계와 주변 상권 전반에 미칠 영향까지 함께 더 고민하고 숙의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이번 포스코의 결정이 기업 내부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포항 전체를 살찌우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포항제철소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필자는 이러한 이유로 직고용 발표에 앞서 시민의 눈높이에서 우려되는 현실적 문제들을 포스코 측에 전달한 바 있다. ‘결단의 취지에는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전환 기준의 투명성, 제외 인력과 협력업체에 대한 대책, 조직 융화와 안전관리 방안, 지역경제에 미칠 영향까지 폭넓게 검토해 달라’는 것이 의견의 요지였다. 이러한 의견 제시는 이번 결정의 의미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결단이 품고 있는 뜻이 큰 만큼 그 결실의 온기가 고스란히 포항 바닥 곳곳에 퍼졌으면 하는 차원이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선언이 클수록 실행은 정교해야 한다. 포스코의 경쟁력은 곧 포항의 경쟁력이다. 포스코의 이번 직고용 결단이 현장의 세밀한 목소리까지 담아내어 전환기의 불안과 충격을 최소화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안착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노사와 지역과의 진정한 상생이다. /국민의힘 이상휘(포항남·울릉) 의원

2026-04-08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부정적으로도 생각해 봅시다

참 아끼는 동생이 한 명 있다. 의리가 있고 언행이 솔직해서 여러모로 믿음이 가는 동생이다. 그런데 그에게 딱 하나 고쳐지지 않는 단점이 있다. 바로 시간 약속의 문제다. 그는 항상 늦는다. 적게는 일이십 분, 많게는 한두 시간까지 늦어 주변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인다. 그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나와의 사적인 약속에 늦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해줄 수 있지만 그가 아주 중요한 약속에서 늦는 바람에 낭패를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항상 갖고 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고민을 토로했다. 자신도 그런 문제를 충분히 알고 있는데,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충고하는 것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한 마디 했다. “넌 지나치게 긍정적이야.” 그가 나와 오후 두 시에 시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상황이라고 상상해보자. 그의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로 30분을 가서 버스로 갈아타고 30분을 가면 시청에 도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그는 그것을 한 시간 거리라고 생각하고 한 시에 집을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계산이다. 한 시간 만에 그가 도착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순간이동을 해야 하고, 역에 도착하자마자 때마침 지하철이 도착해야 하며,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도착해서 문이 열려야 한다.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교통체증 같은 것도 절대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변수는 언제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고 때때로 최악도 일어날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작은 일이 하나 생길 때마다 도착시간은 몇 분 씩 지연되고 그것들이 더해져 한 시간 두 시간을 늦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는 데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 지금은 조금 덜 해진 것 같지만 온 세상이 ‘긍정’이라는 말에 미쳐있는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책들이, 당시 티비속에서 ‘긍정! 긍정!’을 외치던 어느 예능인처럼 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유행이 다소 못마땅하게 느껴졌던 것은 내가 부정적인 사고를 많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는 불만과 걱정이 많고, 세상 사람들과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긍정 일변도의 사고는 일종의 마취제다. 걱정과 불안은 확실히 삶을 괴롭게 하는 일이고,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확실히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마취제에는 어떠한 치유효과도 없다. 상황이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저 긍정을 외치며 고통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환부가 곪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치료하려고 하기보다는 마취제로 버티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통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라도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고, 아니면 애초에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이다. 부정적인 사고는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한다. 문제를 인지하고 이것이 심화되었을 때 내가 겪게 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빠르게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부정적인 사고다. 행여나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를 미리 염려하여 그 가능성을 낮추는 것도, 아니면 그것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부정적인 사고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덕분에 나는 보다 원활하게 내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먼 지역에서 공연이 잡혔을 때 최악의 교통상황을 상상하고 여유롭게 출발하거나 전날 미리 현장 근처에 숙소를 잡고 잠을 자는 것, 혹시나 공연장에 갖추어져있지 않을지도 모르는 장비를 미리 여분까지 넉넉하게 챙기는 것. 이런 것들이 나를 지켜준 횟수가 꽤 많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성향이 처음부터 내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긍정이 안일함이 되는 바람에 박살 나 본 경험이 내게도 몇 번 있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내게 준 소중한 가르침이다. 긍정과 부정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단어만 보면 ‘긍정’이 긍정적이고 부정이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무엇이 옳고 다른 쪽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매사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동생의 태도가 부러울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 나를 지켜준 부정의 가치를 믿는다. 그에게도, 내게도 둘 사이의 균형을 찾아내는 지혜가 있길 바란다. /강백수(시인)

2026-04-08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영원 같은 잠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스포를 일부 포함하고 있음을 알린다. 최근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보았다. 두 시간 반이 넘는 긴 러닝타임 동안 인상적인 장면이 꽤나 많았지만, 영화관을 빠져나오며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잠에 대한 이야기였다. 주인공 그레이스(인간)와 로키(외계인)의 첫 만남 후, 로키는 잘 자라는 그레이스의 인사에 자는 모습을 지켜봐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자는 모습을 지켜본다니, 인간의 관점에선 다소 소름 끼치고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레이스도 같은 이유로 로키의 제안을 거절하지만, 로키는 진지하게 덧붙인다. 잠들었을 때는 위협에 대비할 수 없으므로 서로 지켜봐 주는 거라고, 지켜봄으로써 지켜주는 거라고. 이들은 영화 내내 가까이에서 잠을 자며, 서로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또 지켜봐 준다. 그레이스의 지친 잠을 로키가 지켜주고 로키의 영원 같은 잠을 그레이스가 지켜준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잠’은 필수 요소이다. 포유류 중에 가장 잠을 적게 자는 것으로 알려진 코끼리바다표범도 하루 두 시간은 숙면을 취해야 한다. 물론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처럼 수면 시간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생물도 있지만, 대부분의 생명체에겐 길든 짧든 일정한 수면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몸은 재정비에 돌입한다. 과학적으로 수면은 뇌와 신체를 회복시키는 시간이다. 수면 중의 뇌는 깨어 있는 동안 쌓인 노폐물을 내보내고, 기억을 정리한다. 우리의 몸은 세포를 재생하고 면역 체계를 강화한다. 잠은 집중력과 기억력이 상승하며 스트레스가 완화될 뿐만 아니라 각종 성인병과 질환을 예방해주는 효과까지 있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활발한 우리의 몸과 달리, 잠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정신은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꿈을 꾸기도 하고,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에 빠져 그저 어둠밖에 없는 공간에 머물기도 한다. 의식은 사라지고 자아는 희미해진다. 잠이 우리의 의식을 꺼트리는 일이라면, 그 시간에 우리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인지, 어린 시절 대부분의 인간은 홀로 잠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모는 아이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아이는 부모가 곁에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훗날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 옆에서 잠을 청하거나, 아프고 병든 이의 잠을 지켜준다. “잠든 모습을 지켜본다”는 로키의 말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잠을 지켜보며 살아온 것이다. 영화 말미에서 로키는 그레이스를 구해주다 큰 부상을 입고 영원과도 같은 긴 잠에 빠진다. 로키의 잠자는 모습은 꼭 마비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얼굴도 없기 때문에, 그레이스는 로키가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깨어날 수도, 그러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레이스는 묵묵히 잠든 로키의 곁을 지킨다. 연구하고 알아낸 것들에 대해 들려주면서 로키가 깨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란다. 그레이스는 이제 로키가 부탁하지 않아도 로키의 잠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잠자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 그건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당신이 건강하지 않아도, 기쁘지 않아도, 그 어떤 상태일지라도 함께하겠다는 가장 조용하고 깊은 형태의 언어. 나의 무방비한 모습을 기꺼이 보여주고, 또 상대의 무방비한 모습을 기꺼이 지켜보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는 신뢰이자 다정한 행위. 그것이 바로 사랑 그 자체일 거라고 나는 믿게 되었다. 우리는 매일 잠들고 또 잠에서 깬다. 몸이 서서히 이완되고 의식이 점차 흐려지다가 마침내 어둠이 찾아올 것이다. 소리를 비롯한 감각이 차단되고 나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갈 것이다. 다행히 내게도 그 시간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그 사람의 잠을 지켜본다. 가장 무방비하고 연약한 순간을 지켜본다. 우리는 같은 시간에 잠들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시간에 깨어나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가 잠든 동안 나는 지독한 불안과 고독감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장 약한 모습을 지켜보려면 반대로 나는 가장 강해져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외롭지 않게 잠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영원에 가까운 잠일지라도. /양수빈(소설가)

2026-04-08

사설

대구시장 선거 이슈가 된 ‘2년뒤 TK통합’

지난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여·야·정 민생경제협의체’ 회담에서 대구·경북(TK) 행정통합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이날 회담이 중동발 경제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성사됐지만, 여야 대표가 자연스럽게 TK행정통합이 무산된 데 따른 의견을 나눴으며, 이재명 대통령도 “야당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겠다”고 언급했다. TK행정통합을 먼저 거론한 사람은 민주당 정청래 대표였다. 그는 “TK, 대전·충남 행정통합도 여야가 잘 합의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누구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여러 차례 TK행정통합 무산이 국민의힘 책임이라고 몰아갔지만, 이날은 ‘무산돼 안타깝다’는 말로 수위를 조절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이에대해 “TK통합, 대전·충남 통합이 안 된 것에 대해서는 저희도 안타깝다. 우리는 통합 자체를 반대했던 것이 아니고, 내용상에 이견이 있었다”고 하자,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먼저 추진하자고 해놓고 반대하니 당황스러웠다”고 대응했다. 정 대표는 이날 “TK 행정통합에 대해서는 법사위가 열리기 전 제가 추미애 위원장에게 통과시키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기억한다”며, TK통합에 대한 자신의 찬성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정 대표의 이러한 발언은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가 TK행정통합 재추진 의사를 밝힌 직후에 나왔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김 후보는 전날인 6일 기자들과 만나 “시장에 당선되면 2년 뒤 총선에서 TK통합단체장을 선출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다음 TK단체장이 4년 임기를 다 채우면 차기 정권이 통합인센티브를 준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재명 정부에서 행정통합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김 후보가 제시한 TK통합 일정은 부산·경남(PK) 통합 스케줄과 같아 정청래 대표가 영남권 민심을 의식해서 TK통합 문제를 거론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민주당의 속셈이 어쨌든, ‘2년 후 TK통합’이 이번 대구시장 선거의 이슈가 돼서 구체적인 로드맵이 나오길 기대한다.

202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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