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 생각의 빛
세상의 논란, 소용돌이의 한 귀퉁이에 서 있어 마음 편할 수 없는 나날이다. 지난 31일, 토요일, 서울대학교 신양학술정보관에서 설악무산(雪嶽霧山) 스님을 추모하는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헤아려보니 벌써 어언 7년. 2018년 5월 26일 원적에 드셨다. 세수 87세요, 승납 60세이셨다. 그때 최동호 선생님, 권성훈 시인과 함께 마지막 누워계신 곳으로 갔을 때, 병풍 뒤 유리관 안에 계신 스님께서 눈을 반짝 뜨시고, 너 왔느냐, 하셨다. 유리관에 맺힌 이슬이 마침 스님의 감으신 눈에 맺힌 것이다. 다시 살아나셔, 한 말씀, 제대로 살라, 하시는 듯했다. 사제이신 홍사성, 김병무 선생이 엮으신 ‘무산 스님의 방할’, 생전의 스님 언행과 법문을 담은 책이 있다. 이를 보면, 무산은, 대승불교의 정신은 불심(佛心), 부처님의 마음은, “중생심(衆生心)”, 중생의 마음에 있다 하시며, 스님들이 좋은 곳에 앉아 덕담만 하면 어찌 부처님이 되겠느냐, 저자거리에 시장바닥에 나가보라 하셨다. 불경에 전하는 화두(話頭), 1700 공안(公案)에 속지 말라시며 뜰 앞에 있는 나무가 잣나무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겠느냐고도 하셨다. 옛날 중국 조주 스님의 문답에, 어느 스님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까닭을 물으니, 스님 답하시기를,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라 하셨다는 것이다. 불법의 이치를 묻는 스님에게 그 실상(實相)을 보라 하셨다는 것인데, 그야 내가 제대로 알 리 없다. 무산은 화두에 묻히지 않도록 안거(安居) 수행을 끝내고 산문을 나서는 스님들께 해제 법문에서 그렇게 이르셨다는 것이다. 세속 세상, 보통 사람들, 서민들 살아가는 곳에 나아가, 수행에서 얻은 것이 참 깨달음인지 아닌지, 제대로 얻은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한 번 자문해 보라, 하셨다는 것이다. 시비인(是非人)이 되지 말고 무사인(無事人), 일상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는, 애써 구하려 하지 않는, 생각을 내려놓고 볼 줄 아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도 경계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그 혼탁한 가운데 불의가 정의가 되고, 권력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마당에, 옳고 그름을 가려 그 세상이 언제까지, 어디까지 그렇겠느냐고 매서운 추위의 겨우내, 시절 좋은 봄에도, 세월 가는 줄 몰랐었다. 시비(是非)에 묻혀, 저 숲속의 마르고 구부러진 나무 되기를 꺼리고 세속 세상에 나와 싸우려 하기를 거듭했다. 사제 되신 분께 그분의 사유에서 무엇을 얻어야 하느냐 여쭈니, 수행해서, 참선해서 부처님 되신 후에, 중생을 구하려 하는 불교에서, 부처처럼 살아가야 부처가 되는 도리로, 중생 속에서 부처의 삶을 살아야 부처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화두 수행이 공허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수행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루신 것이라 한다. 중생들의 삶이, 내게 제대로 비추이도록, 나 또한 중생의 하나임을 잊지 않도록 마음 거울을 닦아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하리라 생각한다. ‘세상 마음’이 투명해지도록.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2025-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