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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스터트롯’과 국민적 문화, 그리고 ‘전통’의 쇄신

온갖 화제를 남기면서 트로트 열풍을 일으킨 TV조선의 ‘미스터트롯’이 얼마전 최종 우승자를 가려내면서 성황리에 끝났다. “10년 만에 국민예능의 탄생”이라는 자찬의 말에서 보듯 그것은 ‘국민적’ 수준의 흥행이었고, 특히나 이 경연에서 두드러진 영남출신 참가자들의 약진은 코로나19의 최대 감염지역으로 고통받고 지쳐가는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그나마 흥겨운 시간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렇듯 새롭게 복권된 대중음악 장르와 취향 뒤에 깔린 사회적 배경도 흥미롭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국민적 ‘문화’와 그에 의한 대중적 취향, 감성의 도야, 그리고 ‘한국적 전통’이 현재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주기도 한다.사실 35.7%의 시청률, 최종 문자투표 773만 건은 예전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국민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TV채널이 3∼4개에 불과하고 축구 한일전이나 올림픽,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면 모든 채널이 동일한 프로를 방영하는 것도 잦았던 1990년대까지와 현재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채널이 200개가 넘는 케이블TV·종편방송의 시대, 그리고 이것마저도 온갖 인터넷 개인방송, 유튜브, 팟캐스트 등이 또한 잠식하고 있는 오늘날 미디어 풍요의 시대에 그 정도의 시청률과 참여율은 경이롭다고 할 수 있다.특히나 이를, 젊은이와 진보적 성향의 인구층의 방송인 것처럼 간주되는 JTBC가 추구해온 음악예능의 방향과 비교해보면 많은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JTBC의 음악예능은 그간 ‘수퍼밴드’나 ‘팬텀싱어’, 그리고 ‘비긴어게인’등에서 보듯 중노년세대를 ‘소외’시키는, 젊은이들의 상당히 서구적이고 ‘글로벌’하면서 세련된, 고급문화적인(크로스오버) 취향에 맞추고 따라올 것을 종용하는 듯한 방향을 의도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추구해왔다. 특히 ‘수퍼밴드’의 경우 해외 교포 출신 참가자들이 두드러지고, 무엇보다 한국말로 된 음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영어와 최신 해외음악에 익숙치않은 중노년세대가 애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이 프로가 불러일으킨 소셜미디어 상의 폭발적인 관심과 대비되게 그 시청률은 ‘미스터트롯’에 비하면 초라했다.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미스터트롯’의 성공에서 특징적인 점은, 과거에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었지만 현재는 ‘전통가요’라고 불리며 주변부 장르가 된 트로트에서 팬덤(fandom), 특히 매우 능동적인 중노년층 팬덤이 형성되고, 젊은 세대에게 이 장르가 감상할 수 있는 음악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형편이 어려운 음악인들이 트로트 장르에 최종적으로 귀착하는 가장 큰 요인은 이 장르가, ‘방송국’과 SNS, 음원차트 같은 중앙집중적 네트워크와는 독립된 수익원을 제공하는 ‘행사’를 활동무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 장르에서는 노래가 가진 ‘음악성’에 대한 ‘숨죽이고 듣는 감상’보다는 노동과 일상의 피로와 따분함을 날리기 위한 ‘흥겨운 쇼’가 더 결정적이다. ‘발라드 장르의 수호자들’로 구성된 MBC ‘복면가왕’ 판정단의 단골 성원들이 노골적으로 트로트를 음악성이 없는 장르로 비주류, 노인들의 장르로 폄하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하지만 그 판정단(소위 ‘마스터’)에서도 언급했듯이, ‘미스터트롯’은 트로트 음악도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뿐 아니라 실제 역량을 보여주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음악성’의 차원에서 높이 평가하고 즐긴 곡들은 영탁의 ‘추억으로 가는 당신’, 김호중의 ‘무정블루스’, 임영웅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혼합장르적 성격을 가진 무대였다는 공통점을 갖는데, 우승자인 임영웅의 트로트 또한 사실은 발라드 계열 음악을 통해 다져진 그의 섬세한 감성과 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된다.필자가 여러 음악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이때껏 발표된 곡으로서나 음악인의 저변 층으로서나 한국대중음악이 가진 높은 수준과 다양하고 넓은 역량이다. 하지만 정작 더 놀라운 것은 한국 관객들의 수준이다. 새로운 것과 더 나은 음악성에 대한 이들의 판단은, ‘전문가’로 자처하며 ‘일반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연예인 판정단, 전문음악인보다 훨씬 더 열려 있고 전향적이다. 관객들은 그것이 ‘데스메탈’, ‘사이키델릭’, ‘크로스오버’ 등 낯설은 음악이건 클래식적 감성을 가진 음악이건 해묵고 뻔해 보이는 예전 음악이건 간에 들려지는 음악이 그 완성도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응용과 편곡이 돋보이면 ‘눈물 짜게 하는 데 집중’하는 ‘정통’ 발라드나 ‘정통’ 트로트를 서슴없이 제쳐버리고 그에 높은 지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미스터트롯’이건 ‘복면가왕’이건 ‘수퍼밴드’건 화석화된 ‘전통’을 고수하고 반복하려는 모습은 오히려 판정단, 심사위원이나 제작진에서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오히려 관객들은, 자신이 해온 음악의 관성, 그리고 참가자에 대한 애착과 편애에 휩쓸리기 쉬운 이들보다 훨씬 더 공정한 평가를 무대 자체에 대해 내리고 있다.사실 트로트에 대해 가진 반감과 낮은 평가는 그간 ‘우리의 전통’이라 불려왔고 강권하는 것에 대한 그것인 측면도 있다. 음악적인 측면을 빼고 트로트 곡 가사에 담긴 내용만을 본다면 그 주류는, 모든 대중음악에 공통적인 남녀의 사랑과 이별 외에 효도, 고향, 향토 찬양, 해방 이후 한민족의 고난에 대한 강조, 어지럽고 거친 현대화가 휘몰아치는 사회생활 속에서 출세에의 욕구가 좌절되는 등의 감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미스터트롯’의 몇몇 무대는 이처럼 ‘꼰대스러운’ 정서와 취향에 대한 온갖 반감과 괴리감을 단숨에 달려버렸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김호중이 리드한 ‘패밀리가 떴다’ 팀의 마지막 곡인 ‘희망가’였던 것 같다. 물론 시대를 요약하는 듯 맑은 밤하늘 아래 걸려 있는 달과 벚꽃이 있는 고풍스러운 풍경의 배경 화면은 그 세팅 자체만으로 이미 음악이고 예술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곡과 가사가 100년 가까운 시간을 넘어 울림과 공감을 낳게 한 예술적 성취는, 록음악의 고재근, 클래식의 김호중의 음악성이, 시원하고 울림있는 음색과 성량이 돋보이는 이찬원, 그리고 희망을 고대하는 어린 정동원의 쓸쓸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와 만났을 때 이루어졌다.이제 한국사회는 고도로 개인화되고 개개인의 예술적 취향 또한 다양화되고 ‘현대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노년세대의 차에서 ‘뽕짝’음악만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70년대 통기타 음악, 8∼90년대 발라드와 해외 팝 음악, 임재범, 전인권의 음악을 시끄럽게 틀고 다니는 노인들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취향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의 변화는 가치와 이념, 생활양식에서의 변화와도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우리가 우리의 ‘전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은 외국인에게 내보이기 위해 박제화시켜 놓은 것들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호소력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삶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높고 넓게 승화시켜주는 가치와 의식, 정서, 즉 문화라 불리는 대상들의 모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을 찾아가는 일은, BTS나 싸이의 성공에 한껏 고무되어 빌보트차트 1위를 탈환하려 하거나 “100억가치 트롯걸”, “글로벌 수퍼밴드” “한류 트롯스타”를 찾는 일과는 다르며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경북대 강사

2020-04-01

코로나19 위기와 ‘나쁜 정치’, 그리고 ‘사회’의 힘

우리들 한 명 한 명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자기 자신이다. 우리의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며 우리의 행위는 자신의 감정과 이해관계에 지배된다. 그런 연유로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와 이익에는 열렬하고 예민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줄 결과에는 무심하기 마련이다. 이런 양상은 자신이 속하거나 분류되는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데, 흔히 사람들은 자신을 특정집단의 일원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일에 격분하지만 타인을 특정집단의 일원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에는 스스럼이 없다. 이렇듯 자기와 타인에 대해 인간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이중적인 태도는 대단히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적인’ 감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의 최대의 진원지인 신천지교회의 반응 또한 정확히 그런 ‘합리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사태의 발발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을 지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조직의 보전과 면책을 위해 신도들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만을 당국에 마지못해 제공해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 또한 피해자고 협조를 잘 하고 있으니 자신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마녀사냥’을 중단해 달라는 적반하장같은 논평을 아직도 내고 있다.이제 확진자가 3천명을 넘어서고 의료지원이 태부족한 우리 대구 경북민의 불안감과 위기의식은 극에 달해 있지만 이 국가적 위기에 대한 정부와 여당의 대응과 언행은 완벽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통합되어 새롭게 탄생했다는 보수세력의 현 사태에 대한 대응은 실망을 넘어 그 구태의연함과 ‘선동성’이 가증맞기까지 하다. 이들의 공세는 먼저 현 정부가 대구 경북에 대한 배제의 감정을 조장한다는 데 집중되었다. 사실 ‘대구코로나’라는 표현은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일명 ‘조중동’ 삼대 일간지와 종편방송이 더 앞장서서 벌인 일이고, 그 성향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선정성과 공포의 상업성에 편승하려는 몰지각한 언론과 누리꾼들에게 한정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정부발표에서 유독 ‘대구 코로나’, ‘대구 봉쇄’라는 말들에 밑줄을 그어 가면서 대구 경북지역이 박해받고 있다는 감정을 부추기고자 하는 이들은 타지역으로부터의 차별과 경원시를 우려하는 대구 경북지역 시민들의 예민해진 마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여념이 없다. 정부와 여당이 현 사태를 정쟁에 이용하고 ‘나쁜 정치’를 하고 있다고 성토하지만 정작 나쁜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은 이들인 것 같다.그에 비해 몇몇 누리꾼들의 논평, 즉 미래통합당 관계자들이 코로나19를 ‘우한폐렴’이라 부르면서 ‘대구코로나’라는 명칭을 문제삼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비판은 좌파적 사고에 특유한 약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어찌 우한과 대구가 동일하겠는가? 우한과 중국은 외국이지만 대구의 시민은 동일한 정치공동체, 사회 속의 동포요 동료 시민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보수 측은 사태 초기에 중국인에 대한 전면적인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공세를 집중하였다. 그 요체는 꽤나 단순하고 낯설지도 않은 것으로, ‘중국 눈치를 보고 자국민보다는 중국민을 더 생각한다’는 것이다(이 문장에서 중국 대신 ‘북한’을 넣어보면 꽤나 익숙한 논변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이는 우리네 마음속 가장 강력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즉 우리끼리 뭉쳐서 이익을 도모하고 손해보는 일은 없어야 하며, 무엇보다 ‘남에게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오기, 그리고 강대국의 눈치를 안 본다는 원초적인 ‘자존심’을 자극하는데 집중하는 지극히 단순한 선전선동이다. 미래통합당의 황교안 대표는 정부가 마스크 300만 개를 중국에 보내줬다는 가짜뉴스를 버젓이 공표하면서 이를 계속 이슈화했고, 이는 박능후 보건장관을 몰아붙여서 그의 실언아닌 실언을 이끌어내어 ‘중국 탓인데 우리 탓을 한다’는 낙인을 찍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그처럼 고도의 정책적 판단에 있어서 무엇이 옳은지 자신 있게 말할 지식은 필자에게 없다. 하지만 우리는 외국과의 교류가 국민경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의 길을 내내 택해왔고 특히나 중국, 일본, 미국은 좋으나 싫으나 우리가 깊이 의존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일본과 미국이 한국인 전면입국금지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러한 상호의존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서울이나 제주에서 마스크도 안한 채 식당에서 식사하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중국인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아마도 중국인과 중국발 입국자를 초기에 전면 봉쇄했으면 마음도 흔쾌하고 강대국에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미래통합당이 여당이었다 한들 중국인의 전면입국 금지와 같은 조치를 전격적으로 취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는다.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국가적 위기 규모로 발전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대구신천지교회의 네트웍을 통해 대규모 감염이 일어난 이후이다. 접촉이 제한된 외국인이 아니라 일상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자국민의 관리가 더 결정적이라는 박능후 장관의 발언은 유쾌하지는 않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며 일정 측면에서의 대구경북지역의 봉쇄는 방역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그럼에도 미래통합당은 한편에서는 당대변인이 정부가 신천지교회를 매개로 한 대규모 감염 사태의 경로를 아직 규명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집단에 문제를 귀인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평을 당대표가 내고 있고,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집회강행을 불사하는 전광훈 목사 등의 막무가내 행보도 애써 비판하려 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10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자는 자신을 아시아인으로 차별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면서도 흑인 등 다른 소수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과 경멸, 그리고 주류 백인사회에 대한 숭배와 ‘짝사랑’은 대단했던 현지 한국인의 모습이 미국인들과 대비되어 매우 환멸스러웠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인상은 이번 사태의 전개과정을 보면서 단번에 바뀌었다. 코로나 전염위험이 아직 강 건너 불구경이던 시기에 TV를 보던 필자는 중국 각지에서 우한으로부터 오는 동포 시민들을 막고 봉쇄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을 보고 꽤나 놀랬다. 역시나 우리나라에서 감염자가 늘자 중국정부와 중국시민들은 염치고 격의고 상관하지 않고 한국인 격리와 봉쇄로 내달리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우한교민의 격리 수용지로 결정된 아산의 주민들은 우리 교민들을 따듯하게 환대하였고, 지금 전국의 많은 이들은 대구 경북지역에서 묵묵히 일하는 의료진과 공무원들, 그리고 의연히 양심을 지키며 생산에 전념하고 있는 마스크제조업체들에 선물과 격려 편지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의 ‘사회’가 가진 역량이 이 정도라는 것에 안도감과 함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서두에서 말했듯 자신과 자기 집단의 이익과 안녕을 염려하고 도모하면서 타인을 단순화하고 차별, 배제하는 것은 사회 속 인간의, 그들이 만든 집단의 지극히 자연스럽고 강력한 성향이다. 하지만 ‘사회’를 작동시키는 한 사회의 역량은, 증오와 따돌림, 집단적 거부, 무질서와 이기주의의 횡행으로 치닫기 쉬운 그러한 성향을 제도와 도덕의식을 통해 제어하는 정도를 통해 드러난다. 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우리 사회를 마비상태로 몰고가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는 뜻밖에도 어떤 것이 ‘나쁜 사회’이고, ‘나쁜 정치’를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다른 때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구자혁 경북대 강사

2020-03-04

‘한국적’ 보수와 우리의 과거

요즘 보수 통합신당을 추진하는 움직임이 다가오는 총선에 대비하여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 더불어 그 주요 정치적 기반인 영남지역 전체도 술렁이고 있다. 과연 새로운 보수, 보수의 혁신은 준비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수사일뿐인가? 정치세력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부분이 있겠지만 유승민 의원 등에 의해 진행되어온 바른 정당계열의 흐름이 독자적인 가치와 지지세력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다시 전통적 보수에 해당하는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시도하는 것은 필자 개인으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어쩌면 한국 정치에서는 권력의 탈환과 유지 외에 다른 실질적인 가치나 이념, 정책 상의 진전이나 쇄신을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무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넓게 보면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왔고 현재에 이르러 참으로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양극화(polarization)의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이는 새로운 보수, 보수의 혁신이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정치가, 그리고 그 이전에 우리 일상의 사회문화가 양극화의 논리와 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은 이 양극화의 두 ‘극’ 중 보수가 밟아온 궤적을 살펴 볼까 한다. 과연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보수(保守)’라 함은 거창한 도덕이나 이념까지는 아닐지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와 선택, 행위방식을 지칭하는 것일까?한국 보수, 정치적 보수의 역사는 색다른 면이 많이 있다. 전통적 친일 지주세력들의 정당으로 시작된 한민당을 진보정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한국 보수정치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버림받은 이들보다는 제1공화국 하의 자유당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한국 정치의 역사는 경쟁의 외관을 갖고 있긴 하지만 실상 일당지배의 역사, 즉 최소한 정권 교체가 거의 기대되지 않는 그런 정치지형이 오랫동안 유지되었고 이는 일본의 자민당의 장기집권 양상과 유사한 모습이다.이런 배경에서 우리가 보수라고 부르는 일련의 정치세력의 원류는 특별히 자신을 보수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었다. ‘진보’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 보수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6·25전쟁과 미국과의 강한 동맹관계 때문에 좌파의 이념과 가치가 정치공간에 들어올 가능성은 애초에 제거되었고, 그나마 자유주의, 반공주의를 일반적으로 주창하는 이들 속에서 그 중 좀 더 진보적이고 개혁적 색채를 가진 이들의 실제 수권 가능성은 대단히 미약했다. 그 이름을 나중에야 비로소 받게 되는 이 한국의 보수는 그저 지배세력, ‘사회지도층’으로 스스로를 구별하여 인식하면 족했고, 이들은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위한 국가와 재벌기업의 공고한 동맹과 이에 협력하는 여타 사회제도들 내의 엘리트들로 구성되어 한국 사회를 불과 2∼30년만에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여기서 이 ‘혁명적’이라는 말이 한국 보수의 색다름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최소한 선진 유럽, 북미, 호주 등지의 나라에서 어떤 집단이나 세력을 ‘보수(conservative)’라는 말로 지칭할 때에 그것은 큰 무리 없이 이들이 전통과 안정, 도덕성, 민족 등을 중심가치로 키워드로 간직한 이들임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물론 보수정치세력은 어느 사회든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세력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발과 기업활동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이 잦기는 하지만, 보수라는 말이 그것이 단지 현 상태, 기득권의 옹호라는 의미 이상이려면, 즉 독자적인 정치사상과 사회적 가치라는 중심을 갖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위의 가치들을 부분적으로라도 대변할 수밖에 없다.이에 비해 한국사회의 전통적 지배세력, ‘영원한 여당’이었던 한국의 보수는 현대화, 개발과 성장, 실효성(혹은 실리성), 그리고 미국, 일본과의 ‘혈맹적’ 결속을 불변의 교리로 간직해 왔다. 다시 말해 북한, 중국, 소련에 대항한 어느 정도 종속적이지만 미국, 일본과의 정치, 경제적 동맹의 우산 아래서, 양적 성장을 위해 밤낮으로 줄달음치고, 정-관-재계의 부정한 결탁도 서슴치 않으며 사회안정과 질서, 무엇보다 생산증대를 위해 강제적으로 사회질서를 부과하고 노동기본권을 포함한 인권 침해를 서슴치 않는 것이 보수를 구성하는 엘리트들과 국가의 모습이었다.여기서 보듯, 자유와 평등은 차치하고라도 본래 보수의 가치인 ‘전통’과 ‘민족’은 아무리 공식 연설과 주장에서 강조될지라도 생산과 성장, 현대화, 그리고 국가(민족과는 구별되는)에 의해 실제로는 대부분 묵살되는 항목이었다.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그것은 서양적 의미로 본다면 ‘진보’ 쪽에 더 가까운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또한 현재 보수세력의 가장 목소리 크고 전투적인 부분인 태극기 집회에 꼭 미국의 성조기가 같이 휘날리는 것이나, 징용배상문제에서 촉발된 일본정부의 경제보복에 대항한 한국정부의 조치에 대해 아베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들에게서 공공연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는 한국의 보수가, 민족문제의 가장 예민한 부분인 ‘친일파’라는 비판조차도 무릅 쓰게 하는 다른 전통적인 목표, 애착의 대상이 있음을 보여준다.이런 모습들을 가치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점이 없지 않지만, 한국 보수의 이러한 모습은 동시에 우리가 살아온 모습이기도 하다. 근대화를 향해 줄달음치는 국가와 지배엘리트, 기업의 독촉과 강압 속에서 우리는 국가와 회사가 하라는 대로 따라가고 열심히 일하며 그 속에서 경쟁하고 자신과 가족의 출세와 영달을 도모하며 살아왔다. 또한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떤 기회도 마다하지 않고 산도 허물고 강도 메우며 부귀영화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친인척은 물론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하는 것도 당연시했고 이 모두는 근대화와 국가,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1970, 80년대를 살아왔고 추구해온 삶의 지배적인 부분은 바로 이런 보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이런 한국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지형에 새로운 요소가 대두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박정희 정부 하에서 사회적 정의와 민족적 민주적 민중적 정통성, 평등이라는 기치로 수렴되었지만 내내 만년 재야에 머물렀던 이 흐름이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정치세력화하고 87년 민주화를 거쳐 1997년에 와서 이들에 의한 독자적인 정권교체가 시작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한국의 보수는 정교화되고 고매한 정치사상적 이념까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지배적인 양태, 즉 우리가 살아오고 우리 사회가 작동해온 방식의 어떤 지배적인 모습을 대변하며 이것은 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정도만큼 보수가 주창하는 혁신도 그에의 필요성과 압박은 별반 중요하지 않게 된다.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보수가 놓인 질곡은 곧바로 우리 사회가 벗어나지 못하는 질곡으로 그 핵심에는 바로 경쟁과 개발, 출세라는 한국 보수, 아니 현대 한국인의 중심적 가치가 놓여 있다. 한국적 진보의 유별남과 그 문제적인 측면을 보기 전에 먼저 이렇듯 우리의 과거의 모습을 요약하는 한국 보수의 가치가 특히 대구경북지역에 어떤 고유한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질곡을 낳았는지를 다음 마당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자혁 경북대 강사(사회학)

2020-02-12

날 선 합리성 속에 우리가 잃어가는 것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근대화가 한참 진행된 후에도 여전히 긍정적 의미를 가져왔던 인정(人情)이나 의리(義理)와 같은 말이 언제부턴가 ‘합리적’이라는 말에 의해 대체되어왔다. 말 자체로 보자면 ‘합리적(合理的)’이라는 수식어는 이치에 맞는, 그에 합당하고 부합하는 것이라는 뜻을 갖는다. 그에 대한 영어의 대응어인 rational이라는 말에는 이성(理性, reason)에 부합하는, 즉 어디에서나 옳고 현실에 부합하는 규범과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가 쓰는 ‘합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 본래의 것이 아닌 앞선 서구에서 들어온 더 발전되고 세련된 태도를 지칭하는 뉘앙스가 담겨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건 이 말은 젊은 세대나 도회적 삶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들을 정치, 경제적으로 유인하기 위한 마케팅 슬로건으로 광범하게 쓰이면서 자신을 전통적인 보수가 아닌 ‘합리적’ 보수로 지칭하는 정치인들도 등장하게 되었다.합리적이라는 말의 현재 쓰임은 뭔가 이해득실을 꼼꼼히 따지거나, 단지 이전부터의 관행이라는 이유로 통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마트에 가면 바로 보게 되는 합리적 가격, 합리적 소비라는 말은, 부풀려져 있거나 그렇게 비쌀 이유가 없는 상품의 유통비용을 줄이고 브랜드 로열티를 없앤 가격에 제공하고 구매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합리적이라는 말이 ‘납득할만한(reasonable)’이라는 의미보다는 조금도 손해 보고 살지 않겠다는 근래에 들어 더욱 강팍해진 한국사회의 분위기, 지고는 못사는 현대 한국인의 메마른 성벽을 비추어주는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필자는 오랜 유학생활과 수도권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또 다른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지 1년이 되어간다. 이런저런 예상과는 달리 대구에서의 삶은 사람들 사이가 조밀하고 서로 밀치고 당기고 문제 삼고 삿대질이 빈번한 수도권에서의 삶과는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인구 250만이 넘는 대도시임에도 낯선 이들 간의 만남에조차 인정과 예의가 여전히 상당한 정도로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가장 신선했던 것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서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이웃사촌이나 공동체적 삶 같은 말에 딱히 열렬히 공감해본 적이 없음에도 필자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있는 사람들 간에 서로 우호적인 감정과 관심을 ‘갖고 있는 척’이라도 하는 것, 그 정도 ‘수고’를 할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은 꽤 중요한 차이(쓸모있는 것을 넘어서)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건전하고 쾌적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기실 눈에 안 보이는 ‘진심’이라기보다는 이런 ‘척’과 ‘제스처’의 관행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 부여하는 의미라고 믿기 때문이다.김찬호 선생같은 사회비평가들은 한국사회의 사회적 삶이 서로 주고받는 모멸감과 그 과정에서 쌓여가는 원한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필자의 체험으로 보건대 이 점은 수도권 도시에서 더욱 그러한 것 같다. 수도권에서의 삶을 떠올릴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손해 볼까 봐 늘 전전긍긍하고 자신을 문제 삼을까 싶어 먼저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이는 일차적으로 수도권이라는 그 좁은 지역에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많은 사람이 몰려 산다는 단순하고 기본적인 사실에 기인한다. 어이없을 정도로 상승해 있는 부동산 가격과 천만 자영업자의 파산을 먹고 사는 높은 월세는 수도권에서의 삶을 강팍하고 성마르게 만든다. 이는 단지 의식변화의 촉구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물질적 조건이지만 사태의 더 본질적인 면은 사회와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에 있는 것 같다.10년 만에 돌아온 한국사회는 어느 곳을 가던 어디에 전화하건 똑같은 ‘아기 목소리,’ 걸그룹의 말투를 듣게 되는 곳이었다. 매장에서의 친절은 번지르르하고 표준화되어있고, “2만원 되시겠습니다”라는 표현처럼 돈 액수에까지 경어를 붙이는 이상한 존대법의 인플레가 극에 달했지만 정작 그런 말들에서 조금의 마음도 배려도 느낄 수 없다. 그에 비해 필자의 집 주변에서건 포항에서건 안동에서건 사람들은 악에 받쳐 장사하는 모습이 별로 없다. 애써 호객행위하고 일부러 친절한 척하지도 않으며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판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물어보면 스스럼이 없고 성의를 보이며 응대해준다. 물론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상황이나 필자가 이들 속에 이웃이 되었을 때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런 수준과 상황에 국한되서라도 그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었다.사회학자 알랭 뚜렌(A. Touraine)은 현대적 인간(modern man)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짐가방을 들고 이제 낯선 곳으로 떠나려는 여행객의 모습이라고 했고, 뉴미디어의 철학자 삐에르 레비(P. Levy)는 정보화시대로 불리는 오늘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윤리는 ‘환대(歡待)’라고 했다. 현대화된 세상에서 우리는 모두 일종의 여행객이고 늘 어느 정도 낯선 이로서 서로와 조우하고 세상을 접한다. ‘환대’는 단지 능란한 처신과 체면을 위해 면식있는 이들을 열심히 대접하는 척하고 떠받들어 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등한 존엄을 가진 또 다른 동류 인간으로서 낯선 타인을 대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환대의 전통을 민중적 차원에서 ‘인정(人情)’이라는 말로 간직해 왔다. 공자가 말한 ‘인(仁)’이라는 유교적 덕목은 차마 그럴 수 없다, 인정 상 그럴 수 없다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서와 정오(正誤) 관념에 의존하는 윤리였다.물론 현대화된 사회, 수많은 산업과 직종, 이질적인 사회계층, 집단으로 분할되고 복잡해진 근대사회에서 이 인정의 윤리는 결코 충분치 않다. 합리적, ‘합리성’이라는 구호는 인정과 의리, ‘인간적인’ 등의 말이 끈끈하고 불합리한 결탁과 부패, 권위주의적 태도와 부당한 기득권의 옹호하는 말에 다름 아닐 때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삶은 합리성과 합리적 태도가 퍼지고 우세해지면서 더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것이 되었을 뿐 획기적으로 더 공정한, 무엇보다 더 견딜만한 것이 된 것 같지는 않다. 맹목적이고 날이 선 합리성이 발달하는 동안 우리의 삶은 인정이란 말을 통해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었던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를 잃어버린 것이다.인정과 합리성, 이 두 말 사이에서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혼란스러움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선도지역으로서뿐 아니라 전통과 보수의 상징으로도 자천타천 비쳐지고 있는 우리 대구경북지역에서 더 가중되는 것 같다. 서로 갈등하고 있는 양 진영 중 어느 한 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에는 복잡한 현실과 가치의 상태를 ‘양가적(兩價的)’이라고 부른다면 우리가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의 문제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 또한 그런 양가성과 복합성에 충실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점을 충분히 그리고 정직하게 의식하면서 한국정치, 대구경북지역의 정치가 갖는 고유한 난맥을 살펴보는 일로부터 우리의 사회적 삶이라는 엉켜있는 실타래를 함께 풀어보기로 하자. /구자혁 경북대 강사(사회학)구자혁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회학과에서 석사, 미국 Virginia 대학교에서 사회학박사 취득.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에서 박사후연구원, 학술연구교수 역임, 현재 경북대사회학과 강사. 최근의 저서로 꿈의 사회학(공저), 역동적 현대화와 한국인의 ‘우리’: 한국 집단주의의 논리와 역사적 형성이 있다.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