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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춤추는 이벤트 풍선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한참 전 일이다. 동네 귀퉁이 작은 빵가게를 개업하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다. 동네 자영업의 어려움과 단기 폐업을 많이 들었기에 ‘잘 돼야 될텐데’라는 막연한 걱정을 하며 물끄러미 쳐다봤다. 네 출발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네 자영업은 잔뜩 기대로 시작하여 낭패를 경험하고 초라하게 마감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가게의 인지도를 빨리 높여야 한다는 조바심 탓인지 개업식은 꽤 거창하게 벌리는 경우가 있다. 축하화환을 가게 앞에 진열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벤트 회사에 의뢰하여 치어걸 같은 차림을 한 여성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가게 앞에서 춤을 추거나 홍보성 멘트를 큰소리로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개업사실을 알린다. 사람모양의 풍선이 흥겹게 춤을 춘다. 인형풍선이 이벤트에 동원되어 흔들거린다.불어넣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인형 풍선을 보고 있노라니 반평생 보낸 공직생활의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깊은 연민이 밀려왔다. 경찰직을 평생업으로 삼고 살아오면서 여러 형태의 정부를 겪었다. 정부의 성향과 최고 통치권자의 국정철학을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직업공무원으로서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것 같다. 공무원은 특정이념이나 정파에 관계없이 정치적인 중립이라는 헌법가치에 충실해야하는 규범적 의무감이 있다. 인형풍선처럼 뒤에서 바람을 불어넣는대로 춤을 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관료제를 주창한 막스 웨버는 ‘공직자는 영혼이 없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가치중립적으로 정부의 업무를 충실히 이행해야한다고 이해했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그 정부의 국정 기조에 맞춘다는 인식을 가지고 일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의지나 생각은 앞세우지 않아야 기계적인 도구로서 관료제의 기본 취지에 맞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효율적 관료제를 위한 지침이었을 것이다.언제부턴가 ‘영혼이 없다’는 말은 비난의 말로 통용되고 있다. 아무 생각이나 개념없는 행동에 대한 비아냥섞인 말로 변질되었다. 뚜렷한 주관과 의식 있는 행동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이 없는 공직자’, 과연 이벤트 인형풍선 같은 것일까? 국정을 수행하는 통치권자의 정책들은 오른손이 달린 곳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넣으면 오른손이 춤을 추고 왼쪽으로 바람을 세게 불어 넣으면 왼손이 춤을 추는 그런 행태가 될 수 있다. 이에 맞춰 열심히 춤을 춘 공직자를 영혼이 없는 공직자라고 몰아세울 수만 있는 것일까? 공직자의 영혼, 공직을 맡는 동안 주권자인 국민에게 위탁해 둔 것은 아닐까? 국민은 자신들이 선택한 정부에 공직자의 영혼을 재위탁하여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닐까? 공직을 끝마치는 날 자신들의 영혼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지나친 아전인수식 해석일까?맡긴 영혼을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낡고 헤진 구멍으로 바람이 새나가서 용도 폐기된 인형풍선이 된 것 같다. 맑은 기운으로 빈 영혼을 다시 찰지게 채우고 싶다. 지금부터 내 영혼의 장단에 맞춰 신바람나게 춤을 추고 싶다. 바람따라 춤추는 이 땅의 많은 이벤트 인형풍선들이여 힘내시라!

2020-09-27

동의합니까?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지난 여름 땡볕더위와 태풍에 지친 나뭇잎들이 쉴 곳을 찾아 거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걸 보노라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한다. 소슬바람에 코트 깃을 살짝 치켜세우고 사랑하는 연인과 팔짱을 끼고 고궁돌담길을 걸었으면 하는 기분이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중년 사내의 심장 한 구석으로 촉촉한 물기가 스며든다. 왁자지껄하던 사회적 모임이 코로나로 잠시 정지되니 사람 만나는 일이 뜸하다. 의도하지 않게 사회분위기가 고독의 계절 가을에 어울리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뒤섞여 지낸 탓에 소홀했던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 느리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가을빛이 높은 요즘, 은근히 쓴 커피향이 제 몸뚱이에서 풍겼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고독을 좀 폼 나게 즐겨보고 싶어 집을 나선다. 고독을 즐기는 것은 아무래도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 잔을 들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맞은편에 아리따운 여인이 앉아 조곤조곤 말상대를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고독한 분위기는 앞자리가 비어 있는 게 좋다. 평소 잘 들리던 커피전문점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출입문에 붙은 코로나 방역 경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마스크 미착용 출입불가’, ‘손 세척’,‘테이크아웃만 가능’ 등등. 고독한 분위기를 즐기려던 마음은 사치다. 죽음과 맞선 인간의 처절한 투쟁으로 여겨졌다면 너무 과한 생각인가? 카페 안으로 들어간다. 탁자와 의자는 패잔병처럼 한쪽 구석에 쌓여있다. 객장 안에서 음료는 안 된다는 무언의 시위다.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냉큼 나가야겠다’고 느끼는 순간, 부동산 계약서 같은 종이뭉치가 들이닥친다. ‘발열여부, 출입시간, 이름, 전화번호, 개인정보동의….’ 횡으로 뻗어나가는 칸들이 죄수를 기다리는 독방 같다. 국가적인 재난상황에 대응하는 착한 시민의 책임을 다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꼼꼼히 적어나간다. 잘 적어나가던 펜이 ‘개인정보 동의’,‘개인정보 제3자에 제공 동의’란에 이르게 되니 주춤하게 된다. 개인정보가 볼모로 잡힌다. 코로나로 영업장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재하도록 행정명령이 발동된 것이다. 영업을 하는 곳에서 기록물을 잘 보관했다가 행정기관에 제출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혹시 원본은 제출하고 복사본을 업소에서 가지게 되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이르자 덜컹 걱정이 된다. 너무 무분별하게 개인정보가 나돌아 다니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개인정보보호에 관한 엄격한 법이 정착되어 개인이든 기관이든 함부로 사용치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잊을 만하면 개인정보를 팔고 사는 사건이 생긴다. 사생활 보장은 민주주의의 근본이다.세상이 디지털화되면서 사생활 노출이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세상이다. 집을 나서면 하루 동안의 내 동선은 온통 폐쇄회로 천국에 갇힌다. 스마트폰은 실시간 위치추적기다. 신용카드는 내 생활패턴의 징표다. 오로지 무인도에서 고립된 자만이 사생활 비밀이 유지될까? 그도 드론의 고공접근을 막을 도리는 없을 것이다. 수집된 방대한 데이터의 최종 보관자는 누구인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악령은 법과 도덕을 이기곤 했다.

2020-09-20

“뭉쳐라”, “흩어져라”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뭉쳐야 찬다’란 tv예능프로그램이 있다. 한 때 대한민국 내노라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축구종목으로 한 팀을 만들었다. 2002년 월드컵축구 반지의 제왕 안정환 선수가 감독으로 팀을 이끈다. ‘전설’, ‘신’, ‘천하’, ‘제왕’, ‘대통령’ 같은 으리으리한 수식어를 장착한 왕년의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동호회 팀들과 겨뤄 처참하게 연패를 당했다. 어느새 목표치 1승을 넘어 제법 하는 축구팀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재미와 의미를 더해간다. 자신들과 무관했던 새로운 종목으로 one팀을 만들어 좌충우돌하는 설정이 쏠쏠한 재미다. 선수와 감독시절 버럭 소리의 대명사였던 농구대통령 허재의 허접한 말과 유행어들이 웃음으로 반전을 이루며 감칠 맛나게 한다. 웃음 뒤에 밀려오는 잔잔한 의미들을 곱씹어 보게 된다. 지나가는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경험하지 않은 종목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들이 패배를 받아들인다. 내려놓음의 미학을 음미하게 된다.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능력을 과신하는 구성원들이 많은 조직은 갈팡질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하며 양보, 희생, 배려의 미덕을 보인다.전혀 다른 종목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one팀을 이뤘지만 개성을 크게 내세우지 않는다. 팀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뭉쳐서 살아가는 지혜다. 감독의 목표달성을 위한 열정, 적절한 전술, 연공서열을 넘는 파격적인 출전 선수 선발, 선수들의 건강을 챙기는 자상함에 조직의 리더로서 역량도 보게 된다. ‘뭉쳐서 찬다’ 축구팀은 뭉쳐서 잘되고 있는 조직 같다.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뭉쳐서 잘했다. 몽골의 침략도, 임진왜란도, 6·25 남침도 모두 뭉쳐서 막아냈다. 일제강점은 ‘조선인은 세 명만 모이면 싸운다.’는 허언으로 뭉쳐서 저항을 할까 두려워했다. 코로나 사태로 뭉치는 일이 금기시 되고 있다. 뭉치면 죽는다는 말과 동의어로 ‘흩여져야 산다’는 메카폰 소리가 도처에서 울린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크린은 “join or die”(뭉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말로 영국 식민에 저항의 메시지를 던졌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호소했다. 건국 후 좌우 이념의 극한 대립에 통합과 단결을 외쳤다.작금의 대통령은 ‘흩어져야 산다’고 한다. 이념과 정체성이 대비되는 대통령들의 외침에서 공교롭게도 정치적 메타포를 보는 것 같다. 뭉침은 저항의 최고 공격 무기다. 뭉침은 억압의 공고한 방패다. 부동산 정책, 장관아들 군복무 스캔들 등 난제들로 웅성거림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뭉쳐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광장은 나쁜 바이러스로 이미 폐쇄되었다. 한가위 달빛을 그리며 달리고 싶던 철마는 주춤거리고 있다. 간만에 큰 제사상 받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던 조상님도 올 추석은 혼자 계셔야 할 처지다.암은 혈류와 신진대사의 막힘이다. 웅성거림이 막혀 밀폐된 중얼거림은 대중의 암이 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방패삼아 이곳저곳 웅성거림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곱지 않은 시선이 나돈다. 뭉쳐서 살아났었던 민족이다!

2020-09-13

의사를 다치게 하면 재물손괴죄?

박화진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전 경북지방경찰청장“정부미였습니다.”, “??? 아! 예”퇴직 후 이전에 어떤 일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과 상대의 반응이다. 큰 장애 없이 공무원으로 일했다는 의사소통이 이뤄진다.70년대 단군 이래 숙업이었던 식량자급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가 야심차게 개발한 다수확 품종 쌀, 통일벼라는 이름을 가진 작물이 있었다. 일반벼보다 수확량이 40% 더 많아서 정부에서 강권하다시피 재배하게 했다. 쌀을 주식으로 삼는 국민들의 식량난 해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정부에서 재배를 권장했기에 정부미라 불렸다. 절대 양은 늘었는데 질적인 문제까지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찰기가 적어 맛이 떨어지고 볏짚도 사료용과 연료용 이외에는 큰 쓸모가 없었다고 한다. 배고픔 벗어나기엔 성공했지만 농민들의 재배 선호도는 낮았다. ‘정부미’는 기초수급자 및 재난 구호목적과 국공립시설 등에 제공되는 비축재다. 통일벼가 정부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곡물 과잉 공급의 원흉이 되어 통일벼는 생을 마감했다.정부미는 공무원들을 부르는 또 다른 유품으로 살아남았다. 일반인보다 못하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는 공무원들의 자기 비하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공직자도 사람인데 정부의 비축 재물로 부르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공무원 스스로 정부미라고 부른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그런 직업의 별칭에 대해 반감을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는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군림하려는 공무원에 대한 불만을 대리 해소시켜주는 말로써 다소 속 풀리는 느낌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명분으로도 사람을 재물로 부르는 것은 천부인권의 지고지순한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사람이 먼저다’는 수사(修辭)가 넘쳐나는 시대다. 사람이 최우선이라는 말이다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대체할 수 없다는 함의도 갖고 있다. 최근 정부 고위 공직자가 ‘의사는 공공재’라는 말을 했다가 곤혹을 치르고 있다. 울고 싶은 데 뺨 때린 격으로 의사들의 파업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앞으로 사직당국에서는 의사에게 상해를 입히면 재물손괴죄로 단죄해야 할 것 같다. 고위 공직자의 사람에 대한 인식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어서 더욱 문제의 심각성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의 공공적 성격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고 특급 소방수가 투입됐지만 이미 반 이상 건물이 탄 뒤 출동한 모양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어휘선택은 파장효과를 감안하면 언제나 신중함을 잃지 말아야한다. 파리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이 그들일 수 있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두 집단 모두 잘못하다가 신문지에 맞아 죽는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둘둘 말린 신문지에 맞아죽는 파리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경솔한 말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면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정부미는 역시 영양가 없는 거야!’라는 말에 ‘맞아! 우리는 정부 비축재지’라며 기분 좋게 맞장구치겠는가? 감정이 이성을 앞서게 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 이치다.“신중하자 정부미여!” 일찍 품절된 선배 정부미가 꼰대질 한번 해본다.

2020-09-06

엘리트냐? 이리떼냐?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 · 전 경북지방경찰청장말장난이 개그소재로 유행한 적이 있다. 썰렁하다면서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 너나없이 한마디씩 했던 것 같다. 영어가 원래 우리말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으로 썰렁 개그 한 번 해보자. 상을 당하면 상주들이 곡(哭)을 한다. 대부분이 ‘아이고’라며 울먹인다. ‘I go’(나는 간다)는 영어 표현이 된다. 저 세상을 떠나는 망자의 말을 연상시킨다. 어느 지역의 말투는 거의 영어다. ‘왔시유’(What see you). ‘인식하다’(acknowledge)는 ‘아이쿠 알지’ 머 이런 식이다. 우리말의 우수성을 설파하며 영어의 기원은 우리말이라며 책을 쓴 사람도 있으니 문화 자존감의 엉뚱한 발상이지만 그리 기분 나쁜 생각은 아닌 것 같다.비슷한 발상으로 최근 우리 사회 여러 현상을 겪으며 ‘엘리트(elite)’라는 말도 우리말 ‘이리떼’에 어원을 두고 있거나 이웃사촌 쯤 관계가 있는가 싶다. 문헌을 보면 엘리트란 말은 17세기경에는 ‘고급 상품’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우월적 사회집단을 뜻하는 말이 되어 사회 각 분야에서 최고의 능력을 나타낸 집단, 어떤 형태든 높이 평가된 사회적 가치를 가진 집단을 엘리트라고 불렀다고 한다. ‘파워 엘리트’,‘ 창조적 소수자’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선택된’이란 뜻의 라틴어 ‘electus’에서 유래되었단다. 엘리트가 지나친 특권과 독점으로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적이 있다. 그러다보니 늘 급진주의자와 무산자의 정치적 타도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역사 발전에서 엘리트의 역할과 기여를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우리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 죽이기가 만연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교육현장에서 폐해만 부각되어 엘리트 교육이 멸종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남보다 우수함을 위한 노력과 땀에 대해 경의와 찬사를 보내기 보다는 배경을 의심하거나 기울어진 운동장, 금수저 논란으로 폄하시키고 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우수한 인재의 확보와 양성은 최고 회수율을 보이는 투자임에도 하향평준화로 치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우리가 내세울만한 세계적 엘리트 기업들도 부도덕과 부패의 상징이 되어 휘둘리고 있다. 엘리트를 죽여서는 미래가 없다. 시민의식이 투철한 건전한 엘리트로 양성해야 한다.코로나 바이러스의 광기 속에 의사들의 파업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밥그릇 작아질까봐 파업을 한다고 몰아친다. 국민건강권을 인질로 잡았다며 반인륜적 범죄행위처럼 프레임을 짜고 있다.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법률서비스의 특권을 깨겠다며 도입한 로스쿨이 오히려 사다리를 걷어찬 결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더 좋은 의료혜택을 주는 정책이라는 주장에 앞서 질 저하를 우려하는 젊은 의사들의 쉰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을 떼로 몰려다니며 건강권을 뜯어먹는 이리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엘리트들이 오히려 진짜 이리떼에게 뜯어 먹히는 지경이 될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체육 등 엘리트들을 사납게 뜯어 먹은 이리떼들이 결국 먹을 것이 없어 서로 뜯어먹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그 땐 토끼만 더 떨게 될 것이다.

2020-08-30

빛의 방향과 양

박화진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전 경북지방경찰청장긴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다. 코로나까지 다시 기승을 부린다니 여름나기가 쉽지 않다. 에어컨이 켜진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나마 견딜만하지만 땡볕 아래 일하는 사람들은 마스크까지 착용해야 되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긴 장마에 볕이 그리웠는데 오히려 그 볕을 타박하니 사람 마음이 참 간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생명체에서 햇빛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봄가을이면 아름다운 하늘에 청량한 햇빛을 맘껏 누리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긴 겨울과 비가 많은 북유럽 사람들은 모처럼 나오는 햇빛을 주체하지 못하다고 한다. 빛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피부미용에 민감한 여성들의 얘기가 아니다. 사진작가와 같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다. 필름카메라 시대가 끝나고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되어 누구나 웬만큼 사진을 찍는다. 빛과 색상을 카메라가 자동으로 보정해주지만 그래도 작가들은 수동으로 빛의 양과 각도를 조절하면서 찍어야 예술성 있는 작품이 되는 모양이다. 피사체에 대한 빛의 반응이 재미있다. 피사체 후면에 빛이 있으면 피사체가 검게 나온다. 이런 점을 역으로 이용하여 실루엣 사진으로 예술성을 찾는다. 전면에 빛이 많이 비치면 피사체가 하얗게 나아서 얼굴사진인 경우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다. 예술사진이 아니라면 적당한 측광이 명암과 원근감을 살려 제대로 된 정상적인 사진으로 찍힌다. 물론 비전문가의 사진이다.사람에게도 빛의 방향과 양이 꽤 중요한 일이다. 유명 체육인, 연예인, 정치인 2세들이 부모의 후광 때문에 정작 자신들은 어두워지는 현실이다. 부모처럼 뛰어나면 본인의 노력은 아랑곳없이 유전적으로 대물림 받은 것으로 여긴다. 부모에 미치지 못하면 부모의 명예에 손상을 끼친 사람이 된다. 이래저래 자기 정체성이 실종된다. 빛이 앞에서 지나치게 비치는 것도 잘 감당되지 않는다. 강한 스포트라이트 때문에 순간 눈이 감긴다. 앞이 어두워진다. 분별력이 떨어진다. 나락으로 치닫게 된다. 어느 날 유명인이 된 사람들에게 종종 일어나는 과다한 빛 쬐기의 부작용이다. 적당하게 들어오는 측면의 빛을 받아 명암이 섞이고 원근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 일 수 있다. 부족한 부모를 탓하거나 지나치게 내리 비치는 빛에 우쭐할 일이 아님은 자연의 이치다.최근 나라님의 인기가 나라살림 사는데 지장을 줄 정도까지 내려앉고 있단다. 전임자의 후광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많이 들떠있던 시간들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니 뒤뚱거림이 예외가 아닌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처럼 전임자들이 들었던 말들을 듣고 있는 현실을 심각히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지나친 후광과 스포트라이트에 얼굴이 실루엣과 백야가 될 경우 인물사진으로서는 잘못 찍힌 것이다. 빛의 각도와 양을 잘 조절했으면 한다. 민초들은 나라님 존영을 오래도록 원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요즈음은 사진 좀 찍을 줄 알고 볼 줄 아는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 살짝 보정하는 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만….

2020-08-23

형사 콜롬보와 셜록홈즈의 협업

박화진지킴랩 기업탐정본부장전 경북지방경찰청장추억을 소환해 본다. 70년대 중반 사회적 오락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TV가 서민들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줬다. 곱슬머리에 후줄근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사내가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살인사건의 용의자에게 질문을 툭툭 던지며 범행 전모를 명쾌하게 밝혀나간다. 미국 범죄수사 드라마 ‘형사 콜롬보’가 우리를 TV 수상기 앞으로 불러들였다. 어눌하지만 상대방의 신경을 자극하는 한국 성우의 더빙 목소리가 콜롬보 형사의 대명사처럼 여겨질 정도였다.한국 수사드라마 ‘수사반장’이 일반적인 범죄자들의 이야기라면 ‘형사 콜롬보’는 사회적 저명인사, 상류층 등 성공한 사람들의 살인범죄 행각을 밝힌다는 점에서 상대적 박탈감의 서민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줬다.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콜롬보 형사의 끈기와 추리능력에 감탄했다.그의 펌 머리와 트렌치코트 유행을 한 몫 하게 만들었다. 용의자와 자연스런 대화를 이끌며 범죄 혐의점을 찾아간다. 심리적 신경전을 벌이다가 마치 당신은 아닌 것 같다는듯 돌아서다가 툭 던지듯 송곳 질문을 한다.범인의 지능적인 증거인멸과 증거조작 행위에 가슴 철렁할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다. 형사 콜롬보는 민완형사를 꿈꾸는 경찰지망생들의 로망이었다.사냥용 모자, 파이프 담배, 돋보기를 든 사내. 범죄를 추리해나가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 1890년대 후반 소설가 코난 도일이 낳은 추리소설의 등장인물. 런던 출신의 탐정 대명사 셜록 홈즈다. 주변 환경과 타인의 인상착의를 관찰하여 그 사람의 내력까지 추리해내는 프로파일링의 원조, 준 프로급의 권투실력과 괴력, 걸어 다니는 범죄학 사전, 변장술과 연기력이 뛰어난 그는 범죄사냥꾼의 전형이다. 가끔 사건해결을 위해 불법행위도 불사하는 또 다른 탐정의 모습을 보인다. 학창시절, 흥미진진한 추리전개를 끊지 못해 수업시간 책상 밑에서 침을 발라 책장을 넘기다가 혼이 나기도 했던 흑백사진 같은 추억 속 주인공이다. 법 개정으로 그동안 금지된 탐정이란 직업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수사업무 경력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게 되었다며 흥분감이 감돈다. 미행, 도청, 사생활 침해의 폐해도 우려되는 현실. 감독관청의 체계적인 관리와 같은 법적 보완이 시급하다. 그간 경찰 등 국가기관에게서 부족했던 문제들을 민간영역에서 보완해줄 수 있는 제도로 정착된다면 국민들의 성마른 갈증을 풀어줄 것 같다. 국가적으로도 전문적 인적자원을 재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셜록 홈즈의 능력이 부럽지만 그가 가끔씩 목적달성을 위해 탈법을 슬쩍 이용한 것이 뒷머리로 손이 올라가게 만든다. 그래도 형사 콜롬보가 근무여건 개선을 요구하며 잠시라도 태업한다면 셜록 홈즈라도 있었으면 하는 것이 범죄 피해자의 심정일 것이다. 콜롬보와 셜록 홈즈의 협업과 공유를 기대해본다. 최고의 케미(조합)가 되었으면 한다.“ 아! 그런데…. 홈즈 선배가 잘 하겠지요?”콜롬보가 대화 말미에 이런 말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2020-08-09

오! 신발짝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젓가락, 가위 같은 물건은 짝이 있어야 제구실을 한다. 신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발짝이라 불린다. 신발은 경제발전의 척도다. 아직도 아프리카 오지나라나 지구촌 구석에는 맨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과 6·25 전란 이후에 고무신 패션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장년층은 백고무신, 조무래기들은 검정고무신이다. 생필품인 고무신이 부정선거 현장에서 공공연한 사은품으로 나돌만한 이유였다. 낡은 미제 군화는 전란이 남긴 캠퍼스의 가난한 낭만이다.어린 시절 한 동안 검정고무신을 사계절 신고 다녔다. 여름철은 제격이다. 개울가를 건너거나 비가 오더라도 툴툴 털거나 말리면 된다. 발등 부분은 박세리의 발등, IMF의 시름을 한방에 날릴 때 보여준 선명한 흑백의 대비가 생긴다.겨울은 괴로운 계절이다. 발등을 아리는 찬 공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래도 질기고 값싼 탓에 자식 많은 집에서 아이들 생필품으로 딱이었다. 부동의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고무신은 ‘잘살아보세’ 기치아래 전 국민이 허리띠 졸라맨 노력의 결실로 운동화와 구두가 등장하며 명을 다하게 되었다. 새로 등장한 운동화는 온갖 기능들이 장착된 지금의 브랜드 운동화와는 천양지차 품질이다.새신을 신고 팔짝 뛰는 대신에 날아오는 축구공을 되받아 차다가는 조악한 헝겊으로 된 신등이 처참하게 찢어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부모님의 성난 얼굴이 말풍선이 되어 머리위에 떠오르는 부작용은 뒷감당이 불감당이다. 그래도 명절이면 연례행사처럼 받을 수 있는 운동화 한 켤레를 이불 속에 안고 행복감에 젖어 잠들곤 했다. 요즘 세대들은 조선시대 짚신 신은 얘기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고무신의 장점이 운동화의 단점이다. 물로 쉽게 씻던 고무신과 달리 천으로 된 운동화는 세탁이 만만찮은 일이었다. 비누칠을 해서 싹싹. 옷을 빨듯이 해야 한다. 흰 고무 테두리를 더욱 희게 하려고 치약을 살짝 발라 문지르는 비법도 구사했다.사춘기 소녀들의 맵시내기 비법일 것이다. 신발에 한 맺힌 민족마냥 신발 산업은 경제발전에서 단연 효자 종목이었다. 우리의 경제성장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발 한 짝이 날아간 일로 나라 한 쪽이 얼마간 술렁이고 떠들썩했다. 중년의 한 남자가 집에 신발이 남아돌지는 않을텐데 나라님 행차 길에 던졌단다. 나라님께 할 말이 있다는 의사표시라고 한다. 사직 당국은 테러분자의 소행으로 본 건지 구속을 시키겠다고 했다. 영장이 기각되어 영어(囹圄)의 몸 신세는 면했지만 법원의 최종판정을 받는 절차가 남았다. 신문고를 치는 북채 대신에 신발을 던진 행위라는 항변도 있다.독립운동을 한 열사에 버금가는 신발열사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폭탄이었으면 어쩔뻔했냐’며 과도하게 호들갑을 떠는 사직당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다. ‘허, 허, 허’하고 너털웃음으로 사람 좋게 보였던 나라님의 관대한 아량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지 모르겠다.그런데 ‘한 쪽 발이 맨발인 상태로 연행돼갔다면 혹시 인권침해?, 워낙 인권을 챙기는 나라라서….’

2020-08-02

시간 살리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죽일까요?, 살릴까요?” 청부살인업자의 말이 아니다. 머리손질을 하면서 부풀릴지, 눌러 놓을지 손님에게 물어보는 미용사들이 잘 쓰는 말이다. 다른 장소에서 이런 대화를 엿듣게 된다면 ‘혹시 살인을….’하고 한 번 더 대화자들을 살펴봤을 것이다.오랫동안 직업인으로서 죽이는 사람들을 상대했던 것 같다. 남의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범에서부터 남의 재물을 죽이는 강도나 사기꾼은 죽이는 일을 하는 자들이다. 밝고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죽이는 일보다는 살리는 일이 많은 것이 좋다. 그래서 경제 살리기, 4대강 살리기 같은 말들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이다. 킬링타임이라고 한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거나 짬이 나는 시간을 때우는 것을 말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시간 죽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 있다. 엘리베이터 탑승시간이다. 거주하는 아파트, 회사, 식당 등 어디를 가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무료하고 어색한 시간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간을 죽이는 일이 만만치 않다.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지고 그 시간을 잘 죽이지 못한다. 벽에 붙은 거울을 보거나 광고물에 눈길을 주거나 층계표시 등을 멀뚱히 바라보게 된다.낯선 장소의 엘리베이터는 그렇다 쳐도 언제부턴가 아파트 같은 동 엘리베이터 시간 죽이기도 마찬가지가 된 것 같다. 이웃집 밥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지내는 정답던 우리 이웃들의 모습들이 아파트 생활에 뺏긴 지 오래다. 같은 동 통로에 거주하는 사람조차도 서로 알고 지내려 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고 있다. 세상이 팍팍할수록 함께 살아가야 하는데 아쉽고 안타깝다. 얼마 전 이사를 하고 이웃집에 인사를 해야겠다고 떡을 좀 장만하려는데 주변에서 말렸다. 요즘 그런 일은 이웃이 싫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웃에 일종의 신고식 같은 미풍양속인데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 같은 통로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게 된다. 시간 죽이기가 시작된다. 여성 동승자라도 탑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혹시나 제3자가 없는 좁은 공간에서 예기치 않은 오해를 살까싶어 벽면으로 몸을 돌리고 양손을 겨드랑이 사이에 꼭 긴 채 고슴도치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게 된다. 물끄러미 천장을 보거나 감시하는 폐쇄회로를 힐끔힐끔 보다가 목적지에 도착해 내릴 때면 동승자의 레이저 눈빛이 뒤통수를 치는 것 같다. 몇 년을 살아도 누구인지 모르고 살게 되는 경우도 많다.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 시간 살리는 법을 배우게 됐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녀석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안녕하세요?”라고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를 했다. “어으응, 안녕” 누구인지를 몰라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녀석의 선(先)인사와 몇 호에 사느냐, 몇 학년이냐 등 등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목적 층에 도착했다. 평소 지루하게 느껴졌던 엘리베이터 안 시간 죽이기는 없었다. 죽어가는 이웃 간 정 나누기도 간단한 인사하나로 해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다정한 인사로 엘리베이터 안 시간 살리기를 했으면 좋겠다. “좋은 아침입니다!”

2020-07-26

염라대왕 당부말씀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이승에 계신 인간제위께!여러분을 사후 세계로 여행시키는 저승사자 주식회사 대표이사 염라대왕이요. 회사 창립 이후 최초로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은 현 인간 세상의 사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오. 이대로 둘 경우 저승사자들이 중노동에 시달리며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며 파업을 할까 우려 때문임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잘 알다시피 금년 초부터 불어 닥친 코로나19 사태로 이곳의 저승사자들이 밤잠을 설치며 새 여행객을 맞이한다고 밤을 밝혀 일하고 있소. 근래 보기 드문 여행객의 증가로 이곳 저승사자들이 저녁이 있는 삶이 없어졌다며 특단의 대책을 세울 것을 나 염라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있는 실정이라오. 물론 전 지구촌 인간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처음보다 저승여행객이 많이 줄어들고 있음은 높이 평가하고 있소. 빨리 끝나서 정상적인 업무처리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을 당부하오. 이런 저승과 이승의 협업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 인간세계에서 잊을만하면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기에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게 되었소.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 늙고 병들어 저승을 찾는 기본 계약을 어기고 급행열차에 몸을 싣는 인간이 심심찮게 있는데 제발 자제해주기를 당부하오. 지구 동쪽 끝 인간들의 급행열차 탑승인원이 지구촌에서 제일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소. 특히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어떤 연유인지 급행열차를 선탑하는 사례로 완행열차를 타야 될 승객들을 술렁이게 함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오. 저승으로의 여행은 언제 되돌아갈지 모를 여행으로 인간세상의 복잡하고 힘든 일을 잊게 해준다는 점에서 유혹에 흔들릴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생업을 책임진 가장이, 나라를 책임진 정치지도자가 불쑥 기약도 없이 여행을 떠나 남은 가족과 국민들이 걱정의 나날을 보내게 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도리가 아니요.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은 기본이요 가족과 나라를 내팽개친 무책임의 극치라 생각하오. 인간 세상에는 ‘실수’라는 좋은 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신이 아니기에 인간이 자신의 기본적 의도와 달리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잘못을 저지를 때 짐짓 용서하고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승세계의 환상에 젖어 급행열차를 타는 것은 어리석은 처사로 밖에 볼 수 없소. 인간생활 향상을 위해 일하는 정치지도자들의 급행열차 승차는 그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음을 감안하면 급행열차 새치기 승차는 절대해서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인간들이 만든 말이 맞소. 여기 저승생활은 만만찮소. 아울러 그쪽 일부에서 급행열차 승차한 일을 미화하여 너도나도 동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코로나 종식으로 이곳 저승사자 업무도 정상적으로 돌아갔으면 하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계속 밀려오는 여행객들 때문에 이만 줄이오. 명이 다할 때까지 이승에 있길 바라오.

2020-07-19

정치인 자질 자가진단법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선량들의 본격 활동이 개시되었다. 상임위원장을 여당이 독식했느니, 추경에 야당이 들러리를 섰느니 언론의 요깃거리들이 하루를 멀다않고 진수성찬으로 쏟아져 나온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 힘든 민초들로선 그 동네 돌아가는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여력이 없다. 감시꾼의 눈초리가 느슨한 틈을 타 정치판에 공룡과 괴물들이 난장판을 만들까 걱정이다. 공직을 끝낸 뒤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정치 한번 해보지?’라는 권유나 덕담을 간간히 듣게 된다. 자질과 상관없이 의미 있는 일을 해보라는 말이다. 손사래를 치다가도 ‘오늘 멋지다’고 건넨 아침 인사말에 심장이 벌렁거리며 거울 한 번 더 쳐다보는 심정이 된다.“정치는 허업(虛業)이다”고 일갈하며 떠난 노정객의 말이나 “정치하지마라”고 측근에게 유언을 남긴 전직 대통령의 뼈저린 말속엔 정치는 보통의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름대로 세 가지 자가 진단을 해본다. 첫째, 나는 권력의지가 있는가?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은 가만히 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쟁취의 산물이다.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의지 없이 선한 목자처럼 사람만 좋아서는 권력은 쟁취되지 않는다. 둘째, 나는 타인과 잘 싸울 자신이 있는가? 논리와 명분으로 싸우든 몸으로 싸우든, 첨예한 대척점에서 싸우지 않고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그 동네 현실이다. 탁자 위를 나르는 공중부양과 의사봉보다 주먹과 발길질을 더 잘 휘두르는 사람이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정치적 자산을 쌓아 정치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냐며 화해의 손짓을 동전 뒷면 보듯이 할 수 있는가? 철천지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국리민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과감하게 손을 내밀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 앞에서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웃을 수 있어야 한다.이 세 가지를 두고 ‘나는 정치인 자질이 있는가?’ 진단한 결과는 경찰 고위직까지 했으니 권력의지는 좀 있는 것 같은데 싸우는 것과 싸운 뒤 쉽게 화해하는 것을 잘 못하겠다. 묘수인양 훈수나 두는 장기판 훈수꾼에 머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창시절 정치학개론 첫 수업시간에 ‘야누스’를 배웠다. 정치는 야누스라는 정치인 출신 교수님의 강의가 그 때는 절절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실을 목격하니 두 개의 얼굴인 야누스가 정치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땀 흘리는 선량들의 의지와 노력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감사하다. 군림하고 사리사욕을 위한 권력의지라면 노땡큐다. 어떤 논리와 명분을 내세워서라도 국민을 위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면 언제나 감사하다. 당리당략이라는 내숭을 감추고 있다면 노땡큐다. 길길이 싸우다가도 활짝 웃는 모습이 대의를 위한 타협의 몸짓이라면 야누스의 얼굴이라도 언제나 감사하다. 속마음은 단지 작전상 후퇴일 뿐 참다운 웃음이 아니라면 이것 역시 노탱큐다.한 번 더 진단해 봐도 나는 함량미달이다. 눈 뜬 민초로 살아가는 게 분수 같다. 정치DNA를 가진 분들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2020-07-12

“고객님, 사랑합니다”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인간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물건 하나를 주겠다. 사용법을 꼭 지켜라. 첫째, 많이 나눠줘라. 둘째, 대가를 바라지 말라. 셋째, 돈 주고 사지 말라. 넷째, 자주 표현하라’.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인 사랑사용법이다. 하지만 인류는 사랑을 사용법대로 사용치 못하고 살고 있다. 예수님, 석가모니 부처님까지 인간 세상으로 출장(?)와서 사랑을 제대로 사용하라고 역설했지만 세상은 아직도 다툼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이다.그럼에도 맹렬히 당신을 사랑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뜬다. 받을까말까 망설인다. 혹시 급한 용무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수신버턴을 누른다. 쟁반을 구르는 구슬소리 같은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작은 소리통을 통하여 들려온다. “…. 사랑합니다.” 느닷없는 여인의 사랑고백에 화석같이 굳어있던 중년의 가슴팍이 살짝 떨린다. 찰나의 시간에 발칙한 생각이 든다. ‘누구지?’ 떠나보낸 기억저편 첫사랑 여인의 팜므 파탈인가? 지친 영혼을 달래겠다며 퇴근길 들리던 단골 선술집의 뜸한 발걸음을 불러들이려는 여주인의 얕은 수작인가? 옆지기가 혹시 들을까 음량키를 줄이려다 잘못 눌러 더 크게 하는 대참사를 겪는다. 잠시 혼미했던 정신 줄을 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작은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입자들을 귓구멍으로 몰아넣는다.“고객님 잠시 시간이 되시면 이번에 새로 나온….” 선풍기 강풍모드로 급히 돌아가는 콜센터 여직원의 말임을 알게 된다. - 어찌하랴 여인으로부터 ‘사랑합니다’란 고백을 듣고도 흔들리지 않는 중년이 있으랴!- 몽환에서 깨어나고 짧은 시간 동안 외도 아닌 외도에 괜한 쑥스러움이 밀려온다. 워낙 강렬하게 내리꽂히는 ‘사랑합니다’란 말 때문이다. ‘고객님’이란 호칭 앞부분 말이 수신불능 상태가 된 것이다.가끔씩 오는 콜센터 직원들의 전화응대 예절 말 ‘고객님 사랑합니다!’. 사랑한다는데 어찌 매몰차게 전화를 끊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말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얼굴도 모르는 고객을 상대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직원들의 애환을 생각해보게 된다. 회사의 방침이니 전화응대어로 사용할 것이다. 어쩌면 갖은 험한 말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제적 방어용일지 모르겠다. 물론 고객들도 그들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으로 대하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물건 팔아먹으려는 얄팍한 상술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세상 최고 고운 말인 사랑한다는 말로 고객을 응대한다는 점에서는 좋은 말일 수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일지라도 숭고함, 고귀함, 아름다움이 깃든 ‘사랑합니다’라는 말로 연결되는 일은 신이 정해준 사랑 사용법 중의 하나 ‘자주 표현하라’이다.말은 의식과 행동을 지배한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콜센터 사람들은 가족과 주변으로부터 아름다운 사람일 것 같다. 척박해지는 세상살이에 빈말일지라도 가족과 이웃에 ‘사랑합니다’란 자주 표현했으면 좋겠다.콜센터 사람들의 고운 인사말에 “진짜로 사랑합니까?” 되물어 바쁜 그들을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

2020-07-05

권위가 도전받는 세상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19세기 이탈리아의 의학자이자 범죄인류학의 창시자인 롬브로조는 ‘생래적 범죄인설’을 주장했다. 생래적 범죄인은 원시선조의 야만성이 격세 유전하여 후대에 나타나고 선천적인 범죄인이라고 주장했다. 생래적 범죄인은 환경에 관계없이 운명적으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들은 예방과 교화가 불가능하므로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연구는 범죄학에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었다. 사람의 두개골 형상을 관찰한 결과에서 착안했다고 한다.오랜 세월 범죄인을 접한 경험에 의하면 범죄꾼임을 얼굴에서 얼핏 읽게 된다. 특히 강도, 살인 같은 흉악범의 험상궂은 얼굴을 보면 롬브로조의 주장이 마냥 낡은 학설로 치부하기엔 자신이 없어진다.두상(頭相)을 보고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는 것은 동양에서도 있었다. 삼국지에 촉나라 장수 가운데 위연이 유비에게 투항해 올 때 위연의 두상을 보고 제갈량이 그의 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위연의 뒤통수가 튀어나온 형상을 보고 그는 후일 배반을 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유비의 관대함으로 위연은 받아들여졌지만 결국에는 위연이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때 위연의 두상을 ‘반골(反骨)’이라 칭하였다. 반골은 세상의 일이나 권위 따위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반적인 권위나 방식, 관습 등에 맹종하기보다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비판과 반항을 일삼는 기질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왕조시대 궁중에서 후궁의 소생들이 태어나면 관상을 보아 반골이면 후일 모반을 할 가능성 있다며 제거했다는 설도 있다. 두상을 통해 범죄인이거나 배반을 할 것으로 판단했다니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일이다. 그럼에도 반골의 기질을 가진 사람은 시대를 초월하여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행동으로 자신과 가족에 대한 핍박으로 한 시대를 불행하게 살아갔다. 세월이 흘러 역사의 평가가 엇갈리면 그들의 처절했던 행동과 절규는 한 순간에 선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유독 굴곡 많은 역사를 지닌 우리는 반골 기질 사람들의 역사로 점철된 것 같다. 지나온 시절은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살았던 사람들이 출세를 하며 살던 세상이었다. 학창시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세상을 경영하던 시절이었다. 기존의 권위에 도전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 사람들, 경영자의 지위를 타박하는 노조원들, 교장의 권위에 도전한 평교사들, 장군의 권위에 도전한 병사들, 검·경의 상명하복 지휘체계에 반기를 든 사람들 등등. 이들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중심으로만 집중되었던 권위가 파편화되어 비산하고 있다. 정당한 권위 행사가 주저되거나 포기되며 눈치를 보는 분위기다. 이념으로 채색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체념이다.오랜 경험과 세상 지혜를 전수하려는 어른의 권위마저 없어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밀려온다. 새로운 질서와 권위도 시간이 지나면 도전받을 것이다. ‘신(新)반골들로 세상이 또 다시 소용돌이치면 어쩌지?’꼰대의 기우가 아니길 빈다.

2020-06-28

취미가 밥 먹여 주냐?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식사하셨습니까?” 인사말이다. 밥 먹었냐고 묻는 말로 인사를 하는 나라가 몇 나라일까 싶다.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수 없던 시절엔 밥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일이 제일 중요한 관심사이기에 인사말이 된 것이다.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프랑스 혁명의 초기 외침도 결국 원초적인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의 다름 아니다. 지금도 혁명정신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에서는 빵 값을 국가에서 관리한단다. 젊은 세대들은 이 인사말의 유래를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다. 배고픔과 같은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밥만 먹고 사냐?’는 우스갯말이 생겨난 것을 보면 적어도 밥만 먹기 위한 경제 활동을 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기본적인 생존 위협에서 벗어나니 풍요로움 삶에 대한 욕구는 문화적 욕구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저기 취미활동이 풍성하다. 한 때 일부 상류사회에서 그들만의 리그로 여겨지던 테니스, 골프, 승마, 요트 같은 놀이가 대중화로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골프채를 닦으며 부하 직원에게 지시하던 회장님만의 장난감이 웬만한 직장인은 물론 주부들도 주방의 국자 휘두르는 일처럼 일상화되었다. 중년 남자들이 삑소리를 무릅쓰고 굵직하게 내뱉는 저음의 부르스 곡 색소폰 연주(청중의 불안감은 내 알바 아니다)로 여심을 흔들고 싶어 한다. 헌팅캡을 삐딱하게 눌러쓴 채 긴 후드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피사체를 향해 연신 카메라 샷을 눌리는 이는 아마추어 사진작가 반열이다. 유화 물감으로 캔버스 한 모퉁이를 알지 못할 형상의 덧칠을 하더니 붓끝을 왜 그리 열심히 보는지 이쯤 되면 피카소도 고개를 숙일만하지 않는가? 나무토막이 이유도 모른 채 끌 칼에 깎이고 톱에 잘리며 주인 잘 못 만난 탓을 하는 사이에 전문가 뺨치는 목공예 소품으로 만들어져 새 주인을 기다린다. 넘치고 넘치는 취미생활이다.이쯤 되면 그 동안 들어간 비용 손익계산서를 들여다봄직하다. 가정경제를 꾸리는 주부의 찡그린 타박이 들려온다. 남정네의 과다한 관심영역을 채워주는 취미생활이 가계에 미치는 영향을 따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 학원비, 아파트관리비 등등. 기본 지출항목에 취미생활비용이 점점 잠식해 들어온다. “취미가 밥 먹여주느냐?”는 극언(?)이 뒤통수를 내리친다. 그동안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지쳐버린 내 영혼의 안식과 미래를 위해 재투자하는 충정을 이해 못하고 등 뒤로 던지는 비수에 급소를 맞는다. 여심을 흔들고 싶었던 악기연주도,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피카소를 소환하는 일도, 여인의 누드사진도 아니고 삶의 찐한 향기를 우려내려던 일생일대의 흑백사진도 찌든 삶의 아우성에 도로 다 물려야할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 말자. 잘 키운 취미 하나, 열 직장 안 부러운 시대다. SNS로 하는 취미생활 자랑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조회 수가 많아지면 돈을 준단다. 취미가 밥 먹여주고 때론 직업으로 변신하는 시대다. 마른하늘 적시겠다고 가정용 가습기 한 대 트는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밥 먹고 사는 방법이 다양해진 세상이다.

2020-06-21

찌라시 전쟁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광고의 홍수시대다. 찰나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광고 전쟁이 치열하다. 광고경쟁을 뚫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입장에서는 광고는 핵심 전략이다. 유명 연예인에게 거액의 모델료를 주고 광고를 하는 것도 그런 연유다.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는 광고문구(일명 카피)를 만들까 골몰하게 된다.일부 광고물은 사람들에게 공해가 되는 것 같다. ‘찌라시’라 불리는 전단지가 광고에 활용된다. 특히 청소년에게 유해한 음란성 전단지를 대로상에서 버젓이 나눠주는 경우가 있다. 단속관청의 관심이 소홀해지면 길거리 한 모퉁이를 차지하곤 한다.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온 부모들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한다.유흥가 주변의 음란 전단지를 전쟁 치르듯 일소한 여성경찰지구대장이 있어 신문지상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단지를 뿌리고 도주하는 사람을 추적해 제작 장소까지 단속을 해서 발길을 끊게 했다고 한다. 청소년 유해환경을 정화시켰을 뿐 아니라 매일 아침 청소 부담을 줄여 학부모와 지자체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던 일이다. 시민의 가려운 구석을 긁어준 참다운 경찰활동이다.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면 가던 길을 멈칫하게 된다. 호주머니에 구겨 넣거나 휴지통이나 길거리에 내팽겨진다. 외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전단지를 돌리던 청년들이 전단지가 구겨져 내던져지는 것을 보고 처음부터 구겨서 종이 뭉치로 나눠주자 사람들이 오히려 펼쳐보는 재기 넘치는 장면이었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로 일을 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외면을 참고 견디며 노상에서 하는 일이다. 나이가 제법 있는 아주머니나 심지어 연세를 드신 분들도 눈에 많이 띤다. 일정량을 배부해야 소액의 대가를 받을 것이다. 한여름 뙤약볕이나 추운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해내기 힘든 일이다.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어진 손을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란 쉽지 않다. 길거리에서 무단으로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이 법적으로 허용된 일도 아니다. 단호히 거절하고 받지 않는다면 거리에서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 일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전단지 홍보는 음란성 전단지 살포와 같은 법적, 정서적 불허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다. 주로 소상공인, 동네 자영업자들의 생계형 홍보다. 이들이 고용한 사람들의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전단지 내용을 보지 않거나 전단지에 실린 것들을 구매하지 않더라도 힘겹게 전단지를 내미는 손을 매몰차게 거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주머니 깊숙이 찔러둔 손을 꺼내 한번쯤은 받아드는 것은 어떨까? 법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유익하게 집행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북쪽으로 전단지 날리는 일로 나라 안이 시끄럽다. 법적으로 처벌하겠다고 한다. 생계형으로 광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들이 뜨끔해할지 모르겠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법적 형평성’이라는 말을 워낙 좋아하니까!

2020-06-14

케렌시아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치열한 경쟁을 살아가는 이 땅의 중년 가장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50대. 앞만 보고 살다가 잠시 되돌아보게 되는 나이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 모든 걸 버리고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살아온 날에 대한 회환과 남은 생의 변곡점을 어떻게 통과해야할까 하는 고뇌에 이르면 불쑥 짊어진 짐을 모두 내려놓고 싶어진다. 물론 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안다. 대책 없는 푸념과 넋두리일 수밖에 없다. 앞만 보고 달려온 것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어떻게 받을 것인가?이제 지난날 자신감에 찬 질주는 숨도 차고 힘겨워 후진의 추격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친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항구에 정박 중인 자식들의 인생항로를 위한 선장으로서 역할도 버겁긴 마찬가지다. 절대적 지지자로 생각했던 부부간극은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틈을 메우기 힘들 정도로 벌어져 있다. 바쁜 일상으로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언제나 내가 하자는 대로 움직여 줬던 몸뚱이가 어느 날 매몰차게 나를 외면하면 어쩌지 하는 건강염려증도 뇌리 한쪽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불안정과 불안감을 술로 잊으려 해보지만 건강 하향곡선 탓에 능사가 아님을 안다. 주말이면 골프모임, 등산모임으로 구심력 잃은 공처럼 이쪽저쪽 튀어나가 기웃기웃 해보지만 이것 역시 허한 가슴을 채우지 못한다. 그러다 어쩔수 없이 또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50대의 중년이다. ‘무소유’, ‘내려놓아야 한다’는 법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니 아직은 페달을 밟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은 자전거 삶이다. 질주본능을 떨치지 못하고 계속 힘들게 페달을 밟게 된다. 하지만 탄력 좋은 고무줄도 당기고 놓기를 반복하면 결국은 끊어진다. 중년의 삶, 속도를 늦추고 마디마디 휴식이 필요하다.케렌시아(Querencia)란 스페인어가 있다. 피난처, 안식처라는 말이다. 투우장의 투우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재충전의 공간을 의미할 수도 있겠다. 중년위기의 탈출, 나만의 케렌시아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이 땅의 대부분 50대 가장들은 어린 시절 여러 형제들이 방 하나의 같은 공간에서 지냈다. 병영 같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직장이라는 조직에 몸을 담았다. ‘함께’, ‘단체’, ‘집단’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라 전체가 압축 성장 과정이었기에 개인에겐 잠깐의 휴식과 여유도 터부시된 것 같다. 100미터 달리기 같은 삶을 살아왔다. 심리적·공간적 나만의 케렌시아는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이제라도 나만의 케렌시아를 마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곳이 꼭 조용한 산사이거나 물리적 휴식공간이 아니어도 좋다. 바쁜 일상 속에 복잡한 관계를 끊고 잠시라도 오롯이 자신의 시간만을 가질 수 있는 장소나 꺼리라면 어떤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 시간만큼은 휴대폰은 꺼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혹시 그동안 급한 카톡 오면 어쩌지?” 좀 무시해 보자.

2020-06-07

태극기 안녕하십니까?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보훈의 달이다. 호국영령들에 대해 머리를 숙인다. 그들의 넋을 기리며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의무감은 산자들의 몫이다. 애국하면 떠오르는 상징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를 목청껏 부른다. 끓는 심장을 싸고 있는 유니폼 상의 태극마크를 감싸 쥔다. 대형 태극기가 물결처럼 출렁이고 관중석 함성은 하늘을 찌른다. 국가 간 축구대항전 식전의식이다. 군악대 팡파레가 울려 퍼진다. 양국 국기를 곧추 세운 의장기수단 옆을 지나간다. 태극기를 향해 방문 귀빈이 왼쪽가슴에 손을 올려 경의를 표한다. 순국한 국군장병의 관(棺)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을 바라보는 동료장병들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린다. 그의 남은 체온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는듯 관을 감싼 태극기의 작은 몸부림이 함께 한다. 캐네디 공항 상공을 휘감아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기가 활주로를 따라 움직인다. 환영인파를 향하여 기체를 돌리는 대통령 전용기 태극마크가 이국땅에서 점점 더 크게 보인다. 반도강점 원흉들을 향하여 도시락 수류탄을 투척한다. 가슴 속에 숨겨둔 태극기를 꺼내 펼쳐든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 활약상이다. 나라의 상징인 국기의 의미는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고 있다. 학창시절 태극기 그리기 숙제는 지루하고 힘든 일이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다른 숙제는 빠뜨리더라도 놓치지 않고 했던 것 같다. 주입식 애국교육 탓인지 아직도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노라면 가슴 한 곳이 찡해진다. ‘국뽕’(애국심 발현을 마약에 취한 것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다) 꼰대라고 빈정거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세대다.학교에서 제대로 된 태극기 교육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건국시기를 두고 이념의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상징물에 대한 재해석 의견들이 분분하다. 광화문 광장을 매주 메꾸며 집회를 하시는 분들의 단체명에 태극기가 들어갔다. 특정 부류로부터 태극기가 마치 혐오도구로 기피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든다. 일부 극단적인 부류에서는 태극기를 분단의 상징물로 여기는 것 같다. 그 자리를 한반도 지도가 새겨진 ‘한반도기’가 통일 대한민국 국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하지만 아직도 155마일 휴전선을 두고 남북의 총구는 서로를 겨누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지키는 국군장병의 팔뚝엔 태극기 휘장이 그의 조국수호 의지를 받쳐주고 있다. 이념의 갈래 속에 태극기가 애증의 대상물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다. 코로나로 광화문 집회에 등장했던 태극기가 장롱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다시 장롱 속 태극기가 나올지 모른다. 장롱 속에서 그의 마음이 안녕했을지 모르겠다. 현충일은 조기 게양 날이다. 마치 일제강점과 분단 조국의 슬픔에 겨워 깃대 맨 끝까지 못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산자들이 더이상 태극기의 안녕을 흩트리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 초대형 태극기가 하늘을 찌를듯 국기봉에 매달려 힘차게 휘날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0-05-31

사람경찰, 기계경찰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코로나이후 4차 산업의 기재들이 대폭 늘어날 것 같다. AI, 블록체인, 로봇, 드론 등등.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재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면 디지털 장애인이 될까 걱정이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컴맹이라고 했다. 디지털 기기가 도처에서 사람의 일상을 제어하는 오늘날엔 자칫하다간 ‘디지맹(디지털장애)’이 될 지도 모른다. 햄버거 가게에서 겪은 일. 종전처럼 주문을 하러 종업원에게 갔다가 기계한테 가라는 타박 아닌 타박을 당했다. 키오스크를 이용하라는 거다.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기계를 상대하게 되었다. 얇은 널빤지 같은 화면 가득 형형색색의 상품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앞서 줄지어 선 젊은이들이 빠른 눈 놀림으로 상품사진을 선택하고 이어지는 기계의 지시사항을 컴퓨터게임 하듯이 빛의 속도로 손가락터치를 하며 주문을 했다.어정쩡하게 줄선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지 고민하는 사이 차례가 돌아와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는 눈빛으로 화면의 사진과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진 뒤 연인의 손을 처음 잡는 것처럼 긴장과 설렘으로 뜨덤뜨덤 기계에 손가락을 갖다 될 즈음. “아저씨! 좀 빨리 하세요. 제가 해드릴까요?” 라고 훅 치고 들어오는 젊은이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구멍을 막았다. 놀람과 무안함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이후 주문한 햄버거가 어떻게 내 앞에 놓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갔는지 알거나 느끼지도 못한 채 허둥거리다 서둘러 햄버거 가게를 나왔다. 허겁지겁 먹은 탓인지 아니면 빛의 속도로 변해가는 시대의 ‘부적응자’가 된 기분 탓인지 그날 오후 내내 속이 쓰리고 마음이 불편했다. 인간을 위해 개발되고 발전하는 4차 산업시스템이 혹시 나같이 소외되는 인간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4차 산업혁명의 결과물이 치안활동에도 획기적인 효율성을 이끌 것 같다. 장난감 비행기놀이 같았던 것이 ‘치안드론’이라는 이름으로 실종자수색, 행사경비, 심지어 테러범저격 같은 활동까지 하고 있다. 안전을 위한 기계의 발전은 인류에 유익한 것임은 자명하다. 머지않은 장래에 기계경찰도 등장할 것 같다. 최고성능 인공지능으로 작동하는 로봇경찰, 충전과 업그레이드만 시키면 지칠 줄 모르는 활동이 시민의 안전을 완벽하게 책임질 것 같다. 감히 인간경찰이 경쟁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시민은 기계경찰로 인한 최고의 만족감을 기대하며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기계경찰의 경쟁력에 밀릴지 모를 인간경찰의 일자리가 걱정이다. 인간경찰의 생존비법이 시급하다. 주문이 어려워 우물쭈물 거리는 디지맹에게 “제가 직접 주문받을게요.” 라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종업원이 있다면 디지맹도 햄버그 가게에 가는 일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다시 그 가게를 찾고 싶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쭐되는 기계경찰을 이기는 방법은 햄버그 가게 종업원 말과 같은 사람의 온기가 아닐까?“ 범인 1시간 내 잡는다! 디비디비…. 띠띠, 철커덕 철커덕….”(기계강력형사)“ 아이구 할머니, 얼마나 놀라셨어요!. 이놈의 소매치기 놈들 그냥….(사람강력형사)”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2020-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