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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공감능력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탄핵된 전직 대통령에 대하여 우리는 그가 ‘공감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음을 지적하였다. 성장배경이 보통 사람들과 같지 않았으므로, 가족을 일구어 보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늘 높은 자리에만 있었으므로 그랬을 것이라고 하였다. 대통령도 분명히 실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도, 국민은 그가 보여준 공감능력의 결핍에 참담하리만치 낙심하였다.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지도자가 나라를 이끌어 주기를 기대하였다. 보통 사람의 일상에 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느낄줄 아는 이가 우리들 앞에 서 주기를 바랬었다.공감. 영어로 sympathy 또는 compassion. 남의 의견, 감정, 생각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일이라고 한다. 상황과 성품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므로 남의 느낌과 일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똑같이’라기 보다는 ‘그렇다고’ 느끼는 일이라고 적었을 터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공감능력을 모두 충분히 가지고 있을까. 공감능력 결핍의 문제가 비단 전임 대통령에게만 있었을까. 혹 우리 사회가 가진 치명적 약점이 바로 이 ‘공감능력 부족현상’이 아닐까.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 그리고 느낌에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함께 하고 있을까?학교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며, 떨어질 줄 모르는 청소년 자살률이 우리 모두의 걱정거리다. 이들 사회문제들도 ‘공감능력의 결핍’에서 까닭을 찾아야 한다는 최근 연구 발표가 있었다. 자신의 문제와 상황에 집착하면서 남들에 대해서는 배려 또는 공감하려 하지 않다보니,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을 경쟁적이며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상황으로 몰아넣기보다는, 예술과 문화를 교과과정에 접목시켜 공감능력을 키워가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사회적 맥락에서 뿐 아니라 우리 정치권에도 이 ‘공감능력 결핍현상’이 보인다. ‘내로남불’ 현상이 그러하며, 나와 다른 의견에 대하여 배려하는 마음과 경청하는 자세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국민이 보기에 그리 어렵지 않는 사안들에서도 끊임없이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불화만 부채질하는 집단이 오늘 우리의 정치권이 아닌가. 정치는 무릇 불화와 갈등을 조화롭게 마감하게 하고 국민과 사회가 안정적으로 평안하게 작동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을까. ‘공감능력’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남을 탓하기보다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21세기 글로벌 환경은 이미 바뀌었다. 세계는 이미,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머물기보다 어느 편이 힘을 가지든 ‘화해와 협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념의 골짜기를 어렵지 않게 메우고 있다. 우리는 어째서 아직도 극심한 갈등과 다툼 가운데 머물러 있는지 살펴야 한다. 다음 세대를 기르는 교육의 현장에서도, 분열과 편가름을 가르치기보다 더불어 잘 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공감과 배려가 넘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며, 이웃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공감능력이 부족하면 ‘반사회성 인격장애’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개인의 공감능력 결핍이 사회적 맥락에서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학교폭력과 청소년자살은 그런 증상이 일부분일 뿐이며, 보다 폭넓은 사회심리적 병리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이처럼 중요한 인성 덕목인 ‘공감능력’을 어떻게 다시 쌓아올릴 것인지 함께 살펴야 할 터이다.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건강한 사회성은 ‘공감’하면서 자란다.

2018-08-16

소나기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먹구름보다야 맑은 하늘이 반갑다. 시커먼 구름장 하늘보다 시원하게 뚫린 파란 하늘이 늘 좋았다. 그런데 폭염을 지나며 비구름이 그립다. 흐르는 땀방울에 소낙비가 기다려진다. 마침 예보에는 전국 곳곳에 소나기가 뿌린다고 한다. 맑은 하늘이 늘 좋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은 그것이 찜통같은 무더위와 함께 왔기 때문일 것이다. 먹구름이 늘 싫지만 않은 것은 그칠 줄 모르는 폭서의 한 가운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보에는 소나기가 무더위를 물리치지는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기다려진다. 한줄기 쏟아붓기를. 한나절 식혀 주기를. 내려 쬐는 뜨거운 햇발에는 만물이 녹아내릴 지경이다. 흘러내리는 땀줄기는 닦아내기도 지칠 모양이다. 잠시라도 쉬고 싶다. 순간이라도 잊고 싶다. 드맑은 하늘을. 끈적한 느낌을. ‘이게 나라냐’며 촛불을 들었었다. 나라를 잘못 이끄는 이를 국민이 뜻을 세워 몰아내었다. 가파른 뜻이었다. 빛나는 생각이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이 나라의 주권은 그들에게 있었다. 자랑스러웠다. 기대가 높았다.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 마음대로 굴러가던 나라가 이제는 보통 사람들 생각을 담아 움직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일방통행이 아니라 함께 생각하고 더불어 나누며 나아갈 것으로 기대했다.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들이 실릴 것으로 상상하였다. 떼거리가 휘젓는 나라가 아니라 작은 이들의 목소리도 들릴 것이었다. 폭넓은 사고와 정깊은 배려도 우리 사회에는 필요했다. 한방울 피흘림없이 정권이 내려오던 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였다. 시민이 권력을 이긴 것이었다.그리고 이제 일 년 남짓. 염천과 폭염을 만났다. 짜증스럽도록 버거운 무더위가 어쩌면 우리가 처한 자리를 그려내는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한 번 바꾸었다가 다시 돌아간 기억도 있다. 아 정말 잘 할 수도 있었는데 무기력과 무능함으로 다시 빼앗겼던 상처가 있다. 그리고는 얼마나 오랫동안 힘들었던가. 이제는 배울 때도 되지 않았을까. 어느 편이든 어느 한자락 나아 보이지도 않는다. 자신들의 실력과 내공이 쌓여야 하고 능력은 스스로 내부에서 갖추어야 한다. 오른편이든 왼편이든 국민이 보기에 마뜩치 않다. 방금 힘을 잃은 당신들은 잘못 한 일들을 바닥부터 고칠 일이다. 케케묵은 구습을 고집하면서 소생의 기회를 노리는 일은 가당치 않다. 국민이 기억하고 있어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사회이든 선한 가치를 지키는 보수의 생각이 든든해야 한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국민을 믿고 실력을 길러주기 바란다. 지금 모양으로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 그렇게는 안 된다.진보는 어떠한가. 힘을 잃어버렸던 동안 내공을 실하게 쌓아왔는지 걱정스럽다. 조금씩 틈이 보이는 듯 국민은 조마조마하다. 높은 기대와 함께 국민이 맡겨준 힘이 아닌가. 나라의 인재를 두루 구하고 일거리마다 최선을 다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주시라. 국민만 바라보겠다던 다짐을 새롭게 하여, 보통사람이 안심하고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 주시라. 천만 촛불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시라. 국민의 힘으로 몰아낸 자리에 참으로 국민을 섬기는 나라가 서겠는지 주시하고 있다.나라와 지역이 폭염 속 날씨만큼 답답하고 안타깝다. 시원하게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다. 기대가 높았던 국민은 더위에 지치고 기다리다 지친다. 염천에 소나기만큼 시원한 리더십을 만나고 싶다. 폭염을 이기고 돌아온 국민에게 보란 듯이 펼쳐 주시라. 기다리던 소나기가 여기 있노라. 경제가 살고 사회가 안정되며 국제관계도 다시 살아나는 나라를 만들어 주시라. 입추가 지났다. 절기가 계절을 재촉한다. 기다리기도 버거울 판이다. 잘 이끌어 주길 바라고, 잘 준비해 주길 바란다. 한줄기 소나기처럼.

2018-08-09

약속의 무게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그가 떠났다. 덧없고 허망하다. 안타깝고 야속하다. 그래야만 했을까. 끝내야만 했을까. 짐은 무엇이었을까. 얼마나 무거웠을까. 가보지 않았으므로 알 길이 없다. 들어보지 못하여 헤아릴 길도 없다. 이제 그는 우리 곁에 없다. 남긴 생각을 더듬어 뜻을 짚어본다. 떨치고 떠난 세상은 그래도 나아가야 하므로. 서글퍼도 세상은 아직 움직여야 하므로. 시작부터 그는 달랐다. 그의 시간은 남들과 분명히 달랐다. 남을 위하여, 작은 사람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이들을 위하여. 아예 투명인간들을 위하여.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기적인 세상인 줄 다 아는 마당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다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걱정해 그렇게 떠나고 말았다. 떠나면서도 세상 걱정을 하지 않았을까. 끝내 못 이룬 꿈들이 안타깝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떠나야만 했다면, 그 무게는 천근이었을까 만근이었을까. 아니 도대체 그 무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스스로 어긴 것으로 드러날 ‘깨끗함’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배반한 것으로 판명될 ‘청렴함’이 아니었을까. 씻어도 회복되기 어려울 ‘단정함’이 아니었을까. 돌이키기 어려울 자신의 날카로운 언사가 아니었을까. 공직자가 깨끗하고 청렴해야 함을 수없이 강조했던 그 자신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앞에 선 이들의 몸가짐이 단정하지 못한 것을 수없이 지적하였던 그가 아니었던가. 많은 이들에게, 그는 ‘꼭 그랬으면 싶은 리더십’을 들려주고 있었다. 믿거니 하고 챙겨 새기는 흔하지 않은 지도자였다. 닮은 사람이 더 많이 나왔으면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그래서 짙은 것이다. 많이 좋아진 세상이 사람 복은 없는 것인지, 떠나고 난 자리를 세상이 메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뭘 그 정도 가지고 목숨까지 버렸는가 묻는다. 아니 그보다 훨씬 큰 짐을 안고도 버젓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고 해도 그런 위로는 그에게 들리지 않았을 터이다. 남의 들보가 아무리 크다 해도 자신의 티끌을 용납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주 작은 부정함도 덜어내고 싶은 그가 아니었던가.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그가 느꼈을 생각의 무게를 남은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정치인 한 사람의 도를 넘은 부끄러움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우리는 이 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무엇을 새길 것인가. 나의 생각은 무엇인가. 당신의 다짐은 무엇인가.마음을 가다듬고도 뜻이 남았으면 한다. 일상으로 돌아와도 그의 마음이 새겨졌으면 싶다. 시간이 조금 지나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기억 속에 혹 돌아볼 부분을 이제는 잘 정돈하였으면 한다. 모두가 새롭기 위하여. 사회가 나아가기 위하여. 나라가 바로 서기 위하여. 나도 잘 살아야 하지만, 남도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를 길렀으면 한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으면 한다. 오늘보다 나은 세상을 만나기 위하여 생각하며 살았으면 하고, 모두 함께 행복하기 위하여 마음을 모았으면 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치열함으로 부끄러움도 줄여 갔으면 한다. 삶을 마감하며 덜어내려 하였던 그 무게를 우리는 살아서라도 줄여갔으면 싶다.그가 남긴 약속의 무게를 새겼으면 싶다. 그런 끝에 우리는 굳이 다그치지 않아도 약속이 지켜지는 세상을 만나고 싶다. 크든 작든 약속은 지켜내야 한다. 큰 정치인 한 사람이 일러주고 떠난 일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그 같은 지도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혹 닮을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본다. 약속은 무겁다.

2018-07-26

폭염과 폭력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덥다. 여름은 더워야 제격이라는 생각에도 더워도 너무 덥다. 한여름 무더위가 당연하다 해도, 오늘 겪는 불쾌지수는 초유라 느껴질 만큼 기록적이다. 폭염. 염천폭력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 곡식이 익으려면 한여름 땡볕이 필수라지만, 한낮 찜통은 고통스럽다. 흐르는 땀줄기와 씨름하느라 평정을 유지하기도 힘들지 않은가.폭력은 무엇이나 인간에게 고통을 끼친다. 자연이 휘두르는 염천의 위세 앞에 인간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뿐이다.어린 학생들이 학교 안팎에서 저지르는 폭력이 어른들을 걱정하게 한다. 배움터가 되어야 할 학교가 어쩌다 폭력의 무대가 되어 버렸을까. 가르치고 배우는 질서는 어쩌다 잃어버린 것일까. 학생과 학생 사이에 있어야 할 아름다운 협력은 언제 가르치려고 학생들 간의 폭력과 욕설을 느슨하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학생이 심지어 선생에게 휘두르는 폭력에 학교와 선생이 쉬쉬한다면 우리 교육은 그 자리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인권을 외치느라 사도는 팽개쳤다는 말인가. 학생을 보호하려고 선생을 함부로 하겠다는 소리인가. 배우는 자의 권리를 세워주겠다고 가르치는 이의 교권은 무시해도 된다는 것인가. 교육이 살아나려면 선생의 자리가 지켜져야 한다.선생이 바르게 가르칠 수 있으려면 학생이 배우려는 태도로 다가와야 한다. 협력과 상생을 바르게 배우려면, 그에 걸맞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다툼과 갈등, 경쟁과 질시는 폭력적 태도의 씨앗이 될 뿐이다. 이겨야 하고 짓밟아야 하며 거꾸러뜨려야 한다면 마음 속엔 이미 폭력의 불씨가 지펴진 것이 아닐까.폭력을 없애기 위해서 교육을 바로 세워야 한다. 마음 속 폭력을 이미 키우고 있는 ‘과도한 경쟁’을 지워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을 덜어내야 한다. 모두 함께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야 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협력을 가르쳐야 한다. 남을 이기고도 내가 자라지 못하면, 이겨도 이긴 것이 못 되지 않는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을 가르쳐야 한다. 상생의 보람을 길러야 한다. 과도한 긴장과 도를 넘는 경쟁이 심성을 비뚤어 지게 하며 낙오자를 낳는다. 조금씩 틀어진 태도가 정도를 벗어나면서 폭력이 싹트게 되어 있다. 상상 속 폭력은 실제 폭력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겉으로 폭력이 나타나기 전에 학교의 현장에는 폭력으로 이끄는 조건들이 즐비한 것이다.경쟁, 다툼, 낙오, 좌절, 그리고 복수와 폭력. 그러니 겉으로 폭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걷잡기도 어려울 수 밖에. 교육의 기본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학교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선생이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학생은 배움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슬기와 지혜를 배우는 즐거움이 넘쳐야 하며, 협력과 상생을 기르는 마당이 되어야 한다. 즐거운 배움이 넘치고 보람있는 가르침이 가득한 곳에 폭력은 설 자리가 없다.교육이 반듯한 자리에 찾아갈 때에 학교폭력은 사라질 것이다. 벌어진 폭력보다 숨어있는 까닭에 집중해야 한다. 교육의 기초부터 살필 일이며, 가르침의 기본을 돌아볼 일이다. 견디기 힘든 폭염은 지나가지만, 뿌리깊은 폭력은 노력없이 근절되지 않는다. 교육의 제 모습을 찾아가는 일에 학교와 선생, 학생과 학부모가 마음을 합하여 나서야 한다.학교에서 폭력이 싹튼다면, 교육은 그 자리를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그 뿌리는 무엇이었을까. 남 탓을 하기 전에 교육에 거는 기대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교육이 서면 폭력은 사라질 수 있다.

2018-07-19

아직도 다른가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을까. 우리는 이를 꽤나 개화된 세상이 되어서야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유교 사상이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보란듯이 적고 있다. 서구 각국에서마저 여성에게 선거권이 허용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흑인 인권을 보장하자는 운동이 여성 권리를 개선하자는 것보다 먼저 일어났다고 하지 않는가.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정말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21세기가 되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여기며 차별적으로 대접하는 버릇이 우리 모두에게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놀랍게도, 신약성서 ‘갈라디아서’는 이미 2천 년 전에 ‘남자나 여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런데 그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렇게도 남녀의 차별과 격차에 대하여 고집스럽게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성별 간 임금격차 통계를 보면 회원국들 안에서 14.1% 의 임금격차를 보이고 있다. 즉, 같은 능력을 가졌어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적은 보수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부끄럽게도 꼴찌를 차지하고 있는데, 남녀 간의 임금격차가 무려 36.7%에 달한다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가.7월 첫 주는 ‘양성평등주간’이라고 한다. 양성평등기본법은 남녀 간 ‘성별에 따른 차별, 편견, 비하 및 폭력이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모든 영역에서 동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생각과 정신만 겨우 살아있고 현실에서의 실천에는 그리 관심들이 없다면, 실질적인 양성평등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이를 현실로 만들어 갈 것인가? 기념주간을 설정한다고 평등한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니고, 법이 있다고 모두 다 지켜내지 않는다면 생각도 법제도 모두 헛수고가 되지 않을까.유럽언론인협의회(EFJ)와 국제언론인협의회(IFJ)가 공동으로 발간한 ‘언론인양성평등핸드북’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보다 폭넓게 확보되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미 보장된 참여의 기회에 여성들이 생각보다 덜 참여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문제라는 것이다. 동등한 능력과 노력에 같은 임금을 확보하는 문제, 성희롱과 성적학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문제, 의사결정과 네트워킹에 보다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문제, 여성들 안에서 함께 과제를 발견하고 서로 상담하고 격려하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노력, 여성 리더십을 보다 주체적으로 형성해 가며 사회적 지도력을 확보하는 과제 등 여성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방안을 만들어 가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것이다.수천 년 전에 선포된 동등한 권리가 아직도 확보되지 않았다면, 오늘부터 특단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수천 년이 더 흘러도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양성평등주간은 남성과 여성의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터에, 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당연히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는 쪽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남성이 시혜처럼 던져주는 무엇을 기다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하자. 이를 평평한 마당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할 일이 있음을 인정하기로 하자. 더 이상 소중한 딸들에게 힘들여 올라가야만 하는 부당한 비탈길을 물려주지 않기로 하자.여성과 남성은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함께 손잡고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

2018-07-05

장마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시간은 직선인가 원형인가. 역사가 기록한 시간은 분명히 직선이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의 희로애락을 보내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러져가는 일도 시간이라는 직선 위에 우리 모두가 서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아닌가. 아니 그런데, 우리는 왜 사람이 죽는 일을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일까. 시간은 직선인 동시에 원형인 것이다. 앞으로도 나아가지만 같은 사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건을 경험하며 한 해 한 해 흘러가는 것 같아도, 해마다 같은 계절을 보여주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런데 햇수로는 2018, 2019, 2020. 그러니 시간은 직선이면서 원형인 것이다.어김없이 2018년의 여름은 왔다. 또 그 여름 가운데 또 하나의 반복, 장마를 만난다. 이 때 즈음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가온 장마는 늘 반가우면서도 야속하다.우선 농사에는 도움이 될 것이므로 반갑기 그지없는 것이다. 또 마침 여름 햇살이 뜨거울 적에 만나는 장마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어 좋기도 하다. 하지만, 빗줄기는 며칠씩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고 곳에 따라 물난리를 겪게도 한다. 그래서, 장마가 온다는 소식은 기대하면서도 반응은 늘 이중적이다.이번 장마와 함께 들려온 소식 한 자락은 시간의 이중성을 다시 드러내 주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이제는 수다히 걷어내고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의를 궁극적으로 구현하며 사회를 맑게 하여야 할 법원에 기나긴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국민의 마음은 다시 크게 무너져 내린다. 앞으로 나아가나 했었는데 다시 반복하여 목도하는 적폐인가 싶은 것이다. 가장 영리한 사람들이 저질렀을 폐혜는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보통 사람의 마음은 다시 힘들어 지는 것이다. 이제 법을 누구에게 맡길 수 있을까. 대통령이 나라를 망치더니 대법원장이 법을 망친 꼴이 되지 않을까.나라에 닥친 또 한 번의 장마가 마음을 어둡게 한다. 이번에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어김없이 어려움이 닥쳐왔지만 시간은 또 어김없이 흐른다. 반복하며 진전하는 시간 가운데 던져진 사람들이 얼마나 슬기롭게 어려움을 이겨내느냐에 따라 역사는 발전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하는 것이다.한 여름 장마를 잘 견뎌낸 농부가 풍년을 만나는 것처럼, 어려움의 산을 잘 넘어선 사회는 보다 풍성한 역사의 결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겪어온 역사와 흐름과 반복 가운데 이번 장마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게 이겨낼 것으로 믿는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당신이 쌓아놓은 폐해가 묻힐 것이라 기대했다면, 반복하여 드러내는 역사의 지혜 앞에 부끄러워야 할 일인 것이다.나아가며 반복하는 시간과 역사를 두려워 할 일이 아닌가. 장마가 걷히고 만나는 하늘은 늘 푸르지 아니하던가. 그리고 저 끝에는 청명한 가을도 기다리고 있지 않던가. 계절과 시간이 보여주는 반복과 흐름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지혜의 끈을 놓지 않고 이겨 나가면, 분명히 더 맑고 더 밝은 세상이 펼쳐질 것임을. 누구라도 걸림돌이 되는 당신들은 역사의 물결 앞에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임을.다가온 장마는 반가운 반복이었음을 증명하기로 하자. 드리운 어두움은 슬기로운 밝음으로 극복하기로 하자. 역사와 시간이 흐름과 반복의 지혜로 함께 할 것임을 믿기로 하자.장마는 걷힌다. 역사는 흐른다.

2018-06-28

관계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모바일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경제와 사회 전반에 스며들면서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는 다음세대 산업혁명이라고 한다. 20세기 후반에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이 불러온 지식정보혁명을 넘어,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또 한번의 기술혁명이 다양한 분야에서 사람을 대체하고 있다. 여러 단순반복작업이 폭넓게 잠식될 뿐 아니라 이제는 곧 판사, 의사, 교수 등의 고단위 지능직업군들마저 기술의 손에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들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인간이 만든 기계가 거꾸로 인간을 판단하고 재단하며 진단하는 결말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이전의 산업혁명들이 모두 기술의 도입과 혁신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기술은 인간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었다는 ‘도구적인 성격’을 유지했다. 3차와 4차산업혁명이 나타난 시점이 그리 긴 간격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네 번째의 산업혁명에 관해서는 그 존재와 의미에 대하여 논란마저 일고 있는 것이다. 즉, 4차 산업혁명은 3차 산업혁명의 연장으로 보일 뿐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산업혁명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기계가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생산의 효율화와 확장성을 증진시켜 왔다면 이 네 번째 혁명은 물리적, 육체적 한계 뿐 아니라 인식기능과 지능영역을 잠식해 오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알파고 사건으로 이미 목격하였으며 그 외에도 무인자동차와 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인간은 결국 기계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말 것인가? 인간에게 남은 의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인간이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 성취한 끝에는 인간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허로 남게 될 것인가? 어찌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마저 드는 것이다. 물리적 능력과 육체적 기능을 기계가 도와 모든 업무가 대량화하고 자동화되는 것을 넘어 지식과 인식의 기능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어 눈부신 변혁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육체와 지능 뿐 아니라 감성과 관계의 영역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들 영역을 기계가 넘본다는 것은 적어도 아직은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인간은 풍부한 감성과 예술적 감각을 토대로 자칫 건조할 수도 있을 기술의 영역과 함께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윤택하게 만들어 왔다. 인간 고유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특성’을 가지고 다양하고 폭넓은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어 사회적 기능과 국가적 맥락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이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였다는 21세기 초반에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지점은 바로 이 ‘관계’가 아닐까.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면 할수록 자칫 실종될 수도 있을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끌어올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의 영역과 교감의 기회를 늘려 가야 하지 않을까. 소통과 공감을 지향하는 인간관계의 형성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기계가 잠식해 오는 인간기능의 영역을 위기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감성능력의 도출과 보다 뛰어난 관계형성의 기회로 만들어 내어야 하지 않을까.혁명은 인간을 뒤로 물러서게 하지 않는다. 증기기관과 대량생산, 그리고 컴퓨터 기술이 인간의 삶을 기름지게 하여 왔다면, 4차 산업혁명은 다시 한 차례 인간의 삶을 높은 자리로 올려놓을 것이다. 이를 위하여, ‘관계’의 중요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2018-06-21

주사위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주사위는 던져졌다. 한반도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남북이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을 서막이 열린 것이다. 미국도 여지껏 가보지 않았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낯선 역사를 시작한 장소가 되었다. 대한민국 언론에 북한의 인공기가 펄럭이게 되었으며, 북한의 언론에 미국 대통령의 동정이 우호적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역사는 매우 더디게 흘러가지만, 어느 순간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세지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겨우 한 계절만에 해치우기도 한다.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찜찜하게 멈춘 것이 벌써 65년. 긴 세월동안 가보지 못한 그 땅은 어떻게 변하였을까. 찾아보지 못한 그 골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헤아려보지 못한 세월은 어떻게 돌려받을 수 있을까.세월의 무게를 돌아보자면, 어제 목격한 역사의 진전은 오히려 너무 가볍다. 이마저도 사람들의 복잡한 생각을 버무린 끝에 만들어진 결과이지만, 단 하루의 만남으로 정리되고 보니 그 모든 고난, 그 많은 갈등 그리고 그 많은 이야기들이 바람 결에 흩어지는 낙엽인 듯 하여 차라리 아깝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오가지 못했던 쓰라린 가슴들이 저렇게 멍든 채 남아있는데, 아직도 다툼 가운데 스러져 간 젊은 영혼들의 기억이 이렇듯 생생한데 우리는 이제야 새로운 시작을 이토록 싱겁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새로운 문 앞에 선 겨레는 이 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그만큼 ‘소원’이라 불렀던 지향점을 새롭게 다짐하여야 하며, 인류에게 소망으로 다가온 ‘평화’를 이제는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어느 몇 사람 지도자가 이루었다고 하는 것도 대단한 착오인 것이다. 반세기를 견디며 살아온 모든 사람들의 염원이 드디어 작은 결실을 본 것이며 앞에 선 몇 사람은 그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여 심부름을 했을 따름이다. 그 모든 눈물과 한숨을 기억하여야 하며, 그 귀한 희생과 목숨들과 바꾼 결과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한 일이라 내세우지 말 일이며 모두가 모두에게 감사하며 다짐을 새롭게 할 일인 것이다. 길고 긴 기다림이 이제야 손님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이며 아프고 쓰라린 다툼이 이제야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수고는 인정하지만 한반도와 세상이 요청하는 부름 앞에 오히려 더욱 진중하고 겸손해 질 일이다. 이제 겨우 첫 걸음을 놓은 것이며 갈 길이 아직도 멀다. 겨레의 기대와 소망 가운데 걸어 온 길이라면, 우리의 관심과 지켜보는 마음을 이제야말로 더욱 바로 세울 때가 아닐까. 주변의 열강들이 깊은 호기심도 가질 것이며 속으로는 탐심을 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모아야 하며 더욱 밀도있는 집단지성도 발휘하여야 한다. 이제는 큰 대륙 끄트머리에 붙은 초라한 한반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어야 한다. 대륙과 바다를 잇는 교통과 교역의 중심점, 한반도의 자리를 분명히 세워가야 한다. 그간 쌓아온 겨레의 역량과 상상력을 이제야말로 아낌없이 사용하여야 한다.이제 새 길이 열려오는가 보다. 수많은 고난과 골 깊은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나 이제는 한반도에 새벽 동이 터오는가 싶다. 오늘 발견한 작은 씨앗을 소중하게 키워내어 내일의 거목으로 자라게 할 사람도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어쩌면 가장 중요할 한반도의 역사를 함께 열어가는 다짐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는 각오도 분명히 하여야 한다. 오늘같은 날이 마침내 있기 위하여 어제는 그렇게 힘들었나 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겨레의 앞길은 우리가 열어가야 한다.

2018-06-14

사람읽기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나라가 무너지는 듯 했다. 시민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럴 때 나타난 그는 위대한 조국을 다시 세울 것이라고 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나라의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킬 것이라고 약속했다. 국민은 열광하였다. 마을마다 도시마다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하였다. 새 목표를 따라 나아가는 길이었으므로 모두 약간의 희생도 참아 냈다. 조금씩 불편해도 나라가 잘 될 것이라고 믿었기에 감내하기로 하였다. 그가 국민 앞에 지도자로 서면 천지가 개벽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라는 바뀌고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그렇게 그는 공식 선거를 통하여 선출되었다. 정당성을 완벽하게 가진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히틀러다. 그는 결국 나라를 망치고 국민을 욕보였으며 세계인들에게 창피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인류역사에 그 오명을 길이 남기며 부끄러운 기억을 이어갈 것이다.어쩌다가 독일 국민들은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도대체 어떻게 그런 바보같은 결정을 하였을까. 그가 국민 모두를 담지 못하고 결국은 인종차별이나 일삼으며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에 실패할 것을 어떻게 눈치도 채지 못했을까. 이를 미리 알아내거나 감지할 방법이 국민들에게는 없었을까. 전혀?결론은, 없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걸 정확하게 탐지하여 분명하게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세상에 궁금할 게 없어질 터다. 그 모든 인류의 실패와 구태, 나쁜 결정과 처참한 열매는 모두 사람이 저지른 것이다. 개인의 결정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은 대개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그래서 선거가 중요하고 선택이 무서운 것이다. 선택의 결과는 그의 임기 뿐 아니라 오래오래 그 그림자를 남길 수 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의 발자취는 늘 그리운 것이며 나쁜 지도자의 기억은 내내 우리를 힘들게 한다.우리는 또 한 번의 선택 앞에 도착하였다. 지방 선거이기는 하지만, 우리네 삶에 미칠 영향은 절대로 작다고 할 수 없다. 작은 선택에서 실패한 사람은 큰 선택에도 성공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을 지역의 지도자로 세울 것인가는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지역을 위하여 성실하게 열심히 땀흘릴 사람을 뽑으면 된다. 문제는, 저마다 그렇게 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우선, 그가 지나 온 길을 살펴야 한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 길에는 어떤 지향점이 보이는지 일관성이 드러나는지. 그 지나온 길의 맥락에 지금 하겠다고 주장하는 일이 닿아 있는지. 그가 살아온 모습을 그대로 이어가면 지역의 내일이 과연 보이는지 어떤지. 이제 공인이 될 그의 어제 모습이 내일 밖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겠는지.어느 작가가 이렇게 적었다. ‘선거로 집권한 인물이 다 훌륭하지는 않다. 폭군, 사기꾼, 거짓말쟁이, 천하의 호색한도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하기만 하면 권력을 쥘 수 있다.’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뽑아본 경험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속아 넘어 갈 수 없지 않을까. 얄팍하게 마음을 사려는 후보보다는, 진정으로 주민들을 섬기고 해야 할 일에 합당한 선량을 선출해야 한다. 작은 동네 선거일수록 보다 세심하게 살펴서 아래로부터 ‘조용한 선거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국민을 만만하게 보고 공직을 탐하는 사람이 이제는 나서지 못하도록 우리가 지켜야 한다.사람을 잘 읽어야 한다. 깨끗한 그 한 표로 바꾸어야 한다.

2018-06-07

변화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모든 것은 변한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늙어가고 부패도 하며 그저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자연 삼라만상 가운데, 생겨난 그 모습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사람이 만든 물건들이야 다시 손을 대어 그 모습을 바꾸기 전에는 변하지 않겠지만, 식물과 동물, 그리고 대기와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의 흐름을 타고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렇게 변해 가는 모습을 우리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그렇게 바뀌어 갈 뿐 아니라 그 변화에는 정해진 법칙과 방법이 있어 보인다. 시간을 따라 조금씩 새로운 것을 남겨 가면서 자연이라는 배경으로부터 사라져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자연스럽게’ 새 모습의 자연을 우리는 오늘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연과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런 변화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 아닐까? 자연은 자연스러운 변화를 만들어 가지만, 사람은 또 사람대로 오늘의 모습에 그대로 멈춰 있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더 나은 모습을 향해 움직여 가지 않는가. 오늘 나의 모습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말이야 ‘이 모습 이대로가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해도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하며 하나라도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오늘의 좋은 모습을 붙들어 둘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변화해야 하고 이왕 바뀌어 갈 바에야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며 꿈틀거려야 하는 것이다. 변화는 ‘자연스럽다’.변화는 어떤 방향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인가. 변화의 까닭을 깊은 곳에서 발견할수록 좋을 것이다. 날마다 생기는 문제를 따라 변해 갈 일이 아니라, 그 문제의 근원을 다스리는 변화를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겉모양의 변화보다 깊은 속이 바뀔 때 더욱 든든하고 뿌리깊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보이는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 문제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 살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할 터이다.변화의 결실을 기왕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수록 좋지 않을까. 이제는 글로벌 시대. 모든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활동이 노출되어 있다. 나 혼자 변화와 성공의 열매를 누리기 보다 함께 하는 변화와 함께 누리는 결실을 향해 만들어 가는 변화야말로 21세기형 변화가 아닐까. 나와 내 가족이 나아져 갈 뿐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그 열매를 나눌 만한 변화, 찾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그리고 변화는 그 흔적이 오래 갈수록 좋을 터이다. 보다 긴 지평이 열리고 긴 호흡이 느껴지는 변화, 생각만 해도 가슴뛰는 일이 아닐까. 내가 불러온 변화가 오래 남아있어 긴 시간동안 그 호흡을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의 지평을 넘어 변화가 불러온 결실을 여러 세대가 느낄 수 있다면.변화는 자연스럽다. 기왕이면, 보다 깊고 더욱 넓으며 긴 지평의 변화를 생각하기로 하자. 뿌리부터 다르고 누리는 이들이 더욱 많으며 세대를 넘어 흔적을 남기는 변화를 상상하기로 하자.마침 선거의 바람이 분다. 나선 이들 가운데 누가 그런 변화를 이야기하는가. 인물로 보아 정책으로 보아, 그가 말하는 변화에는 깊이와 넓이와 지평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어떤 변화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어떤 변화를 수용할 것인가. 또다시 결과를 놓고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부끄러운 평을 스스로 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바뀔 것이라면, 생각이 깊고 함께 누리며 긴 안목으로 다진 변화를 기대하기로 하자. 높은 기대가 걸린다.

2018-05-31

약속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모든 관계는 약속에 달려 있다. 관계가 있어 약속도 존재하는 것이다. 상관도 없는 사이에 무슨 약속이 있을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가깝거나 멀어지는 일도 약속을 어떻게 지켜내었는가에 달려 있다. 양치기 소년하고 친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약속이 관계에 중요하다는 것은 사람들 간에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국가나 기업 또는 단체가 국민과 소비자 그리고 대중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유지해 가는 데에도 ‘약속’의 무게는 절대로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다. 국가와 공직자는 국민과 생각을 나눔에 있어 신중하고 진솔해야 하며 투명하고 숨김이 없어야 한다. 국회의원 두 사람이 받고 있는 형사적 혐의에 관하여 말로는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하고는 국회의원 다수의 힘을 빌어 장막 뒤로 숨고 말았다. 국민들이 모두 보고 있는 터에, 청렴하고 정직하겠노라던 그 약속은 어디로 갔는지. 그들 자신 뿐 아니라 이들을 비호하고 함께 방패막을 만들어 준 동료의원들은 국민들이 겪는 실망과 배신감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지. 더욱이, 그동안 기대와 희망을 가지게 하였던 여당의원들이 이 같은 모습에 한 몫을 하였다고 하니 나라와 정권의 앞길에 걱정이 실리는 것이다.최근 타계한 한 기업인의 일화에도 ‘책임’의 소중함은 깃들여 있다. 오래전 여당의 비리에 자신의 기업이 동참했던 것이 밝혀졌을 적에 그는 그것이 창피해 낯을 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의 진정성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그가 한 말에는 진솔함이 실려 있는 것이다. 기업이 소비자를 상대로 사업을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소비자 대중과의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이 아닌가. 기업활동을 수행함에 있어 정치권과의 결탁이나 비리에 함께 하는 일은 소비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언사는 적절하였으며 이에 대하여는 보통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바쁘다.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지켜내기 위하여 북한과의 대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고민이 깊어 보인다. 이미 날짜까지 발표되어 있는 북미대화가 성사될 것인지에도 오늘은 물음표가 달린다. 이 땅에 전쟁 대신 평화의 기운이 자리 잡기를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약속’이 지켜지기를 간절히 기대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이익에 몰두할 뿐 아니라, 한반도와 주변 정세 그리고 세계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평화’를 불러오는 지도자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문 대통령은 주변 여러 나라들의 이익을 조정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과 북이 직접 당사자로서 이 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한반도에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 일에 매진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당신들에게 실린 약속의 내용은 ‘평화’가 아닌가.약속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크든지 작든지 그 무게만큼 지켜내야 하는 것이 약속의 의미이며, 이를 지키지 못했을 때에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도 당연히 상당한 것이다. 약속 내용을 확인하고 담보하기 위하여 우리는 온갖 수단의 보증방법을 생각해 보지만, 결국 이는 약속 당사자 간의 신뢰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약속을 할 적에 신중하게 할 것이며, 그 내용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혹, 어려운 일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정직과 투명함으로 나서야 하며 숨기거나 속이지도 말아야 할 일이다.모두가 약속 앞에 신중하기를 바라고, 약속한 내용 그대로 지켜내는 믿음이 가득한 세상을 만나고 싶다. 믿지 못할 세상에 살고 싶은 이는 한 사람도 없다.

2018-05-24

벌써 여름인가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계절이 바뀌어 가는 일 만큼 신비로운 게 세상에 또 있을까. 그처럼 혹독했던 겨울이 씻은 듯이 물러간 것이 겨우 몇 달인가 싶은데, 찬란한 햇살 화사한 봄 길을 건너 여름 문턱에 다다르고 보니 자연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자연이 사람을 도우면 도왔지 사람이 자연을 도운 적이 언제 한번 있었을까. 사람이 애를 쓰고 노력해 일들을 해 간다지만, 자연만큼 소리내지 않고 갈등도 다툼도 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봄이 여름으로, 도처에 세상을 물들이며 분명히 바꾸어 가지만 어려움이나 아픔을 호소하는 일 없이 또 그 어떤 칭찬이나 격려도 챙기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여름으로 안내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여름이 도착하고 있다.마침 이 계절에 우리는 나라 밖으로 평화에 기대가 걸리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지방선거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의도적이었을까, 일정마저 거의 겹쳐 진행되고 있어 둘 가운데 무엇을 먼저 바라봐야 하는지 국민들은 조금 당혹스럽기도 하다.먼저, 남북미 대화. 거의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북한 당국과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번에는 온 국민의 기대를 한 곳에 모으고 신뢰를 회복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북한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다가올 것인지,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에 실질적인 관심을 가지고 임할 것인지 긴장 속에 바라보는 국민은 애가 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선거. 마을마다 동네마다 다음 몇 년을 맡길 사람들을 살펴야 하는데, 받아든 명함뭉치 말고는 제대로 헤아릴 방법이 없다. 무릎이라도 맞대고 앉아 생각을 나누고 마음이 오가며 대화라도 한 판씩 벌어졌으면 좋을 것을, 선거는 이를 허용하지 않아 출마한 인사들을 겉핥기로만 대하고 있다. 표를 던질 국민들도 찬찬히 살펴야 하겠지만, 선거제도도 이를 보다 세심하게 가늠할 수 있도록 나아져야 할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생각깊은 인사가 선출되지 못한다면, 선거의 의미가 제도의 그늘에 묻히고 말지 않을까. 이 모든 날들을 지나며 우리는, 선거의 뜻을 바르게 거두어 내며 선거의 과정과 방법이 그 의미를 잘 담아내도록 생각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방법이 의미를 담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허망하게 다음 선거를 기다리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채 한 달도 안 남은 초여름이면 미국과 남북한의 대화는 일단락을 짓고, 우리의 지방선거도 막을 내린다. 나라 사이의 대화에는 누가 가장 많은 것을 챙길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고, 선거의 결과로는 어떤 사람들이 일하게 될 것인지 알게 될 터이다. 수십 년 나뉘었던 이 땅의 통일이 바라보이는 일이 아닌가. 화약 냄새로 가득했던 이 반도에 이제는 평화를 당겨올 일이라지 않는가. 회담으로 향하는 대표들에게 기대도 싣고 우려도 전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지방선거. 그 누가 뽑혀도 그리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를 이제는 벗어야 한다. 분위기도 바뀌고 빠르게 변화해 가는 세상에, 선거와 투표에 임하는 우리 표심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하루 계절은 여름으로 다가간다. 날마다 열기를 더하며 여름 본색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남북대화에도 지방선거에도 생각이 모이고 마음이 합해져서 날들이 더워질 만큼 결과도 따뜻해서 국민이 안심하고 지방이 든든해지기를 기원해 본다. 풀뿌리 민심이 여지껏 만들어 낸 결과는 생각보다 위대했다. 남북관계와 지방선거, 두 가지 커다란 일들 가운데에도 더 이상 흔들림없이 지혜로운 성적표를 받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대하는 것이다.

2018-05-17

스승의 날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 때가 있었다. 임금과 스승, 그리고 아버지는 같은 반열이라 하여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기도 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선생의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학생과의 관계가 깨어진 나머지, 선생님들 스스로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누구의 잘못일까. 선생님은 누구인가?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학생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고 그들이 사람노릇을 할 수 있도록 기르는 것이 선생의 할 일이다. 이 두 가지, 즉 지식전수와 인성개발의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지는 선생님 각자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일 것이다. 지난 세기 시대적 요청에 따라 우리는 스승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잘 가르쳐 ‘아는 것이 힘’이 되도록 이끌어 왔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그 일을 매우 훌륭하게 해 오신 덕에 이 나라가 이만큼 발전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전달할 새로운 지식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날의 선생님과 오늘의 선생님은 그 직함은 변함이 없으되 하는 일은 매우 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 그 어떤 새로운 지식도 학생들 쪽에서는 새로울 것이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것이 있다고 하여도 순간순간 바뀌어 가는 현실 앞에 고정적인 정답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 쪽은 선생님이 아니라 학생들이 되어 버렸다. 이런 마당에 선생님은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일까. 선생의 역할 그 본질로 돌아가 보자. 지식전수와 인성개발. 새로운 무엇을 가르치기보다 이제는 함께 배우고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지식 그 자체의 성격이 고정적이기보다 매우 유동적이며 빠르게 변화하여 가는 것이라면, 이제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배우고 이를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가에 오히려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가는 세상의 모습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그 변화의 양태가 가히 혁명적이라는 것. 이전의 어떤 변화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와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인성개발’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역할이 디지털문명에 조금씩 밀려나는 상황. 사람이 사람 역할을 하기도 버거운 세상. 혼자도 어려운데 함께 하기는 더욱더 힘들어지는 마당. 바로 이럴 때 우리는 바른 ‘인성’을 키워내야 하지 않을까. 선생의 역할을 단순한 지식전수로부터 과감히 옮겨 인성개발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새로운 것은 선생과 학생이 함께 배우고 나누며, 발견한 그 무엇이라도 이제는 이를 어떻게 사용하여 우리 모두의 삶에 유용하도록 함께 만들어 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교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그래서 이제는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기만 하는 일방통로가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 함께 배우고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면 얼마나 좋을까. 이미 바뀌어 버린 세상을 지혜롭게 읽어내어 선생과 제자 모두에게 득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성공은, 달라진 세상을 누가 먼저 눈치채고 그에 어울리는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선생님들이 그 같은 변화를 잘 담아내기만 하면, 학생들이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지 않을까. 학교에서 담아오는 세상의 변화를 가정의 부모님들도 존중하지 않을까. 혁명이라 불리는 변화 앞에 우리는 또 얼마나 혁명적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인 것이다. 우리가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잃어버린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새롭게 돌아올 수도 있고 끝끝내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하였다.

2018-05-10

홈 스위트홈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어김없이 찾아온 5월, 가정의 달.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부부의 날과 스승의 날. 듣기만 해도 풋풋하고 따뜻한 느낌이 흘러넘친다. 하지만 이 날들을 기대하듯 정겹게 맞기에는 너무나 팍팍하고 답답한 현실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또 하나, 이런 특별한 이름을 가진 날들이 다른 나라들에는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 그들은 또 왜 그러는 것일까. 그네들 사정을 들여다 볼 때, 우리보다 오히려 여유있고 넉넉한 사회 환경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면 이런 우리의 날들이 차라리 걱정이 되는 것이다.우리는 여건 상 여유가 없으니 그 하루씩 만이라도 생각을 모아 보자는 의미였을까. 까닭이 어떠했든지, 우리에게 다가온 5월을 ‘가정의 달’로 뜻있게 맞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저 이름붙은 날로만 기억하고 지나기에는‘가족’이란 이름이 너무 소중하지 않은가. 일년에 한번 때우듯 떠나 보내기에 어린이와 어버이, 부부와 스승의 가치는 너무나 무겁지 않을까. 먼저, 어린이. ‘어린이는 우리의 미러라고 수없이 외쳐보지만, 우리가 어린이들의 미래를 위해 긴 호흡과 깊은 생각을 모아본 적이 있었을까. 교육은 백년대계라고 구호만 늘어놓고는, 조삼모사 교육정책으로 그들을 오히려 힘들게만 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어린이들을 우리의 다음 세대로 기르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처음부터 다시 생각을 모아보아야 하지 않을까.둘째는 어버이. 부모들과의 소통과 교감이 갈수록 옅어지는 세상에 어버이들께는 면목이 없다. 세대의 단절이 나날이 깊어만 가고 가풍은 옛날 이야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어디에서 왔을까. 뿌리를 찾아보고 내력을 알아보아 삶의 의미가 면면히 내려가는 흐름 속에 있었다는 걸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 살아가는 일에 관하여 보다 진지해 지고 숙연해 지며 실수와 패착도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부부. 부부는 정말로 전생에 원수였을까. 갈수록 남처럼, 볼수록 타인이 되어가는 희한한 느낌을 어떻게 고쳐볼 수 있을까. 처음처럼 돌아가는 일은 끝내 불가능한 것일까. 우선, 표현과 소통이 절대로 부족하다. 아니, 없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아끼고 돕겠다던 그 모든 느낌을 이제는 아예 나누지도 않다보니 함께 살아도 남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이제라도 나누고 표현하고 늘어놓고 대화하는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일을 일부러라도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그리고 스승. 하늘같던 스승이, 추상같던 무게가 하염없이 떨어져 가벼워진 오늘. 이제 가르치는 일의 의미도 몰라보게 바뀐 오늘, 우리는 어떤 선생님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일까. 스승들이 나서서 스승의 날이 부담스럽다 하는 모습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바뀌어 가는 모든 일들 가운데, 학생들의 내일을 준비하며 가르치는 선생님은 아직도 교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어린이와 어버이, 그리고 아내와 남편이 소중한 만큼 선생님의 무게도 다시 새겨보는 5월이었으면 싶다.가정의 달이 기대하는 만큼 따뜻하려면, 우리 모두가 옷깃을 여미듯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회복하여야 한다. 나만을 고집하기보단 서로 서 있는 자리를 존중하며 배려할 때 너른 가슴이 생겨나고 소통과 공감이 함께 있을 때에야 서로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이 달이 빛날 수 있지 않을까.오월 한 달 내내, 격려와 칭찬으로 배려와 감사를 나누어 다른 달보단 행복의 웃음이 늘어나는 홈스위트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18-05-03

봄비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봄은 그 자체로 눈부시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산하를 어느 틈에 초록으로 물들이는가 하면, 시냇물 개구리와 담장 옆 개나리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사람이 어느 한 자락 거들지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온 이 계절은 방금 지나온 겨울과 비교하면 가히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살을 에이던 찬 공기는 어디로 갔으며 두텁던 얼음장은 어디 갔는가. 차갑게 얼어붙었던 사위에 갇혔을 적에 우리는 봄을 기다리지 않았던가. 오도가도 못 하는 추위와 긴장 속에서 따스한 봄볕을 기대하지 않았던가.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에도 겨울이 있고 봄이 있다. 사면초가 답답한 시절을 보내면서도 봄처럼 다가올 돌파구를 희구하는 것이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 집안 사정이 그렇고 수십 년을 두고도 풀리지 않던 남북관계가 그렇다. 내일이면 남북의 정상들이 만난다는데, 이제는 한반도에 봄이 오는가 높은 기대가 걸린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도 내일이면 나아질까 기다림이 있다. 날마다 청명하기를 바라지만 이따금씩 비가 내린다. 봄비. 어두운 겨울을 뚫고 이제는 봄인가 했더니 아니, 그만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화사한 봄날이면 좋았을 것을, 우중충한 봄날도 있는 것이다. 나른한 봄날을 즐기려 했더니 꼭 한번 씩 시샘추위도 찾아오는 것이다. 거의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비와 꽃샘추위는 또 한 자락 깨우침을 떨구어 놓는다. 각자의 마음에 긴장을 놓지 말라는 것을….나를 찾은 봄이 꼭 나만의 노력으로 오지 않았던 것처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려움도 불현듯 닥치는 것이다. 그러니 잘 나갈 때 오히려 조심하라는 것. 풀려갈 때 느슨하지 말라는 것. 좋아졌을 때 차라리 경계하라는 것. 혹 비가 내리면 어찌 할 것인지 잘 살피라는 것.남과 북의 만남은 그 자체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눈이 녹고 꽃이 피듯이 따사로울 것이지만, 반드시 또 비가 내릴 것을 상상하며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 어떤 어려움이 저 길에 서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질 해빙을 만끽하면서 어쩌면 다가올지 모를 어려움을 생각해 볼 일이다. 따뜻한 봄에도 차가운 비가 내리듯, 남북의 관계에도 어느 자락에 찬 서리가 내릴지 모를 일이다. 봄은 찾아왔지만, 비를 경계할 일인 것이다. 그래도 국민은 설렌다. 이게 얼마 만인가. 만남에 임하는 모든 이들이 봄에도 내릴 비를 경계하면서 평화의 길을 잘 닦아주길 기대할 뿐이다.안으로는 어떤가. 이제 또 선거의 계절. 누구를 뽑고 나면 봄이 올 것인가. 우리네 힘들었던 삶의 모습이 정말로 나아질 것인지. 봄이 가져다 준 기적에는 못 미칠 약속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국민은 다시 한 번 속아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 중. 우리는 얼마나 순진하고 바보 같은 것인지. 잘 살피며 표를 던진다고 매번 다짐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언제나 실수가 아니었던가. 입후보한 이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하길 바라고, 투표하는 이들이 풀어야 할 문제에 집중하길 바란다. 아니, 투표에 임하지도 않고 불평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남북대화의 희망도 지방선거의 기대도 사실은 모두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올곧은 줄 눈치 챌 적에 남북의 정상들이 평화를 반듯하게 찾아올 것이며, 보통 사람들의 눈초리에 흔들림이 없을 때에 좋은 사람들이 대표로 선출될 것이다.나라에도 지역에도 봄이 오길 바란다. 너무 긴 겨울이었고 오래 기다린 봄이 아닌가. 따뜻한 봄 햇살이 찾아들길 기대하면서, 또 함께 내릴 빗소리도 상상하며 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봄에도 비는 내린다.

2018-04-26

봄 빛에 물들다

▲ 차혜명선린대 교수 교육학 박사봄은 과연 도시보다 시골에 어울리는가. 아파트의 콘크리트 담장보다 시골집 울타리 곁에 핀 개나리가 백배 아름다우며, 빌딩 숲에 숨죽이며 꽃잎을 연 진달래는 산자락 비탈에 만개했을 때가 훨씬 예뻤을 터이다. 도시에서 맞는 봄은 그 향기도 덜한 것인지 도무지 봄으로 여길 여유조차 발견하기 힘들다. 이럴 땐 어디론가 훌훌 털고 떠나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도시민은 세사에 갇혀 오도가도 못 하는 신세.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공평한 봄 볕과 봄 빛. 그마저도 하기야 도시의 소음에 묻혀, 오늘 하루 그 봄을 느껴보기나 했는지 벌써 아득한 심정. 우리는 어째서 이 봄을 거부하듯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영광을 바라고 봄을 무시하며 뻐기는 것일까.누구에게나 봄 볕이 내려쪼이듯, 모든 기회가 차별없이 공평했으면 좋겠다. 재벌집 따님이 웬 갑질을 했다는데, 그게 어째서 딴 나라 소리처럼 들리는 것일까. 어떻게 우리는 이걸 당연한 듯 살고 있는 것인지. 법을 어기며 무엇인가를 했다는데, 처벌할 방법이 없다는 소리는 혹시나 잘못 들었던 것일까. 그 집 자매가 하나같이 그런 힘을 나누어 가졌다고 했던가. 어째서 법조차 공평하지 않은 것일까, 우리 사회에는. 기회가 공평하고 결과가 정의로울 때에 모두가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사회로 느끼지 않을까. 그래서 한 낮 따사로운 봄 볕에도 배울 게 많은 것이다. 빠짐없이 한결같이 따뜻하게 내려 부으며, 이왕이면 사람들도 서로에게 너그럽기를 넉넉하기를 그리고 한결같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내가 저 봄 기운이라면.아마 저 같은 봄 기운은 북녘에도 도착했을 것이다. 두 정상이 만날 일을 준비한다는데, 이들 생각 속에 국민을 헤아리는 마음이 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둘이 만나 둘만의 영광을 나누면 얼마나 볼썽사나울 것인가. 이제는 겨레의 만남을 이루고 이 땅의 평화가 다가오는 만남을 만들어 주기를 봄 기운과 함께 기대해 본다. 봄은 남과 북을 차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신들도 모든 이들의 가슴을 감동으로 적셔낼 준비를 하시길, 봄 볕에 의지해 바라고 싶다.늘 양치기 소년이 되고 말았던 우리의 소원이 이 봄에는 조금 더 당겨 보이기를 두 사람의 만남에 기대해 본다. 수십년을 말없이 기다려 준 백성의 마음을 이제는 헤아리듯이, 만남이 평화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싶다.이 봄도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은 누구나 안다. 한동안 포근하고 따사로울 봄 볕이 이제 곧 불볕이 되고 폭우가 될 것을 이미 아는 것 아닌가. 혹 오늘 행복하다고 자만하지 말 것이며, 혹 오늘 어둡더라도 낙심하지 않기를. 봄이 늘 봄이 아니듯, 겨울도 늘 겨울이 아니었으니. 행복할 때는 부족할 것을 준비하고 모자랄 때는 남을 때를 대비하여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모든 시간은 흘러흘러 결국은 한 줌 흙으로 남을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다만, 오늘 일에 성실하고 오늘 만남에 집중할 때에 오늘 내게 합당한 열매로 돌아오지 않을까, 바라고 기대하며 오늘을 간다. 그래서 흘러갈 봄 기운데도 배우는 것이다. 오늘에 집중하고 오늘에 성실할 것을.봄 볕이 따뜻한 동안 약속을 하나 했으면 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기를, 누구에게나 너그럽기를, 그리고 기다리지 말기를. 차별없는 세상이 이제는 이 땅에 자리를 잡아 함께 사는 세상이 살 만 하기를. 봄 기운에 배운 대로,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헤아리는 마음이 공동체를 이루는 조건이 되기를. 그러므로, 힘들어도 웃을 수 있고 어려워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이 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봄 빛에 드디어 물이 들 듯이.

2018-04-19

인생은 마라톤처럼

▲ 차혜명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봄날 아침, 꽃샘추위였는지 뚝 떨어진 기온에 움츠러들었지만 마라톤에 함께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설레었을까 모두들 상기된 모습이었다. 살아가는 일에도 날마다 그만큼씩만 흥분되어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즐겁게 이겨내지 않을까 싶었다. 출발선에 선다. 아니 그 출발선에 서기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우선 건강해야 뛸 수 있으니 이 날 만큼은 아프지 말자 다짐하며 기다려온 오늘이 아니었을까. 가장 좋은 기분으로 달려가기 위해 마음도 다스리며 이 아침을 맞지 않았던가. 모두에게 같은 조건. 진짜 문제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타이밍이 맞아야 하고 적절해야 한다. 건강은 물론이고 마음도 잘 다스려야 한다. 그리고야 출발선에 서는 것이다. 자, 달려 나가자.어디로부터 이렇게 많이들 찾아 왔는지. 함께 뛸 사람들이 모두 즐겁다.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응원하며 악수도 하고 박수도 치고.오늘은 차라리 축제의 날. 이렇게 좋은 날 더불어 달려 나가며 어우러져 이 도시를 들뜨게 하자. 달리는 발자욱마다 이 길을 새 기운으로 물들게 하자.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이란 차라리 성스럽지 않은가. 하늘이 보고 있다면 마라톤 광장에는 축복이 가득하지 않을까.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으며 모두가 행복한 이 시간의 넉넉함은 어디서 왔을까. 뜀박질을 함께 즐기자는 단순한 초청에도 이렇게 행복한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을까.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도 어차피 이 도시를 지킬 것이라면 날마다 사는 일도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친구와 이웃과 동료가 있음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모두라면 오히려 격려가 되고 응원도 받아가며 어려운 일도 쉽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함께 숨쉬는 공동체를 어떻게 살려내는가에 달려있지 않을까.달려 나간다. 누구는 천천히, 누구는 빠르게. 결승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길들을 생각 속에 그리며 달려 나간다. 서로 다른 보폭이지만 자신은 만만하다. 끝까지 달릴 것을 기대하면서 지치지 않고 달릴 것을 상상하면서 내닫는 것이다. 달리는 길 위엔 새 봄이 풍성하다. 만개했던 벚꽃이 벌써 지려는지, 하지만 새파란 봄 하늘이 보폭처럼 출렁인다. 이렇게 싱싱했구나, 세상의 모습은. 이렇게 즐거운 길이었구나, 함께 뛴다는 일은. 펼쳐지는 길거리가 새삼 정겹다. 아등바등 애쓰며 살아보지만 무슨 큰 차이가 있었던가. 이제 돌아가면 즐겁게 살아야지 다짐도 되고 매일매일이 기대도 된다. 달리며 웃고 걸으며 즐겁다. 빨리 뛰어도 그 결승점이고 천천히 걸어도 같은 결승점. 달리며 깨우치는 단순한 이 생각에 스스로 흥겹다. 즐겁게 살자, 행복하게 지내자 마라톤이 가르친다.반환점을 돌아 결승점으로 향한다. 오던 길 익숙한 풍경이라 자칫 무리할 지도 모른다. 왔던 길 다시 달려도 우습게 보지는 말 것. 돌아가는 길은 오던 길과 또 다른 다짐으로 나서야 한다. 길은 같아도 나는 다르다. 숨이 가쁘고 몸이 지친다. 마음도 새롭게 보폭도 신중하게 다시 긴장하며 다시 다짐하며 돌아가는 저 길을 상상해 본다. 다 아는 것 같아도 아직도 모른다. 나이가 들었어도 삶에는 언제나 낯선 가닥이 가득하다. 방심은 금물, 느슨하지 말 일이다.드디어 결승점. 모두가 행복하다. 다 달려왔구나. 수고들 했구나. 돌아보는 굽이굽이가 새삼 정겹고 함께 도착한 사람들이 참으로 대견하다. 각자의 삶에서 그렇게 승리하시라. 오늘처럼 행복하게 달려가시라. 함께 달려 즐거웠고 같이 견주어 행복했습니다. 내일부터 사는 일은 마라톤의 기억처럼 해내야 한다. 건강하게, 즐겁게, 그래서 행복하게.

2018-04-12

봄은 잔인할 것인가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피고…”오지 않을 듯 싶던 봄이 어느 틈에 무르익어 이제는 한낮에 땀이 송송 배인다.산천이 녹아내려 꽃을 피우고 산에도 들에도 봄 빛깔이 깊으면 저절로 봄노래가 흥얼거려 지는 것이다. 걱정은 사라지고 무엇이라도 잡을 듯하다. 겨우내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나른해 지고 여유로워 지는 것이다.하지만 봄이 온다고 하여 내 삶의 모습이 그리 달라지는가. 계절이 바뀌어도 선 자리가 변하지 않았다면, 살아가며 겪는 근심과 걱정은 거기 그대로 있는 법.어느 시인은 그래서 4월을 두고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겉으로는 넉넉해 보이는 날들 가운데 몸으로 지나가는 어려움과 또 그 상처들이 그 어떤 어두운 그림자보다 더욱 짙게 여겨지는 것이다.저렇듯 아름다운 계절이 이렇게 힘든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연 사월은 잔인한 달인 것이다.우리의 4월은 어떠한가. 곧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만난다 하고 연이어 미국과 북한도 함께 해, 드디어 한반도에 봄이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기대도 되고 희망이 보인다. 여러 번 속아 본 국민들은 이번에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들려오는 소식에 눈과 귀를 모으고 있다. 남과 북은 정말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어디 그뿐이랴.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지역의 동량들이 저마다 핑크빛 다짐과 약속들을 날리며 뜬금없이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다.시장, 군수, 도지사, 시의원, 구의원, 도의원, 교육감…. 후보들 모두의 약속을 모으면 당장이라도 이 나라는 천국이 되는가 싶다. 이제 곧 길거리에 그들이 머리도 조아리고 허리도 굽힐 것이다. 후한 웃음과 풍성한 언변을 대하며 우리 모두 사뭇 들뜨고 고무될 것이며 구름 위에라도 앉을 것이다.그런데 남한과 북한은 정말로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을까. 한반도는 저 모든 약속들을 담아낼 수 있을까. 돌아서 생각하면, 이 모든 소망과 기대가 또 한 번의 소란스런 기억으로 흩어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남과 북,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열강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이 땅의 염원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에 따라 이 나라는 분단의 고통을 아직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길거리에서 명함을 돌리며 지지를 호소하는 저 사람들도 6월 중순이면 씻은 듯이 보이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시민들은 어찌 해야 하는가.이제라도 눈을 부릅떠야 할 터이다. 우리 정부가 하는 이야기도 북한이 하는 소리도 또 미국이 던지는 이야기도 귀만 열 것이 아니라 생각을 활짝 열어 살펴야 할 것이다. 거짓 주장이나 헛된 욕심을 담지는 않았는지, 이번에는 적어도 평화로 가는 길목에,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든든한 다리 하나라도 생겨날 수 있도록 국민이 사뭇 긴장하며 지켜봐야 할 터이다. 지방선거에 나선 저들에게도 우리는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유권자를 우습게보고 이 틈에 입신양명하려는 이들을 가려내야 할 것이며, 시민을 참으로 섬기며 일할 사람들만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당겨올 사람인지 현명하게 판단하는 주권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대화를 했는데 평화가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쉬울 것인가. 선택을 하고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몇 년은 또 얼마나 안타까울 것인가. 평화의 그림자라도 밟아보고 싶고, 변화의 실개울이라도 건너보고 싶다.꿈에라도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왔으면 싶고, 이 봄에는 좋은 사람들만 선택되었으면 한다. 살피는 일은 우리가 할 일이며, 반듯한 선택도 우리 손으로 하는 것이다.잔인한 4월을 노래했던 시인의 예언이 이번에는 틀렸으면 한다. 이 봄은 부디 허망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2018-04-05

연결능력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시간은 미래로 달려간다.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조금씩 변해가고 있으며 세상의 모습도 그만큼씩 바뀌어 가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 우리의 모습과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대해 흔히 듣게 되는 소리가 그 정체를 분명히 확인하기 쉽지 않은 `4차 산업혁명`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과연, 보통 사람으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며 전문가들 사이에도 그 실체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들린다. 세계경제포럼(WEF)의 클라우스 슈밥 회장은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 분야의 융합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기술혁명”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고 일해 왔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기술혁명이 도래했다고 하면서 그 변화의 규모와 범위, 복잡성 등은 이전 인류가 경험했던 그 어떤 변화와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경제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4차 산업혁명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허구”라면서, “우리가 겪는 변화는 정보화 혁명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입장을 내놓았다.하지만,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클라우드컴퓨팅, 자율주행 자동차와 빅데이터 등 눈부신 구체적 변화가 실제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존폐의 위기에 몰리는 직업군들이 나타나고 있어 과연 세상이 바뀌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4차 산업혁명과 함께 거론되는 저 기술분야들은 고도의 전문지식과 장기간의 연구개발을 토대로 진행되는 것들이라서 보통 사람으로는 따라잡기가 매우 어렵다. 그보다는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한다. 급변해 가는 사회의 모습을 살피다 보면, 한가지 매우 중요한 힌트를 담은 가닥을 발견하게 된다.연결능력. 즉,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끊임없이 경계없이 그리고 제한없이 연결되면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과연, 우리는 이전의 그 어떤 연결의 형태보다 훨씬 확장되고 한계가 없는 연결의 지평을 인터넷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의 세계는 우리를 한없는 연결의 바다에 빠뜨려 놓은 것이다. 그 연결의 지평을 어떻게 개인의 삶에 유용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활용해 실제 나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는지는 결국 개인 역량에 달린 것으로 보인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인맥`이라 부르던 것이 디지털 세상에서 `연결`이라 표현되는 것이다. 이전에는 사람과 사람 간에 물리적인 만남과 교감으로 인맥이 형성되어 운용되었다면,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양한 기기들이 들어서 폭넓은 연결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은 달라 보이지만 본질은 같은 것이다. 다양한 의미에서 연결의 지평을 넓게 만들어 내고 긍정적으로 유지하며 확장해 가는 능력은 이전에도 중요했지만 디지털 세상에는 더욱 긴요한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연결능력`은 기술적으로만 설명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차라리 인성과 품성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며 심리적이고 사회적 기능으로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개발해 디지털 세상에서 쓸모있는 역량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매우 아날로그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눈부신 디지털 기술개발이 중요한 만큼, 인간의 아날로그적 인성이 풍요롭게 유지되는 일이야말로 기술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데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4차 산업혁명의 추이를 적절히 관찰하며 그에 기술적으로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의 `연결능력`과 `관계형성`에 보다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갈고 닦아야 할 필요가 분명히 보인다.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 감성이 있어야 비로소 빛날 수 있으므로.

2018-03-29

우리가 바라는 리더

▲ 차혜명 선린대 교수·교육학 박사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 만날 적 좋았던 사람은 헤어지고 나서도 그리운 법이다. 반대로, 함께 했던 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다면 헤어진 다음 느끼는 미움이나 상처도 그만큼 남아있지 않을까.혹 그 상흔이 오래오래 남아있기도 할 것이다. 정부 수립 후 우리는 열두 사람의 대통령을 만났다. 그들 모두 만날 때야 거의 모두 국민들의 기대와 박수 가운데 등장했지만 헤어질 때 느낌이 좋았던 대통령은 우리 기억에 어째서 없는 것일까. 왜 그랬을까. 무엇이 잘못 되었던 것일까. 대통령은 선출직 공무원이라 국민의 손으로 뽑게 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는 어떤 실수를 거듭하고 있는 것일까.마침 우리는 또 한 사람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기 직전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아픈 역사를 목격하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무슨 다짐을 해야 하는 것일까.혈연과 지연과 학연.사람이 사는 데 인연을 무시할 수 있을까. 지역별로 학교별로 똘똘 뭉쳐 밀어주고 당겨주는 정서를 탓만 할 수 있을까. 남보다 가족이 끌리고, 처음 만난 사람보다 오래 알던 사람이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야 인지상정이 아닌가. 하지만, 대통령을 뽑으면서도 그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그가 나와 어떻게 가까운지 어떤 맥락에서 관련이 있는지에 치우쳐 결정하지 않았을까 반성해 보는 것이다. 실제 능력과 상관없는 판단으로 누군가 선출될 때에 마피아도 생기고 집단의 광기도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동일한 조건이면 가까운 사람에 끌릴 수도 있을 터이지만, 그가 과연 그 직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먼저 판단하는 지혜를 품어야 하지 않을까. 불행한 이별을 원하지 않는다면 만남의 결정이 지혜로와야 하는 것이다.배려와 공감. 선거철에는 멋진 말들이 날아다닌다. 수려한 언변이 판단을 흐린다. 말만 들어서야, 모두들 국민을 위한 선량이 될 터이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속지 않았던가. 사거리에서 90도 절을 하며 표를 달라던 그가 임기 동안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유권자 시민을 위해 진정으로 공감하고 마음으로 배려하는 그 사람을 뽑아야 할 터인데 이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어렵긴 해도 방법은 있다. 그가 이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살펴볼 방도는 있지 않는가. 지나온 자취 가운데 자신보다 남을 위한 희생이 보이는지, 살아오는 동안 남들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궤적이 보이는지 잘 살피면 보인다.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달리는 사람보다 이웃의 어려움을 헤아리며 일하는 사람을 찾아야 할 터이다.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살펴 만나야 할 터이다.하야, 타살, 자살, 탄핵, 그리고 투옥. 겨우 열두 사람 대통령을 맞았던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가 겪은 쓰라린 기억. 이처럼 아픈 추억을 더 이상 남기지 않으려면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만나기 전에 현명하게 살펴야 하며, 해야 하는 일에서 국민을 위해 공감어린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가늠해 하는 것이다. 갚아야 할 빚이 많은 사람보다 국민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만날 때 기대가 되는 만큼, 헤어질 때 그리울 사람을 그려 보기로 하자. 나라가 자라온 만큼, 사람을 찾는 일에도 성숙한 모습이 필요한 것이다. 정실에 흔들리기 보다 실력에 집중해야 한다. 겉모습에 휘둘리기 보다 진정성에 집중해야 한다. 후한 약속에 흔들리지 말고 그의 지나온 길을 잘 살펴야 한다.곧 또 한 사람 전직 대통령이 불행을 맞을 모양이다. 이를 우리는, 한 자락 뉴스로 대하기 보다 분명한 다짐으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좋은 대통령은 현명한 국민이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일들이 다 지난 후에, 미소로 그리워지는 리더를 만나고 싶다.

2018-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