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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3가지 후회

어느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물러나는 분께 후배들을 위한 한 말씀을 부탁드렸더니 다른 모든 건 제쳐두고 딱 세 가지 후회가 남더라고 했다. 첫째가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 좀 더 베풀 걸, 두 번째는 좀 더 즐길 걸, 세 번째는 좀 더 참을 걸이었다는 것. 이 얘기가 매스컴을 타면서,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위치에 있었건 인생을 뒤돌아보는 위치에 서면 가장 큰 아쉬움이 남을 위해 왜 좀 더 베풀지를 못했을까? 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국 최고의 부자들이 수백억 달러가 넘는 자기의 전 재산을 사회를 위해 쾌척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푼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특히 작년에 우리나라 TV에 소개되었던 니콜슨 부부의 인간애는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아름다운 충격이었다. 베푼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알지만 결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깊은 사랑이 있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이다. 니콜슨 부부 얘기는 분명 보통사람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었기에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더군다나 이 부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면 생활이 불가능한,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맹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거기다가 4명의 자녀 모두가 선천성 장애를 갖고 태어나는 바람에 고국의 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한국의 입양아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장녀인 엘렌은 20년 전 경기도 어느 시장에 버려진 아이였다고 한다. 미국으로 입양된 후 이들 부부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성장하여 이제는 의젓한 대학생이 되어 한국을 방문했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결국 떨쳐내지 못한 그는 몰래 숨어서 자기를 바라볼 엄마에게 “엄마가 나를 버린 것 때문에 생긴 자책감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세요. 엄마 자신을 용서하세요. 저는 이미 엄마를 용서했답니다” 그리고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를 향해 “제가 엄마와 아빠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에게 행복을 알게 해 주셨고 가족이 되어 주신 엄마, 아빠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눈물을 삼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속 깊은 딸로 키워 준 맹인인 니콜슨 부부야말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고 온몸을 다해 사랑을 실천한 이 시대의 진정한 천사였다.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전 인류에게 긍휼의 산 증인이 되었던 또 한 사람을 들라면 39대 미국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씨가 있다. 그는 56살에 대통령임기를 마치고 여생을 어떻게 하면 세상을 위해서 바칠 수 있을까 만을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든 것이 카터재단이었고, 그때부터 그는 세계평화와 인류복지향상을 위해서 사회활동에 뛰어들었다. 막강한 나라의 전직 대통령이었다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겼다. 그로 인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랬던 그는 아직도 여전히 소박하기만 해서 칠순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백악관을 떠나서 아내와 보내는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고도 했다. 우리의 전직 대통령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어서 우리도 언제 이런 소박한 모습의 전직대통령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인다. 지금도 전직 대통령들의 사저에는 경호원들이 겹겹이 둘러싸서 지키고 있다. 국민들로부터 진정으로 사랑을 받을 만큼 국민을 위한 정치에 헌신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더라면 과연 이렇게 보호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부터 받고 싶은 대접을 당신보다 못한 자에게 베풀라.” 고대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세네카의 말이다. 동서고금 어디를 막론하고 남을 위해 베푸는 선이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진정으로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사랑이 점점 메말라 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여기저기서 살기 어렵다고 호소하는 목소리들이 더 높아만 간다. 세계경제가 바닥을 치니 우리나라도 어렵기 매한가지다. “사랑은 베풀면 배가 된다”고 했다. 이런 때 가장 필요한 말이다.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길은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2009-07-09

언제까지 흔들까?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 끝난지도 한 달을 넘겼건만 아직까지도 야당과 운동권에서는 이를 정치판의 요람쯤으로 여기는지 흔들기를 계속한다. 자살이 무슨 영광스럽기나 한 듯 떠받들며 정치쟁점화하려는 작태는 꼭 죽은 들짐승에게 덤벼드는 쇠파리 떼 같다. 장례식 직후 터져 나온 일부 교수들의 시국선언도 나라의 안위를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지식층이 취해야 할 행동으로 보기보다 부화뇌동으로 보인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최초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서울대를 필두로 교수들이 맨 먼저 전면에 나선 경우는 처음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독재에 맞서서 민주화를 외치던 학생들의 뒷북치기가 고작이었지만 이번에는 제법 앞장서 목소리를 높였다. 교수들의 시국선언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나라를 걱정해서 올바른 길로 나아가라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선언문내용으로 보아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들고 나올 만큼 민주주의가 무너진 위급상황에 빠진 것인가 하는 점과 전직대통령이라서 달리 대우해야 했었다는 뉘앙스는 그들이 법 앞에선 만인평등을 외쳤던 것과는 뭔가 논리가 맞지 않아 보인다. 과거의 시국선언 때는 진짜로 나라의 존망이 염려되던 때다. 그때는 워낙 서슬이 퍼래서 몸보신 하느라 관망만 하다가 끝판에 마지못해 학생들 뒷전에서 변죽을 울렸는데 이제는 그다지 겁날 것 없다고 느꼈는지 “민주주의의 후퇴” 운운하면서 오히려 선수를 치는 것이 아무래도 순수함이 떨어져 보인다. 시기적으로도 보아도 아귀가 맞지 않다. 우리나라 최고의 두뇌들이라는 분들이 하필이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뜩이나 젊은이들의 자살이 만연하여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이때에 “옳다구나” 하며 호기로 여긴 야당들의 행보를 따라나선 꼴이다. 올해 들어 카이스트를 비롯한 국립대교수들의 승진 탈락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고 한다. 그중에서 서울대 교수들의 탈락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철밥통이라고 여기는 교수들에게 면학풍토를 조성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고무하여 세계 유수의 대학들과 경쟁력을 갖춘 학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연구결과가 떨어지고, 시대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은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의식이 교수사회에 확산되면서 앞다투어 시국선언을 하고 나선 상당한 이유였다는 후문도 적지 않다. 적당주의로 일관하면서 고액의 연봉에 펜을 잡아야 할 손에 골프채나 잡고 상류의식에 젖어 있는 그들의 밥그릇에 발길질을 해 댔으니 쌍날을 세우고 으르릉대는 것은 불문가지, 그래서 상대적 피해의식을 심하게 느꼈을 것이란다.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서울대가 세계 백대 대학 안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부끄러운 현실 앞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정신없어야 할 때에, 유행처럼 시국선언이나 하면서 정치판을 기웃거리는 것은 분명히 순수해 보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대학교수들이라고 하면 과거에는 시국의 잣대가 되기도 했고, 기본적인 정치 소신은 지닌 분들로 알았는데 지금 드러나는 행어느 분이 지금 우리나라 정치권을 파벌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를 가리켜 “촛불시위를 지지하면 진보, 반대하면 보수” 라고 했다. 사상과 이념은 실종되고, 행동의 향방에 따라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는 패거리 문화가 만연해가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임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말이다. 지금은 화합할 때. 흔들기만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를 알고 신중을 기하는 지식인들의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2009-07-02

유년, 그 아름다웠던 소리들

따가운 아침볕을 이마로 밀며 학교 가는 길. 까까머리 머슴애들과 단발머리 계집애들이 책 보자기를 돌돌 말아 걸머메거나 허리춤에 졸라맨 아이들이 쫄랑쫄랑 굴러가는 풍경은 흑백사진처럼 까마득한 추억의 저 건너편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온갖 소리, 소리들과 함께 겹쳐지는 그때 그 시절 따스한 시간 속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가 보고자 한다. 십 리쯤은 되는 거리일까. 학교 가는 길은 신작로였는데 뿌연 흙먼지 속을 툭툭 자갈을 차면서 우리는 애향단 깃발을 앞세우고 동요를 부르며 혹은 군가(?)를 부르기도 하면서 학교에 가곤했다. 허리춤에는 노란 백철로 된 급식용 컵과 손잡이 부분에 구멍이 뚫린 미제 숟가락을 꿰어차고 등교하는 우리는 걸을 때마다 찰가당찰가당 소리를 몰고 다녔다. 길가의 조선 버드나무에는 매미울음소리가 주렁주렁 달려 교실까지 따라오곤 했다.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구포가도(九浦街道)의 합승, 삼륜차, 찝차, 트럭들은 연방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고 아침 따가운 볕 아래로의 우리들 등교행렬은 상급반 형의 점점 졸아든 구령 소리와 꼬맹이들의 기운이 다 소진된 복창소리는 학교운동장으로 들어가면서 서서히 스러지곤 했다. 학교에 가 닿으면 다시 새로운 소리들이 우리를 물고 다녔다. 아니 우리는 새로운 소리들을 생산해내며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강냉이가루 죽을 받아먹기 위해 급식소 앞에 줄을 선 우리들은 어김없이 차고 간 숟가락으로 노오란 백철 컵을 긁거나 두들기기도 하며, 또 아이들은 줄서기 순서를 두고 한바탕 시끄러움이 일어나고 선생님의 먼지 털이용 대나무 회초리는 빈 바케스를 탕탕 두들기며 질서를 잡는 것인데 그 정겨운 풍경들이 시끌벅적한 소리들과 함께 아직도 가슴 깊은 곳 싸아한 감동으로 살아있다. 그때 우리는 끝없이 재잘거리며 소리를 만들어 갔다. 어디 그뿐인가. 마룻바닥으로 된 복도는 한 시도 조용할 때가 없었다. 쿵탕 쿵탕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자주 나오는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처럼 그때는 공부시간도 주로 수많은 소리들로 채워지곤 했다. 소리 내어 책 읽는 소리, 동요 부르는 소리, 구구단 외우는 소리, 등 온통 소리 속에서 모든 학교생활이 잠긴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데 지금 가만히 그때 그 시절의 소리, 소리들을 생각해 본다. 그 수많은 시끌벅적한 소리들 끝에는 말할 수 없이 순수하고 고운 아이들의 꿈이 달려있음을 알겠다. 때 묻지 않은 시골 아이들의 고운 마음씨와 맑은 눈빛들에는 깨끗한 희망이 붙어있었음을 알겠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 소리 내어 책 읽는 아이도, 골목에서 동요를 부르는 아이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게임기기 앞에서 혹은 컴퓨터 앞에서 재빠른 손놀림으로 게임을 즐기는 아이들의 반들거리는 눈과 굳게 닫힌 입만 있을 뿐 어떤 소리도 내질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또 다른 소리들 속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학교에서 받아온 숙제도 거의 소리 내어 책 읽어오기, 구구단 외워오기, 혹은 동요 익히기 등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달고 다녔다. 어링불에 노을이 퍼지면 후리막엔 멸치 데치는 물이 끓고 어허야 어허야 후리꾼들의 그물 당기는 노랫소리가 명사십리 백사장에 흘렀는데 바닷가의 모닥불마져 꺼져가면 정겨운 고향마을에는 각종 소리들이 잦아들며 밤이 깊어갔다. 밤새워 머리맡으로 밀려오는 물결 치는 소리를 걷어내며 개 짖는 소리, 뉘 집 장닭 우는소리에 눈을 뜨는 고향마을의 하루는 소리 소리를 물고 열리고 소리를 물고 닫히는 것이었다. 그 소리들 끝에는 참으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달려있었다. 참 많은 시간들이 휘익휘익 지났다. 내 유년시절을 온통 끌고 다닌 그 수많았던 소리 소리들이 아직도 내 눈 속에, 귀속에, 가슴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소리들이 요즘도 종종 환청처럼 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2009-07-02

49재 분향소의 의미

인간의 4대 통과 의례인 관혼상제(冠婚喪祭)는 그 민족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식이기 때문에 민족마다 독특한 의식을 보인다. 우리 민족은 머리에 갓을 써서 어른이 되는 의식으로 혼례를 치르기 전에 관례(冠禮)라는 의식을 거쳤다. 남녀의 나이 15세부터 20세의 성년기에 이르는 동안에 남자는 머리를 추켜올려 초립이라는 관을 썼고, 여자는 머리를 틀어 올려서 비녀를 꽂아 계례라 하였다. 오늘날의 성년식은 매년 5월 셋째 월요일을 `성년의 날`로 정하고 그 해에 성년이 되는 젊은이들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는다. 혼례(婚禮)는 남녀가 부부가 되는 의식으로 `제2의 인생` 시작이라고도 하며 육례(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신영)를 갖추어야 혼인이 성립되던 것이 지금은 네 단계(의혼, 납채, 납폐, 친영)로 간소화되었다. 상례(喪禮)는 사람이 죽은 때로부터 묘지에 장사를 지낼 때까지의 절차로 사례 중 가장 복잡하고 엄숙하다. 제례(祭禮)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시고 유덕을 기리며 강림케 하여 흠향토록 하는 의례이다. 제례는 이처럼 효(孝) 사상을 중히 여기는 우리 민족은 조상의 위패를 각 가정의 사당이나 사찰에 모셔두고 돌아가신 날과 명절에는 그 계절의 가장 좋은 음식을 제상에 올리고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고인을 기리는 의례이다. 관혼상제는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영원히 계승해야 될 우리의 미풍양속인 것이다. 오늘날의 49재(四十九齋)는 사람이 죽은 뒤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례로 6세기경 중국에서 생겨난 의식이다. 유교적인 조령숭배(祖靈崇拜)사상과 불교의 윤회(輪廻)사상이 절충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불교의식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7일마다 불경을 외면서 재(齋)를 올려 죽은 이가 그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내세에서 좋은 곳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제례의식이다. 그래서 칠칠재(七七齋)라고도 부르며 이 49일간을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라고 한다. 이 기간에 죽은 이가 생전의 업(業)에 따라 다음 세상에서의 인연, 즉 생(生)이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래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에 따르면 개인의 생전의 행위 자체에 대한 업보(業報)는 그 사람 개인에 한정되며 어떤 방법으로도 자녀 또는 그 후손 누구에게도 전가될 수 없으며 전가시킬 수도 없다고 한다. 이것을 유교에서는 49일 동안에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그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여 재를 올리면, 죽은 부모나 조상이 후예들의 공덕에 힘입어 보다 좋은 곳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또 그 조상의 혼령이 후손들에게 복을 주게 된다는 것이다. 49재는 우리 민족의 전통의례는 아니지만, 다른 의례와 마찬가지로 의식행위 자체가 고인과 조상을 위하는 효심과 기도하는 인간의 진정한 마음을 나타내주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우리는 자신의 가치관(도덕성)상실에 따른 자괴감을 견지치 못하고 세상을 등진 전직대통령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전 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나가겠다는 사람들에 의해 곳곳에 49재 분향소가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다. 지난 24일 `서울 한복판에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불온한 세력들이 이 분향소를 빌미로 무법천지를 만들고 있다.`며 덕수궁 대한문 앞에 마련됐던 고(故) 전 대통령 분향소를 국민행동본부 등 단체들이 강제로 철거했다. 문제는 대다수 국민들에게도 이 분향소의 설치 의미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인상을 주어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개인이나 단체들이 죽음을 미화하여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해 대중적 관심과 인기몰이를 위해 운영된다는 것을 국민들은 느끼고 있었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준 수석연구원은 24일 `한국의 사회갈등과 경제적 비용` 보고서에서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7개 회원국 가운데 4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목적달성을 위해 투쟁으로 갈등사회를 조장하는 일부 세력들에게 말 없는 국민들은 차기 민주주의 직접선거에 참여하여 그 뜻을 전할 것이다.

2009-06-29

죽음의 조크

기독교에서는 결코 용서 못 할 두 개의 죄악이 있다고 한다. 신이 내려준 남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 살인과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끊는 자살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자살이 미화되고 고무되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죽음이 미학이라도 되는 양, 수많은 젊은 연예인들을 비롯하여 심지어는 나라의 최고 자리에 있었던 사람마저도 목숨을 헌신짝같이 버렸다. 모방 자살도 늘고 있다는 보고다. 이러한 풍조는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태라고 한다. 이 나라의 앞날이 그렇게도 희망이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용기 중엔 가장 큰 용기가 죽는 용기라고 했는데 그 용기를 살겠다는 것에 투자한다면 헤쳐나가지 못할 난관이 없을 텐데도 말이다. 어떤 분은 이러한 병리현상이 한국사회에서 특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유교의 영향이라고 분석했다. 유교의 발원지는 중국이고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은 유교의 잔재가 사라진 지가 오래란다. 유독 한국에서만 유교의 영향이 아직도 우리 생활 가운데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며, 조금은 이해가 어려운 논리를 편다.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인들 알겠는가?” 공자의 말이다. 이랬던 그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는 현세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요 사후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면서 이러한 유교사상이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전파되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생전에 폼 나게 살다가 이 세상 떠나면 그 후는 내 알바가 아니라는 극단적 이기주의가 만연했으며, 특히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심했던 까닭도 나만 잘살면 된다는 바로 이런 사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논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세태에서 한 번쯤은 새겨 봄직도 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사후세계를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그것은 신앙 자체가 인간에게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에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니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해선 인류역사 이래 가장 많은 논쟁거리가 되었고, 그 어떤 종교든 죽음을 끝으로 보는 경우도 없다. 또 다른 세계의 시작점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조크도 많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엘 갔다. 거기서 그는 세 가지에 놀랐다고 한다. 첫째 도저히 천국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이 와 있는 것이고, 둘째 꼭 와야 할 사람이 도통 보이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천국에 왔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남을 위해 숱한 적선을 하고, 늘 반듯하게 살아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사람이어서 마땅히 천국에 있겠거니 했는데 보이지 않으니 지옥에 떨어진 것이 분명하겠고, 오직 자기밖에 모르고, 못된 짓거리에 돈에는 찰거머리 같던 인사가 버젓이 천국에 버티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자신을 돌아보니 도무지 천국에 올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막상 천국에 와 있으니 황감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조크도 있다. 천국에 왔더니 너무도 실망하여 지옥엘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자가 있어, 연유를 물었더니 세상에서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던 인사들이 몽땅 거기 와있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천국이란 곳이 온통 흉악범 천지라 설마 지옥이 이보다 더할까 보냐며 헷갈리더라는 것이다. 죽음을 기점으로 이편과 저편의 평가가 매우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숨겨진 선이 드러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의 시선은 한계가 있어 진실을 보기가 어렵지만 신의 잣대는 끝이 없기에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평가가 나온다는 것을 은유한 조크다. 죽음에도 분명히 질이 있다. 남을 위하거나 세상의 공의를 위해 맞는 의로운 죽음은 존경을 받지만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죽는 것은 개죽음일 뿐이다. 생명 그 자체도 중요하여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죽음 후에 있을 세상의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저 세상에서 받을 형벌을 어찌 감당하려고….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나 선과 악을 구분 짓는 데는 실수가 많다. 때문에 무엇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잘 살펴서 실수 없이 살라는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개죽음만큼 비참한 것은 없을 테니까.

2009-06-25